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6/36)

 (37)

“아우우우~” 

아침에 눈을 뜨자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은 뒤집어 질 것 같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다. 정말 최악이 컨디션이다. 

입안은 텁텁한 게 모래알을 씹은 것 같아 물이 절실히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삐그덕 거리는 허리가 강한 통증을 호소해 차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데 누군가 목 아래로 팔을 넣고 내 몸을 일으켜주었다. 

찌르르 울리는 허리의 통증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자. 물 좀 마셔봐.” 

입 앞에 내밀어진 물 컵이 구세주처럼 보였다. 한잔을 순식간에 비웠는데도 모자란 감이 들어 빈 잔을 아쉽게 쳐다봤다. 

그래도 이제야 좀 살만하다는 느낌에 길게 숨을 내뱉었다. 

“괜찮아?” 

익숙한 바리스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고개를 들자 걱정스런 준혁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뿌옇던 머리가 점점 게기 시작했다. 

“준혁씨?” 

준혁이 왜 여기 있는 것이지? 아니.... 여기 호텔이잖아?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당황하는 내 얼굴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읽었는지 준혁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기억 안나? 어저께 네 선배라는 사람이 너 술 먹고 뻗었다며 내게 전화를 걸었어. 너 인사불성으로 취했으니 좀 데려가라고.” 

헉! 그러고 보니 어제 석훈선배가 주는 술 마시고부터는 기억이 흐릿하다. 중간 중간 준혁의 얼굴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으아~ 이게 무슨 쪽이야~ 

소리 없는 내 절규를 들었는지 준혁이 내 코를 잡고 살짝 비틀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시래? 그것도 내가 없는 곳에서?” 

.......할말 없다.......... 

“자, 약 먹어.” 

언제 준비해 뒀는지 준혁이 작은 병과 알약을 건네줬다. 건네준 약을 먹고 나자 그가 내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다시 침대에 조심스럽게 뉘어주었다. 

그의 정성어린 손길에 온몸을 흔들어대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미소가 절로 피어올랐다. 

그런데........... 

왜 허리는 이렇게 끊어질 듯이 아픈 거지???? 이 낯익으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의 느낌은...... 설마........ 

하지만 단편적으로 짧게 짧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영상은 머리를 뽀게는 두통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준혁씨.......”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준혁이 ‘음?’ 하고 대답했다. 

“우리.......어젯밤......” 

눈치 빠른 준혁은 내가 뭘 뜻하는지 금세 알아챈 듯 하다.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라는 간절한 내 눈빛에 준혁이 입 꼬리를 사악하게 말아 올리는 걸 보자 직감적으로 내 바램이 무참히 부서져 내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훗~ 어제 정말 좋았어. 자주자주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주면 좋을 텐데.” 

두둥!! 

내가 제정신 아니었던 게야. 암~ 그렇고 말고. 그렇지 않고 내가 준혁에게 응응 해달라고 조르고 내가 그 위에서 응응 할리 없어.......................... 

.................... 

......... 

..... 

우어어어어~ 미쳤어!!!!!! 

핏기가 빠져나가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단번에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준혁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 이불을 머리위로 끌어올렸다. 민망하고 창피하고 쪽팔려 앞으로 어떻게 준혁의 얼굴을 볼지 막막하다. 

“큭큭~” 

얄미운 준혁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이불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와 봐, 지운아. 놀리는 거 아니라 나 어제 정말 기분 좋았어. 내가 널 원할 때 너는 기분 나빠? 나는 언제나 너 만지고 싶고 안고 싶은데 넌 안 그런가보지?” 

“아, 아니에요! 기분 나쁘지 않아요! 저도...그..... 그러고 싶어요.....” 

정말 실망했다는 준혁의 말투에 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했다. 틈만 나면 만져오는 준혁 때문에 민망했지만 절대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이기에 끝까지 이불을 내리지는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날 원하면 기분 좋아. 너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얼굴 좀 보여줘 봐. 자꾸 이러면 다시는 안아주지 않는다!” 

“!!!” 

부드럽게 타이르다가 뒤에 붙이는 협박성 발언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휙 이불을 내려버렸다. 이내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에 넘어갔다는 걸 깨닫고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준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쓸어 올려주는 동안 창피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못하며 얼굴만 울그락 불그락 붉혔다. 

“그리고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그날 리셉션에서 널 보낸 건 그 불여시들이 너에게 추근덕 거리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거야.”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하... 그러고 보니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추태란 추태는 다 부렸구나...... 

훗~ 그래도 지금 나 때문에 질투했다는 말이지? 헤헤~ 기분 좋네~ 

조금 전 준혁의 말대로 같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나 역시 준혁을 확인시켜줘야겠지? 

“저도 싫었어요. 그 여자들이 준혁씨 한테 추근덕 거리는 거 싫었어요.” 

어제 술김에 털어놓기는 했지만 맨 정신인 지금 다시 한번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똑같았던 마음을 털어놓고 우리는 침묵 속에 잠시 서로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쿡~” 

“훗~” 

서로를 응시하다 동시에 터진 바람 빠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우리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어지는 기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풀면 좋았을 것을 혼자 속으로 끙끙대던 것이 미련스러웠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준혁을 좀더 믿을 줄 알아야 한다고 반성의 마음을 가졌다.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의심치 말아야 한다고....... 

“자, 그럼 이제 씻을까? 샤워하고 나오면 몸도 좀더 게운 할 거야.” 

준혁 또한 후련한 표정으로 일어나 내 등과 무릎 뒤로 손을 넣고 날 안아들었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건지 만만치 않은 무게일 텐데도 매번 가뿐히 날 안고 욕실로 향하는 준혁에게 가만히 몸을 맡기고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참으로 편안한 아침이라고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씻고 아침도 먹은 후 준혁은 날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호텔에서 더 쉬던가 집에서 쉬라며 준혁이 만류했지만 학교에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날 데려다 준 것이다. 

“정말 괜찮겠어? 너 아직 숙취도 남았고 몸도 불편하잖아 . 무리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 쉬지 그래?”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학교 입구에 차를 세운 준혁이 다시 한번 날 설득해보려 했다. 

“괜찮아요. 볼일만 보고 바로 집에 들어가서 쉴게요.” 

“그럼 볼일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데려다 줄께.” 

아니, 이 남자가. 내가 무슨 세살 먹은 아기도 아니고 뭔 걱정이 이리 많아. 

“얼마나 걸릴지 몰라요. 정말 괜찮으니까 가봐요. 준혁씨 가서 일도 해야 하잖아요.” 

“.....알았어......가봐......”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하는 준혁이 귀엽게 보여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훗~ 가볼게요.” 

휙휙- 주위를 살핀 뒤 재빠르게 준혁의 뺨에 입 맞추고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후다닥 차에서 내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아무리 창문이 검게 썬틴 되 있다지만 학교 앞에서 내가 먼저 애정표현을 한다는 것은 나로서 상당히 용기를 낸 것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식히며 걷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태식이놈이 강의를 듣는 건물이다. 

오늘 수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볼일이 있다고 나온 이유는 태식이 때문이다. 

오늘 아침 준혁과의 오해를 풀고 서로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초조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편해지고 여유로워지는 동시 태식이에 대한 고민 또한 한결 가벼워지는 마음을 느꼈다. 

견원지간이라는 것을 떠나서 단순히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니 마음도 정리되며 훨씬 편안해졌다. 녀석이 아무리 미운 녀석일지라도 험한 꼴 당할 걸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불쌍한 녀석이 아닌가. 어릴 때부터 가족에 의한 콤플렉스에 휘둘려 지금까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맞추어 인생을 살아온 녀석이다. 한가지만을 쫒느라 그 주위에 소중한 것들은 놓쳐버렸다. 

나야 제수가 지지리도 없어서 그런 녀석의 희생양이 되어 본의 아니게 피곤한 인생을 살아왔다지만(....그냥 집에 갈까.....) 녀석은 스스로가 만든 지독히도 외로운 인생이다. 

아마 녀석의 본성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 아닐까 싶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겉만 포장된 인생을 살아간다면 결국 끝에 남는 것도 빈껍데기일 뿐이다. 

그런 생각들이 들자 녀석이 동정이 간 것이다. 

전화로도 건넬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왠지 직접 보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절교 선언 해놓고 갑자기 전화로 ‘너 몸조심해라’ 라고 툭 건네는 건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이렇게 녀석을 무조건 외면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부족했던 대화로 서로의 골을 조금씩 메워가고 싶었다. 

우리가 알고 지내 온지도 거의 10년이다. 이제 와서 인연을 끊기에는 서로에게 휘둘려온 긴 세월이 억울한 것이다. 

엉킨 실타래를 외면하기 보다는 잘 풀어보는 것이 진정으로 내가 태식에게서 벋어나 한발자국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리고 이 기회로 태식이 역시 녀석을 얽매는 콤플렉스와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녀석 때문에 준혁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제법 일찍 강의실 앞에 도착했는데도 안에는 가방을 챙기고 나가는 사람들로 부산했다. 하지만 그들 중 여우새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요. 오늘 태식이 안 나왔나요?” 

막 강의실을 나서는 학생 한명을 붙잡고 물어봤다. 

“태식이? 강의 끝나자마자 나갔는데 못 만났나요?” 

이런. 엇갈렸나보다. 

나는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급히 계단을 내려가 건물을 나왔다.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아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빠르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가 울리고 허리는 비명을 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정문에 도착해도 여우새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하얀색 승용차에 오르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 차......??!! 

내가 녀석을 부르기도 전에 흰색 차는 태식이를 태우고 출발해 버렸다.

분명 민규를 소개받은 날  의기양양해 하는 여우새끼를 태우고 간 차와 같은 기종, 같은 색깔이었다.

‘하필이면!!’후회가 들었다. 어제 망설이지 말고 말해줬으면 녀석이 저 차에 올라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는 생각에 택시를 얼른 잡아탔다. 

‘내가 왜 따라가야 하지’ 라는 생각이 머리 한 구석에서 맴돌았지만 이 사태를 그냥 무시하기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다행이 도로가 한산해서 금방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아이씨~ 이 자식은 왜 핸드폰을 꺼둔 거야.”

지금이라도 차에서 내리라고 경고를 해주려 전화를 걸어봤지만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고운 미성의 익숙한 여자 목소리만 흘러나왔다점

점 서울 외각으로 빠지는 차를 보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택시기사 아저씨도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건지 마치 첩보원 영화라도 찍는 듯  조심스럽게 흰 차 뒤를 밞았다.

드디어 차가 속도를 줄인 곳은 서울에서 30분 정도 벗어난 뒤였다.

높지 않은 산에 둘러싸인 작은 읍리의 입구로 흰색 차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한 후  나는 입구 앞에서 세워달라고 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요금을 받으며 무슨 일 인진 모르겠지만 조심하라는 충고를 던진 뒤 출발했다.

태식이를 태운 흰 차가 들어간 작은 마을의 입구를 보고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안되겠다. 혹시 모르니까 내 위치 정도는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떠오른 사람은 준혁이었다. 형들도 있었지만 내 손가락은 이미 준혁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느새 이십년 넘게 같이 살아온 가족보다도 만난지 한달도 안 된 준혁에게 더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한참을 울려도 준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결국은 또다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만 흘러나와 메시지를 남기라고 전했다. 듣고 싶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실망이었지만 곧 ‘삐’ 하고 울리는 소리에 생각을 정리했다.

“준혁씨. 저 지운인데요. 볼일이 있어서 지금 xx xx리에 와있거든요. 나중에 집에 들어가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후우~ 그래도 준혁씨한테 음성 메시지라도 남기니 조금 안심이 된다.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고 10가구도 채 안 돼 보이는 작은 마을 안에서 태식이가 탔던 흰 차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는 와중 혹시 모르니까 쓸만한 각목도 하나 주웠고.

 의외로 마을 안의 주택들은 허름한 기와집이 아닌 정원이 무척이나 넓은 세련된 모던식 주택들이었다.

얼마안가 발견한 목표물은 그 중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택의 주차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검은 차 한대를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민규 혼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생각보다 더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겠는걸.’

빌어먹을 여우새끼. 여우면 여우답게 이런 일에는 재주껏 휘말리지 말아야지 바보 같이 쫄랑쫄랑 따라 오다니.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태식이놈이 사정없이 원망스러워졌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창은 빈틈없이 커튼이 쳐져있어 안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시골이어서 그런지 현관문은 철문이 아닌 유리라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현관문을 통해서는 각도가 맞지 않아 안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귀를 대봐도 특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거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하나.........

 쳐들어가봤자 분명 여러 명이 있을 텐데 자신이 감당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특히 아직도 허리에는 둔탁한 통증이 움직일 때마다 찌르르 울리고 있는 지금 상태로는.

경찰을 불러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인데 섣불리 경찰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헉!

순간 안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서둘러 현관에서 떨어져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덩치 좋고 험상궂어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남자 한명이 기지개를 한번 쭉 피고 담배 하나를 꺼내 물자 다른 남자가 불을 붙여주며 자신도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아우~ 별것도 아닌 새끼 가지고 우리가 여기까지 왔어야했냐? 나 참. 지 놈 혼자서도 충분히 손봐줄 수 있게 생겼더구먼 우리는 왜 몽땅 부르고 지랄이야.”

“야야~ 그래도 그 새끼 생긴 건 반반하지 않냐? 좀 있다 맛이나 보자고 하지, 뭐. 큭큭~”

역시!하지만 이거 생각보다 더 질 나쁜 인간들 같은데 어쩌지?

“어이~ 빨리 들어와~슬슬 시작하자고.

안에서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규의 음성이 아니었다.

제길. 도대체 몇 명이야!지금 확인된 수만 4명이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턱도 없다.

안되겠다.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확인했으니 경찰이라도 부르자.

떨어트린 담배를 발로 뭉갠 뒤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놈들을 지켜보며 슬그머니 몸을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띠리리리리’

.............핸드폰이 울리기 전까지는...............

“누구야!!”

빌어먹을!!! 어떡하지??!!! 구석이라서 도망갈 길도 없었다.

‘띠리리리리’

씹! 빨리 안 튀어 나와??

살벌한 남자의 음성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웅크리고 있던 몸을 마지못해 일으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안녕들 하세요.”

“너 뭐야?”

남자 한명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띠리리리리’

“에... 그러니까 저는.....아!..... 조~기 아랫집에 살아요.”

“그런데 왜 거기서 도둑놈 마냥 쭈그리고 앉아 있었냐?”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남자가 물었다.

 ‘띠리리리리’

긴장으로 팽팽한 공기를 가르고 핸드폰은 여전히 줄기차게 울려댔다.

“아....그게.....미, 민규형이 온 것 같아서 반가워 인사라도 하려 왔죠. 그런데 바쁘신 것 같네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럼.”

애써 떠오른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잽싸게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놈들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민규놈 여기 몇 번 안 와봤다고 그러지 않았냐?”

“어. 친구놈 별장이라던데.”

좆 됐다!!

“너 뭐하는 새끼야!”남자 하나가 내 팔을 잡았다.

이렇게 된 거............

‘퍽!’

“헉!”

난 날 잡고 있던 놈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차버렸다. 그리고 잽싸게 몸을 돌렸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아윽, 씨발. 야, 튄다! 잡어!!”

하지만 빌어먹게도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던 또 다른 남자에게 몸을 돌리기 무섭게 뒷덜미를 잡혀 버렸다.

“어딜 도..?!! 크윽!”

이대로 어이없이 붙잡힐 수는 없지!

난 몸을 숙이며 앞으로 돌아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뒤 놈의 복부에 있는 힘껏 주먹으로 찔러 넣었다.

도망가는 것이 틀렸다는 판단이 떨어지자 아까 떨어트린 각목을 주워들어 두 손으로 고쳐 잡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타악’

내 주먹에 맞아 비틀거리는 놈의 어깨를 각목으로 내리치고 날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는 다른 놈의 옆구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비록 두 놈에게 크게 타격을 입혔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가 큰일이다.

“무슨 일이야!”

소란을 듣고 또 한명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각목을 휘두른 것이 허리에 무리가 갔는지 마치 허리가 잘린 느낌이었고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댔다.

이 상태로는 도망가라고 해도 못 간다.

하지만 여기서 그대로 포기할 수 없기에 후들거리는 팔을 가다듬고 이어서 각목을 휘둘렀다.

하지만 보통의 컨디션으로도 저런 덩친 

좋은 남자 셋은 감당하기 힘든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지금 상태로 버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퍽!’

“아으윽!”

엄청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놈들 중 한명이 뒤에서 날린 발차기가 허리에 직통으로 가격당한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통증에 이를 악물고 힘겹게 붙들고 있는 각목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내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고 동작도 커졌기 때문에 허공만을 찔러댈 뿐이었다.

‘퍼억’

“크으윽!”

또다시 몸이 꺾이는 통증에 신음을 내뱉으며 정신을 다잡으려 했지만 이어서 등 위로 쏟아지는 발길질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뒤 정신없이 날아드는 발길질과 주먹질에 나는 몸을 웅크려 최대한 급소를 방어해야 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최대한 삼키려 했지만 끝내 참지 못하여 억눌린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으으윽.....쿨럭!”

끝날 것 같지 않던 구타가 끝난 듯싶었지만 온 몸 구석구석에서 끔찍한 통증을 호소해와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씨발 새끼. 멍들게 생겼잖아!”

‘퍽’

신경질 적으로 내뱉으며 아까 내게 정강이를 맞은 남자가 화풀이 하듯 쓰러져 있는 나를 발로 한대 찼고 내 입에서는 또 다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온 놈이야.”

“몰라. 하여간 민규놈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까 우선 데리고 들어가 보자.”

늘어져 있는 내 몸을 일으켜 양 팔을 한명씩 붙들어 나를 끌고 별장으로 들어갔지만 난 더 이상 반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배가 되는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민규야. 이 새끼 아냐?”

‘털썩’

“크으윽...”

안으로 끌고 들어와 바닥에 내팽개치며 묻는 사내 때문에 등을 돌리고 있던 민규가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뭐야, 이건?”

심하게 맞아 터진 내 몰골을 보고 민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 네 이름 알고 있던데.”

“그래? 고개 올려봐.”

사내 하나가 억샌 손길로 내 턱을 잡아 올려 민규를 향하게 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기억을 더듬는 민규에게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지운?....”

민규 뒤로 보니 주저앉아 있는 태식이놈이 보였다. 이미 몇 대 맞았는지 얼굴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너...여기서 뭐하는 거야....”

믿기지 않는 듯 태식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아~ 기억났다. 이 새끼 친구라고 소개시켜 줬던 그 멍청한 놈 맞지?”

드디어 기억났는지 민규의 얼굴에서 의혹이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금 떠오르는 의혹.

“근데 여기서 뭐하는 거냐?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젠장! 뭐라고 하지??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민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지 비웃 듯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꼴에 친구라고 걱정돼서 따라왔나 본데 쓸데없는 참견은 화를 부른다는 말 들어봤냐?  저 새끼 네 놈 친구로 생각하지도 않아, 알아? 허건 날 네 놈 욕에 내 귀가 다 가려웠다니까.”

.....새삼스럽게.... 이미 다 알고 있다, 씨발놈아.

“솔직히 말해봐. 네 놈도 저 새끼한테 쌓인 거 많지?”

...많지.......

“그런 의미에서 네 놈에게 기회를 주겠다.”

.....

“음... 뭐가 좋을까?”

무슨 꿍꿍이야.

“좋아. 그리 어렵지 않아. 지금껏 쌓인 한을 담아 저 새끼 팔, 다리 중 하나를 부러트려봐.”

“!!!”

“!!!”

“그럼 너는 무사히 보내주지.”

히죽이며 비열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민규를 난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를 공범자로 만듬으로서 신고를 할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태식이놈은 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롭고 불쌍했다. 지도 양심이 있으면 자기가 나한테 해왔던 일들을 떠올려 내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이 상황까지 오게 우리의 관계 때문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민규는 내 웃음을 오해했는지 비열한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뭐, 부러트릴 힘이나 남아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야, 이 놈 각목 하나 줘라.”

아까 내가 각목 들고 부린 난동을 몸으로 체험한 사내들은 내게 각목을 들려주는 것을 영 내켜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현재 내 몸 상태를 인지하고 마지못해 내 손에 각목을 쥐어주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끼며 나는 떨떠름하게 각목을 받아 쥐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들게 태식이이게 다가갔다.

두려움? 체념? 배신감? 정확하게 찍어낼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어지러이 휘몰아치고 있는 태식이놈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바보새끼. 그러게 평소에 착한일 좀 하지.’

더 이상 날 똑바로 보지 못하고 바닥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놈 앞에 섰다.

“내가 널 도와줄 이유 따위 전혀 없다는 거 네 놈이 더 잘 알거야.”

냉정한 내 말에 녀석이 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욱씬거리는 팔을 움직여 들어올린 각목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걸 보고 태식이놈이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퍽!’

“악!”

“이 새끼!!”

태식의 팔을 향하던 각목은 내가 몸을 뒤트는 것과 동시 가까운 곳에 서서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나와 태식이를 구경하고 있던 민규를 향해 휘어 올라가 그의 옆구리를 직격했다.

남아있던 힘을 모아 휘두른 각목에 민규가 비명을 질렀지만 솔직히 나야말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왔지만 나는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각목을 바로 쥔 체 그들을 견제하며 대치상태로 틈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팽팽한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

“아욱, 씨발! 뭐해! 저 새끼 조...!!”

‘타악!’

“!!!!”

하지만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민규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체 다시 바닥으로 쓰러져야했다.

쓰러진 민규의 뒤에는 태식이가 벽난로를 피울 때 쓰이는 쇠로 된 불쏘시개를 두 손으로 쥐고 서있었다.

‘헉! 저걸로 내리 친거야? 무식한 놈.....’

제대로 맞았는지 ‘악’ 소리도 못 내고 쓰러진 민규는 꿈쩍도 안했다.

사내들 역시 쇠꼬챙이는 무서웠는지, 독한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태식이를 보며 슬금슬금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저리 비실대보여도 나 따라잡는다고 뒤늦게 시작한 검도에 상당히 정진했었다. 절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란 뜻이다.

내 상태가 많이 나쁘지만 그래도 2대 3, 거기다 저쪽은 빈손이니 한 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해 마음을 굳게 다지며 자세를 바로 잡아 공격 태세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 죽어버려~~!!”

“히이익!”

“우아악!”

“미친 새끼!”

“.........”

갈고 닦은 검도 실력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태식이놈이 무작정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사내들에게 달려들어 막무가내로 쇠꼬챙이를 휘둘렀다. 

거기에 사내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광경은 정말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하기 까지 해 헛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이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단순에 김이 확 빠져버린 나는 지금까지 힘들게 버티고 서있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 전체가 점점 더 쑤셔오는 걸 느끼며 나는 내가 왜 여기와 이런 꼴이 되어서 저걸 지켜봐야 하는지 자괴감에 빠져 망연히 이들을 바라보다 깊게 한 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는 거지만 저 여우새끼는 내 인생에 눈꼽만치의 도움도 안 되는 인간이다. (단 준혁을 만나게 해 준 것만 빼고)

정신력 하나로 그러모아둔 힘들이 이제는 완전 풀려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아우욱......씨발!”

요란한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꿈쩍 않고 쓰러져있던 민규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동반하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태식이와 사내들은 그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난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를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했지만 이상하게도 온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제길!’

민규는 목덜미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뚱이에 마음은 조급해졌다.

잠시 인상을 쓰며 거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바라보더니 근처에 힘없이 늘어져 앉아있던 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썅! 다 죽었어!”

민규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 성큼성큼 다가와 내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부여잡아 날 일으키는 것을 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야 했다.

“다들 멈춰!!”

쩌렁쩌렁한 민규의 날카로운 외침에 태식이와 사내들이 몸을 굳혔다.

민규에게 붙잡혀있는 날 보고 태식이놈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씨발새꺄! 겨우 그깟 새끼한테 잡혀있냐?!”

빠직!

“씹새끼! 네가 그렇게 미친 듯이 발광하지 않고 일찌감치 저 자식들 제압해뒀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 아냐!! 기껏 배운 검도는 엿 바꿔 먹었냐?”

“그러는 너야말로 어릴 적부터 배웠다는 잘난 검도는 어디다 팔아먹고 겨우 저딴 새끼 한명도 못 이겨 그러고 있냐??”

“개새끼~~!! 내가 왜 이 꼴이 됐는지 몰라서 묻냐~~~”

“미친놈. 누가 도와 달랬냐?”

저, 저, 저. 배은망덕한 여우새끼!!

“두 새끼 다 입 닥쳐!! 이 새끼들이 지금 어디서 싸우고 지랄이야!!”

민규의 사나운 음성에 우리 둘은 결국 입을 다물었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만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내가 미친놈이다. 제정신으로 네 놈을 도와주러 올 리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김 태식. 그거 버려라.”

민규가 턱으로 태식이가 들고 있는 쇠꼬챙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왜?”

저, 빌어먹을 새끼! 네 놈 눈에는 붙잡혀있는 내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은혜를 배신으로 갚다니!

“훗! 그렇게 나오시겠다.”

비릿하게 코웃음 치는 모습에 난 순간 오싹해졌다.

 여우새끼야.... 제발 그거 그냥 버려라~

하지만 내 간절한 눈빛을 처참히 무시하고 여우새끼는 끝까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히이익!”

순간 축축하고 말랑한 것이 내 턱선을 타고 귓불까지 훑고 지나가는 소름끼치는 감촉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내 뒤에 서서 내 목덜미를 붙들고 있던 민규가 마치 뱀 혓바닥처럼 느껴지는 혀로 내 얼굴을 핥은 것을 확인하고 나는 없는 힘을 그러모아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몸부림 쳤다.

“으악! 변태새끼! 안 놔!!”

“닥쳐라~ 나도 시퍼렇게 부어터진 네 놈 보면 별로 안고 싶지 않거든. 원망을 하려거든 저기 친구라는 새끼나 원망해라~”

그의 말에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여우새끼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익! 씨발! 놓으란 말이야!”

내 엉덩이를 한 번 쥐었다 놓은 뒤 앞섬을 풀어헤치기 시작하는 민규 때문에 머리가 패닉으로 하얗게 물들어 더욱 거세게 반항을 했다.

‘챙그랑’

“그 녀석은 상관없으니까 놔줘.”

채념한 얼굴로 쇠꼬챙이를 떨어트리며 하는 태식의 말에 순간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날 위해서??!!

짜식, 역시 너는 인간이었어.

하지만 감동을 채 만끽하지도 전에 난 내 바지를 단숨에 내려버리는 민규의 행동에 비명을 내질러야했다.

“아앗! 뭐하는 짓이야!”

“뭐야! 네가 원하는 데로 했잖아! 걘 놔줘!”

민규의 예상 밖의 행동에 태식이도 놀랐는지 불끈 열을 내며 덤벼들었지만 어느새 둘러싼 사내들에게 잡혀 버렸다.

“훗! 내가 이 녀석 놔준다는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 이런...비겁한 새끼!”

“간단하게 손만 봐주려고 했는데 일을 더 크게 만든 건 네 놈들이다.”

“어이. 네 놈만 재미 보기냐. 우리는 이 녀석 데리고 놀면 안 될까?”

“큭! 맘대로 해라.”

“아악! 이거 놔!!!”

태식이놈의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를 갈랐지만 난 내게 닥친 상황에 녀석까지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몸을 뒤틀며 반항해도 꿈쩍은 커녕 오히려 자신의 앞섬을 내리는 모습에 진심으로 난 진심으로 두려워져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팔은 내 머리위로 고정시킨 민규가 내 속옷을 내리고 자신의 흉기를 꺼내는 모습에 난 눈 앞이 깜깜해졌다.

“싫어!!! 놔!!! 아악!! 쿨럭~!”

이번에는 내 몸부림이 먹혔는지 민규가 주춤했지만 곧 옆구리로 꽂히는 그의 주먹 때문에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으으으.... 싫어.....쿨럭......준혁씨.....흑...”

“뭐?”

눈물이 나왔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은 준혁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도와줘...... 준혁씨....... 구해줘요........ 제발.........

“.....준혁씨!!”

‘쾅!!’

“지운아!!!”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기적 같이 준혁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준...혁씨......?”

믿을 수 없었다. 준혁이 어떻게 여기에........

 하지만 날 내리 누르고 있던 민규를 단숨에 날려버리고 갑작스런 방해자를 향해 덤비는 사내 셋을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처리해버리는 준혁에게서 뻗어 나오는 검은 오로라는 환상이기에는 너무 강렬했다.

‘퍽! 퍽!’

끝까지 발악하는 사내들과 민규를 가볍게 밟아주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분명 자신이 사랑하는 준혁이 맞았다.

만져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품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긴장이 풀려서일까. 내 몸에는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안타까운 눈길로 준혁의 움직임만을 눈으로 쫓고 있자 내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준혁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조심스레 걸쳐준 준혁은 내 얼굴을 감싸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아아.... 꼴이 흉할 텐데......

마지못해 준혁을 바라보자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이는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준혁의 체온이 내 얼굴에 느껴져서야 난 내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몸을 떨기시작하자 준혁이 날 꽉 안아주었다. 맞아 터진 상처가 아파왔지만 내게는 준혁의 온기가 더욱 필요했기에 그의 품 안으로 매달리듯 깊이 파고들었다.

주위에 모든 것이 차단되고 오로지 준혁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마침내 안심이 된 것일까.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난 힘들게 잡고 있던 정신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준혁의 시점-

[준혁씨. 저 지운인데요. 볼일이 있어서 지금 xx xx리에 와있거든요. 나중에 집에 들어가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회의를 하느라 받지 못한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 한통과 음성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부재중 전화가 지운이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음성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어딘가 불안감이 묻어있는 지운의 목소리였다.

도대체 몸도 편치 않은 녀석이 왜 갑자기 서울도 아닌 곳에 가있냔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떡해서든지 녀석을 집으로 보내는 거였는데.

 단축번호를 꾹 눌러 지운이 녀석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한참이 울려도 강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왠지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녀석의 목소리나 장소가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앞뒤 젤 것 없이 난 바로 차키를 가지고 사무실을 나섰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차를 출발시키고 지운이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번에는 발신음조차 울리지 않았다.

온 몸을 서서히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운전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한 박자씩 느린 네비게이션이 너무도 답답했다. 한국 지리를 잘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고 익숙하던 서울의 교통체중이 이렇게 짜증스러울 수 없었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다행이도 가구 수가 그리 많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 안 어딘가 지운이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는 집이란 말인가. 뾰족한 수가 없기에 우선은 마을 전체를 한번 쑥 둘러보기로 했다.

제법 있는 집안의 소유지인지 정원도 넓고 집들도 깔끔했다. 하지만 주로 별장으로 이용되는지 몇몇 관리인 외에는 마을은 전체적으로 비었었다. 한집을 빼고는.

유난히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있는 집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정원은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뭉개진 잔디밭, 여기저기 널려있는 나무 파편들, 군데군데 보이는 붉은 얼룩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끈 것은 눈에 많이 익은 은색 단말기였다.

 액정은 깨지고 배터리는 분리된 체 떨어져 있는 핸드폰은 분명 지운의 것이었다.

잔디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을 때부터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이제는 심장 밖으로 튀어 나올 기세다.

망설일 것도 없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자 안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똑똑히 들려오는 지운이의 목소리.

앞뒤 잴 것 없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내 눈 앞에 보이는 광경에 난 난생 처음으로 이성이 끊기는 분노를 경험할 수 있었다.

두 손은 포박당하고 바지는 벗겨진 내 강아지 위에 한 남자 역겨운 성기를 끄집어낸 체 올라가 있는 모습이 보이자 눈앞이 벌게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난 이미 지운이를 깔고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한참을 이성을 잃은 체 주먹을 날리고 있는 날 진정시킨 건 맥없이 쓰러져 날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지운의 눈동자였다.

그제야 지운의 곁으로 다가간 난 다시 한번 뻗어있는 놈들에게 날아가려는 주먹을 불끈 쥘 수밖에 없었다.

지운의 꼴은 처참했다. 귀여운 얼굴은 안 맞은 곳이 없는 듯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뜯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녀석의 몸 또한 빼곡히 화려한 얼룩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오늘 아침만 해도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던 녀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애써 손의 떨림을 억누르고 지운의 어깨에 재킷을 둘러준 뒤 보듬어 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온몸을 심하게 떨며 품안으로 파고드는 녀석이 팔 안에서 느껴졌다.

 그런 녀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꼭 껴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안심을 시켜주는 것 밖에 없었다. 녀석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더니 이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은 지운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고 조심스럽게 녀석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 눈에 뛴 여우. 바드득하고 이가 갈렸다. 본능적으로 지운이 이렇게 된 게 녀석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운이...괜찮은 건가요?”

후회, 죄책감, 불안감 등으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여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묻는 자신의 상태도 그리 양호해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얼음같이 차가운 내 목소리에 여우가 잠시 움찔했지만 곧 모든 걸 토해냈다.

“옛날 사귀던 놈이었는데 꼭 할 얘기가 있다고.....근데 저 비열한 새끼가 자기를 찬 복수를 한답시고.... 그러다 지운이 녀석이 어떻게 안건지 갑자기 나타나 날 구해주려다.....”

역시 저 놈이 원흉이었던 것이군.

저 놈들과 이곳에 남겨두고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우리 착한 강아지의 노력을 헛되이 할 수 는 없겠지.

 “멀쩡해 보이는데 걸을 수 있겠지? 따라와.”

끙끙대며 일어서는 녀석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지운을 뒷자리에 편히 눕히고 여우는 앞좌석에 태운 뒤 경찰을 불렀다.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강아지를 저렇게 만든 값은 톡톡히 치러야 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지운을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먼저지.

두 녀석을 입원시키고 가장 먼저 지운의 집에다 연락했다

. 어머니로 들리는 여성이 전화를 받고 무척이나 놀라더니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당장 오겠다고 한다.

그 뒤에는 혜린에게 전화해 빌어먹을 놈들의 확실한 뒤처리를 부탁했다.

 또 귀찮은 일 시킨다고 궁시렁댔지만 상황을 자세히 들은 혜린은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섬뜩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검사를 받고 나오는 지운이와 여우는 곧 치료에 들어갔다. 지운이에게 큰 부상 없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늑골 2개에 금이 갔다고 한다. 이미 철장 안에 있을 놈들을 향해 살심이 일었다. 그 때 더 두들겨 패놨어야 했는데.

 “녀석, 사람을 이렇게 걱정하게 만들다니. 깨어나면 가만 안 둘 테다. 이렇게 불안으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던 건 처음이었다. 역시 강아지는 내게 새로운 경험을 많이 안겨준단 말이야. 하지만 이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어.”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지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생각하고 있었다. 요란하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방해받기 전까지.

한눈에 지운이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여성이 여기저기 붕대에 감싸여있는 지운이를 보더니 눈에 눈물을 글썽인 체 녀석의 손을 잡고 지운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녀의 뒤를 이어 병실에 들어오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지운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그 중 낯익은 얼굴이 하나 있었다. 분명 내가 묶고 있는 호텔의 부지배인이었다. 그 역시 날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한 준혁씨가 어째서 여기에? 제 동생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제 동생이 어떻게 된 거죠?”

“으으....”

“아, 정신이 드나 봐요. 지운아. 정신이 들어?”

희미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여성의 고운 음성이 날 흐릿한 정신 속에서 끌어올렸다.

눈을 뜨려 했지만 뭔가에 짓눌린 듯한 눈 커플은 쉽게 들어올려지지 않았다.

몸 또한 움직이려 힘을 넣으면 가슴께부터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통증으로 인해 탁한 신음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간신이 희미하게나마 눈을 뜨고 처음으로 본 것은 하얀 천장을 배경으로 한 가족들의 얼굴들이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얼굴에 걱정을 가득 담고 날 내려다보는 모습에 왠지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역시 가족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 근육을 움직이자 살을 꾹꾹 찌르는 통증에 난 이내 ‘아아아’ 라고 작게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가족들은 어이가 없었는지 언제 걱정했었냐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특히 작은형은 맘에 안 들었는지 바로 얼굴을 구기며 내 이마에 작게 알밤을 놓았다.

“으이구~ 네가 지금 웃음이 나오냐? 아주 안 맞은 곳 없이 구석구석 잘도 쥐어 터졌더구먼.

 어릴 때부터 배운 검도는 갔다 엿 바꿔 먹었냐? 그나마 네 녀석 봐줄 곳이라고는 얼굴 밖에 없었는데 이게 뭔 꼴이냐? 우리가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릴 때 말썽 한번 안 피우더니 아주 한꺼번에 몰아서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는구나.”

“...........”

....작은형........ 누가 들으면 형이 엄마인줄 알겠어.

아버지, 어머니, 큰형도 가만히 있는데 왜 작은형이 저리 쉬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건지.

귀가 따가운 작은형의 잔소리에 어이없어 하는데 부모님과 큰형을 보니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자신들이 할말을 모두 해버려서 일까?

그나저나......

준혁은 어떻게 된 거지? 그 뒤로는 어떻게 된 거고....... 또 태식이 녀석은??

가족들에게 연락을 한 건 준혁일까?

“.....그런데..... 태식이는 어떻게 됐어요?”

우선 태식이에 대해 먼저 물어보자.

“걔도 우선 입원 중인데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어 내일 퇴원해도 되나보더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저....그럼... 전화 걸었던 사람은...?”

순간 가족들의 얼굴이 굳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한 준혁이라는 남자 말이냐?”

아...역시 준혁이었군.... 근데 어디 있는 거지?

“네가 우리 호텔 VIP 손님과 아는 사이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큰형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그....게.....”

뭐라고 하지? 연인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은가.

내가 대답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추궁하는 눈빛을 보내던 가족들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인사이라던데......맞냐?”

흡!!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발언에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동시에 다친 갈비뼈에 무리가 갔는지 뻐근한 통증에 몸을 말아야했다.

“휴~ 참 요란하게도 커밍아웃을 하는구나.”

“??!!”

뭔가 황당한 반응에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뭔가 이 체념했다는 것 같은 반응은?

“난 네 에미다. 내가 배 아파 낳고 키운 자식이란 말이다. 자식의 그런 점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느냐.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여자친구는커녕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다는 것 안다. 특별히 이성에게 별 관심 없나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언제부터인지 네 시선이 여자가 아닌 남자를 쫒는 다는 걸 알았다.”

그런....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했냐고? 너 미국에 있는 지호 아저씨 알지?”

엄마, 아빠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는 그 아저씨? 갑자기 그 아저씨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 아저씨가 게이다. 학창시절부터 게이였어.”

“!!!!”

“그러니 게이들에 대한 편견이나 거부감 같은 것을 옛날에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찬성하는 것은 절대 아냐. 왜냐면 지호 옆에서 얼마나 게이로서의 삶이 힘든지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물론 내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취향을 바꾸려고 한다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네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차마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 난 고개를 수그렸다. 난 부모님께 큰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 한 준혁이라는 사람 꽤나 잘난 사람이더구나. 너 정말 그런 사람과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우리는 지호 곁에서 동성들 간의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지켜봐왔단다. 난 내 아들이 그런 삶을 사는데 찬성할 수가 없구나. 그래서 그 사람에게 널 떠나라고 했다.”

“!!!”

“마침 그도 한국에서의 볼일이 거의 마무리 되어 곧 돌아가야 한다고 하더구나.”

“곁에 있는 사람과 만나기도 힘든데 하필이면 여기 있지도 않는 사람을 만난 것이냐. 앞으로 그를 잊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머리 좀 식히며 공부에 열진해라.”

눈앞이 하얘진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가 여기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입으로 이렇게 확인 받는 것은 마치 지금까지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단숨에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라 숨이 막혀왔다.

“만일....”

새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어머니가 한숨을 푹 내쉰 뒤 망설이며 입을 여셨다.

“네가 네 앞가림을 잘 하여 졸업을 할 때까지도 그를 생각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그 때는 그를 찾아가는 것을 말리지 않겠다.”

“???!!!!”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네가 선택한 사랑이 2년이라는 긴 세월 앞에서도 흔들림 없을 정도로 깊고 강할 수 있다고 우리들의 인정을 받아내라.”

얼핏 들으면 무척이나 희망적이고 파격적이고 유리한 조건으로 들릴지 몰라도 절대 만만한 조건이 아니었다.

2년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남자가 군대에 2년 갔다 오면 사회 적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변할 수 있는 시간이다. 뿐더러 나부터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없는 판국에 준혁이라고 이 조건에 응할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갈등하는 내 얼굴의 표정을 보셨는지 어머니가 다시 한번 못을 박으셨다.

“평범한 연애가 아니다. 그 정도 이겨낼 각오 없이는 이 세상 따가운 시선들을 버티지 못 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거라.”

그럴 수만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쥐어 본 사랑이었다. 이렇게 쉽게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준혁을 사랑하면서 선배를 향해 느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새가 알에서 깨고 나와 처음으로 보는 것을 어미로 인식하듯 나 또한 내 본질을 곧게 봐준 선배를 그렇게 따르며 사랑이라 착각한 것이다.

그러니 간신히 내게 찾아 온 사랑을 아무 노력 없이 보내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비장한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가족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런데 준혁씨는.....”

이름을 말한 뒤 살짝 말을 끌자 어머니는 혀를 차며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었다.

“이 자식, 이제 걸릴 거 없다고 대놓고 애인부터 찾냐?”

작은형이 내 머리위로 가볍게 꿀밤을 놓으며 나무랐지만 그의 소식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너 이렇게 만든 놈들 다 처리한 뒤 온다더라.”

형이 침착한 목소리다 내 궁금증을 드디어 해결해주었다. 하지만 형....... 처리한다니..... 어투가 왠지 살벌하잖아.

“으음...”

잠결에 누군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체향을 맡으며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들게 들어올렸다.

“준혁씨....헤헤....”

너무도 보고 싶던 사람의 얼굴이 마치 꿈만 같이 내 앞에 있자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려버렸다.

“사람 그렇게 걱정시켜놓고..... 그 꼴로 웃음이 나와?”

준혁이 제법 무섭게 눈을 흘겼다.

“그래도 준혁씨가 짠! 하고 구하러 와줬잖아.”

“....”

못 말리겠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준혁의 손길을 느끼고 있자 아까 가족들이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대로 그냥 준혁을 보내 줄 수도 있겠지만 난 어떡해서든 준혁과 나 사이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준혁의 사랑을 믿고 싶었다. 나와 같은 마음 일 것이라고.

“준혁씨....”

어딘가 불안하게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준혁이 손을 멈추고 내 눈을 응시했다.

“우리 어떡하지? 가족 들이 알아버렸어. 펄펄 뛰며 정신병자 취급 안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우리 사이 인정해 주시진 않겠데. 

내가 졸업할 때까지 난 한국에서 준혁씨는 미국에서.... 그렇게 2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여주시겠데.”

“.......”

“준혁씨는 어때? 2년 동안 기다릴 수 있겠어?”

격양된 목소리로 아까 가족들과 했던 대화를 전해주는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준혁이 불안하게 떨리는 내 눈동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솔직히 잘 모르겠어. 준혁씨 정말 사랑하는데...... 모르겠어.....기다리고 싶은데..... 준혁씨...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 괜찮으니.”

“난 기다릴 수 있어.”

“!!!”

정신없이 늘어놓는 내 말을 끊고 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준혁이 날 잡아주길 기다렸나보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난 하늘의 별이라도 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아까까지의 불안감이 싹 사라지고 2년이고 10년이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날 기다려주지 않겠어?”

목이 메어와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목이 떨어져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어느새 흘러내리는 눈물을 준혁이 다가와 부드러운 키스로 훔쳐 주고 내 얼굴에 키스의 비를 내렸다.

이 사람을 만나게 되서,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서 정말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입안을 두드리는 그를 반겼다.

그 후 비록 몸은 아프더라도 마음만은 후련하고 편한 기분으로 준혁과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충실할 수 있었다. 가족

들도 준혁이 한국에 있을 동안은 눈감아 준 덕에 난 더 이상 조마조마한 맘이 아니라 당당히 준혁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난감한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바로 가족들과 준혁이 마주칠 때다. 비록 커밍아웃을 하긴 했어도 가족들 앞에서 남자한테 빠져 헬렐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굳어버리고 마는데 이런 걱정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는지 준혁은 너무도 뻔뻔스럽게(?) 내 수발을 들어주며 짬짬이 애정행각까지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그런 모습에 전혀 개의치 않는 가족들의 담담한 반응이다.

특히 엄마는 이제 준혁이 오면 대놓고 나보다 더 반긴다. 정말 ‘한서방 왔나’ 만 빠졌을 뿐 완전 장모가 사위 반기는 꼴이었다. 그래놓고 어째서 2년 동안 떨어져 있으라는 건지.

아버지도 처음에 말은 그렇게 했어도 준혁이 상당히 맘에 든 듯했고, 큰형과는 의외로 통하는 것이 많은지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이 친해진 듯 했다. 작은형은 내가 어디서 저런 잘 생기고고, 스타일 좋고, 능력 있고, 돈 까지 많은 남자를 물겠냐는 둥, 준혁이 아깝다는 둥 아주 내 속을 팍팍 긁는 말만 늘어놓았다.

도대체 이렇게 나올 거면 조건 따위는 왜 걸어 놓은 거냔 말이다~!!! 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모습이 그렇게도 보고 싶었단 말인가!! 정말 지금껏 없던 가족들을 향한 원망이 스멀스멀 일려고 한다.

어.쨌.든! 이래저래 묘한 어색함 속에서도 서서히 안정과 평온을 찾아가 내일 퇴원을 앞두고 있는 내게 늦은 감이 있는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겠는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내 인생의 태클인 태식이놈이지.

일부로 이런 때를 노린 건지 마침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타박상 외의 특별한 부상이 없던 태식은 하루 입원한 뒤 퇴원했었다. 내 부모님한테는 찾아와 자기 때문이라며 죄송하다는 말까지 했다는데 막상 다친 내 앞에는 코빼기도 안 비친 놈이니 녀석의 방문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네 놈이 웬일이냐?”

웬일인지 비꼬는 나의 말투에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지지 않고 꽈배기 마냥 비비 꼬인 독설이 날아와야 정상인데. 입술을 꾹 다문 체 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녀석이 답답해 결국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해봐.”

“......”

태식이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인지 녀석의 얼굴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특히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녀석의 눈동자는 내 적대심을 낮추기에 충분했다.

“난 정말....네 놈이....”

드디어 꾹 닫힌 녀석의 입술이 들썩였고,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난 귀를 기울였다.

“네 놈이.....”

태식이놈이 주먹을 꽉 움켜쥐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정말 싫어!!!!!!”

까,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를 꽥 내지른 놈 때문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뭐라고? 이 새끼가 지금 자기 때문에 다쳐 누워있는 사람 찾아와 고맙다고는 하지 못할망정  뭐라고?

 여우새끼의 말이 머릿속에 접수되자 참지 못할 분노가 부글부글 끊어 올랐다.

“이... 씹새끼가! 구해준 은혜는 모르고. 고맙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뭐가 어째? 누구는 네가 좋아서 구해준 줄 알아? 역시 네 놈 새끼 어떻게 되든 그냥 내버려두는 거였는데!”

“그래! 앞으로 인연 끊겠다고 했으면 내버려두지 왜 혼자 지랄을 떨어서 그 꼴로 있냐? 그렇게 등 돌리고 나가놓고, 그렇게 모르는 사람 마냥 대했으면 끝까지 모른 척 할 것 이지 왜!!! 왜 쓸데없이 끼어들어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거냐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놈의 젓은 눈동자에서 드디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솔직히 굉장히 놀랐다.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모든 이용한 녀석이었지만 절대 눈물만은 가짜로라도 흘리는 걸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칼이 들어와도 내 앞에서만은 약한 모습 보이지 않을 녀석이 지금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 난 정말이지 너, 강 지운이 너무나도 밉다!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널 누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해! 웃기지도 않는 절교선언을 듣고 꼴사납게 겁먹은 것도 열 받아! 날 구하러 온 널 보고 안도한 내가 비참해 죽겠다고!!!

“........”

지금껏 꾹꾹 눌러왔는지 격하게 쏟아내는 녀석의 감정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난 지금 인정하기 싫어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태식이놈의 속마음을 듣고 있는 것이다.

“넌 내가 네 인생을 망쳐놨다고 했지? 킥, 맞는 말이야. 더불어 내 인생까지 말이지.”

자조 섞인 비웃음을 흘리면서도 녀석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큭큭, 정말 웃기지도 않아. 네까짓 게 뭐라고.”

“........”

“정말 비참한 게 뭔지 알아?”

“........”

“나름대로 널 내 맘대로 휘둘렀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넌 별로 동요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오히려 휘둘렸던 건 나였어. 어느새 내 인생은 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단 말이야!!!”

도대체 뭐가 이 녀석을 이렇게까지 몰아갔을까? 누구에게 뭘 증명하고 싶었기에 그렇게까지 발버둥 쳤을까? 난 처음으로 녀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큭큭, 도대체 당해낼 수가 없네, 강 지운. 이런 내 모습 보고 꼴좋다고 생각하겠지? 왜 아무 말도 없어? 모르겠어? 네가 이겼다고!”

무너져 내려가는 태식이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두 팔 벌려 녀석의 어깨를 꽉 감싸 안았다. 새삼 녀석이 작다는 걸 느꼈다.

 “뭐야! 지금 네가 이겼다고 날 동정하는 거야? 집어치워!”

바동거리는 녀석 때문에 다친 갈비뼈가 눈물나도록 아파왔지만 난 녀석을 감싼 팔을 풀지 않았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처음부터 우리 관계에 승자, 패자 같은 건 없었어. 질투가 많은 한 아이와 소심한 아이의 잘못된 시작으로 이어온 비틀린 우정만 있을 뿐이야. 네 인생이 날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널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결국 내 인생 역시 네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녀석의 바동거림이 멈췄다.

“네 잘못만이 아니야. 내 잘못이기도 해. 네 말대로 첨부터 네게 제대로 맞섰다면 이렇게까지 틀어지진 않았을 거야. 내가 겁쟁이라 도망만 다니면서 우리 사이가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야.”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우리의 엇갈린 인연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하지만 우리의 삐뚤어진 관계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람이 준혁씨야.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서로에게서 얽매인 체 행복을 찾지 못했겠지.”

그래. 나에겐 이제 날 잡아 줄 준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태식이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우리 이제 그만 이 악연을 끝맺고 제대로 된 우정을 시작하지 않을래?”

잠잠하던 녀석의 흐느낌이 강해졌다. 날 잡고 있던 손길 또한 강해졌다.

“네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차마 널 그냥 둘 수 없었던 건 내 마음 깊은 곳에 널 내 유일한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 솔직히 만날 때 마다 으르렁 거렸지만 그만큼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 다만 첫 단추를 잘못 낀 체 너무 긴 길을 걸어왔을 뿐이야. 많이 늦었지만 우리 이제라도 진짜 친구라는 거 해보지 않을래? 무엇보다도 여기서 서로를 잘라내기에는 지금까지의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녀석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우리 서로에게 기회를 줘보지 않을래?”

“...젠장...”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체 녀석이 한참 만에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싫다니까. 혼자 멋진 척은 다하고 있어.”

한참을 울어서 코가 잔뜩 막힌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녀석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쿡쿡~ 나 멋진 거 이제 알았냐?”

“지랄.”

이제야 내가 알던 태식이놈 같다.

 긴 세월동안 억눌렸던 감정들을 내 품에서 눈물로 모두 흘려 내보내 그런지 녀석의 가벼워진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나저나.....”

“??”

“나 좀 이제 놔줘라. 내가 좋은 건 아는데 나 아직 환자거든. 금간 갈비뼈가 살짝궁 아프다.”

“!!!!!”

그제야 내게 안겨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는지 녀석이 정색을 하며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환자복이 녀석의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어쩐지 좀 축축하더라니.

녀석도 내 옷을 보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 믿기지 않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녀석이 괜히 여우새끼였겠는가.

“누, 누가 먼저 안았는데. 아악~! 쓰벌놈! 역시 난 네 놈이 정말 싫다!!”

‘쾅!’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여 놓고도 오히려 지 놈이 더 성을 내고 나가는 녀석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

하~ 몰랐는데 저 자식 왜 이렇게 귀엽냐. 큭큭~”

“뭐 좋은 일 있었나보지?”

“아, 준혁씨 왔어요?”

반갑게 맞는 내게 준혁이 다가와 이마에 입술을 꾹 찍었다. 나 또한 답례로 준혁이 허리를 세우기 전 잽싸게 그의 뺨에 입맞춤했다. 그러자 준혁이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도 없어?”

“엄마가 계셨는데 준혁씨 온다니까 그럼 가족들 저녁 차려준다고 좀 전에 가셨어요.”

“그래? 내일이 퇴원인데 몸은 좀 어때?”

“살살만 움직이면 괜찮아요.”

“그래. 언제나 조심하고.”

“.....?”

태식이놈과의 깊은 골도 풀고 내일은 병원에서 나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고조된 나와는 달리 준혁은 어쩐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무슨 일 있어요?”

“.......”

대답 대신 날 바라보는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날 한순간에 불안에 휩싸이게 했다.

“.....지운아.....”

“....네....”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길 빈다.

“할 말이 있다.”

나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나 안 들을래. 나 안 들을 거니까 말하지 마요.

“나..내일.....미국으로 돌아간다.....”

“!!!!!!”

왜 이러지? 알고 있었잖아. 잘 기다리겠다고 약속까지 했잖아. 세삼 충격 받을 일 없잖아.

 그런데....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은 뭐지? 왜 이렇게 온몸이 떨려오는 거지?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숨쉬기가 힘들어.

“흑...”

웃는 얼굴로 보내주기로 했잖아.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말고 나 잘 기다리라고 말하며 웃는 얼굴로 보내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울면 어떡해, 바보야.

“울지 마. 우리 영원히 떨어지는 거 아냐.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서 잠시 떨어져 있는 거야.”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날 준혁이 부드럽게 팔 안에 가두었다.

“미안해요. 나 안 울려고 했는데. 웃는 얼굴로 보내줄려고 했는데. 내가 못나서....흑...”

“무슨 소리야. 만일 정말 그랬으면 나 섭섭했을 거야. 혹시 날 보내는 게 후련한 거 아냐? 하고.”

“훗! 흑흑...”

과장스럽게 말하는 준혁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뭐야, 웃어? 정말 그런 거야? 울다 웃으면 어디에 뭐가 생긴다고 한국에서는 그러던데. 한번 확인해 봐야겠는데~”

정말로 내 엉덩이를 더듬는 손길에 난 순간 우는 것도 잊고 펄쩍 뛰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뭘 그래. 우리 사이에. 쿡~”

간만에 보는 준혁의 능글 버전에 아까의 내 절망적이던 기분이 한번에 날아갔다. 알고 있다. 준혁이 날 위해 일부러 이런다는 거. 어울리지도 않게 말이다.

난 아직도 내 허리를 놓고 있지 않는 준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꽉 안았다.

“나 정말 잘 기다리고 있을게요. 사랑해요, 준혁씨.”

“응. 나도, 사랑해. 한눈팔면 비행기 타가 날아와 엉덩이를 때려줄 거야.”

“훗! 그럼 한눈팔아야겠네.”

“뭐야! 요 녀석이!”

“아앗! 하지 말아요. 저 아직 환자라고요!”

앞으로 2년 동안 못 볼 거라는 무거운 마음을 서로 안고 우리는 이렇게 웃었다. 심장은 눈물을 흘리는 동안.

“그러니까 태식이 녀석도 한번쯤은 제 인생에 도움이 된 거죠. 이렇게 준혁씨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준혁 덕분에 특실에 입원해 침대가 크니 망정이지 보통 병실의 침대에 성인 남자 둘이 눕기에는 턱없이 적었을 것이다.

 준혁의 팔베개를 베고 누워 오늘 태식이와 있었던 일과 지금까지 녀석과의 관계를 모두 설명하는 동안 준혁은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으며 틈틈이 내 얼굴에 베이비 키스를 뿌렸다.

 “훗~ 정말 녀석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안 그랬음 우리 강아지가 내 뒤를 쫄랑쫄랑 따라왔겠어?”

“강아지요? 누가 강아지에요!”

“처음에 나름대로 몰래 쫒아온다고 따라오는 모습이 완전 강아지 같았거든. 큭큭~”

“윽! 뭐예요? 칫!”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때 내 모습을 떠올라 분하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토라진 내가 귀엽다는 듯 입을 맞춰오는 준혁 때문에 금세 얼굴이 풀려버렸지만.

“음.... 전 준혁씨보고 뭘 떠올렸는지 알아요?”

“글쎄?”

“흑기사요.”

“흑기사?”

준혁의 수려한 눈썹이 올라가며 의문을 표했다.

“네. 한국에 젊은 사람들이 술 마실 때 흑기사를 부르다는 게 있거든요. 술을 꼭 마셔야 하는 상황인데 도저히 못 마실 때 대신 마셔줄 사람을 지목하는 거예요. 그럼 흑기사로 지목된 사람은 술을 마셔주는 대신 소원 하나를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지목한 사람은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 술 마셔준 거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거예요.”

“흠... 그런데 왜 날 보고 흑기사를 떠올렸지?”

“처음에는 절 태식이의 흉계로부터 구해 줄 백마 탄 왕자님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알고 보니 도움의 대가는 확실하게 받아내는 게 완전 흑기사더라고요. 쿡쿡~ 그때 준혁씨 때문에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다고요.”

준혁도 그 때를 떠올렸는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씨~ 미안해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라고요~

“후후~ 하지만 나 역시 백마 탄 왕자님보다 흑기사가 더 맘에 드는군.”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낮게 중얼거리던 준혁이 순간 눈빛을 빛내며 부담스럽게 날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흠칫한 이유는 과거의 경

험을 되살려 보면 알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대가를 받아볼까?”

“네?”

“그 정도 대가로 흑기사를 통째로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우~ 먹은 건 자기면서.

“나, 한 준혁이 그 정도 가치 밖에 안 된다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요구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반한사람이 죄지.

“그럼 뭘 원하는데요?”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기만 해봐라!

 “너, 강 지운. 널 원해.”

“........”

“너의 마음, 너의 몸, 너의 시간, 너의 모든 것을 원해.”

생각지도 못한 준혁의 말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자꾸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점점 벅차오르는 가슴에 눈물 역시 차올랐다. 조용히 내 눈가를 쓸어내리는 준혁의 손끝을 잡고 손가락에 키스를 했다.

“그런 건 이미 옛날에 다 가져갔잖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해주자 준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살며시 두 눈을 감고 준혁의 뜨거운 키스를 맞이했다.

 그 날 밤 우리의 키스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안타까웠다. 털 하나까지도 잊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쓰다듬는 손길 또한 어는 때보다 뜨거웠지만 애틋했다.

2년간 떨어져 있을 서로를 위로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마지막 밤이었다.

-준혁의 시점-

몸이 다 나을 때까지 같이 있어주지 못해 녀석에게 정말 미안했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이 다시 건강해지 모습을 보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녀석이 건강해 질 때까지, 녀석의 방학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계속 핑계를 만들어가며 미루다 더욱 떠나기 힘들어질까봐 냉정하게 내 마음을 다잡아야했다.

‘아니에요. 저 준혁씨 맘 이해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 잡지 않을 거예요.’

어리숙했던 내 연인이 어느새 나보다 더 강인한 얼굴을 하고 날 보낸다.

‘어디 아프거나 하지 말고 건강해야 되요.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말고 저 잘 기다려야 해요.’

내가 할 말을 네가 먼저 다 해버리면 어떻게 하냐.

흔들리는 눈동자로 애써 웃으며 말하는 녀석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고 나면 녀석을 놓지 못할 것 같아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다친 녀석이 아파할까봐 꽉 안아주지도 못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자꾸 내 발길을 잡는다.

 ‘가보세요. 비행기 시간 놓치겠어요. ‘

내 등을 떠미는 녀석의 마음이 지금 얼마나 아플까. 지금이라도 당장 비행기표를 찢어버리고 녀석을 감싸 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녀석도 꿋꿋이 울지 않고 날 보내는데 내가 여기서 무너져 내릴 순 없다.

 여기서 뒤돌아 가면 우리가 진심으로 함께 할 날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부디 나 없는 곳에서 울지 말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

우리가 다시 만날 그 날까지.......

See you later, my love.

- 1년 반 후 -

“드디어 가는 거냐?”

“응.”

“독한 놈.”

“후후~”

태식이 놈이 징그럽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그 무엇도 지금 내 이 감동의 순간을 망칠 수 없었다.

“준혁이 쭉쭉 빵빵 금발미녀한테 홀딱 넘어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

빌어먹을 새끼!!!! 꼭 그렇게 산통을 깨야겠냐!!!!!

“아아~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말라고.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어.”

“퍽이나!!”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고 가는 내게 녀석이 마지막 일격을 먹인다.

“가서 길이나 잃지 마!”

아우~ 넌 역시 영원한 여우새끼야!!

얄밉게 히죽거리고 있는 녀석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멋지게 날려주었

다.

그때 내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머리도 내가 다쳤었던 것이 분명해.

1년 반전 쯤 태식이의 치정문제에 휘말려 병원신세를 지게 됐을 때 난 태식이와 화해를 하고 제대로 된 친구사이가 된 줄 알았다. 물론 나만의 착각이었지만.

물론 달라진 건 있었다. 더 이상 내 뒤에서 공작을 피지도 않았고 내게 악감정 또한 품지 않았다.

하지만 여우새끼가 괜히 여우새끼겠는가. 여전히 내 앞에서는 본색을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가증스런 연기를 펼쳤고 -녀석

은 그걸 내숭이라 불렀다- 비록 악의는 품지 않았지만 내 속을 박박 긁어놓는 입은 잠기지 않았다.

훗~ 그래도 최근 석훈선배랑 잘되는지 가끔 귀여운 모습도 보이긴 한다.

아니 아니. 내가 지금 다른 사람 연애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나, 강 지운! 오늘만을 위해 수험생 때도 흘리지 않은 코피 터트려가며 공부를 한 것이다!  오늘부로서 나는 오는 여름 예비 졸업생이 된 것이다. 음하하하하~~~~

준혁이 한국을 떠난 후 쪽팔리지만 몇 날 며칠 눈물만 흘렸다. 가족들이 짜증을 낼 정도로 준혁과의 추억이 떠오르면 자동으로 눈물을 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을 울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부모님은 분명 내가 졸업할 때까지라고 하셨다. 꼭 2년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 난 울지 않았다. 나에게는 내 인생 최대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목표는 바로 조기졸업! 또 한번 태식이에게 고맙게도 내겐 친구라는 것이 없었기에 언제나 학업에 충실 할 수 있었다. 또한 태식이가 있는 대학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계절학기도 무리하지 않는 수준에서 꾸준히 들어온 것이다.

 준혁이 떠난 후 죽어라 학업에 열중하면 일년 조기졸업은 좀 무리지만 반년 조기졸업은 기대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4학년 1학기를 끝으로 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러 가면 되는 것이었다. 

옛날의 소심하던 한 지운은 이제 없다. 한달이란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난 준혁을 사랑하며 많은 것을 배웠고, 덕분에 강해졌다.

동화속의 공주님처럼 백마 탄 왕자님이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한심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도 난 공주도 아닐 뿐 더러 준혁 또한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나의 흑기사였고 난 내 모든 걸 주고 얻은 흑기사를 당연히 만나러 가는 것일 뿐이다.

부모님도 내 열정에 질리셨는지 묵묵히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는 날 보고 고개만 설래설래 흔드셨다. 비록 준혁이 맘에 들었다하여도 당신의 아들이 다른 길을 선택하길 바라셨겠지. 하지만 두 분은 아무 말 없이 날 보내셨다. 행복 하라는 한 마디와 함께.

이제는 준혁을 만나러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준혁, 기다려! 지금 만나러 갈께!!!

 가자!! 미국으로~~!!

우어어어~ 분명 이건 태식이 놈의 말이 씨가 된 게 분명해!!!

환장하게도 난 정말 태식이놈 말대로 국제미아가 될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난 혜린이누나로부터 집주소와 회사주소를 모두 받았다. 준혁에게는 절대 비밀이라고 당부까지 단단히 하며. 물론 누나 성격상 이런 재밌는 일을 그냥 두고 볼 사람이 아니기에 적극적인 지지까지 받으며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 오른 것 까지는 좋았다. 공항에서 호텔로 무사히 도착한 것 까지도 좋았다. 준혁의 집으로 갈까 회사로 갈까 고민하다 회사에 있을 시간이기에 회사로 정한 것 까지도 좋았다. 물론 회사에 가서 어떻게 만날 것 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혹시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작은 기대감으로만 무턱대고 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택시대신 지하철을 선택한 것이 문제였다.

 마침 호텔 바로 앞이 지하철역이고 서울에서도 잘 타는 지하철 여기 와서 못 탈까 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몇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내가 오늘 막 미국에 도착해 시차적응이 안됐다는 것과, 누가 보기에도 난 혼자 온 여행자의 모습이었다는 것과, 여기는 길가다 총소리가 들려도 이상할 것 없는 뉴욕 도심지라는 것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돼 곧 준혁을 만난다는 흥분과 설렘을 누르고 긴 비행으로 지친 피곤함과(비행기 안에서 한 숨도 못 잤다) 시차로 인한 졸음이 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주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 내 옆에 털썩하고 앉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깨 시계를 보자 어느새 내가 지하철을 탄지 2시간이나 흘렀다는 걸 깨닫고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내가 탈 때는 한산하던 지하철이 지금은 어느새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당황스런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역을 확인하자 몇 번이나 지나쳤을 것이 분명한 내 하차역이 몇 정거장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자 탈 때는 오전이라 몰랐던 여름의 한더위가 한 낮이 되자 기승을 한껏 부리고 있었다.

갈증을 느껴 물 한 병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터졌다. 카운터에서 물을 사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분명 있어야할 지갑이 없는 것이다.

 의심 가는 곳이라고는 지하철 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무방비한 상태에서 그렇게 잠들어 버렸으니 아마 가방을 홀라당 가져갔어도 몰랐을 것이다. 나 여행 중이요 라는 표시를 팍팍 내고 뉴욕시 지하철에서 골아 떨어져있다는 것은 나 좀 제발 털어주세요 라는 것도 똑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비록 뜻밖의 상황에 나는 패닉상태가 되버렸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없어진 것은 지갑뿐이었고 지갑 안에는 약간의 현찰 외에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머지는 호텔에 있는 내 여행가방 깊숙한 곳에 두고 나온 것이다. 당장 돈 없는 것쯤이야 준혁만 만나면 별 문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침착하라고 되새겨보아도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은 막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직 만나지도 못한 준혁 밖에 없는 낯선 땅이었던 것이다.

어렵지 않게 준혁의 회사를 찾았지만 난 예상했던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한 준혁씨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약속이 잡혀있지 않다면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알고 있었지만 힘이 빠졌다.

하지만 1년 반을 기다렸는데 그깟 몇 시간 못 기다리겠냐는 마음으로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준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4시가 넘어가자 슬슬 퇴근 시간인지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천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긴장한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꼼꼼히 훑어봤지만 준혁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6시가 넘어가도 준혁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곳으로 나간 것일까? 순간 온몸에서 기운이 쫙 빠져나갔다. 정신적으로 지쳤을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지쳐버렸다. 이 여름더위 속에서 점심 저녁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것이다.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준혁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비록 차비 한 푼 없지만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데 어딜 못 가겠는가.

 지도라고 있었으면 쉬웠겠지만 없었기에 짧은 영어로 길을 물어물어 한 시간 만에 준혁이 살고 있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이도 회사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감격에 겨워 건물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또한 경비의 제지를 받아 건물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뭔가 엄청 서러워졌다. 그렇게 고생해서 미국에 왔는데 피곤하고, 발 아프고, 배고프도록 준혁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란 말인가. 준혁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1년 반을 참아왔던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 때.

 검은색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동차 한대가 매끄럽게 들어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차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준혁이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기대하면 실망만 더 클 거 아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차문이 열렸고 길쭉한 다리 하나가 뻗어 나왔다. 순간 그 장면이 준혁을 처음 만났던 그 때의 기억과 겹쳐졌다. 곧 이어 모습을 드러낸 다리의 주인은 그때 보다는 조금 마른 듯 했지만 기억 속에서처럼 여전히 멋진 준혁의 모습이었다.

“지...운...??”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기억 속의 준혁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었다.

“준혁씨....드디어.....”

드디어 만났다.

준혁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던 내 몸이 드디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운아!”

내 몸이 바닥을 때리기 전에 재빨리 다가온 준혁이 날 끌어안았다.

준혁이다.... 정말 준혁이다.....

미치도록 그리웠던 준혁의 체취와 품안이다.

 “정말 지운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여길? 학교는?”

갑작스런 내 등장에 준혁이 당혹스러웠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하지만 날 안고 있는 팔은 풀지 않았다.

난 대답대신 준혁의 등 뒤로 팔을 둘러 꽉 껴안아 더욱 깊이 준혁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준혁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강하게 마주 안아왔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이날을 위해 난 이를 악물고 버텨온 것이다. 이 품안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사랑하는 준혁의 품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그리고 드디어 찾았다.

 나만의 흑기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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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입니다. 드디어 완결이에요 ㅜㅜ

완결로 올리겠다고 한지가 벌써 반년이 넘었네요.

면목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흑기사 완결 내라고 다리가 부러졌나 싶기도 합니다.

네ㅜㅜ 저 다리 부러져서 일도 잠시 쉬고 집에서 글만 썼습니다.(살짝 오버;)

벌 받은 거예요. 하지만 그 덕에 그렇게도 미뤄왔던 완결을 낼 수 있어 이런 뜻밖의 여유를 가지게 된 게 원망스럽기만 하지는 않네요.

그리고 끝부분 가서 조금 많이 날렸습니다. 오타도 많을 거예요.

막상 쓰기 시작하니 조금이라도 빨리 완결을 내고 싶은 마음에

 제가 봐도 성의 없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 점은 완결 낸 거라도 어디냐 라는 넓은 이해심으로 어여삐 봐주세요 ^^* (퍽~!)

그 동안 흑기사 사랑해주시고 기다려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꾸벅~

흑기사가 제 첫 글인 만큼 의미가 컸거든요. ^^

막상 이렇게 완결 내놓으니 시원섭섭하네요.

그럼 혹시라도 제가 다음 글을 가지고 찾아 뵐 때까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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