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이차혁이 속삭였다.
“미안해, 폐하.”
이림범의 대꾸는 늘 그렇듯 재빨랐다.
“나한테 해야 할 말이 그게 아닐 텐데?”
그러자 이차혁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두 남자 사이에 샌드위치 속 햄처럼 끼인 하련솔 너머, 제 형제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잠든 사람처럼 두 눈을 감은 이림범의 얼굴은 단단해 보일 만큼 무표정했다. 굳게 닫힌 입매가 그의 상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성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이차혁은 제자리에 풀썩 뒤통수를 붙였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 형.”
“…알면 됐어.”
2층 높이의 커다란 펜션에는 남는 방이 많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구태여 침실 하나를 꽉 채우기를 택했다. 너른 자리를 비좁게 만들고서 그들은 나란했다. 고집스럽게 양 팔뚝에 달라붙는 체온을 느끼며 하련솔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즐거운 듯 속삭였다.
“너희 둘 정말 사이좋구나.”
그러자 하련솔의 좌우를 채운 두 형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딜 봐서?”
“아니거든요.”
하련솔이 크게 하하 웃었다. 그 소리가 아래층의 거실까지 울렸다. 형제들이 투정 혹은 탄식하는 말도 메아리처럼 뒤따랐다. 흥분한 듯 이어지는 대화 소리에 누런 개가 귀를 쫑긋거렸다.
거실 카펫에 발 도장을 꾹 찍으면서, 더덕이는 커피 테이블 옆에 우뚝 섰다. 북슬북슬한 엉덩이는 높게 추켜들었고 새까만 눈동자엔 해태 두 마리를 담았다. 사내 상궁이 조심스럽게 옮겨놓은 해태 도자기는 유약을 얇게, 여러 차례 발라다가 잘 구워낸 모습이었다. 몸매가 통통하고 콧잔등은 모래 빛깔인데,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듯 배의 모양새가 유독 불룩했다.
더덕이는 해태의 앞발을 감싼 보자기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았다. 그러곤 낯선 냄새에 지레 놀라 컹… 헛기침하듯 한 번 짖었다.
“더덕아, 어디 있어?”
이내 멀찍이서 개를 찾는 상냥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들은 말을 이해해보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더덕이는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토돗, 토돗… 토끼처럼 껑충거리며 2층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두 마리 해태가 지키는 가운데, 비 냄새 가득한 새벽이 흐르고 있었다.
***
기린관이 간만에 관객으로 가득 찼다. 매주 한 번은 ‘영화의 날’을 열어 최신작 상영회를 하자는 약속에 의해서였다. 난데없는 모임의 시발점은 뜬금없이, 하련솔이었다.
지나간 월요일 오전, 그는 황제가 모는 세단의 조수석에 앉아 문정궁으로 돌아왔다. 교태전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그를 무척 반겼다. 소나기로 인해 쌀쌀해진 날씨에 우리 솔 님께서 추우실까, 외투며 목도리를 든 시종 무리에 윤슬찬까지 함께했다.
시종들이 하련솔을 마냥 기껍게 마중하는 반면 무화들은 하나같이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황제를 마중하고자 주차장에 모여든 이들의 머릿수가 제법 많았다. 몇몇 이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제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어떤 치들은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자존심 센 사내 무화 두엇은 구석 자리에서 하련솔을 험담했다. 그들 보기에 하련솔은 순 욕심쟁이였다. 교태전에 들어가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나흘 간 황제와 여행을 떠나며 황제의 시간을 온전히 독점하질 않았던가. 그런 하련솔을 향한 질투심과 불안이 많았다. 그들은 제 불만을 해소할 방법을 험구밖엔 몰랐다.
“예전에 그런 무화가 있었다며. 황제 폐하 데리고 자기만 홀라당 경복궁으로 나가 살았다던데…. 그 바람에 문정궁 무화들이 많이 죽었댔어…. 솔 님도 그러려는 건 아니겠지?”
뒷담으로 혓바닥을 달싹거리는 이들조차 하련솔을 함부로 멸칭하지 못했다. 그를 영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치들 눈에도 요즈음 하련솔은 전처럼 쉬워 보이지 않았다. ‘백지’, ‘유령’, ‘허수아비’라 불리던 무명의 무화는 이제 없었다. 옷이 날개라면 총애는 바람이라더니, 하련솔은 하루가 다르게 예뻐지는 듯했다. 어떨 때는 예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했다. 피차 문정궁에 틀어박혀 지내는 상황에서 따로 수술이나 시술을 받았을 리는 전혀 없는데, 여태껏 그 미모를 어떻게 감추며 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를 좋아하면 좋아해서, 싫어하면 또 싫어해서, 무화들은 하련솔의 존재를 거듭 상기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들 뇌리에 새겨진 하련솔의 인상은 더더욱 또렷해졌다. 꼭 황제의 애정이 그의 얼굴에 낀 안개를 닦아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간이 큰 사내 무화들조차 그 앞에 감히 나서질 못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괜한 수다로 끓이며, 나무 그늘에 숨어 속삭일 따름이었다. 키가 높다랗고 양팔은 넓게 뻗은 가문비나무가 그들 험담을 숨겨주었다.
그러나 스물한 번째 생일을 갓 넘긴 어린 무화는 달랐다. 그녀는 싫은 소리를 숨어 속삭이는 법을 몰랐다. 대신에 황제의 부축을 받는 하련솔 앞으로 당당하게 직진했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솔 님, 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런데요, 다음번에 폐하와 궁을 떠나실 때는요. 저희한테 언질이라도 좀 해 주실래요? 그래야 저희도, 병을 고쳐 두게 준비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홧김에 또박또박 외친 소리에 하련솔은 상처받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세단 트렁크에 실린 짐을 내리는 호위 실장이 이마를 찡그리긴 하였지만 그뿐이었다. 말로 빚은 폭격을 맞닥뜨린 하련솔은 물론이고 그 곁에 선 황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누구 하나 나서서 어린 무화를 말리지 못했다.
도리어 이림범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다. 그러곤 속을 알 수 없게 무표정한 얼굴로 하련솔을 쳐다보기만 했다. 초롱을 비롯한 시종들은 그 태도에 무척 놀라 마음을 졸였다. 진정 황제께서 하련솔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직접 나서서 어린 무화를 꾸중하거나 떼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반면 직원용 밴에서 막 내려선 양 상궁이며 짐 가방 네 개를 양팔에 든 호위 실장은 그 태도를 다르게 보았다. 눈앞에서 일어난 싸움일랑 제 소관이 아니라는 듯 물러서는 황제의 자세는 하련솔을 피상적이다 못해 본질적인 교태전의 주인으로 추켜올리고 있었다. 무화를 처벌하는 일도 칭찬하는 일도 모두 안주인의 몫이라, 전부 하련솔에게 일임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이유로 간담 졸이는 가운데, 하련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야.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어? 무슨 일 있었어?”
그에 벌처럼 말을 쏘아대던 무화, 해은해의 표정이 변했다. 해은해는 이전에 딱 한 번, 무리를 지어 교태전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녀와 하련솔 사이의 접점일랑 그뿐이었다. 하련솔이 여태껏 제 이름을 기억하고 얼굴을 알아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막상 이름으로 불리며 상냥한 대꾸를 듣고 나니 어째선지 혀가 굳어, 해은해는 침묵했다. 성난 표정 또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대신에 영문 모를 서러움이 그녀의 흉곽에 가득 찼다. 구겨진 얼굴을 감추고자 해은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빨갛게 달아오른 귀와 울먹이는 숨소리까진 감출 수 없었다.
어리숙한 무화를 향해 하련솔이 허리를 숙였다.
“응? 왜 그래. 누가 많이 아파서 그래?”
그러면서 하련솔은 주차장을 휘 둘러보았다. 나무 그늘에 줄지어 선 무화들이 괜스레 뜨끔하여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들 면면을 차례차례 훑어본 뒤, 하련솔은 재차 해은해에게 물었다.
“맨날 같이 다니던 친구는? 걘 어디 갔어?”
그러자 해은해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하련솔이 ‘흠’하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친구가 많이 아파?”
그제야 해은해가 대답했다.
“네….”
그러면서 그녀는 두 눈을 꽉 감았다. 나이만 성인이지 감정은 순 어린애였다. 제가 보인 짜증이며 철없는 행동이 뒤늦게 수치스럽고, 그러니 분하고, 또 서러워 어찌할 바 모르게 된 것이었다.
무화가 되기 전에 해은해는 아이돌 연습생이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건물의 지하 연습실에 출석 도장을 찍기를 4년째 했건만, 데뷔보다 무화가 되는 게 더 빨랐더랬다. 뭣 모르고 굴러들어온 문정궁에서, 그녀의 친구가 되어준 이가 아청원이었다. ‘아이돌도 립싱크나 하는 딴따라인데, 아이돌 연습생은 음악인도 아니다’하며 시비를 걸어온 윤슬찬을 대신 때려준 것도 아청원이었다. 그런 아청원이 이틀 전부터 열병으로 앓아누웠다.
이틀간 해은해는 아청원의 처소에 붙어 앉아 밤낮없이 그녀를 간호했다. 그래도 열이 내리질 않아 속이 까맣게 타버렸다. 폐하께서 오늘 돌아오신다는 말을 동아줄처럼 꼭 쥐고, 새벽부터 주차장에 앉아 기다린 참이었다. 아침에는 늦가을 소나기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그 바람에 해은해의 바지 엉덩이며 버선, 저고리 어깨가 온통 축축했다.
“죄송해요.”
스스로가 부쩍 초라하게 느껴져, 해은해는 작은 소리로 사죄했다.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느라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삐져나왔다. 그런 그녀의 손을 하련솔이 덥석 잡았다. 그러곤 길 안내를 부탁했다. 마침 폐하께서 함께 계시니, 당장 네 친구 처소로 가자는 말과 함께였다.
“지, 진짜요?”
해은해가 되물었고,
“그래. 빨리 가자.”
하련솔이 즉각 대꾸했다.
어리둥절하니 얼굴이 빨개진 채 해은해는 바삐 걸었다. 황제 또한 기꺼이 그녀 뒤를 따라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에 피어오른 불만일랑 어린 무화의 곱상한 손을 꼭 맞잡은 하련솔의 다정뿐이었다.
‘언제까지 잡고 걸을 거야?’
정처도 없고 한계도 없이 다정한 하련솔이 참 야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