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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17화 (133/135)

외전 17

목 가다듬는 소리를 내며 그는 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거의 구토할 것처럼 ‘우웩’이라고 소리친 적 없다는 양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여상스럽고 뻔뻔한 그 표정에 힘입어 의정부 대신은 하던 보고를 이어 나갔다.

“…가례도감에서 공유한 보고서를 확인한 바, 활쏘기 행사에 산 동물을 이용하는 살생 행위는 지양할 것입니다. 화면을 보시면….”

그러나 또 한 번,

“욱….”

회의장을 채운 이들 전원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를 향했다. 얼굴을 단단히 굳힌 채 이림범은 입으로 손을 가린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전각 밖을 오가는 시종의 발소리가 들리도록 완벽한 침묵도 잠시, 그는 오른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마저 보고하라는 수신호에 힘입어, 의정부 대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끅.”

그리고 황제가 딸꾹질했다. 가까스로 태블릿 PC 화면으로 옮겨 갔던 수십 개의 시선이 다시금 황제에게로 옮겨붙었다.

“큼, 큼….”

어색하고도 광활한 침묵을 없애 보고자 황제가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에 눈치껏, 의정부 대신도 크게 소리 내어 헛기침했다.

기약 없이 차일피일 미루어 온 황제의 국혼이 기정사실화된 마당이었다. 경사에 겹경사라고 무화 하련솔의 임신 소식까지 알려졌다. 의정부 입장에서 그 소식은 이렇게 들렸다.

‘이제 도승지의 세상이 왔다.’

하필이면 특별 결성된 가례도감의 필두가 그, 도승지였다. 깐깐하기 짝이 없는 양반이 더 큰 힘을 얻었으니 앞으로의 궐내 행사와 방범에 새로운 규제가 많이 생겨날 것이었다. 무화 하련솔에 관해서라면 일관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도승지가 교태전을 자주 드나들 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했다. 이제 와 보니 그게 다 가례도감의 수장이 되고자 벌인 수작질이 틀림없었다. 황제의 국혼에 있어 책임을 지고 공을 세우면 남은 궐 생활이 얼마나 편안하겠는가.

저놈의 도승지가 타고난 운은 또 어찌나 좋은지 모른다. 예비 황후께서 당장에 임신을 하셨으니, 임의 결성된 가례도감이 그의 출산일까지 유지되게 생겼다. 말인즉슨 하련솔이 정식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교태전에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날까지 가례도감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거란 의미였다.

그 바람에 의정부에서는 속이 탔다. 물론 가례도감에 속한 의정부 직원도 있기는 했다. 문제는 젊은 황제 이림범의 대에 와 의정부의 특징적인 힘이 약해졌단 부분이었다. 이림범은 어느 한 부서를 짚어 자문하지 않는 사내였다. 단불처럼 홀로 타오르는 그의 성미는 따로 보면 장점이었으나 의정부 입장에선 낭패였다. 황제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어서야 의정부는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것과 진배없었다. 그 와중에 당장 오늘부터 활동을 시작한 가례도감이 전 부서에 보내온 통보가 수십 장이었다. 개중 하나가 예정되어 있던 활쏘기 사냥을 취소하란 압박이었다.

앞으로 아홉 달간은 제대로 된 의견을 피력하기 힘들 터, 의정부 대신은 작금의 보고를 기회 삼았다. 활쏘기 사냥이 안 된다면 대회라도 열자는 생각이었다. 국궁은 황제께서도 즐기는 활동이니 그 점을 강조해 동의를 구하면 좋지 않겠는가.

야심차게 시작된 대신의 보고는 그러나, 두 문장을 채 뱉기도 전에 멈추어야 했다. 대뜸 고개를 숙인 황제가 발치의 쓰레기통을 집어 들더니,

“우욱…!”

크게 구역질했다.

“…….”

“…….”

“…….”

일순 회의장이 규정각처럼 조용해졌다. 서기마저 기록하는 일을 잊고 손을 뚝 멈추었다. 그녀의 손이 타자기 위에서 정지하는 모습을 대신은 난생처음 보았다.

기다란 목이 굵어지고 귓불이 빨개진 채 이림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발 사이에 쓰레기통을 놓고 매우 지친 사람처럼 앉아,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누구한테서 풍기는 담배 냄새지?”

낯선 질문에 일동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서로를 번갈아 훑어보며 개중 흡연자가 누구인지 찾았다. 즉위식이 열리던 날부터 새 황제께서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였다. 그렇기에 대다수 흡연자가 금연을 시작했다. 개중 금연에 실패한 자들은 황제를 마주하기에 앞서 짧게라도 흡연을 참았다. 별수 없이 담배를 피운 날에는 깨끗하게 손을 씻고 외투를 갈아입고, 향수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

침묵 속에 직원들의 시선이 차츰 한곳을 향했다. 황제의 시선을 좇아, 그가 바라보는 이를 함께 바라보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보고서를 쥔 채 기립한 의정부 대신이 있었다.

“손 씻었습니다, 폐하.”

당혹감에 대신이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향수까지 뿌렸습니다. …그래도 냄새가 납니까?”

그 질문에 양채림 상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냄새는 나지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회의장에 입장할 적에 그녀 선에서 대신에게 말을 꺼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림범의 생각은 다르다는데 어찌하겠는가.

“…….”

군말 없이 대신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제 옆자리에 앉은 부하 직원, 사인에게 보고를 떠넘겼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피눈물을 흘렸다. 그가 육아 휴직으로 자리를 비운 새에 그러잖아도 불안한 의정부 입지를 더욱 흐려 놓은 것이 저, 눈치 없는 사인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글렀구나.’

낙담한 와중에도 대신은 대신이었다. 그는 서기가 제 퇴장을 다르게 기록할 수 있게끔 거짓 핑계를 크게 말한 뒤 회의장에서 물러났다.

운수 더럽고 심보는 착한 대신이 얌전히 물러난 뒤, 회의장에는 또 한 번 침묵이 감돌았다. 눈 밑이 파리해진 채 이림범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둘렀다. 연신 치솟는 멀미에 어질어질하여, 사인이 더듬더듬 읽어 내리는 보고는 그의 귓등에 가닿지조차 못했다.

***

하련솔의 걱정 인형은 아주 크고 무겁다. 다행스러운 점은 하련솔이 그 인형을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단 것이었다. 대신에 걱정 인형이 두 발로 걸어 그를 따라다녔다. 하련솔의 그림자에 발끝을 붙여놓고서, 걱정 인형은 교태전을 나서는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제 소매 안에 쑥 집어넣었다.

“형, 손 좀 데워.”

커다란 걱정 인형을 손에 달고 하련솔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궐내 산책로는 차량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된 구역이라 바퀴 달린 탈것이라곤 자전거와 퀵보드뿐이었다. 걱정 인형은 그마저도 철저히 피하게끔 하련솔의 오갈 방향을 조종하기 바빴다.

“형. 안쪽에서 걸어.”

그러면서 제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에 하련솔은 두 눈만 끔벅거렸다. 자전거며 퀵보드를 타고 전각 이곳저곳을 바삐 누비는 이들이야 많기는 했다. 그러나 걱정 인형의 배려는 순 쓸데없었다. 나이 든 시종도 영재라는 대신도 그들 앞에서 감히 유유자적할 순 없기 때문이었다. 황제 이림범의 앞에서 그러듯이 이제는 하련솔의 앞에서도 누구나가 후다닥 탈것에서 내려 인사하기 바빴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한참을 걷던 하련솔은 산책로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고요한 정자와 꽁꽁 언 연못, 그 위에서 잡을 수 없는 잉어를 탐하는 고양이를 구경했다. 불만스러운 듯 흔들리는 고양이 꼬리가 빙판 위를 탁탁 두들겨 댔다.

귀여운 풍경에 빙그레 미소 짓는 하련솔을 향해,

“형. 다리 안 아파? 업어 줄까?”

걱정 인형이 말했다. 그에 하련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도 걱정 인형은 완강했다.

“춥잖아. 바람 그만 쐬고 들어가자.”

그러더니 아직은 힘이 남는다, 더 걸을 수 있다는 하련솔을 설득하여 기어코 등에 업었다. 그와 동시에 먼발치에서 콧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림자처럼 황제를 뒤따르는 호위 실장을 알기에, 또 그 특유의 웃음 참는 콧소리를 알기에 하련솔도 넌지시 입꼬리를 올렸다.

“흐음, 편하다.”

하련솔이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온전히 사지를 내맡기자 걱정 인형은 신이 났다. 갓 말을 배운 앵무새처럼 형, 형… 하고 수도 없이 하련솔을 부르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고 제 동생 이야기를 하고 또 저녁 식단 이야기를 해 댔다.

떡 벌어진 등에 하련솔을 업고서 어린애처럼 종알종알 수다를 떠는 그를 발견하고, 책을 짊어지고 퀵보드를 타던 규정각 직원들이 허둥지둥 보드에서 발을 내렸다.

그렇게 열댓 명의 인사를 받으며 돌아온 교태전은 나설 때보다 더 포근했다. 특히나 침실은 온돌바닥을 데워 놓아 공기부터 따끈따끈했다. 중앙 자리에는 그보다 더 뜨거워 김이 폴폴 오르는 식사가 차려진 상태였다. 하련솔은 제 걱정 인형이 시키는 대로, 그가 나서서 한술 맛본 반찬들을 뒤따라 오물오물 집어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하련솔은 차를 한 잔 받았다. 찻물로 얼른 입을 헹구고픈 그와 달리 걱정 인형은 대령숙수의 손을 거쳐 보내진 후식조차 믿지 못해 먼저 맛보고, 성분을 확인했다. 덕분에 하련솔은 한 모금 덜어 낸 찻잔을 제 오른편에 놓고, 앉은뱅이 반상 위에 책과 노트를 펼쳤다. 이차혁이 선물해 준 소설책이 있어 잠들기 전에 한 챕터를 감상할 생각이었다.

책의 서문을 느릿느릿 읽어 내리는 하련솔을 향해 걱정 인형이 속삭였다.

“그 책, 살인 사건 나고 배신하고 뭐 그런 내용 아니야? 태교에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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