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제발, 게임에 참여하게 해 주세요. (1/17)

1. 제발, 게임에 참여하게 해 주세요.

해인은 양치질을 하면서 거울에 뜬 이상한 창을 쳐다봤다.

[방해인 님, 축하합니다. <그레비티 in dating sim>의 참가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GAME 참가를 원하시면 화면에 나타나 있는 ‘예’를 눌러 주세요. 만약이라도 원하지 않으시면 ‘(매정하게)꺼져’를 눌러 주세요.]

[1.(당신은 행운아)예.]

[2.(매정하게)꺼져.]

짙은 눈동자가 빠르게 글자들을 몇 번이고 훑어 내렸다. 혹시나 자신이 잠결에 헛것을 보고 있나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퉤, 입 안에 있는 것을 전부 뱉고 입까지 헹구고 세수까지 마저 했다. 잠이 덜 깼나 싶어 일부러 찬물로 세수를 했음에도 시스템창 같은 것은 원래부터 거울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다.

해인은 시스템창이 떠오른 거울 위를 검지로 문질러 봤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누군가 거울에 낙서를 했다거나 스티커 같은 걸 붙여 놓았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워지기는커녕 마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묘하게 진동하는 것이 거울이 아니라 꼭 액정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헛것도 아니고 누군가 장난을 쳐 놓은 것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해인은 그저 눈꺼풀만 느리게 몇 번 끔뻑이다 중얼거렸다.

“소설에 빙의한 것도 모자라 게임? 그레비티 in dating sim•••?”

해인이 빙의된 소설 이름도 <그레비티>인데 게임 이름마저 <그레비티 in dating sim >이라니, 누가 봐도 1초 만에 대충 지은 이름이 분명했다. 남의 오피스텔에 몰래 창을 띄울 시간에 게임 이름에 더욱 신경을 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빙의한 이 세상은 생각보다 더 이상한 게 분명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시스템창을 보다 해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놀랍기는커녕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시스템창을 빤히 쳐다보다 시스템창이 거울을 다 가린 탓에 거울 모퉁이로 가서 제 머리칼을 정리했다.

이제 겨우 빙의 생활에 적응해 즐기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게임에 참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나가면 알아서 사라질까 싶어, 문으로 향했지만 어쩐지 선택지가 마음에 걸렸다.

[(매정하게)꺼져.]

매정하게…. 애초에 뜬금없이 나타난 게임 초대장에 누가 응한다고. 해인은 다시는 보지 말자는 의미로, 차라리 매정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매정하게)꺼져.]를 눌렀다.

그러자 시스템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정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잘못 생각했어. 참가할래!]

[(싸가지 없게)꺼져.]

게임치고 꽤 구질구질하다 생각하며 매정하고 싸가지 없는 해인은 ’꺼져’를 눌렀다. 사라지는 시스템창을 보며 해인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정체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 * *

F, 전자 출결 앱에서 더 빠지면 위험하다는 알림이 떴다. 해인은 차마 F를 더 늘릴 수 없어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떠드는 교수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맨 앞자리에 앉은 남자와 맨 뒤쪽에 앉은 남자를 눈으로 흘겨봤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바로 해인이 살고 있는 세상의 메인수, 서해빛이었고 맨 뒷자리에 앉은 남자는 메인공, 백담호였다. 해인은 소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반년 전, 대뜸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악역 서브공인 방해인 몸으로 말이다.

<그레비티>, 베타인 서해빛이 알파인 백담호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세계관이 세계관인 만큼 수위는 높았고 그들의 서사는 몸으로 진행되었다.

사람 대하는 게 서툴다고 작가는 표현했지만, 그냥 성격이 개 같은 백담호는 서해빛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고 재밌을 것 같아 접근한다. 한마디로 장난감을 하나 찾았다는 소리였다. 다들 눈치챘다시피 메인수 서해빛은 구르고 구르고, 마음에 상처가 나고, 심지어 지속적인 알파와의 관계 때문에 베타였던 형질이 오메가로 바뀌기까지 한다.

하지만, 모든 소설들이 그렇듯 서해빛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사랑을 버리지 못했고 백담호는 서서히 그의 순수함과 단단함에 빠져들고 만다. 그 둘 사이, 정확히는 백담호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끔 하는 존재가 바로 방해인이었다.

방해인은 백담호를 싫어했다. 정말, 정말 싫어했다. 자신보다 모든 게 잘난, 심지어 자신은 열성 알파인데 백담호는 우성이라 얼마나 열등감을 느끼던지.

그야말로 자격지심이 심한 전형적인 캐릭터였다. 그래서 방해인은 백담호를 좋아하는 서해빛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방해인의 마음이 진심이 되어 버렸고•••, 결말은 ‘악역 서브공’ 답게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방해인의 몸에 빙의하고 이 세상이 <그레비티> 속이라는 걸 해인이 알았을 땐, 그는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해인은 본래가 지난 일에 미련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원래 생에 크게 미련이 있지 않은 탓이 컸다. 게다가 방해인이 되어 그가 누리던 것을 자신이 누리는 순간, 그땐 정말 눈이 뒤집혔다.

돈이 궁해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놀고 싶은 걸 못 놀고, 막막해지는 앞날 걱정 대신 방해인에게는 돈이 있었고, 정해진 앞날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해인이 미친 듯이 놀기 시작한 때가. 해인은 전생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전부 하려는 듯 원작의 방해인이 여기저기서 지랄을 떨며 다닐 시간에 웹툰을 보고, 놀이공원을 가고, 영화를 보고, 만화 카페를 가고, 게임을 하고, 현질하고…. 유람선을 탔다.

매일 학교에서 사건 사고만 일으키던 막내아들이 이제는 밖으로 나돈다고 걱정하시던 부모님도 해인이 그저 정말 ‘놀기’만 한다는 걸 깨닫자 감격에 겨워하셨다. 사람이나 패고, 욕하고, 영상 찍히던 아들놈이 이제 안 그런다고,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고 어찌나 기뻐하시던지. 그 뒤로 해인은 더 눈치를 안 보고 놀 수 있었다.

이게 바로 행복인 걸까. 해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원래 방해인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자기도 엄연한 피해자였으니, 남의 인생을 뺏었다는 죄책감은 덜했다. 그사이 수업이 끝나 학생들이 하나둘씩 강의실을 나가고 있었다.

“어, 오늘은 오셨네요.”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서해빛이 해인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해인도 그에 따라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응, 이제 안 나오면 F거든.”

“와…. 선배. 그러셔도 돼요? 하긴, 공부 잘하시긴 하는데•••.”

그래도 이정도 출석이면 잘해야 B 아닌가, 하고 중얼거리는 해빛의 말에 해인은 그저 애매하게 웃었다. 공부를 잘하던 방해인은 이제 사라졌다. 이 몸 속에는 멍청한 놈만 있을 뿐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볼펜 한 개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해인이 일어서자 해빛이 그 옆에 자연스럽게 붙었다.

놀랍게도, 현재 해인과 해빛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가끔 마주치면 가볍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평범한 사이였다. 이게 다 서해빛에게 난리를 치는 원작의 방해인이 되기 전에 현재의 해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빙의한 초반에는 해인도 격변한 환경에 적응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서해빛도 왜인지 묘하게 자신을 피하는 느낌에 거리를 뒀다. 하지만 소설의 전개를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간 결과 해빛은 이제는 꽤 해인을 친근하게 대하게 되었다.

서해빛이 해인의 옆에 나란히 서자 해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빗장뼈 위에 닿자 해빛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직은 이런 스킨십은 불편해하는 것 같아 해인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래야만 백담호가 자기 마음을 깨닫거든. 해빛의 어깨에 애매하게 팔을 두른 채 뒤를 힐끔 돌아보니 역시나 백담호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해인은 갑자기 방해인의 몸에 들어왔다. 그 덕에 전생에서 누리지 못한 것들을 누리는 중이니 해인은 어느 정도의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자기도 원해서 빙의 한 게 아니었지만, 그저 이 삶을 즐기기만 하기에는 불안한 마음 탓이었다.

“선배.”

그래서 해인은 원래 방해인의 역할을 최소한 정도만 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작처럼 서해빛하고 방해인이 붙어먹는다는 오해까지는 만들지 않고 백담호의 신경을 조금 건드리는 가벼운 접촉 정도만 해 주기로 했다.

“선배.”

딱 그 정도만. 이 둘은 운명이니까, 자신이 이 만큼만 해 줘도 충분히 잘 이어질 게 분명했다. 전생의 세상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세계 같지만 여긴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둘을 필시 이어질 것이다.

“제 말 듣고 있어요?”

“아, 응?”

딴생각을 하는 게 티가 난 것인지 서해빛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해인은 멋쩍게 웃으며 둘렀던 팔을 물렸다. ‘미안, 너무 덥네.’라고 덧붙이니 다행히 금방 누그러진 투를 하며 해빛은 말을 이었다.

“오늘 점심 뭐 먹냐고요. 먹을 거 없으면 저랑 같이 학식이나 드실래요?”

“아, 나 집 갈 거야.”

“네? 선배, 이따 오후에 저랑 같은 수업 하나 또 있지 않아요?”

“휴강이야.”

“네?”

이미 커다란 옅은 눈이 더 커지니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는 서해빛에게 해인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자체 휴강, 나 아직 그 수업은 한 번 더 빠져도 되거든.”

“아.”

해빛은 이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당한 듯이 웃었다.

“선배, 그러다가 학고 맞겠어요.”

그 말에 해인은 그저 웃었다.

“그럼 다음에….”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던 눈매가 또 한번 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들은 밝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여 해인은 갑자기 애가 왜 이러나 싶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바로 이해했다.

아까 다른 길로 가는 것 같더니만 다시 뒤에서 나타난 백담호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해인은 혹시라도 백담호가 오해라도 할까, 인사도 없이 해빛에게서 몸을 돌렸다. 뒤에서 작게 “선배….”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건 자신이 아닌 백담호를 부르는 게 분명할 터.

해인은 빠른 걸음으로 백담호와 조금 떨어져 지나쳐 갔다. 옆을 스쳐 간 것뿐인데도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워 해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아마 이 소설의 시대 배경이 중세였더라면 방해인은 분명 백담호에게 죽임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 * *

“아니, 미친.”

해인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씻으러 들어왔더니 갑자기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방해인 님, 갑자기 이상한 창이 나타나셔서 정말 놀라셨죠? 그러나 이건 ‘사기’가 아닙니다. <그레비티 in dating sim>은 현실에서 플레이 할 수 있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퀘스트를 달성할 때마다 좋은 보상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퀘스트를 못 깨면 벌칙이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유흥을 위한 게임이므로 벌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특별 참여권을 얻으신 방해인 님은 세계 최고의 행운아! 다시 오지 않을 기회! 놓치면 3대가 후회할 기회를 잡으신 겁니다!

얼른 당장 게임에 참여하시죠! 어때요? 구미가 당기죠? 어서 예를 눌러 주세요!]

[1. (누르면 완전완전 인생 떡상 기회인)예]

[2.(누르면 3대가 탈모)꺼져!]

어제 봤던 그 시스템창이 더 크고, 그리고 더 말이 많아진 상태로 떠 있었다. 관리실에 물어 확인해 본 결과 오피스텔 네트워크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해인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이제는 거울을 다 뒤덮은 시스템창을 노려봤다. 제대로 읽지도 않고 ‘꺼져’를 누르려는 데, 다시 창 떠올라 그걸 막아섰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세요. 이상한 거 전혀 아니고요, 퀘스트도 재밌을 거고 보상도 꽤 푸짐해요.]

[1.(후회하지 않겠습니다) 게임 참여]

[2. (누르면 개거지가 될)꺼져!]

말도 안 되는 선택지를 내어 놓고 이상한 게 아니라니, 아마 누군지 몰라도 이 게임 참여 시스템창을 보낸 사람은 한국어를 잘 못 하는 게 분명했다. 남의 오피스텔에 이상한 걸 자꾸만 띄우는 새끼를 꼭 잡겠다는 마음으로 해인은 거울이 깨질 듯이[2.(누르면 개거지가 될)꺼져!]를 퍽퍽 내리쳤다.

“진짜 존나 안 한다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해인은 개거지가 되어 버렸다.

* * *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해인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좁디좁은 원룸으로 들어서 바닥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이게 무슨…. 미친….”

허망하게 떨리는 검은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침대와 책상 사이의 보폭은 한 걸음 반, 옷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에너지 효율 5등급짜리 작은 냉장고.

실 평수는 5평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 속에 해인은 서 있었다.

“내가, 내가 왜, 왜 이런! 이 미친!”

억울함에 소리를 질러 봤지만, 설움만 더 커질 뿐이었다. 눈물만 똑똑 흘리던 해인이 황급히 자신의 폰을 들고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25만 원.

정말 25만 원만 있었다. 재벌 2세였던 해인이 갑자기 이렇게 된 데에는 불과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 서준 씨. 그거 치우는 거 아니에요!’

종강 후, 만화 카페에서 신나게 만화책을 보다가 돌아온 해인이 다급하게 뛰어가 강서준을 말렸다. 강서준은 해인의 방에 있던 피규어, 만화책, 게임기 등 온갖 물건을 상자에 넣고 있었고 해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서준은 방해인의 부모가 고용한 오피스텔 관리인으로 3년째 방해인과 함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 도련님.’

해인이 서준의 팔뚝을 잡고 무슨 짓이냐는 듯 당황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서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사모님께서 당분간 전부 압수라고….’

‘네?’

’이 오피스텔에서도 나가라고….’

’네?’

’인성하고 지능을 뒤바꿔 왔느냐고, 철이 든 게 아니라 9살 애처럼 머리에 놀 생각밖에 없냐고 하셨습니다.’

‘네?!’

연속적으로 쏟아지는 충격적인 말들에 해인은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곤란함으로 물들어 갔다.

‘놀면서 할 건 다 하는 줄 알고 기뻐했던 자신이 미련하시다면서, 다음 학기 성적이 전처럼 4.0 안 넘으면 돌아올 생각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넋이 나간 해인에 서준이 짐짓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박스 가득히 채워지는 자신의 애장품들에 해인이 서준의 팔뚝을 잡고 도리질을 쳐 봤지만,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다.

‘도련님, 이번만큼은 사모님 말씀 들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학사 경고를 받으시는 건 좀 너무하셨네요. 사모님께서 자기 생애 이런 불명예스럽다 못해 수치스러운 우편은 처음 받아 보신다고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습니다.’

해인은 거기서 더 이상 서준을 막을 수 없었다.

이게 불과 하루 전 일이었다. 해인은 방해인의 부모가 이 정도로 일 처리가 빠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만큼 화가 나셨다는 건가.

게임기, 만화책, 피규어 등등을 다 압수당하고 나니 21인치 캐리어에 모든 짐이 다 들어갔다. 기본적인 생필품과 생활용품은 다행히도 미리 준비되어 있던 탓에 해인의 짐은 더욱 간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묵직하게 가라앉은 숨처럼 해인의 몸도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잘 있어…. 행복한 재벌 2세 라이프…. 즐거웠어…. 짐승의 숲 주민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바닥이 차갑고 딱딱해 느릿느릿 침대로 기어 올라간 해인은 하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폭신하고 항상 해인의 침구류에 쓰이던 섬유 유연제 향기와 보드라운 느낌에 해인은 잠시라도 현실 도피를 할 수 있었다. 베개에 파묻여 깜깜해진 시야 위에 오피스텔을 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슬쩍 돌려 바라본 풍경은 좁디 좁은 5평짜리 원룸일 뿐이었다. 해인은 책꽂이에 꽂힌 전공 책들을 쳐다봤다.

공정제어, 물리화학, 재료역학….

방해인은 이과였다. 그것도 하필 공대생. 전생에 지방 사립대 문과였던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었다.

심지어 성적도 차석! 서브공 주제에 지나치게 스펙이 좋긴 하다만 그래도 서브공이니 메인공한테 너무 딸리면 안 되니까, 게다가 열등감도 많은 설정이라 모든 일에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그 결과 방해인은 인성은 더러워도 공부만큼은 잘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해인은 망했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인문대생이었던 자신이 공대생, 그것도 3학년 과정을 짧은 순간에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때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학생들을, 그것도 명문대생들을 일개 평범한 인문대생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서 천재가 되지 않는 이상은.

다른 사람들은 빙의하면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을 다 알아서 떠올리던데 자신은 떠오르기는커녕 전생의 기억이 흐려지기만 한다.

정말 졸업할 때까지 이 좁은 원룸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방해인의 부모가 그 정도로 결단력이 있고 매정했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방해인의 부모는 방해인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이런 원룸에 박아 두지 않았다. 후반부에 외출 금지를 당하긴 했지만 돈도 없이 쫓아내지는 않았다. 방해인은 성격 나쁜 쓰레기 새끼였지만 집안에서는 제일 사랑받는 막둥이었으니까. 게다가 첫째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늦둥이라 집안에서 다 오냐오냐 키웠다.

그런데 겨우 성적 좀 낮아졌다고-좀이 아니긴 하긴 하지만- 이런 좁디좁은 원룸으로 쫓아낸다고?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에 해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2. (누르면 개거지가 될)꺼져!]

-[후회하실 거예요.]

누르면 개거지가 될…. 누르면 개거지…. 개거지•••.

“아.”

깨달음을 얻은 동시에 해인이 벌떡 일어나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들어서는 순간 작은 크기에 입꼬리가 추욱 잠깐 내려갔지만 이내 세면대 위에 걸린 거울을 빤히 쳐다봤다.

“네 짓이지?”

의심 가득한 목소리가 작은 화장실에서 울렸다. 오로지 자신만이 비추는 거울을 해인은 무엇이라도 있는 듯 확신에 찬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거울은 깜깜무소식일 뿐이었다.

“아닌가•••?”

혹시나 싶어 거울 위에 노크도 해 봤지만 탁한 울림만 좁은 공간을 채웠다. 설마, 오피스텔 욕실에서만 나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날도 오피스텔 욕실에서 말고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어쩐다. 해인은 잠시간 작은 거울을 쳐다보다가 일단 화장실을 나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몸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띠링-.

헉, 해인의 숨이 잠시 멎었다. 지금 그 무엇보다 원했던 소리였다. 아까까지의 짜증도 잊고 해인은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거울을 쳐다봤지만, 삽시간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여-, 개거지 하이^0^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쉬셨어요?]

“지금 그게 할 말이세요? 당장 제 인생 원래대로 돌려놔요!”

해인이 곧바로 거울 위를 손을 나름 위협적이게 짚고 눈도 치켜떴다.

[그러니까 내가 후회한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럼 거기서 누가 수락을 해요?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리면 어쩌려고!”

[이미 방해인 씨 인생은 이상한 것투성이 아닌가요?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게 뭐가 있다고. 게임 하나 참가 좀 해 줄 수도 있는 거지, 좀생이가 진짜.]

좀생이…. 해인은 겨우 ‘거절’ 좀 눌렀다고 남의 행복을 망가트린 것도 모자라 욕까지 하는 놈에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기 와서 이토록 화가 난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당장에라도 온갖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이 꿈틀거리고 목울대가 일렁였지만 해인은 참았다. 지금, 제 눈앞에 나타난 기이한 존재가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걸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능력을 쓴 건지는 몰라도 자신을 순식간에 개거지로 만들어버린 것 처럼 저 이상한 것은 상황을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예요. 그 게임에 참여하면 되는 거예요?”

언성을 절대 높이지 않으려 힘을 준 해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글쎄요. 그때 이미 다시 오질 않을 기회를 3번•••. 아니지, 4번이나 차 버린 건 개거지 씨잖아요. 제가 어떻게 다시 기회를 드리는 건데!]

“개거지라고 하지…!”

[지금 화내는 거예요?]

“하지 마요….”

25만원 있으니까…. 해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찌질해진 해인의 반응에 알 수 없는 존재는 비웃듯 [^0^, 그래요. 25만원 있는 개거지 방해인 님.]이라는 창을 띄울 뿐이었다.

거울을 짚은 해인의 한 손이 바르르 떨리며 쥐어지자 그쪽으로 화살표 하나가 떠올라 황급히 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잼잼을 하는 척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방법은 하나죠.]

[게임에 참가해서 퀘스트 보상을 얻는 것. 보상 중에는 돈도 있고, 소원권도 있거든요.]

“소원권?”

[네, 소원권.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는 소원권이죠. 사람을 없애 달라거나 누군가를 불행하게 해 달라거나 어떤 소원이든 대가 없이 전부 다.]

“그런 소원은 필요 없어요•••.”

[^0^ 그건 두고 보면 알고~ 어차피 소원권은 쉽게 나오지도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할래요?]

약 오르는 웃음 이모티콘을 빤히 노려보던 해인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해인은 겨우 반년 만에 자신의 게으르고 안락한 삶이 막을 내렸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학점 4.0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고 그래, 다시 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하는 거다. 게임이니까 중간에 그만둬도 상관없는 거잖아. 플레이어가 원할 때 종료할 수 있는 게 게임이었다. 그렇지?

해인은 굳은 다짐을 하며 비장하게 말했다.

“참가할래요. <그레비티 in dating sim>에.”

[원해요?]

“네. 원해요.”

[간절하게?]

해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울 위에 떠오른 숫자에 황급히 대답했다.

“네, 완전히 간절해요!”

[그럼 25만원 있는 개거지 방해인 님, “성심성의껏” 빌어 보세요. 그러다 내 마음이 동하면 생각해 볼게~^^]

“빌라고요•••?”

[네, 성심성의껏 무릎이라도 꿇어 보든가요 ^_^ 저도 제가 준 기회를 다 차버려서 속이 좀 상했거든요ㅠ.ㅠ]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문구에 해인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원해도 참여하는 게임도 아닌데 왜 자신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방해인은 본디가 날카롭게 생긴 인상이었다. 지금 그 날카로움이 표정이 어두워지자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해 놓고 나보고 무릎을 꿇으라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했다. 잠시간 정적 속에 갑자기 무릎을 꿇으라는 시스템창이 사라지고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무릎까지는 안 꿇어도….]

“꿇라면 꿇어야죠. 제발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소중한 기회를 못 알아보다니, 전 맞아야 해요! 에잇!”

해인은 자신의 이마를 팍팍 때리기까지 했다. 정말 비굴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해인에게 자존심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상관이 없었다.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해인의 모습을 본 시스템창은 바로 창을 바꾸었다.

띠링-.

[좋아요^0^ 방해인 님이 그토록 간절하다니 제가 다시 한번 더 기회를 드릴게요.]

저 개새끼…. 해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활짝 웃었다.

“감사해요!”

[그렇게 기뻐하니 저도 좋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레비티 in dating sim>에 참가하시겠습니까?]

[1. 예, 참가하겠습니다.]

[2. 아니요,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해인은 고민 없이 [1. 예, 참가하겠습니다.]로 손을 뻗었다. 투욱- 검지가 닿고 거울이 일렁였다.

작은 폭죽이 터지는 모션과 함께 화려한 창이 떠올랐다.

[<그레비티 in dating sim>에 참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해인 님. ]

우리 잠시간 이별이야, 행복했던 재벌 2세 라이프….

꼭 다시 보자….

해인은 울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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