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13화 (129/135)

외전 13

변주의 끝은 원곡이라던가. 지난 한 달간 빨강, 파랑, 진남색, 하늘색, 연두색, 보라색에 이르기까지 선명하고 고운 빛깔의 원단에 화려한 자수가 놓인 옷만 주야장천 입어 온 하련솔이었다. 어여쁜 그의 외모를 과시하길 좋아하는 황제, 이림범의 선택에 맡긴 꾸밈이었다. 오방색을 빠짐없이 즐기고 난 오늘, 하련솔은 아무런 특징 없는 의상을 찾았다. 옅은 노랑 빛깔의 외투는 염색하지 않은 원단으로 고스란히 지은 옷처럼 보였다. 몸매가 가려질 만큼 통통한 외투를 껴입고 각진 남바위를 쓴 그 모습이 요구르트병 같았다. 예비 황후라는 남자가 수수하고도 귀여운 모습을 하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키우는 개를 향해 속닥이는 모습을 초롱은 좋아했다.

그녀의 무화님은 참 상냥하고 정이 많다. 철없는 개가 어정쩡한 자세로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제가 보기엔 웃기기만 한데, 하련솔은 동물이 겪는 불편을 보고 불필요한 사과를 한다. 아마도 그게, 황제의 말씀조차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 더덕이가 그만큼은 충직하게 따르는 이유일 것이었다. 동물은 저를 사랑해 주는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니까 말이었다.

“솔 님. 더덕이도 이해할 거예요. 눈밭에 염화 칼슘을 뿌려 놔서 오늘은 꼭 신발을 신겨야 한다잖아요. 보기에 귀엽기도 하고 말이에요.”

초롱의 말에 하련솔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귀엽기는 해. 이따 사진 좀 찍어야겠어. 그치, 더덕아?”

그가 중얼거릴 때마다 턱 아래에 매달린 남바위 매듭이 달랑달랑 흔들거렸다.

그렇게 종알종알 수다를 떨며 도착한 정문 너머는 온통 새하얬다. 머리에는 포근한 이엄을 쓰고 소매에는 토시를 단 직원들이 쌓인 눈을 밀어 치우느라 바빴다. 그 모습이 백지 위에 구불구불한 황토색 길을 만드는 듯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 하련솔의 자리로 반쯤 기정사실화된 야외 벤치, 닥나무 곁에 인영이 둘 있었다. 그 모습에 초롱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리에 앉아 허공에 대고 두 발을 흔드는 이는 아청원과 해은해였다. 평소보다 일찍 문정궁에 도착해 놓고도 처소로 들어가질 않고, 모름지기 마중을 나와 줄 하련솔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저렇게나 우리 솔 님을 좋아해서 어떡하면 좋지? 몰래 짝사랑이라도 하면 곤란한데….’

지나간 계절에는 제 무화님에게 함부로 구는 치들이 미웠었는데, 이제 초롱의 고민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순진한 무화들의 태도에 초롱은 콧김을 크게 내쉬건만 하련솔은 장갑 낀 손을 크게 흔들며 그녀들을 반겼다.

오늘은 어땠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된 수다는 닥나무 곁에서 오래 이어졌다. 초롱은 제 목도리를 아래로 쓱 내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추위의 정도를 가늠해 보려 했다. 제가 느끼기에 코가 살짝 시릴 정도이니, 하련솔의 다리에는 조만간 쥐가 날 성싶었다.

때문에 흠흠, 목 가다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솔 님. 그만 들어가시는 게….”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그들을 잡아 세웠다.

“형.”

귀를 간질이는 음성은 신기루처럼 멀찍했다. 차라리 눈을 밀어 치우는 쓰레받기 소리가 더 클 정도였다. 그래도 하련솔의 귀에 가 닿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목을 뻗으며 하련솔은 길목을 바라봤다.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이 작게 보였다. 궐 밖으로 외출한 무화가 더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던 하련솔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내 그의 입술이 호를 그리며 벌어졌다.

“환아…?”

뒤이어 하련솔은 서너 발짝 길목 아래로 움직였다. 초롱이 그런 그를 붙잡으려 팔을 뻗었다. 다행히도 하련솔보다는 ‘환’의 걸음이 훨씬 더 빨랐다. 왼손에 쥔 목발을 땅에 댈 새도 없이, 환은 거의 뛰다시피 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뒤늦게 통증을 느낀 듯 왼 다리를 절뚝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함박웃음 끝에 반쪽짜리 보조개가 보기 좋게 쏙 파였다.

“형!”

부쩍 커진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요? 나 오는 줄 알았어요?”

“모, 몰랐어….”

크게 웃음 지으며 하련솔은 그의 손부터 맞잡았다. 몹시 반가운 한편 어리둥절한 순간이었다.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하련솔이 물었다. 그의 어깨너머에 선 두 무화는 저들끼리 허둥지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 그들은 웃는 낯인 하련솔을, 그리고 계절이 지나도록 문정궁을 떠났던 무화, 이차혁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반면 하련솔은 남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이라, 제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았다. 이차혁이 아무런 연락도 기별도 없이 문정궁으로 돌아왔음은,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에겐 알리지 않고 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단 의미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하련솔은 입 안이 씁쓸했다.

전대 무화 하늬안이 저지른 잘못은 오직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건만, 죽은 이는 짐을 들 수 없었다. 그녀가 버려 놓고 간 짐을 생각하면 시의적절하게 명줄이 끊긴 비극조차 도피의 일환처럼 느껴졌다. 돈이 유산이듯이 빚도 유산이었다. 죄책감이라는 짐을 도맡아 정리하는 이는 결국 이차혁이었다. 먼 친척이 함께했다고는 하나 생면부지인 데다, 나고 자란 한국이 아닌 낯선 타국에서, 딱 그만큼 낯설게 된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그의 마음이 오죽 힘들었을까 싶었다.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하련솔은 제 질문을 없던 것 취급했다. 하늬안에 대해서라면 어떠한 말로라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기쁜 낯으로 이차혁을 반겨 주고자 노력했다.

“보고 싶었어. 어서 와, 환아.”

추억이 담긴 이름에 이차혁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하련솔의 두 손을 제 손안에 뭉치듯이 감싸 쥐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손으로 포옹하는 듯한 악수 끝에 이차혁이 물었다.

“형. 형은 좀 괜찮아요?”

요즘 하련솔은 반도에서 가장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치를 향한 걱정일랑 참 뜬금없고 이상했다. 효과가 보장되지 않은 약을 복용해 가며 해외에서 상을 치르고 돌아온 이가 묻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 나야 괜찮지. 내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

피식 웃으며 하련솔이 대꾸했다. 그러다가도 말간 얼굴에 작은 장난기가 번져서는,

“어마어마한 라이벌이었던 무화 이차혁이 떠났으니까,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싱글벙글 지냈지, 뭐.”

얄궂은 농담으로 이차혁을 폭소하게 했다.

이내 하련솔은 두 팔을 활짝 벌려 이차혁의 허리에 감았다. 힘을 주어 꼭 안아 주고,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리자 이차혁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한참을 웃은 끝에 이차혁이 속삭였다.

“그래요, 한동안은 그렇게 불러 줘요. 무화 이차혁으로요.”

귓가에 내려앉은 말에 하련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정한 포옹을 마치며 그는 이차혁의 두 눈동자를 빠르게 살폈다.

“왜? 빨리 예전 이름을 되찾고 싶진 않아?”

“치료제가 잘 들어서 좋긴 하지만요. 문정궁에서 나가고 싶진 않아서요. …난 좀 더 형들이랑 같이 살고 싶거든요.”

“어….”

아아, 하고 하련솔은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제 관자놀이를 퉁퉁 두드리며 미처 생각지 못한 법도를 다시금 곱씹기도 했다.

이차혁의 말마따나 그가 이림환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게 되면 그의 자리 또한 되찾게 될 터였다. 오래전 둘째 태자였던 그의 자리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친왕이 다 되었다. 황제의 유일한 직계 혈족이자 가족이자 형제로서 인정받는 일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모든 자리에는 그에 어울리는 의무와 규율이 있게 마련이었다. 친왕이 되자면 그는 당장 문정궁을 떠나야 했다.

황제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되어서는 황제와 같은 궐내에 살 수 없다. 같이 여행을 갈 수도 없고 같은 차를 탈 수도 없다.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재해가 벌어지거든 그들은 각자 다른 길을 정해 대피해야 했다. 혹여 둘 중 누구 하나에게 사고라도 일어나 사망에 이르더라도, 다른 한 사람은 생존하여 황제의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응, 그걸 생각 못 했네….”

다소 시무룩해진 태도로 하련솔이 중얼거렸다. 그 앞에서 이차혁은 그저 싱글벙글했다. 이름을 잃고 무화가 되어 6년을 허송세월한 그였다. 조금 더 한량 노릇을 한다고 해서 크게 나빠질 것도 없었다. 돌아온 문정궁에는 저를 반겨 주는 하련솔이 있고, 또 폭풍 같은 잔소리를 쏟아 낼 이림범이 있는데 떠날 이유가 없었다.

“이거 어떡하죠? 형의 숙적, 무화 이차혁이 돌아와 버려서?”

그러면서 그는 목발을 팔뚝 밑에 단단히 괴고, 두 손바닥을 턱 아래에 모아 대며 꽃받침 얹은 시늉 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사내가 제 얼굴을 여우처럼 뽐내는 모습에 하련솔은 실소했다.

“그럼…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래? 언제까지 무화로 지낼 순 없잖아.”

저보다 더 제 내일을 걱정하는 하련솔을 보며 이차혁은 좌우로 몸을 흔들거렸다. 게으름 피우는 어린애처럼 건들거리며 그가 속삭였다.

“흠, 글쎄요…. 이림환이라 불리면서 문정궁에서 살 수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그래? 그게 뭔데?”

“황위를 이을 적자가 하나 더 생기면 그만이죠.”

“어, 그 말은….”

하련솔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무어 해 줄 답이 있는 양 입을 열었다가, 다시금 다물었다.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표정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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