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감정을 깨달은 이상 의도적이든 아니든 날 피하는 강아지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기에 직접 학교로 찾아갔다.
활기찬 캠퍼스 내에서 강아지의 모습을 찾고 있자 인정하긴 싫지만 약간 들뜬 기분이 들며 1초라도 빨리 강아지를 품에 안고 녀석에게 깊이 키스하고 싶어
왠지 안절부절 하게 됐다.
드디어 그리도 보고 싶던 강아지의 모습이 보이자 그에 반응하듯 심장이 살짝 뜀박질을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도 어깨가 축 쳐진 채 내 쪽으로 걸어오던 강아지를 막 부르던 차 별로 반갑지 못한 여우가 강아지를 불러 잡았다.
저 여우는 내가 강아지 건들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는데 말길을 못 알아듣는군.
대화를 할수록 점점 일그러져가는 강아지의 얼굴이 보이자 여우의 마수에서 빼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들려오는 내용은 내 발걸음을 얼어붙게 하기 충분했다.
처음에는 여우가 내 험담을 하자 거기에 날 변호해준 강아지 때문에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내기는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진가?"
여우의 비아냥거리는 음성은 내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기?
지금 날 두고 내기를 했다는 소린가??
상황판단이 되는 동시에 불쾌감과 이해할 수 없는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물론 강아지가 날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기분 나빠할 이유 따위 없어야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틀리지 않은가.
분노를 억누르고 둘 사이에 맴도는 팽팽한 신경전을 끊었다.
내 갑작스런 등장에 경악하는 강아지와 여우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강아지와 이런 식으로 대면하게 되다니.......
해명을 바라는 눈길로 강아지는 차갑게 응시했지만 돌아온 것은 뭔가 애달프고 아파보이는 눈빛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많이 창백해 보였다.
순간 마음이 흔들리며 걱정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여우에게 구경거리를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기에 강아지를 끌고 호텔로 왔다. 그리고 내기에 대해 묻자.....
황당하게도 날 뺐기지 않고 싶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 느낌이란!! 벌어지려는 입을 힘겹게 추스르고 이어서 날 피해온 이유를 물었다.
피한 적 없다고 정색을 하며 부정하는 강아지를 보니 확실히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구지 캐내고 싶지는 않았다.
강아지가 내게 귀여운 소유욕을 보인 것 하나만으로 지금까지의 기분이 180도 바뀌다니..... 한심하다 한 준혁........
그럼......... 이제 날 애태우게 한 벌은 받아야지?
얼굴에는 불만을 가득 담고도 지은 죄가 있어 아무 내색 못하고 시키는 일을 모두 하고 있는 강아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날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빠지게 만든 거에 대한 작은 심술이라고 할 수 있다.
녀석이 해준 안마로 인해 몸이 나른해지며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몸에 힘을 빼고 기분 좋은 녀석의 손길에 몸에 맡기자 절로 눈이 감겼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손이 아프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 녀석이 손길이 아쉽게 멀어졌다.
내가 자는 줄 아는지 내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보는 녀석의 기척이 느껴졌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잠시 녀석이 어떻게 하나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녀석의 기척이 잠깐 사라졌다 돌아오더니 내 위로 담요가 덮어지는 걸 느꼈다.
사랑스럽다는 생각에 녀석을 꽉 안아주고 싶었지만 장난스런 마음에 잠시 더 지켜보기로 했다.
내 얼굴위로 꽂히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 볼게 있다고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얼굴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언가가 내 얼굴 쪽으로 뻗어오는 걸 느꼈다. 아마도 녀석의 손일 거라고 생각되자 흥분과 기대감에 가슴이 평소보다 빨리 박동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는데 순간 '삐빅' 하고 정시를 알리는 전자시계소리가 한순간에 김장감 돌던 침묵을 깼다.
그 소리에 놀란 강아지가 손을 거두려 하자 나는 재빨리 녀석의 손을 낚아채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녀석은 힘없이 내 쪽으로 쓰러지며 반사적으로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녀석의 귓가에 키스해달라고 낮게 속삭이자 순진한 눈망울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이 꽉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내 반 억지인 요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수줍게 입술을 맞춰오는 녀석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녀석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내 몸을 짓눌렀다.
침대에 내려놓을 때까지도 아무런 저항 없는 강아지를 당장이라도 가지고 싶었지만 욕망에 이성을 잃고 녀석을 덮치는 식으로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동의를 구하는 내 목을 감싸 안는 녀석을 보며 속으로 안도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자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단 사실에 놀라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몇 백만 달러짜리 계약을 추진시키면서도 긴장한 적 없던 내가 강아지가 섹스를 거절할까 긴장하고 있었다니........
아니........ 이건 단순한 섹스가 아니다....... 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나누는 것이다. 육체적 성욕을 해소시키기 위한 행위가 아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행위인 것이다.
하~ 이런 순정적인 발상이라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분명 처음일 것이 분명한 녀석을 최대한 아프지 않게........... 부드럽게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찔할 정도로 내 중심을 죄어오는 녀석과 온몸을 짜릿하게 하는 녀석의 색스러운 신음소리에 결국 내 자신을 자제하지 못했다.
이렇게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감과 온몸을 꽉 채우는 만족감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익숙지 않은 행위로 축 늘어져 있는 녀석을 씻기고 침대에 뉘인 후 나 역시 옆에 눕자 마치 원래의 자리를 찾은 듯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품에 들어왔다.
절로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느끼며 내 품안에 있는 강아지를 확인하듯 꽉 끌어안고 나 역시 녀석의 달콤한 체취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아침에 일어나 내 옆에 누워있는 녀석을 보자 따뜻한 무언가가 내 가슴에서 온몸으로 확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채 자고 있는 강아지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자 강아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순진한 까만 눈망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까만 눈동자가 날 담더니 곧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내게 지어 보여 내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확실히 내 감정을 알고 또한 인정한다. 언제나 이런 아침을 맞고 싶다는 것이 내 진심이다.........
허리가 아파 끙끙거리는 강아지가 안쓰럽기는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러지 않겠다고는 확신 못한다.
그저 통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마사지를 해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겠지.......
배고픈 강아지를 위해 시킨 룸서비스가 오자 오물오물 거리며 식사를 하는 녀석을 즐겁게 바라보니 나 역시 시장기를 느껴 수저를 들었다.
여유롭고 충만감이 느껴지는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강아지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들썩거렸지만 뭔가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꺼내지 못해
내 의아함을 자아냈다.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저렇게 힘들어하는 거지?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어제 흐지부지 넘어간 이슈! 바로 지금까지 강아지가 날 피해온 이유이다!
바빴다는 그런 서투른 변명 따위 난 당연히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강아지의 기특한 말에 들떠 날 피해온 진짜 이유를 제대로 들을 생각을 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육감적으로 강아지가 날 피해온 이유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 걸 알아챘고 앞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강아지가 보이자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분명 날 사랑해서 강아지가 날 붙잡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라는 현실이 떠오르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아 분명 내게 좋은 말을 아닐 것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던 난 이미 널 놔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라. 그리고 반드시 날 사랑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마라.......
매일 같이 강아지의 얼굴을 보며 지내고 싶지만 도대체 일이 바빠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매일 같이 짧게 듣는 녀석의 목소리가 작은 위안이 되었다.
물론 매번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하는 녀석 때문에 가슴 한켠이 싸해지며 불안함이 들기는 했지만.......
강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한창 마지막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뜻밖에도 여우의 꼬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여우가 내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차갑게 용건을 물었다.
[지운이 일로 할 말이 있는데요.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어요?]
강아지 일 때문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강아지 볼 시간도 없는데 여우 볼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운이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우리 일에 신경 꺼라.”
목소리를 낮게 깔고 경고를 담아 딱 잘라 거절을 했지만 쉽게 물러서지를 않는다.
[훗~ 후회하실 텐데요. 요즘 지운이 이상하게 굴지 않아요?]
비꼬는 여우의 말을 듣는 순간 솔직히 흠칫했다. 확실히 강아지가 최근 이상스럽게 굴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대답이 없자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여우가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했다.
[이유를 알고 싶으시다면 ***에 있는 Mirror에 10시까지 오세요. 그럼.]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여우가 기가 막혀 한동안 이미 끊긴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누가 나갈까보냐!’ 라고 생각한 뒤 다시 서류로 신경을 돌렸지만 자꾸 아까 여우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저 건방진 여우를 간단히 무시하기에는 최근 강아지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대충 검토하던 서류를 마무리하고 시계를 얼핏 보니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은 어느새 여우가 알려준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상당히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 겸 바였다.
안에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여우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해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코앞에 있는 바에 앉아 바텐더로 보이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의 뒤통수가 어딘가 낯이 많이 익어 보이는데..........
"..... 제가 선배 좋아한 거 알아요?"
약간 와작지글한 바 안에서 목소리마저 낯이 익은 음성이 내 귀에 뚜렷이 들려왔다.
설마............
"제 첫사랑이었다고요.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믿고 싶지 않게도......... 다른 남자에게 내가 사랑하는 웃음을 시원하게 터트리고 있는 강아지가 내 눈에 보였다.
뺨에 홍조를 띄고 즐겁게 웃고 있는 강아지 때문에 머리와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거였냐, 강 지운. 그래서 날 피해온 것이냐.
사랑이라는 감정에 한껏 들떠있던 자신이 한순간에 한심하고 비참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저 강아지가 날 농락했다는........ 아니.........
배신감이란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분노가 서서히 치솟아 올랐다.
"지운아."
언제 왔는지 여우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서 강아지를 불렀다.
이름이 불리자 강아지가 몸을 흠칫 떨더니 인상을 잔뜩 쓴 채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날 발견한 강아지의 눈이 커지더니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뭔가 호소하는 듯 한 녀석의 눈빛이 보였다. 평소라면 상처받은 녀석의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을지 모르지만 내 이성은 이미 분노에 의해 멀리 날라 간 상태였다.
그리고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의식하기도 전에 충격으로 굳어버린 녀석이 내 눈앞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