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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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저 왔어요.” 

“그래. 지운이 왔니.” 

여전히 낮게 깔린 조명 아래 아늑하고 분위기를 내고 있는 바에 들어서자 석훈선배가 보였다. 

그때 이 곳에서 준혁과 태식이놈을 대면한 후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그래봤자 그저께 일이지만. 

“뭐 줄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어오는 선배의 말투에 날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가 느껴져 입술에 살포시 미소가 그려졌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의 분위기와 성격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냥 맥주나 한 병 달라는 내 말에 선배가 맥주를 내 앞에 내주었다.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 마시자 톡톡 쏘는 싸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갔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맥주를 마신 뒤 ‘캬아~’ 하고 내뱉는 소리 대신 나는 ‘하아~’ 하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그 때 애인하고 잘 안 풀렸어?” 

내 한숨과 심란한 얼굴을 보고 선배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에? 아..니에요...” 

힘없이 말끝을 흐리는 내 대답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선배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머리가 복잡하여 내가 뭘 고민하는지 조차 모르겠기 때문이다. 

준혁은 준혁 나름대로 신경 쓰이고 태식이는 태식이대로 신경 쓰이고 가족은 가족대로 신경 쓰이고...... 도대체 뭘 두고 고민을 해야 하는지 정말 감이 안 잡힌다. 

어제 테이블 밑에서 기어 나와(다행히 본 사람은 없었다) 준혁에게 돌아가니 그는 여전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기분이 확 나빠지기도 했고 또한 형한테 들킬 수도 있다는 걱정에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정하게도 준혁은 예의상이라도 더 있다가라며 붙잡지 않고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물론 잡으라고 해도 있을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섭섭했던 게 사실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면서도 ‘역시 남자보다는 여자가 좋은 걸까?’ 라는 억측을 자꾸 하게 된다. 

우연찮게 들은 태식이의 일 또한 내 기분을 심란하게 하는데 한 몫 했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이미 들은 이상 마음이 무겁지 않을 리 없었다. 

비록 지독한 악연으로 이어져 있다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싫던 좋던 얼굴 부대끼며 같이 자란 학우가 아닌가. 

녀석이 지금껏 내게 해온 짓들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기분이 영 찝찝하고 뒤가 구렸다. 

오늘 학교에서 태식이놈을 봤을 때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죄인 마냥 태식이놈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조심하라고 경고라도 한마디 해줄까 싶었지만 겨우 이틀 전에 절교(?)선언을 해놓고 내가 먼저 말 걸기에는 또 이 자존심이 허락을 안했다. 

만일 조심하라는 이 한마디만 전했어도 지금 이렇게까지 찝찝하지는 않을 것 같다. 

휴우~ 이 두 가지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집에서도 날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하긴... 지금까지 이토록 외박을 자주 한 적도 없었으니 걱정하실 만도 할 것이다. 

한번도 친구들과 자진해서 놀러갔다 온 적 없는 내가 강원도로 놀러갔다 왔지.... 연락도 없이 무단외박 했지...... 또한 공부는 주로 집에서 해오던 내가 도서관에서 밤을 세며 공부한다고 외박 했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상황이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걱정하실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나다. 

왜냐하면...... 후에...... 내가 부모로서 감당하지 못할 불효를 저질러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는 부모님께 벌써부터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다. 

물론 준혁이 있다. 분명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 

그러나...... 그와 나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형이 있는 호텔에서 준혁을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하고 외박을 하는 것 또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준혁이 한국에 있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계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훈 선배의 조언으로 준혁에게 고백한 후 나는 후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 현재에 충실하자라는 세뇌를 스스로에게 걸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벌써부터 고민하느라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 되새겨 온 것이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그와의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 조금이라도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아~” 

답답해져오는 마음에 다시 한번 한숨이 절러 나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보다 못한 선배가 내게 다시 물었다. 

“......선배......” 

“그래.” 

조금도 재촉하는 기색 없이 선배는 차분하게 내 말을 기다렸다. 

“저 잘하고 있는 거 맞을까요? 후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 오히려 후회를 낳는 건 아닐까요?” 

“..........” 

“자꾸 욕심이 생겨요. 그 사람이 나를 받아준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힘겹게 내 속마음을 토해내자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준혁의 손길과는 다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손길이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건 당연하거야. 너도 그를 사랑하고 그도 널 정말 사랑한다고 믿는다면 네 욕심을 부려봐. 그걸 받아주지 못한다면 그는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거야. 사랑은 용기 있는 자만이 쟁취한다는 말 들어봤지?” 

내게 부드럽게 미소 짓는 선배를 보니 마음이 아까보다 훨씬 편해졌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선배와 대화를 하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이러다가 고민만 생기면 선배를 찾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자,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맘껏 마시고 속 풀어봐.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훗~” 

과장스럽게 큰소리 탕탕 치며 양주 한 병을 내주는 선배 덕분에 웃음이 나왔다. 날 위로해주는 선배의 노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배.....고마워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선배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우....정....시...차....’ 

누군가 자꾸 귀찮게 몸을 흔들며 시끄럽게 군다. 

덕분에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가 더욱 어지러워지면서 속이 울렁거려 얼굴이 찡그려지고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으....” 

순간 내 이마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 좋아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감촉에 얼굴을 부비자 그것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스스로 움직여 내 얼굴을 시원하게 쓸어주었다. 

“헤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왔다. 

또다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말소리 같은데 잔뜩 억눌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몸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 알아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지운아.....”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며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이름이 똑똑히 들렸다. 

“으응...” 

“정신 좀 차려봐. 괜찮아?” 

걱정이 깔린 목소리가 많이 익숙하다. 내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 또한 익숙하다. 

얼굴이 보고 싶다. 뿌연 머리 때문에 누군지 생각나지 않지만 이 목소리와 이 손길의 주인공이 너무도 보고 싶다.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지만 시야가 뿌옇고 어지러웠다. 눈을 크게 껌벅거리며 초점을 맞추자 내 앞에 있는 사람... 아니.... 남자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정신 좀 들어?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술을 그리 많이 마셨어?” 

짐짓 꾸짖는 말투였지만 여전히 걱정이 더욱 많이 깔린 말투였다. 

나는 저 갈색 눈동자를 안다.....아니.... 저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를 안다. 나는 최대한 활짝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준혁씨...”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인데 말이다. 

나는 팔을 벌려 앞에 있는 준혁의 허리를 꽉 안고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그러자 가슴이 한번 크게 올라갔다 내려갔지만 곧 내 머리와 등을 감싸 안아오는 팔 때문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하지만 순간 영상같이 스쳐지나간 장면에 나는 그의 체취를 맡으며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그의 가슴을 확 밀어냈다. 

“준혁씨!” 

갑자기 뒤로 밀린 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봤다. 

“내가 더 좋아요 아니면 여자들이 더 좋아요??” 

그 순간 나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준혁의 벙찐 모습을 구경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어제 왜 나한테 쌀쌀 맞게 굴었어요? 역시 저 같은 사내보다는 여자들이 더 좋은 거죠?” 

어제 준혁에게 외면 받은 순간이 떠오르자 왠지 모를 서러움이 벅차올라 조금 전까지도 고민하고 끙끙대던 속마음이 나도 모르게 줄줄이 흘러나왔다. 

“여자들이 준혁씨 만지는데도 가만히 있고.....힝~ 나 간다고 했을 때도 난 쳐다보지도 않고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히히덕거리고 있고! 난 형 때문에 불안해 죽겠는데....흑~ 준혁씨 미워~” 

결국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건지 황당한 건지 준혁은 그 자리에 꼿꼿이 굳어있더니 이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하~ 미치겠네.” 

미치겠다니..... 미칠 정도로 내가 싫은 거야? 그런 거야? 

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흑~ 준혁씨, 사랑해. 사랑해. 흑~” 

그러니까 나 싫어하지 마. 나 버리지 마. 나 두고 떠나지마..... 

가슴속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하고 난 그저 눈물만 흘리며 준혁에게 사랑을 고했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으악~” 

한계라는 듯 준혁이 거칠게 내뱉더니 툴에 앉아 있던 날 그대로 안아 들었다. 갑작스런 준혁의 행동에 놀라 나는 얼떨결에 준혁의 목에 꽉 매달렸다. 

준혁이 나에게 하는 말인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말의 내용보다는 얼굴을 준혁의 어깨에 기대로 있는 덕분에 내 몸으로 건너와 퍼지는 목소리의 울림이 기분 좋아 그냥 눈을 감고 준혁에게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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