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레스토랑에서 석훈 선배를 우연히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감정은 놀랍게도 반가움이었다.
물론 좋은 추억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픈 추억을 남기고 헤어진 인연이었기에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토록 힘들었던 때가 이제는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았다는 사실에........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흘렀구나 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준혁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되면 그 전의 사랑은 그저 과거의 한 조각으로 남게 되기 마련이니.
준혁을 만나기 전까지는 선배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곤 했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게 되니 마치 친했던 선배를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 마냥 반갑기만 해 절대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내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만큼 준혁이 내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말이겠지.
알고 보니 그 Mirror라는 레스토랑은 선배가 운영하는 곳이란다.
그 날은 갑작스러워 경황도 없었고 또한 일행(도현과 원준)도 있었기에 다음날 저녁에 따로 그 레스토랑에서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그 가게에 가보니 도현의 말대로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아늑하고 세련된 바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에서 선배의 모습을 찾으니 바 뒤에서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석훈선배가 바텐더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 쪽으로 다가가 높은 툴 의자에 앉자 선배가 날 알아봤는지 한때 내가 사랑했던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가왔다.
"왔어, 지운아?"
"네. 많이 바쁘세요, 선배?"
"아니야. 뭐 마실래?"
아무거나 하나 추천해서 달라는 내 말에 이름은 모르겠지만 색깔이 무척 예쁜 칵테일 하나를 선배가 내 앞에 놔주더니 내 옆의 툴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짜식~ 변한 게 없네. 7년?8년 만인가? 그래, 어떻게 지냈어?"
"뭐, 그냥 학교 다니고 군대 다니고 했죠. 선배는요?"
"아, 난 작년까지 미국에 있었어. 한국 들어와서 이 가게 차린 거야."
"와~ 대단하네요."
내 감탄에 선배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애인은 있고?"
"네?"
"설마 없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멋진 남자를 어느 여자가 내버려두겠어."
"하하...."
'있기는 있죠.'
짓궂게 웃음을 흘리며 놀리는 선배에게 차마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해 어설픈 웃음으로 넘어가면 슬쩍 관심을 돌렸다.
"선배는 있어요?"
"음....없어."
"엑? 말도 안 돼. 선배가 얼마나 멋진데요."
"쿡쿡~ 그래, 고맙다."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선배가 마치 형들과도 같은 편안했다. 한때 이 손길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선배가 자리를 잠시 비우자 할 것도 없던 난 칵테일을 홀짝이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런데 지금껏 눈치 채지 못한 괴리감이 이 공간 안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느끼는 이 괴리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다 난 곧 이 바 안에 대부분이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정신이 퍼뜩 들어 주위를 샅샅이 살피자 곧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남자들 사이에 오가는 끈적끈적한 시선과 은근한 접촉이 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운 장면이긴 하지만 내게 어색하지 않은 이 장면은 분명 게이바에서나 익숙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지운아 뭐 더 마실래?"
"선배...."
"응?"
"혹시 여기......."
이제는 확실히 보이는 남남커플들에게 눈길을 주며 말끝을 흐리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 챘는지 선배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하하..... 응......게이바지....”
역시나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게이바라니.....
“선배.......그럼 혹시 선배도......”
“뭐..... 그렇지.....하하~”
이번에도 어색한 웃음을 터트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선배 때문에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왜일까...... 쇼킹하다는 생각도 잠시....참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라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 자신이 게이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커밍아웃이 그리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솔직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가 게이라는 건 역시 충격이긴 충격이지만.
선배가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일까......
같은 비밀을 혼자만 지키고 있는 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나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선배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나와 같은 반응으로 잠시 놀라는 듯 했지만 곧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마치 그동안 혼자 힘들었지.... 라며 위로를 해주는 듯한 제스처에 가슴이 찡해졌다. 지금껏 아는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한 것은 처음인 것이다.
그래서 이해받고 인정받는다는 것이 이리 가슴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같은 게이니까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서로의 가장 큰 허물이 없어져서인지 선배와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애인은 잘 해줘?”
“네? 아......그게......”
아무래도 보통사람과 틀린 연애를 하다 보니 누군가에게 상담하기가 힘들다는 건 당연했다.
특히 나같이 주변에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더했고. 아마 그랬기에 난 은근히 나의 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누군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난 은근한 기대를 품고 선배에게 준혁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물론 태식이와의 내기와 계약에 관한 것은 빼고.
“음..... 그러니까....... 네가 준혁이라는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 남자 역시 널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모른다.
거기다 그 남자는 이제 한 달도 안 있다 한국을 떠난다. 이 말이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선배의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지운아..... 한 번이라도 이런 네 마음을 알려본 적 있니?”
“.....아니요......”
힘없이 대답하자 선배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살면서 후회는 남기지 말자고. 부딪쳐 보지도 않고 미리 안 된다는 지레짐작으로 포기해 버리는 건 정말 안타깝고도 한심하다고.
‘아, 그때 한번 시도라도 해봤을걸....’이라는 후회를 했을 때는 이미 늦은 거야. ‘되든 안 되는 밑져야 본전이지’
라는 다짐으로 도전해본 후 실패하면 물론 실망도 하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상처는 아물게 돼있거든.
또한 정리를 하더라도 깨끗이 정리할 수 있고 후회도 남기지 않을 수 있겠지. 그리고 또 누가 알아? 운 좋게 성공할지.
하지만 시도조차 안하면 그 낮은 성공률에 기대를 걸어보지 조차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만 충실하란 말이야. 후회가 남지 않도록...... 알겠어?”
선배의 말이 끝나자 난 마치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머릿속이 깨끗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거부당했을 경우 나 상처 받을 것만 지레 겁먹어 그에게서 도망가는 것은 참으로 비겁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만일 고백 한번 못해보고 준혁을 떠나보낸다면 아마 평생 가슴속에 무거운 짐을 담고 있는 것 마냥 답답하고 후회가 돌 것 분명하다.
선배를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니 그런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다.
어차피 떠나는 사람인데 눈 꽉 감고 고백 한 번 못할 건 또 뭐가 있을까...... 차라리 고백하고 시원하게 차인다며 마음이 훨씬 후련 하고 정리도 잘 될 것 같다.
그래..... 이 걱정 저 걱정 모두 치워버리고 내 감정에만 충실하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마음의 결정을 내려서인지 훨씬 가볍고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준혁이 미치도록 보고 싶기도 했고........
“고마워요, 선배.”
바보 같고 미련스러운 내게 중요한 깨우침을 준 선배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느꼈다.
처음 바보 같은 실수를 했던 첫사랑 상대에게서 조언을 얻어 또다시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를 뻔 한 것을 저지 받다니..... 왠지 아이러니한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어쭈~ 아까는 죽어가더니 이젠 웃어?”
“히히~ 왠지 아이러니해서요.”
“뭐가?”
“첫사랑에게서 사랑조언 받는 게.....”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문을 표하는 선배의 얼굴을 보자 또 웃음이 나왔다.
“선배, 제가 선배 좋아했던 거 알아요?”
그 옛날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다는 생각에 고백은 꿈조차 꾸지 못했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고백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갑작스런 고백에 제법 놀랐는지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런 선배의 모습에 왠지 장난기가 들었다.
“선배가 제 첫사랑이었다고요.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선배를 보자 나도 모르게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하하~ 이거이거, 굉장한 영광인데. 내가 그 당시 학교에서 악명을 떨치던 귀염둥이의 첫사랑이라니.”
드디어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내게 윙크를 하며 능청스럽게 맞받아치는 선배 때문에 난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학교에서 유일하게 선배만이 날 귀염둥이로 봐줬으니 내 첫사랑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얼마 만에 이리 시원하게 웃어봤는지 모르겠다며 생각하고 있었다.
꿈에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제발 환청이기를 바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리자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곳은 태식이놈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여기 있을 리 없는 준혁이었다.
어째서 여우새끼와 준혁이 여기에 함께 있는 건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은 나는 준혁의 차가운 눈빛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놀라 휘둥그레진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준혁씨? 어떻게....”
아까까지만 해도 그리 보고 싶던 준혁이 내 앞에 있는 것 까지는 좋지만 왜 하필 여우새끼와 같이 있는 것인지............
불안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리고 어찌된 일인지 물으려 했지만 나는 준혁의 냉기 어린 눈빛에 열었던 입을 바로 다물어야 했다.
왜 저런 무시무시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의문을 담아 준혁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건 조금씩 몸을 떨리게 만드는 준혁의 냉랭한 눈빛이었다.
“내게서......”
드디어 준혁의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뭐?’
도대체 이 뜬금없는 말이 뭔 소린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네가 아무리 애원해도 절대 놔주지 않을 거다.”
준혁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에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앞에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어도 지금의 말은 확실히 내 뇌리에 확실히 박혔다.
‘놔주지 않는다.....놔주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그의 말에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조금은....아주 조금은 기대를 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정신을 다잡았을 때 준혁은 이미 가게를 나서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그를 따라잡으려 했지만 순간 내 팔목을 잡아채는 억샌 힘에 내 행동을 저지당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