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 번째 공략 인물
<그레비티 in dating sim>에 참여한 지 2일차, 어제 화장실에서 1시간 동안 서서 튜토리얼을 듣느라 다리가 조금 쑤셔 왔다. 튜토리얼이 그렇게 길 줄 알았으면 의자라도 가지고 들어갈 걸 그랬다.
<그레비티 in dating sim>의 규칙
1. 플레이어는 자신의 공략 인물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공략 인물은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자동 등록이 된다. 또한, 현실에서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택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본인 의지에 맡긴다.
2. 본 게임에 퀘스트 실패 시 리스크나 페널티는 없지만, <방해인> 플레이어는 규정에 맞지 않게 참여했기에 리스크와 페널티가 존재한다.
3. 퀘스트는 필수 퀘스트, 일반 퀘스트, 보너스 퀘스트, 히든 퀘스트가 존재한다. 이 중 꼭 해야 하는 건 ‘필수 퀘스트’만이다. 나머지는 선택 사항이다.
4. 달성하기로 한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는 게임을 종료할 수 없다. 중도 포기시, 페널티가 부여된다.
5.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달성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 또한 받은 보상에 관한 책임 역시 플레이어에게 전부 넘겨진다. 보상은 플레이어의 특성에 따라 바뀐다.
6. 게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밀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밀 발설에 대한 리스크는 모두 플레이어가 감당한다.
7. 플레이어의 안전은 플레이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시스템은 특수한 경우를 빼 놓고 개입하지 않는다.
8. 장기간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시 플레이어 자격을 박탈당한다. 단, 공략 인물의 경우 공략 인물에서는 삭제되지만 호감도는 초기화 되지 않는다. 또한 특정 획득 스킬 역시도 초기화 되지 않으며 다시 게임 참가를 원할 경우 특별 초대권을 받아야 한다.
+) 플레이어, 방해인은 특별한 경우로 참가했기에 리스크, 페널티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들만 요약하면 이 정도였다. 유흥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게임치고는 꽤 매정한 느낌이 나긴 했지만, 그래 봤자 연애 시뮬레이션이다. 서바이벌 게임이나 총 쏘는 게임도 아니니 크게 신변에 위협이 갈 만한 일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처음 꼬실 때는 페널티고 뭐고 없다고 했으면서 몇 번 거절 좀 했다고 페널티를 부여해 버렸다는 게 억울할 뿐이었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된 게임에서 처음 받은 해인의 퀘스트는 바로.
<필수 퀘스트>
[공략 인물을 찾고 등록하시오. (난이도★★)]
보상은.
“1,000원.”
이런 시발. 이제는 거울을 벗어나 허공에 떠 있는 창을 보며 해인은 넋을 놓았다. 1,000원, 1,000원이 대체 뭐냐고! 당장 길거리에 나가서 10분 동안 지나가는 사람에게 100원씩 달라고 해도 2,000원은 모으겠다.
말도 안 되게 사소한 보상에 해인은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공략 인물을 등록하는 게 말만 필수 퀘스트지 실상 게임 준비에 가까운 거라 무조건 해야 하는 거라 보상도 좋은 게 아니라는 시스템의 회유인 척하는 협박이 있고서야 해인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보다 공략 인물이라, 대체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거지.
해인은 허공에 뜬 상태 창을 이리저리 손으로 움직이며 살폈다. 게임을 워낙 좋아해서 다양한 게임을 하긴 했다. 그중에 미연시도 당연히 있었고. 하지만 보통은 공략 캐릭터 정도는 알려 주는데.
방금 일어나 살짝 부은 얼굴이 더욱 부루퉁해졌다. 이것저것 터치를 하니 대부분 쓸모없는 광고가 대다수였다.
[호감도 올리는 게 너무 불편하시다고요? 그렇다면 이 매혹의 포션을….]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커스터마이징 해 보세요! 단돈 천! 천만 원….]
광고들은 건너뛰고 해인은 낯선 시스템창들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플레이어 정보’란을 발견하곤 손을 가져다 대었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방해인(개거지)
나이: 22
키: 177
능력치
- 힘: 중하/ 외모: 최상/ 매력 지수: D
스킬
- 협박(희귀스킬): 화난 표정으로 윽박지르면 대부분 겁을 먹고 당신의 말을 따릅니다. (소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너 오타쿠니?: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1.8퍼센트 빠르게 호감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특이 사항
- 열성 알파
- 빙의자(희귀)
- 페널티 존재
자신의 상태창을 본 해인이 처음 떠올린 생각은.
“쓸모없네.”
정말 쓸모가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스킬이 있길래 기대했더니 스킬도 그다지 쓸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협박> 이건 아마 원작의 방해인 때문에 있는 스킬 같았고 <너 오타쿠니?> 이건…. 아마 도해인 자신에 의해 생긴 스킬 같았다.
해인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열린 모든 창들을 없애려는 찰나, 새로운 창 하나가 떠올랐다.
[시스템 알림]
플레이어 방해인 님의 퀘스트 보상은 플레이의 특성에 맞춰 과반수가 ‘금전’입니다.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 입금 받을 은행명과 계좌를 입력해 주세요.
‘플레이의 특성에 맞춰 과반수가 금전’
이 문구에 해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개거지’였다. 지금 개거지라고 보상이 금전이라는 거지. 자기가 돈도 없이 쫓겨나게 해 놓고 금전을 보상으로 준다는 말에 속이 쓰린 기분이었다.
자꾸만 허공에서 손이 멈칫거리다 결국 해인은 체념 섞인 한숨을 늘어지게 내쉬고는 마저 계좌 번호를 입력했다. 돈 준다는 데 이렇게 기분 나쁜 건 처음이었다. 정보를 다 적고 나니 예금주명과 계좌 번호가 다시 떠오르며 확인하라는 창이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예금주는 방해인이었고 해인은 떫은 눈으로 보다 확인을 눌렀다.
[시스템 알림]
상태창에서 잔액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탭을 추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플레이되시길 바랍니다. :)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촐싹거리던 시스템이 마치 다른 게임과 다를 바 없다는 듯 평범하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즐거운 플레이는 무슨 즐거운 플레이. 해인의 눈에는 지금 모든 게 아니꼽게 보였다.
창을 바로 닫았던 전과 달리 이번에는 한참이나 알림창을 노려봤지만 눈만 메말라 뻑뻑해질 뿐이었다. 결국 힘없이 알림창을 닫고 해인은 나갈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이 원룸은 학교와 5분 거리였으니 서성거리다 보면 한 명쯤은 얻어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 *
“아오, 더워.”
벌써 12시가 지나가는 시간에 햇빛은 아침보다 따가워졌다. 가끔 아는 얼굴들이 있어 다가가 말을 걸어 봤지만 대부분 놀라며 해인을 모른 척하기만 했다.
- 안녕하세요. 저랑 같은 수업 듣지 않았나요? 혹시 저랑 대화를 나눌 생각 없으신가요?
- 하하, 괜찮아요•••.
10명 중 6명은 이런 반응이었다. 이럴 때만큼은 방해인의 성격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어 씁쓸해지긴 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은 절에 다닌다며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해인은 밖에서 100원씩만 달라고 해도 2,000원을 모으겠다는 상상은 정말 상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상태면 1,000원도 아마 못 받았을 것이다.
점점 높아지는 온도와 습한 공기에 해인은 자판기에서 뽑은 이온 음료를 들이마셨다.
이대로 무작정 말을 걸다간 끝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퀘스트부터 이렇게 난이도가 높을 줄이야. 이게 다른 사람들도 하는 일반 게임이었더라면 검색해서 공략이라도 볼 텐데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 해인은 소설 속에서 게임으로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신들이 소설의 인물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소설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있다면 믿겠는가.
등나무 아래 멍하니 벤치에 몸을 기대고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역시 종강을 했어도 캠퍼스에는 꽤 많은 사람이 돌아다녔다.
공략 인물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저 모든 사람이 해인의 공략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설마?
해인은 몸을 벌떡 일으켜 이온음료를 전부 다 마시고 캔을 던져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빠른 걸음으로 캠퍼스를 벗어났다.
* * *
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안으로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 해인은 눅눅했던 몸이 상쾌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서 오세요…. 선배?”
캠퍼스에서 20분 거리, 학교 근처에 비해 인적이 드문 길목에는 작은 카페가 있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숨겨진 카페로 바로 <그레비티>의 메인수인 해빛이 일하는 카페였다.
주인공 버프인지, 손님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 해빛은 여기서 백담호와 진정으로 이어지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 오랜만이네.”
해인은 대충 카페 안을 살펴봤다. 역시나 손님은 두어 명 정도만 있고 대부분 빈 테이블이었다. 그야말로 해빛과 백담호만을 위한 공간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카페. 얼마나 딴짓하기도 좋고 또…. 또…. 몰래…. 해인의 시선이 저절로 카페에서 제일 길쭉한 테이블로 향했다. 소설 속 장소를 실제로 와 보니 읽었던 장면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만 같아 해인은 남 모르게 귀 끝을 붉혔다.
아무래도 세계관이 세계관이다 보니 <그레비티>는 꽤 수위가 높은 소설이었다. 낯부끄러운 상상에 혼자 민망해진 해인은 헛기침을 하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서해빛은 뜬금없는 해인의 방문에 적잖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선배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
어떻게 왔냐, 도 아니고 어쩐 일이냐는 질문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해인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마치 오면 안될 곳을 온 것 같은 반응 같았다. 하지만 애써 왔는데 다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해인은 조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너 보러 왔지.”
당당한 해인의 대답에 서해빛은 놀란 듯 눈썹을 들썩이다가 이내 살짝 웃고 말았다. 놀랄 줄은 알았지만 웃을 줄은 몰랐던 해인은 그 모습을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겨우 작게 웃은 것뿐이었는데 해빛은 청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해인은 어쩐지, 백담호가 결국 왜 해빛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방해인이 왜 해빛에게 빠졌는지도. 별거 아닌 풍경에도 서해빛이 있으면 그 공간은 조명이라도 켜진 듯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다. 해인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봤더라면 분명 잠시 숨이 멎었을 게 분명했다. 학교 말고 카페에서 서해빛을 봐서 그런가 기분이 왠지 모르게 묘했다.
“선배가 다시 여기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직 웃음기 가득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어딘가 아련했다. 다시 오실 줄은 몰랐다고…? 해인은 자신이 전에 여기에 온 적이 있나 생각해 봤지만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위치를 아는 것도 원작에서 봤던 가게 이름을 핸드폰에 검색했던 것뿐이다.
그럼 이건 자신이 빙의하기 전에 일인가.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방해인은 서해빛에게 관심을 보였으니 방해인은 전에도 이 카페에 왔었나 보네. 하지만 자신이 빙의했을 때가 소설 시작 시점이었는데•••.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인물들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겠지 싶어 넘겼다. 같은 과 선후배인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그리 생각한 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냥 오고 싶어서….”라고 얼버무렸고 해빛은 그저 묘한 낯으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해인은 멋쩍게 웃다가 메뉴판을 쳐다봤다. 반년 동안 돈이 넘치니 최대의 돈으로 최대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어느 식당을 가도 메뉴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살피게 되었다. 그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 해인은 먹을 게 정해져 있음에도 전 메뉴를 살피고 말았다.
요거트 스무디가 먹고 싶었지만 해인은 아쉬움을 감추고 말했다. 돈이 없으니 스무디는 사치였다. 게다가 아까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먹어서 더더욱 안 되었다.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이야.
“아아 하나만.”
“아아요?”
해인은 아무렇지 않게 주문한 것치고 해빛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뭐에 놀란 건지 동그란 눈으로 해인을 빤히 보다 이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의미 모를 그의 행동에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해빛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라고 되물었다. 물어보는 음성에서 ‘제대로 시킨 게 맞냐’라는 속뜻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요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안 먹나? 해인이 뻘한 생각을 하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응.”
“커피는 제가 살게요.”
“뭐? 왜 네가 사.”
해인이 손사래까지 치며 카드를 내밀었지만 해빛이 이미 자신의 카드로 결제하고 말았다. 결국 해인은 멋쩍게 웃으며 ‘고마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부러 카운터와 제일 가까운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해인은 멍하니 해빛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카페까지 찾아왔지만 아직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단순히 마주친다는 게 등록 조건이 아니거나 해빛이 공략 인물에 등록되지 않는 인물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레비티>를 기반으로 하는 연애 시뮬레이션이니 메인수인 해빛은 공략 인물에 안 들어갈 가능성도 충분했다. 해빛은 오로지 백담호를 위한 인물이었으며, 백담호 역시도 오직 해빛을 위한 인물이었으니까.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그들이 게임에서는 반대로 엑스트라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정보였다. 그럼에도 해인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2,500원 주고 살 다짐까지 하며 해빛을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만약, 해빛이 공략 인물이 된다면 해인에겐 손해보다 이득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서해빛의 반응만 보더라도 해빛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럼 기본 호감도도 낮지 않을 거고 올리기도 쉬울 것이다. 그다음으로 해인은 어차피 해빛과 친하게 지내면서 백담호를 자극해 주기로 했으니, 해인은 호감도 얻어 보상을 얻고 백담호도 자극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그러니 시도라도 해 보자. 사실 이미 해빛이 커피를 사 줘서 그가 아니더라도 손해는 없었다.
서해빛, 이 착해 빠진 녀석. 자신이 친한 척하는 건 단지 의무적일 뿐인데.
“선배,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어요.”
“아, 응 잘 마실게.”
해빛이 테이블에 유리잔을 내려놓자 해인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뭐가 등록 조건인지 모르니 일단 아무거나 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갑자기 손에 잡힌 해빛은 몸을 움찔거리며 의아한 눈으로 해인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연애 게임이니, 어느 정도 관심이 보일 법한 말을 해야겠지.
“근데 해빛아.”
“네…?”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해빛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해인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책상 아래의 다리가 더욱 달달 떨리고 있었다. 이게 맞는 걸까? 막상 입 밖으로 내 보려니까 어색해 괜히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
해인이 힘겹게 입을 연 순간이었다.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강하게 해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우리 꽤 친해졌는데 번호•••.”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백담호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해인이 토끼같이 눈을 뜨고 깜빡이며 붙잡힌 제 손목을 쳐다봤다.
그리고, 정적이 2초가량 더 흘렀을 때.
띠링-.
[첫 번째 공략 인물 등록 완료]
보상으로 1,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잔액란에서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해인은 제 머리 위에서 깜빡이는 시스템창을 쳐다봤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에 몇 번이고 노려봤지만, 시스템창은 더욱 충격적인 문구를 띄웠다.
[첫 번째 공략 인물 등록 완료]
공략 인물: 백담호.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현재는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됩니다.)]
“어…?”
백담호.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세 글자에 해인의 시선이 물 흐르듯 서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백담호에게로 옮겨졌다.
엉성하게 벌어진 입과 어딘가 허망해 보이는 눈빛에 백담호는 미간을 조금 좁혔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놀란 것도 아니었다. 마치 당황스러움과 절망이 뒤섞인 모호한, 그래, 정말 딱 그런 표정이었다.
자신이 나타난 게 그렇게까지 절망스러운 일인가, 내심 속으로 당황한 백담호는 기분이 나빠져 해인의 손을 던지듯 떨어트렸다.
“저 선배….”
제일 먼저 이 정적을 깨트려 준 건 다름 아닌 해빛이었다. 기이한 기류가 흐르는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해빛은 살짝 제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몇 없긴 했지만 손님들의 시선이 쏠려 해빛은 결국, 백담호를 조심스럽게 툭툭 쳤다. 그러자 백담호는 그나마 풀린 표정으로 해빛을 돌아봤다.
“어.”
“저…. 일단 앉아 주실 수 있나요.”
다들 쳐다봐요. 곤란함이 가득한 속삭임에 담호는 그제야 주변을 흘긋거리고는 군말 없이 해인의 앞자리에 앉았다. 옆 테이블도 아니고, 옆자리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빈자리도 아닌 해인의 앞자리에 떡하니 앉아 그를 빤히 쳐다봤다.
굳이 앞자리에 앉은 의도를 해인도 눈치채긴 했다. 얼른 꺼져라, 이 뜻이겠지. 하지만 해인은 이미 크나큰 충격을 먹은 터라 오히려 같이 백담호를 쳐다보고 말았다.
피하지도 않고 겹쳐지는 시선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단, 한쪽에서만. 백담호는 불쾌감을 전혀 감추지 않은 채 수장의 목을 벤 적군이라도 보듯 날 선 눈으로 해인을 노려봤다.
그 살벌한 눈빛에 해인은 이제 오금이 저리지 않았다. 다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스템창은 이제 알아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담호가 공략 인물로 등록된 현실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해인은 백담호의 머리 위에서 둥실 떠있는 긴 막대를 쳐다봤다. 그 막대는 속이 아주 까맣고 길었다. 그 막대의 위에는 ‘호감도’라는 글자와 두 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20. 그런데, 양수가 아니라 음수였다.
[호감도: -20]
세상에.
드르륵-. 해인이 벌떡 일어섰다. 여태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보다가 일어난 탓에 담호는 그 뜻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같이 일어섰다.
[호감도: -21]
미친, 해인은 가슴에 날카로운 것이라도 꽂힌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백담호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다 싫은 걸까.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것 같았다.
백담호의 머리 위를 쳐다보던 해인이 다시 백담호의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해인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백담호는 월등하게 컸다. 인상도 무뚝뚝하게 생긴 게 키도 크니 해인은 느껴지는 위압감에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싸우자는 거 아냐….”
해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백담호는 여전히 해인이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뒤쫓을 기세로 우뚝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수작이 뻔하다는 듯 비웃고 있었다.
역시 백담호하고 방해인은 얽히면 안 된다. 백담호는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려 하지도 않았고 가끔 뱉는 말들은 직설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능글맞아 짜증이 일기도 했다.
어느새 팔짱까지 끼고 있는 백담호에 해인은 앓는 소리를 내다 손사래까지 쳤다.
“아니, 나 진짜 그냥 갈 거야. 정말이야. 정말.”
공격 의사가 없다는 듯 해인은 살금살금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이 새끼 호랑이를 진정시키려는 사육사 같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오던 해빛은 생각했다.
딸랑-, 카페의 문이 열렸다. 해인이 나갔다는 뜻이었다. 그와 동시에 백담호의 머리 위에 뜬 호감도의 숫자가 바뀌었다.
[호감도: -20]
유리창 너머로 해빛은 백담호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고 있었다. 해빛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분홍빛으로 물든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해인이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과 다를 게 없는 풍경이 절망스러워 보이는 건 빙의 후 처음이었다.
“돌아 버리겠네.”
* * *
해인은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아니 암울한 현실과 천 원을 얻고 좁은 원룸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해인은 백담호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백담호
나이: 22
키: 189cm
등록 조건
- 플레이어와 3초 이상 접촉해야 한다. (옷 위, 물건을 통한 접촉은 인정하지 않는다.)
특이 사항
- 알파
- 희귀 공략 인물
플레이어와의 관계(호감도:-20)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 현재까지 열람할 수 있는 정보입니다.
플레이어와 3초 이상 접촉.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이상한 등록 조건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백담호라는, 왜 하필 백담호여야만 했나 싶어 해인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솔직히 접촉도 접촉마다 다른 거잖아. 적어도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접촉이라고 하면 우연히 닿은 손끝이라든가, 은근한 터치 같은 게 접촉이어야 하지 않을까.
백담호가 해인에게 한 것은 접촉이 아니라 청소라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백담호가 점점 관심이 생겨 가는 상대이자 미래의 연인이 될 해빛에게서 더러운 것을 치워 내는 그런 것.
아마 ‘고전 읽기와 토론’ 기말고사 대체 과제로 팀플을 하면서 백담호가 슬슬 해빛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을 것이다. 오늘 카페까지 찾아온 거면 말 다했다.
보면 볼수록 막막해지는 ‘백담호’ 정보창을 닫아 버리고 해인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벅벅 비비며 몰려오는 온갖 짜증과 허탈함을 풀어냈지만 그다지 소용없는 짓이었다.
입술과 코끝만 얼얼해질 뿐이었다.
“이건 꿈이야….”
아니야, 현실이야. 해인의 마음속에서 대답했다. 이게 현실인 걸 아는 것도 해인이었고, 꿈으로 치부하고 싶은 것도 해인이었다.
양립하는 두 마음에, 해인은 소설에 빙의한 지 반년 중 제일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이곳에서 한 제일 심각했던 고민은 불고기 매콤 파스타 세트를 먹을까 돼지고기 김치찌개 세트를 먹을까였다.
돈은 문제가 없었지만, 식욕에 비해 먹는 양이 많지 않아 한 끼에 두 가지 이상의 음식을 먹기 어려웠다. 저 문제로 해인은 약 1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닭갈비를 먹었다. 메뉴 고르기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모든 고민이 사라진 해인에게 그나마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그랬는데, 이제는 겨우 밥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게 되고 말아 버렸다. 밥이고 뭐고, 집에서 쫓겨나고, 갖고 있는 돈은 그동안 쓰던 것에 비하면 한 달을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해인이 고개를 슬쩍 돌려 책장에 꽂힌 온갖 서적을 쳐다봤다. 1학년 때 교재부터 3학년 1학기 교재까지 전부 있었다. 성적 오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는 방해인 어머님의 뜻임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공부하는 것과, 백담호와 친해지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
해인의 머릿속에 백담호가 등록되던 그 순간이 되살아났다.
번쩍하는 빛과 백담호의 머리 위에 생겨난 막대기와 호감도. 그의 처음 호감도는 -20이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21로 떨어졌다. 자신이 사라지자 호감도가 다시 -20이 되었다.
자신과 눈만 마주쳐도 싫다는 걸 아주 잘 알겠다. 사라지니 다시 회복되는 게 다행이긴 한데, 뒷맛이 떫었다. 해인, 자신이 딱히 백담호에게 -20만큼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인생 참, 쓰다.”
나직이 중얼거린, 해인은 책상 앞에 앉았다. 흐린 눈으로 1학년 교필이라는 대학 수학을 펼치고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타개책으로 공부라도 해 둬야지.
당장 다른 공략 인물을 찾는 방법도 있지만, 백담호가 이미 공략 인물 슬롯 하나를 차지하고 말았다. 해인이 등록할 수 있는 공략 인물은 단 3명, 이게 페널티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아무나 한 명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백담호가 등록된 이상, 아무나 등록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나가 아니라, 누구인지가 더 중요했다.
역시, 백담호랑 엮여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정도면 작가가 백담호랑 방해인을 악연으로 만들어 놓은 게 분명하다고 해인은 생각했다.
* * *
두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정확히는 짧으면서 길었다. 3학년 1학기 과정까지 독학하기에 지나치게 짧았고, 개강이 얼른 왔으면 하는 마음에 조급함이 들어 길게 느껴졌다. 그나마 좀 놀라웠던 건 막상 공부를 하긴 하니까 집중이 잘되었다. 오랜만에 공부를 해서 그런가.
결국 뭐 하나 이뤄 낸 거 없이 두 달이 지나 버렸다. 하지만 완전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창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중, 공략 인물의 호감도 달성시 별 얻을 수 있는 보상과 이벤트를 미리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무료는 아니었다. 보상을 미리 보려면 무려 5만원이나 지불해야 했다. 매달 25만원밖에 받지 않는 해인에게는 엄청난 지출이지만, 해인은 백담호 밑에 있는 ‘희귀’에 가능성을 걸기로 했다.
해인의 목표는 소원권. 쉽게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나 명색이 희귀 인물인데 있겠지 싶어 5만원을 과감하게 지불했다.
그리고 그 5만원은 제값을 했다.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겨우 호감도 10달성에 소원권이 있었던 것이다. 겨우 10에! 물론 초기 호감도가 -20이라 30을 올려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50이나 80같이 높은 호감도가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전에 쉽게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해인은 호감도 100에 있는 끔찍한 상상까지 했었기 때문에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백담호의 호감도를 단 10까지만 올리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해인은 지긋지긋한 전공 책을 덮었다.
드디어 개강 날, 해인은 깨끗하게 샤워도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었다.
방해인과 백담호는 같은 과, 같은 학년이기에 겹치는 과목이 많았다. 그래서 방해인이 더욱 백담호만 있을 때 시비를 걸기도 했고, 공부를 방해하기도 했다. 해인은 자신은 그럴 일이 없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설정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달랐다.
“안녕, 백담호. 오랜만이다.”
백담호의 앞에 서서 해인이 손을 흔들었다. 혼자 앉아 있던 백담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고, 곧바로.
[호감도 -22]
호감도가 한번에 -2나 떨어졌다.
존나, 진짜.
얼굴을 굳힌 백담호는 눈앞의 해인은 보이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해인도 그걸 예상했지만, 막상 겪으니 조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백담호에게 인사를 무시당한 것도 당한 거지만, 제게 쏠린 시선이 더욱 신경 쓰였기에 해인은 멋쩍게 웃으며 백담호와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앉기에는 백담호와 친해져야 하니 안 되고 그렇다고 바로 옆자리에 앉기에는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을 뻗었을 때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길이. 그게 해인이 현재 백담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마저도 백담호는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해인이 뜬금없이 백담호에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 모든 학부생이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해인이 얌전히 자리에 앉자 수많은 시선은 경악과 함께 슬금슬금 사라져 갔다.
수업이 시작하기 5분 전, 해인은 멍하니 하얀 칠판을 쳐다봤다가 옆에 앉은 백담호를 몰래 힐끗거렸다. 대체 저 살벌한 녀석하고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해인은 제 평생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 고민에 골치가 아파졌다. 백담호는 정말 다가가기 어려운 전형적인 성격이었다. 아마 전생의 자신도 저런 타입을 만나면 굳이 나서서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미 사이가 나쁠 대로 나쁜 사람 몸으로 친해지라니.
방해인과 백담호, 정확히 둘이 언제부터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고등학교 때라고 추정했다. 백담호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방해인이 항상 치근덕거렸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정도. 이때부터 알았는데도 사이가 지금 이 모양인데 둘이 친해지라고…. 해인이 다시금 백담호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몸을 움찔거리며 재빨리 정면을 쳐다봤다.
분명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딴 곳을 보고 있을 줄 알았던 백담호의 눈이 해인과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까만 눈동자에는 냉기가 서려 있어 해인은 당황감에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한번 해인에게 붙은 검은 시선은 떨어지지 않고 집요하게 해인을 꿰뚫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렇게 다가서는 건 역시 너무 무리였던 걸까.
자신이라도 예전에는 시비만 걸고, 반년 전부터는 쌩 까던 녀석이 친한 척을 하면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하물며 백담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그렇다고 해서 해인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의 목표는 최대한 빠르게 소원권을 얻는 것이니까.
물론, 백담호에게만 목을 맬 생각은 없었다. 아직 2명 더 등록할 수 있으니 공략해 보다가 도무지 안 될 것 같으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레비티>의 메인공인 백담호가 등록이 가능하니, 분명 해빛도 가능할 것이다. 조건은 모르겠지만 백담호의 등록 조건을 보니 아마 무작위로 설정되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메인공인 백담호가 희귀 공략 인물이면 메인수인 해빛도 필시 희귀 공략 인물일 터, 일단 지금 당장 눈앞에 떨어진 백담호라도 간을 보고 안 되면 바로 해빛에게 넘어간다. 이것이 해인이 세운 허술한 계획이었다.
“야.”
제 처지가 불쌍해 먹먹해지던 찰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해인은 몇 번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애매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응?”
백담호는 커다란 제 손으로 턱을 괸 채 해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했고 경계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자신에게 묻는 걸까. 말끝이 올라가지 않았고 소리도 중얼거리듯 작았다. 대답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해인은 그저 여전히 어설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됐다.”
그 꼴에 못 볼 걸 봤다는 듯 백담호는 고개를 돌려 버림과 동시에 백담호의 머리 위의 숫자가 깜빡거렸다.
[호감도 -21]
고개를 돌리자마자 올라가는 호감도에 어색하게 웃던 해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쟤를 만날 때마다 얼굴을 가릴 수도 없고.
* * *
“안녕, 백담호.”
화요일 오전이었다. 해인은 예전에 인터넷에서 산, 머리를 작아 보이게 해 준다는 볼 캡을 사서 꾹 눌러썼다. 억지로 누를 필요도 없이 워낙 큰 폭이라 얼굴이 반 이상 가려졌다. 전에 썼다가 앞이 안 보여서 벽장에 처박아 둔 걸 이리 쓸 줄은 몰랐다.
얼굴을 가린다고 백담호 호감도가 안 떨어질까 싶었는데, 지나가는 척 슬쩍 모자를 올리고 본 백담호의 호감도는.
[호감도 -21]
오, 이게 통하네? 인사하자마자 -2나 떨어졌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그대로였다.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에 정신이 팔려 그의 얼굴이 무척 이상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어제처럼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은 해인을 백담호는 눈썹을 찡그리고 위아래로 흘겨보고 있었다.
“저게 미쳤나….”
백담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해인과 백담호가 겹치는 수업이 있는 날은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딱 네 번이었다. 해인이 수요일에 공강인 걸 감안하면 거의 백담호와 똑같은 시간표라고 할 수 있었다.
전부 시스템이 수강 신청 15분 전에 보내 준 백담호의 시간표 덕분이었다. 물론 쉽게 얻은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깜짝 퀘스트’라며 백담호의 시간표를 보내 주면서 똑같이 성공하라는 창이 떠올랐다. 비몽사몽한 채로 집에서 대충 끝내려고 했던 수강 신청이었지만 정말 이름처럼 ‘깜짝’을 넘어서 식겁한 해인은 그대로 근처 피시방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필 전 주에 미리 장바구니에 담아 둔 것도 전혀 달랐다. 같은 전필 과목이라도 분반을 다르게 해 해인은 갑자기 장바구니에 담아 둔 게 전혀 소용이 없어져 버려 그날은 아침부터 스릴 넘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교양까지 잡으려고 전체 학년 수강 신청 날까지도 끙끙거린 결과 월, 화, 목, 금을 겹칠 수 있었다.
백담호의 시간표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 퀘스트는 성공하지 못했다. 깜짝 퀘스트라서 그런지 실패해도 페널티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있었더라면 이 게임은 정말 양아치를 넘어서 인성 파탄이었다. 이미 비슷하긴 했지만.
수강 신청 15분 전에 준 건 괘씸하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면 월요일 하루만 겹칠 뻔했다. 결과적으로 백담호와 시간표가 많이 비슷해졌기에 해인은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니 백담호가 해인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수업이 겹쳤을 때는 백담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두 개쯤 겹치는 일이야, 흔했으니까.
하지만 월요일이 겹치고 화요일도 겹치고 목요일, 금요일, 심지어 필수가 아닌 교양까지 겹쳐 버리자 백담호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 갔다.
“너도 이거 듣는구나?”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에 방해인은 오히려 너스레를 떨며 백담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반년 전부터 마주쳐도 못 본 척하고 지나치고 서해빛하고 붙어 다니는 거 빼고 얌전하길래, 이제 같잖게 수작질 부리는 걸 그만뒀나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겹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시간표가 겹친다.
어이없다 못해 짜증까지 치미는 상황에 백담호는 해인의 까만 모자를 계속 노려봤다. 차라리 보이지도 않게 멀리 떨어져 앉든가 하지 애매하게 시선이 걸치는 자리에 앉는 게 더 거슬렸다. 서로의 말소리는 들려도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자리 선택은 분명 의도적인 게 분명했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써 입만 보인 채 자신을 쳐다보며 또 말을 건넬 것이다. 그간의 이상 행동 때문에 백담호는 방해인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학기에 우리 겹치는 게 꽤 많은가 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억지로 웃는 게 뻔한 어정쩡한 입꼬리가 보여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볼 캡에 가려진 방해인의 눈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게 뻔했다.
개강 첫날이라 미쳤나 싶었더니, 그냥 미친 거였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방해인은 빼놓지 않고 마주칠 때마다 꼭 백담호에게 짧은 말을 건넸다. 주로 영양가 없고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었고 그래서 백담호는 더 기가 찼다.
바로 지금처럼.
“이거 과제도 채점 기준이 이상해서 별로라던데.”
벌써 세 번째, 방해인이 백담호에게 말을 건넸다. 이 교양이 개 같다든지, 교수가 기분파에 차별이 심하다는 건 자신도 다른 사람한테 들어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니, 아마 이 강의실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 사실을 방해인은 굳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쓸모없는 말들에 단 한 번도 대답이 돌아온 적이 없는데도 방해인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 가려는 노력이 뻔히 보였다. 방해인의 행동이 바뀔 때는 한 가지뿐이었다.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엿 먹이려고 할 때.
방해인은 자기 할 말은 다했는지, 아니면 반응이 없어서 그만둔 건지 어느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원래도 작은 머리통이 어디서 산 건지 존나 큰 볼 캡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예전의 방해인은 같잖은 짓을 일삼았다. 뒤에서 다 들리게 욕을 한다든가, 경멸하듯 노려보며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험 기간만 되면 꼭 근처에 앉아 소란스럽게 굴었다.
방해인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탐탁치 않아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귀엽게 봐줄 수준이었지만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방해인의 행패는 백담호의 신경을 살살 건드렸다.
그는 얌전하다가 갑자기 혼자 수틀리면 난리를 떨었으니. 예전에는 참다 참다 방해인의 부모에게 진지하게 방해인이 정신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백담호가 짜증이 날 대로 나 백담호가 중학교 때 복도에서 방해인을 한 대 갈긴 적도 있었는데, 방해인은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딱 맞기 직전까지만 치고 빠지며 더 집요해졌다. 대학에 오면 벗어날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기어코 대학까지 같은 곳에 와 버렸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방해인은 그전과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야리기는커녕 얼굴을 전부 가린 채 인사를 건넸고 떽떽거리며 욕하는 것보단 조곤조곤 말을 걸어왔다. 반년 동안 자신은 무시하고 서해빛하고 붙어 다니면서 심사를 뒤틀리게 하더니 이제 그 경로를 틀은 걸까.
매일같이 답지 않게 다정한 척 웃으면서 서해빛한테만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아니, 잘된 건가. 백담호는 미묘한 눈빛으로 해인을 빤히 쳐다봤다. 그나마 멀쩡했던 허우대마저 뭐가 그리 가리고 싶은지 시커멓게 입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길래. 입밖에 안 보였던 앞얼굴과 달리 옆얼굴은 꽤 많이 드러나 있었다.
뭘 그리 열중하는지 자신이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입을 꾹 다물고 엄지만 움직이고 있다. 대체 이번엔 뭔 짓거리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하는 짓만 보면 자신을 괴롭히고 싶어 하는 것 보단 꼭 관심이라도 받고 싶다는 듯 굴고 있었다. 이것도 방해인이 그러니 좆같긴 했지만 백담호는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분명, 개좆같은 짓거리일 텐데. 그럼에도 그 좆같은 짓거리에 어울려 주고 싶은 건 이번엔 하는 짓이 색달라서 그런가.
백담호는 호기심이 동했다. 평생을 가도 안 그럴 것 같던 방해인이 그러니 불쾌한 관심이 쏠렸다. 방해인과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는 걸 알았다. 하지만 백담호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러게. 과제도 좆같고 수업도 좆같다는데 너도 이걸 듣네?”
백담호가 처음으로 해인의 말에 대답했다. 할 것도 없는 휴대폰 화면만 괜히 옆으로 넘기던 해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시야가 반쯤 가려 입만 보였지만, 백담호가 지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 어?”
벌써 대답할 거라는 예상은 못 했기에 해인은 버벅거리며 되묻고 말았다. 정말 얼빵해 보였을 텐데 백담호는 웃지도 않고 친절하게도 다시 말해 줬다.
“과제도 좆같고, 수업도 좆같은데, 너는 왜 이걸 듣냐고.”
해인은 이 순간 제 얼굴이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넓은 모자챙이 가리지 않았더라면 얼빠진 제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을 것이다.
“어……. 난 좆같지는 않고 교양 들어야 하는데 이거 꽉 안 찼길래.”
반은 거짓이었고 반은 진실이었다. 해인이 교양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거짓이었고 이 수업의 수강 인원이 널널한 것이 진실이었다. 힘들기로 소문난 교양이라 전체 수강 신청 날이라도 해인이 잡을 수 있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인은 당장 백담호의 호감도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백담호의 시선이 아직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기에 슬며시 고개를 돌려 인물 정보를 보려던 찰나였다.
“그렇구나. 좆같네.”
백담호치고는 퍽 부드러운 어투였다. 뒤에 붙은 말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 좆같다는 말이 자신한테 하는 걸까, 그저 감탄사일까. 고민하는 순간 눈앞에 새로운 창이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떠올랐다.
[필수 퀘스트 (난이도★★★)]
시작이 뭐가 중요합니까, 관심만 보이면 되는 거지요! 공략 인물 <백담호>가 당신의 도발에 넘어갔습니다.
알면서 당신의 계략에 넘어가 버린 그! 도발하다 눈 맞고, 눈 맞으면 뽀뽀하고, 뽀뽀하면 사귀고? 이제 곧 연애 시작인가요? 서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혀 보세요! 단, 몸싸움은 안 돼요~ 밤에는 빼고!
-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 앉기. (0hr/50hr)
- 보상: ?
* 호감도가 떨어지면 안 됩니다.
* 필수 퀘스트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은 경우, 치명적 페널티를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