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아침을 맞으며 정말 행복한 하루를 시작했다.
준혁의 도움으로 화장실도 갔다 오고 샤워도하고 허리까지 꼼꼼히 마사지 받으며 마치 아기를 다루듯 모든 걸 일일이 챙겨주는 준혁 때문에 쑥스럽고 쪽팔렸지만.
누군가 나를 이렇게 챙겨주고 아껴준다는 사실에 가슴을 간질이는 행복을 느꼈다.
혹시 몸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세심한 것까지 꼼꼼히 신경써주는 준혁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이런 아픔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몸의 상태가 훨씬 좋아진 지금은 영화에서나 보던 침대에서 아침을 먹는 사치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음식이 도착하자 내가 진짜 아이나 환자라도 되는 줄 아는지 자기가 먹여주겠다는 걸 말리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나도 다 큰 남잔데 멀쩡한 두 팔 두고 음식 수발을 받는 다는 것은 심히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 김치.”
“.........”
물론 중간 중간 반찬을 집어주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내게 김치를 내미는 준혁을 어떻게 거절하란 말인가!!
어설프게 입을 벌리자 적당한 사이즈로 찢은 김치가 내 입안에 쏙 들어왔다.
씹는 동작, 삼키는 동작 하나하나 흐뭇한 얼굴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준혁 때문에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쪽!’
“잘 먹었어.”
마지막 한 숟갈을 겨우 넘기고 마침내 이 부담스런 식사가 끝났구나 하며 속으로 안도를 하고 있는데 준혁이
내 이마에 키스를 해고는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사람이 과연 한때 날 짐꾼으로, 가정부로 이리저리 부려먹던 사람과 동인인물이 맞는 건지 심히 의심이 간다.
뭐......그래도 기분이 그리 나쁜 건 아니니까....흠흠!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비록 어린애 다루는 듯한 태도는 약간 불만이었지만 그의 정성어린 간호(?)에 솔직히 감동 먹었을 뿐 아니라 몸도 이제는 훨씬 편해졌다.
“그래? 고마우면 보답을 해야지.”
“.........”
완전 능구렁이가 된 준혁이 능청스럽게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미는 것을 어이없이 쳐다봤다.
처음 그 칼날 같이 날카롭고 야수와 같이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이 남자에게 이런 면이 있을지 누가 상상이나 했는가.
그렇게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한눈에 반했던 자신의 이상형이 지금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당당히 키스를 요구하게 될 거라는 걸 그 당시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 시켜 줄 준혁의 따뜻한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촉촉한 머릿결과 배스로브 사이로 보이는 그의 단단한 가슴이...... 그
리고 내리깐 긴 속눈섭과 살짝 벌어져 있는 유혹적인 입술이 섹시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슬며시 두 손을 뻗어 준혁의 뺨을 감싸고 얼굴을 내 쪽으로 당기자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천천히 입술을 가까이 하자 애프터 쉐이브의 청량한 냄새가 가슴을 시원하게 훑고 갔다.
살포시 내 입술을 준혁의 입술에 눌렀다. 가볍게 입술만 댔다 땠다 하자 애가 탔는지 준혁이 내 아랫입술을 살짝 빨았다 놨다.
리드에 맞춰 나 역시 입술을 빨았다 깨물었다 좀더 적극적으로 입술을 더듬다 과감하게 준혁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 그의 말캉한 혀를 감쌌다.
거기에 강렬히 마주 대응해오는 준혁이 내 몸을 꽉 안아 당겼고 나 역시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얼굴 각도를 틀며 그가 좀더 깊이 내 입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딩동’
순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몽롱하니 키스에 빠져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준혁의 손이 어느새 허리끈이 느슨해진 배스로브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내 몸을 더듬고 있는 걸 느끼자
그를 살짝 노려보며 손등을 살짝 후려쳐 손을 빼낸 후 얼른 로브를 제대로 여몄다.
준혁은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신경질적으로 ‘누구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러 나갔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앙탈스런 목소리에 방해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다, 이 녀석아! 책임자라는 놈이 잘만 살고 있던 이 몸을 불러놓고 일이나 죽어라 시키면서 너는 감히 땡땡이를 쳐? 핸드폰은 왜 꺼 놔!”
쏟아져 나오는 잔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준혁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지만 곧 자신의 사촌누이를 가볍게 무시한 뒤 다시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거기서 포기 않고 방으로 따라 들어오면서 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혜린이 보이자 나는 아직 배스로브 차림으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후다닥
몸을 침대에 뉘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잠시 후 침대 한쪽이 준혁의 무게에 가라앉는 게 느껴졌고 곧 이어 이불을 내리려는 그의 손길이 따랐다.
“답답하게 왜 이불은 머리까지 덮고 있어.”
‘우앗! 바보!’
확 젖혀지는 이불을 잡지 못하고 결국 난 혜린의 앞에 민망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혜린은 날 발견하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멈추지 않은 것 같던 그녀의 종알거림 역시 말끝을 흐리며 침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뜩이나 큰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자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라 난 안절부절못하며 얼굴만 빨갛게 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었던 표정이 풀어지고 대신 눈과 입 꼬리가 휘어져 의미심장한 미소가 얼굴에 떠오르는 것이 보이자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호호호~ 결국 이렇게 된 거야? 지운이 불쌍해서 어떡하니. 꽃다운 나이에 이런 녀석한테 코 꿰이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다시 잘 생각해봐.”
“누나....”
“서혜린!”
점점 일그러져가는 준혁의 얼굴이 보이자 난 그가 폭발하기 전에 말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혜린을 애처롭게 불렀지만 이미 늦었는가 보다.
섬뜩하게 혜린의 이름을 으르렁거리는 준혁의 음성에 몸이 절로 움찔했다.
하지만 무적의 여인, 혜린에게는 이도 통하지 않는가보다.
“호호~ 한 준혁. 너 그 성질 죽여라~ 안 그러면 귀여운 강아지 도망간다~”
“푸훗~!”
준혁의 위협에도 쫄지 않고 되려 능청스레 받아치는 혜린 때문에 결국 난 웃음이 터졌다. 아니.....
무엇보다도 절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준혁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거리며 분해하는 모습이 웃겼달까.
오늘 참으로 상상도 못했던 준혁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는 것 같아 정말 유쾌하다.
하지만 어찌 준혁 앞에 대고 웃을 수 있을까.....
손으로 얼른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아보았지만 이미 한번 세어나간 웃음 때문에 난 준혁의 따끔한 눈총을 받아야했다.
하지만 원인제공자는 따로 있었기에 내게 오래 머물지 않고 곧 혜린에게로 눈총이 넘어갔다.
물론 거기에 굳힐 누나가 아니었지만. 저 귀엽고 아담한 체구 어디에서 저런 용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리 사촌동생이라지만 직장상사이기도 한데 저래도 되나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저런 강심장이니 준혁과 같이 일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혜린은 준혁의 살벌한 눈총을 아주 가볍게 무시하고 오늘의 스케줄을 쫙 나열하기 시작했다.
결국 직업모드로 들어온 혜린을 보며 준혁도 체념한 듯 한숨을 크게 쉬더니 곧 자신도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혜린의 말에 집중했다.
한번도 준혁이 일 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나는 (그래봤자 침대에 앉아 혜린의 말을 듣고 있다 이것저것 지시하는 것뿐이지만)
그의 새로운 모습에 두 눈을 반짝이며 준혁을 유심히 관찰했다.
냉철한 눈과 절제된 동작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당당하고 단호하게 지시를 내리는 준혁의 모습은 권위적 그 자체였다.
굳건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준혁의 멋진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며 가슴이 설래와 세삼 다시 반한 눈으로
준혁을 정신없이 넋 놓고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누구 애인인지 참 잘났다~ 하며 침을 흘리고 있는데 어느 정도 용무가 끝났나보다.
“......그리고 오늘 저녁 리셉션 준비는 예정대로 잘 돼가고 있으니 늦지 말고.”
그걸 마지막으로 혜린은 두툼한 서류 파일을 덮었다.
그나저나 준혁은 말로만 듣던 리셉션이라는 곳도 가는구나. 역시 학생인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세삼 깨달아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운아, 너도 저녁에 할 일 없으면 와라.”
“네?”
혜린이 건네준 서류를 검토하던 준혁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고 뭔 소리냐는 듯이 쳐다봤다.
“어차피 가벼운 연회고 사람들도 많이 올 테니 상관없잖아. 너 전공도 경제학과라며. 미리미리 사람들 안면도 익혀놓을 수 있으니 좋은 기회야. 견학이라고 생각해.”
생각해보니 분명 나한테는 둘도 없이 좋은 기회다. 학생의 신분으로 그런 중요자리(?)에 참석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행운인 것이다.
준혁을 힐끗 쳐다보자 그도 혜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수긍하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날 향하더니 아직까지 침대에 누워있는(허리 때문에)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가고 싶어?”
마치 어린아이한테 놀이동산 가고 싶냐 는 투로 물어보는 준혁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가고 싶은 건 가고 싶은 거다.
“네.”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하자 준혁의 잘 생긴 얼굴에 멋진 미소가 그려졌다.
“훗~ 그런 몸 가지고 괜찮겠어?”
‘화끈’
으으~ 저런 민망한 소리를 거침없이 하다니..... 얼굴이 홍당무가 되 버렸다.
“너무 무리하지 마.”
“우우... 괜찮아요.”
남자의 체면이 있지. 사랑 한 번(?) 나눴다고 드러누워서야 쓰겠어. 오기로라도 가고야 만다.
또한 저녁이라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몸도 많이 편해질 테니 큰 무리 없을 것이다.
“오케이~ 그런데 지운이 양복은 있니? 아! 아니다. 어차피 준혁이도 하나 사야 되니 지운이 네 것도 사는 김에 같이 사자.”
“예?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집에 양복 있어요.”
신세지기도 싫을 뿐 아니라 부담도 되어 황급히 거절해 보았지만 준혁이도 감당 못하는 혜린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야. 부담 갔지 마. 설마 애인 양복 한 벌 사줄 능력 없겠어? 그치, 준혁아?”
능청스럽게 준혁을 끌어들이는 혜린이 이 순간은 정말 여우로 보인다.
“음...좀 쉬고 점심 먹은 다음에 같이 사러가자.”
으이구~ 이럴 때는 또 둘이 맘이 척척 맞네.
그나저나 외박까지 하고 집에도 일찍 못 들어가게 됐으니 어제 집에 전화 안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다행히 어제 준혁과 뜨거운(?) 밤을 보내고 중간에 ‘아차’ 하고 집이 떠올라 전화를 걸어 오늘 학교 과제 때문에 도서관에서 밤 샐 거라고 부모님께 말해둔 것이다.
또다시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맘에 걸리지만 준혁에 대해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직 점심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더 자 놔. 나중에 깨워 줄께”
대답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제는 확실히 몸에 무리였는지 준혁이 이불을 잘 덮어주고 머리를 만져주자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혜린은 내게 ‘잘 자’ 라고 말해준 뒤 서류들을 챙겨 방문을 닫고 나갔다.
하지만 준혁은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 모양인지 조심스런 손길로 여전히 내 머리를 기분 좋게 쓰다듬어 주었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사르르 눈을 감자 아늑해지는 의식 속에 준혁이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가슴을 꽉 채우는 행복한 감정에 절로 입가가 벌어지는 걸 느끼며 난 천천히 내 몸을 덮는 어둠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