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11화 (111/135)

112.

“아, 폐하.”

이차혁의 운동화 뒤축에 떠밀린 자갈이 간지러운 소리를 냈다. 황제를 따라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차혁이 말했다.

“폐하도 알잖아…. 봤잖아, 우리 엄마 못 일어나는 거. 그 몸으로 멀리 떠난다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보내.”

“걷지도 못하는 놈이 어떻게 남의 병시중을 들어!”

성난 이림범은 꼭 활화산 같았다. 잠잠해진 듯 숨을 죽이다가도 툭 불거진 성대를 꿈틀 움직이고, 이내 뜨거운 화를 버럭 쏟아내고야 말았다. 그가 내지른 거친 외침에 더덕이가 으르렁 소리를 냈다. 긴장한 탓에 어깨가 딱딱해진, 털복숭아 같은 개를 다독이기란 하련솔의 몫이었다.

입을 다물고 이림범을 노려보기도 잠시, 이차혁이 뒤돌아 움직였다. 그의 손안에서 접이식 휠체어가 척척 펴지며 환자를 앉힐 준비를 마쳤다. 하련솔을 향해 휠체어를 세워 놓고, 이차혁은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죽을 자리 찾으러 가는 거야.”

그리고 세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자리에 찬 기운이 밀려들었다. 멀찍이, 갈대를 쓸고 지나는 비바람이 파도치는 소리를 냈다.

중대한 사유를 더럭 내뱉어 놓고 이차혁은 평안한 척 굴었다. 하련솔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것이었다. 힘주어 일으켜 주는 부축에 이림범이 합세했다. 형제의 손에 이끌려 하련솔은 휠체어 위로 얌전히 옮겨졌다.

제 목줄을 쥔 이가 낯선 자리에 앉자, 더덕이는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며 하련솔의 발 앞을 맴맴 돌았다. 사료 한 끼를 챙겨주고 산책을 시켜 주었을 뿐인데 어린 개에겐 하련솔이 벌써 제 주인인 모양이었다. 낑낑거리는 울음이 몹시도 조급해 보여서, 이림범이 안달 난 개를 들어다가 하련솔의 품에 올려 주어야 할 정도였다.

잠깐의 평화로운 순간에 기대어 이차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시험약이 안 들어도, 몇 주쯤 못 걷는다고 해도 여행은 할 수 있어. 모아둔 돈도 있고, 여기. 스페어 휠체어도 있고…. 미리 알아봤는데, 그 동네 시설이 꽤 잘 되어 있대. 바퀴 타고서 어디든지 오갈 수 있어.”

나름대로 노력하여 지어낸 설득을 몽땅 무시하며, 이림범은 휠체어 손잡이를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하련솔의 상체가 제자리에서 앞뒤로 흔들렸다. 자갈밭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 휠체어 옆으로 다가가, 이차혁이 허리 숙였다. 그러곤 브레이크 레버를 고쳐주며 물었다.

“왜 허락 못 해 줘? 아무리 그래도 가족 일이잖아.”

“나한테는 아니야.”

재차 휠체어를 밀어 갈대숲 산책로 길을 오르며, 이림범은 매정하게 대답했다.

“너한테나 가족이지.”

한동안 휠체어 바퀴 구르는 소리만이 공기를 채웠다. 등받이에 어색하게 몸을 기댄 채 하련솔은 더덕이를 두 팔로 단단히 안았다. 개의 축축한 발바닥이 그의 니트에 황토색 얼룩을 남겼다.

느릿느릿 떨어지던 빗방울이 빠르게 자리바꿈하기 시작했다. 손전등 불빛을 흔들며 빠르게 다가오는 호위 실장이 보였다. 커다란 장우산을 펼쳐 든 채였다. 당연하다는 듯 그 우산을 받은 이는 이차혁이었다. 그러곤 긴 팔 뻗어, 한기에 코끝이 빨개진 하련솔과 미운 소리 하는 이림범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

그래도 그의 형은 몹시 쌀쌀맞았다.

“혁아. 난 부모가 없어서 모르겠다. 이해가 안 돼, 그 많은 일을 겪고도 너한테는 네 어머니가 최우선일 수 있다는 게.”

이차혁의 곱상한 이마도 그를 따라 구겨졌다. 미간이 좁아지도록 인상을 쓰며 이차혁이 재차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게 아니면 뭔데. 이 중요한 시기에 네가 궁을 떠나겠다는 게, 그럼 무슨 뜻인데?”

“아니, 방금 다 설명했잖아. 여기서 뭔, 뭐가 우선이냐는 말이 왜 나와? 왜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왜곡해서 듣고 그래?”

그러면서 이차혁은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의 외투 주머니 속엔 시종들이 챙겨둔 핫팩이 둘 들어 있었다. 양손에 핫팩을 쥐고는 마라카스 악기 소리가 나도록 세게 흔들었다. 짜증이 담긴 손짓에 핫팩을 채운 철 가루에 금세 열이 올랐다. 뜨끈해진 핫팩은 모두 하련솔의 무릎 위에 올려졌다.

가벼운 소나기를 뚫고 산책로를 오르는 내내 이림범의 관자놀이에 불거진 핏줄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여태껏 제가 동생에게 해 준 일들을 차례차례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이차혁은 하나뿐인 동생이고 하나뿐인 혈육이고,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베푼 품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시간이 있었다. 그는 개중 무엇 하나 아까워한 적 없었다. 이차혁에게도 제가 유일한 가족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가족이라면, 이 번잡한 시기에 서로의 곁을 떠나선 안 됐다. 제 잘못도 아닌 일로 벌벌 기며 사과를 하고는, 마음 안에 남은 개운치 못한 감정을 해소조차 하지 못하고서 멀리 가 버려선 안 됐다.

막말로 시험약이 들지 않으면 어쩔 거란 말인가? 그 먼 땅, 호주까지 가서 개화병이 악화하기라도 하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운 나쁘면 죽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서라도 제 곁을 떠나겠다는 이차혁이 이해되질 않았다. 저를 일어나 걷게 하는 형제의 곁이 아니라, 저를 외면하며 아들 취급조차 해 주질 않던 어머니와 함께하겠다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미숙한 결정에 화가 났다.

성화는 금세 서운함으로 변했다.

“그간 네 어머니가 너한테 해 준 게 뭐냐?”

“…뭐?”

“내가 널 위해서 해 준 건? 그것들은 이제 뭐가 되는 거지? 내가 너, 이따위로 떠나버리라고 그렇게 애쓴 줄 알아?”

“아니….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네가 어지간한 여행객이나 돼? 남들 보는 눈 신경 쓰느라 목발도 안 쓰는 놈이, 그 먼 타국에서 휠체어를 어떻게 타고 다녀!”

“…….”

“지랄하지 말고 내 말 들어. 문정궁이 네 집이야. 내가 네….”

펜션 현관에 휠체어를 대놓고, 이림범이 말끝을 흐렸다. 속이 상한 듯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키기도 잠시였다. 그는 대뜸 소리치듯 말했다.

“내가 너한테 가족이긴 하냐?”

“뭐?”

그에 이차혁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는 난데없이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놀랐다가, 이내 신경질을 냈다.

“아!”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내지른 탄식이었다.

“됐어! 다 집어치워. 없던 일로 해. 아무 데도 안 갈 테니까!”

이림범이 그렇듯 그도 목청이 무척 좋았다. 버럭 소리를 내지른 뒤 이차혁은 성큼성큼 펜션 안으로 들어섰다. 역정이 난 채로도 그는 비바람에 무릎을 적신 하련솔을 일으켜 세워 주길 잊지 않았다. 그대로 하련솔의 품에 들린 더덕이를 받아 안고는,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 버렸다. 욕실을 찾아 더러워진 개의 발을 씻겨주기 위해서였다.

긴 한숨을 쉬며 이림범은 하련솔을 번쩍 안아 들었다. 동화 속 어린 공주님 다루는 듯 다 큰 형을 품에 안고,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가져다 놓은 도시락 하나를 챙겨 들기 위해서였다. 그러곤 2층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입을 꾹 다문 채 하련솔은 침실로 옮겨졌고, 남의 손을 쓰며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간식 도시락을 받았다.

침대 카우치에 앉아 바삭바삭한 유과를 입에 넣으면서 하련솔은 두 형제를 연신 살폈다. 이림범은 더운물로 데운 물수건을 가져와 하련솔의 찬 얼굴과 조청 묻은 손, 까매진 발바닥을 차례대로 닦아주었다. 이차혁은 헤어드라이어를 쥐고 더덕이의 털을 말리기 바빴다. 그러는 내내 그들 형제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

“…….”

“…….”

이리저리 눈 굴리며 상황을 살핀 끝에, 하련솔은 침대 중앙에 먼저 누웠다. 그러곤 이차혁을 향해 이리 오라는 양 손짓했다. 잘 자리를 찾으려던 이차혁이 그에 냉큼 응했다. 하련솔의 옆구리 한쪽을 차지하며 함께 누운 것이었다. 그 모습에 이림범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들으라는 양 한숨을 크게 쉬기도 했다.

힐끔힐끔 제 형제의 눈치를 보는 이차혁을 따라 하련솔도 이림범의 그림자를 살폈다. 그는 욕실로 가 옷을 갈아입었고, 남는 잠옷 한 벌을 찾아다가 이차혁의 얼굴에 대고 던졌다. 팔로 옷더미를 막아내고도 이차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받은 잠옷을 침대 밖으로 홱 던져버리고는, 하련솔의 어깨를 향해 홱 돌아눕고는 잠든 척을 했다.

캘리포니아 킹사이즈 침대를 터벅터벅 둘러 걸어와, 이림범은 하련솔의 빈 옆자리를 채우며 누웠다. 장신의 형제 둘과 무화 하나로 커다란 침대가 가득 찼다. 매트리스의 높이마저 아래로 푹 꺼지는 듯했다.

긴긴 침묵 게임 끝에 이림범이 말했다.

“박 비서 붙여줄 테니까 달고 가라.”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서 여전히 마뜩잖은 기색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영 탐탁하지 않은 일이라도 져 주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었다. 이차혁보다 1년 더 일찍 태어나 그의 형이 되어버린 것을, 이림범으로선 별수 없었다.

“…경호도 둘 붙일 테니까 떨굴 생각하지 말고. 만에 하나라도 상황이 잘못되면, 직원들이 판단해서 널 데려오게 할 거야. 의사도 하나 붙여주마, 네 소원대로 어머니 임종 시간 읊어줄 놈 하나는 있어야겠지.”

말을 마친 뒤 이림범은 눈을 감았다. 두 손을 제 배 위에 겹쳐 올린 채였다. 하련솔이 그를 향해 제 팔을 슬쩍 뻗자, 이림범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여러 감정이 실린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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