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질 않아, 도승지는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중앙 탁자 위에 흰 자기 그릇이 놓였는데, 속에는 한약이 가득이었다. 한 입도 마시지 않은 듯한 모양새에 도승지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본래 약을 가리십니까?”
“아. 아뇨, 아뇨. 잠깐 놔둔 거예요. 금방 먹을 거예요.”
“친절하려고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도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딱딱하게 돌아오는 즉답에 하련솔은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멋쩍게 답했다.
“저, 제가…. 지난번 약은 잘 먹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냄새가 좀… 달라서요. 멀미가 나서 잠시 미뤄 뒀어요.”
“흠….”
듣던 중 이상한 소리에 도승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하련솔의 체질에 완벽하게 맞추어, 지난번과 완전히 동일한 약재로 똑같이 지어 달라 주문한 한약이었다. 그러니 약의 냄새가 달라졌을 리는 없었다.
“체질이 달라진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순 없습니다.”
콧소리를 가볍게 흥 내쉬며 도승지는 제 두루마기 안을 뒤적였다. 그러곤 휴대폰을 꺼내어 연락처를 살폈다.
“홍문관 부학을 불러다가 마마를 살펴봐 달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의 거절을 예상했다. 여태껏 봐 온 바가 있어, 순둥한 예비 황후의 반응이 뻔했다. ‘네? 아니, 아니. 아뇨. 교수님한테 그러지 마세요.’ 하며 거절을 해 올 성싶었다.
한데 하련솔이 웃었다.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그에 도승지의 눈썹이 더욱 크게 꿈틀했다. 정말 건강이 크게 편찮은가, 혹여 말 못 할 통증이라도 있는가 싶어 큰 근심이 더럭 닥쳤다.
걱정으로 얼룩진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하련솔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더덕이랑 동생들 마중 산책을 나가느라 찬 바람을 자주 쐬어 그런 걸 수도 있어요.”
“…….”
“아, 어젯밤에 폐하와 눈싸움을 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눈싸움이요.”
도승지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눈에… 맞으셨습니까?”
젊은 황제 이림범과 예비 황후 하련솔은 풍채부터 체력, 힘, 손과 발의 크기가 전부 달랐다. 이림범은 기념일에 국궁을 쏘며 놀 정도로 대단한 사내였다. 팔과 어깨의 근육이며 기골이 어지간히 좋질 않고서야 국궁 활시위를 종일 당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하련솔은 어떠한가. 그의 건강 문제는 조회 때마다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입씨름 재료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꼬집어 논하던 이가 바로 자신이기에, 도승지는 양심이 따끔거렸다.
그런 하련솔에게 눈 뭉치를 던져 댔다면 젊은 황제의 양심은 지금쯤 닳아 빠지다 못해 걸레짝이 되었다고 봐야 했다.
“어…, 그런 건 아니고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련솔은 그런 이림범을 두둔하고 나섰다. 연신 ‘아니’라는 말만 반복할 뿐인 변호는 도승지의 마음 안에 작은 의심의 씨앗을 남겼다.
그러나 양심이 걸레짝인 이는 오히려 하련솔이었다. 승정원 도승지 앞에서 황제에게 눈을 퍼먹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그저 멋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릴 따름이었다.
“제 몸 상태는 아주 좋아요.”
말간 얼굴로 활기차게 뱉은 소리에 도승지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부제학은 불러다 드릴까요?”
가볍게 건넨 질문에,
“네. 그래 주세요.”
하련솔이 즉답했다.
“…….”
짧은 생각 끝에 도승지는 휴대폰을 두루마기 속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고개 숙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허리를 편 그를 따라 고개를 들어 보이며 하련솔이 말했다.
“혹시… 저희 아버지와 자주 연락하세요?”
난데없는 질문 앞에 도승지는 꼭 그다운 잔소리를 건넸다.
“‘저희’라는 말로 스스로를 낮추셔선 안 됩니다. 당신께서는 곧 품계를 초월할 몸입니다. 제 직급은….”
“정3품 당당관직이시죠.”
“당당관직이 아니라 당상관직입니다.”
“아.”
당상관직, 당상관직, 당상관직…. 하련솔은 들은 말을 세 번 되뇌며 다시 암기했다. 구시렁거리느라 뺨을 씰룩이는 그를 구경하는 도승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헛기침을 하며 그는 애써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예. 그분과는,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연락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럼 제 소식을 좀 전해 주세요. 아파서 죽어 가고 있다고요.”
“…아파서 죽어 가고 계십니까?”
엉뚱한 소리에 눈살을 좁히며 도승지는 하련솔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자 하련솔이 이를 보이며 히 웃었다.
슬슬, 도승지는 눈앞의 예비 황후를 대하기가 힘들다고 느꼈다. 처음 교태전에 들를 때만 하더라도 그는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며 일개 무화의 예절 선생 노릇이나 하려 했었다. 한데 그 일개 무화가 배움에 욕심 많고 적극적인 학생이라, 듣기 싫을 만한 지적이며 잔소리에도 기분 상하는 일 없이 이토록 잘 따라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요즈음 하련솔과 그의 관계는 단순히 예절 선생과 무화가 아니게 됐다. 그 앞에서 하련솔은 실없는 농담이며 사담을 자주 늘어놓았다. 아주 편한 태도로 아이처럼 키득키득 웃음도 자주 지었다. 어른 마음을 아주 약해지게 하는, 착한 개구쟁이 같은 미소였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도승지가 말했다.
“그 정도 부탁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한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련솔의 아버지라는 사람과 그는 사실 자주 연락하는 사이였다. 정확히는 잦은 연락을 받는 입장이었다. 교태전에 처음 방문하여 제 아들을 잠깐 보고 떠나던 날, 도승지는 그에게 길을 알려 주고 몇 마디 안부를 물었다. 돌이켜 보면 그 인사가 작은 불씨였다. 하련솔의 아버지는 도승지를 길목에 세워 두고 속사포처럼 제 사정을 줄줄 읊는가 싶더니, 아예 연락처를 받아 갔다. 그러곤 이틀에 한 번 꼴로 제 아들 소식을 물어 왔다.
그토록 제 자식에게 관심도 많고 애착도 깊은 사람이 구태여 만남은 회피하는 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도승지는 그들 부자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하련솔의 거짓말을 전달하기에 앞서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를 불러들이려는 그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런데 뜻밖에, 언제고 반듯반듯하니 진실만을 말하던 하련솔의 입이 딱 다물렸다. 속을 알기 힘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침묵하기를 한참, 하련솔은 이렇게 답했다.
“알려 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 그래요. 이왕이면… 부제학을 만나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만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죠?”
“예. 그리하겠습니다.”
들은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도승지는 대답을 먼저 했다. 빠른 대답은 생각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를 맞닥뜨린 순간마다 보여 온 오랜 습관이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 뒤 그는 교태전 침실을 나섰다. 한 손에는 한약이 든 그릇을 쥔 채였다. 귀한 약을 전부 정원 바닥에 부어 버리고 그릇만을 돌려주자, 초롱은 도승지를 미친놈 보듯 흘겼다.
싸늘해진 초롱의 배웅을 받아 밖으로 나선 후에도 도승지는 침착했다. 정확히는 침착하려 노력했다. 한 발 두 발 성급함 없이 반듯하게 디디며, 평화로운 날 마실 나온 사람처럼 느리게 걸었다.
홍문관 건물에 다다라 도승지는 승강기를 잡아탔다. 그러곤 대뜸 두 눈을 휘둥그렇게 크게 떴다. 무얼 깨달은 사람처럼, 혹은 아주 더운 사람처럼, 굵은 목덜미가 서서히 붉어졌다.
그런 도승지를 향해 저 멀리서 홍문관의 젊은 직원들이 팔을 흔들어 댔다.
“저, 잠시만요! 같이 탈게요!”
아직 9품도 달지 못한 인턴 직원들이었다. 저희를 기다려 달라며 달려오는 그들을 눈앞에 두고, 도승지는 닫힘 버튼을 눌렀다. 한 번도 아니고 따닥따닥, 따닥, 세 번을 눌러 댔다.
이내 얼이 빠진 도승지를 실은 승강기의 문이 닫혔다. 코앞에서 닫혀 버린 문 앞에 남은 인턴들의 얼굴에 사색이 번졌다. 개중 가장 키가 작고 어린 직원은 뒤로 두어 발짝 물러났다. 그러곤 어깨에 걸고 있던 배낭을 앞으로 돌려 매고, 비상구 계단을 향해 뛰었다. 당황한 채 얼어 있던 인턴들도 그녀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인턴들의 발소리와 함께, 작은 소란이 홍문관에 불어왔다.
***
빠른 걸음으로 허둥지둥 교태전에 들어선 중년의 사내는 귀한 나무가 심긴 정원이며 아름다운 처마, 한겨울에도 햇볕이 열 갈래로 쏟아져 들어오는 복도, 화려한 그림과 청자에는 눈길 한번 주질 않는 유일한 손님이었다. 초롱은 그처럼 모시는 재미가 없는 손님은 처음 보았다.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빳빳한 정장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대던 첫 만남에도 그랬지만, 회색 청바지에 낡은 황갈색 재킷을 입고 등장한 오늘은 더욱이 그러했다.
어디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어 말 한마디 뱉지 않는 그에게 초롱은 이번에도 자기소개를 하지 못했다. 덩달아 바빠진 걸음으로 그를 그의 아들이 있는 방, 교태전의 침실로 안내할 따름이었다.
커다란 문을 열어 주자 손님은 말없이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몸에 밴 동작 그대로 초롱은 고개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소리 없이 스르륵, 문을 닫은 뒤 그녀는 괜스레 이마를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혼잣말했다.
“정말 솔 님과는 딴판이시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