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음......”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곧 도현의 별장으로 놀러왔다는 걸 기억해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붉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을 보았다.
수평선과 맞닿아 가는 해가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낮과는 색이 다른 붉은 빛이 마치 어둠에 먹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키기 위한 유혹으로 보여 나는 내려앉는
해를 멍하니 한참을 바라본 것 같다.
천천히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자 한기가 내 옷 속으로.........???
‘허걱! 아무것도 안 입고 있잖아!’
그제 서야 욕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이내 내가 어떡케 침대 까지 와서 자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떠올랐다.
‘설마 준혁이?’
얼핏 누군가 나를 안아 올려 침대로 옮긴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이 별장에 있는 사람 중 나를 옮길 만한 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준혁밖에 없고 마지막으로 본 것도 준혁이니.......
그러고 보니 손에도 새 붕대가 깨끗하게 감아져 있었다. 이것 역시 아마 준혁이 감아줬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욕실일과 더불어 부끄럽고 창피하고 고마운 마음에 준혁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이었다.
우선은 옷부터 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침대 밖으로 완전히 몸을 빼니 서늘한 방 공기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가 닭살을 일으키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벌컥’
“형! 이제 그만 일어나요!”
“으아악~!”
옷가방 쪽으로 몸을 옮기는 순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도현이 때문에 그만 쪽팔리게 여자처럼 소리를 질러버렸다.
같은 남자끼리 뭐가 부끄럽냐고 할지 모르지만...... 준혁과의 일도 있고 해 왠지 맨몸이 신경 쓰여 급히 침대에 있는 베개로 내 앞부분을 가렸다.
“흐~음~”
어린놈이 부끄러워 할 줄은 모르고 오히려 변태마냥 한손으로 턱을 괴고 내 몸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는 폼이 영 마음에 안 든다.
“이 자식, 당장 안나가!”
“형, 생각대로 몸매가 죽이네요~”
결국 난 녀석 얼굴을 향해 베개를 힘껏 집어던졌지만 얄밉게도 녀석은 살짝 피하고 더욱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여 내 속을 뒤집었다.
“뭐, 어때요~ 같은 남자끼린데~”
몸을 가리는 것도 잊은 채 저 뺀질이를 어떻게 손봐줄까 고민하는데........
“무슨 일이야...”
“으아아아악~!”
또 한번 내 비명이 별장에 울려 퍼졌다.
아까 내 비명을 듣고 올라온 건지 준혁이 갑작스레 방안에 들어왔고 그 뒤로 태식이놈 역시 무슨 일인가 보러 따라 들어오자
난 부랴부랴 침대에 뛰어 들어가 이불로 몸을 가렸다.
“다들 나가았!!!!!”
이제 와서 가리고 소리 지르면 뭐하냐...... 이미 볼 거 다 봤을 텐데... 흑흑~
“나참~ 같은 남자끼리 뭐가 그렇게 창피하다고~ 나가요, 준혁씨.”
결국 태식이놈이 먼저 비웃음을 지어보이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듯한 준혁의 팔을 끌어 방을 나섰고.
그런 준혁은 아직도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도현을 ‘나와’ 라는 말 한마디로 제압해 녀석을 방에서 쫒아냈다.
마침내 혼자가 된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다듬고 혹시나 또 누가 들어올라 후다닥 옷을 입었지만.......
쪽팔린 마음에 쉬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런데.........
뭔가 맛있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
순식간에 입안에 침이 고이고 허기를 느껴버린 나는...... 냄새의 유혹에 못 이겨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만은 없다며 스스로를 납득시킨 후
쪽팔림을 무릅쓰고 아래층으로 살며시 내려갔다.
아래층을 내려가 주위를 둘러보니 거실과 연결 되 있는 넓은 테라스에서 숯불에 고기를 굽고 있는 준혁이 보였다.
하지만 그 옆에 태식이 딱 달라붙어 아양을 떨고 있는 모습 역시 보이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 형. 내려왔어요? 언능 나와서 고기 먹어요.”
뭔가를 가지러 들어온 듯한 도현이 계단 아래 어정쩡하게 서있는 날 제일 먼저 발견했다.
불쾌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도현에게 이끌려 테라스로 나와 자리에 앉았다.
준혁은 그런 나를 지나치듯 슬쩍 쳐다본 후 다시 고기를 구웠고 태식이놈은 여전히 준혁의 옆에서 같이 고기를 구우며 내게 재수 없는 미소를 보내어 내 신경을 긁었다.
테이블에는 마치 고깃집에 온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상추며, 깻잎, 쌈장, 된장찌게 등등.... 하다못해 소주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슬쩍 곁눈질로 준혁을 살폈는데........
이런 거랑 왠지 안 어울릴 것 같은 준혁이 의외로 고기를 굽고 자르는 폼이 상당히 자연스러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형, 배고플 텐데 어서 먹어 봐요.”
“....으응........”
고기가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주는 도현 때문에 마지못해 포크를 들었다. 아까까지의 식욕은 언제 싹 사라졌는지 음식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우리도 대충하고 인제 좀 앉아서 먹어요.”
‘우리~???’
마치 준혁과 자신이 뭐라도 되는 듯한 투로 말하는 태식이놈이 상당히 거슬려 눈을 치켜세우고 먼저 자리에 앉는 태식이놈을 쳐다봤다.
내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채 태식이놈이 상추를 들고 그 위에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하나 올려놓는다.
자신이 먹을 거라고 하기에는 이것저것 정성스레 싸는 폼이 영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예쁘장하게 상추를 오므리는 모습을 보자니 내 추측이 맞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준...!....”
‘확’
만족스런 얼굴로 상추를 들고 아직 뒷정리를 하고 있는 준혁을 부르며 일어나려는 태식이놈을 보는 순간.......
‘역시나’ 라는 생각과 녀석의 뜻대로 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난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재빨리 태식이놈 손에 들린 쌈을 덥석 먹어버렸다.
“우물우물....여시(역시).... 쩝쩝... 너 바께 없다.... 꿀꺽!”
내 뜻밖의 행동에 놀랐는지 이미 사라진 쌈을 들고 있던 자세로 굳은 태식을 보자 무척 통쾌해져 저 놈이 싸준 쌈임에도 불구하고 쌈은 맛이 무척 좋았다.
“고마워, 택...아니 태식아~ 정말 맛있다~”
마지막으로 씨익 하고 웃어주자 태식이놈은 그제야 상황판단이 된 건지 얼굴을 울그락불그락거리며 날 째려보았다.
“형, 저도요. 저도 하나 싸줄게요!”
눈치코치 없는 도현이 또 하나의 쌈을 푸짐하게 싸서 내 입에 들이댔다.
아까 도망갔던 식욕은 태식의 분한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돌아왔기에(아마 저놈 얼굴보고 식욕이 나기는 처음일거다) 나는 기꺼이 입을 벌렸는데.......
‘휙’
내 입안에 들어오기 직전의 쌈이 순간 공중에서 사라졌다.
“뭐하는 짓이야!”
도현의 앙칼진 외침에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있는 준혁이 보였다.
“여태껏 고기구운 사람한테 제일 먼저 줘야하는 거 아냐?”
“이익!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직접 싸먹어! 지운이 형 손 다쳐서 못 먹는 거 몰라?”
“흐음~”
준혁은 잠시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날 보더니 이내 상추를 들고 고기와 이것저것 올려 커다란 쌈을 하나 쌌다.
“아.”
“아?”
날 보며 입을 벌려 ‘아’ 소리를 내는 준혁을 보고 반사적으로 나도 준혁을 따라 입을 벌려 ‘아’ 소리를 냈다.
‘쑥’
“우웁~!”
순간 갑자기 내 입을 쑤시고 들어온 커다란 쌈이 조금만 움직여도 튀어 나올 정도로 내 입안을 가득 채워 난 당황스런 맘보다 괴로운 맘이 먼저 들었다.
“됐지.”
‘되긴 뭐가되! 좀 작게 만들어주면 어디가 덧나냐!’
삐져나올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도 못 쉴 정도로 입안에 가득 찬 음식을 힘들게 꾸역꾸역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며 준혁에게 원망스런 눈길을 보냈다.
내가 숨이 넘어가든 말든 준혁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았고 도현은 분해서 씩씩거리며 준혁을 노려보더니 이내 다시 쌈 하나를 싼다.
‘설마....또 나??’
“준혁씨, 이거 먹어보세요.”
어느새 마이페이스를 되찾은 태식이놈이 쌈 하나를 싸서 준혁에게 내밀고 있었다.
“형! 아~ 하세요.”
이번에는 어떻게 태식이놈을 막을 길이 없어 속이 타는 마음으로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도현의 쌈을 받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자 쌈 하나가 입안에 쏙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도현의 쌈이 아니었다.
“당신 뭐야!!”
도현의 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없게도 준혁은 태식이 자신한테 내민 쌈을 잽싸게 내 입에 넣은 것이다.
두 번이나 준혁에게 가야 할 쌈이 내게 오자 태식역시 분에 찬 얼굴로 날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남자가 오늘 왜 이래.’
나야 쌈도 먹고 태식이놈도 약 올리고 일석이조지만 유치한 준혁의 행동에 약간 어이가 벙벙했다.
결국 즐거워야 했던 저녁식사가 단숨에 전쟁터가 됐다는 건 참으로 웃기고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태식이의 쌈이 준혁에게 넘어가지 않게 지켜야 했고, 태식이는 어떡해서든 나에게로 넘어오는 쌈을 사수해야했고,
준혁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도현이 내게 주는 쌈을 일일이 가로채갔고, 그런 준혁으로부터 도현은 쌈을 사수해야 했고.....
어찌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 우리들은 모두 치열했다........
상추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상추가 떨어질 때까지의 치열한 전쟁 속에 이상하게도 쌈은 대부분 내 입으로 들어왔으니 혼자 배가 터질 정도로 과식을 해버린 것이다.
신경전을 벌이느라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한 우리는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거실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여행 와서 술을 빠트릴 수 없다나....)
어둑한 거실에는 벽난로에서 장작까지 타고 있어 분위기가 상당히 아늑하고 포근했다.
도현이 아직 중3이라 문제가 됐지만 보호자도(?) 있고 요즘 자기 또래들도 술은 기본으로 마신다는 강력한 주장에 뭔 일 있겠냐 싶어 큰 맘 먹고 허락해줬다.
(제대로 된 보호자냐!)
고기와 함께 마시려던 소주대신 도현이 녀석이 분위기 맞추자며 별장에 있던 와인을 가지고 왔다.
붉은색 와인이 상당히 매혹적이고 달콤해 보여 모두들 한 잔씩 들고 천천히 맛을 음미해보았다.
역시나 달콤한 향이 입안에 싹 퍼지면서 와인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갔다.
마치 포도주스 같은 와인이 내 입맛에 맞아 계속 홀짝이다 보니 어느새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 뭔가 아쉬운 기분에 한잔을 더 따랐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따라 마셨을까......
난 지금껏 한번도 술에 취해본적이 없다.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마셨고, 독하지 않은 술을 주로 마셔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러 종류의 술을 많이 접하지 않았던 나는 몰랐다..........
와인의 달콤한 맛에 매혹되어 마시다 보면 더욱 지독하게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몸도 내 몸이 아닌 마냥 붕 떠있는 기분이었고 이상하게 난 가만히 있는데 주위가 빙글빙글 돌아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툭’
뭔가 내 어깨에 기대어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올려 옆을 보니 도현이가 와인 병을 껴안은 채 내게 기대 쓰러져 있었다..... 아니..... 자는 건가??
다시 힘겹게 눈을 깜빡이고 주위를 둘러보니 건너편 소파에 앉아있는 두 인영이 보였는데 한명은 잘나신 애인님이었고 한명은 재수 없는 여우새끼였다.
여우새끼가 흐물거리며 준혁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기대고 있는 게 보이자 갑자기 속에서 뭔가 울컥했다.
힘겹게 몸을 가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자꾸 바닥이 기울어서 걷기가 힘들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준혁이 의아한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난 우선 반쯤 감긴 눈으로 준혁에게 기대있는 태식이놈을 확 옆으로 밀쳐냈다. 그런 바람에 녀석이 놀랐는지 눈이 땡그래져 날 보는 게 느껴진다.
그런 다음 난 대담하게 다리를 벌려 준혁의 무릎위에 앉아 그의 목에 팔을 두른 후 망설임 없이 내 입술을 준혁의 입술에 갔다 대었다. 달콤한 포도 맛이 느껴졌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준혁이 놀랐는지 잠시 그대로 굳어있었지만 이내 내 허리에 팔을 둘러 몸을 바싹 끌어안고 내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해왔다.
내 거친 키스에 준혁역시 점점 격해져 서로의 혀가 정신없이 얽히고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것이 입가를 타고 흘러 내렸다.
점점 가파 오르는 숨에 그의 몸을 손으로 밀어내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태식이놈 쪽을 바라봤다.
시야가 흐릿하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녀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볼 수 없지만 난 녀석의 얼굴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얼얼한 입을 움직였다.
“........안...뺐겨........”
하고 싶던 말이 입에서 제대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던 목적을 이루고 나서일까........
온몸을 내리누르는 무게와 몰려드는 어둠에 결국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의식의 끈을 놓으며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단단한 가슴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