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음날 벅차오르는 분노에 잠도 설친 난 아침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마치고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물론 주머니에는 싸가지 없는 놈이(호칭이 바뀌었다) 쥐어준 수표를 꾸겨 넣고...
‘어젠 나름대로 첫 데이트라는 생각에 한껏 설레어서 나갔는데... 하루 종일 부려먹은 것도 모자라 거지 취급을 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분하고 억울했다.
‘쾅쾅쾅!!’
그의 스위트에 도착한 난 있는 힘껏 문을 두들겼다. 한참을 두들기니 문이 열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건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놈이 아니라 투피스 정장을 깔끔히 차려입은 아담한 사이즈의 귀여운 젊은 여자였다.
“누구시죠?”
인형처럼 커다란 눈에 의문을 담아 날 올려다봤다.
‘귀여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잔뜩 벼르던 사기가 툭! 떨어져버렸다.
“아...저... 여기 한 준혁씨 룸 아닌가요?”
의욕을 상실한 체 조심스레 확인을 했다.
“맞는데... 누구시죠?”
“아.... 전 강 지운이라고 하는데요.... 준혁씨 있나요?”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흠~ 우선 들어오세요.”
그녀가 날 위아래로 쑥 훑어보더니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준혁아~ 네 손님 왔는데~”
“누구? 아...”
스위트에 딸린 방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이 보이자 어제의 일이 다시 떠오르며 잠시 가라 앉아있던 분노가 다시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짐은 가져왔어?”
“야!!!!!!!!!”
보자마자 내뱉는 싸가지 없는 말에 난 결국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고, 내 갑작스런 외침에 같이 있던 여자가 ‘어머?’ 하고 놀란 반면
아쉽게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한쪽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간 것 외에는.......
“..........”
“내가 네 짐꾼이냐! 왜 네 맘대로 사람을 부려먹고 지랄이야!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지 꼴딱 굶겨 보내냐?
그리고 내가 거지야! 엉? 어따 대고 돈 자랑 질 이야!!”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그에게 던진 후 씩씩거리며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
내가 마구잡이로 퍼붓는 동안 여전히 그는 내 거친 말투가 거슬렸는지 인상이 살짝 찡그러진 것 외에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럼.....”
약간의 뜸을 들이고 씩씩거리는 날 응시하던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쪽 입 꼬리를 씨익~ 하고 치켜 올려 보이는 뭔가 의미심장한 그의 미소에 의해 알 수 없는 불길함과 함께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낀다.
“그만둘까?”
“뭐?”
‘뭘 그만둬?’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잠시 감이 안 잡혔다. 하지만 스믈스믈 어제의 상황이 떠오르자 그때서야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걸 느끼며 내 입장을 기억해냈다.
...........결국.............
내 분노는 어이없게도 그 단 한마디로 일축되고 말았다............
그가 정말 내 애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끝내고도 남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처지는 그럴 여유가 안 된다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다.
맘 같아서는 이딴 놈 차버리고 딴 남자 알아보고 싶지만.... 흑흑~ 이 정도 조건을 갖춘 남자는 정말 하늘에서 별 따기라는 걸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기에......
“하하하~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보내요... 방금 제가 한 말을 잊어주세요... 제가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하하~”
‘흑~ 지운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굴해졌냐~~~’
옆의 여자가 갑작스레 돌변한 나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고 준혁은 그래야지~ 하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어 보인다.
‘....빌어먹을...........’
“흠~ 이번에는 봐주지만 앞으로는 알아서 처신해라.”
“.....네.....”
마치 큰 아량이라도 베푸는 듯한 그의 말에 속이 뒤틀렸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놈은 나인 걸.... 알아서 기어야지....
“그럼, 가서 짐 가져와.”
“...............네...............”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결국 난 본전도 못 찾고 집으로 와 그의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시 호텔로 갈 수 밖에 없었으니...................
호텔로 돌아간 날 그 인간이 고이 보내줬냐.....
아주 날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마치 태식이놈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태식이놈은 사람을 살살 약 올리며 얍삽한 방법을 써서 괴롭히는 반면 이 인간은 아주 대놓고 괴롭힌다. 그것도 너무 당당하게.
좀더 다르게 비교를 하자면 태식이는 고양이고 준혁은 사자? 결국 같은 고양이과지만 수준이 틀린 것처럼.......
어쨌든 오자마자 ‘옷 정리해라’ ‘청소해라’ ‘뭐 사와라’ ‘과일 깎아라’.... 아주 하인이 따로 없었다. (호텔인데 청소를 왜 날 시키냐고~~~!!)
그래도 소득이 있었다면 그 귀엽던 여자가 준혁의 사촌누나인 김 혜린 이라는 것과 그가 미국에 본사가 있는 상당히 큰 회사의 CEO 며
현제 한국에 지사를 내기 위해 와있다는 걸 알았다는 점?
그리고 혜린누나와 제법 친해져 준혁(‘씨’자는 팔아먹었다) 모르게 그의 흉을 보는 재미가 솔솔 했다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 그녀가 ‘근데 둘이 무슨 사이야?’ 하고 묻자 준혁이 망설임 없이 ‘애인’ 하고 대답했을 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해졌었다.
아무리 요즘 세상이 많이 개방적이 되긴 했어도 누가 자기 가족이 게이라고 하면 펄쩍 뛰지 않겠는가.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불쾌해 하기는커녕 마치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나와 준혁을 번갈아 보았고
그 후 내 옆에 붙어 이것저것 물으며 친근하게 굴어 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보다 어려보이는 그녀가 누나라는 것도 놀랐지만 벌써 결혼까지 한 유부녀라는 사실이 더더욱 믿겨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준혁과는 다르게 남편과 함께 서울에서 산다고 한다. 원래 다른 회사 다니다가 귀엽지 않은 사촌동생 덕분에 그만둔 후
이것저것 책임을 맡아 이리저리 일에 치이면서 자신이 제일 정신없다고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대는데..... 그게 어디 30살 넘은 아줌마냐고~~~·
어쨌든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그녀와 친해졌고 내가 어제 있었던 일을 말 할 때는 대장박소를 터트리며 뒤로 넘어갔다.
어제의 한을 풀 곳 없던 나는 물 만나 제비 모냥 그의 만행을 모두 고해바쳤다. 물론 그가 자리에 없을 때.....
그리고 내가 울분을 토할 때마다 ‘맞아, 저놈이 싸가지가 없어’ 하며 맞장구를 쳐주는데 내가 어이 신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근데 무슨 약점 잡힌 거 있어? 왜 그렇게 쩔쩔매?’ 하고 물었을 때는 그냥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거 외에는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저 싸가지 없는 놈은 어째 꼭 내가 자신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마냥 여유롭게 구는 것이 영~ 수상했다.
그렇다고 그가 알 수 있을 리는 절대 없는데 말이야.....
하루빨리 태식이 놈에게 선보인 후 인연을 끊어야겠다. 이러다간 내 몸과 정신이 남아나질 않겠다.
처음에는 애인으로서 잘해볼 생각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정말 애인을 사귄다면 못생겨도 좋으니까 성격만 좋으면 된다... 라는 생각까지 든다.
몇 시간을 시달린 후 집으로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자 아무래도 이건 악마새끼하나 때려다 오히려 대마왕 하나를 달아버린 느낌이었다.
하늘은 도대체 어디까지 날 시험에 들게 할 생각인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리도 날 괴롭히는 거냐고~~!!!
그때.......
그렇게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내 귀를 사로잡는 음악하나가 거리에서 울려 퍼졌으니.....
‘저 하늘이 나의 영혼을 괴로움에 빠져도 어차피 내겐 삶의 시련.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구름 뒤의 절망의 빛이 내 등 뒤에 모두 숨어도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아무리 가르고 갈라도 피할 수 없는 우리 내 운명은
내가 믿는 신의 선택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들려라 나의 목소리 너의 귓가에 들리게
울분이 터지는 오열 속에도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쓰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