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보는 눈이 많은 가운데 하련솔이 잡아야 할 것은 어린 무화가 아닌 황제의 손이건만, 그에겐 자기과시를 위한 계산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섭섭한 마음에 이림범은 연인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사사로운 질투는 한나절 접어두어야 했다. 당장은 아픈 무화의 처소를 찾는 일이 먼저였다.
곧바로 찾아든 황제를 버선발로 맞이하며 아청원은 안절부절못했다. 병상에서 막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한 기색이 어찌나 역력한지, 그 버선발마저 짝짝이였다. 침의 위에 외투만 두 벌을 걸쳤고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는 참빗이 꽂힌 채였다. 남루한 꼴로 볼 붉히는 아청원을 향해 이림범이 가볍게 눈짓했다. 그러자 해은해가 얼른 그녀 곁으로 가, 침상 옆에 아청원을 앉히고 저 또한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열병이 나 앓아누운 아청원이며 친구가 죽을까 봐 겁에 질린 해은해에게 필요한 이는 누구보다 황제이건만, 정작 그들이 절실하게 붙드는 건 서로의 손이었다. 시종이 급히 마련한 상석에 이림범이 자리하는 동안 하련솔은 두 무화의 맞잡은 손을 응시했다. 왼손 약지에 똑같은 모양의 옥 반지를 나누어 낀 모습이었다. 하련솔이 던진 시선에 뺨이라도 맞은 듯, 해은해는 고개를 급히 숙이더니 제 손을 이불 밑에 감췄다. 그러곤 재빨리 반지를 빼내어 주머니에 숨겼다.
조급하고 어리숙한 두 무화를 못 본 체하며, 하련솔은 침실 벽면을 둘러보았다. 침상이 놓인 자리의 머리맡에 새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전부 참새를 찍은 것으로 아마추어 사진사의 솜씨였다.
황제의 손짓에 따라 그의 곁에 앉아 하련솔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직접 찍은 사진이야? 들어올 때 보니까, 처소 밖에 새집이 있던데.”
친숙한 이야기에 안심한 듯, 아청원이 수그렸던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반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 거기서 살던 새인데요, 붉은뺨멧새라고 하는…. 엄청 귀여운 새예요.”
“그래, 엄청 귀엽게 생겼다.”
하련솔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아청원은 은근히 기운을 차렸다.
“그…, 그죠. 엄청 귀엽죠…? 새집에다가 알도 낳고… 거기서 아기 새도 키웠어요. 아기 새는 더 귀여웠는데, 너무 작아서 잘 안 찍혔어요.”
“그래? 그랬구나.”
“네. 그런데, 그… 얼마 전부터 안 보여요…. 겨울이 오기 전에 멀리 떠났나 봐요. 아쉬워서 새집은 아직 안 치웠는데….”
종알종알 길어지는 대화에 하련솔의 뺨이 동그래졌다. 보조개가 패도록 함박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그는 형제도 자매도 없는 외동아들이었지만, 저보다 어린 동생들을 무척 좋아하며 잘 다루는 편이었다. 황제의 눈치를 연신 살피면서도 좋아하는 새 이야기를 참지 못하는 아청원은 꼭 막내 여동생 같았다.
“잘했어.”
하련솔은 그런 그녀를 칭찬했다.
“내년이면 다시 새집으로 돌아올 거야. 철새들은 하늘길을 전부 외우거든.”
“정말…, 정말요? 진짜 그럴까요?”
“그럼. 내 고향에는 봄새가 다녀가곤 했었어. 날이 풀리고 삼, 사월쯤 되면 어른들이 트럭 가득 모이를 실어다가 논 옆길이 꽉 차도록 뿌려줬거든. 철새들이 그걸 기억하고 매해 밥을 먹으러 몰려왔었지.”
“와….”
활짝 열린 침실의 문밖에는 대청마루에 앉은 무화가 여럿이었다. 그들 모두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바빴다. 기껏 황제께서 행차하셨는데 참새 이야기나 나누는 아청원이 바보 같았다. 제 님인 황제를 다른 무화의 처소에 데려다 놓곤 신난 듯 수다를 떠는 하련솔은 괴상한 남자였다. 한데 그들 대화 사이에 간간이, 황제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봄새’가 아니라 ‘여름새’라고 하는 거야.”
이림범이 말했다. 가볍게 흘린 그 음성에 낮은 웃음소리가 묻어나는 게, 무화들 듣기에 아주 이상했다. 정말 이상하면서도 또 여상스러운 월요일 아침이었다.
문정궁을 가득 채운 무화들은 여태껏 젊은 황제를 우러러봐 왔다. 존경, 숭배, 동경. 혹은 그저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의하여…. 형태는 제각각이었으나 그들 모두 황제를 사랑했다. 하루아침에 인간이 아닌 한낱 소유물로 전락한 신세에, 그들을 구제하는 이가 그들의 소유주인 황제라는 건 참 묘한 일이었다. 부모도 친지도 등을 돌린 판국에 황제만이 그들을 사람으로 상대했다. 육신에 내려앉은 병증을 공평하게 달래어 줄 뿐만 아니라 문정궁 안에 작은 사회를 일구게 해 주었다. 황제는 그렇게 무화 모두의 마음 안에 자리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디까지나 피사체에 불과했다. 사진 속의 철새처럼, 그는 곁에 있어도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이고 대화를 나누어도 소통되지 않는 상대였다. 언제고 누구나의 곁에 번갈아 존재만 할 따름이었다. 그런 황제는 제 옆에 둔 이 모두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 또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였다.
한데 오늘날의 이림범은 달랐다. 하련솔의 곁에 앉은 그는, 달랐다. 실없는 농담에 피식 웃고 길어지는 대화에 하품하고, 이따금 한심한 소리 다 듣겠다는 듯 한숨 쉬는 그는 철새가 아니었다. 당장 어디로든 떠나버릴 존재,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미련 따위는 품지 않을 것만 같던 어제의 피사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황제의 팔뚝을 제 팔꿈치로 톡 건드리며, 하련솔이 말했다.
“폐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 무화들과 한 주에 한 번씩은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게 어떠실지요?”
그에 이림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는 눈이 많으니 ‘폐하’, ‘폐하’ 하며 말끝이 보드라워진 하련솔이었다. 순한 척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모아쥔 태도가 참 고왔다. 언제고 어른이기만 하던 형이 보여주는 보기 드문 애교에 이림범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어허. 솔아. 그들 건강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무화라면 누구든, 언제든 조찬에 참여할 수 있지 않으냐.”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근엄한 황제가 되어 건넨 말이었다. 그 바람에 아청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사나흘 황제께서 자리를 비웠다 하여 앓아누운 일은 순 아청원, 그녀 자신의 불찰에 의한 것이란 핀잔처럼 들려서였다.
반면 하련솔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림범을 노려보았다. ‘이것 봐라?’ 하고는 꿀밤을 딱 놓고픈 마음이 거센 눈총에 실렸다. 황제의 뻔뻔한 낯을 흘겨보기도 잠시, 하련솔은 두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그리고 애써 얌전한 척 목소리를 냈다.
“폐하. 조찬은 외부 손님들도 함께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내향적인 무화에겐 작은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제법 큰 부담입니다. 꼭 저처럼요.”
“…….”
이림범이 제 무릎 위에 둔 손끝을 꿈틀 움직였다.
‘어쭈. 어디서 공갈을 쳐? 형은 내향적이어서가 아니라, 황제고 나발이고 다 까내려고 불참한 거였으면서!’
입천장에 빗발치는 투정을 애써 삼키며 이림범이 말했다.
“부끄럼쟁이 무화를 불러내는 방법이라면 내 이미 알고 있단다.”
그러자 하련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림범을 마주 보았다. 남들 앞이라고 곱상하니 착하게 구는 하련솔의 얼굴이 재차 귀엽고 사랑스러워, 이림범은 볼이 다 씰룩거렸다. 언제고 화난 척, 무심한 척, 진지한 척 연기하기가 일상이던 황제이건만 하련솔 앞에서는 표정 관리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이림범은 눈매며 입술이며 온통 호를 그리며 웃었다. 웃으며 속삭였다.
“영화를 보러 나오라 하면 그만이더군.”
그러자 하련솔이 신이 났다. 두 눈동자에 작은 전구가 팟 소리를 내며 켜진 듯하고, 흰 뺨마저 더욱 환하게 빛을 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다 같이 영화를 보면 되겠어요.”
그가 크게 외친 말에,
“뭐?”
이림범이 눈썹을 찡그렸다.
황제의 미적지근한 반응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하련솔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극장에서 모이면 누구라도 폐하와 가까이 붙어 앉을 수 있고, 어두우니 복장이나 표정을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억지로 사교적인 척 수다를 떨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두세 시간씩 영화를 보면 재미도 있고, 개화병 증세도 충분히 완화될 테니 모두 기뻐할 겁니다.”
“…….”
하련솔이 조곤조곤 내놓은,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운 기획에 이림범의 눈썹이 재차 움직거렸다. 그러나 왼쪽, 오른쪽 높이를 바꾸어 가며 눈썹만 움직일 뿐, 어여쁜 하련솔의 면전에 대고 ‘싫다’하는 답을 크게 내놓진 못했다.
그는 기린관을 혼자 쓰기 좋아하는 황제였다. 세상 누구와도 함께 있고 싶지 않은 밤마다 심야 영화를 하염없이 연이어 보곤 했었다. 지난날 제 대피소이자 안식처이던, 개구멍을 뺏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기린관까지 내놓으라 하니 순 황당했다.
입이 있어도 말이 없는 이림범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련솔은 보릿자루처럼 자리한 두 무화에게 질문했다.
“해야. 원아. 너희도 좋지?”
그러자 그들 대화를 드라마 시청하듯 지켜보던 두 무화가 ‘앗’ 소리를 냈다. 저에게도 발언권이 있는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당황하여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그들은 하련솔을 한 번, 이림범을 한 번, 다시 하련솔을 한 번 살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좋긴 한데….”
그러자 대청마루의 무화들도 인기척을 흘리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기대를 품고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아주 작게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이림범의 미소가 얄궂어졌다. 상황이 이리되고 나니 차마 싫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평소 같았더라면 대놓고 거부하였겠지만, 두 눈 반짝이며 즐거운 듯 웃음 짓는 하련솔 앞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좋다. 그러자꾸나.”
어차피 이림범에겐 더는 대피소가 필요치 않았다. 세상 누구와도 함께하기 싫은 밤에도, 하련솔의 옆자리만큼은 평생 굶주린 이가 목축이듯 달가운 그였다. 때론 교태전에 자리한 그의 존재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하련솔이 바란다면 개구멍 처소이건 기린관이건, 하물며 제 침전을 내놓으래도 그럴 수 있었다.
허탈하게 웃음 짓는 황제 곁에서 하련솔이 선언했다.
“그럼 이틀 뒤, 저녁 일곱 시. 다 함께 재밌는 영화를 봅시다.”
그렇게 모임 하나를 뚝딱 만들어 놓고, 하련솔은 꼬르륵 뱃고동을 울렸다. 그 소리를 신호 삼아 이림범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청원의 열병일랑 새 이야기를 할 적에 완치된 지 오래였다.
하련솔을 데리고 처소를 떠나면서, 이림범은 지나간 대화로 인해 부스러기처럼 남은 앙금을 드러냈다. 오늘 조찬 모임은 취소하겠노라 일러놓은 것이었다. 그런 그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하련솔은 한 차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해은해를 향해 말했다.
“해야. 내일 점심에 교태전으로 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하련솔은 떠나버렸다. 커다란 존재감이 사라진 자리엔 불안에 젖은 두 여인만이 남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걱정하는 아청원을 달래며, 해은해는 솔 님께서 저를 꾸중하실 거라 짐작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큰소리를 내며 그에게 시시비비를 걸어댔으니, 몇 번을 혼난대도 군소리할 자격이 없는 처지였다.
해은해가 품은 것과 비슷한 추측을 이림범 역시 가졌다.
“교태전으로 저 애를 왜 불러? 따로 혼쭐을 내주려고?”
제 팔뚝에 안겨 걷는 하련솔에게 몇 번이고 귓속말해도, 시원하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보기 좋은 미소로 답을 대신하며 하련솔은 황제의 단단한 엉덩이를 남몰래 토닥토닥 두드렸다. 멀찍이, 상궁의 팔에 들린 더덕이가 어서 오라며 짖는 소리가 커다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