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15화 (115/135)

116.

이차혁의 어깨너머를 하련솔이 힐긋 살폈다. 뒷좌석 문을 활짝 열어둔 밴 앞에 선, 이림범의 뒷모습이 커다랬다.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그는 뒷좌석에 앉은 여인을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이내 이림범이 밴의 문을 퉁 소리 나게 닫았다. 하련솔의 즐거운 배웅도 그와 같이 끝났다.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고서 이차혁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백색 밴은 즉시 문정궁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후련함 반, 미련 반을 발바닥에 붙이고서 하련솔은 이림범의 손을 잡았다. 기린관에서는 벌써 도입부를 한참 지난 영화가 상영 중이지 싶었다. 호기심 많은 무화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극장을 향해 나란히 걷던 중 하련솔이 말했다.

“범아. 아까… 그 사람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하늬안’이라 이름을 말하기는 예의상 꺼림칙하고, ‘그분’이라 존칭을 쓰자니 그건 그것대로 싫고, ‘혁이 엄마’라 지칭하자니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더럭 들었다. 때문에 하련솔은 그녀를 ‘그 사람’이라 불렀다.

긴 고민이 담긴 질문 앞에 이림범은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대꾸했다.

“별 얘기 안 했어.”

“어. 그래?”

“그래.”

두 남자의 발이 극장에 닿았다. 두툼하고 묵직한 기린관 문을 밀어 여는 이림범의 얼굴은 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갑작스러운 용무를 마치고 돌아온 황제와 하련솔을 위해, 무화들은 중요한 도입부를 훨씬 지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상영하는 데에 동의했다.

작은 웅성거림을 그림자처럼 몸에 붙이고서 이림범은 제 좌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하련솔 역시 그의 곁에 앉아, 눅눅해진 팝콘 대신 황제의 손을 잡았다.

큰 눈을 반짝이며 스크린을 응시하는 하련솔과 달리, 이림범은 영화가 아닌 제 기억을 바라봤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저를 노려보던 하늬안이 있었다. 문정궁 앞에 함부로 얼굴조차 내밀 수 없어, 흰 밴 안에 숨듯이 자리한 신세였다. 언제고 포식자 같던 그녀의 얼굴에, 피식자 특유의 공포감이 스민 것이 마냥 신기했다. 이림범은 하늬안은 죽는 날까지 도도하고 꼿꼿하고 뻔뻔하게 살 줄로만 알았다. 그녀에게도 정신 승리가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게, 그다지 통쾌하지도 고소하지도 않고 그저 신기했다.

하늬안을 향해 그는 대단한 비난이나 책망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질문했다.

‘왜 내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지? 황제가 되고 싶으냐고… 그럴 마음이 있긴 하냐고 말이야.’

하늬안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림범을 피하느라 차량 맨 안쪽 창문에 뒤통수가 닿도록 몸을 뒤로 빼고는, 두 눈을 느리게 끔벅일 따름이었다. 몇 초를 허투루 흘려보낸 뒤에야 그녀는 들은 말의 뜻을 깨달은 듯 더럭 움직였다. 이림범을 향해 상체를 불쑥 기울이며 마른 입술을 벙긋거린 것이었다.

병세에 시달리는 전대 무화의 얼굴 위에 간절한 갈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녀가 하고픈 말이 무언지 이림범은 알았다. ‘만일 내가 그랬더라면, 너는 뭐라고 했겠니’하는 되물음일 터였다. 그러나 이림범은 애원이 담긴 그 눈짓을 모른 체 했다. 도리어 그녀의 눈을 아주 빤히 내려다보며, 재차 질문만을 안겨주었다.

‘혹시 동생한테 그 자리를 양보해 줄 생각은 없느냐고, 왜 나한테 물어보질 않았어?’

그러자 하늬안이 입을 크게 쩍 벌렸다. 혈기 옅은 혓바닥과 아랫니가 다 드러나는데, 선뜻 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억… 목구멍이 펄펄 끓도록 쥐어 짜낸 음성이, 억… 신음처럼 흘러나올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떠밀려 온 의구심이 두려운 듯, 하늬안은 구원을 좇았다. 두 손 뻗어 이림범의 옷 소매를 움켜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옷은 무척 미끄럽고 부드러워 쉬이 잡혀 주질 않았다. 이림범이 가볍게 뿌리칠 때마다 하늬안의 손은 허공을 가르며 허덕거렸다. 황제의 옷 소매에 용의 발톱이 기다랗게 새겨져 있어, 마치 용이 그녀를 내팽개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림범이 손을 뻗었다. 그는 비쩍 마른 전대 무화의 한 손을 제 두 손으로 덥석 감싸 쥐었다. 총알 같은 말을 매정하게 뱉어놓고서, 손길은 꽃잎이 암술 감싸는 듯 무척 부드러웠다.

‘오래 살아.’

하늬안의 손을 제 얼굴 가까이 바짝 당기며, 이림범은 가만히, 또 잔잔히 속삭였다. 원수의 손바닥에 대고 그는 날숨을 불어넣었다. 죽어가는 무화의 닳아빠진 수명을 연장하는 숨결이었다.

‘그래야 오래 후회하지.’

텅. 영화 속의 주인공이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덮었다. 이림범의 무표정한 회상도 그와 함께 덮였다.

***

큼직한 꽃다발을 가득 채운, 샛노란 메리골드가 화사했다. 밤길마저 환해지도록 풍족한 꽃다발을 움켜쥔 채 황제는 여유롭게 걸었다. 교태전의 정원 꽃밭에 늦게 핀 부용 한 송이가 시무룩하기에, 그것도 길게 꺾어다가 제 꽃다발에 꽂아 넣었다.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황제의 등 뒤를 호위 실장과 신입 비서가 뒤따랐다.

지난주, 황제는 무화 이차혁이 문정궁을 떠나자마자 비서를 바꿨다. 승정원은 그 소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박총명의 소속을 옮기고, 준비된 새 비서 후보를 여럿 보내왔다. 개중 황제의 선택을 받은 이는 나이가 가장 어린 여자 비서였다. 정장을 차려입은 신입 비서가 긴장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림범은 그녀에게 ‘친구는 잘 사귀느냐’ 질문했다. 그러곤 교태전의 여자 시종들과 얼른 친분을 쌓아, 주기적으로 교태전의 소식을 내게 물어오라 명령했다.

그렇게 오늘, 황제의 새 비서는 재밌는 소식을 물어왔다. 시종 보리와 밤새 전화로 수다를 떨도록 친해져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교태전의 시종들이 요즘 아주 바쁘단 것이었다. 엊그제엔 무화 하련솔이 심부름을 시켜 시종 초롱이 백화점이며 시내의 상가 여러 곳을 오갔고, 오늘 밤에는 교태전의 시종 전원이 야근을 한다고 했다.

마침 대령숙수도 재밌는 소식을 전해주었더랬다. 하련솔이 오늘 저녁 후식으로 ‘무난한 크림빵’을 만들어달라 요청을 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 이림범은 무척 들떴다. 크림빵은 그 옛날, 고야읍의 절간 창고에 갇혀 지내던 저에게 하련솔이 가져다주던 간식이었다. 아픈 추억이 담긴 음식을 준비하고 시종들을 바쁘게 한 것을 보면 하련솔이 저를 위한 데이트를 준비하는 게 틀림없었다.

발바닥이 가렵도록 들뜬 황제를 더러, 호위 실장 김웅진은 ‘그저 모르는 척하시고, 일정대로 움직이십시오’ 부탁했지만 이림범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요즈음 일이 재미가 없고 회의도 지루하기만 해 좀이 쑤셨다. 승정원이며 의금부를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며 긴장하게 만드는 보람도 더는 없다고도 했다. 그 말에 승정원 소속 비서며 의금부 소속 호위 실장이며 이마를 잔뜩 웅크렸다.

“폐하….”

그들 조언을 귓등으로 퉁 튕기며, 이림범은 꽃다발을 준비했다. 예정되어 있던 야근 일정을 전부 미루어 놓고, 교태전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심야의 짧은 데이트를 준비해온 하련솔이, 제 님을 한 시간 일찍 만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단순한 기쁨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림범은 교태전 전각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황제를 뒤늦게 발견한 시종 윤슬찬이 무척 당황하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 솔 님을 불러오겠다 말하여도 소용 없었다.

“내가 들어가서 만날 테니 부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서 이림범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때마다 용포의 검은 옷자락이 깃발처럼 휘날렸다. 손에 들린 풍성한 꽃다발도 앞뒤로 신나게 흔들렸다.

그런 이림범을 반긴 것은 그러나 하련솔이 아닌 이상한 침묵이었다.

“…….”

교태전 침실 내부는 어둡고 휑했다. 불빛이 전무한 데다 인영 하나 없었다. 문지방을 밟고 선 채 이림범은 어리둥절하니 멈추어 섰다.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도 시무룩하니 아래를 향했다.

“게 아무도 없느냐…?”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이림범은 주인 없는 침실에 들어섰다. 휙 뒤를 돌아보자 윤슬찬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땅히 돌려주는 답이 없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이림범은 침실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더덕이 산책 나갔나?’

그 개를 데려온 뒤로 교태전의 분위기가 아주 포근해졌다. 하련솔을 비롯하여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더덕이는 건강을 되찾았다. 목욕을 시키고 미용을 해주었더니 누더기가 곰돌이가 되어서는, 잡지에 실려도 될 만큼 귀여워지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교태전으로 개를 보러 오는 무화 손님이 많아졌다. 녀석을 산책시키느라 하련솔도 하루에 세 번씩 방 밖으로 기꺼이 나섰다. 개 한 마리가 안겨준 활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그 개를 선물한 장본인인 이림범이 질투를 해야 할 정도였다.

오늘날 교태전의 정원이며 복도, 문간 곳곳에는 물어뜯다 만 인형이 즐비했다. 하련솔의 침상 옆에는 도넛 모양의 개 침대가 함께 놓였고, 자개장롱 곁에도 조그마한 걸이를 놓아 개를 위한 옷, 모자, 목걸이, 발바닥 로션 따위를 정리해두었다.

귀 넣는 구멍이 숭숭 뚫린 모자를 미심쩍게 노려보기도 잠시, 이림범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며 다가가 보니 자개장롱 문이 한 뼘 간격으로 열려 있었다. 도란도란한 목소리는 그 안에서 들려왔다.

‘이것 봐라.’

픽 실소하며 이림범은 장롱 문짝을 붙잡아 쥐었다. 곱디고운 철릭이며 두루마기가 가득 걸린 옷장의 안쪽 벽은 사실 미닫이문이라 지하통로로 통했다. 그 틈새 또한 넓게 벌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하련솔이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황제의 처소 침실로 향한 모양이었다.

웃음기를 숨기느라 입술을 꾹 다물며, 이림범은 옷장 안으로 들어가 미닫이문을 지났다. 등 뒤로 윤슬찬이 ‘아’ 하고 작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기습 데이트로 저를 깜짝 놀래 주려는 하련솔을 역으로 놀라게 할 생각으로 즐거운 순간, 이림범은 황제가 아닌 소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