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부작용 (5/17)

5. 부작용

한마디로 이 포션을 먹으면 호감도 버프를 받는다는 소리였다. 제 쓸모없는 스킬로 강서준의 호감도도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그렇다면 이걸 백담호한테 먹인다면.

정말 잘하면 포션을 먹이고 2시간, 호감도를 0까지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도 버프를 받는다는 말이 걸리긴 했지만, 요즘 백담호는 호감도가 떨어지는 일보다 오르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니 더 비위만 잘 맞춰 준다면.

해인의 입이 귀에 걸릴 직전까지 올라갔다. 이 지긋지긋한 원룸을 탈출할 날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 강하게 몰려와 해인은 다른 주의 문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 *

포션은 놀랍게도 현실로 꺼내 올 수 있었다. 현실로 꺼내지 못하면 사용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눈앞에서 2D였던 것이 3D가 되니 신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지만 한 크기의 기다란 포션을 해인은 월요일부터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원래 학교에 가자마자 바로 사용하려 했지만 백담호와 해인이 주로 같이 있는 시간은 강의 시간밖에 없었다. 먹여 봤자 호감도가 오를 만한 행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이라 해인은 금방 철회하고 화요일을 노렸다. 학교가 끝나고도 백담호와 함께할 수 있는 화요일을.

해인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백담호를 빤히 쳐다봤다.

[호감도 -6]

역시, 오늘 잘하면 0까지 올릴 수 있겠어. 가끔 백담호는 자신이 별짓을 안 해도 호감도가 오르곤 했다. 아, 별짓을 안 해서인가. 저 호감도는 무슨 기준으로 오르는 걸까.

앞에서 들려오는 열정적인 교수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해인은 백담호를 빤히 쳐다봤다. 수업에 집중하는 건지 자신이 티가 날 정도로도 쳐다보는데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호감도 -5]

해인의 시선이 백담호에게 조금 더 머무는 때에 호감도가 올랐다. 해인은 오른 호감도를 전보다는 덜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떠야 할 게 안 뜬 기분이었다.

“아.”

그래, 보상이 안 떴다. 5단위씩 올라갈 때마다 뜨던 보상이 안 뜨자 해인은 바로 고개를 돌려 시스템창을 열었다. 그리고 전에 미리 현질을 하고 봤던 백담호 호감도 달성별 보상 목록을 확인했다.

목록을 보는 순간 해인은 금방 납득했다. -10 이상부터는 호감도 보상이 10단위마다 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게 조금 아쉬워 해인은 입맛을 다시다 시스템창에 들어온 김에 퀘스트도 확인했다.

[필수 퀘스트]

-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 앉기(14.30hr/50hr)(현재 진행 중, 2배)

처음에는 가능할까 했는데 이제는 얼른 채워졌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창을 전부 닫아 버린 해인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백담호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너무 대놓고는 말고 은근하게 말이다.

백담호는 가끔 보면 볼수록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나 싶었다. 참 잘났다는 의미였다. 방해인도 잘난 편인데 백담호는 더 잘났다. 이렇게 보면 방해인이 왜 하필 백담호를 제일 싫어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큰 모자 챙 아래로 몰래 백담호를 훔쳐보던 중 책상 위에 올려진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백담호를 지켜보던 걸 멈추고 해인이 폰 화면을 켰다.

[백담호: 뭘 봐.] 오후 1:39

지잉-.

[백담호: 내 얼굴 뚫리겠어, 해인아.] 오후 1:40

화면에 조금 간격을 두고 오는 메시지에 해인은 몸을 슬쩍 아래로 숙였다. 반대쪽에 있는 백담호의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이 애매한 시간 간격은 한 손으로 치느라 그런 건가, 백담호가 한 손으로 몰래몰래 메세지를 친 걸 상상하니 해인은 살짝 웃음이 나왔다.

백담호의 손이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안 가 지잉-, 해인의 손에 들린 폰이 진동했다.

[백담호: 룻어?( 뒤진ㄴ다] 오후 1:41

오타까지 가득한 메시지에 해인은 결국 웃음이 터져 숨을 죽여야만 했다. 수업에 집중한 척, 평온한 백담호의 행동이 더 우스워 해인은 자꾸만 웃음이 피식 피식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이 이랬으면 별로 안 웃겼을 텐데, 백담호가 이러니 웃겼다.

한참을 픽픽 웃던 해인은 ‘미안.’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방해인: 수업 끝나고 뭐 해?] 오후 1:42

책상 아래 숨기고 있던 휴대폰을 백담호가 이제야 제대로 들어 올리고 쳐다본다.

[백담호: 왜.] 오후 1:42

[방해인: 약속 시간까지 할 거 없으면 같이 있자고 하려 했지. 할 일 있으면 말고.] 오후 1:42

[백담호: 뭐 할 건데] 오후 1:42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키 패드를 쳤다.

[방해인: 중도에서 공부할까?] 오후 1:44

[백담호: ?] 오후 1:45

아직 개강 초이긴 했지만 해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담호랑 단둘이 카페에 있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영화를 보러 가는 건 더 이상했다.

그렇게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게 중앙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는데 백담호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지금이라도 다른 거 하자고 물을까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백담호가 더 싫어할 거 같아 해인은 ‘싫어?’라고 대신 보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싫다는 건가, 아쉽네. 해인도 딱히 공부할 생각은 없었고, 백담호 옆자리에 앉아서 퀘스트 시간이나 채우려고 했다. 조금 미련이 남긴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빈둥거리다가 나와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들 과제 잊지 말고 다음 주까지 해 오세요.”

벌써 강의가 끝났다. 해인은 양심상 챙겼던 교재를 가방에 넣고 일어서고 백담호에게 이따 보자는 인사를 건네려는 참이었다.

“중도 가서 공부하자며, 개빡공하는 해인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백담호가 해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반쯤 남은 음료수를 한꺼번에 마시고 쓰레기통에 던지듯이 버렸다. 해인이 수업 시간 전에 준 음료수였다. 이번에는 복숭아 맛의 달짝지근한 음료였다. 달짝지근한 향이 백담호의 호흡에서 느껴졌다. 어깨에 걸쳐진 팔이 신경 쓰였다.

요즘 백담호는 제가 준 음료를 잘 마셨다. 다행이었다. 이제 이따가 포션 타 준 음료수도 잘 마실 걸 생각하니 해인은 걱정이 없었다.

* * *

“공부하자며.”

뭘 가져오나 했더니 책상에 쌓인 소설책을 백담호는 기가 막힌 듯 쳐다봤다. 먼저 공부하자고 한 사람이 옆에서 교재도 아닌 소설책들만 잔뜩 쌓아 놓고 있는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지어 취향 한번 확고한지 장르가 다 판타지 아니면 SF였다. 자기도 민망한 걸 아는지 모자챙 아래로 보이는 입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대접 같은 모자는 벗기면 벗기는 대로 씌우면 씌우는 대로 짜증이 치밀었다.

짜증 나는 면상인데 안 보이면 빡쳤다. 극과 극으로 갈리는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건네는 말투가 삐죽했다.

“개빡공한다며.”

“어…. 빡공한다는 말은 안 했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결국 백담호는 해인의 볼 캡을 또 뒤로 돌려 버렸다. 훤하게 드러난 하얀 얼굴은 역시나 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전에는 왜 그리 날이 서 있나 싶을 정도로 심술 궂은 얼굴이었는데 요즘에는 심술은커녕 유순하고 어딘가 맹한 게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한참 어릴 때 이제는 먼 과거가 되어 버려 잊고 있었던 방해인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떻게 한 사람 얼굴에서 양립되는 분위기가 풍기는지, 방해인은 공대가 아니라 연기과에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는 짓거리도 갈수록 요망해져서.

“좆같네….”

백담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고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건지 해인은 소설책을 쭈욱 밀고 백팩에서 교재를 꺼내 들었다. 백담호는 턱까지 괴고 해인을 빤히 쳐다봤다. 집요한 시선에 해인은 두꺼운 교재를 몇 번 이리 저리 넘기다가 어렴풋이 교수가 과제를 냈던 게 떠올랐다. 그 부분을 겨우 찾아 펼쳤지만 해인의 볼펜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둘 사이의 정적이 흘렀다. 비교적 자유로운 1층이라 주변의 조용한 소음이 없었더라면 정말 진공상태처럼 적막했을지도 몰랐다.

“뭐 해.”

드디어 그 적막에 금이 갔지만, 다시 붙고 말았다. 해인이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인은 멍하니 숫자와 영어 한글 온갖 문자들로 가득한 문제를 보고만 있었다. 설마 암산으로 푸는가 싶어 고개를 조금 숙여 얼굴을 보니 눈이 마주쳤다. 왜인지 곤란함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 암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해인, 뭐 하냐니까.”

“…라.”

“뭐?”

“…풀 줄 모른다고.”

백담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몇 번 입을 벙긋거렸지만 금세 다시 다물고 세상 제일 못 믿을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방해인.”

부르는 목소리가 살벌했다.

“아무리 지금 내가 네 장단에 어울려 주고 있어도.”

해인의 턱이 한 손에 잡혀 위로 들려졌다.

“나를 너무 좆만이로 보는 거 같다. 해인아.”

턱을 잡은 손아귀의 힘은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웠고 강아지 만지듯 턱밑을 손끝으로 긁기도 했다. 백담호는 가끔 간지러운 접촉을 해 왔다.

“정말이야…. 나 저번 학기에, 저번 학기에….”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해인에 백담호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그를 재촉했다. 단 한 번도 쪽팔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해인의 귀 끝이 벌써 빨갛게 물들었다.

“학고 맞아서 집에서 쫓겨났어….”

“뭐?”

백담호의 얼굴이 삽시간 험악해졌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찡그린 얼굴 근육이 전부 풀렸다.

“집에서 쫓겨났다고?”

“응….”

“그것도 학고 맞아서?”

“으응….”

뭘 그리 확인 사살을 하고 싶은지 백담호는 계속 물었다. 그러다 이내 헛웃음을 치다가 황당하게 해인을 쳐다봤다.

“진짜였네.”

“뭐가…?”

“방해인이 사고 쳐서 쫓겨났다는 소문.”

백담호가 조소 가득하게 ‘그 사고가 이런 사고인 줄은 몰랐지만.’라고 덧붙여 해인은 이제 광대까지 붉힌 채 대답했다.

“어, 응….”

백담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까만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해인은 알 수 없었다. 전보단 잔잔해진 기색으로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백담호는 제 앞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돌아가는 고개에 해인은 다행히 백담호가 더 이상 파고들지 않음에 크게 안도했다. 이제 안심하고 책이나 볼 수 있겠다 싶어 교재를 덮으려는 찰나였다.

“왜 덮어.”

덮어지는 교재를 백담호는 다시 펼치고 해인의 옆으로 더욱 바싹 붙더니 꽤나 즐거운 얼굴로 한 문제를 짚었다.

“같이 풀어 줄게.”

아이, 미친. 해인은 절망스럽게 백담호를 쳐다봤다.

* * *

4시 40분, 해인과 백담호는 중도를 나와 후문으로 향했다. 아직 쨍쨍한 햇빛 아래 백담호는 처음 들어갔을 때보다 즐거운 낯을 하고 있었고 해인은 죽어 가고 있었다.

옆에서 터덜터덜 걷던 해인이 말했다.

“넌…. 넌 정말 과외 같은 거 하지 마라.”

해인은 다시는 백담호와 공부 따위는 같이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총 2시간 40분 동안 ‘이러면 돼.’, ‘뭐?’, ‘이걸 왜 몰라?’, ‘뭐?’의 반복이었다. 백담호는 자신만 알게끔 설명했고 해인은 그걸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어쩌다가 알아들어도 혼자 풀어 보는 순간, 1차 방정식을 배웠는데 3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것 같아 해인은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그래서 백담호가 중간에 해인의 머리는 빡대가리라며 깨트릴 뻔했지만, 다행히도 해인이 전에 머리에 혹이 난 게 아직도 아프다고 투덜거리자 백담호는 손을 물렸다.

백담호도 답답해 자신을 때리고 싶어 하는 주제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지독하게 대단해 해인은 모든 걸 포기하고 ‘네.’만 반복했다.

“네 머리가 멍청해진 거야.”

여전히 뒤로 돌아가 있던 볼 캡을 백담호가 다시 앞으로 돌려 놓고는 가볍게 뒤통수를 두드렸다. 그 손짓이 묘하게 기분이 나빠 해인은 머리를 바르르 흔들어 손을 떨어트렸다. 백담호의 손은 미련 없이 떨어졌고 어쩐지 그것도 짜증이 나 해인은 백담호를 몰래몰래 째려보며 속으로 욕을 했다.

호감도 10만 찍으면, 백담호를 쌩 까겠다고.

그런 해인의 속마음도 모른 채 백담호는 장난스레 모자챙을 툭툭 내리쳤다. 어느새 도착한 후문에는 이미 강하연, 정수훈이 와 있었다. 5시 5분이 되었을 즈음, 황정운이 여유롭게 나타났다.

* * *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한옥 유적지 탐방은 생각보다 오래 걸려 7시 반이 지나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끝나자마자 강하연과 정수훈은 각자 할 일이 있다고 바로 떠나 버렸고, 황정운은 멀뚱멀뚱 해인과 백담호 앞에 선 채 해맑게 말했다.

“야, 배고프다. 우리 밥이나 먹자.”

* * *

“야, 방해인. 너 이 새끼 좀 웃기다?”

“아, 정말.”

밥을 먹자고 하던 황정운이 해인과 백담호를 데리고 간 곳은 술집이었다. 당연히 백담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붙잡은 건 해인이었다. 원래 계획에도 단둘이 밥이나, 술이나 뭐든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이대로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는 백담호가 가면 해인이 혼자 정운을 상대해야 할 것 같은 이유도 컸다.

그렇게 현재, 이 벗어나고만 싶은 상황이 와 버린 것이다.

자기 술이 말술이라면서 쭉쭉 들이켜던 놈은 눈이 반쯤 풀린 채 해인의 몸에 들러붙었다. 왜 이렇게 친한 척을 하나 했더니 동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해인은 떨떠름하게 대꾸해 주고 있었다. 어쩐지 저번부터 얼굴이 익숙하다 했다.

백담호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아니꼬운 눈으로 해인과 황정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집에 어떻게 가려고.”

그리고 좀 떨어져. 해인은 어느 순간부터 제 어깨에 팔을 올리며 들러붙는 정운을 밀어냈다. 그러자 정운은 뭐가 그리 웃긴지 킥킥 웃으며 ‘새끼, 친하게 좀 지내자. 엉?’이라고 말했다.

분위기가 개판이었다. 정말, 완전.

백담호의 심기는 불편해 보였고 해인은 그의 눈치를 보느라 제일 좋아하는 콘 치즈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신난 건 황정운뿐이었다.

“자, 자. 그러지 말고 다들 마셔! 먹고 뒤지는 거야!”

뒤지는 건 정운 같았지만 해인은 차라리 그가 빨리 뒤지기를 바라며 가득 채운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몇 분 전까지 적어도 소주잔까지는 들어 주던 백담호가 이제는 팔짱을 끼고 술잔을 들지도 않았다. 정운의 고개가 획 백담호에게 돌아갔다.

“뭐야, 백담호. 벌써 스탑이야? 찌랭이네, 찌랭이.”

얄밉게도 웃는 정운은 백담호의 날이 선 눈빛이 보이지도 않는지 해인의 손목을 붙잡아 제 술잔으로 부딪히고는 술을 들이켰다.

“그럼 백담호는 버리고 방해인, 마시자.”

“그래….”

해인은 정운이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취할 거 같으니 조금만 비위를 맞추자 하며 술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30분 후.

“황정운아, 나 저거 저거 좀 가져와 봐.”

“뭐, 뭘 원해! 당장 가져올게!”

둘은 짱친이 되었다. 해인은 귀 끝과 볼을 연분홍색으로 물들인 채 손가락으로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가리켰다. 정운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서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고 해인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다가 시선을 돌렸다. 앞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백담호는 기가 찬 얼굴로 해인을 쳐다봤다.

“야, 방해인.”

흐물흐물거리던 해인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려 백담호를 쳐다봤지만, 시야를 가리는 모자챙이 거슬렸다. 그래서 스스로 모자를 뒤로 돌리고는 대답했다.

“짠.”

“…시발.”

환장하겠네. 그렇게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자기 혼자 모자를 돌리는 꼴을 보니 맛이 간 것 같았다. 하는 짓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데 표정만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짠은, 시발 무슨 짠이야.

“야, 그만 마셔. 너야말로 집에 어떻게 가려고.”

“쉿.”

그건 말이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검지를 세워 제 입술을 가리며 대답하는 꼴에 백담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방해인 한쪽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고 다행히 방해인은 설 수는 있었다.

“뭐야.”

“집 어디야, 데려다줄게.”

“아, 정말? 개쩌네….”

“그래.”

해인을 부축하며 나가는 길에 백담호는 어느새 다른 테이블 가서 떠들고 있는 황정운을 보고는 혀를 찼다. 고개를 돌려 카운터에 카드를 내민 백담호가 계산을 끝냈다. 밖으로 나오니 후덥지근하던 술집의 내부와 달리 상쾌한 밤공기에 백담호는 그나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옆에서 목 아래, 볼, 귀, 눈가 그냥 다 붉게 물들인 해인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까 방해인이 그렇게 붙잡아도 그냥 갔어야 하는 건데.

“야, 집 어디냐고.”

“우리 집은 말이지, 저기에 있어. 경기도 부천시…. 부천시 어디지, 어디였더라…?”

해인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키며 중얼거리다 혼란에 빠진 듯 미간을 좁혔다 피기를 반복했다. 경기도가 나오는 순간부터 백담호는 제 머리를 손으로 짚고 듣지 않았다. 방해인이 서울 토박이라는 걸 백담호는 뻔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았어도 방해인과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해인은 정말 자기 집 주소를 말한 거였다. 전생에 살았던 집이긴 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백담호는 다시 한번 물으려다가 포기했다.

“하…. 시발.”

버리고 갈까. 여기다 버리고 가면 황정운이랑 알아서 짝짜꿍하며 놀다가 잘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방해인이 황정운이랑 짝짜꿍하는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백담호는 해인의 어깨에 꽉 끌어안아 제 옆에 끼어 놓고 빠르게 걸었다. 아무래도 집에 데리고 가는 건 무리일 듯하니 근처 모텔에라도 던져 놓고 와야 할 듯했다.

“백담호, 우리 어디 가? 2차 가야지.”

“닥쳐.”

“뭐?”

“닥치라고, 지금 좆같으니까.”

술은 취했어도 눈치는 약간 살아 있는지 해인은 말을 멈췄다. 드디어 조용해지자 백담호가 주변을 살피며 적당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해인이 중얼거렸다.

“맨날 좆같대. 좆이 커서 그런가. 뭐가 그렇게 좆같지?”

입구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백담호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 방해인을 쳐다보니 그는 입을 비죽비죽 내밀며 얄궂은 눈으로 백담호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네 좆이, 읍.”

해인의 입이 큰 손으로 막혔다. 백담호의 목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입을 막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백담호는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라 걸음을 빨리했다.

* * *

방에 들어온 백담호는 일단 해인부터 침대에 앉히고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건넸다. 해인은 얌전하게 그걸 받고는 꼴깍꼴깍 마셨다. 해인과 백담호의 가방은 대충 바닥에 던져져 있었다.

드디어 한숨 돌린 백담호는 해인 옆에 앉아 여전히 ‘좆이 커서 그런가. 뭐가 그렇게 좆같지?’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었다. 시발, 그걸 지가 어떻게 알아.

시발…. 어떻게 알았지. 백담호는 혼란스러웠다.

살다 살다 이렇게 직구인 성희롱을 처음 들어 봤다. 500ml 생수를 한 번에 다 마신 해인은 그제야 술이 조금 깨는지 붉은 기가 사그라져 있었다.

“야.”

해인이 고개를 돌려 백담호를 쳐다봤다. 눈동자는 여전히 조금 흐리멍덩했다.

“너 술 많이 마시지 마라. 좆…. 개 같으니까.”

해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백담호도 대답을 바라지는 않은 듯 몸을 일으켰다.

“여기 가만히 있어.”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방해인이 잠드는 것까지 봐야만 그나마 신경이 덜 거슬릴 것 같았다. 해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알코올 향에 제정신도 아찔해지는 것 같아 백담호는 세수라도 해야겠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모텔 안의 유리창에 흐리게 비친 백담호의 실루엣을 보던 해인이 몸을 일으켰다.

사실, 술은 모텔에 다다랐을 때부터 좀 깼다. 백담호 엿 좀 먹어 보라고 취한 척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 김에 하고 싶었던 말도 하고.

다만, 좆이 크냐는 말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는데. 확실히 술기운이 남아 있긴 했나 보다.

“방해인이 미친 새끼….”

해인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다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 있는 매실 음료수를 꺼내 따개를 열어젖혔다. 눈으로 아직 화장실 안에 있는 백담호를 흘긋 보고 주머니에 있는 포션을 전부 다 부어 넣었다.

뭔가 티라도 날까 냄새를 맡아 봤지만, 그냥 달큼한 매실향이었다. 그런데도 해인은 괜히 마음이 찔려 살짝 흔들었다가 혹시 맛이라도 이상할까 봐 입을 떼고 반 모금 마셔 봤다.

그냥 매실 음료인 걸 확인하자 안심한 해인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마 안 가 백담호가 앞머리카락이 젖은 채 화장실에서 나왔고 해인의 손에 들린 매실 음료를 보고 멈칫했다.

“그건 또 언제 꺼냈어.”

“마셔.”

해인이 방긋 웃으며 백담호에게 냉장고에서 갓 꺼내 시원한 음료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백담호가 마시지 않고 터무니없는 눈으로 보기만 하자 해인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덥잖아.”

“…개 같은, 진짜….”

술을 처마시고도 이 짓을 하네. 짜증이 조금 어린 말투와 달리 백담호는 작은 매실 음료를 한 번에 다 마셨다. 달곰한 맛이 입에서 맴도는 게 짜증이 나 냉장고에 있던 생수를 집어 들고 입을 헹구며 해인을 내려다봤다. 해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전과 달리 해인의 표정이 조금 더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띠링-.

해인의 귓가에만 작은 소리가 울렸다.

[호감도 2배 업 포션을 사용하셨습니다. 10초 후부터 버프가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10, 9, 8, 7….]

해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3.

“이제 그만 누워. 방해인.”

2.

해인의 몸이 뒤로 눕혀졌다. 백담호는 어쩐지 머리가 붕 뜨는 기분이었다.

1.

띠링-.

[주의, 포션의 1.2%가 부족합니다.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어?”

백담호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부작용? 무슨 부작용? 그것도 1.2%가 부족해서? 설마 한 모금 마신 것 때문에? 아, 미친 방해인! 자신이 마신 것 때문에 부작용이 왔다는 걸 깨닫자마자 웃고 있던 해인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옅게 두려움이 드리운 갈색 눈이 자신 위에 있는 백담호에게로 향했다.

이미 해인은 매트리스와 딱 붙어서 더 누울 곳도 없는데 어깨를 잡고 있는 백담호의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등에 역광이 진 백담호의 까만 눈동자가 유독 짙어 보여 해인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백담호?”

백담호는 대답하지 않은 채 해인을 계속 내려다보기만 했다. 가끔 눈가가 경련하기도 하며 무언가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해인이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백담호, 백담호야, 아니 담호야.”

더욱 당황한 해인이 말까지 더듬으며 부르자 그제야 백담호가 뒤로 물러나며 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시발…. 눈깔이 미친 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살벌해 해인은 벌떡 상체를 세워 뒤로 엉덩이 걸음을 쳤지만 얼마 못 가 침대 헤드에 퇴로가 막히고 말았다. 백담호의 기세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해인은 옆으로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울상을 하며 백담호만 주의 깊게 쳐다봤다.

방해인 이 빡대가리, 개멍청이, 좆같은 새끼! 그걸 왜 처마셔서. 다 된 밥에 재를 넘어서 그냥 밥을 그냥 불타는 아궁이에 넣어 버린 격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백담호의 호감도가 아직 [-4]라는 점밖에 없었다. 뒤는 막혔고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책이 있을까? 조심스럽게 눈만 움직여 주변을 살펴봤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해인이 고민하는 순간 마른세수를 벅벅 하던 백담호가 고개를 쳐들었다.

드러난 두 눈이 조금 맛이 가 있어 해인은 조그맣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방해인.”

바닥을 뚫을 정도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어, 어?”

“내가 아까 술을 많이 마셨나?”

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해인이 잠시 사고가 멈춰 3초가량이 지난 후에야 ‘별로? 거의 안 마셨을 걸….’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근데 시발, 왜 이러지.”

백담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짐에 짜증과 함께 곤란함이 가득해 해인은 불현듯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부작용이 위험한 것이면 어떡하나 하는 응당 가장 먼저 떠올렸어야 하는 걱정이 이제야 들기 시작했다.

“왜? 어디 아파? 왜 그래.”

밀려오는 불안함과 동시에 자신이 너무 안일한 나머지 고민도 없이 근본도 모를 걸 먹였다는 죄책감에 해인이 조심스럽게 백담호에게 기어갔다.

“아픈 건 아닌데….”

“그럼 왜…. 앗.”

해인이 가까워지자 백담호가 해인의 뒷목을 손으로 잡아당겨 제 품 안에 억지로 끼워 맞췄다. 해인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 다리는 침대 아래로 떨어졌지만, 엉덩이가 백담호의 허벅지 위에 안착해 있었다.

순식간에 백담호의 무릎에 앉다시피 안긴 해인이 잔뜩 커진 눈으로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시발, 해인아.”

“으응?”

“두 대만 때려도 되지.”

미, 미친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해인의 몸이 경직되길 잠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해인이 펄쩍 뛰며 안 된다고 하자 백담호가 실없이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내가 드디어 돌았나….”

작게 중얼거리던 백담호가 해인과 집요하게 시선을 얽혀들어 가며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자조적으로 말했다.

“방해인, 시발 왜 존나 귀엽고 지랄이야.”

“……?”

버둥거리던 해인이 모든 걸 멈췄다. 생각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심지어 숨을 쉬는 것조차 멈춰 버려 해인은 순간 자신이 또 다른 세계에 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담호는 낮게 욕을 중얼거리며 해인의 배 위에 올린 손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해인이 기겁을 하며 도망가려 했지만 이제 눈이 완전히 맛이 간 백담호는 해인을 꽉 끌어안았다.

띠링-.

[경고, 공략 인물 백담호가 포션 사용 부작용으로 욕정 수치가 배가 됩니다.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포션 효과 남은 시간: 1:55:40]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주 지독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해인이 속으로 절규했다. 시스템창에 쓰인 ‘욕정’이란 단어가 혹시 다른 뜻이 있나 생각해 봤지만, 어느새 옷 속을 파고든 커다란 손에 그럴 시간도 없어지고 말았다.

“백담호, 백담호! 정신, 정신 차리라고!”

욕정은 무슨 욕정, 애초에 백담호가 자신에게 욕정을 할 리가 없었다. 해인이 가슴께를 파고드는 손을 막으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백담호는 멈추지 않았다. 호감도를 빠르게 올릴 생각만 했지, 백담호와 이런 짓까지는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백담호가 자신과 이러고 싶을 리도 없을 게 분명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오히려 반쯤 풀린 눈으로 얼굴을 숙여 오는 게 아닌가.

“방해인, 가만히 있어 봐, 응?”

“시, 시발! 뭘 가만히 있으래, 꺼져!”

“욕하는 것도 존나 귀엽다.”

백담호가 미쳤다. 이건 욕정이 아니라 미친 게 분명하다. 해인은 지금 정조의 위기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 이런 새끼가 아닌데 자신이 지금 백담호를 망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얼굴 들이밀지 마, 미친 새끼야! 정신 차리라고!”

짜악-. 짜악-.

제동 없이 다가오는 백담호의 낯을 해인이 손바닥으로 두 번 후려갈겼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간 처사긴 했어도 효과가 있는지 백담호가 모든 행동을 멈췄다.

“방해인.”

해인이 손을 뒤로 슬금슬금 숨기니 드러난 얼굴은 붉었다. 맞은 부위가 흐리게 부어올라 있었다. 조, 조졌다. 지금 제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해인의 얼굴에 낭패감이 물들었다.

발광할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얌전해진 해인을 백담호가 들어 올려 자신을 마주 보게끔 앉혔다. 눕다시피 무릎에 앉은 것보다 훨씬 더 민망하고 부담스러운 자세에 해인이 또 버둥거리자 백담호는 해인의 양 엉덩이를 콱 잡았다.

“악!”

“가만히 좀 있어.”

잡힌 엉덩이가 아파 해인은 반강제적으로 끙끙거리며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더 움직였다가는 엉덩이가 똑 떼어질 것 같아 무서웠다.

그렇게 해인을 안아 들고 백담호는 침대 헤드로 향했다. 해인의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고 자리를 잡은 후에야 백담호는 움켜잡은 엉덩이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자세는 훨씬 노골적이고 민망했다. 해인의 양다리는 백담호의 상체가 사이를 가로막아 오므릴 수조차 없었고 까슬한 바지 아래로 맞닿은 하반신이 곤란했다.

절대 백담호와 방해인이 할 자세는 아니었다. 치고받고 싸우다가 한 0.5초 정도는 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백담호가 자신을 은근하게 쳐다보면 안 되는 일이다. 이건 이 세상의 이치와 맞지 않는 행동이다.

갈수록 혼란에 빠져 가는 해인과 달리 백담호는 사뭇 늘어지게 웃으며 해인에게 물었다.

“방해인, 나한테 관심이 많다며. 어?”

해인의 등 뒤로 손이 둘려 당겨졌다.

“계속 신경 쓰라며. 맨날 캥거루 새끼도 아니고 가방에서 먹을 거 꺼내서 먹여 줘 놓고는.”

뜨거운 숨결이 목에 닿았다. 백담호가 아양을 부리듯이 해인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벼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해인의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달큰쌉쌀한 향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시발, 먼저 꼬셔 놓고 왜 자꾸 정신을 차리래.”

요망한 새끼, 정신은 지가 쏙 빼 놓고 해인아. 어?

이건 포션 때문이다, 포션 때문이다. 백담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인은 기도문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포션을 먹이는 게…. 아니지, 자신이 확인한다고 마시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평범하게 호감도나 오르고 있었을 텐데!

멍청한 제 행동을 속으로 후회하며 엉엉 우느라 버둥거리던 몸이 얌전해졌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허리 뒤에 둘러져 있던 백담호의 손이 스멀스멀 다시 얇은 반팔 티 안을 파고들었다.

등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워 해인은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등허리를 지나 길고 약간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하나하나가 날개 뼈를 짚으며 주욱 밑으로 쓸어내렸다.

뼈 속이 간지러워지는 감각에 해인의 입에서 ‘아….’ 하고 앓는 소리가 흐리게 나오자 턱 밑에 얼굴을 묻고 있던 백담호가 기분 좋게 입으로 호선을 그렸다.

[호감도 -3]

코앞에 있는 호감도가 오르는 걸 보고 나서야 해인은 지금 부작용이 생기긴 했지만, 호감도 버프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아, 으…. 백담호, 잠시만.”

한번 반응을 보이니 손짓은 더욱 야릇하게 변해 바지춤까지 파고들어 가는 바람에 해인이 손을 붙잡았다.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싫어?”

백담호가 고개를 들어 올려 물었다. 평소와 다르게 어찌나 순진한 눈빛인지 해인은 그만하라고 말해야 하는 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싫다기보다는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해 해인은 입술만 살짝 떨어트렸다가 다시 꾹 다물고 난감하게 백담호를 살폈다.

띠링-.

[포션 효과가 끝나기까지 1시간 30분 남았습니다.]

해인의 시선이 흔들렸다. 몇 번 달싹인 입술이 드디어 체념하는 말을 꺼냈다.

“싫지는 않아…. 하지….”

[호감도-2]

인격이 변할 정도로 강력한 부작용인 만큼 버프도 효과도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였다. 순식간에 -2까지 오른 호감도에 ‘하지만 이러면 안 돼.’라고 뱉으려던 말은 쏙 들어갔다.

코앞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해인의 표정에 열감으로 붉게 물든 백담호가 흐리게 미소를 뗬다. 해인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 잘게 떨리는 하얀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제 손이 뜨거운 건지, 방해인 얼굴이 뜨거운 건지 붙었다가 떨어지는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감이 중심으로 쏠려 입이 말랐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에 백담호는 순간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애인이라도 대하듯 부드럽게 방해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게 분명 이상해야 하는데 뇌가 망가진 건지 속을 채우는 건 혐오보다 충족이었다.

“벽치기는 네가 먼저 했으니까, 키스는 내가 먼저 갈길게. 응?”

백담호가 애절하게 말했다. 해인은 그 모습에 홀리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이 키스를 해도 되는 이유를 떠올렸다. 대부분 건조하던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어려 있고, 쓰다듬는 손길은 생각보다 보드라웠으며, 이 일의 발단은 자신이 저질렀고,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그리고… 그리고, 호감도를 올려야 하니까….

해인의 머릿속이 점점 탁해졌다. 백담호가 포션을 먹고 미친 것처럼, 자신도 포션을 조금 섭취해 버렸으니 지금 자신도 미친 걸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응….”

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감도 -1]

올라가는 호감도와 함께 메마른 입술이 부딪혔다. 반응을 살피듯 입술이 가볍게 포개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해인은 눈을 감지도 못하고 반쯤 감았다가 다시 뜨기만을 반복했다.

백담호의 눈 역시도 감기지 않은 채였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덮칠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눈으로도 입을 맞추려는 건지 집요한 눈빛에 해인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깜깜해진 시야 뒤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해인, 입을 벌려야 키스를 하지.”

해인의 입은 꽉 다 물린 상태였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입가의 살들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투정을 부리는 얼굴 같기도 했다. 그 볼록한 입주변의 살이 귀여워 백담호가 손가락으로 쿡쿡 건드리던 때였다. 손끝에서 풍기는 달콤쌉쌀한 향이 훅 들어와 해인이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갑자기 놀란 듯이 떠진 눈에 백담호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해인은 알 수 없는 이 묘한 향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대답은 없었다. 아까부터 흐리게 느껴지던 향이 점점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해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산책하는 개처럼 킁킁거리던 해인이 백담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코끝에 닿은 백담호의 살갗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착각인가 싶어 이마를 대 보기도 했지만, 확실했다. 열이 났다. 그리고 더욱 진해진 향에 해인은 기분이 살짝 들떠 더 얼굴을 묻었다.

향은 코가 찌릿거릴 정도로 달았고 또 씁쓸했다. 달아오른 피부 위에서 흩어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백담호는 해인의 양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살짝 풀린 밤색 눈동자가 백담호와 흐리게 마주쳤다.

“방해인, 왜 그러냐고.”

“냄새가 나.”

“냄새?”

냄새라는 말에 땀 냄새라도 나나 조금 심각해진 백담호가 코를 제 어깨에 맞붙여 냄새를 맡았고 얼마 안 가 그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아주 달고 단데 또 써. 그런 냄새가 나.”

해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담호가 여전히 제 무릎에 안긴 해인을 슬쩍 들어 침대에 앉히고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멀어지는 그에 해인은 홀린 듯이 백담호의 옷자락을 잡았다. 흐리멍덩해져서 순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인을 보고 백담호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머리가 미친 것 같더니만.”

옷자락을 여전히 잡고 있는 해인의 손을 떼어 낸 백담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제 가방을 주워 올리고 가방 안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에서는 작은 크기의 알약 통이 나왔다. 백담호는 마치 일부러 알약통을 보여 주듯 살짝 흔들기까지 해 해인은 본능에 따라 약통을 자세히 보고 깨달았다.

러트 억제제였다. 해인은 열성이라 거의 안 먹다시피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백담호가 러트가 왔다는 걸 알아차린 해인은 당황스러워 보였던 백담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주기에 맞지 않게 온 듯했다. 그건 아마 포션의 부작용 때문임이 분명해 해인은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역시, 다시는 쓰지 말아야지. 욕정이라는 게 러트였을 줄이야. 정말 직관적인 설명이었다.

백담호가 정말 잠깐 미쳐서 들러붙었다는 사실과 욕정이 그저 러트였다는 사실에 해인은 조금 안심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을 내려놓고 억제제를 먹는 백담호를 해인은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백담호, 괜찮아?”

안 괜찮을 걸 알았지만 해인은 괜스레 물었다. 백담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만으로도 자극이 오는 것 같아 백담호는 애써 해인의 물음을 무시했다. 생수와 함께 억제제 두 알을 삼키고 나서야 자신의 상태가 왜 이상했는지 백담호는 깨달았다. 주기에 맞지 않게 빠르게 온 러트가 문제였던 것이었다. 억제제를 항상 가지고 다녀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이대로-. 백담호는 슬쩍 해인을 흘기고는 그대로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갑자기 열이 확 오르더라니, 갑자기 방해인이 존나 귀여워 보이더라니.

이제야 그 모든 이상 행동들의 원인이 밝혀지자 백담호는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편했다. 그 이유에는 항상 주기를 잘 지키던 러트가 어긋난 탓보다는 제 머리에 여전히 남은 방해인의 잔상 때문이었다.

백담호는 침대에 앉지 않고 벽에 기대고는 전보다 상태가 약간 진정되고 나서야 방해인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전까지는 자신의 향에 조금 취했던 건지 지금은 꽤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똘망똘망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술도 완전히 깬 것처럼 보였다.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로 시선이 쏠렸다. 조금 전까지 저기다가 입을 부볐다. 방해인 입술에 입을 부볐다고. 분명 기분이 나빠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생각나는 건 곤란한 듯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방해인의 얼굴이었다. 어쩔 줄 몰라 굴러가는 눈알이 귀여워서 하마터면 씹어 버릴 뻔한 제 감정도 같이 떠올라 고개가 푹 숙이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야, 아니야. 시발, 아니야.”

지금 자신은 러트가 왔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다.

“존나 빡치네….”

백담호는 진심으로 빡칠 것 같았다. 방해인도 자신이 지금 러트가 온 걸 이젠 눈치챘을 텐데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게 거슬렸다.

왜 눈깔이 저렇지? 원래 저랬나? 왜지? 왜 저렇게 눈이 동그랗고 크지.

아무래도 러트가 오면서 시신경이 가출한 것 같아 백담호는 제 눈을 손바닥으로 힘을 주어 꾹꾹 눌렀다. 빨리 돌아오라고.

그러나 변한 건 얼얼해지고 빨개진 제 눈밖에 없었다. 방해인은 여전히 존나 귀엽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백담호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백담호는 결국 무시하기로 했다. 머리를 들고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해인에게 말했다.

“눈깔 치워.”

“아, 응.”

“…….”

해인이 바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허공을 쳐다봤다. 그걸 보니 백담호는 더 열이 뻗쳐 왔다. 저건 자존심도 없나. 백담호는 튀어나올 것 같은 핀잔을 억누르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굳혔다. 방금까지 키스하자고 조르던 사람치고는 정말 뻔뻔한 태도라고 해인은 흘긋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 순간 해인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포션 효과가 끝나기까지 1시간 남았습니다.]

벌써1 시간이 지났다. 해인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백담호의 호감도를 흘겼다.

[호감도-1]

0까지 1밖에 남지 않았다.

“술 다 깼지.”

“아.”

반사적으로 ‘응’이라고 대답하려던 입이 멈췄다. 백담호는 갑자기 뭐가 그리 불편한지 이마빡에 ‘심기불편’이라고 적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이 다 깼다고 하면 왠지 자신을 내쫓을 거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래서 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깼어.”

발음을 어눌하게 해야 했는데 너무 또랑또랑하게 나와 버리고 말았다. 누가 봐도 하나도 안 취한 사람의 발음에 백담호 역시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거짓말하지 말고. 다 깼잖아.”

“아닌….”

자꾸 부정하는 해인의 말이 끊고 백담호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며 말했다.

“너 집에 가는 게 좋을 거 같다. 택시비 줄게.”

돈까지 줄 정도로 자신이 갔으면 좋겠다는 건가? 해인은 어쩐지 심통이 났다. 몇 분 전까지 들러붙던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이 변해 버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전부 백담호에게 포션을 먹인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돌아가는 게 민폐 끼치지 않고 올바른 행동일 텐데.

그런데도 해인은 어쩐지 심통이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 가라면 가야지.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투에 불만이 가득했다. 해인도 그게 느껴져 지금 자신이 뭐 하는 건가 싶어 입을 꾹 다문 채 일어섰다. 입을 다물지 않으면 또 부루퉁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인은 천천히 침대에 버려지듯 널브러진 모자를 줍고 백담호의 발 앞에 버려진 제 가방을 허리를 숙여 주워 들었다. 얼마 전까지 강하게 느껴지던 달곰쌉쌀한 향은 많이 옅어져 있었다.

허리를 펴고 가방을 멜 때 즈음에야 해인은 불순했던 제 감정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그래, 나중에 멀쩡해진 백담호가 왜 개겼냐고 머리를 깨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은 고분고분하게 가야 한다. 백담호는 로맨틱하고 병신 같고 매너 있을 때 호감도가 올랐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떠나 주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병신 같지는 않겠지만, 로맨틱하고 매너 있는 행동이니까.

손에 들린 모자를 잠깐 꼼지락 만지다가 해인은 백담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잘 쉬고 목요일에 보자는 말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미련 없고 깔끔하게.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야만 했다.

“그럼 백담호, 나 그만 가 볼게.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

[호감도 -3]

뭔데. 갑자기 팍 떨어진 호감도에 해인은 말을 멈췄다. 혹시 자신이 얼른 떠나지 않아서인가 싶어 당황한 해인이 한 걸음을 문을 향해 뗐을 때였다.

[호감도 -4]

또 팍 떨어졌다. 갑자기 떨어지는 호감도에 해인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호감도 디버프도 같이 받는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호감도가 팍팍 떨어지니 포션 효과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져 해인은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안 가.”

백담호가 걷다가 멈춰 선 해인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얼른 가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해인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자신도 모르게 “그러게.”라고 대답해 버렸다.

뱉고 나서야 또 호감도가 떨어지겠구나 싶은 해인이 낭패 어린 낯으로 호감도를 쳐다봤지만, 10초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전혀 바뀔 생각이 없어 보이는 호감도에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백담호의 호감도는 술이 안 깼다고 거짓말했을 땐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간다고 말하니 떨어졌다. 이게 시간 차이 때문에 뒤늦게 떨어진 우연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백담호가 자신이 안 갔으면 하는 거라면?

해인은 문으로 걸어가는 대신 픽-,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뜬금없이 쓰러진 해인에 백담호는 손에 쥐고 있던 지폐를 모두 떨구고 놀라서 허리를 숙였다.

“뭐야, 왜 그래.”

해인은 말없이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조금 경직된 얼굴이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몇 번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해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 아직 취한 것 같아.”

백담호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 치고 명확하게 자신을 보는 시선에 붉은 기 하나 없이 말간 얼굴로 방해인은 여전히 술에 취했다고 한다.

“…진짜 병신인가.”

[호감도-2]

어이없다는 듯 뱉는 말과 달리 호감도는 올라갔다. 정말로 올랐다. 호감도가. 정말로 혹시나 싶어 해 본 행동이었는데 해인도 진짜로 오를 줄은 몰라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백담호는 내가 안 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돈까지 쥐여 주면서 정말로 갔으면 좋겠다고 군 주제에 취했다고 우기니 좋아한다.

그 우스운 간극에 해인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백담호가 그러니까 웃겼다. 그리고 이상하리 만치 우울해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괜찮아졌다.

“방해인.”

“응.”

“가라니까….”

백담호의 속마음을 깨닫고 나니 그의 말끝이 답지 않게 흐려지는 게 들렸다. 저번에도 기분 좋았으면서 안 좋다고 우기더니 오늘도 안 갔으면 좋겠으면서 갔으면 좋겠다고 우긴다.

그래서 오늘은 해인도 우겨 보기로 했다. 민폐라고 생각했던 행동을 오히려 백담호가 좋아해 주니 해인은 약간의 용기를 얻었다.

“나도 가고 싶은데, 역시 아직 어지러운 것 같아.”

이번에는 일부러 말을 또박또박했다. 뻔히 느껴지는 연기 톤에 백담호는 해인을 빤히 내려 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하, 미친.”

담호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해인의 고개도 그와 함께 점점 숙여 멀었던 거리는 한 뼘 정도를 남기고 가까워졌다.

“방해인, 왜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해…. 응?”

내가 진짜 좆만이로 보이나 보다. 백담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이 기가 찬지 가끔 웃는 게 기분 나쁘다는 말투와는 달리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해인아, 마지막이야. 그냥 곱게 가자.”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말하는 탓에 말소리가 조금 뭉개졌다. 입이 가려지자 표정은 더욱 모호해져 호감도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의 속내를 더욱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백담호.”

해인이 나직하게 부르며 제 입을 가린 백담호의 손을 잡아당겼다. 쉽게 당겨진 손 아래 드러난 입매는 위로 조금 말려있었다.

“너 내가 안 갔으면 좋겠잖아.”

까만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호감도 0]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 [0]을 달성했습니다.

보상, 40만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보상, 공략 인물 위치 지도가 지급되었습니다.

보상, 호감도 알리미가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해인이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백담호는 역시 자신이 가지 않기를 원한다. 흐릿한 미소를 그린 입을 백담호가 잡힌 손을 빼어내서 가려 버렸다. 커다란 크기 탓에 코까지 막은 손에서는 단 향이 풍겼다.

“방해인.”

“응.”

“넌 진짜 가끔 사람 빡돌게 만들어. 알아?”

백담호는 제 얼굴을 손에 파묻고 문지르다가 해인의 팔뚝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대로 다시 침대로 끌고 가는 탓에 해인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바로 침대로 끌고 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해인은 그저 백담호가 잠들 때까지 같이 있다가 나올 생각이었다. 억제제에는 수면 유도제가 들어 있으니까.

“앗.”

침대에 던져지듯 날아간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담호를 쳐다봤다. 손에 들려 있던 모자는 침대 옆으로 떨어졌다. 설마 다시 키스라도 갈길 생각인가 싶었지만 백담호는 그대로 옆에 쓰러지듯 눕고 말았다.

약간 숨이 가쁜지 길게 숨을 쉬며 몸을 옆으로 돌려 해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았다. 올려진 손은 가볍게 장난을 치듯 원을 그리다가 쭈욱 뻗어 허리를 감싸 올렸다. 하는 행동이 낯간지러워 해인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백담호는 점점 약 효과가 돌기 시작했는지 나른하게 풀린 얼굴로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역시, 지금의 백담호는 제정신이 아니다. 해인은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던 가운데 백담호가 나직하게 물었다.

“해인아, 왜 이렇게 아는 척을 해?”

“…응?”

맥없이 풀린 말투치고는 시비 같았다.

“저번부터 당당하게 아는 척하던데, 방해인 그거 존나 빡치는 거 알아?”

“어…. 어. 미안해.”

생각해 보니 백담호의 입장에선 갑자기 바뀐 해인의 태도를 아는 척한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호감도에 치우친 신경 탓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해인은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세계에 빙의는 하였으나 그들과 깊게 엮일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와중에 게임에 참여하게 되고 백담호가 공략 인물까지 되어 버리자 무의식적으로 그를 가상의 인물처럼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해인은 이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백담호가 단순히 소설의 인물이 아닌, 자신과 얽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이 상황이 불안했다.

“사과는 또 존나 잘해요. 할 말 없게.”

바람 빠지듯 웃은 백담호가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해인을 올려다보다 허리를 감쌌던 손을 풀고는 해인의 한쪽 볼을 툭 하고 건드렸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백담호는 또 혼자 웃었다. 억제제를 먹으면 몽롱해져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있는 것 같다던데 백담호가 딱 그 상태였다. 억제제 효과가 돌고 있다는 뜻이었다.

“넌 다 아는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지, 해인아. 어?”

내 기분도 알고 내 좆 큰 것도 알고 내 생각도 방해인은 다 아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네. 존나 불공평하다.

졸려서 투정을 부리고 싶은 건지 백담호는 말이 점점 많아졌다. 해인은 그 말에 속으로만 대답했다. 자신이 백담호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건 당연했고 백담호가 해인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했다.

해인이 백담호에 대해 잘 아는 것이 해인의 안정감을 구축했다. 갑자기 들어와 버린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인이 잘 아는 건 백담호와 서해빛뿐이었으니. 그러니 해인은 백담호에 대해 잘 알아야 했다. 반대로 백담호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백담호는 혼자서 뭐가 그리도 불만이 많았는지 웅얼거려 해인은 귀에 온 신경을 다 집중해야 했다.

“해인아, 널 보면 존나 빡쳐. 어? 알아?”

아까는 아는 척해서 빡친다더니 이제는 보기만 해도 빡친다고 한다. 이미 거의 감긴 눈으로 할 말이 얼마나 더 남았다고 입은 다물지를 않았다.

“네가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아? 시발 좆 큰 건 어디서 알아서 온 거야…. 쪽팔리게.”

몰래 화장실이라도 따라 들어왔어? 백담호는 물었고 해인은 목덜미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조건 백담호에게 좆이 크냐고 비아냥거리기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냐, 내가 미안해. 너 좆 안 커. 나 본 적도 없어.”

사과하지 않으면 계속 구시렁거릴 것 같아 해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리고 벌어진 일은.

[호감도 -1]

떨어진 호감도와 함께 나른하게 풀려 있던 얼굴이 싸하게 굳은 채 백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보여 줄까?”

“어…?”

“본 적도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알자고. 시발, 큰지 안 큰지 봐야 알지.”

백담호가 해인의 손을 움켜잡고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해인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지만 그는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솔직히 좋게 말해 은은하다는 거였지, 미소는 살벌했다. 은은하게 살벌했다. 세상에 저런 미소가 있다는 것을 해인은 방금 깨달았다.

“아, 아니. 괜찮아, 괜찮다고!”

“왜, 방해인. 다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여기도 알면 완벽하겠다. 어?”

어느 부분에서 스위치가 눌렸는지 몰라도 조금 신경질이 난 백담호를 해인은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억제제 덕에 백담호의 힘이 그렇게 세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잡혀서 당겨지는 손을 그대로 백담호 쪽으로 밀어 해인은 그의 어깨를 눌러 눕혀 버렸다. 풀썩 하고 힘없이 쓰러진 백담호의 눈이 약간 커졌다.

“이제 그만 자, 졸리잖아.”

어린아이 잠재우듯 해인은 백담호의 가슴 가운데에 손바닥을 올리고 약하게 두드렸다. 빠르게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해인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호감도 2]

단 한 번도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던 백담호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말했다.

“와, 벽치기 말고 침대치기를 당한 건 처음이라 내가 좀 많이 떨리네.”

반하겠어. 해인아.

빠른 심장 박동처럼 가쁜 호흡이 섞여서 그런지 울리는 목소리는 더욱 간드러졌다. 알싸하게 남은 잔향 탓인지 해인은 목 아래로 열이 몰려 몸을 뒤로 뺐다.

다행히 백담호는 해인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눈을 완전히 감고 입도 다물었다. 드디어 작은 모텔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미약하게 들리는 밭은 숨소리만이 공간을 은은하게 채웠고 해인은 잠든 것 같은 백담호를 멍하니 쳐다봤다.

[포션 효과가 끝나기까지 30분 남았습니다.]

백담호는 이제 잠에 빠져든 것 같았지만 해인은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30분만, 저 포션 효과가 끝나는 것만 확인하고 나가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만 해인은 30분 동안 잠든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띠링-.

[포션 효과가 모두 끝났습니다.]

띠링-.

[필수 퀘스트]

-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 앉기(18.10hr/50hr)

* 호감도가 올라 혜택으로 시간이 두 배 적립되었습니다.

* * *

버스는 당연히 운행이 종료된 지 오래라 택시를 탄 해인은 학교 후문 쪽에서 내렸다. 바로 집에 들어가기에는 머리가 꽤 복잡했고 여전히 제 옷에 스며든 잔향이 더욱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문득, 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랑 뭘 하고 싶은 걸까.’

질책하는 것보단 정말 순수하던 그 의문,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던 질문이 해인의 속내를 전부 헤집어 놓았다.

나는 정말 백담호랑 뭐를 하고 싶은 걸까. 호감도 10을 올리면 백담호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짧게 겹쳤던 입술이 돌연 뜨거워지는 것 같아 해인은 손으로 문질렀다.

“아.”

그러다 문득 해인은 모자를 두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 * *

평소와 다르게 몸이 뻐근해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옆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나 아무도 없었던 건지 손으로 더듬은 시트 위는 차게 식어 있었다. 어쩌면 손이 뜨거워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갔네.”

갈 것 같기는 했지만, 막상 진짜 가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몸까지 완전히 옆으로 돌려 버렸다. 심해진 열감 때문인지 어젯밤 일들이 전부 허상처럼 느껴졌다.

바로, 여기에 방해인이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냥 이성이고 뭐고 다 끊어 버리고 뒹굴걸 그랬나. 그랬으면 방해인은 아마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난리를 떨다가 결국 곤란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겠지.

이러면 안 된다는 듯 꽉 다 물린 입을 한번 씹어 주면 작게 앓는 소리를 내겠지.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그러고 나서 이곳저곳을 미친 것처럼 빨아 들이고 얇은 반팔 티 속을 더듬고 닿지 못했던 바지 속까지.

그걸 생각하니 존나 설 것 같다. 아, 이미 섰나. 요망한 새끼, 차라리 끝까지 하지 말라고 얼굴이나 더 후려갈기지, 왜 고개는 끄덕여서 사람 미치게 만들어.

제 다리 위에 앉혀져서 버둥거리던 촉각이 떠올라 백담호는 더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무래도 약을 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몸이 무거워서 별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동틀 무렵인지 창밖은 어슴푸레했다. 저 창문에 얼굴을 가져다 대면 시원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백담호는 눈을 다시 감았다.

눈을 감으니 짙어지는 감각과 기억에 허리가 조금 들썩였다. 무의식적으로 뻗어 내려가던 손을 멈추고는 백담호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 놓인 휴대폰을 들었다.

알림창에 메시지가 하나 와 있는 걸 보는 순간 백담호의 머리 위에 호감도가 깜빡거리며 ‘3’으로 올랐다.

[방해인: 아, 나 거기에 모자 두고 나왔다.] 오전 3:10

간결한 메시지에 백담호는 바로 잠금을 풀고 연락처를 눌렀다. 왠지, 방해인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 주욱 내려 봤지만 역시나 ‘방해인’의 ‘방’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서른 개가 넘는 목록에 방 씨도 없는가 싶어 백담호는 힘없이 웃었다. 방해인 존나 멍청한 새끼.

꼬실 거면 번호를 먼저 따 가야지. 벽치기도 하고 젤리도 먹여 주고 입술도 부볐는데 전화번호 하나 없다는 게 허탈했다. 이 연락처 목록에 방해인보다 자신과 더한 짓거리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근데 방해인이 없네. 백담호는 넋을 놓은 채 ‘박’ 씨 목록을 쳐다보다가 홈을 터치해 나가고 메신저 어플을 들어가 검색창에 ‘방’을 쳤다. 치자마자 유일하게 한 이름이 떴다. ‘방해인’, 그 이름이 보이자 어쩐지 만족스러워 눌러서 보이스톡이라도 걸까 하다가 손이 또 멈칫했다.

전화도 아니고 보이스톡을 걸자니 뭔가 구차해진 것 같았다. 어쩐지 그랬다. 엄지손가락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다 다시 채팅방으로 들어갔다.

모자를 두고 왔다는 메시지 위에 먼저 와 있던 메시지가 보였다.

[방해인: 나 먼저 들어가 볼게,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오전 2:48

그 두 메시지를 가만히 보던 백담호는 결국 짧게 ‘응.’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별거 아닌 일에도 방해인이라면 고민하게 된다. 역시 방해인은…. 만나 본 인간 중에 제일 좆같다. 백담호는 가만히 기본 설정으로 해 놓은 화면을 보다가 메시지를 들어갔다.

[정실장님, 이따 일어나시면 여기로 와 주세요.] 오전 5:20

백담호는 자기 위치와 함께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눈을 감았다.

* * *

늘어지게 자던 해인이 약간의 숙취와 함께 눈을 떴다. 끄으윽 괴상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다 침대 옆 서랍장에 올려진 휴대폰을 찾으려 손을 더듬거렸다.

눈이 부어 잘 떠지지가 않았다. 겨우 집은 폰 화면을 켜니 오후 1시였다. 화면에는 알림 하나가 와 있었다.

[백담호: 응] 오전 5 : 17

짧고 간결했다. 해인은 그 짧고 어딘가 매정해 보이는 메시지를 부은 눈으로 메시지 창을 닫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몸은 괜찮냐고 묻기에는 안 괜찮을 게 뻔했고 내일 보자고 하기엔 러트 기간이라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게다가 아무래도 자신 때문에 유발된 러트다보니 뭐라고 묻기에도 미안했다.

그런데 이건 모자를 가져다준다는 걸까.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안 가져다주면 또 사지, 뭐.

술도 먹었고 향에 취해서 그랬는지 어제 일이 꿈처럼 느껴지긴커녕 여전히 머리에 맴돌아서 수치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해인은 발로 이불을 팍팍 걷어차면서 다가오는 백담호 입을 막았어야 했는데 그것에 홀려 고개를 끄덕인 자신을 욕했다.

등을 쓰다듬던 손길과 맞부딪히던 입술, 폐부를 가득 채우는 달콤씁쓸한 향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원작 중후반쯤에 서해빛이 카카오가 70프로 이상 들어갔다는 초콜릿을 먹고 백담호를 떠올린 묘사가 있었다.

마치 백담호 페로몬 같다나 뭐라나, 읽을 당시는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직접 맡으니 서해빛이 제대로 떠올렸구나 싶었다.

정말 숨을 쉴 때마다 입안에서 단맛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그 사이로 쓴맛도 같이 느껴졌다. 그 향과 맛이 여전히 입 안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해인은 배달 앱을 켰다. 맛과 향을 잊으려면 다른 맛과 향으로 덮어 버리면 된다. 배달 앱에서 순대 국밥과 육회를 고민하던 해인은 두 개를 다 시켜 버렸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나가다니, 해인은 지난날의 충격이 컸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다 호감도 보상으로 점점 채워지는 통장 잔고를 떠올리니 더욱 기분이 괜찮아졌다.

* * *

백담호를 못 본 지 이틀째다. 그는 목요일도 나오지 않았고 금요일에도 보이지 않았다. 같이 앉았던 적을 횟수로 따지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도 이상하게 허전했다. 해인은 고개를 돌려 빈 옆자리를 쳐다봤다.

휴대폰을 켜서 메신저 어플을 괜히 켜 봤지만 백담호에게 온 메시지는 하나도 없었다. 채팅창을 눌러 ‘아직도 많이 안 좋아?’라고 쳤다가 다시 지우기만 반복하다가 다시 꺼 버렸다.

신경은 쓰이는데 뭐라고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인가 싶기도 했다. 애초에 호감도 10만 올리면 쌩 까겠다고 다짐도 했었고.

결국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해인은 시스템창을 열어 공략 인물 정보에 들어갔다.

[강서준]

[백담호]

워낙 오랜만에 들어가는 터라 강서준이 공략 인물이 되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생각난 김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일단 백담호 정보를 열람했다. 익숙한 정보들을 대충 읽어 내리고 제일 중요한 ‘플레이어와의 관계’로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플레이어와의 관계(호감도: 3)

신경이 쓰입니다.

‘호감도: 3’.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였던 거 같은데 보지 못한 사이 올랐다. 왜일까. 왜 오른 걸까. 문득 궁금해져 심각하게 호감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깊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오르면 좋은 거지, 그래, 그냥 좋은 일이다. 점점 깊어지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시스템창을 전부 꺼 버렸다.

어느새 수업은 끝나 있었고 해인은 벌떡 일어나 강의실을 나섰다. 이제 5교시 전까지 공강이기에 원룸을 갈까 하다가 귀찮아졌다.

교내 카페에 가 있을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중이었다.

“선배!”

“힉.”

갑자기 뒤에 얹어진 손에 깜짝 놀란 해인이 뒤를 돌아보니 활짝 웃고 있는 해빛이 서 있었다. 아는 얼굴에 해인은 금방 안도하며 옅게 미소를 띠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근데 해인 선배도 여기서 수업 들었구나.”

“응, 너도 여기서 들어?”

해빛은 자연스럽게 해인의 옆에 따라붙었다.

“네. 원래는 12시 다 돼서 끝나는데 오늘 일찍 끝났거든요. 선배는 항상 이때 끝나요?”

“응, 이때 끝나.”

건물을 나오니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서 ‘어쩐지, 그래서 계속 못 봤구나.’ 하고 해빛이 중얼거렸지만 해인은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다가 카페 가는 길과 식당가는 길이 갈라진 곳에 도착했다. 해인은 카페를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카페 쪽으로 걸음을 조금 옮기며 해빛을 쳐다봤다.

“난 이제 카페 갈 건데, 넌 식당 갈 거지?”

수업이 일찍 끝나면 밥을 일찍 먹고 중도에서 공부하던 해빛이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뇨, 저도 카페 갈 건데요?”

“그래, 그럼 이…, 응?”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답을 하다 해인이 멍한 눈으로 해빛을 쳐다봤다.

“너 밥 안 먹어?”

“음, 선배는 안 먹게요?”

“응, 배가 별로 안 고프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해빛은 해맑게 ‘저도 배가 별로 안 고파요.’라고 대답했다. 어쩐지 별로 믿기지 않는 소리였지만 자기가 배가 안 고프다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어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인은 얼떨결에 해빛과 같이 교내 카페에 가게 되었다. 해인은 오랜만에 요거트 스무디를 즐거운 마음으로 시켰고 해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대충 자리를 잡은 해인은 할 건 없지만, 노트북을 꺼냈다. 해빛은 아무것도 꺼내지 않은 채 멀뚱멀뚱 해인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공부하게요?”

“어…. 아니.”

“그럼 뭐 하시게요?”

해인은 말문이 막혔다. 노트북을 꺼낸 이유는 단지 서해빛이 공부할 테니까 뭐라도 하는 척해야 할 거 같아서 꺼낸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서해빛은 교재도 꺼내 놓지 않고 있었다.

“그, 너는 공부 안 해?”

대답 대신 해인은 되물었다. 해빛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개강 초잖아요, 놀아요. 선배.”

웃고 있는 해인이 슬금슬금 팔을 책상에 올리고 앞으로 뻗어 해인의 노트북을 덮었다. 황당한 행동에 해인이 넋을 놓고 쳐다보니 해빛은 어느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 팔을 위에 얼굴을 비스듬히 눕히고 있었다. 원래도 순한 눈매가 천진하게 휘니 약간 해맑은 어린아이 같아서 해인은 결국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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