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5
어째선지 그날 이후로 하련솔은 도승지의 잔소리를 들어 보질 못했다. 오히려 크게 호의적으로 돌변한 그와 자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이따금 홍문관 부제학이라는 나이 든 교수를 데려와 사이좋게 차를 마셨고, 아주 가끔 하련솔이 입궁하기 전 있었던 사소하고 웃긴 일화를 전해 주기도 했다. 종국에는 아예 궁궐살이에 도움이 될 법한 지식을 전수해 주겠다며 과외 선생으로 나섰다.
덕분에 하련솔은 ‘마마’라는 호칭이 지닌 무게를 잘 알았다. 오직 황제, 혹은 왕의 직계 가족만이 그 호칭을 달아야 옳은데, 무화들이 함부로 자신들을 그리 불렀다면 지적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단까지 치냐.’
하련솔은 콧김을 흥 내쉬었다. 어린 친구들이 저들끼리 장난스레 서로를 추켜올린들 작금의 황실이 얕보일 리가 없고, 제 입지가 흔들릴 일도 없음을 알기에 그랬다. 그러나 머리칼의 색은 염색으로 가린들 하얀 수염까지는 어찌하지 못하는 노신사인 도승지의 생각은 달랐다. 젊은 황제는 물론이고 하련솔도 살아 보지 않은 세대를 아는 그는 경계를 철저히 하고 규율을 정직하게 따르는 하루하루가 평탄한 역사를 만들고 현시대를 지켜 준다고 믿었다.
어린 무화들에 대한 제 친근감보다는 도승지의 신념이 중요하다 여기기에, 하련솔은 고개 끄덕이곤 말았다.
“그래, 그래.”
그러자 초롱이 픽 웃었다. 홀로 생각에 잠겨 침묵하던 제 무화님이, 딱 맞는 볼끼에 볼살이 눌려서는 고개 끄덕이는 모습이 퍽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뭐가 ‘그래, 그래.’예요?”
장난스러운 어투로 초롱이 물어도 하련솔은 하하 웃을 뿐이었다.
이내 하련솔의 시선이 문정궁 바깥의 먼 차도로 향했다. 그를 따라 초롱도 고개를 돌려, 새하얀 밴 한 대가 규정 속도에 맞추어 느리게 지나는 모습을 보았다. 같은 기종의 차를 타고 떠난 이를 알기에, 초롱은 말없이 손을 모아쥐고 미소 지었다.
정차하는 일 없이 흰 차가 모습을 감추었고,
“후우….”
하련솔은 입김을 내뱉는 척 한숨 쉬었다.
그간 하련솔이 예비 황후 자리에 머무르며 황제와의 결혼을 미뤄 온 이유가 그, 하얀 차를 타고 바람처럼 떠난 무화, 이차혁에게 있었다. 그가 없는 결혼은 이림범도 하련솔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개인적인 것이 못 되는 국혼이래도 가족 없이, 친구 없이 벌이고 싶진 않아 그랬다.
이차혁이 돌아오거든, 그때 식을 올리기로 언약을 맺던 날에 이림범은 제 동생이 금세 귀국할 줄 알았었다. 치료제의 효과가 아무리 좋아 봐야 무화의 개화병 증세를 완전히 누그러뜨릴 순 없으리라 짐작한 결과였다.
제 연락만을 기다리는 형제에게 이차혁은 호주 땅을 밟은 지 한 주는 더 지나서야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곤 제 어머니의 상태가 아무래도 좋진 못하다며, 저는 하늬안의 장례를 치르고 그녀를 먼 땅에 묻어 준 뒤에 돌아가겠노라 말해 왔다. 그 바람에 이림범은 심기가 상한 듯하면서도 기쁜 듯, 아주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녀석에게 치료제가 아주 잘 든 모양이라며 말이었다. 덕분에 그와 하련솔의 결혼은 차일피일 밀렸다.
어찌 되었건 홍문관에는 희소식이었다. 이차혁이 임상 실험 참여자로 나서 준 덕분에, 또 그의 몸에 치료제가 아주 잘 통했기에 부제학 교수는 무척 행복했다. 해외 출장을 마다하지 않은 직원들에 따르면 이차혁의 개화병은 어느 정도 나빠지는 듯하다가 사나흘을 기점으로 더는 심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주가 더 흐른 뒤에는 미약하게나마 차도를 보였다. 주로 휠체어에 앉아 생활해야 하긴 했지만, 노력한다면 홀로 일어나 짧은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외의 부작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약효로 인한 극심한 졸음이 전부였다.
홍문관 직원들이 건네 온 소식은 문정궁 전체에 빠르게 번졌다. 그를 따라 치료제를 복용하고 싶다며 나선 무화가 다섯 있었다. 아청원도 그랬고, 해은해도 그랬다. 개중 네 사람은 크게 효능을 보진 못했으나 아청원은 달랐다. 극심하던 열병을 떨친 것만으로도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황제는 그런 아청원을 일종의 본보기 삼았다. 개화병에 걸려 입궁하던 당시 아청원은 대학교 졸업반이었는데, 세상살이를 뒤로하고 무화가 되면서도 그녀는 자퇴 대신 휴학을 선택했었다.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인데 아쉽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날 그녀가 남긴 미련은 뜻밖의 기회로 돌아왔다. 대학교를 마저 다닐 수 있게끔 황제가 특별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더불어 적정 기준 이상으로 치료제의 효과를 본 무화에게는 시종을 동반한 짧은 외출을 허락했다.
요즘은 과반수의 무화가 치료제 복용을 희망했다. 홍문관에서 하루빨리 치료제를 더 만들어 주기를, 명단을 적어 놓고 줄을 지어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오빠!”
더럭 끼어든 큰 소리가 침묵을 싹 걷어 냈다.
대신에, 하련솔과 초롱,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앉은 누런 개는 동시에 큰 소리의 발원지를 찾았다. 차량 및 외부인 출입 통제선을 지나 달려오기 바쁜 조그마한 인영이 둘 있었다.
“솔이 오빠아!”
두 번째 이어지는 외침에 당황한 듯 초롱이 근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정문을 지키는 경호 직원 둘이 멋쩍게 얼굴을 굳힐 뿐, 큰 관심은 쏠리지 않았다. 하련솔은 벤치에서 일어나 저를 ‘오빠’라 부르는 어린 무화를 반겼다.
“원아. 해야.”
“우리 마중 나온 거예요? 너무 좋아!”
목청 크고 해맑은 이는 아청원이었다. 그녀 곁에 나란히 뛰는 이는 당연하다는 듯 해은해였다. 아청원의 계절학기 수업이 끝날 시간에 맞추어 마중해 온 모양이었다.
하련솔이 그녀들을 반기기도 전에, 초롱이 그의 앞을 슬며시 막아섰다.
“흠, 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두 무화를 세워 두고, 초롱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궐 안에서는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뒷짐을 지고서 초롱이 건넨 경고는 제법 양채림 상궁을 닮아 있었다. 그녀 앞에서 해은해는 ‘아’ 하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아청원은 해맑기만 했다.
“아직 문정궁 들어가기 전인데요? 그죠, 솔이 오빠!”
그러곤 하련솔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 가방을 벌컥 열었다. 코바늘로 뜬 망태기 가방 안에는 한 권의 책과 인형 형태의 필통, 작은 게임기와 텀블러, 그리고 조그마한 옷이 들어 있었다.
“전철 역 앞에서요, 강아지 옷을 팔더라고요! 너무 귀여워서 하나 샀어요. 더덕이 선물이에요!”
그러면서 아청원이 꺼내 보인 옷은 유아용인지 반려견용인지 불분명한 치수의 한복 저고리였다. 그 모양이 워낙 귀엽고 앙증맞아 하련솔은 정신이 쏙 팔려 버렸다. 당장 더덕이에게 입혀 보자며 야단인 아청원을 따라 하련솔도 홀린 듯 더덕이를 벤치 위에 앉혔다. 빳빳한 한복 저고리에 ‘복’ 자가 덩그러니 쓰인 배낭 형태의 복주머니를 등에 메 주자, 더덕이는 수제비 같은 귀를 뒤로 젖히며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제 나름대로는 싫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못마땅한 표정만으로는 그 귀여움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아, 진짜 귀여워.”
“잘 어울려, 잘 어울려! 도련님 같아!”
꺅꺅, 와와, 소리치는 세 사람의 틈바구니에서 더덕이는 저를 도와줄 구원자를 찾으려 했다. 세모나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린 끝에 더덕이의 시선이 향한 곳엔 초롱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법도 운운하던 그녀의 손엔 휴대폰이 들렸다.
“정말 귀엽습니다!”
찰칵, 찰칵… 휴대폰 카메라 셔터음 끝에 더덕이가 내신 콧숨이 흥… 가벼웠다.
흥겨운 두 무화와 엉거주춤 걷는 개, 그리고 핫팩을 꺼내어 건네주는 시종을 옆에 달고 하련솔은 문정궁으로 돌아갔다. 문턱을 넘기 직전에 그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이어지는 길목에는 그러나 겨울만이 존재했다.
더는 기다리는 이가 오지 않기에, 하련솔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
이림범은 근래 스스로가 토라진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가, …아니다. 하고는 생각을 고쳤다. ‘어린애’라는 표현은 그 자신에게 쓰기엔 적절치 못했다. 유년기 그는 토라지는 종류의 가벼운 감정을 느낄 줄 모르는 목석이었으니 말이었다.
요즘의 이림범은 그 시절의 ‘아이’와는 사뭇 다른 어른이었다. 그는 자주 토라졌고, 투정했다. 불만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애정도 과해졌다. 두 감정이 함께 다닌다는 사실을 그는 새로이 배웠다. 그의 불만은 죄 애정에 기인했다.
오늘 조회는 평소보다 훨씬 길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1시가 되도록 늘어지고 또 늘어졌더랬다. 이림범은 그 점에 대해선 큰 불만이 없었다. 열정적인 공신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입씨름을 벌인 장본인이 그,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회를 갈무리하고 집무실을 지나 전각을 빠져나온 순간에는 심기가 삐뚜름해졌다.
노란 고양이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잡고 노는 길목에는 줄지어 선 무화가 여럿이었다. 이는 ‘영화의 날’마다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기린관으로 향하기에 앞서 이림범은 여러 무화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으므로. 저를 기다리는 작은 무리야 존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무리에 하련솔이 끼어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힘없는 햇볕 대신 찬 기운이 가득한 야외에서, 그것도 옆자리에 선 무화의 두루마기 코트 매듭이나 지어 주며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