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18화 (134/135)

외전 18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목소리가 간지러워 하련솔은 어깨를 끌어 올렸다. 그러곤 잠시간 고민하다가, 첫 번째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책을 덮었다. 책장 위에 놓일 예정이었던 황옥 문진은 결국 쓸모를 잃고 개구리 포포의 배 속에 들어가야 했다.

대신에 하련솔은 남색 노트를 열었다. 앞뒷면을 비단으로 짓고 오침하여 만든 노트는 손바닥만 한 크기에 내지는 원고지로, 온통 하련솔의 필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한 문장 글을 읽어 내리기도 전에,

“또 공부해?”

걱정 인형이 말했다.

“무리하지 마, 형. 일찍 자야지. 불 다 끄고 얼른 눕자.”

다정히 타이르는 음성에 하련솔은 펼쳤던 노트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이어서 대꾸했다.

“안 되겠다, 범아.”

너른 침실이 고요한 덕분에 한숨과 함께 빠져나온 중얼거림이 무척 선명하게 들렸다.

“좋게 생각하려 노력했는데 안 되겠어. 이대로 여름까지 버티긴 무리야.”

그제야 그의 걱정 인형, 아무개 원단을 삐뚤빼뚤 박음질해다가 단추 두 개로 눈을 박아둔 듯 흐리멍덩하던 이림범이 제대로 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큰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웅얼웅얼 잔소리만 뱉던 입을 크게 벌린 것이었다.

“왜? 형. 왜…. 역시 몸이 안 좋아? 진이 빠져서 그래? 전에 비해 기운이 안 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얼굴도 부은 거 같고 손발도 퉁퉁해진 게 많이 피곤해 보이더라.”

하련솔의 양어깨를 붙잡아 쥐고서 이림범은 속사포 쏘듯 말했다. 그의 두 눈을 빤히 노려보며 하련솔이 대꾸했다.

“나 말고, 너 말이야!”

“…어?”

하련솔의 얼굴이며 손발이야 잘 먹고 잘 쉬고 잘 잔 덕에 살이 올라 전보다 통통해진 게 당연했다. 한 주 사이에 몸무게가 2kg은 더 는 덕이었다. 부제학은 그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 이대로라면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도, 순조롭게 임신 초기를 넘길 수 있을 듯하다고 말이었다. 하련솔이 들은 말을 전해주었을 때 도승지는 무뚝뚝한 얼굴로 ‘네, 그렇습니까.’ 하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차혁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교태전을 찾아와 하련솔의 손발을 주무르면서, 그는 조카를 위한 요람 제작을 장인에게 맡겼다질 않나, 배냇저고리도 제가 지어 주겠다며 무슨 색으로 해야 좋을까 고민하며 야단이었다. 한참 머리를 맞댄 끝에 분홍도 파랑도 아닌 연녹색 비단으로 결정한 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초롱을 비롯한 네 시종은 또 어떤가. 그러잖아도 교태전의 주인을 돌보기에 모자람이 없던 이들이 더욱 극진해졌다. 덕분에 하련솔이 하루에 홀로 있는 시간은 다 합하여도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모두 그의 배 속에 든 아이의 탄생을 기대하기에 그랬다.

그런데 정작 아이의 아버지이자 하련솔의 지아비인 이림범은 안색이 파리해져서는, 날로 체중이 줄고 눈빛이 예민해졌다. 항시 여유를 풍기던 얼굴에서 훈훈한 기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쏜 활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메웠다. 그 모습이 마치 굶주린 호랑이가 전전긍긍 날을 세운 듯 보였다.

“이러다 우리 애기 말라 죽겠어.”

하련솔이 한탄했다. 그에 이림범은 깜짝 놀라며 제 연인의 배를 내려다보았는데, 정작 하련솔은 이림범의 두 뺨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애기야! 네 꼴이 이게 뭐야? 여리여리해서는 한 대 툭 치면 픽 쓰러지게 생겼잖아.”

젊은 황제의 우람한 몸을 한 대만으로 쓰러뜨리자면 포클레인을 써 바오바브나무를 휘둘러 쳐야 할 것이었다.

그래도 하련솔의 눈에 비치는 이림범은 순 ‘애기’였다. 하련솔의 배 속에 든 새 생명의 존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소화 기관이 고장 난 데다 밤마다 뜬 눈으로 날 새우는, 그는 가엾게 말라가는 애기였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하기에 모르쇠 하고 놓아 온 하련솔조차 더는 봐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범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고 긴장이 돼? 그런 상태로 출산일까지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

“…나는….”

하련솔의 손바닥에 뺨이 짓눌려, 이림범은 붕어처럼 튀어나온 입술을 빠끔거렸다.

“형이 잘못될까 봐 무서워.”

“…….”

그 말에 하련솔은 두 눈을 실처럼 가늘게 떴다. 눈빛이 시무룩해지고 안색이 창백해진 이림범은 또다시 ‘걱정 인형’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의 두 뺨을 팡, 소리 나게 두들겨 주며, 하련솔은 웅변하듯 말했다.

“난 내가 잘못되거나 크게 아플까 봐 무섭지 않아.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하니까. 넌 그렇지 않아?”

“…형,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박또박 제 생각을 말하는 하련솔에 비해 이림범의 음성에는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로 그는 근래 자신을 점령한 나쁜 깨달음을 전했다.

“아무래도…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 그 아이에게 형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질 않아.”

그러면서 그는 죄인처럼 고개 숙였으나, 주어진 자책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련솔이 그의 턱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추켜들도록 힘준 탓이었다. 박력 있는 손아귀 힘을 못 이겨 이림범은 고개를 높이 추켜들어야 했다. 건방질 만큼 높이 추켜들고, 두 눈을 내리깔아 하련솔을 마주 봐야 했다.

“넌 아이들을 엄청 좋아해.”

그리고 이림범은 놀랐다. 옅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 앞에서 하련솔은 웃었다. 보기 좋은 미소로 입꼬리를 올리며 그는 확언했다.

“지난번 미사에서 느꼈어. 너,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참 웃더라. 합창이 아무리 길어져도 지겨워하지 않았어. 다들 하품을 참느라고 턱에 힘을 주는데, 너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을 꾹 다물었지.”

진실과 애정이 어우러진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림범의 뭉친 불안을 단번에 풀어 내리는 멋진 주문이기도 했다.

그 앞에서 하련솔은 늘 사실만을 말했다.

“넌 아이들을 좋아해, 범아. 단지 아이였던 널 싫어할 뿐이지.”

낯선 깨달음이 이림범의 가슴 안에 차올랐다. 여태껏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 마음으로는 이미 품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랬다. 그는 어린 날의 그 자신을 싫어했다. 제 피가 섞인, 저를 닮은 아이에게는 하련솔의 무얼 희생할 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저조차도 외면했던 진심을 들킨 바람에 이림범은 귀를 붉혔다. 부끄러움에 손을 떠는 그를 향해 하련솔이 속삭였다.

“네가 아니라 날 닮은 아이라고 말하면 네 마음이 편해지겠지. 이 배 안에 그 시절의 ‘아이’가 아니라 ‘은재’가 들었다고 말하면, 너도 이 애를 좋아하게 되겠지. 나도 알아.”

이림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조차 없이 맞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아. 범아. 나는 이 아이가 네 아이라서 좋거든.”

그러나 이어진 고백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은지 모르게 됐다.

그래서 이름만 연신 불렀다.

“솔이 형.”

“그래, 범아.”

“…은재 형.”

“응. 애기야.”

이림범은 제 얼굴을 감싼 하련솔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곤 아예 상체를 푹 숙여 하련솔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콕 박았다. 대답 대신 돌아온 애교에 하련솔은 제 앞에서만 어리숙한 황제의 머리를 와락 껴안아 주었다.

그제야 이림범은 하련솔이 임신하여 좋게 된 점을 처음 찾았다. 열병 끓는 순간에는 익어버릴까 무서울 만치 뜨겁다가도 평상시엔 안색이 파리하고 손발이 얼음장이 되던 하련솔인데, 이제는 항시 체온이 1도쯤 더 높았다. 덕분에 온몸이 따듯하게 되었다. 저를 끌어안는 그의 두 팔이 나른하고, 가슴에서는 은은하게 열기가 풍겨 좋았다.

“애기야. 아직 이렇게 어려서 어떡해야 좋지? 우리 애가 태어나기 전엔 어른이 되어야 할 텐데.”

“…….”

그리고 이림범은 깨달았다. 하련솔을 향한 제 애정이 늘 넘쳐 흐르듯이 저를 보는 하련솔도 그렇다는 걸. 그러니 누구라도 들었다가는 경악을 하며 뒤로 넘어갈 이야기를 아무렇잖게 속닥거리는 것이었다.

민망함에 붉어진 이림범의 뺨에 다시금 하련솔의 손이 닿았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이림범은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렇게만 하면, 기대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보드라운 입맞춤을 받을 수 있었다.

쪽.

하련솔이 자아낸 작은 뽀뽀 소리 끝에,

“…형은 괜찮아?”

이림범의 질문이 붙었다.

“어떻게 그렇게… 튼튼할 수가 있어?”

감탄과 호기심이 섞인 질문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순수한 남성의 몸으로, 남자라는 인지를 지니고 스물아홉 해를 살아온 하련솔을 알기에 그러했다. 하련솔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고 이해하고자 이림범은 수없이 노력해 왔다. 또한 그때마다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렸다. 갑자기 개화병을 얻어 무화가 되고, 누구를 품을 순 없고 평생 한 사내에게 안겨 살아야 한다는 변화만 해도 그랬다. 실제로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을 앓는 사내 무화를 자주 봐 왔다. 한데 하련솔은 그런 무화의 몸으로 아이까지 가졌다. 보통의 남자로서는 쉽게 적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이고 사고라 여기어 앓아눕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하련솔은 달랐다. 가느다란 몸에 병약한 기질을 갖고도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담력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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