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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Story : 도현
내가 기억도 하지 못 할 정도로 어렸을 때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난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한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날 너무 여리게만 보셔 과잉보호 하는 것은 솔직히 불만이다.
물론 날 걱정하고 사랑하시는 마음에 날 감싸시는 건 알지만..... 나도 어엿한 남자란 말이다.
난 할아버지가 걱정하시지 않을 그런 강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난 내 또래의 아이들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 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 얼굴인데......
아직 아기같이 뽀얀 피부와 두툼하고 붉은 입술, 오똑한 코...... 무엇보다도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 칠흑같이 까만 눈.
내가 여자라면 몰라도 남자인 나에게는 콤플렉스가 될 수 있는 요소였다.
몸이라도 키우자 라는 생각에 아무리 먹고 운동을 하여도 이 빌어먹을 몸둥이는 도대체 굵어질 생각을 안 한다.
내가 다니는 남학교에 가면 내 주위에 두 가지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한 부류는 날 마치 여자쯤으로 보고 대하는 재수 없는 놈들이고.
또 한 부류는 내 앙칼진 외모나 눈빛이 맘에 안 든다고 시비를 걸어오는 유치한 놈들이다.
첫 번째 부류와는 날 마치 여자나 동생 취급할 때 빼고는 잘 어울리는 편이다. 물론 가끔씩 ‘여왕님’ 이니 ‘고양이’니 할 때는 국물도 없었지만.
인정하긴 싫지만 할아버지 밑에서 응석받이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자란 난 고집이나 자존심이 상당히 쌨고..........
그 첫 번째 부류는 그런 나의 제멋대로이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잘 받아 주어 나름대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놈들이었다.
반대로 두 번째 부류는 그런 나의 건방진 태도와 남을 깔보는 듯한 내 시선이 곱게 안 보인다나 뭐라나.
유치한 시비와 저질스런 농담을 건네며 올 때는 내가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는 성격이 아닌지라 지지 않고 맞대응했고......
가끔씩은 격분한 놈들이 주먹을 날려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었지만......... 매번 주위에 의해 말려져 크게 번진적은 없었다. (다행이지....커져봤자 나만 불리하다)
하지만 난 몰랐다...... 언제나 자잘한 싸움만을 걸어오던 놈들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는 놈들인지를........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때 혼자 학교 뒷동산에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너 이 도현이지?”
“......”
내게 말을 건 덩치가 제법 있고 불량하게 생긴 녀석은 아마 3학년 일진 중 한 명 이었던 것 같다.
“흠~ 소문대로 건방지게 생겼군.”
기분 나쁜 시선으로 내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자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썼다.
“그래도 제법 색기가 돌지 않아요?”
“저도 가끔 저 녀석 보고 있으면 자식 놈이 발딱발딱 일어설 때가 있다니까요, 킥킥~”
3학년 옆에는 같은 2학년으로 보이는 놈들이 3명이 히죽이며 내 주위를 둘러쌌다고 그들의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발언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너희들 뭐야.....”
최대한 분노를 담아서 놈들을 노려보았다.
“훗~ 저 오만한 눈동자가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맘에 안 드는데.”
잠시 3학년과 팽팽하게 시선을 맞대고 있는데 그놈이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내새끼 뒷구멍 맛도 제법 괜찮다지?”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등골이 오싹해지며 손에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같은 사내새끼 안을 맞은 안 나지만...... 이 녀석은 또 다르죠.”
“그래요. 이 녀석 뒷 구명 맛은 한번 보고 싶네요, 킥킥~”
“킥킥, 앙탈부리는 게 어찌 보면 더 흥분되긴 하죠.”
더러운 눈길로 나를 보는 2학년 놈들에게서 차마 믿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오자 내 얼굴을 점점 창백해져 갔다.
“좋아.... 그럼.....”
3학년의 신호가 떨어지자 2학년 놈들이 내 팔을 덥석 잡자 나는 벗어나기 위해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뭐하려는 거야!”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내 팔을 잡은 손들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훗~ 너도 느끼게 해줄게 너무 억울해 하지 마.”
어느새 놈들은 날 땅 위에 눕혀놓고 교복을 벗기고 있었다.
“이거 놔! 싫어!!”
앞으로 닥쳐 올 일에 몸이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놔!”
‘퍼억! 퍼억!’
“윽!”
“뭐야!”
순간 내 놈을 내리 누르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급히 옷을 여매고 주위를 살피니 아까의 놈들은 죄다 주위에 쓰러져 있었고 그중에 우뚝 서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거대한 녀석 하나가 보인다.
놈들이 도망을 가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던 녀석이 천천히 내 쪽을 향했다.
내가 바라던 남자의 강인함이 물씬 풍기는 얼굴. 거기다 눈은 나와 반대로 약간 아래로 처진 눈 꼬리.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고 그러는 동안 녀석은 내내 아무표정도 말도 없이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 분하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녀석 앞에서 같은 남자에게 당할 뻔한 수치스런 꼴을 보이고 도움까지 받다니.
“쓸데없는 참견이었지만 어쨌든 고마워.”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차갑게 내뱉고는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걸어가는 와중에도 내 뒤에 꽂히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정 원준 이라는 전학생이었고 근방에서는 고등학생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은 정도로 꽤나 주먹으로 소문이 자자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특이하게 덩치처럼 성격도 곰 같아서 둔하고 느릿한 게 소문의 그 이미지와는 왠지 매치가 되지 않아 다른 학생들도 크게 위협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다만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과 모든 것에 관심 없어 보이는 듯한 눈빛은 위화감을 느끼게 해 그의 소문에 지레 겁먹은 학생들이 그에게 쉬이 가다가지 못 할 뿐이었다.
그 수치스런 일이 있은 후 난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더욱 강력해졌다. 아무도 나를 건들지 못 하도록........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80을 육박하는 키에 중학생답지 않은 우람한 체격.
모든 면이 비교되었기에 나는 그가 더욱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하게도 원준은 그 날 이후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았고 난 그런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때의 씨발놈들은 차마 원준을 건들지 못하겠는지 내게 보복을 하듯 전부터 있던 자잘한 시비가 점점 난폭해져 갔고..........
그럴 때마나 언제나 원준이가 나타나 날 구해주었다. 고맙다는 마음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하지만 만일 그런 일로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결국 도저히 못 참은 나는 왜 그렇게 내 일에 간섭을 하는지 그에게 따져보았다.
“글쎄.....언제나 경계하는 듯 날카롭게 곤두서있는 눈빛이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오만함으로 치장한 네 얼굴을 보면 왠지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원준이 녀석이 싫었다. 나의 무능력과 나약함을 내게 각인시키는 녀석이 너무도 싫었다.
“네가 뭔 대! 내게 그 따위 말을 지껄여. 네가 뭔데!”
“내 앞에서 꺼져 버려! 다시는 내 일에 상관 말고 내 앞에 나타나지도마!”
분에 겨워 악을 써대면 녀석을 몰아붙였지만 녀석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녀석을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내 몸을 덮었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녀석의 얼굴.
충격이었다. 남자와 키스라니.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나는 녀석의 키스를 그대로 받고만 있다 곧 녀석이 그 때의 씨발놈들과 같은 시선으로 날 보고 있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있는 힘껏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물론 키와 힘 차이가 있어 어설픈 내 주먹에 원준의 고개가 살짝 돌아간 정도밖에 안됐지만 그것이 또 날 분하게 만들었다.
입술을 거칠게 문지르며 그 자리에서 벗어낫다.
그날 원준은 날 붙잡지 않았지만 그 후에도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지켰고 난 그런 그에게 갈수록 심해지는 말을
서슴지 않고 퍼부었어도 녀석은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다행이도 그 후로 다시는 키스를 시도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점점 팽팽해지는 긴장감 속에 더 이상 원준을 무시할 수 없어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
“왜 날 신경 쓰는 건데! 왜 날 내버려 두지 않는 건데!”
“......좋아하니까.....”
“하!”
어이없는 원준의 대답에 헛웃음이 나온다.
“날 좋아한다고?”
내 얼굴은 분명 시니컬한 미소로 입술이 뒤틀려져 있을 거다.
“....그래...”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곧게 응시한다.
“난 여자가 아니야.”
“알어.”
“미친새끼.”
“.........”
더 이상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 난 그 무표정 속에 언뜻 비친 상처 입은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대로 학교를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데 재수가 없는 날인지 양아치 놈들과 시비가 붙어버렸다.
훗~ 이럴 때 왜 원준이 녀석이 생각나는 건지.
짜증스런 마음에 양아치들에게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
그러다 내게 내리꽂아지는 주먹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그가 나타났다.
아름다우면서 강하고 빛이 나는 강 지운이.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훨친 한 키와 다부진 몸을 가진 강 지운..... 그 사람을 본 순간 난 한 눈에 반해버렸다.
내가 그렇게도 되고 싶었던 이상형.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 본 그를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겠지.
처음에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그가 사라져 버린 방향 쪽을 얼마나 한참을 바라보았는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그를 다시 보게 됐을 때는 진심으로 기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형의 옆에는 기분 나쁜 남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하는 그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형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빈틈없이 형을 옮아 매고 있었다.
아마 나는 내 자신을 강 지운과 겹쳐 보고 있지 않았나 싶다.... 강 지운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기 때문에 난 강 지운이 남자와 사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겠지...
마치 원준이 날 좋아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듯이.
둘을 어떡해서든 때어놔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그 재수 없는 남자가 내 도발에도 여유롭게 웃으며 대하는 게 이 남자는 강 지운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다짐을 굳혔다.
그래서 가게 된 여행이었지만 아무런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거칠어 보이던 준혁이라는 남자가 형을 대하는 세심한 배려에 나를 놀라게 했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이 남자기 강 지운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라는 의혹을 강하기 부정하고 있었지만 말이지.
여행간 다음날 아침 형의 몸의 키스마크들을 본 순간 난 내 안에 뭔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난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
남자끼리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어느새 내 곁에 맴돌던 커다란 그림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내 뒤에서 말없이 나를 지켜준 원준을 좋아해 버리게 된 것을.
도망치고 싶었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해 버리는 것 같아서.
하지만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원준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녀석의 넓은 품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을 와서도 이상형인 강 지운이 내 앞에 있는데......
난 어느새 좀더 넒은 어깨를..... 좀더 강인한 얼굴을...... 좀더 부드럽게 꼬리를 늘어트린 눈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고 난 애써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도망가지 말아야겠지? 도망가는 것이야 말로 정말 못나고 나약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겠지? 내 마음에 당당히 맞서련다.
언제나 내 뒷모습만 바라보게 만든 내가........ 인제 너와 옆에 나란히 서고 싶다.
보고 싶다, 정 원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