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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15화 (131/135)

외전 15

평소 같았더라면 꿈자리가 사납다 치고 넘길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은 깨고 난 뒤에도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기만 했다. 제가 잠든 사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단 걸 알고, 그녀의 장례식을 모두 치른 후에도 그랬다.

그래서 남은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빨리 귀국했다. 떠날 때엔 심각한 수준이었던 비행기 공포증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구름 위를 나는 내내 그의 마음 안에는 얼른 문정궁으로 돌아가서 하련솔을 보고 싶단 바람뿐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정문 앞에서 저를 반기는 하련솔은 걱정과 달리 멀쩡했다. 아주 행복해 보이고, 건강해 보이고, 좋아 보였다.

“…….”

긴긴 이야기를 끝내기가 무섭게 이림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차혁은 당혹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 기립했는데, 그의 형은 매정해 보일 정도로 빠르게 등을 돌려 자리를 비웠다. 이차혁은 그를 더러 어디를 가느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에 짧은 한숨을 쉬며 이림범을 따라나섰다.

두 형제가 달리다시피 걸어 도착한 곳은 교태전이었다. 마당의 눈을 밀어 치우던 시종 윤슬찬이 두 사내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젊은 황제를 향한 두려움 반, 돌아온 이차혁을 향한 반가움 반이 섞인 얼굴로 그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런 그를 향해 이차혁은 옅은 미소와 작은 손짓을 보여 주었다. 추위에 발긋해진 윤슬찬의 양손을 가리킨 것이었다. 황제가 교태전에 자주 들르고 그는 교태전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제는 손모아장갑이 필요치 않았다. 기다란 열 손가락 모두 구부러지는 일 없이 편안했다. 무화 자격이 아닌지라 개화병 치료제를 복용하지 못해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제 근황을 알아주는 이차혁을 따라 입꼬리를 올리려다가도,

“하련솔은 어디 있지?”

황제의 하문에 윤슬찬은 재차 허리를 꾸벅 숙였다.

“침실에 계십니다.”

재깍 돌아온 대답에 이림범이 발을 뻗었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움직이며 그는 침실로 향했다. 황제의 뒤를 바삐 쫓으며 윤슬찬은 의외의 말을 했다.

“폐하, 침실에 먼저 온 손이 있습니다.”

급히 전한 소식에 이림범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먼저 온 방문객이 있어 봐야 승정원 도승지겠거니 생각해서였다. 설사 도승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 누가 되었건 황제가 제 약혼자를 보겠다는데 만남을 방해할 순 없는 법이었다. 교태전의 침실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뜻밖에, 벌컥 연 침실 문 너머에 자리한 손님은 홍문관 부제학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을 하나로 땋아 내린 그 노인은 종이학 접는 할머니 같은 얼굴로 하련솔의 손을 잡고 있었다. 좌측에는 이미 사용을 마친 듯 꺼진 의료 기기가 놓였고, 병풍 주변에는 홍문관 소속 직원이 둘 보였다.

황제의 등장에 부제학을 비롯한 직원들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림범의 관심은 그러나 다른 이들에겐 가닿지 않았다. 그의 시선 끝에 자리한 이는 늘 그렇듯 하련솔이었다.

하련솔의 눈길 역시 이림범에게 가 꽂혔다.

“오셨습니까? 폐하.”

보는 눈을 의식하여 존댓말로 인사하는데, 그 태도가 졸린 사람 같기도 했고 놀란 사람 같기도 했다. 이림범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하련솔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가만 보니 졸린 와중에 놀란 모양새였다.

가만히 상황을 살피는 황제 앞에 부제학은 덤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무어라 말하고자 입을 열었는데, 그녀가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보다는 예비 황후의 만류가 더 빨랐다.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들 이만 돌아가 주세요.”

그에 이림범의 시선이 부제학의 얼굴로,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진료 가방으로, 다시 하련솔에게로 빠르게 옮겨 갔다. 잠시나마 그 눈짓에 묶여 있다 풀려난 사람처럼 부제학은 얼른 침실을 떠났다. 홍문관 직원들도 그녀의 뒤를 쫓아, 아주 무서운 것을 본 고양이와 같이 소리 없이 후다닥 침실을 비웠다.

그러나 교태전 밖으로 나서자마자 부제학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상기된 얼굴의 부하 직원들을 먼저 돌려보낸 뒤 그녀는 교태전의 담장 옆에 섰다. 잠시 후 저를 찾아 나설 황제를 짐작해서였다.

아주 좋은 소식이 생겼으니 아마 뛸 듯이 기뻐하시리라. 부제학은 그렇게 예상했다. 젊은 황제의 기쁜 모습을 상상하니 저까지도 흡족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도록 무화 하련솔과 결혼하겠노라고, 오직 그와 후사를 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황제임을 알기에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쁜 발소리가 들려왔다. 교태전의 정문을 지나 성큼성큼 빠져나온 이는 부제학이 예상한 것과 같이 이림범이었다. 부제학을 향해 가까이 다가온 그는 거의 코앞에 다다라서야 멈추어 섰다. 그러나 그 잘생긴 얼굴에 걸린 표정은 부제학의 예상과는 완전히 어긋났다.

얼음 송곳에 목을 찔린 사람처럼 낭패 어린 표정을 드러내 놓고, 황제가 물었다.

“개화병 환자가 출산하다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지?”

“예?”

난데없는 물음에 부제학은 뛸 듯이 놀라고야 말았다. 그녀는 그 질문이 걱정스럽다 못해 잔인하다고 느꼈다. 아껴 마지않는 무화가 임신을 하였는데, 기뻐할 새도 없이 죽음부터 상상하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당혹감은 아주 짧았다. 부제학은 얼른 표정을 고치며 놀란 감정을 추슬렀다. 어차피 그녀 앞에서 이림범이라는 사내는 단 한 번도 뻔한 황제였던 적 없었다.

“폐하. 어찌 그리 하문하십니까?”

부제학이 물었으나,

“대답해라.”

돌아온 것은 다시 하문이었다.

“하련솔이…. 솔이 형이 아기를 낳다가 다칠 확률이 얼마야? 죽을 확률은 또 얼마지?”

“폐하….”

눈썹 뼈가 자아낸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두 눈을 보자마자 부제학은 그가 저와는 다른 풍경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오늘 그녀가 마주한 것은 봄을 기다리는 겨울이오, 문정궁은 물론이며 온 국민이 반길 새 생명의 소식이나 황제는 달랐다. 누구보다 기뻐할 자격이 있는 그는 도리어 눈앞이 컴컴했다.

“형은 너무 약해. 밤바람만 맞아도 오한이 들고 조금 뛰었다고 몸살이 나는 사람이야.”

그 말에는 부제학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씨를 품은 이 결실의 빛이 바래지진 않았다.

“폐하. 하지만 저번에는…, 몇 달 전 조회에서만 하더라도 분명, 마마의 나이가 서른을 넘기 전에 일찍 후사를 보아야만 하겠노라 말씀하셨잖습니까. 마마는 올해로 딱 서른 살이 되셨습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부제학은 사실만을 말했다. 그녀의 설득이 길어질수록 이림범의 미간에 깊은 홈이 파였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어수선해진 눈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침내 이림범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의 마음 안에서 사무치는 문장은 아주 많았으나 순 뒤죽박죽이었다.

그때는… 하련솔과 몸을 섞기 이전이었다. 관계를 맺은 후 하련솔의 몸에 내려앉은 개화병이 얼마나 호전될지, 증세가 도로 악화하기까지는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던 때였다. …아니, 돌이켜 보면 성행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하련솔이 가장 극심한 개화병 환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림범은 그를 걱정하고 아끼며 가장 가까이에 품을 것이었다.

그때보다 지금 더, 어제보다 오늘 더 이림범은 하련솔을 사랑했다. 조회에서 후사 이야기를 즐겁게 읊어 대던 날에 그가 하련솔을 귀엽게 여겨 사랑했다면, 누구 앞에서도 쉽게 그에 관해 논하지 않게 된 지금은 하련솔을 존경하며 또 사랑했다.

오늘, 이림범은 하련솔에게 미쳐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후사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게 되었다. 지금 제 곁에 함께하는 하련솔,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행복은 한껏 차올라 가득했다. 오죽하면 제 하나뿐인 혈육, 이차혁이 궐을 떠났건 말건 크게 그리워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긴긴 번뇌 끝에,

“…정말 임신을 한 게 확실해?”

이림범이 물었다.

심각한 황제 앞에서 부제학이 허허 웃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실소를 옷소매로 닦아 내며 그녀는 주름이 파이도록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건 저보다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노인네 특유의 재치로 뱉은 말에도 이림범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낙담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에 부제학은 오히려 안심했다. 하련솔의 임신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기에 근심하는 황제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왔던 것과 같이 이림범은 뒤돌아 걸었다. 인사도 없이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제학은 소리 없이 웃었다. 제아무리 호랑이 같은 황제라도 이리 보니 어리기는 어렸다. 그녀의 눈으로 볼 때는 교태전의 주인이신 하련솔 역시 어리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서로 간에 나이 차이가 나다 보니 그는 황제보단 어른스러웠다. 아직 계획에 없던 임신 소식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금세 감정을 추스르고, 제 배 위에 손을 대고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었다. 그러곤 웃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았기에 부제학은 걱정일랑 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간 그 미소에는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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