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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1화 (117/135)

외전 01

첫술에

기자와 수행원이 모두 하차한 뒤, 백색 전세기에는 황제와 그의 약혼자만이 남았다. 밖으로 나설 준비를 진작 마친 황제는 겉감은 검고 안감이 붉은 정장 재킷에 넥타이까지 각을 잡아 묶었으나 그 앞의 무화는 허리띠도 매지 않은 차림새였다. 꿩과 구름이 새겨진 검정 허리띠를 왼손에 움켜쥔 그는 침대에 주저앉은 채 멍해 보였다. 황제는 그런 무화 앞에 기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근심 어린 얼굴로 무화의 두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형.”

다정한 부름과 함께 상대의 무릎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는 권위 있는 황제가 아닌 귀염성 있는 애인이었다. 제 무릎을 간질이는 손길에 어깨를 웅크리는 이 또한 그저 병약한 무화가 아닌 이림범의 연인, 하련솔이었다.

다정다감한 기운은 포근하였으나 하련솔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긴 시간 비행하는 내내 그는 황제의 전용 공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 종일 잠만 잤다. 식사 시간에 맞추어 한 번 일어나긴 했는데, 이림범이 비벼 준 산채비빔밥을 두어 숟갈 먹고는 ‘열나’ 하며 다시금 뻗어 버렸다. 첫 비행에 긴장하고 지쳐 버려 몸살이 났나 싶어 이림범은 약 대신 제 몸을 내어 주었다. 하련솔을 따라 침대로 자리를 옮겨서는, 그의 상체를 제 가슴 위에 어린아이 어르듯 얹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곤 한 손으로 태블릿 PC를 쥐고 일정을 확인하며 일을 했다.

세 시간은 족히 부둥켜안은 덕분에 전세기가 활주로에 착지한 지금 하련솔의 몸에는 열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두 눈은 여전히 졸린 사람처럼 멍하고 둔해 보였다.

이림범은 하련솔의 손에 꼭 쥔 허리띠를 천천히 빼앗았다. 빳빳한 새 허리띠가 당장 갈 곳은 바지 벨트 고리도 못 찾는 주인이 아닌 자개 협탁 위였다.

“어때. 내 얼굴은 잘 보여?”

말간 갈색 눈동자에 제 얼굴을 비추려 노력하면서 이림범이 물었다. 그에 하련솔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입술로만 호를 그릴 뿐 눈매는 당황한 듯 굳은 채였다.

“아까 전보단 훨씬 나아.”

두 손을 우물쭈물 모아 쥐며 하련솔이 대답했고,

“아직 덜 보인다는 뜻이네.”

이림범은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내 하련솔의 몸이 매트리스 위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제가 그를 따라 침대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두 팔 뻗어 하련솔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는 얼어붙은 연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쪽, 쪽. 입맞춤 소리가 긴장을 풀라는 위로처럼 느껴져, 하련솔은 괜스레 두 발을 아래로 쭉 뻗었다.

기껏 접어 정리한 이부자리를 흐트러뜨리며 하련솔은 뒤로,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며 내준 공간을 이림범이 덥석 채웠다. 넓고 큰 기내를 아주 비좁게 나누어 쓰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뺨에 제 뺨을 맞붙였다. 그대로 소리 없이 숨을 고르기도 잠시, 그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하련솔의 셔츠를 풀어 내렸다.

어깻죽지에 연신 맞붙는 입맞춤에 하련솔의 두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긴장감과 피로감, 긴 비행이 안겨 준 약간의 멀미, 그리고 설렘이 한데 뭉쳐 그를 무척 지치게 했다. 고단한 듯 힘없는 연인의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달래는 일은 이림범의 몫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침실 자리를 가로지른 병풍 너머로 시계를 확인하며, 이림범이 속삭였다.

“…안 되겠다.”

한숨처럼 귓가에 닿은 음성에 하련솔은 가슴이 철렁했다. 맥 빠진 몸에 불쑥 힘이 들어가고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급한 마음에 입을 벙긋거리며 하련솔은 이림범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아냐…. 그 정도로 나쁘진 않아, 범아. 나… 나갈 수 있어.”

변명처럼 빠져나온 목소리는 별수 없이 시무룩했다.

무화를 낫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황제뿐이었다. 자국민도 그 능력을 높게 사기는 하나, 해외의 경우 오묘한 오리엔탈리즘이 섞여 더욱 신비롭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적인 색채를 빼놓고 논해선 안 될 이곳, 바티칸에선 더욱이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더군다나 하련솔은 오늘날 교태전의 주인이자 황제의 약혼자였다. 그런 자격으로 황제의 곁에 서자면, 특히나 해외 일정에 함께하며 발을 나란히 하자면 그는 개화병 증세를 보여서는 안 됐다. 양채림 상궁과 승정원 도승지에게 오며 가며 받은 족집게 과외가 있기에 하련솔도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니 이림범이 저를 전세기에 떨구어 놓고 홀로 나서겠다고 결정한들 하련솔은 서러워할 자격이 없었다. 피로감에 번진 개화병 증세가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당장은 사소한 억울함보단 대중에게 보일 모습을 재단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이성으로는 분명히 그렇게 판단하면서도, 하련솔은 별수 없이 답답하고 서러웠다. 이번 순방을 위해 스스로를 열심히 가꾸어 왔기에 유독 그랬다. 체력을 비축하고자 5주 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했다. 해외 인사의 얼굴과 이름, 직급과 집안, 정치 성향을 달달 외우느라 노트 세 권을 글씨로 가득 채웠다. 바른 행실이며 몸가짐, 예절을 익히느라 걸음걸이를 알려 주는 선생까지 따로 만났다. 기초 외국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세기에서 내리기도 힘든 신세가 되었다니 괜스레 발바닥이 다 간질거렸다. 이림범의 다정에 기대어 못내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범아.”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하련솔이 말했다.

“내가… 잘할 수 있어. 잘 안 보여도 잘 보이는 척, 내가 연기할게. 잘해 볼게.”

그에게 이번 순방이 지닌 의미는 무거울 만큼 컸다. 무화로서 황제를 따라나선 첫 해외 순방이라 그랬고, 연인으로서 이림범과 함께하는 첫 해외여행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하련솔은 이번 일정의 무엇 하나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부담감이 도리어 애를 태워 개화병 증세가 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실 이번 순방에서 하련솔이 맡은 역할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늘 열리는 미사에 참석해 이림범의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만인 식이었다. 내일 오전 교황과의 면담은 물론이고 그 밖의 정성을 쏟는 일정은 전부 이림범이 소화할 몫이었다. 하련솔은 그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동행 한 번, 제 배우자의 옆자리를 채워 주는 몫조차 못 해내어 전세기며 호텔에 갇혀 지내고 싶진 않았다. 내세우기 부끄럽고 숨겨야 마땅한 존재인 건 싫었다.

한데 이림범의 의중은 그의 걱정과 정반대였다.

“뭔 소릴 하는 거야? 형.”

이림범에겐 이 먼 땅에 제 약혼자를 홀로 떼어 놓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전세기에 하련솔을 외톨이로 감춰 두느니 제 혀를 깨물고 말 것이었다.

도리어 그는 더욱 빠른 해결 방안을 찾아 하련솔을 낫게 할 생각이었다. 하련솔에게 이번 순방이 첫 경험이라 중요하듯이 이림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그는 세상 모든 이들 앞에 제 약혼자를 내보일 것이었다. 하련솔의 어여쁜 얼굴이며 고운 옷으로 포장된 몸, 반듯한 자세와 다정한 분위기를 누구나가 알게 할 것이었다. 병세를 싹 떨치고 이지로 반짝이는 눈을 감상하게 하고, 제 약혼자 ‘하련솔’로서 널리 기억되게 할 것이었다. 그 옆에서 젊은 황제인 제 명성은 사소한 도움닫기일 뿐이었다. 그는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20분만 시간을 좀 줄 수 있겠어?”

넓게 펼친 병풍 너머를 향해 이림범이 외쳤다. 제 손을 동아줄 쥐듯 꼭 잡은 하련솔이 아니라, 전세기 문 앞에서 발 구르고 있을 비서 실장에게 건넨 소리였다. 그러자 무어라 바삐 말을 나누는 비서진의 웅성거림이 짧게 들리더니,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15분입니다, 폐하.”

딱딱하게 돌아온 시간제한에 이림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다들 자리 좀 비워 줘.”

“네, 15분 뒤 모시겠습니다.”

그러곤 사방이 조용해졌다. 하련솔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침대에 등을 붙였다. 반면 이림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전세기 내부가 확실히 텅 비었는지 2층까지 돌아다니며 확인했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침실 자리로 돌아왔다.

이따금, 하련솔은 이림범의 손을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 어떤 동물이라 여겼다. 기다란 손가락을 다리 삼아 이리저리 먹이를 찾듯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동물. 그 손으로 이림범은 하련솔을 아주 달뜨게 하고 때로 울게 했다. 그럴 때면 하련솔의 육신 또한 이성과는 따로 노는 짐승이었다. 숨이 달아오르고 오금이 저리기 시작하면 전신의 무엇 하나 통제할 수 없게 된다.

푹신한 침대에 등을 파묻은 채 이림범의 큰 손에 몸을 내맡기면서 하련솔은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나쁜 변태가 되었다는 죄책감을 맛보았다. 한때 그에게 이림범은 한량 친구 나찰사였고, 아주 예전에는 저밖에 모르는 애기 백구였는데 말이었다. 그 옛날의 ‘아이’와 오늘날 제 황제님을 순 동떨어진 존재로 여기다가도,

“형….”

애정이 가득 담긴 부름에 정신이 확 깰 때면 별수 없이 양심에 모가 났다. 가슴 안이 이리 따끔 저리 따끔했다.

“…나한테 집중 좀 해 줄래?”

희미한 시선을 천장에 던져 둔 하련솔이 못마땅해, 이림범은 투정했다. 허리 위를 기는 손길이 간지러워 허리를 비틀면서 하련솔은 콧잔등을 구겼다.

“아!”

웃음 섞인 탄성을 짧게 내뱉고는,

“너한테, 나… 집중하고 있어. 네가 몰라서 그렇지.”

하련솔이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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