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준혁이의 시점-
이번 한국에 지사를 내기위해 왔다가 뜻밖의 귀여운 생물을 발견했다.
왠지 괴롭혀주고 싶은 초롱초롱하며 순진한 눈망울 때문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강아지.
처음 그 강아지를 발견한 곳은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 앞에서다.
중요인사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 로비 앞에 차를 대기해 놓고 혜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린은 생긴 거와는 다르게 일처리 하나는
확실하고 기발한 기획아이디어도 상당히 잘 뽑아낸다. 이번 한국에 지사 내는 일도 혜린의 도움이 상당히 컸다.
그래서 상으로 조카가 태어나면 선물로 그렇게 듣고 싶어 하는 ‘누나’ 소리나 들려줄 생각이다.
그렇게 차에서 혜린을 기다리는데 웬 사내하나가 호텔기둥에 기댄 체 눈을 감고 있었다. 시원스럽게 부는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고,
얇은 옷감은 몸에 감겨 말라보이지만 군살 없는 매끈한 몸이라는 걸 여지없이 들어냈다.
그 모습이 내 눈에 너무 나른하면서 색정적이어 왠지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서있던 그가 눈을 뜨더니 내 쪽을 바라봤다. 물론 안이 보일 리 없지만 그의 시선이 날 향한다는 생각에 왠지 가슴이 살짝 강하게 뛴 듯싶다.
잠시 날 보고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인상을 살짝 쓰며 한 숨을 푹 쉰다. 그리고는 이내 혼자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모습이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웬 남자하나가 가까이 다가서자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수시로 바뀌는 표정이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릴 것 같지 않다. 동시에 좀더 많은 표정들을 짓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나로 인해 웃고, 화내고, 울기도 하는 다양한 표정들을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데 그 남자가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또 그런 강아지는 뭐가 좋은지 실실거리며 웃는데....
왠지 모르게 울컥하며 울화가 치밀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나가서 강아지를 쓰다듬는 저 손을 내치고 아무도 못 만지게 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생소한 감정에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가 이렇게 흔들려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사내와 함께 점점 멀어져가는 강아지를 붙잡고 싶었지만 나답지 않은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내 자신이 용납하지 못해 마음을 다스리며 꾹 참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한테 이런 유치한 감정이라니. 마치 내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혜린과 함께 차가 출발할 때쯤에는 이미 내 머리 한 구석에 아까의 강아지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강아지 생각에 점심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들릴 곳이 있다고 하는 혜린을 먼저 내려주고 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강아지를 또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휴~ 본다고 쳐도 어떻게 할건데....
아니나 다를까... 호텔에서 막 나오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아까의 남자는 어쨌는지 혼자 있는 그가 혹시라도
내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가버릴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는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최대한 느릿한 걸음으로 그를 살며시 스쳤다. 왠지 멍해 보이는 얼굴에 살짝 웃음이 난 듯하다.
그런데 이 귀여운 강아지가 겁도 없이 내 뒤를 쭐래쭐래 따라온다. 나름대로 안 들키게 따라온다고 하는 것 같지만....
그 덩치를 산만하게 움직이며 쫓아오는데 누가 모를까.....
일부로 룸으로 안 올라가고 연회준비가 한참인 연회장으로 갔다. 역시나 따라온다.
책임자랑 몇 마디 나누며 슬쩍슬쩍 강아지 쪽을 보았다. 살짝 머리만 문밖으로 내민 체 날 빤히 쳐다보는 강아지의 모습이 왜 그리 앙증맞던지......
연회장을 나서는데 이 겁도 없는 귀여운 강아지가 지 덩치는 생각 못하고 화분 뒤로 몸을 숨긴다.
나에게 안 들킨다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얼마나 참았든지..... 쿡쿡~
하지만 왜 날 쫓아오는지는 알아야겠지... 비록 이 유쾌한 미행놀이가 끝내기 아쉬울 정도로 재미는 있었지만 말이야....
코너를 돌고 강아지를 기다리는데 급하게 왔는지 코너를 돌자마자 날 보지 못하고 그대로 나에게 부딪쳤다.
부딪치면서 느껴진 그의 다부진 몸이 아까 결코 잘못보지 않았음을 알았다.
얼얼한 코를 문지른 후 빨개진 코를 내게 드민 체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놀랜 듯이 크게 띄어진다.
아까는 거리도 있었고 검은색 틴트 된 창문을 사이에 두어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상당히 호남 형이다.
아니.... 잘생겼다기보다는 뭔가 묘하게 예쁘다고 해야하나....?
멍하게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정말 나답지 않은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미간을 찌푸려졌다.
그러자 강아지가 겁을 먹었는지 당황하며 도망치려는 걸 목덜미를 확 잡아챘다.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강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모르게 위협적인 말투가 나가버렸다.
용건을 묻자 또 다시 얼굴이 당황스러워졌다 찡그려졌다 사색을 했다 아주 수시로 바뀐다.
그 모습이 재밌어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는데 강아지가 제법 비장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본다.
이번엔 또 어떻게 날 즐겁게 해주려는지 잔뜩 기대가 됐는데....
‘제 애인이 되주세요!!’ 라니...................
정말 숨 막히게 깜찍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다듬고 우선을 내 룸으로 데려와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강아지의 이름은 강 지운이란다.
성도 ‘강’씨겠다 이름도 ‘아지’로 했으면 따~악 이었을 텐데.
겁먹은 티가 역력한 얼굴로 그래도 다 대답하는 걸 보니 왠지 옆에 두고 더욱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아마도 난 나의 이런 생소한 감정들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한달이라는 기간을 둔 것 일거다.
이 한달은 나의 유예기간이다.
이 감정들이 나에게 득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해가 될 것인지 판단하기 위한....
해가 된다면 확실히 잘라낼 것이지만...... 만일 그 반대라면....... 글쎄.... 내가 널 어떻게 할까?
후~ 그걸 알아내야 되는 거겠지.....
오랜 사업가로서의 직감으로 이 강아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에게 반해서 그랬다고 보기에는 표정이 너무 비장하고 절박했다.
아무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겁도 없이 날 이용하겠다는 소린데.....
쿡~! 좋아! 동참해주지!
확실하게 네 놀이에 장단 맞혀 줄 테니 기대하라고.
대.신.
난 그에 대한 대가는 확실히 받을 거라는 걸 알아둬라~
그리고 나에게 이런 혼란스런 감정들을 느끼게 했으니 어느 정도의 심술도 각오해두라고. 한달은 은근히 짧거든~
다음날 강아지를 불러냈다.
왠지 들뜬 듯한 목소리가 전화로 들리자 어서 빨리 날 즐겁게 해줄 강아지가 보고 싶어졌다.
혜린이에게 특별히 오늘 오후 일정들은 모두 미루고 주요인사들 과의 저녁약속만 잡아놓게 했다. (이것 또한 나답지 않았으나 유예기간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생각을 하며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얼굴이 잔뜩 상기된
체 걸어오는 강아지가 보이자 어느새 내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순간 그런 내 자신을 깨달자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나려했다.
지금껏 내가 먼저 여자나 남자를 아쉬워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유혹해왔고,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야망과 욕망, 어떤 이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에게서 얻기 위해 다가왔고 그 누구도 성공한 적 없다고 장담한다.
그런데 저 강아지에게 날 이용하도록 허락한 것도 그렇고 이렇게 흔들리는 것도 절대 나 답지 않은 행동이다.
또한 다른 이들은 무슨 목적으로 접근하든 나에게 욕망을 담은 시선을 던지기 마련이었는데....
저 순진한 강아지는 사심 없는 맑은 눈망울로 날 바라본다는 것이 새롭기도 하고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저 강아지가 도대체 뭐라고 날 이렇게 자극하는 건지..........
그래서 난 강아지가 왔을 때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 매정히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 건지도....
풀죽어 있는 강아지를 데리고 쇼핑을 했다.
딱딱해 보이는 양복을 입고 강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옷을 편하게 입고 나왔지만 조금 있다 참석해야 할 저녁식사 때문에 양복하나를 사가지고 가려 했었다.
원래는 강아지를 보낸 후 사려고 했지만.... 유치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억울한 마음에 자꾸 괴롭히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처음 일부러 이것저것 산 후 짐을 들라고 시켰을 때는 제법 반항적인 눈빛으로 날 보는데 ‘어쭈~’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바로 꼬리를 내리고 고분고분 말을 듣기는 했어도 눈빛이 영 불순했기에 좀 더 괴롭힐 심성으로 여기저기 더 많은 곳을 끌고 다니며 짐들을 턱턱 얹혀주었다.
나중에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고 약간 안쓰러운 마음도 들기는 했지만.....
평소에 그리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난 강아지와의 쇼핑은 상당히 즐거웠다고 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어울릴 듯한 옷 몇 가지를 사긴 했지만 관심이 없는 건지 둔한건지 알아채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저녁약속을 깜박하고 있었다. 강아지와의 시간을 방해받기 싫어 일부러 핸드폰까지 꺼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이 내가 뭔가를 깜빡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강아지의 위력을 실감한다.
그나저나 빨리 출발하면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듯싶었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는데 강아지가 날 부른다.
내 안에 악마가 살고 있는지 여기서 또 한번 강아지를 괴롭히고 말았다.
뭔가 할말이 있는 듯싶은 강아지에게서 오늘 산 양복 한 벌을 받아들고 택시에 탔다.
나머지는 내일 호텔로 가져오라고 한 후. 이래야 내일 또 괴롭힐 수 있겠지.. 쿡쿡~
이번에는 제법 앙칼지게 부른다. 웃음을 참고 일부러 짜증스럽게 쳐다본 후 지갑에서 수표하나를 꺼내줬다.
그리고 수표를 받아든 체 얼이 빠진 표정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택시 안에서 결국 웃음을 터트리자 택시기사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정말 오늘처럼 유쾌한 하루를 보낸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강아지와 같이 있으면 확실히 지루하진 않겠다.
쿡쿡~ 맛있는 거 많이 사먹고 기운 내라~ 그래야 날 더욱 즐겁게 해주지~
다음날 역시나 잔뜩 뿔이난 강아지가 호텔로 쳐들어왔다.
날 보자마자 바락바락 덤벼드는 게 어제 확실하게 열을 받았나보다.
그래도 내 눈에는 좀 괴롭혔다고 삐진 강아지가 왕왕~ 하고 짖는 것처럼 귀엽게 보이니 아무래도 저 강아지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렸나보다.
그래도 예쁘지 않은 말을 내뱉는 건 영~ 맘에 안 드는데.....
훗~ 그렇다면 버릇을 잘 들여야겠지..?
비록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강아지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안다.
역시나 자신의 위치를 한번 상기시켜줬더니 단숨에 언제 짖었냐는 듯이 꼬리를 내린다.
그런 강아지를 여기저기 부려먹었는데.....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도 내게 한마디도 못한 체 혼자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다 하는 거 보니 왜 이리 자꾸 괴롭히고 싶은지...
처음에야 심술이 나서 괴롭혔지만 이거 잘못하다가는 중독 되겠는걸....
혜린이에게는 강아지를 애인으로 소개시켰더니 약간 놀란 듯하지만 이내 재미난 장난감을 찾아낸 듯 강아지에게 들러붙어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으며 틈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게 보낸다.
아마 내 입에서 한번도 애인이란 말이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겠지.
혜린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방으로 들어갔다.
간간히 혜린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길래.....
일 때문에 강아지를 집으로 보냈는데 혜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온다.
“아주 귀여운 사람이네~ 어디서 찾아냈데~ 작은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시면 아주 기뻐하시겠는걸.”
그렇겠지..... 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다고 믿는 부모님은 언제나 사랑을 찾아 정착하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 하셨으니....
가뜩이나 동물 애호가로서 저택을 동물원으로 만들 정도인데 저런 귀여운 강아지를 데려갔다가는....... 큭큭~
하지만 말이야.... 난 지금 유예기간 중이지 사랑 중이 아니라고.... 아니... 어쩌면 그걸 알기 위해서인가?
“그나저나 의외였어. 특정인물을 사귀는 일이 없는 네가?”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어?
“그래도 너무 괴롭히진 마라.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도 재미가 들려 그만 두기가 쉽지가 않은걸.....
그리고 도망이라..... 내가 놔줄 때까지 그건 곤란한데.....
그럼 강아지 목에다 줄을 달아 놀까???
네가 먼저 내게 뛰어든 이상 절대 먼저 도망가지 못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