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번째 퀘스트
이 게임은 정말.
“뜬금없이 시작한다.”
해인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고 시스템창을 제대로 훑었다. 그러다 발견한 어이없는 단어에 해인은 미간을 팍 찡그렸다.
‘도발’. 대체 자신이 백담호한테 도발을 언제 했다고.
해인은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말을 계속 씹다가 겨우 대답한 게 비아냥인 백담호가 되레 저를 도발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친해지려고 인사도 해 보고, 나름 쓸데없는 말도 건네 본 것뿐이었다.
대체 어느 부분이 도발인지 몰라 해인은 내심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퀘스트창에 써진 단어가 바뀔 리는 만무했다.
“선배?”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해인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만난 줄 몰랐다는 듯 부드럽게 눈매를 접은 해빛이 서 있었다. 놀란 해빛과 달리 해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백담호가 이런 거지 같은 교양을 들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었다.
“어, 해빛이. 안녕.”
해인이 모자를 살짝 내리고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인사를 평소처럼 밝게 받아 주기엔 백담호 눈치가 보였고 씹자니 다음 공략 인물로 해빛을 등록해야 하니 그럴 수 없었다.
“오늘은 뭔가 기분이 별로처럼 보이네요.”
해빛은 백담호를 발견도 못 한 건지 해인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탓에 되레 놀란 건 해인이었다. 늘 앞쪽에 앉았던 그였다. 게다가 지금 상황이 얼마나 백담호에게 아니꼬워 보일지 알아 해인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 왜….”
마주친 옅은 눈동자에 미묘하게 백담호가 담긴 걸 해인은 봐 버렸다. 해빛은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눈에 담은 건 백담호였다. 그가 왜 굳이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자신 옆에 앉는지 깨달아 해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해빛이 중반인가 후반쯤에는 가끔씩 백담호 근처에 앉았던 것 같기도 했다.
“네?”
“아무것도 아냐.”
해인은 앞으로 수그렸던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해빛과 백담호 사이를 자신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인이 비키자마자 해빛의 시선은 한곳을 계속 응시했다. 자신의 게임도 중요하긴 했지만, 운명인 둘 사이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옆을 보지 않아도 해빛의 얼굴이 그때 카페에서 봤던 것처럼 상기되어 있을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해인은 곁눈질로 해빛을 슬쩍 쳐다봤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최소한이지만 해인이 원작의 방해인 역할을 해 준 덕에 서해빛은 담호에 대한 설렘을 오래 느낄 수 있었다.
해인은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때였다. 해빛이 고개를 살짝 꾸뻑였다. 백담호가 드디어 해빛 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도 이거 들으시는구나….”
가까이 앉은 해인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응, 그러게.”
무뚝뚝하긴 했지만, 해인에게 말할 때 비해서는 훨씬 부드럽고 나긋한 대답이었다.
장난기 하나 없이 담담한 대꾸에 해인은 해빛과 백담호 사이에 별다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본 날, 아마 머지않아 둘 사이에 큰 변화가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 큰 변화를 말하려면 19금으로 넘어가야 해 해인은 생각을 멈췄다.
해인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백담호를 쳐다봤다. 모자가 푹 눌려져 있어 자세히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표정 같다고 추측하던 때였다.
“너도 이 수업 좆같은데 듣네?”
콜록, 혼자서 딴 생각하던 해인이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네? 이 수업 별로인가요?”
해빛이 되물었다. 아무래도 강의평 따위는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역시 해맑은 메인수다웠다. 해맑은 건가. 강의평이 아니라 악플러들만 모인 거 같던데. 그걸 안 봤네.
“어, 존나 좆같아.”
백담호도 자신이 말해 줘서 안 주제에 마치 원래부터 알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해인은 그 탓에 살짝 의문이 들었다. 귀에 잘 새겨들었으면서, 왜 그리 말투는 띠꺼웠던 거지.
“선배, 이 수업 좆같대요.”
그 와중에 해빛은 순수하게 걱정되는 투로 해인에게 소곤소곤 말을 건넸다. 자신이 둘의 대화를 못 들었을 거로 생각하는 건가.
“으응.”
그래도 해인은 모르는 척 대답해 줬다.
* * *
내가 미쳤지. 해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도 수강 철회해야 하는 걸까? 해인은 점점 앞으로 꼬꾸라지는 머리를 슬쩍 오른쪽으로 돌렸다. 서해빛은 지치지도 않는지, 수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 똑같이 집중한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을 시작한 지 1시간 40분째. 끝나려면 1시간 10분이나 더 남았다. 왜 이 강의평에 다들 그리 비난을 했는지 해인은 몸소 느꼈다.
교수님…. 이건 아니죠….
나이도 환갑을 넘으신 것 같은 교수님은 당장 ASMR로 틀어도 될 법한 목소리로 쉬지 않고 달리고 계셨다. 게다가 그 중 1/3은 자기 자랑이었다.
“존나…. 폭주 기관차도 아니고….”
해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책상에 얼굴을 박자 커다란 볼 캡이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엉덩이도 아프고 에어컨 바로 앞이라 몸은 점점 차게 식어 가고 있었다.
아침에 얇은 겉옷을 챙기는 걸 깜빡했다. 다른 수업에는 에어컨 온도를 23도 정도로 맞춰 놓아 별로 춥지 않았지만, 이번엔 전에 들었던 더위를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18도, 강풍으로 내려놓고 갔나 보다.
해인은 제 팔뚝에 소름이 돋아 살살 문질렀다.
“선배, 추우세요?”
열심히 필기하던 해빛이 고개를 조금 숙여 물었다. 해인은 책상에 박았던 고개를 돌려 해빛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춥네.”
해인이 대답했지만 해빛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입을 다문 채 제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심각한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서해빛?”
“아, 죄송해요. 그럼 에어컨 끌까요? 꺼야 할 것 같은데요.”
“아냐, 아직 앞쪽은 더운 거 같은데. 좀만 버텨야지.”
해인의 말에 해빛이 앞쪽에 앉은 사람들을 쳐다봤다. 간혹 손으로 부채질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이긴 했다. 정말 소수의.
“음, 제 겉옷이라도 벗어 드릴까요? 의자에 걸어두면 바닥에 쓸릴 까봐 입고 있었거든요.”
자신이랑 똑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애써 이유까지 지어내 벗어 주겠다는 말이 꽤 귀엽고 감동이었지만 해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서라, 너보단 내가 더 튼튼해.”
해인이 얇은 카디건 위로 드러난 서해빛의 하얀 손목을 툭툭 건드렸다. 비실비실한다고 놀리는 듯한 손짓이었지만 정작 해인의 손목도 그리 굵지 않았다.
하지만 서해빛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곤란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추운 게 그렇게 걱정되는가 싶어 해인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해빛은 따라 웃지 않았다.
두어 번 손목의 튀어나온 뼈를 건드리다 해인은 몸을 일으키곤 모자를 제대로 썼다. 좀만 버틴다고 말은 했지만 아무래도 밖에 잠시 나갔다가 와야 할 성싶었다.
갑자기 해인이 모자까지 고쳐 쓰자, 해빛이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봤다.
“화장실 갔다 오게.”
그리 말하며 슬쩍 혼자 떠드는 교수를 보다 해인은 조용하게 문으로 걸어갔다. 뒷자리라 나가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아.”
거울을 본 해인은 그제야 왜 해빛이 자신을 그리 심각한 표정으로 봤는지 깨달았다.
입술이 파랬고, 낯빛은 창백했다. 제 몰골이 엉망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갑자기 뼛속까지 한기가 몰아치는 것 같아 몸이 덜덜 떨렸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웃겼을지 상상이 가서 열이 올랐다.
이런 몰골로 너보다 내가 더 튼튼하다고 말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몸은 추운데, 얼굴은 너무 뜨거웠다.
화장실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얼굴을 보니 지금 바로 들어가면 분명 저체온증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해인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봤다. 2시 41분,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4시쯤이니까 3시에 들어가야겠다. 어차피 방금까지 교수는 자기 젊을 적 대학원에서 명성을 휘날렸을 때를 떠들고 있었다.
휴대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으면서 해인은 앞으로 금요일에는 겉옷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을 때우는 동안 딱히 있을 곳이 없어 커다란 거울을 멍하니 보다가 제 머리 위로 비추는 햇볕이 따사로웠다. 그래서 해인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해인은 멍하니 서 있었다. 까맣고 커다란 모자 위가 후끈 달아오를 때 즈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해인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반쯤 감긴 눈으로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화장실에서도 조나 봐.”
해인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거울에는 백담호가 이상한 눈초리로 해인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의 머리 위에는 [호감도-23]이 까맣게 떠 있었다.
해빛이 제 옆에 앉는 순간부터 예상은 했다지만, -2나 떨어질 줄은 몰랐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백담호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뭘 봐.”
자신을 본다고 착각한 건지 백담호가 삐뚜름하게 입매를 틀어 올렸다. 해인은 또 호감도가 떨어질라 모자를 더욱 푹 눌러쓰고 말했다.
“아냐, 미안. 안 볼게.”
더 이상 이곳에 있기에는 그른 거 같아 해인은 따사로운 햇볕이 아쉽지만, 몸을 돌렸다. 이렇게 호감도가 팍팍 떨어지는데 대체 어떻게 옆자리에 앉아야 할까, 이번 학기 안에는 성공할 수 있는 퀘스트일까.
“야.”
“응?”
해인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백담호를 쳐다봤다. 그래 봤자 모자챙에 시야가 가려 턱과 가슴팍밖에 안 보였지만 해인은 백담호의 얼굴이 보이는 척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부른 백담호는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해인은 제 대답을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 한번 대답했다.
“왜?”
“입이 왜 이래, 곧 뒤지겠어.”
“아.”
아까보다는 혈색이 돌아왔지만 아직은 조금 푸르스름할 것이다. 해인은 추워서 그랬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곧바로 제 턱을 우악스럽게 잡는 커다란 손에 나오던 말소리는 쏙 들어가 버렸다.
드러난 그는 뜻밖에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해인과 두 눈이 마주치니 더욱 미간을 좁혀보였다. 백담호의 눈에까시 제 몰골이 안 좋아 보이는 걸까.
“설마, 에어컨 바람 때문에?”
“어…. 그렇지?”
생각보다 제 턱을 오랫동안 잡고 이리 저리 살피는 행동에 해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계속 이리 저리 굴렸다. 지금 백담호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가 싶어 해인이 떨떠름해지려는 찰나였다.
“뭐 하러 갑자기 뒷자리에나 앉아서는. 병신 같긴.”
그럼 그렇지, 백담호는 비웃듯 실소를 뱉고는 그대로 해인의 턱을 놓았다. 턱이 놓이고 다시 백담호의 얼굴이 모자챙에 가려졌지만 해인은 똑똑히 봤다.
[호감도 -21]
제가 눈앞에 있는데도 처음으로 백담호의 호감도가 올라가는 걸.
그것도 +2나.
해인이 모자를 들어 올리고 다시 백담호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호감도 -21]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 위의 숫자는 그대로[-21]였다. 해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입매는 주책없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까만 눈동자가 제 얼굴을 얼마나 빤히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해인은 웃음을 꽉 억누르며 얼굴에 힘을 줬다.
“안 본다며.”
가볍게 퍽 치는 소리와 함께 해인의 모자챙이 아래로 푹 내려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해인은 황급히 괜히 볼 캡을 꽉 누르며 아무 말이나 얼버무렸다.
“아, 미안. 내가 착각했나 싶어서.”
“뭘?”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호감’까지 뱉었다가 황급히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혹시라도 제대로 말하라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찰나에 백담호는 몸을 돌려 버렸다.
해인은 그가 서너 걸음 멀어졌을 즈음에야, 고개를 들어 올리고 빤짝거리는 눈으로 [호감도-21]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호감도가 마이너스라서 그런지 몰라도, 백담호의 호감도 변화는 정말 들쭉날쭉했다. 가끔은 호감도가 아니라 감정 상태를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그를 기분 좋게 만들면 더 확 뛰어오르지 않을까.
에어컨 바람에 입술이 파래진 내 꼴을 보고 호감도가 오른 것처럼. 내가 병신 같을 때 기분이 좋은 건가.
* * *
“안녕. 백담호.”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백담호는 무심하게 해인을 보고는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해인도 이제는 익숙한 반응에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향했다. 다만 모자를 살짝 들어 그의 머리 위만 확인할 뿐이었다.
[호감도 -20]
그 짧은 사이, 백담호의 호감도가 올라가 처음 설정된 숫자가 되었다. 해인이 오르는 순간을 보지 못했기에 아마 주말 때 자신을 보지 않아 올랐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수 있었다.
벌써 개강한 지 8일이 지난 시점, 해인은 원래 자기가 앉던 자리로 향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이 강의실은 책상이 길었다. 두 자리씩 떨어지지 않았다. 해인은 재빠르게 백담호와 한 자리 떨어진 그 자리를 쳐다봤다. 원래라면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을 해인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모자에 얼굴이 가려진 탓에 해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 속의 눈동자는 발발 떨리고 있었고 입매는 굳어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백담호의 호감도만 확인하면 되었다.
고개만 돌리면 바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해인은 겨우 한자리 좁아진 게 뭐가 그리 긴장되는지 번거롭게 시스템창을 열고 공략인물 정보를 열람했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백담호
나이: 22
키: 189cm
등록 조건
-플레이어와 3초 이상 접촉해야 한다. (옷 위, 물건을 통한 접촉은 인정하지 않는다.)
특이 사항
- 알파
-희귀 공략 인물
플레이어와의 관계 (호감도:-20)
도발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점점 신경이 쏠리기 시작합니다.
*현재까지 열람할 수 있는 정보입니다.
호감도가 그대로인 걸 확인하자마자 해인의 마음이 한결 놓였다. 백담호가 한 자리 좁아진 걸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하긴 자신 같아도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옆자리라면 모르겠지만.
해인은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그 자리, 엉덩이 한 번만 들었다가 놓으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평소처럼 고개를 돌리는데도 해인은 그 순간이 무척 느리게 느껴졌다.
드디어 얼굴이 완전히 옆으로 돌아갔고 해인의 시선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에게 향했다. 언제부터 자신을 향해 있었던 건지 가려진 시야 아래 백담호의 하관이 정면으로 보였다. 챙에 눈코가 전부 보이지 않은 탓일까. 그의 일자로 다물어져 있는 입술로 시선이 쏠렸다. 그렇게 해인이 쳐다보기를 2초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안녕.”
인사를 하는 백담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낮았다.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볼 캡을 위로 들어 올렸고 드러난 해인의 표정은 굳이 나쁘게 말하자면…. 멍청해 보였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속을 걸어오느라 볼은 우습게 붉었고 반쯤 벌어진 입에 동공은 더없이 커져 있었다.
[호감도 -19]
방해물 없이 마주한 백담호는 즐거운 건지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지만, 그가 해인에게 양쪽 입매를 올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해인이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사이, 백담호가 먼저 운을 뗐다. 해인이 먼저 말을 걸어도 대답을 들을 확률이 40퍼센트였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무척 놀라운 상황이었다.
해인은 눈을 깜빡이며 백담호를 쳐다봤다.
“그 좆같은 모자는 왜 쓰고 다녀?”
“아.”
백담호가 좋은 말을 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해인은 왠지 모르게 신선함, 그런 부류의 감정을 느꼈다.
해인은 검은 볼 캡을 만지작거렸다. 쓰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모자한테 머리를 잡아먹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크긴 했다.
“좆같아?”
해인이 되묻자 백담호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존나.”
백담호는 단호했다. 그렇게 이상한가. 해인은 자신이 모자를 쓴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쓰는 순간 시야의 반이 사라지는데 볼 수 있을 리가.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안 쓰고 다니게?”
“그러지, 뭐.”
백담호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해인은 당연하게 대답했지만 정작 백담호는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눈가를 찡그리던 백담호는 결국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려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렴풋이 해인의 귓가에 ‘존나 로맨틱하네. 시발.’ 하는 소리가 들려와 해인은 슬쩍 호감도를 살폈다.
[호감도 -18]
또 올라가 있었다.
로맨틱. 그래 로맨틱. 해인의 머리에 로맨틱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뇌리에 박혔다.
백담호는 다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뚝뚝하다 못해 가끔, 자주 욕도 하는 성격 나쁜 새끼였지만, 마지막에는 누구보다 달은 말을 해 주고 해빛을 소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사실은 백담호는 로맨틱한 걸 좋아한다는 걸까. 정확히는 병신 같고 로맨틱한 걸 좋아한다는 것일까.
그게 대체 뭘까. 해인은 자신이 아는 백담호에 대한 기억을 다시 상기하며 볼 캡을 다시 눌러쓰는 쪽을 택했다. 비록 백담호가 좆같다고 욕을 하긴 했지만 해인은 그의 말보단 호감도를 믿었다. 볼 캡을 썼다고 호감도가 내려간 적은 없지만, 볼 캡은 안 썼을 때 내려간 적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백담호에게 애초에 볼 캡을 쓴 것도 너 때문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머릿속에 ‘존나 로맨틱하네. 시발.’이라고 말하는 백담호의 목소리가 재생될 뿐이었다.
* * *
기다란 책상과 달리 고등학교처럼 두 자리씩 붙은 책상들을 해인은 이리저리 살폈다. 당연히 백담호 주위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고 원래라면 해인도 백담호가 앉은 다음 분단 의자에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거기에 앉자니 어쩐지 해인만 아는 둘의 거리감이 멀어지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백담호에게 로맨틱해야 한다. 백팩을 앞쪽으로 메고 해인은 가방 속으로 손을 넣었다.
방금 복도에서 뽑은 탄산음료는 무척 차가워 손끝에 닿자 목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해인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백담호의 대각선 앞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자리에 앉기에는 수업 내내 등 뒤가 불안할 것 같았고 옆자리에 앉기에는 너무 진도가 빨랐다.
자리에 앉은 해인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재빠르게 탄산음료를 꺼내 백담호의 책상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안녕. 오늘 덥더라.”
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표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해인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백담호는 묘한 눈으로 캔을 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백담호의 호감도는 변하지 않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캔 윗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캔을 따려는 의도보다는 이게 지금 무엇인가 하는 그런 손짓이었다.
“스*라이트야.”
재벌이라 모르나 싶어 해인은 친절하게 알려 줬다. 로맨틱의 기본 철칙은 다정함이었으니까. 하지만 잘못 짚은 거였던 걸까, 캔을 건들던 백담호가 자신을 쳐다봤을 땐 그리 좋은 눈빛이 아니었다.
“그걸 지금 내가 몰라서 이럴까.”
“아.”
하긴. 모르는 것도 조금 웃기긴 했다. 해인은 자신이 좀 지나쳤던 것 같아 ‘미안.’이라고 덧붙였지만 백담호의 기색은 여전히 묘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백담호는 다시 캔을 쳐다봤지만 하는 말은 자신을 향하는 것이라고 확신을 느꼈다.
“그냥. 날이 덥잖아.”
서둘러 해인이 대꾸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백담호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아, 날이 더워서 미쳤구나.”
백담호는 느린 행동으로 탄산음료 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가 그러는지 몰라 얌전히 하는 짓을 쳐다봤다. 저렇게 흔들면 열 때 터질 텐데.
“그런데, 이왕 주는 거 열어서 줄래?”
“응?”
백담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해인에게 캔을 건넸다. 잔뜩 흔들린 탄산음료 캔을. 해인은 백담호가 건넨 캔을 내려다봤다. 캔에는 벌써 물기가 방울방울 어려 있었고 금방이라도 거품이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백담호는 웃고 있었다. 정말 진심으로 즐거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보고만 있으면 캔이 따져?”
가만히 캔을 보는 해인을 재촉하며 백담호는 은근히 캔을 더 흔들었다. 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이었다. 해인은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이런 유치한 도발을 백담호가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캔을 땄는데 거품이 넘치는 건, 해인이 보기에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같았고 백담호가 보기엔 병신 같아 보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멍청하게 캔을 열어야 하는 걸까. 백담호는 자신이 병신 같아 보일 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캔을 따 주는 건 꽤 다정한 행동이었다.
해인이 결국 캔을 집어 들었다. 백담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그걸 여유롭게 지켜봤다. 하지만 캔이 책상 위에 눕혀짐과 동시에 호선을 그린 입매는 점점 수그러들었다.
해인이 눕힌 캔을 책상에 대고 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 해.”
탄산음료 캔이 데굴데굴 백담호의 옆 책상 위에서 굴렀다. 구른 자리마다 물기가 아롱아롱 어려 있었다. 그렇게 서너 번 정도 천천히 굴린 해인은 캔을 세우고 따개를 탁-, 젖혔다.
거품은 넘치지 않았고 해인은 아무렇지 않게 캔을 건넸다. 당당하게 내민 캔을 백담호는 얼떨결에 받아 들고는 어딘가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하면 흔들어도 거품이 안 넘치거든.”
“……어, 그렇구나. 시발.”
백담호는 음료를 마시지 않고 그대로 캔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해인은 왠지 더는 뒤돌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몸을 돌렸다. 호감도는 아쉽게 변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거품이나 왕창 쏟을까 생각했지만, 강의 시작 5분 전에 그러는 건 수습하기가 힘들 게 뻔했다. 게다가 음료를 쏟으면 몸이 얼마나 끈끈해지는지 아는 해인은 안전하게 따는 걸 택했다.
나름 캔 굴리는 것도 멍청해 보이긴 했을 텐데. 아, 멍청해 보이는 게 아니라 황당해 보였으려나?
해인의 전생에 한 친구가 했던 행동이었다. 캔을 떨어트리고는 길바닥에서 느릿느릿 굴리는 친구를 보고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오, 개멍청해 보여…. 뭐 해?”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렇게 하면 떨어트리거나 흔들어도 넘치지 않는다고 친구가 말해 줘서야 멍청한 게 아니라 똑똑한 거였구나, 깨달았다. 문득 전생, 전생이라고 해도 될까. 이제는 머나먼, 다시는 갈 수 없는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이 살던 세상은 현실이었을까. 그곳은 존재하던 곳이었을까. 그 친구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을까. 걔는 잘 살고 있을까.
읽던 소설로 들어온 후로 해인은 가끔, …자주 제 존재와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찾아오고는 했다. 그러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한테 정을 많이 주고 살지 않아서. 딱 이렇게 가끔 떠오를 정도라서 다행이었다. 하물며 반려 동물도 키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만약 해인이 전생의 어떠한 것에 크게 정을 주었더라면 해인은 절대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해인이 어릴 적부터 마음속 깊이 새긴 문장이었다.
생각에 잠긴 해인은 뒤에서 백담호가 서늘하게 노려보는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 * *
밥은 찰기가 없었고 국은 된장국과 맹물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한구석에 두어 개 퍼진 김치는 너무 시큼했고 그나마 먹을 거라곤 소시지 채소 볶음밖에 없었다.
자신의 입이 고급이 되어 버린 걸까, 학식이 존나게 맛이 없는 걸까.
해인은 그동안은 자취방에 들러서 점심을 먹고 왔지만, 오늘따라 집에 가기도 귀찮았고 전생에 매일같이 학식을 먹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식당을 왔다. 그리고 그건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다.
해인은 수저를 까딱거리며 밥을 한 톨 두 톨 먹는 둥 마는 둥 거리며 찰기 없는 밥과 맛이 밍밍한 된장국을 노려보기만 했다. 소시지는 겨우 한 개 남은 참이었다. 저것마저 먹으면 아마 해인의 불행한 식사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앞으로 차라리 앞으로는 이 돈으로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겠다고 다짐하던 때에 해인의 앞에 누군가가 식판을 내려놓았다.
“선배.”
생글생글 뜨인 연갈색 눈동자가 해인을 반갑게 담고 있었다. 서해빛이었다.
“어, 해빛아.”
“선배가 어쩐 일로 학식을 드세요?”
그러게 말이다. 해인은 씁쓸하게 웃다가 해빛의 식판을 쳐다봤다. 자신과 똑같은 메뉴였다.
“그냥.”
별 개 같은 게임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짧게 대꾸했다. 해빛은 그저 티 없이 ‘그렇구나.’ 하고 웃으며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
국까지 한 숟가락 퍼먹은 해빛은 어깨를 약간 들썩이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먹을 만해요.”
“그렇구나….”
해인은 나직하게 웃으며 하나 남은 소시지를 해빛의 식판 위에 살며시 올려줬다.
“깨끗하게 먹었어.”
해빛이 조금 놀란 듯 해인을 보다 이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저 소시지 좋아해요.”
“그래…. 많이 먹어.”
소시지는 맛있으니까…. 먹을 만하다는 것치고 해빛은 깨끗하게 식판을 비웠다. 해인은 꽤 신기한 표정으로 해빛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선배는 안 드세요?”
“난 오늘 입맛이 없네.”
해빛이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로 반도 안 줄은 해인의 식판을 쳐다보다가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솔직히 맛없어서 그렇죠? 선배는 입맛이 까다로우니까 더 그러겠다.”
“아.”
금세 들켜 버린 속내에 해인은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제 입맛이 까다로웠나?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해빛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의문은 곧바로 묻혔다. 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상대는 맛있게 먹고 있는데 맛없다고 하기엔 좀 눈치가 없는 행동 같았지만, 확신에 찬 물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해요. 우리 학교 학식 맛없다는 교수님들도 있거든요.”
“정말?”
해인은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맛이 없다는 이야기에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런 것치곤 해빛이 잘 먹기는 했지만.
“여기 정식 말고 분식 쪽이 그나마 맛있어요.”
해인은 다시는 식당에 올 생각이 없었기에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그거 먹어요, 선배.”
“다…음?”
“네, 앞으로 학식 먹을 때 저랑 같이 먹어요. 혼자 먹는 것보단 같이 먹는 게 좋잖아요.”
다시는 학식을 먹으러 안 올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해인은 웃는 해빛 얼굴에 거절할 수 없었다. 해인은 순간 고민이 들었다. 정식이 이 모양인데 분식이라고 다를까? 서해빛은 이 정식마저도 맛있게 먹은 입맛이다. 고민 끝에 해인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였다. 해인은 해빛을 거부할 수 없다.
“으, 응….”
“좋아요, 그러면 이제 일어날까요? 선배, 다음 수업 언제예요?”
“1시에 있어.”
“아, 전 2시인데.”
“아, 정말.”
성의 없는 대답에 해빛은 약간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인은 식당에서 먹으니 생각보다 빨리 먹어 버린 탓에 40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였다. 해빛이 언제 뽑아 온 것인지 캔 음료를 들고 와 해인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든 해인은 익숙한 캔 음료를 보자 문득 백담호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음료를 건넨 사람이 서해빛이라는 사실에 조금 기분이 묘했다. 전에 비해 관계가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선배는 자주 제 말에 집중을 안 해요.”
해인은 더 기분이 묘해졌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해빛과 점심을 함께 먹고 한가롭게 캠퍼스를 걸으며 제 말에 집중 안 한다는 해빛의 볼멘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친한 사이를 바라지는 않았는데. 바로 제 옆에 선 서해빛을 해인은 낯선 눈으로 쳐다봤다.
게다가 해빛은 자신에게 꽤나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해인의 영혼이 가끔 가출한 것 같다, 늘 자신만 이야기한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왜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는지 알 수 없어서 해인은 애매하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운 날씨에 습기 어린 서로의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해빛과 사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란히 걷고 있으니까 지나치게 친밀한 사이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볼 땐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어차피 해빛이 공략 인물로 등록시켰을 때 호감도가 높은 편이 아무래도 놓을 테니까. 해인은 자꾸만 스치는 해빛의 팔에 제 팔을 밀착시켜 봤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백담호랑 같은 등록 조건일 수도 있으니까.
서해빛은 등록만 어떻게 하면 될 거 같은데.
1초, 2초, 3초…. 딱 붙은 자신의 맨살과 해빛의 맨살을 집중해서 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살결 한번 살벌하네. 해인도 꽤 피부가 좋은 편이었지만 서해빛의 피부는 물을 떨어트리면 방울져 떨어질 듯이 맨들맨들했다. 역시 소설 속 메인수라는 걸까.
아쉽네, 입맛을 다시며 해인이 팔을 슬그머니 떨어트리다가 그만, 자신과 해빛이 멈춰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 한 거예요?”
“아.”
해빛이 해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해인은 순간 당황해 눈을 빠르게 굴리다가 튀어나오는 대로 뱉고 말았다.
“아, 그냥, 그 피부가 너무 좋아 보여서. 로션 뭐 써?”
“…네?”
“아니, 아, 음, 나 요즘 피부가 건조해서, 환절기라 그런가•••.”
해인은 황급히 머리를 굴려 애써 변명을 하며 말을 수습하려 했지만, 말은 오히려 더욱 꼬여만 갔다. 해빛은 이미 당황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환절기…? 아직 여름인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이상해져 해인은 열이 올랐다.
“그런데 저보다는 선배 피부가 더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해인의 손가락 하나가 해인의 팔뚝부터 손목 위까지 스르륵 훑어내려 갔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미묘한 손길이 간지러웠다.
“어, 고마워…?”
해빛의 손가락이 금방 떨어질 거라고 여겼지만 의외로 계속 해인의 손등 위에서 맴돌았다.
“전 선배랑 이러고 있는 게 가끔 신기해요….”
나직하게 중얼거림에 해인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랑 이러고 있는 게 신기하다고…? 알 수 없는 말에 해인이 고개를 들었고 곧바로 지독한 우연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백담호가 삐뚜름하게 서서 자신과 해빛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필, 이 상황에.
해인에겐 참 좋지 못한 우연, 해빛에게는 좋은 우연이었다. 해인은 앞을 보느라 손에 들고 있던 볼 캡을 황급히 머리에 썼다. 그 탓에 해빛의 손이 마치 튕겨져 나가듯이 밀쳐졌다.
백담호와의 거리는 조금 멀었다.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분명 자신을 봤을 것 같지만! 그래도 해인은 백담호가 자신을 못 봤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빌며 몸을 돌렸다. 해빛은 튕긴 제 손을 넋을 놓고 보다가 갑자기 등을 보여 주는 해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선배…?”
“쉿.”
해빛의 손이 해인의 어깨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해인은 곤란한 낯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해빛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해인이었다.
“서해빛, 이대로 넌 앞으로 가. 넌 나랑 있던 게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해인은 빠른 걸음으로 반대로 걸어가 버리고 말았다. 해인은 속으로 제발 백담호가 자신을 못 봤기를 만약 봤어도 제발 호감도만큼은 떨어지지 않았기를 속으로 바랐다.
지금 다시 앞자리가 2가 되면 해인은 조금 절망할 거 같아 더욱 걸음을 바삐 옮겼다. 사실, 다시 ‘-20’으로 내려가면 백담호 공략을 그만두면 되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 한 짓들이 아까워서, 어떻게 올려놓았는데 고작 이런 일로 내려갈 수 없어 해인은 뛰었다.
백담호가 자신을 쫓아올 리는 없었지만, 그의 눈에서 최대한 빨리 사라져야 했기에 빠르게 달려, 법정대 근처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벤치가 있었다.
이쯤이면 된 것 같아 해인이 밭은 숨을 몰아쉬며 늘어지던 때였다.
“이 날씨에 미친 듯이 달리면 어떡해.”
여유로운 얼굴의 백담호가 수풀 사이에서 나타났다.
좆 됐다.
“배, 백담호….”
해빛이 서 있으면 나는 안 쫓아오겠지. 서해빛이 혼자 길거리에 서 있는데 설마 두고 달려오지는 않겠지. 내가 아니라 서해빛을 보고 있던 거겠지.
해인의 모든 예상, 아니 바람은 완전히 틀려 버렸다.
백담호가 느긋하게 걸어와 벤치에 앉아 있는 해인의 앞에 섰다. 거대한 키에 해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역광이 진 백담호의 살짝 웃는 얼굴은 소름이 끼쳤다.
“왜 온 거야? 어쩐 일이지….”
해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다 부러 모자를 꽉 눌러썼다. 눈을 마주하는 순간, 말이 헛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해인 씨.”
제 이름이 처음으로 불렸다. 방해인도 아니고, 해인아도 아니고 ‘방해인 씨’. 거리가 느껴지는 호칭이었다. 그전까지 말을 무시하고 좆같다고 욕하던 사람이 부를 만한 호칭도 아니었다.
백담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현재 찔리는 게 있는 해인은 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네? 왜요?”
“와….”
백담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해인은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 가지고 기분을 판단해야 했다. 저 감탄사는 무슨 의미일까. 애초에 지금 감탄사를 할 만한 말을 제가 했나 떠올려 봤지만, 전혀 생각나는 게 없었다.
“방해인 씨가 그렇게 장단을 잘 맞춰 주는지 난 몰랐네. 응?”
갑자기 뭐라는 거야…. 해인은 다시 반말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말을 골랐다. 메인수와 노닥거리다가 메인공에게 걸리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 거지?
“저…. 내가 미안해, 요…?”
“뭐가요?”
“서해빛…. 씨랑 같이 있어서요…?”
머리로는 이게 맞는 대답이라 생각하는데 뱉을수록 이상해 해인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하, 숙여진 고개 위로 얼척 없어 하는 것만 같은 헛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해인은 무언가 헛손질을 해도 단단히 하는 기분이 강렬하게 들었다. 하다못해 백담호의 입이 웃고 있는지, 굳어 있는지라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웃고 있으면 조진 거고…. 굳어 있으면 더 조진 거고…?
혹시라도 심기를 더 거스를까, 고개를 느리게 아주 느리게 들리는 해인의 정수리가 콱, 잡혔다.
“그런데, 일단 사람하고 대화를 하면 좆같은 모자는 벗는 게 예의가 아닐까?”
검은 볼 캡이 순식간에 해인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과다하게 들어오는 빛에 해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백담호를 흘끗 올려다봤다. 늘 시야를 가리던 것이 사라지니 세상이 환했지만 백담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제 손에 쥐여진 볼 캡을 무표정으로 보다가 ‘대접 아니야?’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대접을 처 쓰고 다니니까, 날 보고 무슨 쓰레기 피하듯 도망가 버리지, 응?”
백담호가 해인의 머리통에 다시 볼 캡을 씌웠지만 해인의 시야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모자챙이 뒤로 가게끔 쓰여졌기 때문이다. 모자를 거꾸로 쓴 해인은 이대로 멜빵바지를 입고 무대에 올라가도 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백담호의 입매가 비죽 비틀렸다.
“방해인 씨, 모자 그렇게 쓰니까 존나 귀엽다.”
칭찬보단 비꼬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투였다. 그럼에도 해인은 그저 멀뚱멀뚱 백담호를 쳐다보다 눈썹을 까딱거리며 되물었다.
“귀여워?”
비아냥이라도 백담호에게 귀엽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방해인에게는 어떻게 해도 좋은 의미를 담은 말은 절대 하지 않으려 하는 그였다. 매일 말끝마다 좆같네를 붙이는 거만 봐도 알만 했다.
존나 좆같네도 아니고 귀엽다니.
백담호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이 먼저 뱉어놓고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럼 그렇지 싶어 모자를 다시 제대로 쓰려고 손을 올려 돌렸지만, 모자는 돌아가지 않았다.
“어, 존나 귀여워서 때리고 싶어. 한 대만 때려도 돼요?”
머리 위에 올려진 백담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번 말도 역시 장난이겠지. 아니 제발 장난이어야 한다. 하지만 손은 더욱더 강하게 해인의 머리를 억눌러 왔다.
백담호, 이 녀석은 그냥 자신이 때리고 싶은 거다.
해인은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제 머리에 올려진 손을 떨어뜨려 내려 몸부림을 쳤다. 그것도 개기다 맞을까 봐 약하게 버둥거려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은 이상한 움직임이 되어 버렸다.
백담호의 표정은 더욱 이상하게 변해 갔다.
“지금 아양 부려? 몸을 왜 그따위로 흔들어.”
짜증 나게.
“악!”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해인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머리에 혹이 날 정도로 정수리부터 척추뼈까지 찌르르 울려 해인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제 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렸다.
“하, 씹…. 개아파. 진짜. 하…. 미친.”
하필 때린 부분에 볼 캡 위에 달린 단추가 있어 그 고통은 배였다. 눈물이 찔끔 고여 해인은 백담호에게 개기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그를 원망스럽게 쏘아봤다.
고작 귀엽냐고 물었는데 머리에 구멍이 뚫린 뻔한 건 너무 과한 처사였다. 앓는 소리를 내며 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해인에 백담호는 실소를 하다 옆자리에 앉았다.
자신은 대가리 뚫릴 뻔했는데 백담호는 호감도도 오르지 않았다. 양심 없는 새끼.
“나랑 뭘 하고 싶은 걸까.”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질책하는 것보다는 정말 순수한 의문 같이 담담했다. 해인은 손바닥으로 제 정수리를 문지르다가 주변의 분위기가 묵직해져 정자세로 앉아 백담호와 같은 곳을 쳐다봤다.
“별로.”
해인은 눈으로 백담호의 머리 위를 슬쩍했다. 거지 같은 호감도가 접착제라도 붙여 놓은 건지 [-18]에서 올라가지가 않는다.
“왜, 솔직하게 말해 봐.”
앞만 보던 얼굴이 유유히 돌아 해인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누그러져 있었고 훨씬 부드러웠다. 친밀한 사이를 보듯 입매는 나른하게 말려 올라가 있어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모든 넘어가 줄 것 같았다.
“갑자기 안 하던 인사를 하고.”
백담호가 무릎 위에 올려진 해인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시간표는 어디서 몰래 알아 온 것처럼 존나 똑같고.”
해인은 살짝 찔렸다.
“답지 않게 웃기나 하고, 병신같이 굴고.”
손등을 건드리는 손짓이 더욱 은근해졌다. 습한 공기에 축축한 살갗을 검지로 꾸욱 눌렀다가 느리게 떨어트리고 다시 눌렀다. 오묘한 자극에 해인은 들려오는 말소리보다 건드리는 손등에 더욱 신경이 쏠려 단화 안의 발가락이 꼼실거렸다.
“나 꼬셔?”
얽히는 시선은 어느 때보다 느리고 순했다. 꼬시냐고 물어봐 놓고 제가 더 꼬시는 듯 백담호는 해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만지작거렸다. 미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해인이 슬쩍 손가락을 빼려 하자 백담호의 손이 따라붙었다.
“그렇잖아. 갑자기 잘해 주고, 먹을 거 주고 그러면 그거 꼬시는 거 아닌가.”
“글…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버렸다. 해인이 아는 백담호는 이렇게까지 능글맞지 않았고 자신을 꼬시냐고도 대놓고 묻지 않았다. 해빛이 그렇게 자신을 좋아하는 티를 냈음에도 백담호는 즐겁다는 듯 모르는 척하며 들쑤셔 놓았을 뿐이었다.
물론, 서해빛이 자신처럼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겨우 이 차이로 사람이 이리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을 상대로.
예상치 못한 백담호의 돌직구에 눈 깜빡임이 빨라졌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내가 좀 헷갈리네. 방해인 씨.”
헷갈리니까,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계속 신경이 쓰이잖아. 전과 다르게 말이야.
지금까지 상황과 정반대가 되었다. 말을 씹혀도 계속 말을 걸던 해인이 입을 꾹 다물었고 늘 무시하던 백담호는 대답이 오지 않아도 계속 말을 건넸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아마 이쯤에서 백담호를 무시하고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백담호 역시도 해인이 여기서 끝내는 순간, 관심을 끌 것이다.
마치 해인의 입에서 꼬신다는 대답이 나오길 바라는 것처럼 백담호는 손장난을 치며 몸을 들이밀었지만 정작 제일 감정이 드러나야 하는 눈동자는 잔잔했다.
해인의 모습이 둥둥 떠 있는 까만 눈동자에는 기대가 없었다. 찔러 보는 거다. 언제나 자신을 엿 먹이던 방해인이 어디까지 하나.
이런 도발을 원래라면 무시하는 게 해인의 지론이었지만.
“그럼 계속 신경 쓰면 돼.”
해인은 백담호의 머리 위에 뜬 호감도를 흘겼다.
[호감도 -18]
긴 손가락 밑에 깔린 제 손을 빼내고 백담호가 가까이 들이대는 바람에 뒤로 물렸던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둘의 얼굴 사이가 한 뼘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나, 너랑 친해지고 싶거든.”
[호감도 -15]
띠링-.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 [-15]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 10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보상, 백담호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15], 지나가는 사람보다도 낮을 숫자였지만, 속으로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눈앞의 백담호만 없었더라면 해인은 아마 벤치 위에서 삼바를 췄을지도 모른다.
마이너스에 있는 호감도치고 해인과 백담호 사이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시야를 가득 채운 얼굴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짙은 두 눈이 가까워 해인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검은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다 이내 멎어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탐탁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찰나였다. 일그러녔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느른하게 떠진 눈만 있을 뿐이었다. 살짝 올라간 한 쪽 입매가 비소같기도 했고 퍽 흥미로워 보이기도 했다. 백담호는 지금 이 상황과 이런 상황을 만든 해인, 자신이 우스웠고 그와 동시에 짜증도 났다.
‘나, 너랑 친해지고 싶거든.’
떨지도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뻔뻔함에 기가 차다 못해 웃기기까지 했다. 속으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짜증나게 웃기네. 정말 그간 했던 짓거리가 자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다고 직접 말까지 해 주니 오기가 생길 것 같았다. 이쯤에서 전처럼 역겹게 손대지 말라며 도망가면 이 의미 없는 짓거리도 끝날 것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방해인은 그 쉬운 길을 두고 제 본성을 아는 자신의 앞에서도 순진한 척 눈을 맞춰 온다. 저리 곧게 마주해 오는 얼굴이 심사를 뒤틀리게 한다. 방해인이 뭘 위해 이러는지는 몰라도 이번엔 성공했다. 아주 빡치게 성공했다. 웃기는 새끼.
속쌍꺼풀이 옅게 있는 큰 눈이 눈꺼풀 아래로 숨었다 나타나기를 몇 번, 백담호는 말없이 해인을 보더니 얼굴을 조금 일그러트렸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이상해진 표정이 서서히 뒤로 멀어져 갔다.
“아…. 그렇구나. 나랑 친해지고 싶었구나.”
몸을 뒤로 물렸지만 까만 시선은 여전히 해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잘게 떨리는 눈꺼풀, 잘 정돈되어 부드럽게 떨어지는 눈썹의 들썩임, 입가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백담호는 좇았다. 혹시라도 발견 못 한 미세한 균열이라도 발견할까 싶었지만 해인의 얼굴은 잔잔하기만 했다.
자신의 온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자기만 얼빵한 낯을 하는 게 진짜 숨겨진 뜻 없이 자신과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아 기가 찼다.
“진짜 미친 건가.”
백담호가 중얼거렸다. 해인은 굳이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백담호에게 방해인이 미친 것처럼 보일 테니까. 백담호는 그렇게 말없이 해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보던 백담호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나랑 친해지려고 그 지랄을 떨었던 거네.”
“그렇지.”
지랄까지는 안 떨었지만 해인은 고분고분하게 긍정했다.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모습에 백담호는 실소를 터뜨리다가 얼굴에 묽은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에 치기가 가득해 짓궂어 보였다.
“나랑 친해지려면 일단 그 좆같은 모자부터 버리자.”
백담호가 해인의 머리에 여전히 뒤로 쓰인 모자를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이따 보자, 해인아.”
백담호는 벗긴 해인의 모자를 돌려주지 않고 자기가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해인은 백담호가 사라지고 나서야 크게 숨을 돌렸다.
띠링-.
알림창이 떠올랐다.
[필수 퀘스트]
-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 앉기. (1hr/50hr)
* 호감도가 올라 혜택으로 시간이 두 배 적립되었습니다.
“아.”
갑자기 나타난 백담호에 잊고 있던 퀘스트가 창이 떠올라서야 깨달았다. 늘어나 있는 시간에 해인은 그제야, 백담호가 제 옆자리에 앉았었다는 걸 자각했다.
“이것도 옆자리로 치는구나.”
하긴. 해인은 중얼거리며 창을 닫았다. 그리고 방금 제게 일어난 일들을 상기했다. 갑자기 3이나 오른 호감도, 어색하게 들리는 자신의 이름. 점점 진전이 보여 다행이었는데, 해인은 어딘가 조금 불안했다.
너무 나댔나.
* * *
두 칸 멀었던 자리는 어느 순간, 한 자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고 방해인은 전보다 더 편해진 듯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 왔다. 찔끔찔끔, 좁혀 오는 거리가 우스워 그냥 가만히 뒀다.
어디까지 하나, 언제까지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나.
적당히 지켜보다가 귀찮아질 즈음에 그만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길거리 한복판에서 서해빛과 서 있다가 자신을 보고 황급히 도망치는 방해인을 보는 순간, 아주 조금 무언가 잘못된 것이 느껴졌다.
정말 아주 조금.
도망가는 방해인 뒤 모습이 거슬려 발걸음이 빨라졌다. 전에는 무시해도 말을 걸고 맨날 쫄래쫄래 와서 인사하던 게 마주치자마자 도망가니 심히 거슬렸다.
“선배?”
서해빛을 지나치려는 때에 그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불렀다. 순간 무시하고 지나칠 뻔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 더운 날, 방해인을 집중해서 쫓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저번엔 감사했어요. 선배 덕분에 무사히 과제 제출했어요.”
“다행이네.”
서해빛은 나에게 관심이 있다. 나는 그걸 알았다.
“급한 일 있나 봐요?”
“어.”
“그럼 가 보세요.”
서해빛은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 나도 그걸 안다.
전과는 달리 차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고 쳐다본다. 비록 짧게 보인 관심이었지만 그게 꽤 흥미가 생겼던 터라 서해빛의 관심이 떠났다는 게 전에는 좆같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그래.”
다시 발걸음을 돌려 이미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방해인을 쫓았다. 만나 본 인간 중에 제일 좆같은 방해인을. 아주 조금 무언가 잘못된 것이 느껴졌다.
정말 아주 조금.
* * *
“거기 앉게?”
백담호와 한 자리 떨어진 옆에 앉은 해인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담호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백담호가 자리에 대해 물어봤다.
바로 몇 분 전, 백담호에게 친해지고 싶다는, 자신이 말하고도 웃긴 헛소리를 내뱉은 탓에 해인은 긴장이 되었다.
그에 백담호는 알 수 없는 반응만을 남기고 떠났지만 해인은 올라간 호감도와 내심 즐거워 보이는 백담호의 표정에 자신이 나쁘지 않은 선택을 했구나 하고 최대한 불안감을 덜어 봤다. 그러나 막상 마주하니 긴장되었다.
혹시 백담호가 계속 생각하다 보니 화나서 호감도가 내려가지 않았나 싶어 확인도 했지만, 여전히 [호감도 -15]라고 떠 있었다. 그러니 더 멀리 떨어져 앉으라고는 안 하겠지.
매일같이 얼굴을 가리던 모자가 사라지니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는 해인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응, 여기 앉게.”
말을 끝내면서도 해인은 백담호를 힐긋거렸다. 정확히는 백담호의 호감도를 살폈지만, 백담호가 그걸 알 리는 없었다.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와 책상 아래로 약간 덜덜 떨리는 한쪽 다리를 보다 백담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안 되지.”
“응?”
뭐가 그러면 안 된다는 건지, 해인은 알 수가 없어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설마, 더 떨어져 앉으라는 건 아니겠지. 해인은 불안해 또 호감도를 쳐다봤다.
이러다 호감도 의존증에 걸릴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들었다. 어떻게 좁힌 거리인데 다시 멀어지면 상실감이 클 게 분명했지만 해인은 그래도 일단 백담호가 멀리 앉으라고 하면 바로 옮겨 앉을 생각이었다. 그래 봤자 겨우 한 칸 옆으로 옮길 테지만.
금방이라도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던 찰나 백담호가 제 옆자리에 손을 올리고 툭툭 두드렸다.
“친해지고 싶다며. 그렇게 찔끔 찔끔거려서 언제 친해지겠어.”
예상과 정반대인 말에 해인은 경계 어린 눈초리로 백담호를 쳐다봤다가 의자를 쳐다봤다. 혹시 의자에 껌이라도 붙어 있나 싶어 살폈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백담호의 얼굴이 약간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해인은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엉덩이만 들어서 옆자리로 옮겨 갔다. 드디어, 이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입꼬리가 또 주책없이 올라갈 거 같아 해인은 꾹 누르며 옆을 힐끗 쳐다봤다. 백담호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전보다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황당해 보이는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해인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냥 써라, 시발….”
해인의 머리통에 큰 볼 캡이 다시 쓰였기 때문이다. 좆같다며 뺏어 갔다가 왜 다시 주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해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백담호랑 닿을 것 같아 불편했지만 지금 열심히 채워지고 있을 퀘스트 시간을 떠올리면 이깟 불편함 따위는 참을 수 있었다.
“아, 맞다.”
가방을 바닥으로 내리던 해인이 가방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음료수 캔이었다. 이번엔 탄산음료가 아니라 이온 음료였다. 전에 보니까 탄산음료를 다 마시지도 않고 하수도에 버리길래 해인은 이온음료를 뽑아 왔다.
촤악, 캔이 따지는 소리가 들리고 해인은 책상 위에 캔을 올려놓고 옆으로 올렸다.
“오늘도 덥더라.”
백담호도 그걸 알겠지만, 해인은 딱히 할 말이 없어 나오는 대로 말을 건넸다. 옆에서 기가 찬 헛웃음 소리가 들려와 모자를 들어 올리고 위를 힐끔거렸다.
[호감도 -14]
해인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퀘스트 시간이 두 배로 적립된다!
그 생각에 활짝 웃다 그만 백담호의 얼빠진 낯과 마주치고 말았다. 평소라면 해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갈무리했겠지만 오늘만큼은 해인은 백담호를 웃으며 쳐다봤다.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좋은 일은 해인을 백담호 앞에서 웃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해인의 머리 위에 또 주먹이 내리꽂혔다.
“진짜 돌았나.”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달리 [호감도 -13]으로 변해 있었다. 대비도 못 하고 정수리를 두 번이나 내리꽂힌 탓에 내리꽂는 힘은 처음보다 약했어도 고통은 비슷했다.
해인은 제 정수리를 잡고 끙끙거리느라 호감도가 올라가는 걸 아쉽게도 보질 못했다.
* * *
초반에 고생한 게 이제 와 결실을 보고 있는지 백담호 공략하기는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벌써 퀘스트 시간이 9시간째 채워졌고 호감도는 머지않아 -10에 도달할 것 같았다. 호감도 -10을 찍으면 보상으로 20만 원과 오피스텔 하루 숙박권이 주어진다. 원래 자기 집이었는데 하루 숙박권이 주어진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숙박권을 거부할 생각도 아니었기에 해인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기기로 했다. 애초에 보상도 금전으로 주는 말도 안 되는 게임이었다. 자신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세상에 들어와 말도 안 되는 게임에 강제로 참여하고 있는 중이었다. 불필요한 생각은 빠르게 지워 버리는 게 살아가기 편했다.
괜한 불평 대신 해인은 현재 자신의 성과를 떠올렸다. 처음 –20을 봤을 때는 막막하기만 했었던 게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10에 가까이나 올라갔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새삼 놀라웠다.
호감도를 올리기는커녕 되레 -100을 찍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던 것치고는 훨씬 좋은 진전이었다. 백담호의 호감도가 더욱 수월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도 그날 벤치에서 대화했던 때부터가 분명하다. 너무 돌직구로 나갔나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지금 보니 오히려 그게 강구책임이 확실했다. 백담호는 자기 성격처럼 상대도 직구인 걸 좋아하나 보다, 그리 생각하며 해인은 강의실에 들어섰다.
강의실을 들어가면 대부분 백담호가 먼저 앉아 있었다. 백담호는 늘 강의실 마지막 줄에 앉는다. 공부도 잘하는 녀석이 왜 뒷자리에 앉는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해인은 묻지 않았다.
백담호와 자신은 그런 사사로운 걸 물을 정도의 사이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호감도가 한 5쯤 되면 백담호가 대답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긴 했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지만.
금요일 1시부터 4시까지 3시간 연속짜리 교양, 해인은 자연스럽게 백담호가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바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탓에 몇몇 사람들의 눈길이 닿았지만 해인은 이제 익숙하게 무시하며 가방에서 볼펜 하나를 꺼내 놓았다.
“점심은 잘 먹었어?”
해인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휴대폰만 쳐다보던 백담호가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나른하게 눈을 뜨며 대답했다.
“응.”
“다행이네.”
해인이 또 의미 없는 말을 건네려는 찰나에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
드리운 그림자와 작은 탄식도 함께 들려와 해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옆에는 조금 놀란 표정의 해빛이 서 있었다.
“아, 안녕.”
“네, 선배. 안녕하세요.”
해빛의 인사에 백담호 역시도 고개를 슬쩍 들어 해빛을 쳐다봤고 해빛은 말 대신 고개를 꾸벅했다. 해빛은 계속 해인과 백담호를 곁눈질하며 애매한 얼굴을 했다.
해인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 교수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다들 점심 맛있게 드셨죠? 오늘은 저번 시간에 공지한 대로 조별 활동을 할 건데, 조는 제가 미리 짜서 왔어요. 프린트 해 왔으니 다들 보고 조별대로 앉아 주세요. 그리고 오늘 수업은 여기 이 활동지 작성하고 제출하면 끝이에요.”
조별 활동?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이마를 탁하고 칠 뻔했다.
‘주거와 문화’, 조별 활동을 많이 하고 평가 기준도 이상하다는 그 교양. 이 교양 활동을 하다가 해빛은 오메가로 형질이 전환된다.
하라는 과제는 안 하고 맨날 백담호랑 붙어먹어서…. 다만, 아직 둘의 관계가 담백해 보여 변할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딴생각을 하는 동안 갑자기 알림 창 하나가 떠올랐다.
[플레이어의 원만한 플레이를 위해서 특수 상황이 부여됩니다.]
원만한 플레이를 위한 특수 상황, 한 번에 문구가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문장은 이해했지만, 추측을 할 수 없어 눈을 찌푸렸다.
“선배, 뭘 그리 봐요?”
“아무것도 아니야.”
알림창에 너무 집중하느라 밖인 것도 까먹고 말았다. 허공을 노려보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아 해인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반대쪽을 쳐다보니 백담호는 이미 먼저 나가서 종이를 확인하고 있었다.
“선배.”
“응?”
단상 앞에 옹기종기 모인 인파 탓에 해인과 해빛은 조금 사람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차피 서해빛은 백담호랑 될 게 뻔했지만 알려 줄 수 없었다.
“그…. 백…. 어떻…. 요….”
해빛의 목소리가 앞쪽의 소음 때문에 작게 들려왔다. 해인은 해빛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쪽 머리로 계속 ‘특수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바람에 알아듣지 못했다.
문득 해빛이 저번에 하던 투정이 생각나 해인은 다시 물으려고 입을 열었지만, 몸이 뒤로 휘청거리고 말았다. 등 뒤에 단단한 것이 닿아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봤다.
백담호가 무표정으로 해인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랑 같은 조야.”
“어?”
해인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백담호는 해인을 질질 끌고 갔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인 건가 싶어, 해빛을 쳐다보니 그 역시도 놀란 듯 보였다.
“해빛이는, 서해빛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정말 그걸 왜 자신한테 묻냐는 듯한 투에 해인은 그제야 ‘특수 상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백담호는 자신의 ‘공략 인물’이고 서해빛은 그를 짝사랑하는, 어쩌면 해인이 백담호의 호감도 올리기를 ‘방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공략 인물과 붙여 놓고 방해물은 치운다. 정말 원만한 플레이를 위한 상황이었다.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담호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해인은 저 멀리 앉아 있는 서해빛을 쳐다봤다.
원작에서 서해빛과 백담호는 교양 조별 활동은 같은 조였다. 유일하게 겹치는 과목이 교양이기도 하고 둘 사이에 더욱 긴밀한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해인은 백담호와 같은 조가 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원작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자신이 방해인의 몸에 빙의되는 순간부터 해인의 캐릭터가 어긋났으니까.
하지만, 지금 자신 때문에 원래 같은 조가 되어야 할 서해빛과 백담호가 떨어져 버렸다. 해인은 원작을 나서서 유지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크게 어긋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런 특수 상황을 해인은 바란 적도 없었고 전혀 반갑지도 않았다. 오히려 명백하게, 애써 무시할 수도 없이 자신으로 인해 둘이 갈라져 찝찝함만 커질 뿐이었다.
해인은 가끔 생각했다. 자신이 백담호도 아니고, 서해빛도 아닌, 서브공인 방해인이 된 건 메인인 저 둘은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해인이 빙의를 한 덕에 얻게 된 호화로움이 커질수록 둘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 역시도 짙어져만 갔다. 그리고 해인 역시도 굳이 자신이 아주 잘 아는 둘의 관계를,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둘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저, 방해인 씨.”
머릿속을 잠식해 가는 불안 가득한 생각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해인을 끄집어냈다.
“네?”
해인의 앞으로 종이가 내밀어 졌다. 종이 위에는 학과 학번,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거기다 학과, 학번, 이름, 전화번호 적어 주세요.”
“아, 네.”
넋 놓고 있다가 빠르게 상황 파악한 해인이 주머니에 넣은 볼펜으로 얼른 학번과 전화번호,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이름을 쓰면서 슬쩍 위를 쳐다보니 ‘강하연, 정수훈, 황정운.’ 전부 낯선 이름들뿐이었다. 심지어 자음 하나도 겹치는 성이 없어 ‘백담호’ 밑에 쓴 ‘방해인’이 도드라져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저희 그럼 조장부터 정하는 건 어떨까요? 아, 전 20학번 강하연이에요.”
해인의 앞에 앉은 강하연이 제 조원들 얼굴을 익히려는 듯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당당하게 말하는 투에 해인은 직감적으로 강하연이 조장을 맡게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강하연 씨가 맡는 거 어때요?”
그럼 그렇지. 해인은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고 드디어 조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벌써 두 번째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겠지만, 해인은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대각선 앞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그나마 익숙할 뿐이었다.
“혹시 조장하고 싶으신 분은 없나요?”
강하연이 조원의 얼굴 한 명 한 명을 눈도장 찍듯 살폈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예상한 건지 강하연은 특별한 기색 없이 자신이 조장을 맡겠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남자가 신난다고 손뼉을 쳤다. 주변 사람들은 전혀 안 신나는 것 같았지만.
“그럼 저희 이제 역할 분담하고 장소 정해야 하는데 역할 분담부터 할까요?”
강하연의 말을 시작으로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활동지만 작성하면 원래 3시간짜리 수업이 단 1시간 내외에 끝날 수 있으니 다들 열정이 가히 대단했다. 해인 역시도 생각에 잠겨 서해빛을 힐끔 쳐다보다가 앞에서 느껴지는 강하연의 따끔한 시선에 조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해인이 간간히 대답하는 동안 옆에 앉은 백담호는 조용했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릴 뿐이었다. 해인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강하연의 시선을 피해 몰래 멀리 앉아 있는 서해빛만을 힐끔거렸다.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또 조 활동이 없을 것도 아니었고 분명 다른 조 활동이 생길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엇갈렸으니 둘이 함께하는 일이 더 생겨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해인이 원한 것도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이 게임도 이 세계에 속한 것 중에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 게임이 억지로 갈라놓았으니 완벽히 자신의 탓이라고 볼 수도 없다! 아마도…?
겨우 조 활동이었다. 같은 조가 되었다고 자신이 서해빛을 제치고 백담호와 연애질을 할 것도 아니었고 그저 호감도만 아주 살짝 올리기만 할 거다. 호감도 10이면 친구 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숫자였다. 물론 이 게임 내에서 비교 대상이 현재 없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최대치가 100이니 다른 미연시 게임하고 비슷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저 둘은 이 세계가 정해 놓은 인연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해인은 스멀스멀 느껴지는 불안감을 지워 버렸다.
* * *
강하연의 대단한 진행력 덕분인지, 해인의 조는 다른 조에 비해 일찍 활동지를 제출할 수 있었다. 제출을 마치자마자 조원들은 전부 사라졌다. 해인도 슬슬 돌아가려 고개를 들어 백담호를 쳐다봤다.
벤치에서 자신에게 신경 쓰라는 직구를 날린 이후부터 백담호는 가끔씩 자신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음 수업도 똑같으니까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해인이 혼자 추측할 뿐이었다.
“주말 잘 쉬고 다음….”
습관적으로 호감도를 확인하던 해인의 입이 굳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11]이었던 호감도가 예고도 없이 [-12]가 되어 버린 탓이었다. 호감도가 떨어진 걸 확인하자 해인은 곧바로 백담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평소처럼 일자로 찍찍찍 세 개의 선을 그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표정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대체 왜? 왜 갑자기 호감도가 떨어진 건데? 그럼 이번 퀘스트 시간은 날아간 거야?
해인이 백담호를 넋 놓고 보고 있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다 몸을 돌렸다. 호감도가 떨어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해인은 백담호의 기분이 나빠 보여 떠나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잠시만.”
“왜.”
돌아보는 시선이 생각보다 서늘해 해인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괜찮았고, 교양 시간 전까지도 괜찮았다. 그런데, 대체 겨우 30분 동안 한 조별 활동에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호감도가 떨어진 것인지 해인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근래에 계속 올라가기만 했던 호감도라, 떨어지니 어색하면서도 억울했다. 정말 한 게 없는데.
“백담호, 내가 뭐 잘못했어?”
“잘못, 글쎄.”
내뱉는 말들은 느긋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가만히 쳐다보던 해인은 무심결에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며시 옷깃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아직 수업이 안 끝난 강의실에서 이러는 것은 민폐였다.
“일단 나가자. 백담호.”
해인이 속삭이듯 말하며 백담호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고 백담호도 별다른 말없이 뒤따라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조용히 걷다 해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기분이 나쁘지?”
작게 중얼거리며 해인은 백담호를 벽으로 조금 밀어붙였다. 약한 힘이었지만 백담호는 의외로 쉽게 밀려났다. 해인은 백담호를 의아하게 올려다봤다.
“나한테 정말 관심이 많네.”
“뭐, 그런 편이긴 하지.”
해인은 당연하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고민도 없이 긍정하는 해인에 백담호는 그만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와, 방해인 존나 당돌하네. 학교 복도에서 벽치기도 하고 말이야.”
이러다 키스도 갈기겠어, 해인아.
백담호가 넓은 챙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게 마치 비아냥거리는 거 같아 해인은 서둘러 부정했다.
“아냐, 내가 너한테 키스를 갈길 리가 없잖아. 걱정 마.”
“아…. 시발, 그렇구나.”
해인은 백담호하고 키스를 갈길, 심지어 손조차 잡을 생각이 없었다. 백담호 역시도 그럴 게 분명했다.
싫어하는 사람과의 스킨십이라니 분명 그날은 백담호의 호감도가 정말로 -100을 찍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인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호감도가 또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갑자기 밀어붙여서 미안.”
전보다 조금 더 어두워진 낯빛에 해인은 사과를 했지만 백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존나 매너남이네.’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찰 뿐이었다.
그 모습에, 해인은 백담호와 최대한 접촉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매너’라는 단어를 또 머릿속에 새겼다.
“그보다 내가 아까 뭐 잘못한 거 있어?”
잠시 비켜났던 대화 주제를 해인이 바로 잡았다. 불만족스럽게 해인을 보던 백담호는 벽에 다시 몸을 기대고는 팔짱을 꼈다.
“잘못한 거…. 그런 게 왜 있겠어. 말 한마디도 안 나눴는데.”
“그렇지. 그런데….”
왜 호감도가 떨어졌냐는 말이야. 해인이 이마를 살짝 찌그러트리고는 ‘흠.’ 하는 소리를 흘렸다. 이번 호감도가 왜 떨어졌는지 알아야 다음에 조심할 수 있으니 해인은 쉽사리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어떻게 끌어 올린 호감도인데.
“내가 기분 나쁜 게 그렇게 신경 쓰여?”
“당연하지.”
“왜?”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
연속되는 플러팅에 백담호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백담호가 원래 알던 방해인하고 너무 달라서, 그게 또 기분이 나쁘지가 않아서 백담호는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러지.”
단단하게 꼈던 팔짱을 풀고 백담호는 해인의 모자 위에 또 손을 올렸다. 무의식적으로 해인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다행히도 백담호는 주먹으로 내리꽂지 않았다. 대신 모자챙을 뒤로 가게 돌려 버리고는 모자에 달린 딱딱한 단추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머리에서 간지러운 진동이 느껴졌다.
“방해인, 혹시 진짜 머리라도 다쳤어?”
“…그럴 리가.”
“그럼 혹시 약이라도 한 거야?”
“미쳤어? 그럴 리가 없잖아.”
해인이 헛소리를 하지 말라는 듯 눈을 찌푸리자 백담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방해인이 요즘 내가 존나 편한가 봐. 전에는 눈치만 살살 보더니 말이야. 하긴 훨씬 전에는 이것보다 더 지랄하긴 했지.”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어쩐지 살벌하게 들리는 소리에 해인이 얼른 찌푸렸던 눈매를 풀었다. 또, 너무 개겼다.
“이러는 게 좀 좆같네.”
좆같다는 말에 해인이 호감도가 또 떨어질라, 머리에 또 주먹이 꽂힐라 사과를 덧붙이려는 때였다.
[호감도 -10]
띠링-.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 [-10]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 20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보상, 오피스텔 하루 숙박권이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시스템창이 10초 뒤에 자동으로 사라지자 조금 불편해 보이는 백담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좆같다면서 호감도가 올라갔다.
역시 백담호는 종잡을 수가 없다. 내려가는 것도 자기 멋대로 올라가는 것도 자기 멋대로 규칙성이 없어 해인은 조금 기분이 묘했다. 게임이라는 가상과 제 눈앞에 존재하는 인물이 현실인가 하는 실제감이 섞여서 이상했다.
“뭘 그렇게 봐, 치워.”
곧게 뻗어진 진갈색 눈동자가 보기 싫은 건지 백담호는 자신이 돌렸던 모자를 다시 돌려 챙으로 해인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해인은 결국 백담호의 호감도가 왜 낮아졌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렇게 쉽게 오른다면 몰라도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응, 알겠어.”
해인은 볼 캡을 더 꾹 눌렀다. 이제 호감도도 해결되었고, 드디어 오피스텔 하루 숙박권도 얻었다. 오랜만에 오피스텔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껏 좋아지고 말았다.
“그럼 이제 가 볼게. 월요일에 봐.”
백담호도 다시 기분 좋아졌겠다, 해인은 얼른 가서 이 오피스텔 숙박권을 어떻게 쓰는지 확인하고 오피스텔에서 자고 올 생각이었다. 들뜬 발걸음으로 백담호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팔목이 잡혔다.
“왜 벌써 가.”
“응?”
자신이 잡힐 줄 몰라 해인은 모자를 들어 올리고 백담호를 의문스럽게 쳐다봤다.
“내가 기분 안 좋은 게 신경 쓰인다며. 그럼 풀어 줘야지.”
강력하게 요구하는 짙은 시선을 보던 해인인 호감도를 흘기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 이미 기분 좋아.”
“뭐?”
기분이 안 좋으니까 풀어달라는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기분을 단정을 짓는 태도에 백담호는 황당했다. 남에게 자신 기분이 정해지는 건 처음이라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빠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직 안 좋아.”
“아닌데, 너 기분 좋을걸?”
“안 좋아, 아직.”
해인은 갑자기 빡빡 우기는 백담호가 어이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거면 자신도 알 텐데 대체 왜 이러나 싶어 해인은 슬며시 붙잡힌 손목을 빼냈다.
애초에 자신이 달래 주면 나아지기는 하는 걸까. 하지만 계속 부정하다간 끝도 없이 아니라고 우길 거 같아 해인은 결국 다른 방법을 택했다.
“기분이 아직 안 좋아?”
“응.”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가방을 앞으로 둘러맸다. 그리고는 앞주머니에서 가끔 꺼내 먹으려 사 둔 작은 젤리가 4~6개 들어 있는 한 봉지를 꺼내 백담호의 손에 쥐여 줬다.
“먹어.”
워낙 큰 손이라 작은 젤리 봉지가 초라해 보여 해인은 두어 개를 더 꺼내 올려 줬다. 그러니 그나마 풍족해 보여 만족스러웠다. 제 손 위에 있는 젤리 세 봉지를 보던 백담호가 떨떠름한 얼굴로 해인을 쳐다봤다.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 애매한 반응에 해인이 뒤늦게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하나를 자신이 가져갔다. 그러고는 봉지를 뜯어 하얀색 작은 곰 젤리를 두 개 집어 백담호의 입에 쿡 찔렀다.
“아.”
까만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지만 해인은 아무렇지 않게 한 번 더 ‘아.’라고 말할 뿐이었다.
“시…. 아….”
미처 ‘발’이라고 뱉을 시간도 없이 입이 벌려지자마자 높은 온도에 조금 물렁물렁해진 곰 젤리가 쏙 들어왔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새콤하고 단맛에 백담호는 작게 ‘…발.’이라고 중얼거렸다.
“맛있지? 난 그 색깔이 제일 맛있더라.”
“시발.”
“악!”
해인의 정수리에 벌써 세 번째 주먹이 내리꽂혔다. 백담호는 입을 제대로 다물지도 못했다. 혀에서 굴러다니는 곰돌이 두 마리에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낮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백담호는 다급하게 뒤돌아 버렸다. 그대로 걸어가던 백담호는 뒤에서 끙끙거리는 해인을 흘긋 쳐다보다가 고개를 젓고 더욱 빠르게 걸었다.
“시발…. 저 요망한 새끼….”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백담호의 머리 위 호감도가 [-7]로 바뀌었다.
* * *
“백담호 개시발놈.”
원룸 침대에 뻗은 해인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매번 같은 자리를 틀리지도 않고 때리나 신기했는데 기어코 정수리에 볼록 혹이 나고 말았다.
해인은 제가 좋아하는 곰돌이 젤리를 세 봉지나 주고 대가리가 깨질 뻔한 게 화가 나 고개를 팍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백담호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은 왜 맨날 때리냐고, 야만인이냐고 따지려고 했건만. 눈치도 빠른 새끼, 아쉽게 됐군.
해인인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고 백담호의 정보창을 보는 순간 기분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왜인지 호감도가 [-7]까지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먹을 거 주면 좋아하면서 기껏 자신이 생각해서 까 주고 입에까지 넣어 줬는데 주먹질이나 하고, 해인은 순간 필수 퀘스트에 쓰였던 ‘몸싸움은 안 돼요~’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시스템이라 미래까지 알고 있는 걸까, 해인은 시스템 말을 잘 듣기로 했으니 절대 백담호하고 몸싸움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해도 질 것 같긴 했다.
해인은 둥글게 부푼 혹을 매만지다 시스템창 이곳저곳을 뒤적거렸다. 인벤토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자꾸만 뜨는 광고창을 치워 버리고 드디어 인벤토리 탭을 찾았다. 그 탭을 손으로 누르는 척하니 30개 정도 되는 칸들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첫 번째 칸에 이상한 티켓 같은 게 들어가 있었다. 해인은 바로 그게 오피스텔 하루 숙박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오피스텔 하루 숙박권]
오피스텔에 들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사용됩니다. 단 하루 동안 편안하게 잘 수 있습니다. (단, 플레이어의 페널티가 있어 1% 확률로 사용이 실패될 수 있습니다. 5% 확률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 플레이어 특성에 맞춘 전용 티켓입니다, 판매가 불가능합니다.)
“페널티….”
억지로 참가시켜 놓고 페널티 주는 게 좀 억울했지만 그런다고 페널티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원래는 판매도 할 수 있나 보네.”
누구한테 판매한다는 거야…. 해인은 의문스럽게 중얼거렸다. 광고가 뜰 때부터 생각했지만, 이 게임은 해인 혼자만 플레이한다고 하기에는 불필요한 기능들이 많았다.
마치 여러 사람이 하는 게임 같아 문득 자기 말고도 다른 플레이어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른 플레이어한테는 자신이 공략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신기했다. 하지만, 그랬으면 뉴스에 세상에서 제일 거지 같은 게임이 나왔다고 떴거나, 게임 커뮤니티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별로 가능성이 없는 상상 같다고 여겨졌다. 애초에 현찰로 보상으로 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돼 다시 오피스텔 하루 숙박권으로 생각을 옮겼다. 자동으로 사용된다고 하니 오랜만에 오피스텔이나 돌아가서 푹 쉬다 와야겠다고 여겼다.
웬만한 짐은 오피스텔에 있을 테니 해인은 몸과 휴대폰만 챙겼다. 뒤에 실패할 수 있다는 것과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숙박권을 안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확률도 낮으니 괜찮겠지.
현관에 나서 신발을 신던 중, 바지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강하연: 안녕하세요, 주거와 문화 5조 단체방입니다.] 오후 4:02
진행력도 대단했던 강하연이 그새 단체 채팅방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해인은 바로 볼까 하다가, 곧 버스 도착 시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해인은 핸드폰을 다시 꺼내 확인하니 그사이 벌써 50개가 넘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대충 휘적휘적 내리며 읽으니 언제 만날까 하는 이야기였다.
이번 과제는, 사람이 사는 또는 살았던 건축물을 탐방하고 조사해서 그 시대의 문화와 맞게 분석하고 발표하는 과제였다. 시대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까지 제한이 없었다. 이 부분에서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곧바로 발표 시간이 25분을 넘기지 않으면 0점 처리된다는 말에 곧바로 수많은 악플과 같은 강의평들이 떠올랐다.
다들 멀리 가고 싶진 않았는지 장소는 학교에서 버스 타고 35분 정도 걸리는 공원이었다. 그 공원에는 한옥 유적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정수훈: 저 주말에는 알바를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오후 4:21
[강하연: 아… 그렇군요. 그러면 이번 주말은 힘들 것 같고 다들 그럼 다음 주 평일 시간표가 어떻게 되나요? 저는 월요일 공강이에요.] 오후 4:21
[황정운: 저도 주말 ㄴㄴ 안 돼요, 그리고 공강 없음요 ㅠㅠ] 오후 4:22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버스가 도착해 해인은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버스에는 혼자 있는 자리 중 빈자리가 있어 앉아서 갈 수 있었다.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면 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해인: 전 수요일 공강이에요.] 오후 4:26
[강하연: 백담호 씨는 어떻게 되나요?] 오후 4:27
[백담호: 공강 없습니다.] 오후 4:28
[강하연: 아…. 그렇군요. 그럼 다들 일찍 끝나는 날 있나요? 저녁 전에 만나도 될 것 같은데.] 오후 4:28
해인은 백담호와 제가 같은 단체 채팅방에 있는 풍경이 새삼 놀라웠다.
[정수훈: 저 죄송하지만, 월수금 알바가 바로 있어서 화요일이나 목요일에만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오후 4:30
[강하연: 아, 그러면 화요일 어떠세요? 전 목요일에 약속이 있어서요ㅠ] 오후 4:30
[방해인: 괜찮아요.] 오후 4:32
[황정운: (이모티콘)] 오후 4:32
[백담호: 네.] 오후 4:34
그렇게 8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드디어 약속 시각이 잡혔다. 화요일 5시에 후문에서 다 같이 만나 버스를 타고 향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는 조별 활동에 해인은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다. 평가 기준도 이상하다는 데 혹시라도 누가 무임승차하거나 잠수 타면 정말 골치가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번 학기 때 해인이 미친 듯이 놀 때에도 조별 활동만큼은 잘 참여했었다. 끝난 대화에 휴대폰 화면을 끄고 창밖을 쳐다보니 점점 익숙한 길이 나오고 있었다.
몇 달 만에 돌아오는 건지 벌써 해인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사실은 집에 돌아가서라기보다는 오피스텔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게임기와 만화책 때문이 더 컸다. 자신이 없으니 서준도 오피스텔에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가자마자 온 집 안을 뒤져서 찾아내면 어딘가에서 나오겠지.
해인은 실실 웃다가 자신이 내릴 정거장이라는 걸 황급히 깨닫고 벨을 황급히 눌렀다.
* * *
띠리리리리-.
다행히 비밀번호가 바뀌지 않았다. 환하게 웃은 해인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동시에 놀란 표정의 서준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도련님?”
“…서준 씨?”
서준 씨가 왜 거기서 나와…? 그 순간 해인의 머리에는 1퍼센트의 확률로 실패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