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그렇게 첫 번째 영화의 날이 왔다.
문정궁의 무화들은 모두 한 가지 이상의 모임에 속해 있었다. 각각의 모임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덕분에 영화의 날 소식을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영화가 상영되기 10분 전, 기린관은 모여든 무화들로 가득 찼다.
황제의 좌석은 ‘ㅂ5’로 상영관의 가장 중앙 열, 중앙 행이었다. 눈치 빠른 무화들은 그 자리는 물론이고 그의 옆자리 또한 빠릿빠릿하게 비워 놓았다. 황제가 무화 하련솔과 나란히 붙어 앉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었다. 쉬운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성큼성큼 움직이며 제 좌석을 찾는 이림범은 콜라며 팝콘을 한아름 끌어안은 하련솔과 함께였다.
기린관의 좌석은 총 40석이었다. 처음 극장을 지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당대 무화의 수가 마흔하나일 줄은 누구도 몰랐기에 딴에는 넉넉하다 여기며 마련한 자리였다. 윤슬찬이 무화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40석이라는 좌석은 무화의 머릿수와 운명적으로 맞아떨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오늘, 젊은 황제가 그들과 함께하자니 머릿수가 다시금 마흔하나가 됐다. 끝내 한 자리가 모자라게 된 것이었다.
때문에 직원들은 기린관의 ㄱ열 중앙에 접이식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순서대로 좌석을 채우며 착석을 마쳤으니, 그 자리는 가장 늦게 도착하는 무화의 몫일 터였다. 그런데 상영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선뜻 들어서는 이가 없었다.
팝콘을 감싼 달콤한 캐러멜로 손금을 적시면서 하련솔은 빈 의자를 멀뚱멀뚱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그는 이 자리에 없는 무화가 누구인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극장에서의 모임마저 거절하도록 내향적인 무화가 있던가 고민하는 그의 귀로, 멀찍이 자리한 무화들의 수다가 자잘하게 들렸다.
“…그럼 그렇게 여행도 갈 수 있는 거야? 궁에서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거래?”
“그야 모르지…. 진짜 대단하지 않아? 나 같으면 무서워서 못 나가.”
속닥속닥 나누는 대화 소리에 하련솔이 재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험약’, ‘개화병’, ‘문정궁’에 대해 말하는 그들 음성에는 약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나도 여행 가고 싶다….”
이내 하련솔은 숨겨진 주어를 깨달았다. ‘영화의 날’ 소식을 모두가 알음알음 전달받았듯이, 이차혁이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문정궁을 잠시간 떠난다는 소식 또한 일파만파 퍼진 모양이었다.
“근데 그 오빠, 오늘 가면 언제 다시 온대?”
그에 하련솔이 팝콘을 움켜쥔 손을 멈췄다.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무릎을 타고 흘러내리는 빈 팝콘 통을 이림범이 가볍게 낚아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로부터 두 줄은 더 뒤에 앉은 이들을 올려다보며, 하련솔이 물었다.
“혁이가 오늘 나간다고?”
“어….”
대뜸 밀려든 질문에 당황한 듯, 수다를 떨던 무화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곤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는 양 괜히 근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하련솔의 시선은 오해의 여지 없이 그들에게 똑바로 꽂혀 있었다.
그 바람에 무화들은 어리둥절했다. 이차혁이 교태전에 자주 드나들고, 하련솔과도 무척 잘 지낸다는 소문이라면 숱하게 오갔다.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나 그럴 뿐이라는 비아냥도 자연스레 뒤따랐다.
“왜 대답 안 해. 혁이, 지금 어디 있는데?”
그런데 ‘혁이’, ‘혁이’…. 이차혁을 부쩍 친근하게 일컫는, 하련솔은 금방이라도 그를 찾아 뛰어나갈 것만 같았다.
작은 소란에 다른 무화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선이 모여들자 부담을 느낀 듯, 수다를 떨던 이들이 입을 모아 답했다.
“방금 짐 챙겨서 나가시는 거 보고 왔어요.”
그러자 하련솔이 쏜 활처럼 후다닥 움직였다. 빠른 걸음으로 기린관을 떠나버리는 그를 따라 황제가 자리를 비웠다. 제 허리춤에 손을 홀리고 한숨을 푹 쉬더니, 사라진 하련솔을 쫓아 나가버린 것이었다.
기린관에는 벙찐 무화들의 웅성거림만 남았다. 상영 시간이 되어 스크린에 빛이 들어오자, 극장은 가차 없이 암전됐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움직이며 이림범은 하련솔을 쉽게 따라잡았다. 그에게 어깨를 붙잡혀 하련솔은 무작정 내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놀란 얼굴로 선 하련솔을 말리는 대신, 이림범은 주인 없는 처소로 향하던 걸음의 방향을 틀어주었다. 그러곤 주차장을 향해 함께 움직였다.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림범과 달리 하련솔은 금세 지쳐버렸다. 뛰다가, 걷다가, 다시 뛰길 반복하는 그의 손을, 이림범이 단단히 잡아주었다.
뭇 무화들이 쉽게 뱉던 말과 달리, 이차혁의 여행은 그리 즐거운 것이 못 되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저 멀리 보이는 그의 낯이 시무룩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무룩하다 못해 울적해 보이는 낯으로 이차혁은 묵직한 가방 네댓 개와 함께했다. 짐을 챙겨 나르는 시종들은 분주했고, 호위를 맡은 직원과 담당 의사도 바빴다. 하나같이 커다란 밴에 각자의 짐을 싣고 있었다. 수선스러운 발소리며 짐 옮기는 소리 외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가운데에 선 이차혁을 향해,
“인사도 없이 가냐?”
하련솔이 크게 외쳤다. 그러자 이차혁이 깜짝 놀라 커진 눈을 보여주었다. 당황한 듯 선 채로 머뭇거리다가,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두 형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왔다. 밤중에 도주하는 죄인처럼 남몰래 나서려던 이치고, 갑작스러운 배웅이 반가운 눈치였다.
“형.”
그러면서도 그는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밴의 뒷좌석에 미리 자리한 제 어머니, 하늬안이 신경 쓰였다.
요즈음 하늬안은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었다. 실어증 진단을 받아 말도 하지 못했고, 얼굴 근육이 반절 마비되어 감정 표현도 아주 서툴렀다. 혼자 힘으로 일어나 걷고, 물건을 쥐고 옮기는 등 손을 쓸 줄은 알지만 그뿐이었다. 의사 표현을 일절 거부하는 통에 글씨로도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며 찾는 이가 제 아들, 이차혁이었다. 그런 모습이 남들 보기엔 불행이었고, 그들 모자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눈썹 끝을 내리고서 이차혁은 안절부절못했다. 그에게 있어 제 어머니와 형제는 마치 OX 문제 같았다. 누구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배신하거나 버리는 모양이 되니 무척 괴로운데, 어느 쪽이 오답이냐를 함부로 택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함께하고자 이림범의 허락을 받아내긴 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쁜 엄마를 챙기자고 착한 형을 속 썩이는, 그는 응석 많은 아들이고 못된 동생이었다.
때문에 이차혁은 그들 모자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자 했다. 배웅도 인사도 미루어 놓고, 이림범에게 있어 죄인이자 원수인 하늬안을 얼른 숨기고만 싶었다.
“화내지 마. 형이… 엄마랑 마주치기 싫어할 거 같아서 그런 거야.”
머뭇거리며 이차혁이 말했다. 이림범은 그를 향해 불쑥 손을 뻗었다. 그러곤 제 동생의 머리를 탈탈 털듯 쓰다듬어주었다.
“화 안 내.”
대답은 가뿐했다. 쉬이 돌아온 다정한 말에 이차혁은 당황했다. 큰 눈으로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는 묵묵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림범은 그런 그를 지나쳐 큼직한 밴을 향해 향했다. 그러곤 궁을 떠나려는 동생의 짐을 대신 실어 주기 시작했다.
덤덤한 이림범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는 이차혁의 손을, 하련솔이 단단히 붙들었다.
‘혁아.’
그렇게 부르고자 입을 열었다가,
“환아.”
대뜸 떠오른 이름을 더럭 뱉어버렸다. 그러곤 제 뇌리에 스친 이름에 제가 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었다. 오래전 제 팔을 흔들며 포옹을 조르던 도련님의 이름이, 이제야 기억났다.
그에 이차혁이 이마를 찡그렸다. 눈썹이 구겨지도록 인상을 쓰며 그는 웃었다. 재회라면 진작에 마쳤건만, 다시 떠날 때가 되어서야 저를 기억해 낸 첫사랑이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못내 후련했다.
“응. 은재 형.”
이은재를 좋아하는 시간 내내 이차혁은 제 이름에 집착하며 살았다. 이림이라는 두 글자 성씨도 환이라는 빛나는 이름도 그에겐 미련이었다. 그 이름이 여전했더라면 오늘날 이은재가 내 사람이었을까, 궁금해한 시간은 전부 부질없었다. 애초에 그의 첫사랑은 더는 이은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옛 이름을 훌훌 털고 떨쳤듯이, 그는 이차혁의 이름 또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차혁이 아닌 그 누구의 이름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 글자의 별칭조차 없는 그 시절의 ‘아이’를 전력을 다해 좋아할 수 있었으리라. 어린 날 이림환이 제가 누구인지를 알리고자 노력할 때, 이은재는 그 누구도 아닌 아이와 마음을 나눴다. 처음부터 그 애정은 제 것이 아니었음을, 이차혁은 이제 알았다.
“그래…. 여행 잘 다녀와, 환아.”
그래도 그 앞에서 하련솔은 이은재였다. 은재는 어리숙한 환에게 필요한 말을 깊이, 또 많이 해 주었다. 문정궁을 떠난다고 해도 이곳은 늘 네 집일 거라는 말. 집이라는 건 본래 돌아갈 곳을 뜻한다는 말. 가족의 의미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말…. 긴긴 위로와 격려를 들으며 환은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나중에는,
“올 때 선물 사와.”
은재의 요청에 ‘넵’ 그러곤 제 손바닥에 메모하는 시늉을 보일 정도가 됐다.
“뭐든 말해요, 형. 뭐가 갖고 싶어?”
“글쎄…. 뭐든 좋은데. 이왕이면 작은 거로 부탁할게. 포포 안에 넣어둘 수 있는 걸로.”
은재의 농담에 환은 크게 웃었다. 이왕이면, 작은 거… 들은 말을 따라 읊는 소리가 조그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