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7/36)

 (19) 

“으으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와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딱 붙은 것 마냥 파르르 떨릴 뿐 쉬이 떠지지가 않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천천히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옷 사이로 비추는 누군가의 단단해 보이는 살이었다. 

안개가 낀 것 마냥 머리 속이 뿌예서 잠시 멍하니 그 따뜻한 살 내음이 나는 피부에 이마를 가만히 대고 있었는데....... 

“괜찮아?” 

부드럽게 내 귀를 울리는 낮은 바리스톤의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하다. 

어디서 들었지.... 라고 몽롱한 머릿속을 헤매며 기억을 더듬었고...... 곧 떠오른 얼굴에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아야야~” 

마치 무언가로 쌔게 얻어맞은 듯한 강한 통증이 내 머리를 둘러싸자 나는 머리를 쥐어 잡고 도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많이 아퍼?” 

걱정이 담긴 목소리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의 주인공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준혁의 얼굴은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그의 눈의 왠지 쾡 하게 보이는 건 아직 내 초점이 흐리기 때문인가? 

하지만 곧 왜 준혁의 얼굴이 이리도 가깝게 있는지 깨달은 나는 헛바람을 들이 삼켰다. 

‘헉! 내가 왜 이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거야!’ 

준혁의 한 팔은 내 허리에 떡 걸쳐져 있었고 난 준혁의 다른 쪽 팔을 벤 채 준혁의 품에 포옥 안겨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민망스런 포즈도 모자라 왜 난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인거냐고! 

완전 패닉 상태에 빠진 날 구제해 주듯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제 와인을 그렇게 마시더니...... 머리가 좀 아플 거다.” 

그제야 난 어제 마신 달콤한 주스 같던 와인이 기억났다. 하지만 몇 잔을 따라 마신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그 담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 봐도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듯 던 필름이 끊긴다는 것인가. 

“기억 안나?” 

내 표정을 읽었는지 준혁이 물어왔고 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는데....... 

........저 웃음........ 영 불길하다....... 

“어제 네가 술을 마시다 갑자기 네 친구를 확 밀어버리더니 내 무릎 위에 턱하니 앉는 거야.” 

‘...!!...말도 안돼!!’ 

이미 내 얼굴은 그의 얘기가 시작하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창백했던 안색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왠지 다음이 듣기 두려워진다. 

“그러더니 내 목에 팔을 턱 두르더니 내게 키스를 찌~인 하게 했지. 얼마나 과격하게 덤비던지 내 입이 다 얼얼했다니까.” 

난 이제 하얗다 못해 퍼레지고 있었다. 

“침대로 안고 와 간신히 침대에 눕혀났더니 이번에는 옷을 벗으려고 하더라고.” 

제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해줘........ 

“셔츠를 벗어던지고 바지까지 벗으려는 걸 간신히 말렸더니 또 다시 내 목에 매달리며 키스를 해달라고 유혹 하더군. 계속....할까?” 

이미 그의 품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릴 대로 굳어버린 난 싱글거리는 준혁의 얼굴을 보며 제발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간절히 믿고 싶었다. 

“...농...담이죠....” 

막연한 기대를 안은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사실이야. 못 믿겠으면 네 친구한테 물어보든지.” 

내 가슴에서 ‘우루루’하고 마지막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의 충격이 컸는지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거려와 두 눈을 꽉 감아 버렸다. 

그러자 준혁의 손이 내 이마와 뺨을 번갈아 감싸왔고 그의 서늘한 감촉이 위안이 되어 내 입에서는 뜨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열이 있군.” 

시원했던 감촉이 사라지자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의 체온과 몸이 멀어지는 것만큼은 아니었다. 

준혁이 어디를 간 건지 궁금했지만 참을 수 없는 두통에 눈을 꼭 감은 채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는데....... 

“.....!!....아....” 

정신을 확 깨울 정도로 차가운 무언가가 내 머리위에 올려졌다. 

준혁이 내 머리위에 물수건을 올려준 것이다. 덕분에 내 미간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고 난 나지막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러 길래 누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래.” 

가벼운 질책이 담긴 그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지금은 오로지 내 머리를 시원하게 깨워주는 차가움만이 반가울 뿐이다. 

수건이 미지근해지면 다시 차가운 쪽으로 바꿔주는 준혁 덕분에 깨질 듯이 아팠던 머리가 차츰 진정이 되는 걸 느꼈다. 

이런 것이 숙취라는 건가? 내가 또 이렇게 술을 마시고 취하면 강 지운이 아니라 김 태식이다! (지키지 못할 발언은 하는 게 아니지.) 

‘똑똑’ 

“형, 아프다면서요.” 

준혁에게 내 상태를 들었는지 도현이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아, 그냥 머리가 좀 아픈 것뿐이야. 넌 괜찮아?” 

내 기억이 남아있는 곳까지를 더듬으면 분명 도현이도 꽤 마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도현이의 얼굴은 약간 핼쑥할 뿐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아, 저도 머리가 약간 아픈데 참을 만 해요.” 

내가 중학생보다 술에 약했단 말인가! 새로운 충격에 ‘끄응’ 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집도 아니고 사람들과 놀러와 이렇게 누워서 걱정만 끼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거기다 오늘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헝.....그게 뭐예요......” 

힘겹게 몸을 일으켰는데 갑자기 도현이의 스산한 음성이 들려와 ‘뭐가?’ 하는 의문을 담아 쳐다봤다. 

“당신이 그런 거지!” 

“나 말고 또 누가 있나?”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글스런 웃음을 지어보이는 준혁을 보자 왜 갑자기 화살이 그에게 날아가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잠시 이상한 기분에 아래를 내려다 봤는데...... 

‘허걱!! 이게 뭐야!!!’ 

내 몸 구석구석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붉은 반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여 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휙 들어 준혁에게 해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쏘아봤지만 그는 그저 예의 그 사람 약 올리는 듯한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잖아. 네가 유.혹.했다고.” 

발음까지 또박또박 하며 짓궂게 말하는 그 때문에 난 다시 한번 아연실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무이~~ 정녕 제가 그때 제정신이었습니까! 아무리 술의 위력이 대단해도 그렇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는 날 두고 준혁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죽이라도 만들어 오겠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나와 도현이만 나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름대로의 충격에 휩싸여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형....” 

“으응?” 

착 가라앉은 도현의 음성에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대답을 했다. 

“왜 하필 남자랑 사귀는 거예요.” 

“뭐?”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놀라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반문했다. 도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형이 도대체 어디가 부족해서 남자랑 사귀는 거냐고요!” 

“........” 

격렬하게 몰아붙이는 도현에게 난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런 거였나..... 그때 식당에서 말했던 남자란 ‘준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남자’를 의미한 것이었나. 난 조용히 도현을 응시했다. 

녀석의 눈동자는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형은 완벽한 제 우상인데........ 어째서....... 남자인거에요.” 

“........” 

날 그런 식으로 본거였니...... 그런 건 내게 과분해........ 난 태식이라는 작은 인간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살아온 한심한 인간일 뿐이야. 

맞서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는 겁쟁이. 

“형..... 저 아저씨 사랑해요?” 

“.....!!.....” 

순간 머리를 쌔게 강타하는 충격이 내 몸을 휩싸 안았다. 

‘내가?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왜 아니라고 부정 못하는 거야.......’ 

분명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다. 도현이를 위해서 충분히 아니라고 대답 할 수 있는 말이었고 또한 사실인데......... 

그런데 왜 아니라고 부정 하지 못하는 걸까. 왜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걸까. 왜 내 입이, 내 마음이 그 말을 내뱉는 것을 거부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나와..... 마찬가지로 복잡해 보이는 얼굴의 도현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남자사이에서도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요?” 

도현이의 가늘게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들려왔다. 

“....응........” 

도현이 네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무슨 해답을 찾으려 하는지는 몰라도...... 이건 확실하게 대답해 줄 수 있다. 내가 사랑을 했었으니까......... 

“....그런 건가요.....” 

도현이 확인을 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훗~ 결국 답은 이거였군요.” 

체념하듯 고개를 저으며 도현이 나지막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모습이 짐짓 무거운 짐을 털어낸 듯이 개운하고 후련해 보였다. 

“더 이상 도망가면 안 되겠죠. 도망만 쳐봤자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도현은 아까와는 다르게 단호하고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현이 그렇게 방을 나간 후 나는 후련해 보이던 도현과는 달리 심각한 혼란 속에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껴야했다. 

난...... 준혁을 어떻게 생각하지? 왜 그를 부정 못하는 거지? 

이 알 수 없는 혼란의 실타래를 풀어야했다. 

처음에는 생긴 것과 달리 싸가지 없고 짓궂은 행동에 재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의 통명한 말투 속에 깔려있는 베려가 좋다. 거칠어 보이지만 결국 날 챙겨주고 위해주는 그의 행동이 좋다.  

그와의 키스, 그의 품, 그의 목소리, 그의 미소........ 모든 것이 좋다. 

그의 작은 행동에 말에 내 심장이 빠르게 뛰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건........... 

결국 사랑이겠지...?? 

난 준혁을 사랑하고 있는 건가? 

풀린 실타래의 끝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는 한 달 후에 떠날 사람이었다.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난 사랑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할 틈도 없이 바로 절망으로 향해야 했다. 

마치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된 걸까...... 앞으로 난 어떻게 하면 좋지......... 

결국 꽃을 피우기도 전에 죽어버려야 할 이 감정을 정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