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같은 미소를, 하련솔은 이림범에게도 보여 주었다.
“범아.”
그 앞에서 이림범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하련솔의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하련솔의 손을 잡고 하련솔의 얼굴을 제 두 눈에 담았다. 좀 전의 애태우는 걱정 따윈 한 톨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들 곁엔 이차혁도 함께였다. 그는 벌써 솔이 형에게 제 꿈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며, 돌이켜 보니 그것이 태몽이었나 보다 새 소식을 전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아도 이림범은 이차혁이 그 태몽의 마지막을 각색하였음을 알았다. 해말갛게 웃는 하련솔의 표정에서 전부 티가 났다. 산 위로 올라가 용을 날린 일만 있었을 뿐, 솔이 형이 죽도록 아플까 봐 걱정했단 소식 따윈 전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림범도 마찬가지였다. 불안도 걱정도 모두 없는 척 지워 버리고서, 그는 그저 기쁜 황제가 되어 웃었다. 아들인지 딸인지 구태여 묻진 않았다며, 여름이 오면 태어날 것이라며 속삭이는 하련솔을 그는 부둥켜안았다. 품에 꼭 안고 고백했다. 너무나 고맙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
추적추적 떨어지기 시작한 겨울비에 윤슬찬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작 쌓인 눈을 치워 놓아 망정이지 하마터면 눈 위에 비가 얼어 사방천지 얼음장이 될 뻔했다며 말이었다. 그런 그의 곁을 초롱이 헐레벌떡 지났다. 두 팔 위에는 쟁반이, 쟁반 위에는 기쁜 소식을 품은 예비 황후에게 먹일 보양식이 따끈따끈했다.
“누나. 지금은 침실 출입 금지야.”
그녀를 향해 목을 쭉 뻗으며 윤슬찬이 말했다. 그 소리에 허둥지둥하던 초롱의 두 발이 우뚝 멈췄다. 당혹감에 두 뺨을 물들이며 초롱이 되물었다.
“뭐? 왜? 폐하께선 아까 다녀가셨잖아.”
기실 황제께서 다시 돌아오셨다 하더라도 침실이 출입 금지일 이유는 없었다. 어제까지야 자유로이 애정을 나누실 수 있도록 응당 자리를 비워 드려야 마땅했으나, 솔 님께서 임신 초기임이 밝혀진 오늘부터는 그 애정 행각에도 어느 정도 제약이 걸렸으니 말이었다.
아리송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초롱을 향해 윤슬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 님 아버지께서 오셨거든. 부자간에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좀 비워 달라셨어.”
“어, 그래?”
“근데 있잖아, 솔 님 아버지를 우린 뭐라고 불러?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솔 님께서 당연히 황후가 되실 건데, 황후의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 뭐야?”
보리 누나한테 물어봤는데 그 누나도 모르더라며, 윤슬찬은 종알종알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에 초롱은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가, 대번에 눈빛을 뒤바꾸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성난 치와와처럼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호칭? 네가 그분을 부를 일이 뭐 있다고 호칭을 물어, 묻기를?”
“아까 통성명했는데? 나는 윤슬찬이라고 알려 드렸더니 자기는 하련솔이 아빠라고 하시잖아. 그렇다고 시종인 나까지 아빠라고 부를 순 없는 노릇인데….”
윤슬찬이 아무렇잖게 뱉은 말은 초롱의 머리 위에 낙뢰처럼 내려와 꽂혔다. 쿵… 소리가 나도록 큰 충격에 그녀는 선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쟁반 위에서 덩달아 덜덜 떨리는 보양식 뚝배를 확인하고 윤슬찬은 ‘누나’ 하며 초롱 가까이 붙어섰다. 그러곤 그녀 대신 묵직한 쟁반을 받아 들어 주었다.
“나…. 나…. 나도 아직 자기소개를 못 해 봤는데!”
꽥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린 초롱의 조바심을 못 본 척하며 윤슬찬은 걸음을 옮겼다. 따끈따끈한 음식을 들고 살랑살랑 복도를 가로지르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소개를 못 하긴 왜 못 해, 다정다감하고 따듯하기가 딱 하련솔 님 같은 분이신데… 하며.
그, 다정다감하고 따듯하기가 딱 하련솔과 같은 중년의 사내는 목덜미에 땀이 다 났다. 임신한 예비 황후를 품은 침실이 후끈하게 더운 탓이었다. 덕분에 감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으나, 여차하면 땀띠가 다 나겠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하련솔은 허허실실 웃는 낯이었다.
“더워도 조금만 참아요, 아빠. 감기라도 걸렸다간 나를 혼낼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그러니까.”
번듯하니 등을 펴고 앉아 무릎 위에 이불을 두른 하련솔을 향해, 그의 아버지는 평생 생각도 못 해 본 질문을 입에 담았다.
“입덧이나 빈혈은 없고…?”
머뭇거리며 건넨 물음에 비해 대답은 재빨랐다.
“왔다 갔다 움직이면 좀 어지럽긴 한데 입덧은 없어요.”
하련솔의 대꾸에 그의 아버지는 가슴 위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지난해 연말, 제 아들이 무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그는 쉽게 받아들였더랬다. 오히려 그 사실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가난에 허덕이며 힘들게 살아왔을 제 자식이 황실 소유가 되었다니 다행이라 여긴 것이었다. 그러면 황실 사람들이 나섰을 테고, 궁궐로 그 아이를 데려다가 밥을 먹여 주고 잠을 재워 주며 건강을 돌보아 주었겠거니 믿음이 있어 그랬었다.
그 아이가 교태전의 주인이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예비 황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리둥절했다. 혹시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절로 들었다. 그가 알기로 그의 아이는 누구의 이목을 끌지도, 누구의 기억에 새겨지지도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을 건너 잃어버린 아들을 마주하기에 앞서, 그는 젊은 황제와 짧은 담소를 나누었었다. 한껏 긴장한 채 자리에 앉은 그를 두고 황제는 몹시도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뉴스에서 보던 근엄한 모습과 달리 그는 아주 건실하고 순한 청년처럼 보였는데, 가장 먼저 꺼낸 인사는 ‘처음 뵙겠습니다’가 아닌 ‘오래간만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였다.
주어진 시간이 짧은 탓에 이림범은 간단한 사실만을 몇 가지 알려 주었다. 그가 그 옛날 고야읍의 절간에서 살던 아이라는 것. 그렇기에 하련솔을 이은재로 보고 또 기억했다는 것. 요즈음 하련솔에게는 그와 같은, 이상한 우연이 자주 겹치는 나쁜 일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제가 하련솔을 몹시도 사랑하고 아끼며 하련솔도 저에게 사랑을 돌려주고 있다는 것. 그러니 부디 걱정하지 말라는 말….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풍채에 특징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황제가 그 옛날의 쪼그맣고 소극적인 아이였다는 위화감은 우선 뒤로했다. 대신에 황제가 들려준 말들을 온통 위안 삼았다. 들은 말을 고스란히 복기하며, 그는 제 아들을 걱정하지 않고자 했다. 오늘 그 아들이 임신까지 했단 소식에 헐레벌떡 입궁한 처지이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본래 그는 빨리 진정하고 또 빨리 적응할 줄 아는, 담력이 큰 사내였다.
‘하련솔’이 궐 안에서 어떤 일에 휘말리건 ‘한솔’로서 서울 한복판에 버려진 채 사는 것보단 천 배 만 배 나은 일이었다. 남자와 결혼하고 사랑을 하든 말든, 한데 그 남자가 이 나라의 황제이든 거지이든, 변이된 몸으로 아기를 갖고 황실의 후사를 보든지 못 보든지 그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련솔이 하루아침에 사람이 아닌 강아지로 변해 버린다고 해도 상관없을 지경이었다. 따듯한 집이 있고 제때 먹는 식사가 있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웃으며 하루를 살아간다는 게 중요했다. 그 밖의 어떤 변화도 이제 와 하련솔을 그의 아들이 아니게 할 순 없었다.
“은희가 알았더라면 좋아했을 텐데….”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생생한 그리움이 묻은 말에 하련솔은 하하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두 글자, ‘은희’는 제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워낙 사랑했기에 아버지는 자식의 이름도 ‘은’자 돌림을 써 은재로 지었더랬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어제와 같이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하련솔은 좋았다.
그리움은 추억이 되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친근한 파도에 휩쓸려 하련솔은 아버지가 복기하는 옛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널 가졌을 때 네 엄마도 그랬었단다. 생각지 못한 임신이었지만… 두려워하질 않았어. 오히려 기대를 하고 좋아라 했지. 그래서 그랬나? 남들 다 한다는 입덧도 없었고 빈혈도 없었어.”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에 하련솔이 웃었다. 오늘로 그는 제 어머니와 저 사이의 닮은 점을 새로이 알게 됐다. 개화병에 걸려 문정궁까지 흘러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림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그에게 제 아픈 과거를 이야기할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소식이었다. 그리고 하련솔은 지나온 일 중 무엇 하나 후회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일을 향한 두려움이 없었다.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 끄덕이는 하련솔에게, 그의 아버지는 뜻밖의 이야기를 건넸다.
“그땐 아빠가 입덧을 대신했거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도통 없어서 쫄쫄 굶었었지. 그때는 유일하게 먹을 만한 게 유자청이었는데….”
그 말이 재미있는 농담처럼 들려 하련솔이 하하 웃었다. 그런 하련솔을 따라 그의 아버지도 호탕하게 하하 웃었다. 웃음 끝에 그는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짜야, 솔아. 아빠 죽을 뻔했다.”
***
“우웩!”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너른 회의장이 텅 비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었다. 일제히 입을 다문 이들 가운데 소리 내는 자는 그 침묵의 근원인 황제 이림범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