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준혁의 시점-
비록 강아지의 옆에서 생고문인 밤을 보내 심신이 무척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무엇보다도 강아지의 새로운 모습도 많이 봤으니 말이다. (알몸도 봤고 술취한 모습도 봤고)
하지만 숙취에 끙끙대는 강아지를 보는 것을 그리 즐겁지 못했다. 열에 들뜬 녀석의 얼굴이 유혹적이긴 했어도 안쓰러운 마음이 더욱 컸다.
또한 몸에 내가 새긴 흔적들을 보고 강아지가 까무러치는 모습과 고양이 녀석의 표정 역시 볼만했다.
이걸로 이제 강아지가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알았겠지.
그리고 강아지의 몸에 내거라는 증표가 담겨있는 모습이 의외로 뿌듯해 종종 강아지의 몸에 내거라는 도장을 찍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는 내 충고를 귀담아 들었는지 더 이상 내 앞에서 가식적인 웃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대신 본심을 들어내는 것인지 독기어린 얼굴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진실 돼 보여 차라리 나았다.
그나저나 강아지가 조금 이상하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당황스러워 하며 허둥지둥 시선을 피하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부끄러워 저러나 보다....
하고 귀엽게 보고 넘기기에는 녀석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집 앞에 내려주기 전 내 목에 매달려오며 키스해오는 녀석 때문에 그 생각은 머리 한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내 속단이 너무 빨랐는지 그 뒤 강아지는 괘씸하게도 나와의 만남을 요리조리 피해갔다.
거짓말이란 기색이 역력한 채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머릿속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피어오르는 짜증과 심란한 마음에 일마저 손에 제대로 안 잡히는 걸 보며 한낱 강아지에게 휘둘리는 내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한 달이 체 되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서 강아지는 내게 마이너스 요소밖에 가져오질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다면 빨리 쳐내버리고 다시 본연의 냉철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으로 돌아가면 될 것을 왜 그리 못하고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건 계산에 없었던 지라 내 손에서 벗어나간 이 상황이 솔직히 짜증이 나기도하고 충격적이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너 요즘 뭔 일 있냐?"
"아니."
요즘 통 일에 집중 못하는 날 보며 혜린이 결국 한마디 했다.
"혹시 그 귀여운 강아지랑 뭔 일 있는 거야?"
여자의 저 섬뜩한 직감이란......
"맞구나."
내 얼굴에서 답을 읽었는지 혜린이 묘한 미소를 입에 걸친다.
"훗~ 그 대단하신 한 준혁씨께서 귀여운 애인생각에 일도 제대로 못하는 걸 보니 네게 정말 사랑이 찾아오긴 했나보다."
"뭐? 사랑? 웃기지마."
혜린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혜린의 기분 나쁜 미소는 더욱 깊어만 갔다.
"오호~ 설마 잘나신 한 준혁이 지금 자신의 감정조차 뭔지 모르고 있단 소리야? 아니면... 너무 잘나셔서 인정을 못하고 있는 건가?"
"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가 아냐. 너 왜 그렇게 그 강아지한테 신경 쓰는데? 애인이니까 라는 헛소리는 너야말로 하지마."
꼭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날 응시하는 혜린이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다.
"특이하니까."
"뭐가 특이해?"
"날 내가 아니게 만드는 녀석이 특이해. 처음부터 녀석과의 관계는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거였어.
과연 이런 새로운 모습과 감정들이 내게 해가 될는지 아니면 득이 될는지....하나의 실험이라고 볼 수 있지."
" 그래서 결론은?"
"음..... 별로 득이 되는 것 같지가 않은데."
" 왜?"
이게 지금 무슨 스무고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점점 혜린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듯해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집어치우라고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알 수 없는 심란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야한다고.
“말했잖아. 내 자신이 아니게 된다고. 중요한 일을 깜빡할 뿐 아니라 나답지 않은 행동도 많이 해. 일에 지장을 줄뿐만 아니라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까지 한다고.”
"그래서 싫어?"
"뭐?"
너무 당연한 것을 물었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바보같이 되묻고 말았다. 일에 지장을 주는데 좋을 리 없지 않은가.
"지운이 때문에 변한 네 모습이 싫냐고."
내 모습이 싫으냐고? 모르겠다..........
아니........싫은 건 아니다......... 다만............낯설 뿐이지.......
새로운 감정에 대한 경계심? 두려움?
허를 찔린 질문 덕분에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긴 했지만 결코 납득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두렵다니.....이 내가!!
내 안에 휘몰아치는 거센 파도를 가르고 혜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운이 안보면 보고 싶지?"
내 말에 즉각즉각 반응하며 얼굴표정을 수시로 바꾸는 강아지가 보고 싶긴 하지......
끄덕
"지운이 보고 있으면 자꾸 만지고 싶지?"
내 손길에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강아지 때문에 자꾸 만지고도 싶지.....
끄덕
"지운이가 아프면 걱정되지?"
손을 다쳤을 때나 숙취로 열이 났을 때나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
끄덕
"지운이가 다른 사람 쳐다보면 열 받지?"
고양이가 겁도 없이 강아지 앞에 알짱거리면 기분이 나빠지긴 했지.....
끄덕
그 뒤로도 혜린의 끊임없는 스무고개는 계속되었고 난 거기에 끈기 있게 대답해주었다. 이 대화의 끝에는 과연 무슨 결론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제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한 내 감정에 대한 답을 혜린이 내밀어 줄 것 같기도 했고..........
“그럼............”
밑도 끝도 없는 대화에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던 순간 혜린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말끝을 흐리며 진지하게 눈빛을 반짝였다.
“지운이 안보고 앞으로 살 수 있어?”
"............."
막상 직접적으로 물어오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한 달 뒤에 결정하겠다고만 생각했지 녀석이 떠나는 것을 실제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둘째 치고라도 어차피 한 달 뒤 내게 해가 된다면 미련 없이 뒤돌아설 생각 아니었어? 그런데 왜 쉽게 그렇다고 대답 못한 채 망설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앞으로도 쭉 옆에 두고 싶어?"
역시나 망설여진다.......
강아지를 멀리해야한다는 경고를 하는 이성과 놔주고 싶지 않다는 이해 할 수 없는 소유욕이 내 안에서 충돌해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무슨 말이 나올까 혜린의 입을 주시했다.
“지운이 사랑하지....?”
하! 사랑?? 사랑이라고??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혜린이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사랑을 그랬어. 봐도 또 보고 싶고, 나만을 바라봤으면 좋겠고, 언제나 같이 있고 싶은......”
잠시 남편인 주석을 떠올렸는지 혜린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곧 날 똑바로 주시하며 단호한 어투로 내게 선언했다.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깨닫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넌 지금 사랑에 빠졌어! 사랑은 말이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지.
네가 어떤 기분으로 네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는 알겠지만 지금 너의 모습이 오히려 약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둬.”
짐짓 꾸짖는 투로 진지하게 충고를 해주는 혜린을 보니 역시 나보다 연륜이 아주 조~금 많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이게 사랑이었던 것인가?
확실히 혜린이 따진 대로라면 이건 사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강 지운을 사랑한다고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아니....... 솔직해지자, 한 준혁........
난 분명 앞으로도 강아지를 내 옆에 두고 싶다.
다만 망설였던 이유는.......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감정을 끄집어내는 강아지에게서............ 날 변화시키는 강 지운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비겁한 마음 때문이었다.
“훗~”
막상 결론이 나오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인정하자.....
어이없게도 난 강 지운이라는 귀여운 강아지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결국 난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란 말이지.
‘쿡쿡~ 정말 바보 같아....... ’
강 지운.... 넌 정말 나의 새로운 면을 많이도 끄집어내는구나.
한심스런 내 자신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아직 사랑이라는 게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강아지와 함께 할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의 짜증스러웠던 기분이 눈 녹듯 사라지며 마음이 훨씬 개운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 놔주지 않을 거다, 강 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