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29/36)

 (30) 

마치 십년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간 듯 후련한 가슴으로 바(bar)를 나왔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는지 한심함과 후회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태식의 생각도 잠시...... 바를 나온 이유인 준혁을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졌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준혁의 모습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의 나였다면 실망에 이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갔겠지만 오늘의 나는 여기서 풀죽어 꼬리를 내리는 바보 같은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걸 깨우쳤기 때문이다. 

더 이상 혼자 땅 파느라 소중한 것들을 잃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오늘로 끝인 거다.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한 나는 주먹을 꾹 쥐고 비장한 얼굴을 한 뒤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준혁을 찾아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의 회사가 어디 있는지..... 그가 잘 가는 장소가 어디인지 조차 모르니 말이다. 

그저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곳은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일 뿐. 

우연하게도 이곳에서 호텔은 버스로 두정거장 거리로 그리 멀지 않았다. 

걸어가기에는 좀 벅찬 감이 있는 거리지만 버스나 택시 등을 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을 정도로 내 마음은 초조하고 조급했다. 

어떡해서든 빨리 그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만 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뛸수록 복잡한 생각들이 날아가고 내 머릿속은 오로지 준혁의 생각으로만 꽉 찼고 있었다. 그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그를 보고 싶다는 욕망만이 내 몸을 지배해 내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점점 달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멀리서 조그맣게 보이던 호텔이 점점 커질수록.......... 내 심장박동 역시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한 나는 단숨에 호텔 안으로 박차고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가 머물고 있는 꼭대기 층을 누르고 나자 아까까지만 해도 느낌이 없던 다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무리한 다리가 이제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심장 또한 아까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마치 당장이라도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강렬히 뛰기 시작했다. 

‘띵’ 

어느새 꼭대기 층에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 알림음이 유난히 크게 울리며 내 신경을 자극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리자 침을 한번 크게 삼킨 뒤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다듬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느릿하게 준혁의 스위트 쪽으로 다가갈수록 머릿속은 점점 하얘져가고 있었다. 그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내 몸은 멈추지 않았다. 

‘딩동’ 

두려움, 기대감, 흥분감.......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하는 걸 느끼며 벨을 누른 뒤 잠시 숨을 죽이고 그의 기척을 기다렸다. 

하지만 스위트 안쪽에서는 문을 열어주는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딩동’ 

다시 한 번 벨을 누르고 기다려보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털썩’ 

왠지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긴장감으로 굳어있던 몸이 풀리고 힘겹게 버티고 있던 다리 역시 힘이 풀리자 나도 모르게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한숨을 푹 쉰 뒤 굳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몰라도 내 마음은 꼭 전하고야 말 것이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 보는 거다. 

머리를 문에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던 심장도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마음도 어느 정도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가 울리자 난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펜트하우스 층에는 총 4개의 스위트가 있었다. 그리고 4개 모두 손님들이 사용 중일 찬스는 낮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지금 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이 준혁일 확률은........... 

역시나......... 어디서 많이 본 늘씬하고 긴 다리가 매끈한 검은색 양복에 감겨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뻗어 나왔고 곧 이어 준혁의 잘생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트러진 매무새에 얼굴에는 피곤함을 가득 단 준혁이 날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의외였는지 놀라움을 얼굴에서 감추지 않았다. 

난 드디어 준혁을 만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오는 걸 느껴 새하얗게 비워진 머리보다는 몸이 원하는 본능을 따랐다. 

“윽!” 

‘우당탕!’ 

본능이 시키는 대로 단숨에 준혁에게로 달려가 그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하지만 온몸으로 달려든 내 무게에(보통 덩치가 아니다보니) 밀려 준혁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나와 함께 그만 뒤로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넘어진 것에도 개의치 않고(그의 엉덩이가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준혁을 꽉 안고 있자 그가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해 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곧이어 숨 막히도록 꽉 마주 안아오는 준혁 때문에 나는 더욱 깊숙이 그의 품을 느끼며 안도 할 수 있었다. 

또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사랑해요.........” 

떨리는 심장을 가다듬고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만 둔 나의 수줍은 마음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내 고백에 딱딱하게 굳어지는 그의 몸이 느껴지자 가슴이 철렁했다. 

거절도 각오를 하고 고백을 한 것이지만 막상 거절당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지끈거리고 눈가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으로 그를 힘주어 꽉 안은 뒤 천천히 몸을 뗐다. 아니........떼려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쌔게 안아오는 준혁만 아니었으면....... 

“커헉!”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준혁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꽉 조여 오는 그의 팔은 풀릴 생각을 안했다. 

“다시 말해봐.” 

어딘가 간절하게 들리는 준혁의 음성이 들려오자 나는 저항을 멈추고 그의 등을 위아래로 부드럽게 쓸었다. 

“사랑해요.....” 

아까보다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마음을 속삭이자 그 말이 암호라도 되듯 드디어 준혁의 팔이 스르르 풀렸다. 

숨을 가다듬고 있는데 커다란 두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싸왔다. 손이 이끄는 데로 고개를 들자 옅은 갈색 눈동자가 내 눈을 곧게 응시해왔다. 

“누구를?” 

아직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준혁이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왔다. 

언제나 여유 있고 당당 할 것 같은 준혁이 긴장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자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가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손을 뻗어 그의 딱딱하게 굳은 뺨을 살짝 쓸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 강 지운이 당신 한 준혁을 사랑해요.” 

세 번째로 고백을 하고 이번에는 준혁이 확실히 받아들였을까 의심하고 있는데....... 

“우와아앗~!!” 

갑자기 내 몸을 확 일이키는 준혁에게 놀라 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주, 준혁씨!” 

그래도 내 고백에 어떤 대답을 줄 것인지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날 끌고 다급히 스위트로 들어가는 

준혁 때문에 당황함을 감출 수 없어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털썩’ 

“우앗!” 

준혁은 당혹스러워 하는 내 부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침실로 끌고 가더니 침대 위로 날 넘어뜨렸다. 

“준혀....으읍!!” 

여전히 그의 엉뚱한 행동에 당황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내 몸 위로 포개 눕는 준혁의 무게와 거칠게 입을 맞춰오는 

그의 입술 때문에 그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집어삼킬 듯 거세게 입안을 침투해오는 그의 혀가 내 혀를 뿌리 체 뽑아버릴 듯 감아올려와 아픔과 쾌감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이 난 날 감싸오는 그의 키스에 뭔가를 갈망하듯 열렬히 반응하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숨을 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 때문에 점점 숨이 가빠오고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입 꼬리를 따라 옆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의 입이 떨어져나갔을 때는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 멍한 정신에 아무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침의 줄기를 따라 준혁이 자극적으로 입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시 한 번 온 몸을 강타하는 짜릿한 전류에 

목을 뒤로 젖히며 새된 신음을 흘렸다. 

“하아아....” 

“다시 말해봐........” 

귓불을 지분거리며 중얼거리는 준혁 때문에 간지러움과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사...랑해요....흐윽~” 

흥분에 달뜬 음성으로 힘겹게 내뱉자 그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와 이빨로 살짝 깨물고 빨아 당기며 내 몸에 사랑의 각인을 새기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이 내 쇄골을 훑었고 윗도리는 언제 벗겨졌는지 손은 내 가슴과 배를 쓸며 내 몸을 자극시켰다. 

“하아.....으윽! 준혁씨!” 

입술과 함께 점점 아래로 내려간 손이 바지 앞섬을 푸르고 매끄럽게 들어와 나를 강하게 움켜쥐자 눈앞이 아찔해져 그의 이름을 큰소리로 내질렸다. 

“아으윽!”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드는 준혁의 손길에 쾌감이 등허리를 때려 반사적으로 몸이 튕겨 올랐다. 

“다시 말해봐, 지운아...” 

가슴돌기를 지분거리다 재촉하듯 이빨로 살짝 깨무는 준혁 때문에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악~ 윽! 사...사랑...해요...” 

준혁의 손길이 점점 빨라질수록 내 흥분은 극에 다다라 몸이 비틀리고 발가락에는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으으윽! 준혁씨!....이제....하아악!” 

끝내 절정에 다다른 나는 쾌감에 몸을 떨며 준혁의 손에 희멀건 액체를 뱉어내고 말았다. 

“하아...하아...” 

기운이 쫙 빠져나가 힘없이 늘어져 가쁘게 숨을 쉬고 있자 준혁이 팔꿈치로 윗몸만 일으켜 날 위에서 내려 보았다. 

흥분에 들뜬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려 했는데 내 턱을 잡아 저지시키는 바람에 그와 얼굴을 마주봐야했다. 

내게 고정시킨 그의 갈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평소보다 짙게 보였다. 

“사랑해.....” 

뭐? 지금 뭐라고?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준혁의 듣기 좋은 바리스톤 음성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사랑해, 지운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믿기지 않게도 지금 준혁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한 번만....”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까 준혁이 그랬던 것처럼 환청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짐 받기 위해 다시 한 번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사랑해, 지운아..... 사랑해.....” 

한 점의 거짓 없어 보이는 깊은 눈동자로 곧게 응시해오며 사랑을 속삭이는 준혁을 보자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가가 뜨거워져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 듯 준혁이 내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어준 후 아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키스를 하며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뜨거운 준혁의 느낌은 확실히 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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