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드디어 복수는 시작됐다 (11/16)

11장. 드디어 복수는 시작됐다

주아는 눈을 떴다. 자신을 칭칭 동여 감고 있는 남자의 두껍고 무거운 팔다리를 예상하면서.

“세온 씨…….”

하지만 옆자리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빈자리를 더듬으며 세온의 흔적을 찾다가 모로 돌아누웠다.

“정세온.”

세온은 주아가 자는 동안 스케줄을 나갈 때면 문자라도 남기곤 했다. 혹은 예쁜 얼굴과는 달리 삐뚤삐뚤한 글씨로 행선지를 알렸다.

휴대폰은 고요했고 머리맡에 남은 쪽지도 없었다.

“가 버렸네, 세온 씨.”

정말로 세온은 그냥 가 버렸다.

주아는 차가운 손등으로 뜨거운 이마를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떤 불안한 예측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입만 열면 사랑해요, 좋아해요, 염불을 외던 세온은 어제 끝까지 사랑한다고 해 주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파고들 때마다 귓가에 속삭이던 사랑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분명 그는 새벽녘 동이 트도록 그녀를 가지고 또 가졌다. 지쳐서 흐물거리는 그녀의 엉덩이를 세워서 세 번만 흔들다 싸겠다고 거짓말하고선 또 뜨거운 성기를 박아 넣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밑을 핥고 또 적셔서 슬그머니 남성을 밀어 넣었다.

“아, 아아.”

주아는 퉁퉁 부었을 것이 분명한 눈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그 소리에 손 여사가 주방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네, 읏!”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려던 그녀는 목을 움켜쥐고 인상을 찡그렸다. 밤새 내내 소리를 질러 댔더니 마른 목이 찌르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주아는 얼른 물 한 잔을 꿀꺽꿀꺽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네, 여사님. 저 씻고 나가요!”

“총각은요?”

“세온 씨는……, 세온 씨는 갔어요.”

주아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세온은 그녀의 곁에 없었다. 메시지 함을 열어 봐도 세온의 연락은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주아는 그제야 정세온이 다가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연결된 것이 없는 관계라는 걸 깨닫고 말았다.

불완전한 관계였다.

언어가 일으키는 반작용 때문일까.

주아는 세온을 사랑한다고 인정하자마자 마치 급류를 탄 듯 더욱더 빠르고 격렬하게 그를 사랑하게 됐다.

그토록 인정하기 싫어 망설였던 감정은, 그저 단 한 번 내뱉었을 뿐인데 어느새 한주아의 명제가 되어 있었다.

“사랑해요…….”

주아는 벅찬 감정에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짚었다.

“사랑해요, 세온 씨.”

사랑. 한때 주영을, 엄마를, 그리고 아빠를 사랑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사랑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멀어진 탓에 그들을 떠올리면 그저 책임감, 원망, 그리고 타인이 된 것 같은 어색함만 남았다. 그 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일 사람도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어느 정도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주아의 마음속에도 예쁜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조그만 씨앗이 숨어 있었던 거다. 비와 바람이 불어 그것은 조금 썩기도 했고, 조금은 늦게 싹을 틔워 애를 태웠지만.

그래도 그것은 꿋꿋이 살아남아 싹을 틔웠다.

“장하다, 한주아.”

주아는 홀로 그것을 축하하기로 했다.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예쁘게 웃었다. 부은 눈으로, 잔뜩 눌리고 구겨진 머리칼로도 괜찮았다.

“예쁘다, 한주아.”

한주아는 사랑이란 걸 할 수 있는 완성된 인간이었다. 환상통에 다리를 죽을 때까지 절더라도.

“그래, 그걸로 됐어.”

이 남자가 등을 돌릴 때마다 나던 건조하고 버석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늦가을의 시작이었다.

* * *

세온의 연락은 없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남자는 대답도 없는 주아에게 줄기차게 연락해 대는 사람이었다. 몇 시에 일어났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어떤 촬영을 하는지.

주아가 알고 싶지 않아도 모를 수 없게 만들어 줬다. 그녀는 자신에게 하나둘 도착하는 메시지를 이어 붙여 그의 삶을 상상했다.

양념 하나 안 된 닭 가슴살을 먹으며 울상을 짓고 있는 정세온, 운동하고 지친 몸으로 운전을 하는 정세온,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웃는 정세온.

정세온.

정세온.

어느새 그녀의 하루는 모두 정세온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고서도 막을 수나 있었을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한주아는 이제 안다. 그녀는 사실 지금의 상황을 반쯤은 예상했고, 기대했고, 그리고 드디어 마주했다는 걸.

“연락이 없네.”

그녀는 까만 휴대폰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침대 위에 툭 내려놓았다.

분명 정세온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하루 온종일 침대에서 인생을 비관하고 우울에 젖어 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는데, 그가 사라지자 그것이 모두 의미 없이 느껴졌다.

“이제 시작된 걸까.”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었다.

정세온이 아름답고 빛나는 눈동자 속에 무엇을 분명히 숨기고 있노라고 반쯤 눈치채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무엇인지, 혹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날카로운 칼날이 진흙 속에 조용히 숨겨져 있었다.

한주아는 분명 다칠 것을 알면서 손을 댔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정세온을 탓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녀가 감내해야 할 문제였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생각했던 일이다.

분명 날 다치게 할 때가 올 거야.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라는 건 없는 거니까.

그런 꿈같은 이야기는 없는 거니까…….

“지금부터 시작인가?”

주아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분명 어떤 변곡점이 그들의 앞에 닥쳤다는 걸 기민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어머, 아, 아가씨!”

밖에서 손 여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씨, 아직 주무세요?”

그녀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그녀의 침실을 침범하는 일이 없었는데, 워낙 주아가 개인적 영역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문 앞에 서서 잠이라도 자고 있으면 깨워서라도 이야기를 하겠다는 듯 높은 목소리에 괜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 아니요.”

“아가씨, 어서 나와 보세요! 이리, 이리!”

혹시라도 오 실장에게서 전화라도 온 걸까. 아니, 정확한 내막은 알지도 못하는 손 여사에게 그랬을 리가 없다. 그러면 상경이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 이렇게 급박하게 부를 리가 없는데…….

사실 별 필요도 없는 잡다한 생각으로 심력을 소모하는 건, 심장이 너무 거세고 빠르게 뛰어 무엇에라도 매어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가요!”

주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불을 들쳤다. 가운의 앞섶을 다시금 매만지고 머리를 틀어 올리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손 여사는 머리를 묶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슬쩍슬쩍 밀며 티브이 앞으로 데리고 갔다.

티브이 속에는 한 연예계 신변잡기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사진인데요.」

주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정세온.”

“이를 어째!”

손 여사는 옆에서 주아를 바라보며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이럴 줄 알았어. 꼭 잘생긴 것들은 생긴 걸로 얼굴값을 톡톡히 한다니까!”

그녀는 답답하고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지는 것도 모르고 아유, 아유, 몇 번이고 탄성을 터뜨렸다.

「여기 이 사진 속에 하얀 캡 모자를 쓴 사람이 바로 열애설의 주인공 채윤입니다.」

리포터가 가리키는 대로 주아의 눈동자가 그리로 향했다.

사실 하얀 캡 모자를 쓴 여자보다는 그 옆의 남자로 눈이 갔다.

보자마자 알았다.

그가 정세온이라는 걸.

「그리고 다들 짐작하셨겠지만, 그 옆에서 손을 잡고 있는 남자가 바로 화제의 주인공 정세온 씨인데요. 비록 드라마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비극적인 짝사랑으로 끝맺었지만, 현실에서 사랑을 이룬 건 바로 정세온 씨였습니다.」

리포터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채윤과 정세온의 드라마를 언급했다. 그리고 조연이라 눈물을 흘리며 퇴장했던 엔딩과 달리 결국 채윤을 가진 건 바로 정세온이라며 치켜세웠다.

「바로 어제 찍힌 사진인데요. 밤 9시 34분쯤, 정세온 씨는 본인 소유의 밴을 타고 채윤 씨의 아파트 주차장으로 이동했고, 바로 오늘이죠? 다음 날 새벽 5시 30분경에 나왔습니다.]

어제오늘, 세온의 연락 한 통 없었던 날이다.

주아는 사실 리포터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흐릿해서 식별하기도 어려운 남녀의 사진 몇 장을 연이어 보다가 문득 웃고 말았다.

심장이 따끔따끔한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어, 이거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연예인 총각은 연락 없어요?”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손 여사가 뭐라고 뭐라고 더 떠들었으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세온의 품에 안겨서 행복을 느꼈던 순간에조차도 결국은 어떤 파국이 오리라는 걸 예상했기 때문일까.

주아는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자신의 상태에 안도할 뿐이었다.

「채윤 씨와 정세온 씨는 최근에 종영한 ‘Sunset Prism’이라는 드라마에 함께 출연했었는데요. 거기서도 케미스트리라고 하죠? 비록 주연과 조연이었지만 서로의 눈빛이 남다르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는데요. 사진 속에서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채윤 씨와 정세온 씨가 특히나 화제가 되었던 장면, 함께 보시죠!」

아름다운 여자와 여자를 뒤에서 꼭 껴안은 세온의 모습이 송출됐다. 세온은 눈물을 흘리며 여자에게 애원했고, 곧 그녀는 돌아섰다.

주아는 이 장면을 잘 알았다.

‘오늘은 티브이 보지 마요, 주아 씨!’

세온의 입술이 곧 여자의 이마를 스치고 입술을 머금었다. 입술이 맞닿아 뭉개지는 소리, 점막과 점막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젖은 소리.

그리고 또 장면이 바뀌었다.

멋진 슈트를 입은 세온이 멀리서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뚜벅뚜벅 걸어와 야근으로 지친 여자를 향해 그것을 내밀었다. 뺨에 입술을 장난스레 맞댄다.

‘난 애정 신만 나오면 주아 씨한테 죄짓는 느낌이 들어요.’

‘뭘 그래요. 일인데.’

‘주아 씨가 싫어하잖아요.’

‘싫어요. 싫은데, 존중해요.’

‘존중 안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싫다고 난리를 부려 줬으면 좋겠어. 나 욕심 안 나요, 주아 씨?’

턱에 꽃받침을 만들어 대고는 주아를 바라보던 얼굴이 떠올라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떡해, 정말. 요 며칠 오지도 않더라니.”

“알고…….”

목이 말랐다.

가슴이 따끔거려 심장에 손을 얹고 싶은데, 그러면 손 여사의 동정 어린 시선이 꽂힐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언젠가 시작되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분명 예상했는데. 아프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달랬는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팠다.

아프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시각각 목줄을 죄는 듯 아팠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에여서 어디엔가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티브이에서는 오랜만에 터진 열애설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은 듯, 아직도 세온의 이야기였다.

「한 측근에 따르면, 촬영 당시 세온 씨의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고 하는데요. 채윤 씨에게 첫눈에 반한 정세온 씨는 이미 톱스타인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남자 주인공이었던 권지오 씨보다도 훨씬 더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찐은 숨길 수가 없나 봅니다.」

“미리 이야기해 줬던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전 또 뭐라고.”

이제 이야기는 세온의 화보 사진 몇 개와 여자의 화보 사진, 그리고 소속사에서 확인하고 있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화면이 바뀌자 팔짱을 끼고 있던 손 여사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돌아섰다.

“어머, 정말? 그럼 채윤이랑 총각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알고 있으셨단 말이에요?”

주아는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유, 정말. 우리 아가씨, 왜 이렇게 팔자가 좋으셔. 지금 채윤인가 채연인가 하는 년한테 뺏기게 생겼는데!”

손 여사는 주방까지 쫓아와 잔소리를 늘어놨다.

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컵에 물을 따라 시원하게 한 컵을 모두 비우고는 하, 작은 탄성을 흘렸다.

“열애설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손 여사의 눈빛에 의구심이 어렸다.

“지금 세온 씨 분위기가 워낙 좋아서 이미지 마케팅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못 오는 거고.”

“아유, 총각이 그래요?”

그녀는 멍청하고 맹추 같은 게 정말로 그것을 믿냐는 얼굴로 주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아의 손에서 컵을 재깍 받아 들었다.

“아가씨, 작정하고 속이는 놈이 뭔 말인들 못 해요?”

“세온 씨 화보 촬영하는 거 한번 구경한 적 있었거든요. 그때 세온 씨 매니저님이.”

“……매니저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을 손 여사에게 납득시키고 있으려니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빈약한 상상력으로 굳이 없는 말까지 지어내면서 세온을 대신하여 변명하고 있는 까닭은, 아마도 다른 이가 세온을 나쁘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네. 연하남 이미지를 좀 더 가져가고 싶은가 봐요.”

그제야 손 여사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렇단 말이에요? 갈 데가 하고많은데 왜 다 큰 처녀 집을 찾아간대? 다 큰 총각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쪽은 저쪽의 방법이 있겠죠.”

주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방을 나섰다. 손 여사는 방금 주아가 비운 컵을 설거지하려고 부스럭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확인은 해 봐요, 아가씨! 사람이 조심해서 나쁜 거 없다니까? 저러다가 정분날지 어떻게 알아요, 예?”

“알았어요, 여사님!”

주아는 대충 대답하고는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았다기보다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한지도 모른다.

그녀는 보드랍고 푹신한 침대에 쓰러져 이불 위에 얼굴을 묻었다.

“흐…….”

신음을 삼키며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이상하게 숨을 쉬고 있는데도 공기가 희박한 고원에 서 있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앞이 흐릿했다. 머리에 피가 쏠리는 듯 뜨거워졌다.

뜨거운 눈물이 툭 떨어져 이불을 적셨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자의 배신은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평온을 가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또, 한주아는 오만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세온 씨.”

정세온의 따듯한 품이 그리웠다. 비록 무엇을 담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온기를 담고 바라봐 주는 게 좋았고, 매번 몸으로 뜨겁게 부딪쳐 주는 게 좋았다.

한주아는 정세온이 좋았다.

이 관계에서 패착의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그를 결국 사랑하고 말았다는 것.

아니, 그것을 인정하고 말았다는 것.

“하지만……. 하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와들와들 떨었던 구태경의 기일이 떠올라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피가 다 얼어붙은 것처럼 시리고 차가웠다. 뼛속이 욱신거릴 정도로 춥고 외로웠다.

그런데 그때 또 정세온이 나타나 줬다. 정세온만 나타나 줬다.

한주아의 인생에서.

어쩐지 발바닥이 간질거리고 뜨거워지는 듯한 묘한 느낌에 그녀는 얼른 일어나 비틀거리며 침대를 돌아 서랍을 뒤졌다. 도르르 도르르 굴러다니는 약병을 들고 한 알이면 충분한 걸 알면서도 아무렇게나 손바닥에 덜어 내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몇 번에 걸쳐 그것을 다 삼키고 나자 혓바닥이 쓰리고 아릴 정도로 이상한 맛만 남았다.

“몰라, 모르겠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프고 싶지도 않았고 행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가 세온의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너무 차가워…….”

약 기운이 도는지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몇 개의 알약을 삼켰는지도 모르니까 약발이 얼마나 세게 들지, 약효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

눈앞은 온통 하얀 이불 속의 어둠뿐인데, 그것마저 주아를 비웃듯이 찢어지고 갈라지며 균열을 일으켰다.

그녀는 흐릿한 정신으로도 휴대폰 전원을 꾹 눌렀다.

혹시라도 약에 취해서, 잠에 취해서, 그것을 핑계 삼아 남자에게 추레하게 전화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여보세요, 세온 씨. 왜 그냥 갔어요? 내 옆에 있어 준다면서요. 내 곁에 있겠다면서요. 왜 그냥 간 거예요? 열애설 났던데 봤어요? 나는 봤는데. 채윤이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멋없고 궁상맞은 소리나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남자의 무응답이었다. 끝없이 울리는 통화 연결음 앞에서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주아는 오늘도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 * *

세온은 주아의 집 현관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아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던 데다가, 더군다나 그동안 열애설도 났었으니까.

그리고 열애설은 아직 봉합이 안 된 상태였다.

주아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연락 또한 없었다.

“어머, 총각!”

손 여사는 마침 주방 청소를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 갑자기 마주한 세온의 얼굴에 반가운 듯 미소를 지었다가 그간의 일이 생각났는지 얼굴을 굳혔다.

“오랜만이네?”

연기에 영 소질이 없는지 목소리가 딱딱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오랜만이에요, 여사님.”

여느 날과 다름없는 미소에 긴장이 풀린 건지, 아니면 벼르기라도 했던 건지, 손 여사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는 세온의 앞을 턱 막아섰다.

“못 볼 줄 알았는데.”

“글쎄요, 왜죠?”

세온은 예쁘게 웃었다. 입꼬리를 잡아당기고 볼우물을 움찔거리면서. 주아가 항상 신기하다면서 뺨을 찔러 보곤 했던 바로 그 미소였다.

“어머, 총각. 몰랐는데 좀 뻔뻔하네.”

“제가요?”

“설마 채윤인가 뭔가랑 난 열애설, 몰랐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아, 열애설.”

세온은 여전히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열애설?”

그녀는 아주 잠깐 언성을 높였다가 주아의 침실이 있는 곳을 힐끔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알고 있었다고 별일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요?”

별일 아니라고 하던가요. 세온은 그렇게 물으며 또다시 웃었다.

“아니지? 거짓말이지?”

“뭐가 진실이든 제가 여사님께 변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세온은 뻔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정도로 당당했다.

그에 외려 당황한 건 손 여사였다.

“아니, 물론……. 그래, 물론 그렇지. 총각이랑 나야 무슨 사이겠어. 하지만 아가씨는 아니잖아?”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아가씨한테는 그러면 안 되지 않아, 총각?”

“왜.”

세온의 얼굴이 굳었다.

“왜 그러면 안 되는데요?”

“하, 이거 아주…….”

“한주아는 상처받으면 안 되나요? 한주아는 다치면 안 돼요? 사람도 죽였는데 좀 아파도 되지 않나요?”

세온의 민낯을 마주하고 너무 놀란 탓일까. 아니면 주아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그가 알고 있어서일까.

손 여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어머, 어머, 어머, 어떻게, 하는 탄식만 흘렸다.

“총각, 정말 그렇게 안 보였는데 사람이…….”

“주아 씨는 잘 지냈어요?”

잘 지내면 안 되는데, 아팠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잘 지냈어요?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건조하게, 정세온 따위는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관조하듯 살고 있나요?

날 사랑한다고 해 놓고?

손 여사는 이제 다소 질린 얼굴이었다.

“참……, 이 주 동안 연락 한번 없던 사람이.”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벌컥 화를 내려고 입을 벌렸다가 분을 삭이며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당연히 알지. 온종일 휴대폰만 붙잡고 있던 아가씨가 멍하니 앉아서 창밖만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세온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책이라도 읽었지. 하루 온종일 책만 읽어서 나는 뭐가 잘못된 사람인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완전히…….”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요?”

아주 괜찮은 건 아니었네, 한주아. 사랑은 누구든 약자로 만드는 대단한 놈이니까.

세온은 사실 그의 부재가 주아에게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할까 봐 다소 걱정했었다. 정세온이 사라진 한주아의 일상이 천천히 차근차근 파괴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연락 한 통 없는 휴대폰을 매일 확인하며 다소 두려웠다. 연예계에 크게 관심이 없는 주아가 자신의 열애설을 알지 못했던 건 아닐까. 혹은 열애설이 나고도 연락이 없는 자신을 끊어 내려는 건 아닐까.

한주아는 자신이 없어도 잘 사는 걸까.

한주아가 없는 정세온의 일상은 마치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일기장 같았다. 하루 대부분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하여튼 아가씨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잘 달래 봐, 응? 말은 안 하는데 마음이 많이 다쳤어, 지금.”

세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손 여사의 오지랖이 기분 나쁘지 않게 들리는 건, 한주아의 고통을 전해 들은 탓이다.

그는 침실 문 앞에 섰다. 똑똑 두드리자 무슨 일이세요, 여사님, 하고 건조하고 버석거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나예요, 주아 씨. 정세온.”

잠시 놀란 건지 뭔지 답이 없었다.

세온은 허락을 받는 걸 포기하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여자의 침실을 파묻고 있던 깊은 어둠이 문을 열자마자 달려 나와 세온을 감쌌다.

“주아 씨.”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 우뚝 서 있었다.

손 여사의 말대로 그를 처음 보았던 때처럼 그녀는 무기력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불 꺼진 어둠 속에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 해요?”

세온은 웃었다.

여자의 인생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본 건 아니지만 옆에서 함께한 몇 개월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망가지고 있었다.

“아, 세온 씨.”

그런 주제에 그녀는 아닌 척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안녕.”

“안녕, 주아 씨.”

세온은 자신의 목소리가 최대한 가식적이고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들리기를 바라며 걸어 들어갔다.

“어떻게 지냈어요?”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철컥 풀어 화장대 위에 내려놓으며 거울 속으로 눈을 마주쳤다. 주아의 꺼멓게 죽은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싱긋 웃었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주아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가 목이 턱 막혔는지 목소리가 많이 날카롭게 끊겼다. 물을 한 잔 들이켜고 찬찬히 말하는 여자의 눈빛은 분명 간절했다.

“보고 싶었어요.”

“난 연락 한 통 없기에 안 보고 싶은 줄 알았는데.”

재킷을 벗어 내려놓은 그가 드디어 주아를 향해 돌아섰다. 침대를 돌아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주아의 눈동자는 한시도 세온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 그가 바랐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 보채지도 못하고 엉기지도 못하는 어쩔 줄 모르는 시선. 탓하지도 못하고 끌어안지도 못하는 양가감정 속에 헤매는 시선.

세온은 또다시 예쁘게 웃었다.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으려고 했는데 그녀가 움찔 몸을 떨자, 되레 자신이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여태껏 부동자세로 눈만 도르르 도르르 굴리고 있던 주아가 얼른 얼굴을 내밀었다.

“만져요.”

“재밌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주아는 들었을 텐데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조그만 새끼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애착 상대와 떨어지면 낑낑거리다 결국 죽어 가는.

“왜 연락 안 했어요?”

주아는 말이 없었다. 세온의 뺨에 자신의 보드라운 뺨을 비비고 새끼손가락에 작게 입을 맞추며 그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세온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체념과 절망, 그리고 썩어 가는 행복의 냄새를 맡았다.

“세온 씨 바쁠까 봐.”

“주아 씨는 항상 그래. 좆을 욱여넣어도 내 거 같지 않아. 나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거여서 그런가.”

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온 씨.”

“나는 주아 씨한테 간병인 같은 거 아니에요? 비싸고 예쁜 간병인?”

쩌적, 그녀의 심장이 갈라지며 발간 속을 드러냈다. 핏물이 고였다.

“그런 거 아니…….”

“아니에요?”

세온이 비웃었다.

“난 그런 줄 알았는데. 항상 옆에 있는 강아지 취급 해서 그런 줄 알았어.”

핏물이 고여서 스르르 흘러내리는 걸 지켜보며 세온은 뜨겁고 비린 피 냄새를 들이마셨다.

이제 시작이다. 이 정도로 아파하면 안 되지,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깔끔하고 상쾌하지 못했다.

여자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가슴에 깊이 남았다. 큰 동공에 묻은 절망의 향기가 찝찝하고 우울했다.

“미안해요.”

주아는 사과했다.

“미안해요?”

“세온 씨가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잘못한 거겠죠. 미안해요.”

순진한 여자.

주아에게 사랑을 고백받고서 세온은 드디어 그의 복수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여자의 입에서 새어 나온 사랑의 흔적은 절대로 급작스럽고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성격상, 아주 오래, 오래 가슴속에 깊이 간직했다가 넘쳐흘렀을 거다.

간단하고 덧없는 사랑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아주 진득하고 끈적한, 다칠 것을 알면서도 뭔가를 감수하기로 한 그런 순진하고 멍청한 감정이었다.

세온은 그것을 아주 완벽히 이용할 작정이었다. 여자를 아주 나락으로 떨어뜨려 자근자근 밟아 놓을 생각이었다.

그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은 놓지 못한 채로, 지옥을 걷게 해 줄 생각이었다.

정세온이 그랬듯이.

“안아 줘요.”

주아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으로 침대를 디디고서 남자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을 꼭 껴안고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세온은 불안하게 달리는 주아의 심장 고동을 들었다.

여자는 분명 자신이 마주 껴안아 주길 바랄 테지만, 그러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세온을 잡고 그에게 매달리는 건 오직 한주아여야 했으니까.

“무슨 생각 해요?”

“세온 씨 냄새 좋다는 생각요.”

“나도 한주아 냄새 좋아요.”

주아와 떨어져 지낸 이 주 동안, 그는 이상하게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가 아니면 별로 만질 일도 없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한 시간에 한 번씩, 아니, 사실 손에 그것이 걸릴 때마다 한 번씩, 꼭 휴대폰을 켜서 주아의 연락을 확인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휴대폰은 잠잠하기만 했다.

왜 한주아 빼고 전부 할 말이 이렇게 많은 걸까. 기다리는 연락은 오지 않고 다른 이의 연락으로 휴대폰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불안했다.

아름답고 부유하고, 별로 욕심도 없는 것 같은 여자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서 열애설 기사를 보았을지 궁금했다.

온통 그와 채윤의 기사로 넘쳐 나는 티브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혀를 차면서 채널을 돌리지는 않았을까. 그럼 그렇지, 하면서 세온을 지워 버리지는 않았을까.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몇 번이나 메시지를 입력했다가, 전화를 걸려고 했다가 내려놓았다.

“열애설 봤어요.”

하지만 세온은 그럴 필요가 없었단 걸 깨달았다.

여자는 아파하고 있었다. 그가 바랐던 대로,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하게 아파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십사 시간이 얼마나 긴지 알기에, 그 시간을 자신으로 모두 채우고 홀로 고문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마음이 편해졌다.

“음, 나 변명해야 하나?”

세온은 코를 찡긋했다.

“믿어요.”

믿고 싶은 거겠지.

주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단정했다.

“나 세온 씨 믿어요. 열애설 그거 다 거짓말이잖아요. 아니에요?”

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에요?”

결국은 불안으로 인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주아 씨 이런 여자였어요? 재미없고 매력 없게.”

그는 여자의 몸을 슬쩍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주아는 놓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끌어안은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세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결국 그녀를 마주 안았다. 한주아의 향기가 자꾸 코끝에서 맴돌아서 참기가 힘들었다. 체향이 특이한 것도 아니고 강렬한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생각이 나는지.

여자의 은밀하고 흥분한 냄새가 왜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몸 정이라도 들어 버린 건가…….

세온은 그렇게 자신을 비웃으며 주아의 몸을 불쑥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려놓았다.

“나 매력 없어요?”

그녀는 흐릿하게 웃었고, 세온도 그랬다.

“응, 매력 없어요.”

“집까지 갔던데.”

티브이에서 봤다며 주아가 말끝을 흐렸다.

“내가 거기서 채윤이랑 떡이라도 쳤을까 봐?”

“세온 씨!”

“떡이라도 쳤으면.”

그녀는 숨을 흣, 짧게 들이켰다.

“그럼 어쩔 건데.”

세온이 부드럽게 협박했다.

“그럼 밀어낼 거예요? 나보고 저리 가라고, 꺼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주아의 이마에 입술을 꾹 맞추고서 잔인하게 웃었다.

여자의 심장에 난 상처가 결국 끝까지 세로로 길게 찢어지고 핏물이 줄기로 흘러내리는 걸 바라보며 웃고 또 웃었다.

“그럼 한번 해 봐요.”

여자를 안고 있던 손을 툭 풀었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주아가 세온의 목을 껴안고 절박하게 매달려 왔다. 동그란 엉덩이로 그의 성기를 마구 누르고 뭉개며 고개를 저었다.

“모, 못 해……. 못 해요, 세온 씨.”

“못 하겠죠.”

“응.”

주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온은 그런 여자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말 잘 들어 봐요, 주아 씨.”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한테서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세온은 아이를 칭찬하듯 그녀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혹시 알아요? 말 잘 듣고 예쁘게 굴면 내가 안 버릴지.”

“……그렇게 말하지 마요.”

작은 거부였지만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주아 씨, 나 사랑하잖아요.”

세온이 선을 그었다.

“난 아닌데.”

주아는 충격을 받은 듯 잠시 입을 벌린 채 정지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칼을 물고 덤비는 세온의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물기가 찼다.

“생각보다 아프네.”

그녀는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나 안 사랑해요?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당신 안에 들어갈 땐, 네, 사랑해요.”

세온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땐 당신밖에 안 보이거든.”

“세온 씨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같이 자고 싶다는 여자 많았을 텐데.”

“웃긴 게 난 또 그런 재미없는 여자가 싫더라.”

결국은 주아의 높은 벽이 그의 질 낮은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소리였다.

“아닌 척하던 여자가 나한테 매달리는 게 기분 좋더라고요.”

세온이 주아의 거칠한 눈 밑을 엄지로 쓸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결국은 아래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세온의 손등에 닿았다.

“당신처럼.”

“하…….”

주아는 눈을 감으며 피식 웃었다.

세온은 그녀를 침대에 부드럽게 눕히고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사랑받고 싶으면 벌려 봐요, 주아 씨.”

세온이 귓가에 속삭였다. 귓바퀴를 입술로 꾹꾹 깨물고 귓불을 코끝으로 툭 건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또 사랑한다고 말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사랑해요, 세온 씨.”

“궁금하죠. 내가 그 여자랑 잤는지 안 잤는지.”

긍정하지도 못하고 부정하지도 못하고, 주아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세온이 습관처럼 그녀의 아랫입술을 슬쩍 빼내고는 그곳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물기 어린 여자의 입술을 베어 물고 입 안에서 굴리다가 입술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아읍……!”

안을 헤집고 난폭하게 유영하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아!”

여자는 불은 입술로 숨을 헐떡였다. 조그만 주먹으로 세온의 단단한 어깨를 꾹 내리누르면서.

“궁금하면 벗어 봐요, 혼자서.”

세온은 처음 맞아 본 일격에 주아가 정신을 차릴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연타를 퍼부었다.

“나한테 애원해 봐요. 세온 씨, 만져 줘요. 세온 씨, 사랑해요. 그렇게 한번 빌어 봐요.”

남자가 주아를 흉내 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세온 씨, 만져 줘요.”

그러자 비릿한 미소를 띠고 있던 세온의 얼굴이 굳었다.

“세온 씨, 사랑해요.”

“지금 뭐…….”

주아가 천천히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세온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입고 있던 니트 원피스의 단추를 툭툭 끌렀다.

분명 꾸준히 밥도 먹이고 약도 먹이면서 제법 살을 찌워 놓았는데, 이 주 동안 손 여사는 뭘 한 건지 다시 빗장뼈가 툭 도드라져 있었다. 목도 마르고 어깨도 마르고, 드러나는 가슴팍도 모두 다 말랐다.

어쩐지 세온을 처음 만나기 전보다 더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세온은 분명 기꺼워야 할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쿡쿡 쑤시고 불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은 손이 단추를 다 끄르고 한쪽 팔을 빼내자, 눈부시게 하얀 살갗과 검은 브래지어로 감싸인 가슴이 드러났다.

성기가 불쑥 일어섰다.

세온은 스스로 달랬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생리적 반응이라고. 정세온의 처음이 한주아여서, 어쩔 수 없이 그에 반응하는 것뿐이라고.

무릎을 세워 그의 남성을 꾹 누르는 여자의 가는 종아리를 붙잡고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그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아…….”

속옷에 가려진 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거친 입술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상하게도 그리웠던 여자의 향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등 뒤로 손을 밀어 넣어 브래지어 훅을 풀었다.

“흣.”

“물고 있어요.”

브래지어를 주아의 입에 물리고 완전히 드러난 하얀 가슴과 발간 유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부드럽게 물러져 있다가 천천히 솟아오르는 젖꼭지를 관찰하며 슬쩍 혀끝을 갖다 대 본다.

“아!”

주아가 허리를 펄떡이며 그의 성기를 꾹 눌렀다.

세온은 급하게 여자의 치마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팬티를 끌어 내렸다. 속옷을 완전히 벗겨 내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가슴을 세게 빨고 마음껏 주물렀다.

“아읏, 세온 씨……!”

이상하게 달았다.

여자의 몸에서 나는 익숙한 바디 샤워 향기가 이상하게 달았다. 설탕이라도 발라 놨나 싶을 정도였다.

작은 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비틀며 젖꼭지를 쭉쭉 빨았다. 가슴에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무자비한 악력이었다.

“세온 씨, 아. 아읏!”

혀끝으로 젖꼭지를 희롱하다가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내려 이제 막 젖기 시작하는 여자의 구멍 속에 손가락을 꾹 쑤셔 넣었다.

“아흣! 아, 아프……, 아!”

“참아요, 주아 씨.”

그는 어쩐지 목이 말랐다. 분명 입을 대기 전보다 지금이 더 그랬다. 이상하게 입을 대면 댈수록,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르게 하는 이상한 여자였다.

한주아는.

세온은 한참을 물고 빨던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판판한 복부에 입을 맞췄다. 흐릿한 음모가 시작되는 곳에 코를 파묻고 흥분의 냄새를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결국 주아의 밑에 입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아응!”

“흥분한 냄새가 풀풀 나네, 한주아.”

“세, 세온 씨, 읏!”

그녀는 세온의 머리칼을 꽉 움켜쥐었다.

“나 없을 때 여기 만진 적 있어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 아니…….”

“내 생각을 하면서 손가락도 안 넣어 봤어요?”

“으읏!”

물기가 어리기 시작한 살점을 입 안에 넣고 굴리자 그녀가 귀엽게도 엉덩이를 들었다. 세온은 그 틈을 타 엉덩이를 두 손으로 떠받치고는 혀로 구멍을 쑤셨다.

“아, 아응! 세온 씨, 흣…….”

찰박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그는 드디어 입술을 핥으며 몸을 일으켰다.

트레이닝 바지와 드로어즈를 함께 내리자 커다란 성기가 툭 튀어나와 배꼽까지 올라붙었다. 그것은 투명한 프리컴을 줄줄 흘리고 있었는데, 세온은 말캉한 엉덩이를 주무르며 몸을 낮췄다.

“말해 줄까요, 잤는지 안 잤는지.”

“흣…….”

여자는 열에 들떠 생각할 틈이 없어 보였다.

세온은 잠시 물러나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안 잤어, 주아 씨. 채윤이랑 안 잤어요. 출연진 몇 명이랑 쫑파티 하러 간 거거든. 근데 진짜 걱정 안 됐어요?”

다시 예전의 세온으로 돌아간 듯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아는 숨도 못 쉬고 그의 변명을 듣고 있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뭉툭한 귀두가 질척한 클리토리스와 만나 비벼졌다.

“아응!”

“하…….”

한주아를 생각하며 얼마나 성기를 잡고 흔들었나. 여자의 몸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껍질이 까지도록 페니스를 흔들었다. 우습게도 아무리 흔들어도 한주아의 안에 사정할 때처럼 상쾌하고 충만하지 않았다. 계속 채워지지 않은 어떤 미흡한 욕망에 몸서리쳐야 했다.

“아, 아아!”

세온의 귀두가 여자의 몸속을 파고들기 시작하자, 주아는 문밖에 손 여사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커다랗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의 텅 비어 있던 한구석을 남자가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음을, 다른 이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건 한주아 본인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힘 빼.”

세온은 이를 악물고 나직이 속삭였다.

오랜만의 삽입은 너무 좁고 뜨거웠다. 여자의 안은 화상을 입을 정도로 온도가 높았다. 겉으로 보면 서늘하고 차가운 여자인데 속살이 이렇게 쫀득하고 뜨겁다는 건, 분명 정세온만 아는 비밀일 것이다.

그게 항상 그를 만족시켰다.

“아, 세, 세온 씨……! 너무 깊, 읏!”

가장 두꺼운 선단은 꾹 다물린 구멍을 힘들게 파고들어 갔다. 길고 단단한 기둥은 그 뒤로 주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덜덜 떨리는 여자의 내벽을 시원하게 핏줄로 긁고 문대며 안속 깊은 곳으로 처박혔다.

“하응!”

“손가락도 안 넣었네, 진짜로. 난 당신 생각 하면서 흔들고 또 흔들었는데.”

“왜, 왜 안 왔어요?”

여자는 세온의 흥분을 몸속 깊은 곳에 품고서 헐떡이며 물었다. 그의 성기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죄고 오물오물 씹어 대면서 절박하게 목에 매달렸다.

세온은 커다랗게 허리를 잡아 뺐다.

“아응!”

“바빠서요.”

그는 이를 악문 채 커다랗게 허리 짓 했다. 자신의 깊고 빠른 움직임에 여자가 깜짝 놀라 몸을 굳히는 걸 알면서도, 그 경직이 주는 대단한 압박감에 외려 엉덩이에 힘을 주고 짓쳐 들었다.

“세온 씨……, 아무리 바빠도 나한테 왔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러냐고 여자가 물었다. 커다란 성기를 삼키고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물었다.

세온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여자의 눈을 덮고 다리를 벌렸다. 허벅지를 붙잡고 거세게 끌어당기며 다시 깊이 찔러 넣었다.

“으읏.”

다소 늦게 젖는 편인 여자에게는 버거운 움직임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처음을 열었고, 그다음을 누렸던 그였으니까. 한주아의 몸에 대해서 정세온이 모르는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잔인해지고 싶었다.

‘세온아, 금방 다녀올게.’

‘야, 정세온. 너 어디 나가지 마라, 불량 청소년.’

‘뭐라는 거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온은 세형과 도진이 제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간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러 가는 사람이니 일과 중에 준비하기가 어려웠으리라. 그래서 부랴부랴 퇴근해 씻고서 케이크라도 사러 가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앞에 제과점에 다녀오면 될 일을 왜 차까지 타고 강남을 다녀왔는지. 그는 형체도 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난 신형 노트북을 경찰이 가져다주고서야 알았다. 엉망이 되어 폐기할 수밖에 없었던 케이크 이야기와 함께.

한주아는 죽였다.

세온의 하나뿐인 세상을, 그것도 가장 행복해야 할 생일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절대로 행복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염치라는 게 있다면.

“아, 세온 씨.”

그는 기계적으로 여자의 몸 안에 자신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고 쿡쿡 쑤시는 작은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나중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 줄도 모르고.

세온은 한주아가 그저 받아야 할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 * *

역시나, 주아는 세온이 없는 텅 빈 침대에서 일어났다.

휴대폰 알람도 맞춰 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눈을 떴는지도 모를 만큼 고된 밤이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주아를 만지고 핥아서라도 기어코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물을 냈고, 그러면 어김없이 들어왔다.

그녀의 다리가 덜덜 떨리면 그것을 문지르면서 들어왔고, 울면 눈물을 핥으며 들어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한주아에 대한 단호한 거부처럼.

[티브이 봐요. 18번.]

휴대폰이 웅 진동했다.

귀엽고 예쁜 이모티콘으로 가득하던 남자의 메시지는 차가웠지만, 그녀는 퉁퉁 부은 눈을 손등으로 누르며 작은 탁자 위에 올려진 리모컨을 찾았다.

세온의 말대로 18번을 찾았다.

「……작은 해프닝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채윤 씨가 별다른 말 없이 그날 드라마 관계자 모두와 자택에서 찍은 쫑파티 사진을 SNS에 올린 건데요. 주필성 감독과 남자 주인공인 권지오 씨, 그리고 정세온 씨, 또한 평소 친분이 있던 지인과 찍은 사진입니다. 술자리가 마무리된 건 정세온 씨가 차를 타고 나온 5시 반쯤으로 보입니다. 그 외의 지인 모두 그녀의 집에서 아침을 맞은 듯, 다소 부은 얼굴로 아침을 먹고 있는 사진이 게시되었습니다.」

세온과 채윤의 열애설을 전했던 리포터는 그때와 똑같이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그들의 작은 파티와 안타까운 열애설의 종결을 알렸다.

「둘 사이의 케미스트리가 정말 눈에 띈 만큼 이런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요. 채윤 씨가 워낙 연예계 마당발로 유명하고, 많은 분을 초대해서 그들만의 파티를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그들의 열애를 지지했던 입장으로서 아쉬운 마음입니다. 자, 그럼 다음 소식입니다!」

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티브이를 껐다.

따듯한 이불 속을 다시 꾸물꾸물 파고들어 베개를 다시 벴다. 창문 밖에서 흔들리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는데, 후두두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

우습게도 안심이 됐다. 죽을 만큼 안심이 됐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세온 씨……, 세온 씨.”

남자의 변심은 무척이나 뼈아팠다. 그리고 수가 훤히 읽혔다.

그는 주아를 최대한 아프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차가운 미소, 날카로운 멸시와 조롱, 하지만 결국은 한발 물러서서 달래 놓고 다시 상처 입힐 준비를 하는 거다.

그게 보였다.

“나한테, 나한테, 왜 이러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베개에 파묻혀 거의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꺽꺽거리다가 숨이 막히면 고개를 들어 한 번씩 숨을 삼키고, 다시 수면 아래로 고개를 밀어 넣듯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대체 뭘 그렇게 잘못 살았는지. 무슨 죄를 크게 지었는지. 왜 이렇게 아프고 아파야 하는지.

주아는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그 길에 정세온이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아프고 싶었다.

그로 인해 행복을 알게 되었으니, 그가 가져다주는 조그만 불행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그렇게 자위하며 또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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