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0/36)

(22)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준혁이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보고 싶던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꽉 껴안고 싶었지만 주먹을 꾹 쥐고 자신을 달랬다. 

태식이놈도 뜻밖의 상황에 놀랐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아무 말 못하고 그저 다가갈 수 없는 안타까움에 아련한 시선으로 준혁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가 험악한 얼굴을 한 채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심장이 가슴 밖으로 뛰어 나올 것만 같았다. 

‘휙’ 

내 팔을 낚아챈 준혁은 그대로 날 거칠게 끌고 갔다.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듯이 무시 된 태식이놈은 분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우리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 준혁이 날 밀어 넣듯 차에 앉혔고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어디론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두근거림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쓰려왔다. 

도착한 곳은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는 내 손목을 놔주지 않았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파왔지만 왠지 손목을 타고 건너오는 그의 체온을 잃고 싶지 않아 놔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와보는 듯한 룸은 전혀 변한 것이 없어보였다. (당연하지. 호텔인데.)

준혁은 날 소파에 내팽개치듯이 앉히고 자신은 그 반대편에 앉았다.

양복상의를 벗어던진 후 거칠게 넥타이를 푸르고 와이셔츠의 위 단추 몇 개를 푸는 모습이 왠지 관능적으로 보여 내 처지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싸늘하게 응시하던 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내기 얘기부터 설명해.”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명령조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변명의 구지도 없었다. 

그를 두고 내기 한 것은 사실이고 그 누구도 자신을 두고 내기 했다는 걸 알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실이다 힘들게 말을 꺼냈다. 

“태식이와 내기를 했어요....” 

“무슨?” 

“태식이가 준혁씨를 뺐어가겠다고.......난 안 뺐기겠다고........” 

막상 꺼내놓고 보니 유치한 사랑 쟁탈전을 벌일 것 같아 쪽팔리고 민망스러워 고개를 절로 수그려졌다. 

“준혁씨 두고 내기 한 것은 정밀 죄송해요...” 

“후우.....” 

그의 낮은 한숨소리에 난 더욱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내게 뭐라 화를 내도 난 할 말이 없다. 

“좋아..... 그럼 요즘 왜 날 피했지?” 

별말 안하고 지나간 것 까지는 좋은데 그가 갑자기 주제를 바꿔 심문하듯 묻자 나는 당혹스러웠다. 

“피, 피한 적 없어요!”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말을 더듬어 버렸다. 

“어설픈 거짓말은 아예 할 생각 마라.” 

오히려 그의 의심만 산 듯 그가 위협적으로 경고해왔다. 

“정말이에요! 요즘 학교일 때문에 많이 바빴어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응시해왔다.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제발 그가 속아 넘어가 주기만을 맘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훗~ 이번만은 넘어가주지.” 

다행이도 믿고 넘어가 주는 건지 알고도 그냥 넘어가 주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넘어가 주었다. 

“후우~” 

잔뜩 긴장했던 터라 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대신....” 

‘흠칫’ 

언제나 ‘대신’ ‘그러나’ ‘하지만’ 등등 뒤에 붙는 말이 제일 무섭기 마련이다. 무슨 말이 나올까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는데.......... 

“애인을 두고 내기한 것도 모자라 속까지 썩인 거에 대한 대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무, 무슨...” 

내가 되묻자 입 꼬리를 싸악 올리고 ‘씨익’ 웃는 저 미소! 평소의 미소와는 다른 의미로 내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드는 저 불길한 미소!! 

“내가 요즘 일도 바빴고 애인이란 녀석은 내 속까지 썩여 집 꼴이 엉망이군. 어떻게 생각해?” 

‘그게 도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거야! 여기자 호텔이지 집이냐! 하우스키퍼들이 허건 날 청소 할 텐데 뭐가 엉망이야!’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억지성 발언에 속으로 발끈해 울부짖었지만...... 

지은 죄가 있는 내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힘없는 난 그의 말에 고분고분 소매를 걷어 올리고 삐까번쩍 먼지 하나 없는 커다란 스위트를 쓸고 닦았다. 

그러는 동안 준혁은 소파에 편하게 발 뻗고 앉아 서류들을 검토하였고 중간 중간 ‘물 가져와라’ ‘과일 깎아 와라’ 등등 잔심부름들을 시켰다. 

이 짓도 두 번째 하다보니 적응한건지 아니면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사랑의 힘으로 커버한건지..... 

처음만큼 그렇게 열불 나고 억울하지는 않았다. 

다만........ 

저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만 있을 뿐!!! 

어느 정도 끝났다 싶은데 준혁이 또 손가락을 까딱이며 나를 부른다. 

‘이번엔 또 뭐냐’ 라고 속으로 이를 갈며 준혁에게 다가갔다. 

“....왜요......” 

“어깨 좀 주물러.” 

‘헐~! 도대체 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내가 그런 맘고생을 했을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헛웃음을 속으로 치며 할 수만 있다면 도로 물리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자 생각보다 단단하게 뭉친 근육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인다. 

내 손길에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 낮은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푸는 그를 보니 왠지 안쓰러운 생각에 

나도 모르는 새 난 진심으로 그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정성껏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손이 뻐근해질 때까지 그의 어깨를 주무른 후 손을 때었는데 그는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그의 눈앞에 흔들어봤어도 그는 깨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많이 피곤해 보였기에 구지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낮게 한숨을 쉬고 방에서 담요하나를 꺼내와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덮어주고 몸을 세우려고 했는데....... 그의 자고 있는 모습은 처음인지라 쉬이 몸을 돌리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였다. 

다시 봐도 정말 잘생긴 얼굴이다. 또한 내가 그리도 보고 싶었던 얼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그의 얼굴로 손을 가져가는데..... 

‘삐빅’ 

갑자기 어디선가 정시를 알리는 전자음 소리가 들려 난 화들짝 놀라 홀린 듯이 내뻗던 손을 황급히 거두려 했는데....... 

‘휙’ 

“앗!” 

자는 줄 알았던 준혁이 순간 내 팔을 확 잡아당겨 난 그의 무릎위로 털썩 넘어졌고...... 동시에 놀랜 난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내 귀로 나긋한 준혁의 음성이 들려왔다. 

“키스해줘.” 

“네??” 

“외로웠던 애인에게 키스하라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이런 억지가.... 이런 남자 정말 어디가 좋다고..... 

하지만 코앞의 남자가 내가 그리도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라는 건 부정 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눈을 살짝 가리던 남들보다 색소가 옅은 갈색머리칼이 부드럽게 뒤로 넘겨져 있어 훤히 드러난 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해왔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아까 만져보고 싶던 그의 반듯한 이마..... 눈썹.... 곧게 선 콧날......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볼..... 약간 까칠한 느낌이 도는 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집스레 굳게 다물어져 있는 그의 입술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하나하나 머릿속에 각인하듯..... 

내 손길에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이 남자를 나는 사랑한다.....

참을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몸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난 눈을 감고 천천히 나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포겠다. 

굳게 다물어져 있는 그의 입술을 살짝 빨아 당겼다 놨다 하며 혀로 살살 쓸었다. 하지만 아까의 일로 아직도 짓궂게 구는 건지 그의 입을 열릴 줄 몰랐다. 

왠지 그가 쫌스럽다는 생각에 그의 아랫입술을 이빨로 꽉 깨물었다. 

그러자 그가 낮게 신음을 흘리며 드디어 입술이 벌어졌다. 그 틈을 타 난 잽싸게 혀를 그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언제나 준혁이 리드를 해왔기에 지금의 상황은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기억을 더듬으며 준혁이 내게 했던 대로 따라해 봤는데....... 반응 없는 준혁이 태도에 난 슬슬 위축되기 시작했다. 

결국 혀를 빼려고 했는데......

갑자기 준혁이 내 허리와 뒤통수를 쌔게 감싸오더니 그의 혀가 거칠게 내 혀를 감싸 올렸다. 

거쌔게 부딪쳐 오는 그의 입술과 혀 때문에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더더욱 깊고 가깝게 그를 느낀다는 쾌감에 아픔보다는 욕망이 내 몸을 지배했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있는데 내 몸이 붕하고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내 입술을 놓아주지 않는 준혁 때문에 그가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곧 내 등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그가 날 침대 위에 내려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날 침대로 데려왔는지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 챌 수 있기에 난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싫으면 지금 말해.”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날 위에서 내려보는 그가 허스키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런 배려가 날 감동시킨다. 그냥 이대로 강경하게 밀어붙일 수도 있는 상황에 내 의견을 존중해주는 그의 따뜻한 배려. 

짓궂은 말투나 행동과는 다르게 상대방을 아껴주고 배려해 주는 그의 세심함이 날 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지금껏 한번도 다른 누구와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겠다는 다짐에......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날 원하고 있다. 

단단해진 그의 하체가 느껴지자 욕망에 물든 눈을 하고도 내 동의를 기다리며 날 내려다보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비록 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와의 사랑을 몸에 각인시키고 싶다...... 

라는 욕심에 나는 대답대신 천천히 위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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