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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14화 (130/135)

외전 14

찰나의 기색에 불과하더라도 하련솔의 표정이고 눈빛이었다. 이차혁은 그런 하련솔을 놓칠 남자가 아니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는, 왜요, 형? …그렇게 묻고자 입을 열었다.

“야, 이 자식아.”

그러나 쏟아지듯 다가온 목소리는 이차혁의 것이 아니었다. 훨씬 낮고 굵은, 커다란 성량으로 더럭 뱉은 말에 두 무화의 고개가 동시에 움직였다. 그리고 이가 보이도록 웃어 보였다. 목소리만큼 큰 존재감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는 다름 아닌 황제, 이림범이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초롱은 재빨리 움직였다. 닥나무 옆에 보릿자루처럼 선 아청원과 해은해를 궁 안으로 손짓하여 보냈고, 황제를 향해 꼬리 치며 리드 줄을 당기는 더덕이를 힘껏 안았다. 그러면서 힐끔 살핀 황제와, 솔 님과, 이차혁의 모습이 참 어여뻤다. 어느 형제, 또 어느 친우의 재회가 저토록 극진할 수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절로 들 만치 다정한 태도로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키 큰 형제 사이에 콕 파묻혀 하련솔은 흐흐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밤 침상에 누울 때에도 잠들기가 즐겁겠구나 예감했다. 웃는 얼굴로 즐겁게 잠드는 밤은 잦고 잦았지만 그는 그 밤들 중 무엇 하나 여상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행복한 오후가 저무는 시간이면 하련솔은 매 순간을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에게 닥쳐온 폭풍 같은 변화를 누설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오늘 이 순간이 워낙에 완벽해서, 아직은 새 소식이 발 디딜 틈 없다고 생각하기에….

***

요즈음 이차혁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대단한 다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거짓으로 꾸며 낸 ‘무화 이차혁’은 더는 필요 없는 역할이 되었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은 열망에 그를 애태우게 하던 어머니는 타국의 묘지에 묻혔다. 제 형제, 이림범이야 말로는 ‘혁아’ 하면서도 태도는 ‘환이’를 다룰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본래부터 그의 괴리감을 덜어 주던 존재였다.

이제 이차혁은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저 그렇게 보는 법을 배웠다. 이림환이 되었든 이차혁이 되었든 그는 그였다. 이름 없는 아이이건 대단하신 이림범이건 그저 그인 제 형제처럼, 유령 인간 한솔을 거쳐 하련솔로 돌아온 첫사랑 이은재처럼.

그가 ‘이림환’이라는 옛 이름에 집착하지 않게 된 데엔 문정궁의 풍경도 크게 한몫했다. 간만에 돌아와 마주한 문정궁은 지난날 그대로였다. 언제나 같은 풍경, 같은 표정을 짓는 이 궐을 이차혁은 애증해 왔다. 사무치게 슬픈 날에도, 배가 당기도록 기쁜 날에도 문정궁은 그저 무심했었다. 저에게 감옥일 때에도 유일한 안식처일 때에도 이 궐은 평생 친해질 수 없는 남 같았다.

오늘, 다시 만난 겨울의 문정궁이 그는 좋았다. 흰 눈에 덮여 고요한 궐 전체가 후련하면서도 쓸쓸한 제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듯 보여서였다.

창밖의 풍경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이차혁은 이림범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어머니, 하늬안에 대해서는 하련솔이 그러듯이 이림범도 묻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라는 사람이 없었다는 듯 구는 그의 태도가 이차혁은 고마웠다. 임종은 잘 지켜보았느냐고 물으면, 거짓말을 하기엔 염치가 없고 진실을 말하기엔 민망해서였다. 기껏 호주까지 따라가 곁을 지켰건만,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깊이 잠든 바람에 유언도 못 듣고 임종도 못 보았단 말을 어떻게 전하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이림범의 관심은 개화병 증세에만 쏠려 있었다. 여러 질문 앞에서 이차혁은 면접 보듯이 제 몸 상태를 알려 주어야 했다. 홍문관 직원들, 하다못해 박총명이 전한 상세한 보고가 있어도 참고만 할 뿐, 이림범은 이차혁의 상태를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길 원했다.

“이렇게 추울 줄 알았으면 좀 더 있다 올 걸 그랬어.”

긴 날숨을 후우 내쉬며 이차혁이 중얼거렸다. 투덜투덜 꺼낸 혼잣말에 이림범은 미간에 줄을 그었다.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마음대로 며칠쯤 더 머물렀다고 해서 내가 혼을 냈겠냐.”

무뚝뚝하게 돌아온 대꾸에 이차혁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간만에 개구쟁이 동생이 되어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형 때문이 아니라 솔이 형 때문에 온 건데?”

“…….”

“꿈에 솔이 형이 나와서 말이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니까.”

가볍게 이어지던 대화는 이림범의 표정이 굳자마자 그쳤다. 단숨에 딱딱해진 분위기에 이차혁은 아차 싶었다. 꿈자리가 희한하단 이유로 귀국을 결정한 제 선택이, 황제의 입장에서는 터무니없을 성싶었다. 제 어머니를 따라 미신을 믿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뒤늦게 이차혁은 허둥지둥했다. 과장되게 웃음 지으며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변명하듯 덧붙였다.

“내가 그런 걸 막 믿고… 그래선 아니야! 오해하지 마. 내가 솔이 형 꿈을 자주 꾸진 않아. 보통은 은재 형 꿈을 꾸지.”

그러곤 두 번째로 아차 싶었다. 지나치게 솔직했단 생각에 그는 윗입술을 움찔거리며 얼른 헛기침했다. 소음을 낸다고 해서 이미 뱉은 말이 지워지진 않지만, 민망한 마음에 별수 없이 그리했다.

다행히도 이림범은 이차혁이 하련솔의 꿈을 꾸든 이은재의 꿈을 꾸든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의 꿈을 꾸지 않는 게 이상하고 괴이쩍은 일이니 말이었다. 두 눈을 내리깔고서 그는 들은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단단한 얼굴에는 옅은 걱정만이 스며 있었다.

“신경 쓰지 마, 형.”

제 실언 때문에 괜한 걱정을 하나보다 생각하며, 이차혁이 말했다.

“아까 솔이 형 보니까 다 개꿈이었던 거 같은데, 뭘. 전보다 건강해 보이고 또 좋아 보이더라. 그리고 더덕이 살 많이 쪘던데? 순간 다른 개인 줄 알았잖아.”

화제를 돌려보려 가볍게 건넨 말끝을 이림범은 다시금 돌려놓았다.

“그럼 왜 꿈 이야기를 했어?”

“어? 뭐가…. 그냥 대화하다 보니까 말이 나와서 한 얘기지….”

“네가 생각할 때 뭔가 이상하니까 이런 대화를 하게 된 게 아니고?”

그의 집요한 눈빛에 이차혁은 벌써부터 넌더리가 났다. 저, 까만 눈동자에 담긴 탐구의 열정을 그는 지겹도록 잘 알았다. 이림범이 저런 눈빛을 하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면 누구라도 이길 수가 없다.

닥쳐올 패배를 예감하기에, 이차혁은 제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하게 될 속엣말이라면 애를 써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넌지시 운을 뗐다.

“곱씹어 보면 그게… 좀 이상하긴 해.”

“뭐가.”

제 형의 급한 성미를 알면서도 이차혁은 침묵했다. 입을 다물고 할 말을 골라내는 그를 향해 이림범이 또 한 번 물었다.

“뭐가?”

“…좀, 그….”

그 앞에서 이차혁은 괜스레 고개를 낮췄다. 이어서 제가 전할 이야기를 이림범이 어찌 생각할지 다소 걱정스러웠다. 주물 숭배와 미신을 혐오하는 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개 미신과 오래된 민간 신앙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온 궁궐을 박박 긁어 내어 낡은 부적을 죄 태우게 한 황제라도, 액운을 막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계동나례는 화려하게 열었다던 소식처럼 말이었다.

이림범은 고집이 셀지언정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알기에, 이차혁은 힘내어 말했다.

“내 생각엔 태몽 같아.”

“…….”

대답 없이 이림범은 미간만 움찔거렸다. 침묵하는 그 앞에서 이차혁은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가 뱉은 말이 저도 어이가 없고 웃긴다는 듯 연신 피식거렸다.

이차혁이 꾸었던 꿈인즉 이러했다. 꿈속에서, 그는 높은 산에 도착했다. 계곡물을 따라 산을 오르고 또 올랐는데, 너무나 높은 산이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왜 이리 힘이 들까?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제 몸에 줄이 칭칭 감겨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 줄이 저를 뒤로 팽팽하게 당겨대고 있었다.

그 줄은 워낙 강하고 튼튼하여 쉽게 끊어지질 않았다. 끊어 낼 수 없다면 끌고 가자는 생각에 그는 줄을 붙잡아 쥐고, 제 두 손에 휘휘 감았다. 그렇게 열 바퀴를 돌린 뒤에야 줄 끝에 매달린 생물이 보였다. 그것은 계곡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커다란 거북이였는데, 등딱지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꿈속에서 그는 거북이를 달고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정상이 보일 무렵에 그는 기운이 다 빠져 버렸는데, 반대로 거북이가 폭포수를 거꾸로 헤엄쳐 오르며 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줄에 매달려 가까스로 정상에 오르자 거북이가 제 품 안에 안겼다. 그러더니 딱딱한 등딱지를 벗어던지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자세히 보니 그 동물은 애초에 거북이가 아니었다. 그건 기다랗고 화려한 꼬리를 가진 용이었다.

산 정상에 혼자 남아 그는 지쳐 버린 채 고개 숙였는데, 품 안의 등딱지에 비친 제 얼굴은 그 자신이 아닌 하련솔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그 점에는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솔이 형의 꿈을 대신 꿔 주었구나. 그나저나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 이렇게 힘든 등산을 했다간 솔이 형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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