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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4화 (120/135)

외전 04

두툼한 외투에 몸을 파묻고, 청옥 노리개를 옆구리에 단 채 하련솔은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면 더덕이는 오가는 이들이 죄 저를 향해 인사하는 줄 착각했다. 제가 아주 대단하고 용맹한 개인지라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시선을 피한다고 굳게 믿는 식이었다. 시종도 경호 직원도 상궁도 제 뒤의 예비 황후, 하련솔에게 인사하는 줄은 영 모르는 눈치였다.

도리어 더덕이는 제 보호자, 하련솔을 제가 보호해야 할 존재라 여겼다. 이림범이나 호위 실장 김웅진, 하다못해 체구 작은 초롱이 데리고 나설 때조차 더덕이는 동행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천방지축이었다. 미치광이 풋나물 캐듯 뛰기도 하고 사람을 버려 놓고는 산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하련솔 옆에만 서면 민들레 꽃씨 날리듯 움직였다. 연약한 그를 해칠까 봐 청설모도 쫓아냈고 행인에 대고 컹컹 짖기도 했다.

산책 중에는 더덕이가 허락하는 이들만이 하련솔의 곁에, 별다른 체취 수색 없이 다가올 수 있었다. 초롱도 승인받은 이 중 하나였다.

“솔 님!”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 초롱이 하련솔에게로 직진했다. 오른손에는 바삐 챙겨 나온 도톰한 볼끼가 들렸고 왼손에는 도통 저를 기다려 주는 법 없는 무화님에 대한 원망을 움켜쥔 채였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니까요. 매일 한 번은 제 눈앞에서 사라지시란 법이라도 있대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끌고 온 원망은 그러나 하련솔의 턱에 볼끼를 대 주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진녹색 원단에 분홍색 안감이 달린 볼끼를 둘러 주고 보니, 하련솔의 얼굴이 더욱 동그래 보이는 데다 안감의 색이 비쳐 양 뺨에도 홍조가 도는 듯했다. 미모에 날로 물오르는 그 얼굴을 보며 화를 내기란 초롱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결국 초롱은 헤헤 웃고는 말았다. 하련솔도 제 시종을 향해 턱을 들고 웃었다. 그의 정수리에 리본 매듭을 지어 주며, 초롱은 조금 전 주워들은 따끈따끈한 새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오늘요, 정자 앞 카페에서 야단이 났대요. 문자 그대로 ‘야단’이요. 오전에 도승지께서….”

그러다가도 순 윗사람이 된 제 무화님을 생각하며 존칭을 고쳤다.

“아, 아니. 승정원 도승지가 정자를 지나가던 길에요, 어린 무화들끼리 서로 마마님, 마마님 하면서 노는 걸 보곤 혼쭐을 냈다더라고요. 어디 마마라는 호칭을 함부로 쓰냐면서요.”

“으음.”

하련솔이 그, 도승지로부터 경계심 섞인 눈짓을 받던 것이 멀어 봐야 두 달 전 일이었다. 공기가 쌀쌀해지고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올 무렵에, 도승지는 하련솔을 마주할 일이 생길 때마다 핀잔이나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했다.

‘보통 황후의 자리에는 무화들 가운데 가장 집안이 좋고 정치적 명분에 맞는 이가 오르게 마련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그러면 하련솔은 입을 모아 ‘오’ 소리 내어 감탄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몰랐는데요.’

‘지금 드시는 생각은 그게 전부입니까?’

‘어, 하긴 그렇겠구나 싶고… 신기한데요.’

도승지는 그런 하련솔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듯 보였다. 하련솔이 생각하기에도, 궁궐에서 오래도록 일해 온 어르신이 보기에 저는 영 부족한 예비 황후이지 싶었다. 그래서 구태여 가식을 떨거나 애써 대접하는 일 없이 싱겁게 그를 마주했더랬다.

한데 도승지는 무뚝뚝하게 굴다가도,

‘그러니 당신께서 무품의 자리에 오르는 건 아무런 수작도 술수도 없이 순수한 출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경우는 아주 희귀하죠.’

난데없이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어….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하련솔이 인사하자,

‘저에게 감사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삐죽한 대거리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식이었다.

지난해 십이월의 끝에는 또 어땠던가. 그맘때 하련솔은 더덕이보다 더욱 촐싹거렸더랬다. 청혼의 설렘이 식지 않은 때라 그랬고, 조만간 제 아버지를 문정궁으로 초대하겠다는 이림범의 깜짝 선물이 있어 그랬다. 약골 육신이며 열병에 대한 걱정은 전부 잊어버리고서 하련솔은 이리저리 달랑달랑 돌아다니며 성탄과 계동 나례를 즐겼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정통 불꽃놀이를 오래도록 감상한 대가로 그는 앓아누웠다. 그리고 사흘 내내 병상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사흘 중 이틀간 교태전에 들른 도승지는 혀를 끌끌 차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굳게 닫힌 교태전 침실 문에 대고 그는 병자 들으라는 양 못마땅한 목소리를 남겼다.

‘왜 이리 회복이 더디신 겁니까? 이렇게나 호전이 늦는 황후는 당신이 처음일 겁니다!’

그러더니 하루건너, 하련솔이 가까스로 쾌차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다시금 교태전을 찾았다. 침의 차림새에 머리만 겨우 빗고서 하련솔은 다소 민망하게 그를 맞이했다. 하필 도승지가 온 시각이 점심시간이라,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잣죽을 받은 참이었다.

머쓱하니 눈치를 살피면서도 하련솔은 홀로 식사를 시작했다. 도승지는 별다른 꾸중이나 혀 차는 소리 없이, 오히려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이며 하련솔을 구경했다. 그 모습이 애초에 하련솔의 식사 동무가 되어 주려 방문한 사람 같았다.

‘고서를 다 뒤져 보니 말입니다. 하련솔 님보다 더 개화병 증세가 악질이었던 무화가 조선 시대에 세 명, 고려 시대에 또 다섯 명 있더라 이겁니다. 개중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어느 무화는 궁으로 오던 길에 객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가장 호전이 늦는 무화‘는 아닙니다.’

수염 까끌한 턱을 매만지며 읊는 말에 하련솔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신… 신기하네요….’

‘대답하지 마십시오. 목이 죄 쉬어 버려 듣기 힘듭니다.’

‘…….’

‘이렇게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는 게 정답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대답하지 말라는 그의 말대로 하련솔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자 도승지가 가볍게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지난번 지어 드린 한약은 몸에 잘 맞았습니까? 매일 챙겨 드셨다면 슬슬 동이 나야 할 때입니다.’

끄덕끄덕.

입 안의 잣죽을 느릿느릿 씹는 하련솔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를 한참, 도승지는 자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새로 한 첩 짓는 중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다음번엔 약을 갖고 다시 들를 테니, 더 건강해져 계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끄덕끄덕.

그렇게 고갯짓 두 번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1월의 첫발자국에 하련솔은 아버지와 재회했다. 그들 재회는 그러나 다소 뜻밖이었다. 아버지를 대하는 하련솔의 태도에는 순수한 반가움만이 가득했지만, 아버지는 몹시 어색하고 멋쩍은 태도로 하련솔을 대했다. 교태전의 응접실에서 만나 깊은 포옹을 나누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밖에, 살아온 이야기며 부자간의 공백을 채울 만한 대화는 없었다.

시종이 내어 온 찻잔에는 입도 대질 않고 아버지는 응접실을 떠났다. 오늘은 바쁜 날이라 볼일이 많다는 변명과 함께였다. 그 말에 하련솔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도승지의 조언을 기억해서였다.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라던 그 조언 말이었다.

화려한 응접실에 혼자 남아, 하련솔은 저와의 재회보다 더욱 중요하고 바쁜 일이 있다는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낯설 만큼 많이 늙어 버린 그의 얼굴을 가만히 곱씹기도 했다. 그래 봐야 외모의 차이는 주름의 깊이와 머리칼의 새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련솔에게 있어, 아빠는 그저 아빠. 여전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30분이 흐른 뒤였다. 하련솔은 작게 탄식했다. 기껏 준비해 둔 선물을 건네주질 못했단 걸 깨달은 것이었다.

갈비와 제철 과일, 약과가 든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 나온 하련솔이 발견한 건 제 아버지가 아닌 도승지였다. 그는 얼이 빠진 하련솔을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곤 조금 전 당신의 아버지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분은 당신과 아주 비슷하고 참 좋은 사람이더라 칭찬을 건네주었다.

하련솔의 아버지와 동년배인 도승지는 그와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뜻밖에, 도승지는 하련솔의 아버지더러 교태전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제는 아들의 곁에서, 황제의 가족으로 함께 사는 게 어떠느냔 제안을 했다. 그 바람에 하련솔은 내심 놀라고 당황했다. 법도를 중시하고 깐깐하기로 소문이 난 도승지가 왜 제 아버지에게 그런 제안을 해 주었을까 싶어서였다. 더욱 뜻밖인 건 제 아버지가 그 제안을 거절했단 소식이었다.

‘맡은 바 직업이 있어 안 된다더군요.’

새 찻잔을 채운 녹차로 입술을 헹구며 도승지가 말했다.

‘그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라, 당장 그것들을 포기할 순 없다고 말입니다. 조그만 보육원의 부원장이랍니다.’

이번에도 하련솔은 아무 대답도 하질 않았다.

끄덕끄덕.

두 번의 고갯짓만 보인 하련솔을 향해 도승지는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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