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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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꼴깍 삼켰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난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음먹은 것처럼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안에 그만큼 미련이 큰 것일까....? 

아니.........용기가 없는 것이겠지...... 

오늘 꼭 말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맞는 아침을 망칠필요는 없겠지. 

아니.... 변명일 뿐이다. 난 아직 이 행복을 쉽게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교차하는 모순에 쓴웃음이 나왔다. 

준혁은 내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얼굴에 미소를 지우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나는 뜨끔거리는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얼굴 근육마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어색한 미소만 되어버렸다. 

결국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눈길을 피해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돌던 식사가 나로 인해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로 바뀌자 안타까움이 일었다. 

아침을 먹고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준혁을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하기에는 내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고 정신적으로 큰 피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진동으로 둔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부재중 전화가 거의 50통에 다다르고 있었고 모두 가족들에게서 온 전화였다. 

‘죽었다.....’ 

준혁을 보내고 문을 열어 집에 들어가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뭐라 해야 하나라는 걱정과 걱정을 끼쳤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역시나 집은 발칵 뒤집어져 있었고 일 나갔어야 하는 큰형과 작은형도 여태 출근도 안하고 집에 있었다. 

큰형은 날 보자 우선을 안도하는 듯 낮게 한숨을 내뱉었지만 작은형은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태세였다. 

아버지 어머니도 하룻밤 사이에 얼굴에 주름이 늘은 듯 하여 무척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화라도 내신다면 차라리 맘 편할 텐데 별 말씀 없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씀만 하셔 내 마음은 더욱 무겁기 그지없었다. 

우선은 친구내 집에 리포트 하러 갔다 깜빡 잠이 들었다고 대충 둘러댔지만 가족들에게 거짓말해야 하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내 말에 가족들은 약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 왔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평소 내가 한번도 이런 적이 없기에 이번만은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잖아도 요즘 내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많이 보내오는 걸 안다. 

얼마 전에도 손을 다쳐 들어왔고 한번도 친구들과 여행 갔다 온 적 없던 내가 여행을 갔다 온다고 했으니.... 

평소의 나답지 않은 모습에 걱정이 될 만도 했을 것이다. 

난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에 낮게 한숨을 내뱉고 허리 숙여 가족들에게 걱정 끼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 뒤로 준혁은 내게 매일같이 꼬박꼬박 전화를 했다. 뭐했냐 등등 통상적인 짧은 전화였지만 날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준혁은 바쁜지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화상으로도 준혁에게 몇 번이나 그만 만나자는 말을 꺼내보려 했지만 그 때마다 입이 붙었는지 결국 머뭇거리기만 할뿐 입은 떨어져 주지 않았다. 

그런 날 질책하며 점점 무겁고 괴로워지는 마음을 힘겨워하며 지내고 있는데.... 

‘띠리리리~’ 

“여보세요.” 

[형! 저에요, 도현이!] 

준혁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며칠 뒤 도현의 반가운 전화가 왔다. 

“도현아! 잘 지냈어?” 

[네. 형도 잘 지냈죠?] 

“으응...뭐 그렇지.” 

무의식적으로 말이 흐려졌다. 

[형, 내일 시간 있어요?] 

“왜?” 

[제가 괜찮은 레스토랑 하나를 알았거든요. 또.....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도현이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기분전환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준혁의 생각으로만 머리가 꽉 차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아, 그래? 그럼 내일 보지 뭐.” 

[정말요? 히히~] 

도현의 발랄한 목소리와 애교 덕분에 간만에 살짝 웃음이 났다. 좀더 얘기를 나눈 뒤 도현에게서 시간과 장소를 받고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니. 그때 고민과 관계있는 사람인가? 

‘훗~ 왠지 누군지 기대되는 걸’ 

“형~ 여기에요~” 

“도현아.” 

중간에 만나 같이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던 장소로 가보니 도현이는 이미 와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키가 꽤 큰 호남형의 남자 하나가 있었다. 

치켜 올라간 도현의 눈매와는 반대로 살짝 쳐져있는 남자의 눈매와 굳게 다물어져 있는 입가가 왠지 느긋해 보이면서도 무관심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형, 오랜만이죠.” 

가까이 가자 도현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반가워했다. 

“그러게. 오랜만이다.” 

도현의 밝은 웃음을 보자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형, 이쪽은 정 원준. 같은 학교 친구에요.” 

‘커헉! 친구? 무슨 중학생이 이렇게 커!’ 

“안녕. 만나서 반갑다.” 

속으로는 엄청난 발육에 놀라웠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안녕하세요....” 

역시 생긴 대로 말투도 어딘가 느릿하고 무뚝뚝했다. 

“자자~ 제가 좋은 대 알아놨으니까 빨리 가요.” 

“그래.” 

도현이 데려온 곳은 기대이상으로 분위기가 좋았다. 

“와~ 정말 괜찮은데.” 

“그렇죠? 밤에는 바 중심으로 운영하나 봐요. 아쉽게도 우리는 미성년자여서 못 들어오지만.”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았대.” 

자리에 안내받은 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나이도 어린 것이 어디서 이런 곳을 알았는지....... 

“아, 태식이형이 알려줬어요.” 

“뭐? 태식이?”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태식이라는 이름에 순간 난 딱딱하게 굳었다. 

“네. 전화가 왔었어요. 요즘 형 기분 안 좋아 보인다고 자기가 괜찮은 곳 아니 데려가서 기분전환 시켜주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더라고요. 

태식이형은 요즘 바쁜 일이 있어 시간이 안 된다고........ 형이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역시 어렸을 때부터 친구다보니 서로를 잘 아네요.” 

“.......” 

‘이게 무슨 소리야. 태식이가 시켰다고?’ 

태식이를 오랫동안 알아왔기에 난 감동보다는 불안감이 더 느껴졌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태식이가 날 챙긴다고?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형, 골라보세요. 원준아 넌 뭐 먹을래?” 

도현이 메뉴를 훑어보다 고개를 들어 나와 원준에게 물었다. 

“......너 먹는 걸로.....” 

“어유~ 이 곰탱이. 이거 맛있으니까 이거 먹어.” 

여전히 건조하게 대답하자 도현은 가볍게 핀잔을 주며 메뉴를 골라주었다. 

“...응...” 

원준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진다 싶더니 귀엽다는 듯이 도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또한 도현은 원준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였고. 

하지만 이내 나의 눈길을 느꼈는지 도현이 날 보며 쑥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실은.... 태식이 형 말도 있었지만.......형한테 원준이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어요.” 

“내게?” 

“네. 실은 우리 둘이 사귀는 중이에요.” 

“그, 그래?” 

방금 전의 분위기도 그렇고 강원도의 일도 있고 해서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때 남자들끼리도 사랑을 할 수 있냐고 묻는 녀석의 표정이 상당히 진지했고 혼란스러워 보였으니까. 

“솔직히 그때 형 덕분에 제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래서 형한테 감사하고 싶었거든요.” 

“아니...내가 뭘 했다고...” 

“곰탱이. 너도 형한테 고맙다고 해. 형 아니었으면 넌 만년 내 뒤만 쫓아 당겨야 했어.” 

“......고맙습니다....”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하는 원준이 진심임을 알 수 있어 나는 당혹스러움에 두 손을 저었다. 

“아니... 난 정말 한 게 없는데....” 

내말이 그 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날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난 쑥스러움에 뒤통수만 긁적였다. 

식사를 하면서도 보기와 다르게 원준과 도현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 

원준은 도현의 고기를 먹기 좋게 쓸어주고 또 도현은 구박을 해가면서도 맛있다고 먹어보며 원준의 접시위에 이것저것 올려주며 서로를 챙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준혁이 생각나 가슴 한켠이 쓰리기도 했다. 

“참. 형은 그 아저씨랑 잘 지내고 있어요? 그 아저씨가 형 안 괴롭히죠?” 

때마침 도현이 준혁의 얘기를 꺼냈다. 

“아.....으응....” 

“그래도 그 아저씨가 형을 좀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해요.” 

‘지끈’ 

말도 안돼는 소리였다. 그가 날 사랑한다니....... 그에게는 한국에 있는 동안 잠깐 즐기는 정도 일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눈가가 뜨거워지려 했다. 

“아......나 잠깐 화장실 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더 이상 준혁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앗, 죄송합니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허둥지둥 가다 마주오고 있던 사람과 그대로 부딪쳤다. 

“괜찮으세요?” 

비틀거리는 내 몸을 잡아주며 걱정스런 음성으로 상대방이 물었다. 

“네...감사합니다.” 

준혁의 생각으로 마음이 심란해 얼굴도 제대로 안보고 그저 고개만 살짝 숙여 보인 후 지나가려 했는데........ 

“어? 혹시......지운이??” 

“네?” 

뜻밖에도 내 이름이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들어 나와 부딪친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설마........석훈선배?” 

“야~ 지운이 맞구나. 얼마만이냐. 정말 반갑다.” 

믿기지 않게도....... 꿈속에서도 잊지 못할........ 내 첫사랑 최 석훈이 내 눈앞에서 반갑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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