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놋시가 하루를 시작했을 때 테스는 이미 나간 뒤였다. 원래는 오전에 메다로와 함께 시장에 가기로 했는데, 벌써 오후다.
“제가 늦잠을 잤어요. 죄송합니다.”
“빨리 갈 이유도 없습죠. 저도 덕분에 빈둥거렸고.”
“…….”
베단은 병사 몇과 함께 벽의 문 몇 개를 보수하고 있다고 했다. 점심을 먹은 메다로는 놋시에게 걸어가겠냐 물었고 둘은 가볍게 저택을 나섰다. 10월 중순에 다가선 에트와주의 거리는 걸어 다니기 좋은 날씨였다.
놋시는 수도의 대단한 점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그래서 시장이 매일 열려 좋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그런 생각만을 하려고 했지만 눈이 날카로운 메다로를 피할 순 없었다.
“노리 님, 무슨 일이 있는가요?”
“아무 일도 없는데요.”
“안색이 새파란데요. 같이 먹고 나온 게 아니면 굶고 다닌다고 하겠습니다.”
“……간밤에 꿈을 꿔서요. 원래 자주 안 꾸는데.”
“허. 타게신이 무서운 얘기라도 했나.”
“아니, 전혀…….”
화제를 돌리고 싶어진 놋시가 애써 생각해 낸 건 요새 포에를 비롯한 병사들이 매일 떠드는 이야기였다.
“달산은 어떤 나라인가요? 국경 지대의 문제가 잦은 건 알지만, 오드사가 걱정하는 걸 보면 일이 심각해 보입니다.”
“오드사는 원래 걱정을 잘해서 쓸모 있는 놈이니까요.”
“그렇다면 정말 걱정할 일이라는 뜻이네요.”
“글쎄요…….”
메다로는 미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달산이 체레오의 왕국 위쪽에 붙은 바닷가 껍데기라고 했다. 왜 껍데기라고 부르냐 놋시가 묻자 진짜 나라는 섬이고, 내륙에 있는 건 온갖 놈들이 지나다니는 항구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시도르도 그랬습죠. 별놈이 다 마음대로 다니는 그런 곳을 나라라고 하면 안 되죠.”
“그래도……. 지금은 아니잖아요.”
“예. 뭐. 타게신의 덕이죠.”
“…….”
기묘한 표정으로 말을 멈췄던 메다로는 달산이 요새 변했다고 했다. 꼭 타게신 같은 자가 나타나서 땅을 정돈하더니 제대로 된 나라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이 전쟁이 될까 봐 걱정이군요. 바로 옆에 있어서.”
“예. 게르독 놈들과는 다르니까요. 그놈들은 좋은 땅을 봐도 쓸 줄 몰라요. 그러니 도둑질이나 하는 거지만. 타게신이 그쪽을 막아 둔 덕에 다른 할 일이 없어서, 그래서 포에가 달산이 어떻다고 매일 떠드는 걸지도 모릅니다.”
“…….”
게르독의 이름이 나오자 말하려던 놋시가 숨만 삼키고 입을 다문다. 사로나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이상해 보일까 봐 말을 삼가게 된다. 레드자 산맥에 살던 노리라도 타게신의 고향인 사로나에 대해 궁금해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혹시나 싶어 말이 어려웠다.
막혔다는 건 협약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뭔가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사로나에 대해서는 테스에게 묻자고 다짐하며 입을 다문 놋시에게 메다로가 되물었다.
“노리 님은 책을 좋아하시죠?”
“예, 예.”
“수도에는 다른 데보다 다른 나라 오메가가 많습죠. 신부는 멀리서 올수록 귀하고, 그런 분들은 왕족이나 귀족과 결혼하니까요.”
“…….”
“계속 책을 읽으니까, 내키면 역사책 같은 걸 구해 보세요. 여기서는 제국의 역사책도 구하기 쉽고……. 지금 있는 나라는 어지간하면 다 나올 겁니다.”
“옛날에 지도를 봤었는데, 맞아요. 다른 나라가 많죠.”
“체레오의 왕국과 붙어 있는 건 몇 개 없지만, 뚝 떨어진 곳에서도 가끔 귀한 분이 오거든요.”
“…….”
메다로의 목소리는 태평했지만 놋시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수도에 온 뒤에도 그는 여전히 긴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뺨에 있는 문신은 감추는 게 이해되지만 그 이상의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예전 메다로를 처음 봤을 때 놋시는 메다로가 제국의 핏줄을 숨기느라 모자를 쓰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수도의 삶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간밤의 꿈을 잊어버린 놋시가 마음속의 질문을 꺼냈다.
“제가……. 레드자 산맥에서 지낼 때는, 매번 들리는 전쟁이 제국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수도로 오니 제국의 물건을 구하기도 쉽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가까워 놀랐습니다.”
“다피벳 님은 제국 출신이니 더하죠.”
“그렇게 오신 분이 많은가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국을 가깝게 여기나요?”
“뭐, 지리로 따지면 여긴 레드자 산보다 제국이 더 가깝습죠. 그리고 어차피 다 같은 뿌리니까요.”
“같은 뿌리요?”
“체레오의 왕도 처음에는 제국의 장군이었으니까. 그, 비싼 역사책을 사면 이런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옳은 말이었다. 놋시는 그날 다피벳이 추천해 준 도구상에서 약초를 포장할 때 쓰는 삼베 묶음을 샀다. 메다로의 말대로 그들의 외출은 급한 일이 없었다. 역사책은 구하기 쉬웠고 오는 길에 잠깐 멈춘 정도로 여러 권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하루는 일찍 끝나는 법이다. 순식간에 해가 진 그날 저녁 유리창 앞에서 등잔불을 켠 놋시는 무심코 간밤의 꿈을 생각하고 있었다. 두렵고 무서운 감각조차 흐려져 놀라게 되는 악몽이었다고만 떠오르는데도 자꾸 신경이 쏠렸다.
책을 읽으려 펼쳐 놔도 읽히지 않았다. 멍해지는 스스로를 몇 번이나 다그치던 그는 침대에 일찍 누워 버렸다. 구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듯 답답한 마음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잠들기도 쉽지 않았다. 횃불이 켜져 있는 사이로 비어 있는 안마당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뒤척거리며 몇 번이나 유리창을 살피던 놋시가 다시 천장을 보고 눕는다. 창을 통과한 불빛이 따뜻한 색으로 벽을 물들이지만 한 줌뿐이고 나머지는 무심한 암흑이다.
테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불 꺼진 문 앞을 다니던 베단의 느린 걸음도 한참 전에 사라졌다.
왕이 내리는 작위는 대단한 일이었다. 분명 준비할 게 많을 것이다. 수여식은 어떤 모습일지, 성년의 의식처럼 관리가 많을지, 자신도 왕을 보게 되는지…….
누운 머리가 점점 생각의 끝을 놓쳤다.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잠에 빠져들던 놋시의 귀는 소리를 들었다.
풀벌레와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속삭임이 이어지다 끊어지고 되살아났다. 그 소리가 작아지다 들리지 않게 되자 방 안이 잠잠해졌다. 소리도 공기도 불빛도 다 잠든 것처럼 먹먹하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났다. 부드러운 털 담요를 젖히고 일어선 놋시의 입에서 허물어진 숨이 연거푸 쏟아졌다.
크게 들썩이는 가슴 밑으로 떨리는 손이 다가와 명치를 눌렀다. 그런데도 가만있질 못한다. 열이 몰려 더워진 배도 큰 숨에 옷자락을 들썩였다. 그림자 속에서 고개 숙인 얼굴이 믿기 힘들다는 듯 어둠을 응시했다.
아무렇게나 놓인 놋시의 다리가 후끈거렸다. 흥분으로 단단해진 그의 성기가 얇고 긴 바지 위로 선을 덧그리며 윤곽을 보이고 있다.
차라리 꿈이면 좋았을 텐데. 그보다도 끔찍했다. 두서없이 헤매던 놋시의 생각이 간밤의 대화를 떠올리다 어느 순간 다른 걸 하고 있었다.
깊은 잠도 맑은 생각도 불가능하던 이른 밤. 혼자 누웠던 놋시는 각인의 무서움을, 테스의 열병을 상상하고 있던 스스로를 자각했다.
단순히 과거를 돌이키는 것과는 달랐다. 깊은 잠의 꿈으로 일어나던 한때의 망상과도 달랐다. 이제 놋시의 머리는 열병의 어둠이 없는 온전한 경험으로 테스의 몸을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자신을 만지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소리를 내는지 고스란히 알게 된 육체는 선명히 떠오르는 순간을 이용해 같은 듯 다른 장면과 그 속의 촉감을 꾸며 냈다.
놋시의 눈이 세게 감기고 심장을 누르는 손이 주먹을 쥐지만 문이 열린 것처럼 이어지는 상상은 끝나질 않았다. 아무리 큰 저택도 순식간에 불태울 크기로 불이 번지고 재가 휘날렸다.
그림자 속에서 젖어 드는 살결이 단 냄새로 올라섰다. 더워진 몸에서 그보다 뜨거워진 성기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변하고 살아 있는 열기로 변했다.
무엇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눈뜬 악몽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어진 놋시의 육체를 상상 속의 테스가 점령하고 있다.
테스도 바닥 모를 허기에 붙들리게 되는 걸까? 눈을 뜨고도 앞을 모르며 원하게 되는 걸까? 젊은 나뭇가지처럼 길쭉한 팔과 굵은 밑동처럼 단단한 허리가 짐승의 머리를 따라 움직이는 걸까?
대낮의 햇살이 가득한 시도르의 성에서 놋시의 살을 열던 손가락처럼, 멈춤이 없는 행위로 허기를 채우려…….
추운 공기에 소름이 돋았던 피부 위로 새로운 전율이 흘렀다. 놋시는 미약하고 끈질긴 향기를 피하듯 몸을 작게 말았다. 서툰 손짓으로 몇 겹으로 엉켜 있는 담요를 뒤집어쓴 그가 온몸을 묶듯이 사방을 막고서 잠을 청하지만 터질 것처럼 갑갑한 머리는 닥칠 줄 모른다.
놋시의 상상은 더 이상 음란하고 더러운 망상이 아니었다. 피부에 닿던 감각과 입안에 삼켜지던 맛과 뜨거운 숨에 잠긴 목소리는 모조리 테스의 것이고 살아 있는 순간의 연장이었다.
“읏, 으음…….”
체온으로 더워진 작은 굴에서 불붙듯 번지는 신음은 더 이상 머릿속과 구분되지 못한다. 발기된 성기를 만지는 손가락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지고 젖은 허벅지가 비벼지는 잡음도 어떻게 나오는지 알 수 없다.
땀과 체온이 만들어 놓은 더운 공기를 씁쓸하고 풋풋한 묽은 정액의 냄새가 물들였지만 놋시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지쳐 감긴 눈가에는 미지근한 눈물이 말라붙었다.
꿈이 없던 긴 잠이 끝났다. 눈뜬 새벽은 언젠가의 그날 아침과 똑같았다. 다리 사이를 적신 체액은 이미 식어 한층 더 무거운 흔적이다.
놋시의 몽롱한 의식은 비틀거리며 침대를 벗어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몸을 가리고서야 다음 할 일을 기억해 낸다. 우물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차가운 물에 머리를 적셔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곳은 산 밑 마을이 아니고 차노륵과 에기는 오래전에 죽었다. 타게신의 이름이 붙은 커다란 저택에서 새벽의 우물가에 나온 놋시를 붙잡는 건 그의 형인 테스뿐이다.
무색의 천을 뒤집어쓰고 새벽에 나와 있는 놋시를 붙잡았을 때. 테스는 놋시가 또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다. 꿈을 헤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본 동생은 잠깐이나마 현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놋시.”
“…….”
말 없는 몸을 끌어안고 한숨을 삼켰을 때. 그때 테스의 몸이 굳었다. 그는 스산한 아침 공기 한 움큼에 숨어든 단 냄새를 맡았다. 마른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길게 움직여 품 안의 몸을 저절로 조여든다.
“무슨 일이…….”
설마 싶은 질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놋시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고서 품을 빠져나갔다. 악몽을 벗어나는 몸부림처럼 크게 휘청거린 놋시의 놀란 눈빛은 금세 숨겨졌다. 고개를 숙인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꿈을 꿨는데, 그게…….”
“꿈?”
“그래서 일찍 깼습니다. 그것뿐입니다.”
“…….”
서두르는 목소리의 끝이 갈라진다. 옆을 보는 듯 밑을 보는 듯 비스듬한 몸이 바람을 따라 돌아갔다. 도망칠 기회를 살피는 동물처럼 사방을 살피는 놋시의 시선이 그만을 외면하고 있다.
테스의 손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외면하고 선 어깨를 천천히 끌어안자 곤두선 신경이 붙들린다. 뼈를 보이고 기울어진 등을 어루만지자 손바닥 아래 뛰는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이 고스란히 만져졌다.
그는 두 팔에 들어온 동생의 목덜미에 고개를 숙였다. 불안으로 들썩인 뺨이 귓가에 부딪혔다. 천천히 숨 쉬며 전신을 맞붙이자 잠깐의 걱정이 가라앉는다. 테스가 들이켜는 숨에는 여전히 한 줄기 달콤한 향기가 스며 있지만 품속의 몸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웠다. 놋시는 차가운 아침 공기에 순식간에 식은 체온으로 떨고 있었다. 다행이 열병의 미열은 아닌 듯했다.
테스는 놋시를 안아 들어 방으로 데려다줬다. 놋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큰 걸음은 몇 번 걷지 않고도 안에 들어와 대화가 무의미했다.
환해지는 밖에서 들어오며 보게 된 방 안은 어두웠다. 빛에서 그림자로 들어선 순간 뒤늦은 걱정에 놋시의 손이 테스의 옷자락을 당겼다.
하지만 곧바로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뛰쳐나가며 문을 열어 놓은 덕분에 방 안의 공기도 서늘해져 있었다. 풀숲의 짙은 바람이 달고 쓴 냄새를 모두 날려 보냈다.
공기 중에 남아 있었을 무형의 흔적은 지워졌다. 놋시는 흐트러진 침대를 가리고 서서 테스를 바라봤다. 방 안을 둘러보던 깊숙한 눈매에서 희게 빛난 눈동자가 그를 돌아본다.
“다시 악몽을 꿨구나.”
“아닙니다.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부인하려던 놋시의 입이 닫힌다. 그때의 악몽이 아니라고, 매캐한 연기와 비명이 먹먹하던 그런 꿈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었다.
진실은 알릴 수 없다. 놋시는 아직도, 무분별한 꿈도 아닌 상상으로 추잡한 쾌감을 얻은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기억조차 흐릿하지만 답은 그것뿐이었다.
놋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테스의 얼굴에는 곧은 선뿐이다. 살펴보던 서늘한 눈이 칼날의 옆면처럼 길고 예리해져 있다.
“잠을 잘 못 자서, 우물에는 물을 뜨러 간 것이고…….”
힘들게 마무리 짓던 목소리가 끝을 흐렸다. 테스의 미간에 가는 금이 그어졌다. 죄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쿵쾅거린 놋시의 고개가 결국 바닥을 향한다. 당장이라도 들킬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듣게 된 말은 놋시가 예상 못 한 우려였다.
“안 그래도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했다.”
“…….”
“네가 좋아하니 놔뒀지만……. 사로나가 생각나겠지. 아직 괴로운데도.”
“아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걸 알아 둬라.”
“…….”
“어차피 곧 겨울이니 뒤편 땅은 놔두자. 약재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설마 다피벳이 너에게 밭을 만들라고 시키진 않았겠지.”
“그건 아닙니다.”
“오늘은 집에서 쉬고 있어라.”
테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곧 호가의 발걸음이 나타났다. 그녀는 타게신의 말이 있었다며 더운물을 들이겠다고 했다. 천천히 하라며 침대를 정리하는 동안 놋시의 심장이 간신히 조용해졌다.
혹시 다피벳에게 화를 내진 않겠지. 놋시는 그것이 걱정됐다. 다피벳이 그의 일을 돕진 않았지만 하라고 한 적도 없다. 다피벳은 다양한 약재를 섞어 환약과 물약을 만들기 좋아했고 혼자 있기를 즐겼다. 그와 놋시는 화가와 조각가처럼 다른 목적으로 재료를 고르곤 했다.
테스가 화를 냈던가. 돌이켜 보지만 놋시는 당황으로 어수선한 자신의 눈을 믿기 힘들었다. 더운물로 씻은 그가 밖으로 나갔을 때 테스는 벌써 아침을 먹고 떠났다고 했다.
남은 하루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외출하지 않은 것만 다르다. 놋시는 테스의 말대로 뒤편의 땅을 덮어 두기로 했다. 그로서는 힘든 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곧 겨울이 다가오는 건 사실이었다.
놋시는 그날 내내 심으려고 준비한 종자와 잎을 틔운 싹을 모으고 땅을 다졌다. 낮잠을 잘까 생각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의 방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
오후에는 사테가 그를 찾아와 저녁을 함께하자는 다피벳의 초대를 알렸다. 놋시도 그를 보러 가려 했다. 당장 심지 않게 된 새싹 중에 필요한 게 있다면 줄 생각이었다. 그가 사테에게 말한 뜻은 자신이 추려 가져다주겠다는 소리였지만 다피벳은 그 즉시 뒤편의 땅으로 직접 찾아왔다.
“노리 님, 밭을 미루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곧 겨울이니까요. 봄에 하는 게 좋을 테죠.”
“맞아요. 수도의 겨울은 따뜻한 편이지만 그래도 땅이 얼면 힘들어요.”
상냥한 목소리로 놋시의 곁에 다가온 다피벳은 필요한 걸 가지라는 말에 기뻐했다. 이전에는 땅에 뭘 심는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줬다. 수도의 땅과 날씨를 잘 아는 그가 봄의 첫날 무엇을 심는 게 좋은지 줄줄 떠든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질문과 답으로 이어졌고 사테가 음료를 따로 가져올 정도로 길어졌다. 부르는 말에 놋시도 햇볕에 따뜻해진 흙을 털어 내며 다피벳이 있는 그늘로 갔다. 다피벳은 빈 땅에 방치되어 있던 넓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놋시는 무엇이 다피벳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는지 몰랐다. 소매를 걷었던 그대로 건네주는 잔을 받은 그는 느릿한 목소리를 듣고야 상황을 깨달았다.
“노리 님의 상처는 오래된 것이군요.”
“…….”
놋시의 왼손이 잠깐 굳었지만 그뿐이다. 그는 도자기 잔을 깨뜨리지 않고 자리에 놨다. 걷었던 소매를 천천히 내리자 숙어진 뺨으로 시선이 따가웠다. 다피벳의 질문에는 어른스러운 무던함이 있었지만 한 줄기 호기심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화상입니다.”
“그래도 치료는 잘된 것 같아요. 부위가 넓은데도 손을 쓰는 데 불편이 없으시니.”
“어머니가……. 자주 다니는 온천이 있었습니다.”
“음. 직후에는 좋지 않을 테지만, 꾸준히 쓰면 효과가 있는 방법이죠.”
다피벳은 더 묻지 않았다. 화상은 어디서든 쉽게 낫지 못하는 상처였다. 나중의 저녁 시간에도 그와 관련된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놋시는 다피벳의 시선이 소맷자락에 가려진 왼손에 몇 번이나 닿아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귀하게 큰 그에게는 인상 깊은 흉터였지 않을까.
테스는 언제나처럼 밤늦게 돌아왔다. 놋시가 아직 깨어 있었으니 전날보다는 이른 시간이었다. 자려고 누웠던 놋시는 아득하게 들리는 말 울음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편의 땅을 덮었다고 말해야 할까?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까? 놋시의 의식은 사소한 대화를 떠올렸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다피벳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박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화상을 본 것은 굳이 말할 만큼 큰일이 아니다. 시도르의 여럿도 그것을 알았고 포에를 비롯해 테스의 곁을 따르는 이들도 모두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마음이 불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수를 한 것만 같았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못했다. 놋시가 망설이는 사이 테스는 벌써 칼을 벗고 몸을 씻었다. 물기가 남은 얼굴로 그의 방에 들어온 테스의 손에는 커다란 등잔불이 들려 있었다.
“아직 깨어 있구나.”
“이제 자려고요.”
“그래.”
“…….”
안마당을 건너온 테스의 벗은 어깨가 어둠과 등잔불의 음영으로 뚜렷이 떠올랐다. 드러난 몸의 굴곡 위로 노랗고 기다란 불빛이 흘러내렸다. 가슴과 등을 넓게 가른 그림자가 자잘한 무늬처럼 허리에 붙었다가, 곧 사라졌다. 테스가 불을 끈 탓이다.
가을이 되었다고 차가운 밤공기도 그에게는 춥지 않겠지. 놋시는 침대에 앉은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다가온 것은 말이 아니다. 벽에 쌓인 물건을 둘러보다 털 담요를 하나 더 가져온 테스가 놋시의 곁에 함께 누웠다.
왜 오늘은 여기에 눕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답하지 않는다. 테스는 시도르의 밤처럼 놋시를 안고서 뺨에 입술을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들떴던 놋시의 등허리가 느리게 무게를 놨다. 그의 어깨를 안고 몸에 팔을 두른 테스의 호흡은 바깥의 풀벌레 소리보다 작았다.
길고 노란 불빛은 모두 꺼져 있었다. 서늘하게 닿았던 테스의 피부는 곧 놋시의 체온을 넘겨받았다. 악몽을 꾼다고 생각해 이러는 거구나. 놋시는 테스의 걱정과 마음이 고마웠다.
편안한데도. 두렵지 않은데도. 그런데도 놋시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오랜만에 함께 누운 탓일까. 아니면 간밤의 꿈 때문일까. 꿈도 아니고 뭣도 아니던 새벽의 혼란 때문일까.
놋시의 심장은 일정한 테스의 호흡을 쫓아가지 못했고 길을 달리해 뛰기 시작했다. 한자리에 누운 테스를 자신이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무엇이 더 나쁜지 알 수 없게 된다.
오랜만이라 낯설어 그럴 거라고, 놋시는 자신을 속이며 눈을 감았다. 아무리 멀어져도 잊지 못하는 체취를 들이마시자 피 냄새 대신 수도의 독한 향료가 한 줄기 느껴졌다. 그래도 쇠 냄새는 그대로였다.
“…….”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열렸던 놋시의 입이 침을 삼키고 다물렸다. 혼자만 들을 수 있었을 소리가 넘어가는 목울대로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잠들었다고 믿었던 테스가 없는 소리를 들은 듯 몸을 일으키고, 자는 척하지 못하는 놋시는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만다.
가만히 닿아 온 시선은 뜨겁지 않지만 차갑지도 않다. 놋시는 스르륵 그의 밑을 빠져나간 테스의 오른손을 어깨 위에서 느낀다. 얇은 옷감을 넘어 더워진 손끝이 도드라진 뼈를 더듬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그의 귀에, 갑자기 떨어진 테스의 속삭임은 깜짝 놀랄 소리였다.
“……열병이 빨리 온 걸까 싶어 걱정했다.”
“예?”
“네 몸에서 단 냄새가 났다. 창백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지.”
“…….”
놋시의 눈앞이 찰나로 점멸했다. 열병의 말이 나오자마자 솟았던 부정은 더 큰 절망에 뒤덮였다.
아침의 흉한 꼴을 테스도 알았구나. 잠시나마 그의 눈을 속였다고 안심한 스스로가 한심하고, 애초에 추잡한 짓을 한 육체도 증오스러웠다. 아니, 몸만이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놋시는 테스의 눈에 더러운 상상을 들킨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테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길고 단정한 입매가 끝을 늘이며 놋시에게 닿았다. 입술을 겹치고 짓는 미소가 몸속을 울리는 웃음소리처럼 달콤했다.
“내가 말했었지. 짐승이 아니라 느끼는 거라고.”
“…….”
“짐승은 언제나 나일 테니까.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이 닿은 채로 열렸다 닫히는 동안 놋시의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바늘에 찔리듯 따끔거리는 것도 같고, 구멍 난 곳에 바람이 통하듯 선득하기도 했다.
조용하게 들어온 혀가 바닥을 더듬고 천장을 헤매는 사이 손이 붙잡혔다. 어느 틈에 오른손을 붙들린 놋시의 몸에 테스의 전신이 닿아 왔다. 두들기다 물에 식힌 쇠처럼 단단한 육체가 차분히 무게를 실어 오자 굴곡의 요철이 맞붙으며 뼈가 근육에 닿고 살이 눌린다.
“으음…….”
마주한 심장의 크기에 눌린 것처럼, 아랫배를 찌르는 뜨거운 성기에 놀란 것처럼, 놋시의 막힌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그런데도 감긴 눈은 떠지지 않고 아늑한 어둠에 잠겨 들었다.
확실한 실체로 그를 안고 가두는 테스의 육체 밑에서 잠에 빠져들던 놋시는 입이 트인 한순간 알아차린다. 어젯밤 그의 잠을 깨웠던 악몽 속의 막막함이 무엇인지 불현듯 알게 된다.
시도르의 그 밤. 별이 내려온 것처럼 웃던 테스가 열병의 열기 없이 놋시의 살을 열고 몸을 섞었을 때. 꿰뚫리고 채워지며 몸서리치던 놋시가 느꼈던 꽉 막힌 속박.
막힌 건 밑이 아니라 위였고 사방 모든 곳이던 그때의 벗어날 길 없던 구속이, 불가능할 크기의 고통이 삼켜지고 변화되던 그때의 감각이, 어젯밤 놋시의 잠을 깨게 만든 악몽의 정체였다.
그날 밤부터 테스는 매일 놋시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놋시를 만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의 살을 열지 않았고 몸을 섞는 통증으로 눈물짓게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테스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놋시의 흥분을 모른 체하지도 않았다.
왕궁에서 작위가 수여된다는 20일의 아침. 놋시는 밤사이 젖어 든 살결을 헤집는 테스의 손가락에 잠을 깼다.
본색이 드러난 놋시의 공포는 과거의 어지러운 꿈으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보면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의 반복이었다.
과거의 언젠가, 주인의 열병을 알아보려 음란한 그림책을 뒤져 보던 어린 놋시의 머리가 모호한 짐작으로 테스와의 성교를 꿈꿨었다. 지금은 아는 것이 늘어 있다. 놋시는 완전한 결합으로 열병을 보내고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일은 그렇지 않다.
경험으로 새겨진 삽입의 통각은 놋시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떠올리는 순간 온몸이 뱉어 놓는 이런 기억이, 첫째가는 이의 열병을 알게 된 머릿속에서 거듭 태어났다. 격렬한 환상으로 떠올라 새로운 꿈을 만들어 냈다.
시도르의 그 밤 놋시는 열병의 열기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이었다. 놀란 마음이 고통을 가릴 만큼 확실하게 겪었던 삽입과 이후의 쾌락은 마냥 좋은 무엇으로 남지 못했다.
놋시가 알게 된 성적인 경험은 모두 증오스러운 열병과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테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 건조하고 부드러운 입술과 마디가 긴 손가락과 넓고 단단한 어깨를, 뜨겁고 거대한 성기를 생생히 알게 된 놋시는 분명치 않은 마음으로 판단을 미루고 생각을 피했다. 죄의 길을 걷는 테스가 미쳤다고 믿으면서도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대처였다.
하지만 해방을 알게 된 본능은 출구를 원했다. 주인에게 부정당한 욕구는 말 못 할 꿈처럼 잠든 놋시의 몸을 차지했다. 바로 곁에 들러붙은 테스의 손과 숨결도 한 몫을 했을 일이다.
수여식이 열리는 아침 테스는 늦잠에 빠져 있었다. 준비는 왕이 할 일이고 그는 가서 받기만 하면 된다.
정오에 시작되는 예식을 위해 바쁜 이들은 왕궁의 시종들뿐이었다. 함께 가려고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던 세조까지 저택에서 밤을 보냈지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새벽이 하얗게 번져 사라지며 방 안의 어둠이 그늘로 바뀐 이른 아침에, 테스를 깨운 것은 냄새다. 그는 두꺼운 잎사귀 밑에서 물러지는 과육의 단내처럼 이끌리는 향을 맡으며 눈을 떴다.
모로 누운 몸은 등 뒤의 고요함과 슬그머니 창틈으로 들어온 아침 공기를 느꼈다. 품 안의 놋시는 아직 잠들어 있다. 이 모든 걸 한순간에 읽어 낸 그가 잠시 후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의 품에 안긴 놋시는 잠들어 있었지만 육체는 그렇지 않았다. 가볍게 벌린 입에선 목구멍에서 솟는 높은 숨소리가 삐져나왔다. 흐응, 흐읏, 빗방울 같은 젖은 호흡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놋시의 두 뺨에도 물기가 올라 색이 짙었고 감은 눈가의 뾰족한 속눈썹도 자꾸 떨렸다. 단맛과 신맛이 섞인 체취를 들이켜며 입에 고인 침을 삼킨 테스가 조심스레 어깨를 일으켜 본다.
가는 목덜미를 받쳐 주던 오른손은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담요를 들추고 움직인 그의 왼손이 살에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옷자락 위를 더듬었다.
호흡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를 지나자 살가운 체온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신중한 손은 곧 옷을 적신 묽은 정액의 흔적에 닿았다. 차분한 호흡은 얽히고설킨 방 안의 향기 중 풋풋한 한 줄기를 골라냈다.
테스는 그가 보게 된 놋시의 꿈을 짐작하고 만다. 잠든 의식 몰래 꿈꾸던 몸이 성공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욕망을 배출시킨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어째서일까. 테스의 팔 안에서 놋시는 간간이 어깨를 떨었다. 몽정의 뒤편에서 가라앉지 못하고 잠을 설치는 동생을 내려다보던 테스가 어깨를 기울인다.
손바닥에 눌린 마른 배가 간지럽다는 듯 가라앉으며 길을 내줬다. 촉촉한 피부를 타고 내려간 테스의 손은 교묘한 움직임으로 잠을 깨우지 않았다. 흔적이 남은 바지 자락 밑에서 단단함을 잃은 오메가의 성기가 건드리는 손가락에 잡히지만 형태를 알아보듯 잠시였다.
살이 적은 허벅지 사이의 빈틈으로 바닥을 짚은 테스의 손이 방향을 바꿨다. 흐읏, 으응, 혼미하게 숨을 뱉는 놋시의 입술 위로 닿을 것처럼 고개가 가까워진다.
놋시의 뒤는 젖어 있었다. 흔적을 남기고 가라앉은 음경과 달리 열기가 사라지지 못하고 넘쳐흘렀다. 체액으로 미끄러워진 살결을 비집고서 입구를 찾은 손가락 하나가 가만히 그 위를 덧그렸다. 그러자 좁은 주름이 떨리며 몇 번을 조른다.
“읏, 흐응, 응…….”
테스의 입술 밑에서 놋시의 숨이 커지고 늘어났다. 잠든 눈두덩과 열린 입술을 바라보며 테스는 열병의 미열 없이도 풀어 헤쳐진 놋시의 속을 더듬었다. 어느새 기울어진 어깨가 그림자로 놋시를 덮치고, 비스듬히 닿은 가슴께에 짓눌리는 옷자락은 한 겹이다.
놋시의 신음은 점점 차올랐다. 꿈에 섞여 든 테스의 손가락이 좁은 속을 헤집자 내밀한 살도 질척해진다. 새롭게 나온 체액이 흐르며 길쭉한 마디를 적시고 관절을 따라 흘렀다. 굽혀진 끝에서 손등으로 가지 못하며 옷자락을 적신다.
소리를 막지 않고 눈을 떼지 않으며. 깊숙이 침입해 내벽을 더듬던 테스의 손가락이 두 개가 됐다. 곤두선 검지를 따라간 굽혀진 손등의 뼈마디가 좁은 입구를 문지르자 주름이 밀리며 벌어진다. 미끄러운 점막을 채우고서 흥건히 젖은 손끝이 닿지 않던 굴곡에 닿았다.
그 순간 놋시의 고개가 크게 젖혀졌다. 흐느끼던 호흡을 멈추고서 한 줄기 전율에 관통당한 몸이 테스의 어깨 밑에서 허리를 들고 가슴을 띄운다. 막는 게 없는 허공으로 무릎이 치솟고 쓰러지자 매끄러운 성기가 머리를 세우고 따라 흔들리지만 나오는 게 없다.
테스는 사정의 배출 없이 일어난 놋시의 절정을 지켜보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자잘한 경련으로 더 뜨거워진 속이 또다시 젖으며 확 하고 냄새가 퍼졌다. 오메가의 달콤한 체액이 짙은 향을 내뿜으며 테스의 손바닥을 적시고 있다.
단내가 진동하는 숨을 뱉으며 놋시의 눈이 열린 게 그때였다. 열병의 열기 없이도 젖어 든 속살을 테스의 손이 헤집고 쾌감으로 채워 나가는 동안 그의 눈이 열렸다.
혼란으로 흐릿한 눈동자가 빛을 얻으며 분명해지고, 열 오른 얼굴이 입을 다물고서 입술을 깨무는 그 순간. 테스는 놋시에게 무슨 꿈을 꿨냐고 물었다.
어지러운 꿈에 녹아 있던 놋시는 하얗게 비워진 머리로 눈떴다.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테스의 곧은 얼굴은 역광의 테두리에 감싸여 있었다. 그림자에 잠긴 목덜미 뒤로 빛무리 같은 금발이 반짝였다. 선명한 형상을 알아본 놋시는 눈을 깜빡이지만 곧 온몸을 굳혔다. 속에서 꿈틀댄 자극이 몸 안을 떨게 하며 머리까지 닿아 왔다.
비스듬히 안긴 고개가 저절로 밑을 향하자 적나라한 광경이 훤히 보였다. 배를 보이고 허리가 빌 만큼 벗겨진 옷자락 사이로 다리 사이에 파고든 손목이 있다.
아니, 손목은 보이지도 않고 길게 굴곡진 팔만 보인다. 넓은 어깨에서 각진 선으로 이어진 테스의 손이 보이지 않게 들어가 그의 속을 헤집고 있었다.
찬 기운에 떠는 아랫배 위로는 혼자 남겨진 오메가의 성기가 부풀어 있고, 아무래도 한 차례 흔적을 만든 것 같다. 말이 나오지 않아 입술만 깨무는 놋시에게 테스가 묻는 첫말은 더 수치스러웠다.
“무슨 꿈을 꿨지?”
“…….”
“꿈이 길었다. 소리도 나고, 숨이 가쁘고.”
상황을 알게 된 놋시의 얼굴이 붉어지다 하얘지며 정신없어하지만 다시금 번지는 색은 목까지 물들여 놓았다. 잠들기 전의 입맞춤도 조용히 받아넘기던 그의 육체가 혼자 꾼 꿈으로 묽은 정액을 토해 놓은 것 같다.
답하지 못하는 놋시의 고개가 선 굵은 팔뚝 위에서 움츠러들지만 멈춰 있는 것은 그의 몸뿐이다. 모습을 보인 테스의 왼손이 살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젖은 손바닥이 부풀어 있는 성기를 지그시 누르며 움직이자 깨물린 입술에 힘이 더해졌다. 으읏, 놋시는 목에서 나는 소리를 막지만 밑에서 오는 손은 막지 못한다.
배에 체액을 묻히며 기어오른 테스의 손가락이 놋시의 옷을 들치며 가슴께를 어루만진다. 살이 없는 가슴에 습기와 열기가 동시에 겹쳐지고 길쭉한 손마디가 유두를 잡아 누른다.
“흐음…….”
놋시의 목에서 나던 신음이 코를 울리며 새어 나가 버렸다. 배를 보이고 누운 동물처럼 붙들린 그의 몸을 형이 손이 만지고 있는데도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못한다. 아무렇게나 놓였던 놋시의 손이 가슴을 더듬는 손목을 잡지만 밀려날 기색이 없다.
목덜미를 받쳐 주던 팔도 어느새 손으로 변해 있다. 귓가를 건드리던 손가락이 크게 열려 뒷목을 잡자 고개를 돌리기도 힘들어진다. 잘 보겠다는 듯 테스의 어깨가 멀어지지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그 밑의 손도 멈추지 않는다.
흐지부지 지워지는 꿈의 연장처럼 놋시의 머리에 열이 오르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짧게 번쩍이는 자극이 마른 절정으로 예민해진 몸을 크게 휘두른다.
마음대로 굽혀졌던 허벅지가 어느 틈에 서로를 찾으며 부딪친다. 사이가 뜬 그 밑에서 흠뻑 젖은 입구가 숨을 참듯 웅크리지만 다시 풀리고 새롭게 젖어 들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보다 더 놋시를 괴롭히는 건 웃음이 섞인 테스의 목소리다.
“무슨 꿈을 꿨기에 이렇게 숨이 가쁘지…….”
나직한 말을 들으며 놋시의 눈이 저절로 세게 감겼다. 숨이 가쁜 건 꿈이 아니라 테스의 손 때문인데. 부끄러워 기절하고픈 마음에 화가 얹히며 눈물이 맺힐 것 같다.
그때 갑자기 테스의 체취가 멀어졌다. 가슴과 배를 더듬던 손이 바닥을 짚고 목 뒤를 잡은 손도 허공으로 빠져나갔다. 뒤틀리고 기울어지다 평평해진 놋시가 정신을 차렸을 때 테스는 다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과 다른 것은 그 손에 잡힌 게 놋시의 두 다리라는 점이다.
길고 마른 다리를 가슴에 안은 테스가 허리를 굽히자 놋시의 몸이 저절로 둥글게 말렸다. 테스는 놋시의 무릎 두 개를 한 손으로 모아 잡고서 다른 손으로 바지를 벗겼다.
곧 허벅지를 지나 엉성하게 떠 있는 종아리까지 맨살을 보이고 만다. 밀리는 힘에 뻗은 놋시의 양팔이 바닥의 보드라운 천을 붙잡는 사이 테스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밝아진 아침 흰빛에 닿아 얼굴의 반이 달라 보인다.
투명해진 흰자위와 깊숙한 초록색 눈동자 옆에는 높게 솟은 콧대가 뻗어 있고 그 옆의 그림자가 다른 눈을 가렸다. 가려져도 빛나는 눈동자의 검은 동공이 새까맣게 번뜩였다.
우물 바닥처럼 깊은 어둠은 놋시에게 낯설지 않았다. 꿈에서 본 것 같고 그제도 본 것 같은 열렬한 욕망을 알아본 놋시의 심장이 기묘하게 들뜬다. 그 들뜬 마음이 알게 된 쾌감에 대한 기대임을 깨달은 그의 뺨이 다시금 창백해진다. 무서운 자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래서 테스의 말을 놓치고 만다. 앞을 놓친 목소리가 뒤늦게 놋시의 귀에 들려왔다.
“……그렇게 만든 게 누구지.”
“예?”
“속을 열어 불을 피우고, 이렇게 적셔 놓은 게 누구인지…….”
아, 작게 열린 놋시의 입이 숨을 모으며 멈춰 선다. 서늘해졌던 젖은 살결에 뜨거운 살덩이가 닿았다. 뼈가 있는 것처럼 단단하니 살이라 말하기도 버거운 그것이다.
표면이 불거진 더운 몸통이 비스듬히 놋시의 뒤에 비벼지고, 미지근한 체액에 몸을 적신 테스의 성기가 점점 더 뜨거워지며 생생해졌다. 살결을 문지르는 열기에 속 안의 허기가 울컥하고 몰려들었다.
그러더니 움직인다. 미지근한 마찰이 따가울 만큼 거세져 놋시의 숨을 달군다. 흐읍, 으응, 소리가 걸리던 머리는 또다시 질문을 놓치지만 젖은 끝이 입을 맞추듯 닿아 멈추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흥분으로 열린 틈새에 끝을 겹친 성기의 단단함은 생소하고도 낯익다. 소름이 돋은 뒷목은 공포로 인한 게 아니다. 테스의 가슴에 눌려 붙들린 놋시의 허벅지가 긴장으로 비비적댄다.
언제 감았는지 모르는 눈을 서둘러 깜빡이는 놋시에게 테스가 되물었다.
“네 꿈에 내가 나와, 살을 열고 몸을 섞었구나.”
“…….”
벗은 다리를 붙잡히고도 차마 답하지 못하던 놋시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들뜨는 쇄골이 닿을 만큼 접힌 턱 끝에서 자꾸 깨물려 붉어진 입술이 애처로웠다.
답을 얻은 뒤에도 붙은 몸은 떨어질 기색이 없다. 놋시의 입술이 다시 깨물리고 눈꺼풀이 속눈썹을 짓씹는다. 다리를 들려 벗겨진 자신의 하체가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 탓에 눈 뜨고 있기가 버거웠다.
“흣…….”
그러다 감은 눈과 씹힌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샌다. 머리를 들이밀었던 테스의 성기가 서서히 그의 살을 열며 빠져들듯 침입했다. 조금씩 밀고 들어오던 두툼한 압박이 갑자기 깊어지자 잡힌 다리가 놀라 어긋나지만 벗어날 길이 없다.
“흐읍, 으응…….”
길고 긴 삽입에 놋시의 속살이 달아오르고 신경이 불붙어 녹았다. 뜨거운 감각에 침입당한 육체가 숨을 참으며 속을 고르는 사이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인다. 뻐근하게 머무르는 무거운 통증이 차고 더운 바람에 날아가듯 변하고 있다.
놋시의 의식에 새롭게 자리 얻는 첫 번째 자극은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이고 두 번째는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꿈으로 착각하기 불가능하게 적나라한 삽입을 해놓고도 테스의 얼굴은 잠잠했다. 놋시는 물기로 흐릿한 눈을 깜빡여 시야를 틔운 뒤 테스를 바라봤다. 시선이 붙들린다.
“아기는, 안 되는…….”
“그래.”
“…….”
“아직은 무섭겠지.”
내쉬는 숨에 잠긴 테스의 목소리는 간신히 들리지만 놋시의 몸 안으로 전해진 호흡은 그렇지 않았다. 내밀해진 접촉은 미약한 움직임으로도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살을 열고 들어와 섞인 몸이 다른 박자로 놋시의 몸을 뒤흔든다.
“아, 읏.”
뜨거워진 속을 참으며 얕은 자극에 몸서리친 놋시가 시선을 내리지만 여전히 직시하기 어렵다. 아침 햇살이 훤하게 들어오는 유리창 덕에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다. 테스의 손에 안긴 다리도, 굽혀져 들린 허리도, 발그레한 뺨처럼 붉어진 성기까지 다, 보이지 않는 게 없다.
해가 들어올 만큼 창이 열려 있는데, 누군가 지나가다 보진 않을까. 섬뜩한 생각에 놋시의 고개가 옆을 향하지만 초점을 맞추기도 전에 소리가 먼저 터진다.
“아!”
열이 몰려 둔해진 내벽이 거대한 성기의 맥박에 맞춰 흔들렸다. 밀착된 점막과 표피가 서로를 구분하기 어렵게 하나처럼 들러붙다 완전히 떨어져 버린다. 짧게 머리를 흔든 테스의 성기가 길게 빠져나가며 놋시의 속을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들어오고, 다시 들어왔다. 숨을 뱉을 만큼 짧고 선명한 삽입이 거듭되며 놋시의 속을 자꾸 채운다.
“흑, 읏, 응, 응…….”
바닥을 움켜쥔 놋시의 손이 버티지만 밀리는 등은 어쩔 수 없게 된다. 고개를 젖히며 들뜨는 가슴과 천을 구기는 등허리가 번갈아 가며 들썩였다. 떠버린 하체 밑을 어느새 테스의 허벅지가 받쳐 주고 있었다.
젖은 속이 끌려다니고 다시 밀릴 때마다 척척한 소음이 요란해진다. 그때마다 이유 모를 초조함이 놋시의 배 속에 쌓이다 닿아 오는 무게에 찔린다. 테스의 몸이 그의 살을 열고서 섞이면 섞일수록 아픔이 사라졌다.
“하아. 후…….”
“흐응, 후으, 으응…….”
간간이 숨이 깊어지는 테스와 달리 놋시의 호흡은 시끄러웠다. 저릿한 통증을 바닥에 깔고 위를 달리는 자극은 점차 쾌감으로 변해 갔다. 흐응, 으읏, 늘어나는 신음은 더 이상 목소리가 아니다. 질척해진 속에서 엉겨 드는 육체의 잡음일 뿐이다.
들린 허리가 밀렸다 당겨지고 굵은 몸통이 젖은 속으로 매끄럽게 되돌아올 때마다 놋시의 목에 열이 쌓였다. 고조되는 열기가 숨통을 막을 것 같아 두렵지만 그래야만 터질 것이다.
한순간 놋시는 뜨거운 성기가 들어왔다 나갈 뿐인데 어째서 이런 기분이 되는지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살을 열고 몸을 섞을 뿐인데 왜 심장이 녹아들고 속이 젖는지, 왜 머리가 저릿하고 눈앞이 흐릿한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잠깐 숨이 멎고 앞이 트였다. 놋시의 등허리가 사선으로 갈라지듯 놀라 굳는다. 다리를 붙잡지 않은 테스의 다른 손이 그의 옆구리 밑 튀어나온 뼈에 엄지를 문지르고 있다. 눌려 잡힌 허벅지와 겹쳐진 살결 사이 무방비한 몸이 큰 손에 만져지며 야릇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얼얼한 자극으로 둔감해진 놋시의 속에서 낯선 한기가 솟고, 얼음이 닿은 것처럼 순간적인 저릿함이 충격으로 나타나 그 자리에서 녹아 버렸다.
겹겹이 쌓인 숨에 소리가 막힌 놋시를 테스의 성기가 다시금 꿰뚫었다.
비명처럼 높아졌던 신음이 줄을 잡혀 비벼지고. 닿지 않던 끝까지 짓뭉개며 속을 파고든 테스의 성기 밑에서 놋시의 손톱이 바닥을 놓고 손바닥을 찔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핏줄이 말라붙듯 감각이 사라지고 폭발해 버린다.
“흐윽, 으응, 흑, 하윽!”
반으로 접힌 허리 위에서 놋시의 성기가 몸을 떨지만 땀처럼 흘린 약간의 습기 말고는 쏟은 게 없다. 찰박한 소리가 날 만큼 흥건해진 체액이 빠듯한 주위를 적셔도 심장이 굴러다니듯 어수선한 가슴께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놋시가 마른 울음을 삼키며 짧은 절정의 여운으로 떨리고 있는 그때, 두툼한 머리부터 불거진 몸통을 넘어 뿌리까지 닿아 있던 테스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경련으로 열이 번지던 내벽이 들러붙어 매달리지만 테스는 곧바로 다른 틈을 파고들었다. 떨림이 이어지는 놋시의 허벅지 사이에 질척한 체액을 묻히며 머리를 비벼 댄 알파의 성기가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살갗을 적셨다.
그 막힌 배출이 퍼트린 냄새가 놋시의 정신을 일깨웠다. 피와 쇠의 향이 덧칠된 알파의 본능이, 뜨거운 찰나로 살을 녹일 테스의 욕망이 피부를 적시고 맛으로 느껴지는 형체로 그의 몸에 쏟아졌다.
희뿌연 정액이 살갗 틈새에서 터져 나와 앞으로 새고 밑으로 흐른다. 채 다물리지 못한 구멍 위로 흐르고 사정하지 못해 열이 몰린 놋시의 성기에도 흘러내린다. 절정의 여운에 잠겨 부들거리던 몸이 앞뒤로 온통 젖어 들었다.
쇳내가 나는 정액과 단내를 풍기는 체액이 한데 섞여 햇빛도 씻기지 못할 정사의 체취로 공기를 물들였다.
그렇게 온통 젖어 버린 뒤에야 잡혔던 놋시의 다리가 풀려났다. 지나친 쾌감에 허물어진 몸은 손도 까딱하지 못하고 늘어져 있다. 힘을 잃은 허벅지가 벌어져 가슴에 닿을 만큼 눌리다 하나는 바닥에 놓이고 하나는 손에 잡힌다.
열에 취한 피부 위로 쏟아졌던 테스의 정액이 잠깐 사이 식으며 서늘한 대비를 만들지만 제대로 느낄 새도 없다. 다리를 벌리고 맞붙는 탄탄한 몸에 놋시의 성기가 눌리자 멎었던 입에서도 말이 나왔다.
“그, 응, 더는 안……. 흐읍, 흐응, 으음…….”
입술이 열리고 혀가 얽혔다. 말이 막히지만 목구멍 속 신음은 끊이지 못한다. 정액으로 질척해진 놋시의 아랫배에 두 개의 성기가 맞닿아 있다.
여전히 굵고 뜨거운 테스의 성기가 젖은 살갗을 짓누르며 놋시의 몸 위에서 움직였다. 허리가 뜨는 사이 가슴이 닿고 배가 눌리자 열이 몰린다. 매끄러운 오메가의 성기가 재차 몸을 떨며 버둥거린다.
“으응, 흣, 아, 흐읏…….”
지친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높아지다 작아졌다. 테스의 팔은 부족하다는 것처럼 놋시의 몸을 조였다. 바짝 붙은 체온이 한데 녹는 사이에서 엉성한 마찰과 성급한 충돌로도 무거운 자극이 연달아 생겨난다. 신음이 커지고 만다.
놋시는 배 위에서 미끄러지는 자극만이 아니라 목덜미를 깨무는 찌릿한 통증도 겪느라 정신이 없다. 허리를 조이는 손도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도 모조리 집요한 쾌감으로 번졌다.
어질거리는 절정이 가라앉기도 전에 난잡한 애무가 이어지자 생각이 불가능했다. 눈물이 날 만큼 온몸이 아픈데도 붙들리고 문질러지며 새는 소리는 웃음이 섞인 것처럼 높다. 놋시의 뾰족한 숨이 위로 던져지고 날아다녔다.
그의 귀에 들리는 테스의 말에도 그런 것이 섞여 있었다. 놋시는 자신의 이름 같기도 하고 젖은 한숨 같기도 한 속삭임을 들으며 휩쓸려 갔다. 상상이 불가능해 꿈도 꾸지 못할 노골적인 행위 끝에 어느 순간 기절하듯 뱉어 낸 것 같다.
놋시가 마지막으로 본 세상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없었다. 그는 햇빛 아래서 더러워진 몸을 만지는 테스의 손과 입술을 느끼며 잠들었다.
그날 테스는 놋시에게 가마를 타라고 말했다. 말을 타고 올라갔다 사람에 치여 다칠까 걱정된다는 이유였다.
놋시도 그편이 나았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얼굴조차 내놓기 부끄러웠다. 목깃이 높은 망토를 골라 입고서 처음 타본 가마는 작은 마차 같았다. 말이 아닌 사람이 끌어 준다는 게 어색할 뿐이었다.
그날의 수여식은 타게신 하나만을 위한 예식이었다. 왕궁의 앞뜰에서 정문을 열어 놓고 거행된 의식에는 초대받은 사람이 적었지만 구경꾼이 많았다. 길지 않은 순서로 끝났다며 뿔이 울리자 사람들의 환호가 높이 퍼졌고 경험이 적은 놋시의 귀에도 심상치 않은 크기였다.
테스의 우려대로 사람의 머리가 넘쳤다. 놋시가 말에 둘러싸여 가마에 실려 올라왔던 길은 새까맣게 메꿔져 있었다. 타게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뜻이겠지만 놋시에게는 편한 길로 보이지 않았다.
새로 받은 칼을 차고서 다가온 테스는 놋시를 저택으로 먼저 보냈다. 원래라면 놋시도 왕을 만날 수 있지만 구경꾼이 예상외로 많아 걱정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포에는 왕의 명령으로 안내해 준 자를 따라 왕궁의 수많은 뒷문 중 하나로 놋시를 이끌었다. 도착은 금방이었다. 놋시는 모두에게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메다로와 베단은 고개를 저었다.
“왕궁엔 이미 가볼 만큼 가봤습죠.”
“그래도, 만찬이 있을 텐데요.”
“여기서 못 먹을 만큼 귀한 게 있다면 벌써 누군가 팔고 있을 겁니다.”
자신 때문에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마음이 쓰이던 놋시는 오후 늦게 돌아온 다피벳을 보고서야 안심했다. 혹시나 모를 소란을 피해 나가 있었다는 그는 왕궁의 음식이 대단할 것도 없다며 놋시를 웃게 만들었다.
“체레오의 왕궁에서 제일 멋진 건 아마 건물일 거예요. 초대 국왕이 세웠다는 사원이 특히 화려하죠.”
“사원이 그 안에도 있군요.”
“주먹만 한 보석이 벽 여기저기 박혀 있을 정도랍니다. 이제는 타게신도 방문이 쉬울 테니까, 나중에 조용해진 뒤 구경을 부탁해 보세요.”
다피벳의 말대로다. 작위를 받은 타게신은 이제 귀족이었다. 하지만 놋시의 생활에는 변화가 적었다.
밤늦게 돌아온 테스는 수도의 경비를 책임지는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했다. 나갔다 돌아오는 것은 마찬가지일 상황이라 놋시가 신경 쓸 일은 없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음 날은 사방에서 보냈다는 선물이 저택에 밀려들었지만 테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들어온 선물 중 그나마 마음에 들어 한 건 커다란 책상이었다. 기다란 상자처럼 무거운 나무 책상은 사방의 다리를 연결하는 조각이 아름다웠고 모서리마다 둥근 장식이 붙어 있었다.
메다로는 놋시의 머리만 한 그것이 마노라고 불리는 광물이라고 알려 줬다. 이 정도면 보석이라고 부르기 어렵다며 웃는 포에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치는 걸로 값어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수여식 이후 며칠간 일어난 일 중 제일 큰 사건은, 왕의 것만큼 귀한 책상을 선물 받은 테스가 차마 거부하지 못한 왕자의 방문이었다.
처음 테스가 왕자의 방문을 예고했을 때 놋시는 놀랐지만 그것은 반 정도 예의를 표하는 마음이 일으킨 반응이었다. 에체르는 두 번이나 직접 찾아왔고 공주의 방문이 그런 것이라면 왕자의 방문이 그보다 대단할 리 없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공주의 그것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놋시는 왕자가 온다는 날 아침에 병사들의 복장을 단속하는 메다로를 보고서야 차이를 인식했다.
에체르가 오는 날 메다로는 그녀가 왔는지조차 몰랐던 것 같았는데. 이 왕자는 격식을 따지는 사람인 걸까?
혹시 싶어 놋시는 주변에서 그에게 해줄 주의를 기다렸다. 누구도 더하는 말이 없었다. 다피벳이 참견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놋시의 질문을 의아해했다.
“타게신의 저택에 왕자가 온다고요? 그럴 만한 건 자케일 님 하나뿐인데. 타게신이 이름을 말하던가요?”
“왕자라고만 했고……. 아마, 함께 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타게신의 손님이니 노리 님이 걱정할 일은 없어요. 인사를 해도 짧을 겁니다.”
“어떤 분이신지…….”
“올해 스물이던가. 친분이 있는 건 모르지만 타게신과 낯선 사이는 아닐 거예요. 그분도 알파니까요.”
“…….”
그렇다면 기사의 수련 기간에 알고 지낼 만한 나이다. 놋시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피벳은 무슨 생각인지 묻지 않은 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줬다.
자케일은 현왕인 리제크의 장자였다. 그가 다음 왕이 된다면 체레오는 몇 세대 만에 알파 기사인 왕을 갖게 된다.
체레오의 왕족에게는 알파와 오메가의 핏줄이 흘렀다. 에체르의 아버지인 지체마는 알파가 아니었고 그의 맏아들이던 리제크도 알파가 아니었다. 둘째인 공주는 오메가였고 그 세대는 그걸로 끝났다.
왕이 된 리제크의 맏아들이 알파로 태어났을 때 왕궁은 수런거렸다. 기사로서 활약할 수 있는 왕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자케일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소문은 적지만 전쟁의 공훈을 보면 모자란 축은 아닐 거라고 했다.
“사실, 리제크는 알파로 태어나지 않아도 될 만큼 특색 있는 성격이죠. 자식이 알파인 게 놀랍지 않아요……. 둘째도 아들인데 아직 열 살이 안 됐어요. 그쪽은 얌전한 아이죠.”
“그러고 보니 다피벳 님은 왕자와 아는 사이겠네요.”
“이름과 얼굴을 안다고 아는 사이라 말하긴 어렵죠.”
“…….”
다피벳의 미묘한 웃음을 보며 놋시는 그를 증오하던 에체르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미움에는 독이 적었다. 상대를 원망하는 증오라기보다는 불만을 표하는 방법을 그렇게밖에 몰라 쏟아붓는 말뿐이었다.
다피벳은 묻지 않는 놋시에게 더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 오후에는 자리를 비우겠다고 했다. 어쨌거나 타게신의 손님이 오는 일이니 자신이 시선을 모아 봤자 소용없다고도 한 것 같다.
에체르 때는 아이의 투정이 귀찮아서 피했던 걸로 생각했는데. 설마 나이가 어른인 왕의 아들도 그를 싫어하는 걸까.
놋시는 캐묻기 어려운 일에 뻗어 나가던 생각을 거뒀다. 그는 오후가 될 때까지 약재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약을 사는 방문이라고는 안 했지만 달리 준비할 게 없었고 혹시나 싶어 선물할 걸 골라 봤다.
바깥채를 몇 번 오고 가며 나름 귀한 약초를 찾아 두던 놋시는 평소와 다른 걸 많이 봤다. 메다로는 오드사와 함께 저택 안의 병사를 다독였고 바깥 담장의 관리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놋시는 그들이 돌아다니며 우연히 흘리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피벳의 말 몇 마디보다 많은 걸 알게 됐다.
달산의 공격을 걱정하던 건 이미 익숙해진 병사들의 화제였다. 오늘 새롭게 배우게 된 한 가지는 그 전쟁을 기회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자케일은 공훈을 따지는 기사인 것 같고, 더하자면 타게신과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놋시가 들은 말 중 명확한 지식은 적었다. 그러나 이름 없는 일화를 얘기하며 욕하는 오드사의 목소리만으로도 그 정도는 짐작됐다.
그러므로 그날 오후 타게신이 왕의 맏아들인 자케일과 함께 돌아왔을 때 놋시는 준비된 상태였다. 그는 불쾌하고 거만한 관리를 상상했고 번거롭게 구는 청년을 상상했고 당연하게도 자신보다 뛰어난 타게신을 질투하는 누군가를 상상했다.
놋시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이전에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어 준비가 불가능했던 그것은 자케일이 수도의 알파라는 점이었다.
놋시는 이제껏 테스를 제외한 알파를 직접적으로 만난 적 없었다. 수도로 온 뒤에도 밖을 다닐 땐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였고 애초에 놋시가 다니는 시장과 가게들은 대부분 기사인 알파가 낮에 돌아다닐 장소가 아니다.
자케일은 놋시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성인의 알파였고 외모가 나쁘지 않은 왕족의 남자였으며 분명 적지 않은 수의 오메가를 상대해 본 경험자였다. 그 결과 놋시는 그날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알파의 시선을 겪었다.
왕자는 키가 큰 편으로 머리색이 짙었다. 색이 밝은 눈매는 에체르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뚜렷한 입매와 굵은 턱이 남성다움을 강조했다.
리제크의 아들 자케일로 자신을 소개한 그는 타게신의 곁에서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놋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또한 태연한 시선으로 놋시의 전신을 훑었고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당하고서도 한참 뒤에나 알게 되는 그런 경험이었다.
가볍게 지나치는 위장으로 낱낱이 모든 걸 살피는 눈빛은 사냥감의 발자국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먼 시선과 비슷한, 속에 든 생각이 보이는 것보다 많은 종류였다.
놋시는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숨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릴 때는 가리고 다녔으니 언제나 숨던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타인을 두려워하는 성격이라면 시선을 끄는 감춰진 모습으로 사로나의 시내를 마음대로 쏘다니지 못했을 터였다.
맨얼굴을 내놓게 된 뒤에는 이게 더 가면인 것 같아 스스로가 뻔뻔해졌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수도에 온 후에도 메다로와 함께 가는 길에서 무엇이 두려워 멈춰 선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 그도, 신발이 밟은 그림자부터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건드리는 듯한 알파의 시선을 처음 겪은 뒤에는 안색이 변하는 걸 감추지 못했다.
밖으로 오고 가는 대화는 짧고 올바른 말들뿐이었다. 테스는 왕자에게 선물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자신의 서재로 일행을 이끌었고 놋시는 함께 따라갈 의무가 없었다. 고민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메다로가 그를 붙잡아 고개를 저었다.
자케일은 타게신의 서재에서 한참을 머무르다 저녁을 먹고 돌아갔다. 여럿이 함께인, 왕자의 수족으로 따라온 시종과 기사에 타게신의 부하들까지 합쳐 열 명이 넘는 큰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점잖았다.
놋시를 제외하고서 따져 본다면 권력의 크기와 나이가 반비례하는 자리였다. 놋시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들이 젊은 주인의 밑에서 예의를 우선하는 걸 느꼈고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싫어하지는 않는 그들만의 동지애를 감지했다.
분위기는 낮보다 괜찮았다. 그들을 불평하던 오드사도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왕자가 가져온 술을 받아 마셨다. 멀지 않은 과거의 전쟁과 전투로 화제가 흐르다 요즘의 날씨를 얘기하기도 하고, 타게신의 작위가 오른 것과 새롭게 맡게 된 수도의 경비에 대해 떠들기도 했다.
아무런 사건 사고가 없는 만찬에서 먼저 빠져나온 놋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 자케일이 그에게 그물처럼 던졌던 시선은 별것 아닌 일상의 일부였다. 많은 이들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짧았고, 설사 그랬더라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라면 분명 누군가 말했을 것이다. 앞에서 불쾌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더라도, 에체르의 욕설을 개의치 말라며 다가왔던 호가처럼 사소한 위로가 존재했을 터였다.
그날 놋시는 알파를 만나는 오메가는 그런 것을 감당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걸 처음으로 절실히 알게 됐고……. 마음이 차가워졌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초도 되지 않았을 찰나였겠지만. 놋시는 마주친 자케일의 시선에서 고기에 식욕을 보이듯 드러나는 태연한 의향을 읽었다. 순간이 만들어 낸 혐오감은 평생 알지 못한 크기의 분노였다.
어쩌면 놋시는 정말 처음부터 어떤 알파도 짝으로 맞지 못할, 잘못 태어난 존재였던 걸지도 모른다. 열두 살 나이에 수도로 보내져 그런 눈빛을 받았다면 어떻게든 죄를 저질렀을 게 분명하다.
다피벳은 이런 걸 매일 겪으며 살았던 걸까? 그래서 새로운 짝을 찾지 않고, 불편을 감수하며 혼자 사는 방법을 찾은 걸까?
놋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관점으로 다피벳을 다시 보게 됐다. 이전에는 몰랐던 기묘한 동지애가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계기였다.
그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탓일까. 놋시는 그날 침대에 일찌감치 눕고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전엔 생각해 보지 못한 일들이 달라진 무게로 질문을 만들어 냈다.
대체 이곳의 오메가들은 어떻게 사는 걸까? 수도에 온 뒤 놋시가 만난 오메가는 다피벳 한 명뿐이었다. 다피벳의 삶은 고귀한 태생과 왕의 정부라는 모욕이 어우러진 남다른 것이라 보통의 예시라 할 수 없다.
놋시는 노예와 시종의 차이를 알았다. 체레오의 왕국은 작은 나라였고 제국의 거대한 역사처럼 잔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분된 세상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독버섯을 같이 먹은 에기 때문이라도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시도르의 친절한 이들은 타게신의 주인이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며 자신들의 정성을 바쳤지만 그것이 보통의 주인에게도 향하는 존경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놋시는 그곳에서 타게신의 곡식을 같이 먹으면서도 일하지 않는 스스로가 불안했다.
정말 모두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나 돌벽 안에서 살고 있는 걸까. 하지만 분명 아닌 이들도 있을 텐데, 그들은 모두 먼 나라로 보내져 보이지 않는 걸까?
한 명의 알파를 만났을 뿐인데도 놋시의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수도에는 자케일과 같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특별히 무례하지 않은데도 자연스레 타인을 평가하는 그런 이들은 낯설지 않았다. 사람은 눈이 달린 동물이었고 계산이 가능한 존재였다. 에기는 약초를 잘 알아 값어치가 높았고 차노륵은 사로나에서 유명한 전사의 핏줄이었다.
놋시가 낯선 것은 자케일의 짧은 시선에서 확연히 느껴진 자신의 색다른 가치였다.
놋시의 성품, 머리,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런 모든 것을 제외한 채로 그의 태생이 오메가인 것과 그의 외모가 어떠한지만 바라보던 그 시선.
잠깐의 회상만으로도 손바닥에 땀이 솟은 놋시가 자리에서 몇 번이나 뒤척이다 마침내 손을 풀었을 때. 그는 문득 생각했다. 테스는 그렇지 않다. 테스는 한 번도 자케일처럼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왕자가 왔던 그날 밤 몇 시에 테스가 그의 방에 왔는지 놋시는 몰랐다. 다음 날 다시 찾아온 기사 하나가 오전 늦게 일어난 타게신에게 왕자의 선물을 전했다.
선물을 들고 온 이는 놋시도 어제 본 얼굴이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기사인 것은 옷차림과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어디가 어떻다 말하기 어렵게 세르시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잿빛 머리카락과 침착한 갈색 눈동자의 그 기사는 테스의 친구였다. 이름은 지오레. 나이는 열아홉으로 테스와 같다. 그들은 지휘할 부하도 화살을 보충해 줄 병사도 없던 최초의 전투를 함께 살아남은 동료라고 했다.
지오레는 첫인상이 깨끗한 남자였다. 소년에 더 가까운 눈빛으로, 겸손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입매에는 어린 기색이 남아 있다.
놋시는 칼을 휘두르는 게 상상되지 않는 테스의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지오레는 수도에 와 놋시가 만난 사람 중 사로나의 일을 슬퍼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게르독과 문제가 컸던 걸 들었다. 고향이 그렇게 되다니…….”
“도둑은 도둑의 방식으로 사는 법이지.”
“너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책임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
바람이 잘 통하는 현관의 그늘 속에서 놋시는 자신도 모르게 테스를 바라봤다. 짧게 밑을 향한 얼굴에선 많은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지금도 여전히 길이 막혀 있을까. 테스의 침묵은 놋시의 짐작을 굳혀 주는 증거 같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지오레는 동생을 잃은 타게신을 위로했다.
“동생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건가.”
“시체가 집과 함께 불탔으니까. 그걸로 장례가 된 일이지.”
“더러운 사막의 도둑들…….”
지오레가 테스에게 동생의 죽음을 말한 순간, 놋시는 쓰러지거나 깜짝 놀라 허둥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 몰랐지만 남의 눈에 이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지오레는 안타까움을 담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노리 님도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예, 저는…….”
놋시의 입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테스의 팔에 어깨를 안긴 채 안마당에 들어선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상대하면 되니 넌 쉬고 있어.”
“……식사를, 그 정도는 대접해야 합니다.”
“아니. 먹을 시간이 없을 거다.”
테스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놋시를 침대에 앉혔다. 놋시는 이마에 닿은 그의 입술이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던 것도 느끼지 못했다.
타게신의 저택에 있는 주인의 방은 지나치게 넓어 바닥이 남아돌았다. 아래를 봐도 눈앞이 훤한 침실에 혼자 앉아 놋시는 여러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기에도 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 지오레는 테스와 비슷한 출생일 거라는 짐작, 왕과 기사들은 사로나를 넘기고 되찾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뒤늦은 깨달음…….
그러다 마음속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테스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그곳에 붙잡혀 있었을 테고 노르섹이 정말로 죽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분명 그랬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항상 생기다 말았다. 확신이 될 만큼 온전해지지 못했다. 죄를 변명하는 위선이 듣기 싫어 놋시의 생각이 저절로 멎기 때문이다.
지난 일에 빠져 있으면 병이 날 뿐이지. 작은 목소리를 밀어내자 차노륵의 장례에서 수군거리던 노인들의 말이 떠오른 것도 같다.
놋시의 매일은 다를 바 없는 듯 조금씩 변해 갔다.
다피벳은 12월의 첫 번째 보름달부터 손님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면 놋시의 열병도 지나갔을 때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놋시에게 가장 먼저 찾아올 손님들을 알려 줬다. 이전부터 다피벳의 물약을 사던 상인의 무리가 가장 먼저고 그다음은 오지 않은 척하는 귀족의 시종일 것이라고 했다. 가루로 된 잠드는 약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 놓으라는 말도 나왔다.
타게신이 받은 작위는 자작이었다. 영지를 받지 못해 이름뿐이라고 말하면서도 테스의 얼굴은 기쁜 것 같았다. 포에나 오드사가 떠드는 말을 들은 놋시는 새로 얻은 작위보다 직책이 더 중요한 걸 알았다.
수도의 경비를 책임지는 건 시도르의 성에서 게르독과 싸우던 것과 위상이 달랐다. 놋시는 살인자와 도둑의 무리를 상대하는 게 더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수도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상대가 있다고 한다.
“타게신이 이제부터 잡게 될 도둑은 왕만큼 돈이 많은 상인과 게으른 귀족들입니다. 그들은 귀찮은 상대거든요. 권력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자를 무시하니까요.”
오드사는 언제나처럼 걱정이 많았다. 그의 신중함은 항상 모두를 여유롭게 했다.
“그러면 전투에는 나가지 않는 거군요.”
“예전처럼 국경 지대를 나갈 일은 적지만……. 그렇다고 쉽진 않습니다. 여긴 평야 지대라 보는 눈이 많이 필요하죠. 에트와주의 장벽이 좋은 산책길이라는 건 가끔 구경하는 귀족의 헛소립니다.”
놋시도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수도는 놋시가 이제껏 본 어디보다도 사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도시에서 질서를 유지하기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테스는 전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밤늦게 돌아왔다. 때로는 밤새 바깥을 돌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놋시는 밤새 골목을 도는 경비병의 발소리를 들으며 테스도 저 중 하나인 걸까 생각하곤 했다.
새로운 일에 신경을 쓰느라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잠을 잘 시간이 부족한 것인지. 테스는 놋시의 걱정처럼 매일 몸을 섞지 않았다.
밤중에 돌아온 서늘한 체온은 짧게 입을 맞춘 뒤 놋시를 끌어안았지만 잠을 깰 만큼 집요하지 않다.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도 쉽게 옷을 벗기지 않고 부드럽게 온기를 전했다.
어쩌면 놋시의 수치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는 요즈음 이상해져 있었다.
놋시가 기억하는 과거의 어지러운 꿈은 잠든 사이 창을 흔들고 지나가는 거센 바람 같았다. 자고 나면 흔적뿐인 그것은 열병이 가까워진 시기에 가끔 나타나는 혼란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꿈은 달랐다. 달력을 보고 날짜를 따져도 열병의 날은 아직 멀었는데, 그런데도 놋시는 자주 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에 물이 차는 것처럼 속부터 젖어 드는 육체는 쉽게 부푸는 흥분으로 그를 당황시켰다. 잠에서 눈떴을 때도 꿈의 연장인 것처럼 입안에 단맛이 돌았다.
이것이 성장이라는 걸까? 책에서 말하는 지식을 되새겨도 놋시의 마음은 편해지지 못했다. 그는 쾌락을 기억하게 된 육체가 부끄러웠고 그걸 주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 더욱 괴로웠다. 만약 산 밑 마을에 살고 있던 때라면 하루 종일 방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의 저택에서는 모른 체하기 어려웠다. 흥분으로 들뜬 놋시가 눈뜰 때마다 테스가 곁에 있었고 마치 기다리던 사람처럼 속삭였다. 자신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러면서도 테스는 요구하지 않았다. 놋시는 싫은 것을 말하기만 하면 됐다. 부정이 아닌 조건으로 허락된 결합은 점점 무언의 약속으로 정해졌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눈뜬 순간의 놋시는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유도 모르고 소리를 참던 놋시가 눈떴을 때 테스는 이미 그의 성기를 물고 있었다. 긴 금발 머리카락은 묶여 넘겨진 상태다. 놋시는 넓게 엎드린 등을 내려다보며 테스가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라는 걸 알았다.
붉은색 긴소매를 걷어 올린 테스의 팔뚝이 그의 허벅지를 누르고 곧은 콧날이 아랫배의 연한 살을 찔렀다. 흣, 으읍, 소리를 참고 손바닥에 손톱을 박으며 머리가 하얘졌던 놋시가 정신 차렸을 때 테스는 옷을 벗고 있었다.
화려한 윗옷에는 굵은 실로 금빛 자수가 놓여 있다. 놋시의 시야에서 휘날렸던 옷자락이 침대 끝에 부딪히고서 보이지 않게 넘어간다. 시야 끝에서 사라진 붉은색을 좇듯이 고개를 돌렸던 놋시는 배를 쓰다듬듯 미끄러져 들어와 허리에 감기는 손목을 느끼고, 세상이 뒤집히는 걸 본다.
엎드리게 된 놋시의 밑은 허전했다. 사정의 여운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던 무릎이 부드럽게 잡는 손에 모였다. 베개를 짚고 고개를 들던 놋시의 어깨가 저절로 낮아졌다.
벌써 등줄기를 훑고 있던 테스의 입술이 뚝 떨어진 뒷목까지 닿자 가슴 밑에 깔려 있던 놋시의 손이 다시 주먹을 쥐게 된다.
어깨를 쓰다듬고 내려간 테스의 손이 놋시의 허리를 잡고 들었다. 주먹 쥔 팔 하나가 바닥을 짚는다. 살이 없는 허벅지가 무릎을 겹친 그 사이로 불거진 머리를 들이밀며 뜨거운 성기가 몸을 넣어 왔다.
그러고선 움직인다. 속에 들어온 것처럼, 속에 들어올 것처럼 피부를 달궈 놓으며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욕망을 흩뿌렸다.
“읏, 아, 하읏, 흐읏…….”
“후우, 놋시…….”
놋시는 밀리는 박자와 비벼진 피부가 느끼는 야릇한 통증을 따라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목덜미를 더듬던 입술이 숨을 흘리며 어깨로 옮겨 가고, 마른 등에 들러붙은 단단한 몸에서 커다란 심장 소리가 울렸다. 무겁고 명확한 박동이 놋시의 심장을 짓누르듯 커다랗다. 엎드린 가슴 밑은 허공인데도 손바닥에 눌리듯 숨이 막혀 왔다.
“흑, 읏, 아, 응, 으읏!.”
접힌 목에서 얕은 신음이 계속 나온다. 속이 비었는데도 아닌 것처럼 놋시의 숨이 가쁘다. 만지는 손과 깨무는 이의 엇박자가 흔들리는 심장을 계속 찔러 소리를 만들었다.
습기로 끈적한 피부를 후비며 박자를 잃던 굵은 몸통이 다시 길게 움직이고, 그러자 위에 올라붙은 놋시의 둥근 살이 근육으로 날 선 아랫배에 눌렸다. 시야가 크게 밀려 저절로 소리를 끊어 먹는다. 비벼지는 허벅지 살갗이 불붙듯 따가워진다.
테스의 성기는 단내를 풍기는 놋시의 체액을 묻히지 않고도 미끄럽게 젖어 있었다. 그 질척한 마찰은 유난히 빠른 느낌이다.
속이 아니라 밖이라 그럴까. 시간이 없는 걸까. 전처럼 그렇게 끝내려는 걸까.
놋시는 겹쳐진 허벅지 사이로 머리를 보일 듯 깊이 관통하는 열기의 모양을 느꼈다. 보지 않아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핏줄이 굵게 선 뿌리께와 굴곡을 만들며 사이를 파고드는 두툼한 머리가 그의 다리를 적시고 문질렀다.
테스의 이가 살을 깨무는 어깨와 그의 성기가 마찰을 만드는 허벅지 중 어디가 더 뜨거울까? 놋시는 알 수 없었다. 어디든 마찬가지로 뜨겁고 얼얼해 열이 솟았다.
고개 숙인 놋시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엉망으로 쏟아져 있다. 바닥을 짚고 만 팔꿈치 사이로 새까맣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쌓여 버린다.
아, 읏, 신음으로 늘어지는 소리에 맞춰 점점 머리가 기운다. 베개가 사라진 자리에 뺨을 짓누른 놋시의 허리가 긴 팔뚝에 조여진다. 더 이상 겹쳐 있지 않은 무릎은 미는 힘에 밀리다 굽혀진 지 오래다.
틈이 생겨 넓어진 사이도 비집고 들어올 만큼 굵은 테스의 성기가 놋시의 살결 틈새에 머리를 충돌하고 다음으로 살을 찔렀다. 저릿하게 열 오른 입구 위로 바짝 붙은 몸통이 새어 나온 체액으로 미끄러워져 한층 거세게 움직였다.
두툼한 머리가 몇 번이나 앞과 위를 스쳤을까. 굽혀진 등을 들썩거리던 놋시는 제게서 나는 단내를 맡았다. 그의 숨도 높은음으로 변하고 있다. 어깨에 온통 침을 묻히고 낮게 신음하던 테스의 입술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끝이 나왔다. 놋시의 녹아든 살갗에 뜨거운 정액이 흐르고 그의 허리를 잡은 테스의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어 멍을 만들었다.
알파의 정액은 냄새에 취할 만큼 진하다. 지금 막 놋시의 다리 사이에서 겉을 향해 토해진 그것은 긴 허벅지를 타고 흘러 무릎 앞의 밀린 천을 적실 만큼 많은 양이다.
씁쓸하고 서늘하며 무거운 향. 놋시는 테스의 본능이 배출한 욕망의 자취를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거대한 성기는 아직 크기를 잃지 못하고서 흠뻑 젖은 피부에 머리를 문지르고 있다. 사정의 여운을 털어 내듯 짧은 떨림이 몇 번을 이어지며 후끈한 숨을 늘였다.
방 안의 공기는 젖은 천처럼 축축해져 있다. 놋시의 속에서 흐른 체액과 함께 뒤섞인 테스의 정액이 흥건한 체취를 흩뿌리며 침대를 적셔 놓았다.
그렇게 다 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허물어진 등을 안고 누웠던 테스의 손은 놋시의 가슴을 더듬으며 한참을 헤매다 자세를 고쳤다. 미지근해진 정액이 습기를 잃고 있는 허벅지 사이에 다시금 뜨거운 열기가 껴들었다.
아직도 뜨겁고 무거운 테스의 성기가 놋시의 겹쳐진 살결 사이로 비좁게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속을 탐하지 않으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들러붙는 행위였다. 스르륵 잠들 것같이 힘을 잃었던 놋시의 눈이 의문으로 열리게 된다. 목적을 알기 힘든 행동에 일어서던 팔이 멈칫하고선 가라앉았다.
“후으…….”
무심코 나왔을 테스의 긴 한숨이 놋시의 목덜미를 새롭게 적시고. 놋시는 들었다. 만족이 담긴 숨결에 스민 낯선 아쉬움, 혹은 원하는 마음, 또는 말하지 않는 비밀을.
테스는 사정 후에도 놋시의 안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마치 열병의 그때처럼. 그의 알파는 오메가의 몸에 묶인 채 다시금 욕망을 쏟아 밖으로 흘러넘치게 속을 적시던 그때처럼 서로를 속박하길 원하고 있었다.
테스는 몸을 씻고 다시 옷을 입은 뒤에도 한참이나 더 놋시를 안고 있었다. 놋시 역시 씻고 싶었지만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테스를 재촉하지 못했다.
더 이상의 절정은 없었다. 테스의 손은 담요를 끌어안은 놋시의 어깨를 품에 안고 등을 쓸었다. 웃지 않는 입술이 땀이 솟아 짙어진 체취를 빨아먹듯 목덜미를 물고 핥았다.
놋시는 테스가 위안을 구한다고, 혹은 뭔가를 걱정한다고 느꼈지만 이유를 몰랐다. 조금 전도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통제되고 숨겨져 있던 욕구가 속내를 보인 것도 드문 일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테스에게는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다.
저택의 안은 바깥과 비슷한 주머니 모양이다. 커다란 주인의 방 입구에는 사람 둘이 지나갈 수 있는 짧은 복도가 만들어져 밖의 길로 통했다. 테스는 그 짧고도 넓은 복도에 그림자가 나타나 출발을 말할 때까지 침대 위에 머무르다 나갔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놋시에게는 물어볼 사람이 적었다. 평소처럼 메다로에게 물어보면 테스의 귀에도 곧 들어갈 것 같다.
훤히 뚫린 하늘은 맑았다. 놋시는 뒤뜰의 빈 땅을 걸으며 저택에 붙은 도시의 외벽을 눈으로 덧그렸다. 그 너머에는 인적 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산이 없어 끝없이 펼쳐진 먼 곳의 지평선을 바라보면 탁 트인 기분이 들지만 뒤를 돌면 몇 겹의 벽이다.
놋시가 병사들의 수다를 들으려 바깥채에 갈지, 아니면 오후에 메다로에게 다른 핑계로 물어볼지 고민하고 있을 때 사테가 그를 찾아왔다.
“노리 님, 다피벳 님이 약을 보러 와달라고 하십니다.”
“예.”
그는 더 묻지 않고 뒤를 따랐다. 잘 모르던 때의 놋시라면 무슨 약을 말하는지 그녀에게 물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테는 주인의 뜻을 자기 말로 설명하길 싫어했다. 오래된 버릇 같았다.
다피벳이 놋시에게 내놓은 것은 그가 만들던 물약의 완성품이었다. 액체의 색깔과 향으로 판단하면 마자기오의 흰 물약과 다를 바 없는 종류였다.
“제토의 눈물을 만드셨군요.”
놋시는 수도의 명칭을 사용해 말했다. 다피벳은 말하며 어색해하는 그를 모르는 듯하다.
“입맛을 돋게 하고 소화를 도우니 누구라도 쓸모가 있는 약이죠. 노리 님의 고향에서도 이것을 팔았나요?”
“저는 아니지만 시내의 약초상에서는 팔았습니다. 환자에게 좋다고 유명했어요.”
그러나 두꺼운 유리병에 담긴 소량의 흰 물약은 마자기오의 것보다 훨씬 귀해 보였다. 놋시는 조심스럽게 병을 만져 봤다. 들고 다니기엔 위험하겠지만 가죽 주머니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환자에게도 좋으려면 뭘 더해야 할 거예요. 환자만이 아니라, 손님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니까요…….”
다피벳은 곧 몇 개의 다른 병을 놋시의 앞으로 밀었다.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들은 각자 다른 색이었다.
“이것은 노인을 위한 것입니다. 물도 못 마시는 환자에게 주로 보내는 약이기도 하죠.”
“이것은 어린이를 위한 것입니다. 갓난아기에게는 쓸 수 있는 약이 적죠. 먹기 쉽게 맛도 제일 달라요. 단맛보다는, 고소한 맛이 납니다.”
“이것은 전쟁터의 병사를 위한 것이고……. 이것은 젊은 신부를 위한 것이고…….”
그는 미세하게 다른 물약의 효능을 하나씩 짚어 가며 놋시에게 설명해 줬다. 어떻게 만드는지 말하진 않지만 적어도 필요할 때 구분할 수는 있을 만큼 자세한 소개였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오메가를 위한 것이라며 옅은 푸른색의 물약을 내놨다.
“이것은 오메가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드린 제국의 책을 보지 않았더라도, 사람에 따라 같은 약이 다른 효과를 내는 걸 노리 님도 잘 아실 테죠.”
“예. 책은 감사히 읽었습니다.”
“그러셨다니 편하네요. 알파를 위한 것도 따로 있지만 그건 좀 더 복잡해요. 전 몸이 상해 먹지 못하는 알파는 본 적이 없거든요. 독으로 속을 다친 경우는 봤지만. 제가 생각해 둔 건 나이 어린 알파 아이들을 위한 약이었는데, 그것도 몇 번 팔아 본 적 없어요. 하나같이 몸 하나는 튼튼하니까.”
“…….”
놋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피벳은 가벼운 얼굴로 병을 치우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는 긴 탁자 옆으로 밀어 한데 모았을 뿐이고 사테가 하나씩 병을 옮겼지만, 신호를 하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었다.
자리가 끝났으니 떠나야 할 때지만. 망설이던 놋시는 차를 마시자는 다피벳의 청을 반갑게 수락했고 아무래도 이것으로 걸렸던 것 같다. 약 냄새가 없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다피벳은 놋시에게 궁금한 게 있냐고 물어 왔다.
“묻고 싶은 게 있으신 것 같아서요. 오메가의 약이 궁금한 거라면 편히 물어보세요.”
“…….”
놋시의 생각에도 못 할 말은 아니었고, 사실상 다피벳은 이런 질문이 익숙한 전문가였다. 하지만 놋시는 따라 준 차가 찻잔 안에서 식을 때까지 침묵했다. 짜증을 표하듯 과자를 먹는 다피벳의 소음이 조금 커지고 나자 그의 입이 열렸다.
“주인의……. 아니, 첫째가는 이와의…….”
“네?”
“그, 오메가의…….”
스스로도 답답할 만큼 입이 굳어 있던 놋시가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알아 둬야만 하는 일이었다.
“저는 예전에 코브나의 가시를 썼습니다.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요.”
시도르의 돌바닥 위에서 물도 없이 씹어 삼켰던 노란 가시는 질겼다. 놋시는 문득 그때 자신이 목을 다치지 않은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가진 게 부족했던 상황이라……. 제가 아는 게 그것만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다른 방법이 있겠죠. 오메가가 쓸 수 있는 다른 약이 있다면, 다피벳 님이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까요.”
“…….”
“당연히 값을 치르겠습니다. 제가…….”
“아니, 저는 타게신의 재산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진작 묻지 그러셨어요. 제가 생각이 짧아 신경을 못 썼네요.”
서둘러 말을 끊은 다피벳의 얼굴엔 웃음기가 돌았다. 관성으로 따라붙는 예의로 보였지만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고 놋시는 그제야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긴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각인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내밀한 화제였고 다피벳은 약초사다. 이런 건 묻지 못할 일이 아닐 텐데, 어째서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릴까.
마음대로 움직인 놋시의 손이 찻잔을 잡자 다피벳이 새로 차를 따라 줬다. 단순한 부끄러움과는 다른 떨림이 찻잔을 달칵거렸다.
놋시는 임신의 가능성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릿속이 새까매지곤 했다. 그들의 죄가 결실을 맺어 생명을 갖게 될 걸 상상하면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자신의 공포가 수줍음으로 보이길 희망하며, 숙어져 있던 놋시의 고개가 들린다. 새로 따른 차를 마신 다피벳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다피벳은 훌륭한 약초사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놋시에게 코브나의 가시를 자주 쓰지 말라는 주의였다. 놋시도 수긍할 수 있었다. 속을 망치는 지름길이기에 가난한 이들이 아니고선 택하지 않는 그 약은 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놋시가 아는 다른 방법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물어본 다피벳은 잠시 후 그에게 다음 열병이 언제인지를 물었다.
“……다음 달 끝에 올 겁니다.”
“주기는 일정하신 편인가요?”
“예, 최근 1~2년은 시기를 놓친 적 없습니다.”
오늘은 10월 27일이다. 놋시는 11월의 끝에서 겨울과 함께 다가올 열병을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시간이 되겠네요. 오메가의 몸에 무리가 적은 약이 있어요. 지하네다라고 불리는 열매의 씨앗이죠. 그걸 즙으로 만들어 열병이 끝난 뒤 일주일간 마시면 되는데……. 구하기 어렵진 않지만 지금은 계절이 안 맞거든요. 저도 한동안 쓰질 않았고. 제국의 상인을 시키면……. 그래도 한 달이면 충분한 시간이죠.”
“……열병 이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남자의 몸이니까, 다른 때는 필요가 없지요.”
놋시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우러나는 찻물처럼 그의 눈에 명료한 인식이 떠올랐다. 경악으로 커다래진 눈동자를 지켜보던 다피벳의 입가에 수많은 말을 대신하는 미소가 걸렸다.
다피벳이 왕의 정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쉽게 자식을 낳아 왕자의 앞길을 위협하지 못한다는 육체적인 특징도 큰 몫을 차지했다. 남성의 외양으로 태어난 오메가는 열병의 시기가 아닐 때 임신을 하지 못하며 규칙적으로 정해진 며칠의 시간은 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혹해하는 놋시의 앞에서 다피벳은 의아해했다.
“베포로의 책에는 이런 말이 없나요?”
“읽은 지 오래되어서…….”
“없을 것 같네요. 그건 의학에 관한 책도 아니고, 그보다는 사회 규범에 관한 설교니까요.”
“…….”
“어쨌든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젊은 나이고 수도에 온 지도 얼마 안 되셨으니 벌써 아기가 있으면 힘들겠죠. 제가 약을 곧 구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놋시는 인사를 잊지 않고서 다피벳의 방을 나왔다. 안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날 오후 놋시는 점심을 거의 먹지 못한 채 밖을 나섰다. 메다로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입맛이 없다는 그의 말을 믿는 듯했다. 베단도 그들과 함께였다.
메다로는 말이 나온 김에 수도의 요리를 먹어 보겠냐고 놋시에게 물었다. 먹을 생각은 없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는 제안이다.
놋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단도 웃어 보였다. 메다로가 주절거리고 떠드는 걸 들어 보면 둘이 항상 가는 식당이 있는 것 같았다. 토끼와 오리를 굽는 복잡한 방법을 떠드는 메다로의 곁에서 놋시는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테스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혼란스러운 머리에 드문드문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이 솟아났다. 그는 놋시에게 지식을 자랑한 적 없다. 그러나 오래전 처음 열병의 고열을 막는 방법을 알아 온 것도 테스였다.
어린 나이에 첫째가는 이로 인정받아 수도를 오가며 수련한 테스가 오메가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놋시는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지만, 들은 것도 없었다.
놋시는 아기를 가져선 안 된다며 테스의 욕망에 한계를 그었고 테스는 그의 말을 따라 줬다. 열병의 때가 아니고선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도.
테스도 나처럼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걸까? 혹시, 내가 진실을 숨기며 그를 속인다고 생각했을까? 거부하려 거짓 핑계를 댄다고 느꼈을까?
놋시는 잘못된 지식을 믿었을 뿐이다. 무지가 만든 착각과 걱정은 말로 풀자면 큰 잘못이 아니지만 생각할수록 머릿속에서 크기를 불렸다. 과거를 무시하고 바라볼 현재도 문제였다.
열병이 아닐 때는 어떻게 해도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놋시의 걸음은 빨라졌다 느려졌다 어지러웠다. 메다로와 베단이 아니었다면 진작 한 번은 어딘가에 충돌했을 것이다. 수도의 좁은 골목길에는 벽이든 사람이든 부딪힐 게 많았다.
“노리 님, 식사를 하고 물건을 보죠?”
“예? 예. 그렇게 하죠.”
“…….”
바짝 붙어 건네진 메다로의 질문은 여러 목적을 가졌지만 놋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메다로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놋시가 빠져 있는 깊은 생각이 가벼운 백일몽이 아니라는 걸 눈치 빠른 그가 모를 순 없다.
놋시는 음식에 대해 말하는 메다로의 질문에 띄엄띄엄 대답하며 뒤를 따라갔다. 오늘 밤 당장 테스와 얘기해야 했다. 진실을 알고도 말하지 않으면 진실로 거짓 핑계를 대는 꼴이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놋시의 앞이 막혔다. 메다로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마차의 뒷바퀴에 묻은 진흙을 온통 뒤집어쓸 뻔했다.
“길 중간에서 뭘 하는…….”
놋시의 말을 막으며 높은 소리를 지르던 메다로의 고개가 천천히 허공을 휘저었다. 당황해 서 있던 놋시도 곧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다. 하나둘 거리의 사람들 모두 하늘로 코를 향하고 있다.
“노리 님, 돌아갑시다.”
“메다로, 이건…….”
화재일 뿐이지 않냐고 말하려던 놋시가 입을 다물었다. 늘어진 모자 밑에서 메다로의 눈이 심각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그새 한 걸음 가까워진 베단의 그림자가 놋시를 덮쳐왔다.
놋시는 메다로와 베단에게 앞뒤로 감싸져 저택으로 돌아왔다. 거슬러 가는 길은 아까와 달리 사람이 적었다. 모두 불구경을 하러 몰려간 듯했다.
저택에 돌아와 호가를 봤을 때만 해도 놋시의 생각에는 그 정도의 일이었다. 불이 났다고 들은 호가는 수도에 우물이 많아 크게 번지지 못한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안도의 속삭임은 잠시였다. 도시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을 알리는 세 번의 종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체도 집 안에 숨기라는 듯 하염없이 계속되는 종소리였다.
타게신의 저택은 모든 문을 닫고 주인의 귀환을 기다렸다. 사방을 살피고 다닌 메다로는 밤이 와도 횃불을 올리지 말라고 했다. 바깥에는 하나둘 불빛이 늘어났지만 어둠을 밝힐 만큼 많지 않았다.
놋시는 혹시라도 다피벳이 그의 말을 싫어할까 봐 걱정했지만 의외로 반대가 없었다. 병사가 줄을 선 바깥채에만 횃불을 올린 채로, 몇 없는 사람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타게신을 기다렸다.
언젠가부터 바깥의 소음이 점차 늘어났다. 해가 사라지자 소리가 크게 들렸다. 먼 골목의 발소리와 초조한 정적이 침착하던 다피벳의 신경을 건드린 걸까. 그는 보기 드물게 찌푸린 얼굴로 메다로를 붙잡았다.
“달산의 공격인가요?”
“아닙니다. 벽은 무사해요.”
“…….”
메다로의 다짐은 이유 모를 소란으로 시끄러운 밖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단호했고, 안에는 그를 부정할 사람이 없었다.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다. 기다림. 기다림. 저녁을 먹는 병사들의 침묵. 기다림. 기다림…….
누군가 놋시에게 곡물 죽이 담긴 그릇을 줬다. 그는 온기를 얻으려 두 손으로 그릇을 쥐었지만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보기조차 두려웠다. 자정 같기도 하고 다음 날 같기도 한 어둑한 하늘 밑에선 먼 곳의 비명과 연기가 간간이 넘어왔다. 이렇게 긴 밤은 생전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천둥벼락처럼 멀던 그것은 알아듣자마자 저택의 앞에 나타나 사람의 외침과 익숙한 목소리로 변했다.
돌아온 타게신은 무사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를 따라온 포에는 말이 없어 달려 들어왔다. 그의 말에는 머리가 흐트러진 에체르가 타고 있었다.
전쟁인지, 기습인지, 왕궁의 반역인지, 그도 아니면 천재지변인지, 혼란만 가득하던 시간이 지나간 뒤.
울먹이던 공주에게 자신의 방을 내준 놋시가 다피벳과 함께 컴컴한 안마당을 건너갔다. 타게신의 서재에 모인 사람들은 시종과 병사를 제외한 숫자였지만 세르시를 비롯한 공주의 일행이 여럿이라 자리가 남지 않았다.
테스는 놋시가 그 자리에 있는 게 싫은 사람처럼 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놋시는 곧 테스의 뒤에 앉혀졌다. 왕자가 선물한 화려한 책상에 딸려 온 큰 의자였다.
등받이가 높고 가죽으로 겉을 씌운 의자는 푹신했다. 놋시는 그 의자에 앉아 오늘의 진실을 들었다. 전쟁은 곧 일어날 것이며 기습은 이미 벌어진 일이고 왕궁의 반역은 진행 중이었다.
아니, 그것은 반역이 아니다. 방 안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그날 낮 체레오의 왕인 리제크는 언제나처럼 사냥을 나갔다. 레드자의 산맥과는 비교하지 못하지만 에트와주의 그림자처럼 늘어뜨려진 숲에도 토끼와 여우 정도는 살고 있었다.
토끼와 여우처럼 들판을 건너온 달산의 기습이 일어난 것도 숲이었다. 리제크가 독을 묻힌 화살에 죽었다면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을 일이지만 달산은 그를 생포했다. 그들은 왕의 말에 머리가 잘린 기사의 시체를 매달았고 가슴에 화살을 꽂아 편지를 전달했다. 왕의 목숨과 에트와주를 바꾸자는 협박이었다.
리제크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한 상황은 곧 하나씩 풀려난 증인들로 확인됐다. 달산은 나라를 원하는 게 아니라 혼란을 원한 것 같았다.
한나절 동안 왕의 목숨을 저울질한 귀족과 왕족들은 그들 생각에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자케일에게 왕위를 이어받아 아버지의 복수를 하자고 했지만 이번엔 왕자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쯤 들판에서는 더 이상 토끼와 여우처럼 숨을 수 없게 늘어난 달산의 군대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것 같고, 해가 진 뒤에는 혼란이 늘어났다. 약탈과 방화를 예고하듯 날아온 불화살이 몇 개나 벽을 넘어왔다고 한다.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선 왕이 수도를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왕궁에서는 문을 굳게 잠근 채 싸움 같은 토론을 이어 갔고 왕족과 귀족이 아닌 이들은 어둠을 틈타 소문을 부풀렸다. 하나둘 도망가는 이들을 막기 위해 경비대의 피해가 컸던 것 같다.
자케일은 어떤 결과로든 위험해질 수도에서 에체르와 동생을 피신시켰지만 그녀는 무리로 늘어난 피난민의 눈에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어린 왕자는 빠져나갔으나 에체르는 그러지 못했고 흩어진 마차에서 세르시의 말로 옮겨 타야만 했다.
어떻게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리제크는 벌써 죽었을 거라고, 달산이 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타게신의 서재는 계속 시끄러웠다. 젊은 기사와 연륜 있는 부하의 목소리가 뒤섞이고 신중하고 걱정 어린 속삭임이 늘어났다.
그런 소란 속에서도 놋시의 눈은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를 가리고 선 테스의 어깨는 언제나처럼 넓고 하나뿐이었다. 혼자 내려야 할 결정과 그것의 무게를 버티고 선 등이 유난히 고독해 보였다.
이런 밤에도 단정히 묶여 있는 길고 곧은 금발을 바라보면서, 놋시는 벽 안의 삶이야말로 도망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