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10화 (126/135)

외전 10

그에 침전의 시종들과 당직을 서던 초롱, 도롱이 각기 황제와 무화에게 입힐 옷을 챙겨 뛰어왔다. 이림범은 제 옷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하련솔을 무장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황제가 직접 옷을 받아다가 한 겹 두 겹 입혀 주니 초롱과 도롱은 할 일이 없어졌다. 대신에 그들은 제 무화님의 해맑은 얼굴과 미소를 감상하며 따라 웃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나 먼저 정원으로 나섰다.

야밤에 이루어진 산책은 그다지 점잖지 못했다. 보는 눈이라고는 입 무거운 시종의 것뿐이라, 이림범에게도 하련솔에게도 체통 따위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갓 쌓인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하련솔은 두어 발짝 뛰다가 느릿느릿 제자리걸음 하길 반복했다. 그러곤 저 멀리, 초롱과 도롱이 미리 뭉쳐 놓은 눈 뭉치를 발견하곤 하하 웃었다.

시종들이 작은 눈사람의 재료 삼으시라고 뭉쳐 놓은 눈 뭉치는 하련솔의 손에 들어가 무기가 됐다. 어린 날 고야읍의 소년이 그랬듯이 하련솔은 눈 뭉치를 덥석 집어 들고는 힘주어 집어던졌다. 허공을 느리게 가르며 날아간 눈은 팍 소리를 내며 이림범의 가슴팍에 부딪쳤다.

“하하! 맞혔다!”

하련솔이 배를 잡고 킥킥 웃었다. 황제를 향해 던진 눈팔매질에 침전의 시종들은 당황하여 사색이 됐다. 초롱과 도롱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림범이 폭소했다.

“형. 지금 해보자는 거야?”

완전 무장한 탓에 몸이 무거워, 뒤뚱뒤뚱 도망치는 하련솔을 향해 이림범은 순식간에 다가섰다. 하련솔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고 번쩍 집어 들기 위해서였다. 하련솔은 두 발을 동동 구르며 크게 웃더니, 이림범의 침의 안에 새 눈뭉치를 쑤셔 넣었다.

“아!”

입을 크게 벌리며 이림범이 하련솔을 내려놓았다. 제자리에서 퉁퉁 뛰며 맨살에 스민 차가운 눈을 털어내는데, 하련솔은 세 번째 눈 뭉치를 그의 가슴에 던져 넣고, 목덜미에 폭 처박았다. 새하얀 눈이 설탕처럼 바스라지며 젊은 황제를 얼리고, 또 적셨다.

“아하하!”

하련솔이 개구쟁이 소년처럼 장난치는 동안 이림범은 당하기만 했다. 머리칼이 얼고 침의 속에 눈이 스민 채 그는 도망치는 하련솔을 쫓고 또 쫓았다. 눈송이로 범벅이 된 건 이림범이었으나 먼저 지친 이는 하련솔이었다. 마침내 눈 뭉치가 다 소진되고 체력이 바닥나 버려, 하련솔은 두꺼운 코트 차림 그대로 눈 쌓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신에 두른 옷이 어찌나 많은지 그 동작조차 느리고 굼떴다.

지쳐 헥헥거리는 그를 와락 끌어안고, 이림범은 두꺼운 옷으로 인해 두툼해진 하련솔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 푸우 입바람을 불자 지친 하련솔이 이마를 찡그리며 웃었다.

허공에 대고 발을 구르는 예비 황후를 안아 들고, 황제는 왔던 것처럼 다정하게 침전으로 돌아갔다. 야밤의 눈싸움은 시종들의 입술 안에 잠겼다.

***

“대령숙수씩이나 되는 요리사가 지어 준 밥을 먹는 개는 너밖에 없을 거야, 더덕아.”

초롱이 말했다. 오른손에는 세제도 수세미도 쓰지 않고 더운물에 뽀득뽀득 씻어 내린 세라믹 밥그릇을, 왼손에는 갓 수라간에서 받아온 작은 도시락을 든 채였다.

“음…. 바다 건너엔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는 말이야.”

그녀의 발치를 요리조리 알짱거리며 더덕이는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손짓으로 더덕이를 진정시키며 초롱은 도시락 속의 요리를 밥그릇에 옮겨 담았다. 제 평생에 개를 부러워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냥하고 권위 있는 보호자를 지닌 덕에 수발을 들 시종까지 기호 부품처럼 달린 더덕이는 남의 속도 모르고 기대감에 침을 흘렸다.

“자아, 착하지. 손!”

더덕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초롱이 제 손바닥을 뻗어 보였다. 더덕이는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헥헥거렸다.

“엎드려! 빵야!”

연이은 명령에도 개는 꿈쩍조차 하질 않았다. 김이 빠져 어깨를 늘어뜨리며, 초롱은 더덕이의 눈높이에 맞춘 작은 반상 위에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그 즉시 개의 주둥이가 밥그릇에 콕 처박혔다.

손바닥에 턱을 괴고서 초롱은 개의 식사를 구경했다. 수라간 하인들의 말에 따르면 ‘개는 어차피 맛도 못 느낀다’는데, 대령숙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러니 황제와 예비 황후가 사랑으로 키우는 잡종 개를 위해 정성 가득한 개밥을 차려 주는 것이었다. 내심 초롱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꼬리까지 붕붕 흔들면서 먹잖아. 그냥 사료로는 이렇게까지 신나 하지 않는다고.’

내일 대령숙수를 만나거든 더덕이가 아주 잘 먹더라 인사를 건네줘야겠다, 생각하면서 초롱은 밥그릇을 확인했다. 입맛을 찹찹 다신 더덕이가 반상으로부터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이내 초롱의 눈매가 좁아졌다. 밥그릇 중앙에 덩그러니 남은 캡슐형 영양제 두 알 때문이었다.

“어쭈. 약 안 먹어? 얼른 먹어. 진짜 안 먹어? 그럼….”

쓰읍, 공기 빠는 소리를 섞어 가며 초롱은 잔소리했다. 그녀의 지적에 더덕이도 한쪽 귀를 젖히며 제 밥그릇을 힐끔거렸다. 이내 초롱은 보란 듯 재빨리 밥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뺏어 먹는다!”

그러자 허둥지둥하며 더덕이가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남이 뺏어 먹는다니 마음이 급해진 듯, 더덕이는 캡슐형 영양제를 깨물고는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그러곤 쩝, 쩝 입맛을 다시금 다셨다.

말끔하게 빈 밥그릇을 확인한 뒤, 초롱은 누런 털과 흰 수염으로 덮인 개의 주둥이를 텁 잡았다. 그러곤 귀여운 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덕아! 건강해야 해. 네가 건강해야 우리 솔 님께서 마음고생을 안 하시지. 알겠지?”

대답 대신 더덕이는 초롱의 턱을 핥아 주었다. 찹찹, 제 턱과 입술을 핥는 개의 입에서 풍기는 오메가3의 향기가 비릿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초롱은 잔소리를 이어 나갔다.

“아휴. 맨날 아버지만 기다리시는데 어쩜…. 더덕이, 너는 절대 그러지 마라. 솔 님이 찾으실 때 재깍재깍 옆에 붙어 있도록 해. 혼자 두고, 기다리게 하고, 그러면 안 돼. 건강하게, 같이 오래, 20년… 아니. 30년은 더 살아야 해.”

긴긴 혼잣말 끝에 초롱은 힉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더덕이의 커다란 궁둥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자리에 선 흑피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목이 기다랗고 색이 검은 신을 따라 고개를 들자 무표정한 얼굴로 선 승정원 도승지가 그녀를 마주 내려다보았다.

“어, 언제 오셨어요…?”

당혹감에 목을 붉히며 초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승지는 대답 대신 안내를 부탁한다는 양 작은 턱짓을 보였다.

허둥지둥, 옷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초롱은 근방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곤 속엣말을 남몰래 구시렁거렸다.

‘또야, 또! 윤슬찬 이 자식 또 농땡이 부리러 간 거야?’

양 볼을 씰룩거리며 초롱은 손님 안내를 시작했다. 지금쯤 극장에 새로 들어온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있을 윤슬찬의 머리에 놓을 꿀밤 열 대를 마음 안으로 적립하기도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도승지 양반의 머리에도 꿀밤을 딱 한 대만 놓고 싶었다. 오늘 그의 방문이 벌써 두 번째인 탓이었다.

다섯 시간 전, 이른 아침에도 교태전을 찾아와 보따리를 전한 도승지였다. 긴 밤을 보낸 탓에 하련솔은 쿨쿨 잠을 자던 때였다. 예비 황후에게 먹일 한약을 새로 지어 왔다며 도승지는 묵직한 보따리를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초롱과 보리의 품에 떠넘겼다. 따듯하게 달여 먹이되 전자레인지 따위를 쓰진 말라는 잔소리와 함께였다.

그의 말대로 초롱은 받은 한약을 정성껏 끓이고 식혀 하련솔에게 내주었었다.

‘그래도 좋아하지를 않으시던데….’

하련솔이 그 한약을 입에도 대지 않고 내려놓은 건 그녀 잘못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 드셨으려나?’

마음 안의 미심쩍은 기운을 물리치기도 전에, 초롱은 하련솔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휙 등을 돌려 승정원 도승지를 올려다보면서 그녀는 손님이 아닌 제 무화 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솔 님. 도승지가 찾아와 뵙고자 합니다.”

하련솔의 대답은 늘 그렇듯 밝은 승낙이었다. 무뚝뚝하고 차갑고, 로봇처럼 딱딱한 이 양반의 방문이 뭐가 그리 달가울까. 알쏭달쏭한 솔 님의 의중을 궁금해하며 초롱은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교태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며 도승지는 그녀를 향해 말 한마디를 남겼다.

“차는 됐습니다.”

등 뒤에서 시종이 혀를 내두르건 말건, 도승지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며칠 사이 목이 더 야윈 듯하고 안색이 창백해진 하련솔을 살피는 것. 밤새 눈이 내리도록 차가워진 날씨에 추위를 느끼는지, 그는 방 안에서도 귀마개를 끼고 있었다.

“낯빛이 많이 나쁩니다.”

두 눈을 내리깔고 방석 자리에 몸을 앉히며 도승지가 말했다. 그에 하련솔은 왼손 손등으로 제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안색을 지적받는 일이 워낙 흔한지라, 혈색을 되찾아 보려는 동작도 무척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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