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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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이 전쟁이지 내가 거의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천성이 순했던 난(엄마가 그랬다) 

악마 같은 태식이놈의 비열한 계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물론 반격을 안 한 것은 아니다. 내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 반격도 해봤지만... 

내 순진한 머릿속에서 나온 참신한 복수는 악독한 태식이놈과는 수준이 틀리다고나 할까.... 

예를 들어, 내가 태식이놈 공책에 ‘태식이 바보, 멍청이!’ 등등으로 낙서를 한다면, 그놈은 내 공책을 아예 태워 버리는 수준의 차이? 

결과도 천지차이다. 난 낙서가 내 글씨라는 것을 알아보신 선생님한테 걸려(분명 태식이놈이 꼬질렀다!) 혼나지만, 그놈은 완벽한 증거인멸이랄까... 

덕분에 난 또다시 착한 태식을 괴롭히는 악당이 되고 말이지...(빠드득!) 

한마디로 완전범죄만을 추구하는 녀석에게 난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소리다. 

악마새끼의 악행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음지에서 끊임없이 날 괴롭혔지만, 

쓸데없는 반격은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난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다. 

지옥 같던 1학년이 끝날 때는 8년 먹은 체중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태식이놈 때문에 제대로 된 친구하나 사귀지 못한 나는 2학년 때야말로 내가 그려왔던 즐거운 학교생활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설렘을 무참히 깨고 하늘은 날 시험에 들게 하려는지 또다시 태식과 같은 반이 되었고, 결국 그 후로도 2번 더 같은 반이 되었었다. 

그래도 다른 반이었던 때는 괜찮지 않았었냐고? 

훗~ 이놈이 정말 날 제대로 찍었는지... 그런 학년 때는 날 챙겨주는 착한친구로 가장해 찾아온 뒤, 

날 못된 놈으로 매도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단 말이다! (독한놈...) 

하다못해 정신수양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낀 난 검도를 배우겠다고 집안에 말했다. 위험하다고 가족들이 펄펄 뛰며 말렸지만, 

호신술이라는 말 한마디를 날리자 부모님은 눈물을 머금고 날 도장에 보내주셨다. 

기대이상으로 난 죽도를 휘두르며 그 끝으로 태식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배출할 수 있었다. 

또한 친구란 것이 얼마나 허울만 좋은 것인지를 망할 놈 때문에 일찍 깨우친 난, 더 이상 친구란 존재에 연연하지 않게 됐다. 

그러니 내가 학교에서 할 게 뭐가 있었겠는가. 당연히 공부밖에 없었지. 덕분에 내 점수는 쑥쑥 올라갔고, 

시험성적이 나올 때 마다 선생님들은 날 더욱 기특해 하시며 예뻐하셨다. 

당연히 그럴 때 마다 일그러지는 태식이놈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통쾌해 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 그것이 내가 태식이놈 속을 긁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내 초등학교 생활은 학교에서는 죽어라 공부, 방과 후에는 도장에서 태식이놈 얼굴을 떠올리며 죽어라 죽도를 내리치는 일과로 이루어져 버렸다. 

그렇게 그저 꾹 참고 지옥 같던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서로 다른 중학교로 가는 날만을 눈 빠지게 기다렸건만....... 

하늘은 끝까지 날 시험하실 생각인지, 같은 중학교를 가는 것도 모자라 같은 반까지 되어버렸다. 

그 때의 내 심정은........... 정말 신이 있다면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그 후로 결국 초등학교의 연장이 됐다고 말하면 구지 설명 안 해도 내가 어떤 중학교생활을 보냈는지 자연히 상상이 될 것이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의 유일한 즐거움마저 빼앗아 버리고 싶었던지, 태식이놈이 죽어라 공부를 해 나와 1,2등을 겨루게 됐다는 점이랄까... 

겉으로 떠도는 내게 시비 거는 인간들은 없었냐고? 물론 재수 없는 인간 손봐주겠다고 덤비는 어리석은 녀석들이 꽤 됐지. 

하지만 초등학교 삼학년 때부터 갈고 닦은 검도실력을 아주 살짝 보여주니, 웬만큼 겁을 상실 놈이 아닌 이상 더 안 덤비더군. 

폭력이 아닌 정신수양을 위해 배운 검도였지만... 제법 괜찮은 스트레스 해소가 됐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고등학교마저 같은 곳을 가게 되었을 때는 내 운명을 납득해 버린 것인지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별 차이 없던 고등학교생활에 몇 가지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자식이 날 증오의 대상에서 경쟁의 대상으로 관점을 아주 살짝 옮겼다는 점이 하나이다. 

공부고 운동이고 뭐든 나와 겨루길 원했고, 정정당당하게 그놈과 겨룰 수 있다는 점에서 난 그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외모적인 면인데...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사춘기가 지나면 어릴 적 귀엽던 외모가 사라지고 투박한 남성미가 자리 잡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자식은 어째 키도 174cm까지만 자라고 몸매는 근육도 없이 야들야들하기만 하더니, 

어릴 적 뽀얀 피부와 얼굴형도 그대로 간직해 제법 귀여운 놈으로(남들이 말하길! 나한테는 꼬리 9개 달린 여우나 뿔과 꼬리 달린 악마로 밖에 안 보인다) 자란 것이다. 

반면 나는 179cm 까지 컸고, 검도를 꾸준히 해서 그런지 군살 없는 단단한 근육이 매끄럽게 자리를 잡았다. 

외모는 예쁘장했던 얼굴에 남자다운 면모가 살짝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말이 되나??) 

그래서인지 난 더욱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란 이미지가 더욱 굳건해 졌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도대체 내 외모 어디가 악당으로 보인단 말이냐~!!! 여우새끼에게 다들 홀려도 단단히 홀린 걸께야... 암, 그렇고 말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아주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나의 성(性) 취향 이었다. 내 인생을 태식이놈이 좌우했듯이, 

이것 또한 그놈이 한 몫 단단히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고... 

어쨌든 한마디로 난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은 게이란 소리다. 물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절대적인 비밀이지만. 

가족들이 아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곤란하진 않다. 하.지.만. 악마놈이 이 사실을 안다면 이걸 빌미로 날 두고두고 괴롭힐 것은 안보고도 뻔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든 없었든, 난 정말 대학만 가면 그놈과의 질긴 인연이 완전 끝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그래서 달라진 모습으로 멋진 대학생활도 즐기고... 악마새끼 시야에서도 벗어났으니 뜨거운 연애도 해보고... 정말 상상만 해도 즐거웠었다. 

하.지.만. 이놈이 인생목표를 나의 불행으로 잡았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보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원서를 넣은 곳에 이놈은 따라 넣었고, 우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쌓은 실력으로 거뜬히 같은 대학에 나란히 합격하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같은 과까지! 

여기까지 오면 정말 많이 참은 것 아닌가? 세 번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지. 

결국 파릇파릇한 대학생활과 진정한 연애의 꿈이 깨지자, 난 더 이상 두고 볼 것도 없이 바로 휴학을 하고 군대에 들어갔다. 

제대 후 복학했을 때, 태식이놈도 군대에 갔는지 악마가 없는 평온한 캠퍼스가 날 맞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군대 들어가자마자 이놈도 바로 신청해서 군대에 갔던 모양이다. 복학한 그 다음 학기에 다시 그놈의 면상을 봐야했으니.... 

2년 넘게 인연 끊고 살았으면 시들해질 만도 하건만.... 앞서 말했듯이 그놈의 인생목표는 나의 불행이다. 

끊임없이 부딪치던 우리에게 여기서 뭐가 더 부족한지 하늘은 뜻밖의 폭탄을 하나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폭탄은 바로 게이바에서 터졌다. 

복학 후 난 성관계를 위해서보다는 사람간의 정을 위해 게이바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태식이놈 때문에 학교에서는 날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곳에서는 내 모습 그래로 있을 수 있었고, 

그놈에 의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없었기에 난 악마에게 시달린 내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었다. 

고리타분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난 날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첫경험을 하고 싶었다. 아마 태식이놈 때문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어 서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니 바에 가서는 언제나 가볍게 술을 마시며 가벼운 대화만 즐기곤 했는데...... 

그날도 난 한 남자와 가볍게 술을 마시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느 곳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히유~ 저 커플은 정말 과격한데요.” 

별 생각 없이 남자가 말한 곳을 쳐다봤고, 거기에는 한 남자가 다른 남자 무릎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체 열렬히 키스를 나누며 온몸을 애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뒷모습에 너무 뚫어지게 응시를 해버렸나 보다. 

키스를 하며 무릎위의 남자 옷 속으로 손을 넣고 애무하던 남자가 나의 시선을 느끼고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으니. 

그는 나에게 살짝 웃어주더니 키스를 멈추고 앞에 남자에게 뭔가 말을 했다. 그 순간 나는 뒷골이 서늘해지면서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 나에게는 슬로우모션처럼 보였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는데... 

이건 운명의 장난임이 틀림없다!! 

여기에 있어선 절돼 안돼는 태식이놈이 떡하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도 상당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아주 사악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 후 나만의 편안한 안식처였던 그 세계가 그놈에게 무참히 침범 당했다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프다. 

내가 어느 게이바를 가든 그놈이 귀신같이 알고 오는 것 까지는 좋다. 하지만 태식이 놈이 거기서 끝낼 위인이냐? 절대 아니다. 

내 상대를 (물론 얘기상대) 꼬박꼬박 중간에 가로채 가는 게 그놈답지. 암~ 그렇고 말고. (빠지직!) 

그렇게 내 모든 안식처를 일은 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난 3학년이 되어 가을의 문턱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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