111.
하련솔의 느릿느릿한 걸음은 기어코 산책로의 끝에서 멈추었다. 근방을 조금만 걷고 돌아간다던 계획은 어느새 흐려졌다. 처음에는 더덕이가 워낙 신난 데다 행복해 보여서 힘을 냈고, 나중에는 산책로의 끝에서 무어 빛 같은 것이 반짝이기에 호기심에 움직였다. 종국에 하련솔은 작은 호수를 맞닥뜨렸다. 반쪽짜리 달을 풀잎처럼 동동 띄운 새벽 호수는 아주 예뻤다.
돌아갈 여력은커녕 서 있을 힘조차 남지 않게 되어 하련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그는 자갈이 깔린 호숫가 땅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버렸다. 깜빡, 깜빡 방황하던 손전등 불빛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하련솔을 비췄다.
후들후들 떨리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통통 두들기며 하련솔은 여유로웠다. 여차하면 호위 실장이 저를 부축해 줄 테고, 상황이 여의치 않거든 이림범을 부르면 그만이었다. 황제와 호위 실장을 굳게 믿으며 하련솔은 가을바람을 즐겼다. 코끝에서 살랑이는 계절의 향기가 그를 들뜨게 했다. 근방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가까이에 납작 엎드리는 더덕이의 존재까지 완벽한 휴식이었다.
“더덕아.”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하련솔은 아직 새 이름이 익숙지 않은 개를 연신 불렀다.
“더더억…. 더덕이? 더덕! 더덕아아.”
그때마다 납작 엎드린 개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반쯤 접혀 있던 귀가 토끼처럼 반짝 선 순간 하련솔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 끝에 멀찍이서 움직이는 차 소리가 섞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련솔의 등 뒤로 터덜터덜 발소리가 다가왔다. 저를 찾아 산책로를 걸어 내려오는 인기척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련솔은 잔잔한 호숫물만 바라보았다. 아주 가까워졌나 싶던 발소리는 하련솔의 옆에서 뚝 그쳤다. 제 곁에 멈추어 선 이의 흐린 그림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하련솔이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러나 상대는 말이 없었다. 제가 누구인지 맞춰 보라는 듯, 등 뒤에 멈추어 선 채 침묵할 뿐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는 하련솔에게 더 큰 확신을 안겨주었다. 언제고 저를 먼저 봐 주기를, 왜곡 없이 알아주기를, 중요하게 기억해 주길 원하던 도련님이 있었다.
“범이가 널 많이 기다렸는데.”
그런 동생을 찾아 펜션의 울타리 너머며 현관문, 창문 밖을 시시때때로 응시하던 이림범을, 하련솔은 알았다. 저는 물론이고 그들 형제의 운명을 헤집어 놓은 노리개를 없애는 여행에 있어 이림범이 제 동생을 초대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늦어도 한참 늦어버린 지각생이 되어, 이차혁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요…? 그랬어요?”
“그래, 그랬어.”
이내 이차혁이 덜그럭 소리를 냈다. 제 차 트렁크에서 꺼내어 온 비상용 휠체어를 바닥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그 자신을 위해 가져온 물건은 아닌 듯했다. 그의 두 다리에는 걸을 힘이 충분히 남아 있었고, 휠체어는 납작 접힌 모습으로 한 손에 덜렁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바퀴 달린 의자를 내버려 둔 채 그는 하련솔과 함께 자갈밭에 앉았다. 낯선 이의 등장에 더덕이가 두세 번 짖었는데, 그의 신발이며 팔꿈치, 손등 냄새를 킁킁 맡더니 금세 진정했다.
같은 호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뿐,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리개는 잘 없앴어요?”
이차혁의 질문에,
“응.”
하련솔이 대꾸한 게 전부였다.
“잘됐네요….”
그대로 십여 분쯤 지났을까, 다시금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 소리는 소란한 외침과 함께했다.
“형!”
큰소리로 하련솔을 찾아 달려온 이의 정체는 당연하다는 듯 이림범이었다. 잠기운이 덜 가신 얼굴로 하련솔을 찾아 뛰어왔다가, 그는 제 동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부랴부랴 걸치느라 구겨진 재킷 칼라를 고치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빈 옆구리를 채우려는 양 자갈밭에 함께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추운데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제 한 손을 가져가며 건네는 말에 하련솔이 웃었다. 차게 식은 손을 주물러주는 안마를 기분 좋게 받으면서, 그는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하나도 안 추워. 바람이 좋잖아.”
그제야 제 형을 따라 이차혁이 하련솔의 빈손을 가져갔다. 그가 조물조물 손을 만져줄 때마다 하련솔의 손목에 걸린 리드줄 손잡이가 흔들거렸다.
두 형제를 손난로 삼아 하련솔은 걱정 없이 좋았다. 흔들리는 갈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솜씨 없는 아이의 휘파람 같았다. 호수에 비친 구름은 일렁이는 물결을 타고 이동 중인 듯 보였다. 발치에 앉은 더덕이도 느릿느릿 꼬리 흔드는, 다정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문득 하련솔은 자신이 태풍의 눈에 있음을 깨달았다. 저만이 평안하고 즐거울 뿐, 제 옆자리를 메우며 앉은 두 형제는 어째선지 각각 심기가 나빠 보였다. 이림범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지각한 동생 때문에 살짝 열 받은 상태였고, 이차혁은 그런 형에게 건넬 폭탄을 혓바닥 밑에 감춘 채였다.
홀로 풍류를 즐기던 하련솔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기 무섭게, 이차혁이 말했다.
“사실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폐하’라는 호칭에 이림범의 눈썹이 각도를 바꾸며 일그러졌다. 대화를 훔쳐 들을 쥐도 새도 없건만 그가 저를 ‘폐하’라 부름은, 무어 부탁할 용무가 있다는 의미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차혁은 이림범의 마음에 조금도 들지 않는 계획을 늘어놓았다.
“나… 다음 주부터 홍문관 임상시험에 참여하기로 했어. 이제는 문정궁을 떠나려고 해. 어머니께서 외가 친척이 지내는 호주로 출국하신다는데… 나도 함께 가고 싶거든.”
사정이 어찌 되었건 무화의 신분으로 문정궁에 소속된 이차혁이었다. 문정궁은 물론이고 한국마저 떠나고자 한다면, 그의 이동에는 필시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다.
“허락해 줄 거지?”
‘그래’ 하는 대답이 떨어지리라 굳게 믿는다는 양 이차혁이 물었다. 반질반질하니 예쁘장한 얼굴로 태연하게 종알거리는 동생 앞에서, 이림범의 얼굴은 험상궂게 변했다. 그 표정이 꼭 수라를 삶아 먹은 악마 같았다. 지은 죄 없는 하련솔의 심장이 다 졸아붙을 지경이었다.
“야, 이….”
새끼야. 딱 그런 말을 삼키는 듯 이림범이 말끝을 흐렸다. 콧잔등이 구겨지도록 성질을 꾹 누르며, 그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혁아. ‘늦는다’, ‘안 간다’ 말도 없이 사람 기다리게 해 놓고 이제야 나타나서는 한다는 말이 그거냐? 궁에서 나갈 테니까 승인을 해 달라고? 누가 너더러 개뿔 사과를 하라고 해, 책임을 지라고 해?”
그러나 평온은 길지 않았다. 한 마디 두 마디 뱉을 때마다 이림범의 언성이 커지고 말투는 거칠어졌다.
“네가 뭔데? 네가 뭘 잘못했다고 궁을 떠나, 떠나기는!”
끝내 버럭 소리치는 형 앞에서 이차혁도 표정을 굳혔다. 얼떨떨하니 앉은 하련솔의 무릎 위로 고개를 내밀며, 이차혁이 낮게 읊조렸다.
“형. 과민 반응하지 마.”
“너야말로 나대지 마.”
이림범의 대답은 빗방울보다 더 빨랐다.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조그마한 빗물이 톡, 하련솔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얘들아, 비….”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하련솔이 속삭였고,
“허락 못 해.”
이림범이 무섭도록 낮은 음성으로 뇌까렸다.“너 그러라고 내가 부제학 제자까지 불러다 앉혀 놓은 줄 알아? 임상실험이고 시험이고 간에 안 돼. 당장 먹고 처나가라고 만든 약 아니야!”
이차혁이 말하는 임상시험이 무언지는 이림범이 가장 잘 알았다. 머릿수만 마흔을 넘긴 무화들을 책임지고 낫게 하고자, 개화병 치료제 개발을 시도한 황제는 그가 처음이었다. 예로부터 무화의 수는 곧 황제의 권력이라, 제 살을 직접 떼어 내는 형국이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황제의 결단을 탐탁잖게 여기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승정원 도승지가 딱 그랬다. 조회에서 홍문관 교수가 발언할 때마다 시시비비를 어찌나 가려대는지, 골머리를 앓기도 자주 해 왔다.
그러나 실전은 자질구레한 말다툼에 있질 않았다. 진짜 문제는, 홍문관에서 만들어 낸 치료 시험약의 효능을 단 한 번도 검증해 보지 못했단 데에 있었다. 갖가지 조건을 걸어 시험에 참여할 무화를 모집하긴 하였으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탓이었다.
물론 이차혁이 그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시험에 참여하자면 황제의 곁을 떠나야 하는 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림범은 시험약을 복용한 무화를 문정궁 근처의 호텔에 묵게 할 생각이었다. 홍문관 교수가 직접 방문하며 이틀에서 나흘 간격으로 병세의 호전을 확인할 것이고, 담당 의사와 호위, 시종들이 함께 생활할 것이었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고 대뜸 해외로 떠나 버리는 건 황제가 바라는 시험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림범이 바라는 제 동생의 모습 또한 아니었다.
“폐하.”
답답한 듯 이차혁이 말했고,
“그 입 다물어. 듣기 싫다.”
이림범이 낮게 읊조렸다. 그러자 더덕이가 소극적으로 컹… 소리 내어 짖었다. 하련솔은 긴장한 개의 목덜미를 끌어 안아주었다.
두 눈을 감고 성화를 삼킨 끝에, 이림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수리를 적시는 작은 빗방울을 느껴서였다. 그는 제 재킷을 벗어 하련솔의 어깨에 단단히 둘러주었다. 그러곤 연인의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어나 걸을 수 있을지, 긴 산책 끝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살피는 눈빛이 검게 타는 불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