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16화 (116/135)

118.

“하….”

조금 전, 지하통로에 몸을 숨기면서 황급히 떠올린 계획대로라면 이림범은 연기를 해야 했다. ‘결혼서약서’라는 이름일랑 미리 보지 못한 척하며, 정말로 놀랐다는 듯 어깨를 튕기며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하련솔이 고심하며 준비해 온, 멋진 반전까지 지닌 청혼의 순간을 함부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림범에게는 노력하여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대는 통에 감동 어린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범아.”

갖가지 감정을 떠안은 이림범 앞으로, 하련솔은 무릎으로 기듯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 황후, 그거 내가 할게. 그럼 아빠도 내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네 새집, 그거 내 집 할게. 이제 더는 옛날 집이 크게 그립지가 않으니까. 새 가정…. 그건 너와 함께 만들고 싶어.”

두 손 뻗어, 하련솔은 이림범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제 품 안으로 가져가, 준비해 온 반지를 꺼내어 약지에 끼워 주었다. 아무런 보석도 특별한 장식도 붙어있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옥 반지였다. 동일한 형태의 반지가 이미 하련솔의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워낙 가난하게 살아온지라 그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이 얼마 되질 않았다. 여태껏 모아온 품위 유지비를 전부 털어다가 구한 것이 이, 가느다란 옥 반지 두 개였다. 평생 사치를 해본 적이 없다 보니 그마저도 어떤 브랜드가 좋은지, 누구를 통해 구매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해은해를 교태전으로 불러다가 정보를 구했었다.

젊고 아름다운, 황제의 약지에 자리하기에는 아쉽도록 보잘것없는 반지였다. 그래서 하련솔은 속상해 입술을 구겼다. 그래도 그는 용기를 냈다.

“…형이랑 결혼할래?”

이림범이 저에게 청혼해 주지 않으면, 뭐 어떤가. 그까짓 청혼 제가 직접 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지나간 여행의 길목에서 하련솔이 내린 결론이었다.

도전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멀쩡하니 보기에 좋던 이림범의 얼굴이 엉킨 실타래처럼 점차 헝클어지더니, 이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강하게 내리감은 두 눈가엔 없던 주름이 졌다. 아래로 축 늘어진 속눈썹은 까맣고, 길고, 눈물에 젖었다.

소리 죽여 우는 그의 모습이 이제는 귀여웠다. 어린 날 아이의 울음은 마음 아리도록 서글펐는데, 오늘의 이림범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니 참 귀여웠다.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구는 황제의 뺨을, 하련솔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애기야. 형이 너,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자 잘생긴 황제의 얼굴은 완전히 오만상으로 찌그러졌다. 시뻘게진 입을 벌리고 더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이림범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형.”

그도 하련솔이 좋았다. 정말이지 마냥 좋았다. 하련솔에게 집을 주고, 가정을 주고, 아버지를 되찾아 주고 싶었다. 후자의 경우는 진작 수소문을 하여 그가 다니는 직장이며 건강 상태, 집 주소까지 찾아놓았다. 그래서 계동나례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 이림범은 하련솔의 아버지를 황제의 손님 자격으로 초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랑에 들뜨고 애틋함에 저릿저릿한 제 마음과 달리, 필시 꺼내야 할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전할 말이 무언지 하련솔은 이미 알았다.

“과거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

그래서 듣기보다 답을 더 빨리했다.

결혼하자, 결혼하자… 신이 나 노래하던 이림범이 입을 다문 시점이 명확했다. 노리개에 스민 저열한 비밀을 알게 된 뒤로, 그는 면구스러운 듯 혀를 굳혔다. 여전히 하련솔을 사랑하며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퍼부어 주고, 그의 뜻을 십분 존중하긴 했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저에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결혼을 해 달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련솔은 그런 건 싫었다. 어떠한 직위도 책임도 떠안은 바 없이, 사랑을 받기만 하는 일이 그는 싫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세금이나 축내며 유령처럼 살길 바라던 한솔은 이제 없었다. 오늘날 그는 하련솔이었다. 하련솔은 황후라는 직위를 원했다. 제자리를 지키며 황제를 보필하기 위한 의무를 원했다. 저도 연인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다. 성큼성큼 움직이는 이림범과 발맞추어 걷고 싶었다. 그리해서 제대로 된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은 잘못 없이 죗값을 갚으려는 아이를 향해, 하련솔이 말했다.

“나는 어제보다는 내일이 중요해. 내일보다는 오늘이 더 중요하고. 오늘은 꼭… 너와 결혼하고 싶어.”

도장 찍듯 단언하는 고백 앞에서 이림범은 울보였다. 잘빠진 턱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입술 사이에도 눈물이 만든 선이 생겼다. 그 눈물이 어찌나 흥건한지, 벙긋거리는 그의 입술에 반짝이는 전등 빛이 비칠 정도였다.

“형.”

재차 이림범이 목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하련솔은 대답을 빨리했다.

“개화병 치료약도 난 필요 없어.”

“…….”

그에겐 이림범이 꺼낼, ‘형이 나와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들을 마음이 추호에도 없었다. 뭐가 됐건 그닥 궁금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아니…, 형. 나도 말 좀 하자.”

이림범이 중얼거렸고,

“아니. 내 말부터 들어.”

성질 급한 고구려 사람처럼 하련솔은 바삐 말했다.

“황후가 되면 그 약도 못 먹는다며? 나도 알아, 무화들이 알려주더라. 다들 개화병을 고친다고 해도 나는 영영 무화여야 한다는 거, 이미 알아.”

따박따박 반박을 늘어놓은 끝에, 하련솔은 이마를 찡그렸다.

“야. 범아….”

그러곤 불쑥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울먹이는 하련솔을 보고 이림범은 화들짝 놀랐다. 왜, 왜 울어… 당혹감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그는 하련솔의 뺨을 마주 감싸 잡았다. 그리고 엄지를 슥슥 움직이며 후둑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울지 마, 형. 왜 울고 그래.”

하련솔로서는 황제를 따라 울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림범이 구태여 자신과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며 늘어놓는 설득이 죄, 저를 위한 것이기에. 그 말들에 이림범 스스로를 위한 이득이나 바람은 조금도 없기에.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래서 좋았다.

“네가 이럴수록 더… 티가 나. 네가 날 사랑한다는 게….”

하련솔의 말끝은 황제의 입술에 잡아먹혔다. 서로의 뺨과 귀를 부여잡고 입술을 부비는 내내 그들은 상대의 눈물을 맛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짭조름한 입맞춤이었다.

이내 이림범이 긴 한숨을 뱉었다.

“사랑해, 형….”

펄펄 끓는 열망을 못 감추며 그는 비로소 이기적이고자 했다. 때문에 하련솔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미 반쯤 망가진 꽃다발을 떠밀어 건넸다. 반상 앞에 주저앉은 채 하련솔이 하하 웃었다. 울다가 웃는 그의 얼굴이 어린애처럼 천진했다.

그러나 기쁨에 취한 하련솔의 미소는 금세 옅어졌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는 이림범의 손끝만 바라보았다. 붉은 실 노리개를 태워버린 뒤, 그는 새로이 품고 다닐 보물을 얻었다. 남의 손에 함부로 닿게 하지도, 남의 눈에 보이게끔 내놓지도 못하고서, 용포 속주머니에 비밀스럽게 지니고 다닌 보물이 있었다.

“솔아.”

황제가 속삭였다. 정사각형의 작은 상자가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몇 달 전의 어떤 오늘, 그는 내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음날 어떤 일이 닥쳐올지도 모르고서 그는 반지를 구했다. 제 곁에서 잠든 하련솔의 약지에 실을 감아다가 치수를 확인하고,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릴 법한 귀하고 비싸고 무거운 것으로 구한, 반지의 용도는 단 하나였다.

“…나의 황후가 되어다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는 하련솔의 약지를 당겼다. 옥 반지가 끼워진 자리에 새로운 반지를 끼워넣기 위해서였다. 손가락등을 타고 옆으로 기울어지도록 커다랗고 묵직한,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훗날 그들은 ‘오늘’의 백년가약을 무척 후회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서로 결혼하자, 결혼해 줘 청혼만 했을 뿐이지 누구 하나 ‘그래’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 그들은 그럴 정신이 조금도 없었다. 사랑으로 숨이 가쁘고 기쁨으로 이성이 마비되어 버려, 주인을 찾아온 더덕이가 크림빵에 주둥이를 댈 때까지 서로의 고백을, 입술을, 전신을 탐하기 바빴더랬다.

황제의 침방 이불을 잔뜩 구겨놓으며 하련솔이 말했다.

“우리, 혼인 신고부터 하자.”

“응.”

“봄이 되면… 환이가 돌아오면, 그때는 우리 같이 결혼식을 올리자.”

“응….”

“너는 내가 하는 말이면 다 좋아?”

“응.”

제 말에 무조건 순응하는 착한 아이, 저 말고는 세상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젊은 황제, 제 앞에서만 울보가 되어버리는 귀여운 이림범을 끌어안고, 하련솔은 하하 웃었다. 길게 터뜨린 웃음은 입 맞추는 소리로 뭉개졌다.

눈먼 밤의 끝에 기어이, 행복은 오고야 말았다.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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