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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이 연회장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에게 몰리는 수많은 시선들에 내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준혁은 찌르는 듯한 시선들은 느끼지 못하다는 듯 차분하고 여유롭게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유유히 걸어가 악수를 나눴다.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그의 태도 때문에 왠지 내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준혁이 사람들에게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압도하는 것인가? 이상하게 이 연회장 안에서 준혁이 제일 빛나보였다.
한 사람 한 사람 다가와 준혁에게 말을 건네는 동안도 사람들은 곁눈 길로 호시탐탐 준혁을 살폈다.
살피는 사람들의 눈빛은 부러움, 동경, 질투 등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내 눈에 거슬리는 눈빛이 있었으니....... 바로 저 여자들의 이상야릇한 눈빛! 정말 맘에 안 든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몇 걸음 뒤로 떨어져 있다보니 준혁을 향한 저런 기분 나쁜 눈길들이 더욱 눈에 잘 띄었다.
물론 지금 준혁의 모습은 여자든 남자든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한번씩은 사로잡을 만큼 멋있고 매력적이다. (콩깍지)
하지만 내 이기적인 욕심이 그를 내 눈 안에만 가뒤두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점욕이라는 건가?
분명 나는 나름대로 사회공부를 하러 온 건대 주위의 거물급 경영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로지 준혁에게만 눈이 박혀 있었다.
여자들의 음흉한(?) 눈길들을 차단할 길이 없어 속으로만 끙끙대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치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돌리니 옅은 녹색의 화사하면서 세련된 원피스를 입고 세팅된 머리는 부드럽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여인이
부드럽고 차분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와 팔짱을 낀 채 내게 씨익 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이 여인이 만일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순순히 감탄을 터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난 대신 경악에 찬 얼굴을 해야 했으니...... 그 이유인 즉.
이 여인은 오늘 아침만 해도 나와 준혁을 마음대로 주무른 무적의 여인! 혜린이었던 것이다!
“정말 누나에요??”
“호호~ 그럼 누군지 알았니?”
하~!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이렇게 몇 시간 사이에 변할 수 있는 거야?
아담한 체형에 준혁보다 나이가 많다고 믿을 수 없는 동안인 외모 때문에 언제나 누나임에도 불구하고 귀엽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앳되던 모습을 어디로 숨겼는지 아름다우며 우화한 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인사해. 이쪽은 내 남편인 최 상원이야. 상원씨, 이쪽이 내가 말했던 강 지운이야. 귀엽지?”
“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가는 은테 안경 뒤로 가늘게 눈을 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원이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흔히 여학생들이 꿈꾸는 멋진 남선생님 이미지랄까........ 준혁과는 정 반대의 이미지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들었다는 걸까? 설마 준혁과의 관계까지 다 말한 건 아니겠지?
설마 하고 의심에 찬 눈초리로 혜린을 응시했더니..... 역시나...... 난 아직도 이 무적의 여인을 과소평가 하고 있나보다.
“호호~ 괜찮아, 지운아. 이 이도 잘됐다며 축하했다고.”
이건 동네방네 소문내며 축하받은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무리 세상이 개방적이 됐다고는 하지만, 이반인 게이들은 아직도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한 채 음지에서 사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 그런 개념이 없는 건지 문득문득 나까지 현실을 망각할 때가 있다니까.
“오셨습니까?”
순간 내 뒤에서 들리는 준혁의 바리스톤 음성에 깜짝 놀랐다. 언제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왔는지 준혁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오랜만이죠? 많이 바빠 보이네요.”
하하~ 혜린에게는 누나라고도 안 부르더니 그래도 매형에게는 상당히 예의바르게 대하네.
“뭐 좀 드셨습니까?”
“아뇨. 우리도 지금 막 도착해서요.”
결국 우리 넷은 부패 식으로 음식이 나열돼 있는 곳으로가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이것 좀 먹어봐. 맛있어.”
준혁이 옆에서 계속 내 접시에 이것저것 올려주자 그걸 본 혜린이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어휴~ 이런 곳 까지 와서 티내야 되겠냐. 상원씨, 이러니 내가 일 할 맛이 나겠어? 아주 둘이 내 염장을 지른다니까.”
“뭐, 어때서. 보기 좋은데. 그리고 혜린이 에게는 내가 있잖아.”
“호호호~ 역시 자기 밖에 없어.”
“.............”
“.............”
나와 준혁이 저런 모습일까?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 남 앞에서는 신경을 써야겠다.
준혁은 결국 인상을 쓰더니 내 팔을 잡고 둘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저 둘을 내버려둔 채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래도 리셉션이다 보니 둘만의 오붓한 식사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거북한 식사 또한 더더욱 바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꽃에 몰려드는 벌들 마냥 몰려와 준혁에게 아는 척을 하며 추파를 던지는 꼴을 보며 음식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갈리 없었다.
물론 준혁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적당히 상대해 줄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준혁이 아니라 저 여자들이다!
여자들이 은근슬쩍 준혁을 만져 댈 때는 정말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속에는 불이나 당장이라도 내 남자니 손대지 말라고 외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쪽 분은 누구세요? 처음 보는 분인데.”
“그러게. 혹시 모델이세요? 우리 준혁씨 만큼은 아니지만 얼굴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상당히 잘 빠졌는데.”
우.리? 빠.져?
하~! 이 여자들이!
우리집안에 여자란 우리 어머니 한 분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여자는 언제나 보호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는 눈에 뵈는 게 없듯이(?) 사랑에 빠진 남자도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다.
“이름이 뭐예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이 여자들이 왜 자꾸 달라붙고 난리야!
“다.....”
당장 떨어지라고 할 참이었다. 나한테서나 준혁한테서나....... 날 방해하는 바리스톤의 음성만 아니었으면.......
“강 지운. 저기 가서 마실 것 좀 갖다 줄래?”
“에? 네? 아, 네.”
때 맞혀 말을 막는 준혁 때문에 나는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얼이 나가버렸다.
얼떨결에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음료가 나열돼 있는 테이블로 가면서도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테이블에서 아무 음료 두개를 들어올리면서도 난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고의적으로 내 말을 막은 것 같은데...........
설마...... 지금 저 여자들하고만 있고 싶어서 나 쫒아낸 거야?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머리로 열이 확 뻗히며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럴 리 없다는 준혁에 대한 믿음이 날 다잡았다.
그래..... 혼자 멋대로 상상하며 극단적으로 결론짓지 말자.
우선은 자리로 돌아가 나중에 준혁에게 꼭 따질 것이라고 다짐을 하며 몸을 돌렸는데..........
오 마이 갓!!!
여기서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이 내 눈에 포착됐다.
바로 큰 형! 강 지한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웨이터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큰형이 일하는 호텔. 거기다 큰형은 이 호텔의 부지배인. 당연히 이런 큰 리셉션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바보! 바보! 준혁에게 정실 팔려 이런 당연하고 중요한 사실을 생각지 못했다니!
우와아앗~ 큰일 났다!
큰형이 그 웨이터들에게 볼 일이 끝났는지 그들을 보낸 후 손에 들고 있는 파일들을 들춰보며 몸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난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음료 테이블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테이블에 씌어 있는 하얀 테이블보가 바닥까지 내려오기 때문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기.”
“네, 부지배인님.”
“오렌지 주스랑 후르츠 펀치가 많이 비었습니다. 빨리 채워주시겠어요?”
“네.”
형과 웨이터인 모양인 남자의 목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왔고 내 심장은 긴장으로 콩닥콩닥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들킬까 숨을 잔뜩 죽인 채 이들이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가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테이블에서 멀어져가는 인기척이 느껴졌고 둘의 대화 역시 더 이상 들리지 않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간이 콩알만 해지는 줄 알았다.
긴장도 어는 정도 풀리자 나는 눈치껏 상황을 보다 테이블 밑에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쪽을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나는 다시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쪽팔리게 테이블 밑에서 기어 나오는 것을 어떻게 보이란 말인가.
“흥! 대표란 놈 얼굴 하나는 반지르르하게 생겨 먹었네.”
“그치? 결국 부모님 빽으로 여기까지 온 새끼지 뭐.”
“미국에서 지 부모 피나 빨아먹고 살 것이지 한국에는 왜 와서 설치고 지랄이야.”
세 남자들의 잔뜩 꼬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지? 설마 준혁의 얘기는 아니겠지?
“그나저나, 너 호모새끼한테 차였다며.... 병신새끼. 큭큭~”
순간 호모라는 소리에 흠칫했다. 그리고 더더욱 몸을 움츠리며 내 기척을 없애려 노력했다.
“씨발.... 내가 그 얘기 꺼내지 말랬지....”
“킥킥, 쪽 팔리기는 한가보지? 하긴 천하의 조 민규가 호모새끼한테 차이다니. 큭큭~ ”
“입 닥쳐라. 와서 존나 아양 떨기에 예쁘게 봐줬더니 아주 간덩이가 부었어. 제까짓 게 감히 나를 차?”
“그래서? 그냥 놔둘 거야?”
“돌았냐? 조만간 손봐줄 꺼다.”
민규라 불린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비열하게 들려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래... 그 불쌍한 호모새끼 이름은 뭐냐?”
“아아.... 태식.”
뭐?? 태식??? 설마 내가 아는 태식???
그제야 민규란 남자의 목소리가 어딘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떠오른 얼굴은 얼마 전에 여우새끼가 자기 애인이라고 소개했던 남자.
분명 이름이 민규 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봤을 때는 상당한 신사처럼 보였었는데.......
여우새끼...... 네가 하도 설치고 다녀서 이런 일까지 생기잖냐. 벌 받는 거다.
하지만 솔직히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에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한 것을 부정 할 수 없었다.
“그 새끼도 참 존나 재수 없다. 하필 네놈한테 찍히냐.”
“씨발... 네 놈부터 손봐줄까?”
“자자~ 그만하고. 존나 배알 꼴리지만 가서 안면이라도 익혀 놓는 게 좋으니 한 준혁한테나 가자고.”
뭐? 한 준혁? 내가 사랑하는 한 준혁??!!
뭐시라!!! 그럼 아까 처음에 저 자식들이 욕하던 새끼가(?) 준혁이었단 말이야???
씨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때려눕히고 싶다는 충동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그런 난리를 치면 준혁의 개최한 이 리셉션을 망칠 뿐 아니라 준혁의 명예와 이미지에 흠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 몸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개새끼들........다음에 본다면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