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
“옛날에… 나도 우리 엄마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었어.”
그러면서 그는 오래전의 깊은 밤을 떠올렸다. 그의 신발 사이즈가 지금보다 20mm는 더 작던 시절, 침대에 누운 엄마에게 뛰어간 밤이 있었다. 두 발은 방바닥에, 상체는 침대 매트리스 위에 바짝 기대어 붙이고는 엄마의 귀에 대고 속닥속닥 말을 걸었었다.
그날 은재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통화를 훔쳐 듣다가, 엄마의 병세가 저를 낳은 직후 급격히 나빠졌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 나를 낳은 걸 후회해?’
그맘때 은재는 ‘후회’라는 단어를 새로 배웠다. 그래서 맛 들인 사탕 먹듯이 새로 알게 된 단어를 혀로 핥으며 자주 쓰곤 했다. 밤잠 설치는 어린 아들 앞에서 어머니는 졸린 눈을 하고 웃었다. 그러곤 아무렇잖게 눈을 감으면서 대충 대답했다.
‘엄만 후회 안 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고 얼른 잠이나 자.’
무심한 듯 조곤조곤 돌아온 대꾸에 은재는 꼬물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엄마의 옆구리에 고양이처럼 슬그머니, 새우처럼 등을 말고 달라붙은 것이었다. 그러자 잠든 듯 움직이지 않던 엄마가 더럭 팔을 뻗어 그를 안아주었다.
그에 은재는 히히 웃으며 눈을 감았다. 엄마 팔을 베개 삼아 얌전히 누워 있기를 한참, 엄마의 숨소리가 깊이 곤해지자 얼른 제 머리를 아래로 치웠다. 엄마 팔에 쥐가 날까 봐 걱정되어 아무도 모르게 주물러 주다 잠든 밤이 많았다.
기억 한편에 녹음된 어머니의 음성을 떠올리며 하련솔은 웃었다. 제 웃음으로 하여금 이림범이 내심 감탄하는 줄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얼굴은 그렇게 웃는 얼굴이리라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서, 하련솔이 말했다.
“난 괜찮아. 지금도 또 앞으로도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 하련솔은 이림범의 손을 잡아 제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웃음으로 자아낸 들썩임이 더 클 만큼 아직은 작고, 제대로 된 형태조차 갖지 못한 아이였다. 이 세상에서 그토록 조그만 주제에 이렇게 큰 힘을 지닌 존재는 그뿐일 것이었다.
“우리 인생 최악의 순간은 너무 빨리 왔던 거 같아.”
제 배 위에 댄 이림범의 손을 감상하며, 하련솔은 느리게 속삭였다.
“어쩔 땐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또… 우리 잘못과 관계없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고. 그래도 늘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는 그걸로도 만족해. 우리는 참 잘해 왔다고, 난 그렇게 생각해.”
당장 오늘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제는 행복해졌다고 확신해서만은 아니다. 돌이켜 보니 내 기억 속 너의 모든 순간이 예뻤다…. 하련솔은 그렇게 고백했다. 너의 기억 속 내가 아주 대단한 영웅이었듯이, 우리 아이는 아주 예쁘고 대단한 영웅일 거라고. 인생 최악의 순간에도 꼭 그럴 것이라고.
아주 여상스럽게 뱉어 낸 긴긴 이야기의 결론은 분명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급되지도 않았지만, 이림범은 제가 들은 말이 ‘사랑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형….”
이림범이 내놓은 답에 몹시 만족하여, 하련솔은 앉은 자리에서 상체만을 일으켰다. 이림범의 두 다리 위에 앉아, 그의 어깨에 관자놀이를 기대며 안기기 위해서였다. 꾸물꾸물 움직여 따듯한 포옹을 얻어 낸 끝에 하련솔이 농담했다.
“입덧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해진 건지 뭔지… 모르겠네. 우리 애기는 원래 울보여서….”
그러자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길게 울렸다. 훌쩍 코 먹는 소리가 섞인, 엉터리 웃음소리가 하련솔은 좋았다.
***
유독 몸이 가벼운 날이었다. 거의 체중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개운한 기분을 한껏 즐기며 하련솔은 문정궁 정문을 지났다. 목적지는 늘 그렇듯 닥나무 곁이었다. 푸릇푸릇한 어린 잎이 자아낸 그늘은 허술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 벤치 위에 바둑이 무늬가 그려진 듯 보였다. 덕분에 하련솔은 벤치에 앉아서도 찬란한 햇빛을 쐴 수 있었다. 눈꺼풀을 빨갛게 물들이도록 볕이 진한 여름이었다.
부족함 없이 벅찬 날씨를 만끽하며 하련솔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아쥐고 눈을 감았다. 그의 곁에 초롱이 함께했다. 두 계절 사이에 초롱은 머리가 많이 길었다. 뜻대로 쑥쑥 자라 길어진 머리를 동그랗게 묶어 비녀를 꽂고, 중앙 가르마 위에는 윤기 나는 개구리 첩지를 달았다. 옅은 미소를 뺨에 건 모습이 제법 성숙해, 지난해 자주 비치던 어린 티가 많이 가셨다.
고개를 휙 들고 하련솔은 빛무리를 응시했다. 흐린 눈으로 한참 노려본 끝에 멀리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마중을 나와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하련솔은 생각했다. 마침내 드러난 풍경에는 제가 아는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가족의 모습이 담겼기에 그랬다.
키 큰 황제의 철릭이 여름 햇볕에 반짝였다. 그의 두 팔에는 어린 용이 안겨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고서 한 손으론 황제의 옷깃을, 다른 한 손에는 긴 줄을 꼭 쥔 아이였다. 기다란 줄이 허공을 가르며 팽팽하게 이어지는데, 그 끝에 하련솔의 배꼽이 있었다.
두 사람을 향해 하련솔은 어서 이리 오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자 저를 알아본 어린 용이 꺄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황제도 하련솔을 발견한 듯 크게 웃더니, 아이를 단단히 고쳐 안고 뛰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만나본 여름 볕 아래에서 그는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가서기 위해서 달렸다. 그의 걸음 끝에 항상 제가 있음에 하련솔은 기뻤다.
하련솔의 발치에 앉아 있던 누런 개가 먼저 황제를 반겼다. 하련솔도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부녀를 맞이했다. 두 팔을 뻗어 제 남편과 딸아이를 동시에 껴안은 것이었다. 두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가 꺄… 높은 탄성을 내질렀다. 어린 용의 연녹색 저고리에 대고 하련솔은 푸… 푸… 입바람을 불었다.
‘외출 재밌었어, 은아?’
하련솔이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제 입술이 제 것이 아닌 듯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은’이라는 이름 또한 저는 아직 모르는 존재였다.
아리송한 마음에 하련솔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이가 보이도록 환히 미소짓는 황제가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 형.’
황제가 물었다. 하련솔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오래 기다릴게.’
그리고 그는 제 동문서답에 만족했다. 만족하여 웃는 얼굴로 잠에서 깼다.
야심한 밤에는 침실 천장이 유독 낮게 느껴졌다. 시야 모서리에 협탁이 닿았다. 그 위에 쌓인 소설책이 탑 같아 보였다. 방 안에만 있길 따분해하는 저를 위해 이차혁이 가져다준 애장품이었다.
머리맡에는 아버지가 담가준 유자청이 다섯 병 놓였다. 누가 보았더라면 1년 내내 먹고도 남을 양이라며 혀를 내두를 테지만, 저 유자청을 숟갈로 퍽퍽 떠먹는 황제가 있어 벌써 한 병을 비운 상태였다.
시선을 슥 내리깔자 아직 한참 덜 부른 제 배가 둔덕을 이뤘다. 다정하게 덮인 연두색 배냇저고리와 커다란 손바닥이 친숙했다. 두툼한 손을 따라 시선을 흘리자, 너른 침상을 내버려 두고 바닥에 누운 특이한 황제가 보였다. 등을 한껏 웅크리며 모로 누워, 그는 아주 소중한 보물 지키는 양 하련솔을 끌어안고 있었다.
잠든 이림범의 얼굴이 무척 곤해 보였다. 딱딱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뉘어진 그의 머리를 보며 하련솔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잠들기 전에 그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이림범의 머리는 그의 팔뚝에서 한참 벗어난 채였다.
웃음 지으며 하련솔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림범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그러자 커닝 페이퍼를 손에 쥔 듯, 오래된 궁금증의 답을 알게 되었다.
세상천지 누구 하나 들어 줄 이 없던 날에, 그라는 나무가 쓰러지며 낸 소리는 기어코 실존했다. 누구의 기억에 새겨지지 못하고 누구의 관심도 끌어내지 못했을지언정 그 스스로는 제 울음소리를 들었으므로. 피로하던 낮에 쏟아지던 땡볕을 기억하고 서글프던 밤에 내리던 빗방울을 기억하는, 지나간 순간의 그는 볕과 빗방울과 같이 존재했다.
그렇게 한솔도 의미를 찾았다. 좋지 못할지언정, 너무나 나쁜 시절이었을지언정 그 시간을 견뎌 온 데엔 의미가 있었다. 마침내 하련솔은 그 시절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제 그는 제 이마에 내리쬘 다음 땡볕이 궁금하고 새로운 소나기가 기대됐다.
‘이렇게나 기다려지는 여름은 처음이야….’
눈을 감고 잠결에 생각하는데, 옆자리에서 움직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빡 잠들었다가 깬 듯 이림범은 제자리에서 부스럭거리더니 이내 이불 위로 몸을 옮겼다. 그러더니 하련솔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 그의 목뒤에 아주 천천히 손을 비집어 넣었다. 이내 하련솔의 머리가 슬그머니 들리더니 굵고 단단한 팔베개 위에 내려앉았다.
그 바람에 하련솔은 얼른 시간을 앞당기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벌써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다가올 날들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울지 알기에, 또 지금 이 순간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 취하여 그러했다.
어찌할 바 모르게 되어 마음 안으로 발 동동거리도록 풍족한 밤이었다.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