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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1) (6/17)

6.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1)

“뭐 하고?”

해인이 덮어진 노트북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서해빛은 여전히 책상에 엎드린 채 해인을 바라보다가 작게 ‘음.’ 하고 소리를 흘렸다.

“그냥 이러고 있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엎드려 있던 해빛이 상체를 일으키고 해인을 정면으로 마주 봐 왔다. 그 순간 진동 벨이 울렸고 먼저 일어선 것은 해빛이었다.

“제가 가져 올게요. 앉아 있어요.”

“아, 응.”

주춤거렸던 몸을 다시 앉히고 해인은 음료를 받으러 가는 해빛을 보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가 다시 껐다.

“오늘은 아아 안 드시네요.”

탁, 긴 컵에 담긴 하얀 요거트 스무디가 해인의 앞에 놓였고 해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성비 때문에 빙의하기 전에는 좀 먹었던 것 같은데 빙의하고 나서, 오피스텔에서 쫓겨나고 개거지가 되기 전까지는 단 한 입도 먹지 않았다.

두꺼운 빨대로 한 입 빨아들이니 차가운 슬러시와 새콤하고 달콤한 요거트 향이 화하게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거지. 오랜만에 먹는 맛에 해인은 방실방실 웃으며 쪽쪽 빨아먹었다.

“그거 좋아하시나 봐요?”

“아.”

웃음기 서린 물음이 들리고 나서야 해인은 자신이 너무 정신없이 먹었다는 걸 깨닫고 몸을 뒤로 물렸다.

“응, 맛있어.”

“그래요? 뭔가 좀 의외인데 어울리네요.”

의외인데 어울린다는 건 의외라는 걸까, 어울린다는 걸까. 무슨 의미인지 잘 파악할 수가 없어 해인은 그저 웃어넘겼다. 해빛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고 나서야 해인도 다시 요거트 스무디를 먹기 시작했다.

곧 4교시가 시작될 시간이라 그런지 어느새 카페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꽤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정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쳐다보던 해인이 문득 옆얼굴을 찌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고개가 다 돌아가기 전에 해빛과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계속 눈을 맞추는 해빛에 해인은 고개를 약간 까딱거렸다.

“왜? 할 말 있어?”

“오늘은 모자 안 쓰셨네요.”

“아.”

작게 탄성한 해인이 ‘응.’이라고 덧붙였다. 해인은 아무것도 덮어지지 않은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건드렸다. 매일 덮고 있던 게 없으니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시야가 잘 보여서 편했다.

“얼굴 보기 더 편해서 좋네요.”

앞으로도 벗고 다녀요. 부드럽게 권유하는 목소리에 해인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모자를 쓰면 불편하기는 했지만 백담호의 호감도가 10까지 오를 때까지 쓰고 다녀야만 했다. 전보다는 백담호가 자신의 얼굴을 덜 싫어하는 것 같긴 했지만, 말 그대로 덜 싫어하는 거지, 싫어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백담호의 속내를 정확히 모르니 안전하게 모자를 쓰고 다니는 편이 나았다. 곧 호감도 10이 얼마 남지도 않기도 했고 사실 백담호랑 있으면 자주 시선이 쏠렸는데 그 시선을 무시하기에 챙이 큰 모자는 제격이었다. 게다가 다음 주에도 백담호가 나오지 않거나 모자를 안 주면 그때 다시 살 생각이었기에 해인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싫다고 대답하기도 그래 해인은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막상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애매했다. 둘은 학년도 달랐고 가끔가다 대화를 하긴 했지만 무언가 함께한 일도 없었다. 보통 친구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해인은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이곳에 마땅한 친구라고 할 게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서준과는 친분이 두텁기는 했지만 그와의 관계와 해빛과의 관계는 결이 많이 달랐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해인의 속내는 점점 다급해져 갔다. 괜히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해빛을 쳐다보니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해인과 해빛의 유일한 공통사는 교양 하나와 백담호밖에 없었다.

둘 중에 고민하다가 해인은 차라리 교양이 낫겠다 싶어 교양을 택했다. 해빛하고 백담호에 대해 나눌 이야기도 없고 아직 해인은 백담호의 이름을 올릴 만큼 그날의 기억이 정리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백담호의 미래 연인을 앞에 두고 있으니 죄책감까지 느껴질 게 뻔했다.

“그보다 너 주문 팀플은 다 했어?”

‘주문-주거와 문화-’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해빛의 표정이 아주 약간 움찔거렸다. 정말 짧은 찰나라 해인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의아하게 해빛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문 팀플이요….”

“응, 너네는 장소 어디로 정했어?”

“뭐…. 그냥 적당히 정했어요.”

모호한 답에 해인은 자신이 괜한 걸 물었나 싶었다. 어쩐지 분위기도 갑자기 안 좋아진 것 같아 어쩔 줄 몰라 눈만 깜빡거리니 해빛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원래 팀플이라는 게 그냥 다 죽이고 싶고 그런 거죠. 그렇죠?”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평소처럼 웃는 얼굴에 비해 목소리가 살벌해 앞에 있는 사람이 해빛인데 해빛이 아닌 거 같았다.

착해 빠진 서해빛 입에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지나치게 신선해 해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란 표정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해빛은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장난이에요.”

“아, 그렇지?”

장난이라는 말에 해인은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치고는 여전히 눈이 서늘해 보였지만 그건 아마 자신이 착각이라고 치부하고 넘겨버렸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백담호 선배랑 같은 조였죠?”

“아…. 그러게.”

해인만 아니었다면 원래대로 서해빛과 백담호가 같은 조가 되었을 텐데. 해인은 마음이 껄끄러웠다. 게다가 백담호와 입까지 맞췄다…. 입을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입과 입을 부딪치기까지 했다. 서해빛과 있으면 자꾸 생각이 났고 어쩐지 미약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자꾸만 깊어지려는 생각을 해인은 애써 차단하려 애를 썼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호감도가 3까지 올랐으니까 괜찮았다. 이제 얼른 10까지만 올리고 소원권을 획득하면 된다. 해인이 오피스텔로 돌아가게 되면 백담호에게 먼저 다가갈 일은 없을 거고, 둘은 서서히 자연스럽게 멀어질 거다. 그가 멀어지는 자신을 애써 붙잡지는 않을 것이니 관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 원래대로.

“선배네는 잘 되어 가요?”

“응, 다들 잘 참여해서 금방 할 거 같아.”

“부럽네요. 그러고 보니 선배.”

요거트 스무디를 마시던 해인이 대답 대신 해빛과 눈을 맞췄다.

“백담호 선배랑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어요? 전에는 말도 잘 안 하시지 않았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하긴 해빛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죽일 듯 쳐다보던 백담호와 눈치만 보던 자신이 갑자기 옆자리에 앉고 말을 하니 황당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빛의 표정은 놀라워하기보다는 어딘가 부러움, 불만 그런 부류의 느낌이 느껴졌다. 부러운 건가…? 아직 백담호와 친밀한 것 같지 않아 보이니 갑자기 친해진 자신이 부럽거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호는 정말 친해지기 힘드니까…. 해인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마 포션을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 더 격렬하게 깨닫고 있었겠지. 머리도 깨질 뻔하고….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서해빛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해인은 죄책감을 무시할 수 없어 조용하게 말했다.

“백담호는 탄산음료를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이온음료는 좋아하는 것 같아.”

“…네?”

“그리고 곰 젤리도 꽤 좋아하더라. 그리고 먹여 주는 걸 좋아해.”

“…먹여 줘?”

“그리고 음…. 친해지면 생각보단.”

다정하다?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과 백담호 사이에 다정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비록 공부를 못 한다니까 가르쳐 주고-괴로웠지만- 술 취하니까 적어도 챙겨 주긴 했고, 같은 조 됐다고 데려가 주긴 했지만.

그래도 백담호에게 다정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말을 잠시 고르느라 입을 다문 해인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더라.”

“아…. 그렇구나.”

해인은 자신이 아는 한에서 좋은 정보를 해빛에게 넘겨줬다. 위에 말한 것들을 자신이 했을 때도 호감도가 올랐으니 후에 해빛이 하면 더 폭발적인 효과를 낼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백담호는 서해빛에게 관대했으니까. 관대한 동시에 잔혹했지만, 사람 취급도 하기 싫어하는 방해인에 비하면 좋은 출발점이었다.

해인은 이제 알아서 힘내라는 의미로 가볍게 미소를 지어 줬고 해빛은 얼떨떨한 눈으로 해인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더 많이 친하신가 봐요.”

좀, 많이 놀랍네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중얼거리는 해빛의 말에 해인은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고 생각하며 조금 녹아 묽어진 요거트 스무디를 마셨다.

“음.”

해빛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카페 창밖을 쳐다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두드렸다. 대화가 끊겼고 조용한 공기 속에 툭, 툭, 툭 손톱과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해인은 조금 굳어 있는 해빛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선배.”

“응?”

해인의 앞으로 하얀색의 휴대폰이 내밀어졌다. 화면에는 키패드 화면이 켜져 있었다. 갑자기 뭔가 싶어 해인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니 휴대폰이 살짝 흔들렸다.

“선배 번호 바뀌셨더라고요, 번호 좀 다시 찍어 주세요.”

$고민에 잠겨 굳었던 얼굴은 그새 나긋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번호가 바뀌었다고…? 해인은 난생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눈이 조금 커졌다. 애초에 서해빛하고 방해인이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기는 했다. 해인이 알기로는 자신이 빙의했을 시점은 아직 스토리가 제대로 진행되기 전이었다. 해인은 거의 <그레비티>의 초반부에 빙의했으니까.

무언가 자신이 몰랐던 일이 벌어진 건가. 자신이 갑자기 빙의한 것처럼 원래의 방해인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들었다. 이럴 때 방해인의 기억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빙의 전 방해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배?”

휴대폰을 해인에게 내밀고 있던 해빛이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어 해인은 떨떠름하게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이미 있었다는데 안 주기에도 좀 그래 제 번호를 친 다음 해빛에게 다시 건네었다. 휴대폰을 받아 든 해빛이 생각보다 기쁜 기색을 보여 해인은 기분이 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머니 속에 있던 해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고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해빛의 번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 번호예요. 저장해 주세요.”

“그래.”

전화가 뚝, 끊기고 해인은 ‘서해빛’이라고 저장했다. 그렇게 해인의 폰에는 5개였던 연락처가 이제 6개가 되었다. 스크롤을 내릴 필요도 없는 연락처 목록에는 ‘강서준, 방해우, 방해윤, 서해빛, 아버지, 어머니’가 다였다. 참 단출한 인간관계였다. 심지어 저 중 4명은 가족이었고 1명은 오피스텔 관리인이었다.

그 사이에 있는 서해빛이라는 이름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져 해인은 물끄러미 보다가 부재중이 찍힌 최근 기록을 들어갔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지만, 해인이 서너 번 전화를 걸었던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 봤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해인이 원래 알던 번호의 주인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 번호를 보다 해인은 휴대폰을 꺼 버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해빛은 전보다 훨씬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는 활짝 웃었다.

“선배.”

“응.”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해인을 바라보는 해빛의 옅은 홍채가 지나치게 반짝였다. 선배에서 형이라고 불린다고 엄청 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호칭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해빛이 그 별 의미 없는 호칭에 기대해 버리면 그걸로 자신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면 해인에게는 더 이상 별 의미 없는 게 아니게 되어 버린다.

전화번호는 삭제하고 차단하면 그만이었지만, 호칭은 별거 아닌 듯 보이면서도 정리하기 힘든 것 중에 하나였다. 선배라고 계속 부르다가 멀어지는 것과 선배에서 형이라고 부르다가 멀어지는 것은 많이 달랐다.

서해빛은 참 좋은 사람이었고 그건 해인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 해인이 서해빛과 백담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누구이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해빛이기에, 해인은 그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형 같은 그런 친밀한 뜻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음, 미안. 그냥 전처럼 계속 불러 줘.”

해인은 조금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거절을 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해빛은 놀란 눈으로 해인을 쳐다봤다. 잠시간 정적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해빛이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좀 양심 없었죠.”

양심까지 운운하는 말에 해인은 되레 자신이 당황에 고개를 저었다. 형이라고 부르는 게 왜 양심이 없는 건가 싶었다.

“아니야, 뭔 양심까지야. 그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런가요?”

순식간에 둘 사이의 분위기는 처음과 달리 굳어 버렸다. 해빛은 어쩐지 묘한 눈으로 해인의 얼굴을 보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턱을 괴었다. 그 탓에 해빛의 입은 가려져 그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지만 좋지 못한 건 확실했다.

해인도 그걸 알았지만, 딱히 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백담호 호감도만 10까지 찍고 오피스텔로 돌아가면 해인은 백담호뿐만 아니라 해빛에게도 거리를 둘 생각이었으니. 그러니 이제 정말 10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기, 가까워졌던 사람들에게 선을 긋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해인은 제 앞에서 아직도 거절당한 여파가 좀 남았는지 눈치를 보는 해빛을 잔잔하게 바라봤다. 해인이 추측하는 해빛의 예상 호감도는 20 이상. 이유는 강서준의 호감도로 추측할 수 있었다. 강서준의 호감도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0이었고 그때 플레이어와의 관계에 ‘길가다가 보면 반갑게 인사할 상대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해빛이 하는 행동을 보면 길 가다가 반갑게 인사는 무슨, 마주치면 시골 똥개처럼 달라붙어 온다. 강서준이 자신을 보고 똥개처럼 달라붙은 적은 없으니 필시 서해빛은 20 이상일 게 분명하다.

그 탓에 해인은 이제는 서해빛이 공략 인물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해빛의 호감도를 올리기는 쉬웠을지라도 소원권을 얻고 나서 원래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 백담호만으로도 조금 골이 아픈데 서해빛이 천진하게 웃으면서 계속 다가오면 밀어내기가 곤란했다.

“선배 미안해요. 그런데 혹시 형이라고 왜 부르면 안 되는지 알려 줄 수 있어요?”

해빛이 드디어 괴었던 턱을 떨어트리고 해인을 쳐다봤다. 드러난 해빛의 표정은 눈치 보는 어린 강아지처럼 안쓰럽게 비추었다. 왜 부르면 안 되냐고? 이제 백담호 호감도 10을 찍으면 해빛과도 거리를 둘 거라고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해인은 빠르게 적당한 이유를 머리에서 골라내었다.

“아, 그냥 좀 부담스러워서…?”

“…그렇구나. 제가 싫은 건 아니죠?”

자신을 향하는 옅은 눈빛이 간절한 빛을 띠고 있어 해인은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응, 안 싫어해.”

“그거… 다행이네요.”

제 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 건지 해빛의 대답은 여전히 의기소침했지만 해인은 더 이상 정정해 주지 않았다. 정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화가 단절되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해인은 시선을 돌렸다. 기가 죽은 해빛을 계속 보다간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고 말할 것 같았다. 너무 매정했나….

창밖을 쳐다보니 분명 아까까지 맑았던 하늘을 까만 구름이 점점 뒤덮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오후에 소나기가 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이대로 먹구름만 껴있고 비는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해인은 생각했다. 우산 안 들고 왔는데 비 오면 안 되는데.

지잉-.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해인의 폰이 진동했다. 해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해빛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폰으로 쏠렸고 켜진 화면에는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백담호: 방해인] 오전 11:02

* * *

해빛은 분위기가 이상해져도 꿋꿋하게 해인하고 같이 있다가 한 20분쯤 지나니 알아서 전처럼 해맑아졌다. 그의 강한 회복력을 해인은 새삼 감탄했다. 하긴, 겨우 형이라고 부르는 거 거절당했다고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웃기긴 했다. 다시 넉살 좋게 말을 붙여 오니 해인은 결국 전처럼 대꾸해 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시 수업 시간이 다가와 해인과 해빛은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너 정말 밥 안 먹어도 돼?”

“네, 아까 샌드위치 먹었잖아요. 괜찮아요.”

이대로 이 교양까지 끝나면 해빛은 바로 알바를 하러 갈 거고 그러면 저녁을 한 9시가 돼서야 먹어야 했다. 밥도 잘 먹는 애가 겨우 샌드위치로 힘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제 가방에 있는 지렁이 젤리를 꺼내서 해빛에게 무심히 건넸다. 멀뚱멀뚱 그걸 해빛이 보고만 있자 해인은 작게 속삭였다.

“배고프면 먹어.”

“저 주는 거예요?”

“응.”

그깟 젤리가 뭐라고 해빛은 대단한 거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했다. 아까의 일이 마음에 조금 걸렸던 해인은 남모르게 그 젤리에 제 미안함을 담았기에 씁쓸한 눈으로 해빛을 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고마워요, 선배. 잘 먹을게요.”

“응.”

해빛은 보스락보스락 소리를 내며 해인에게 받은 지렁이 젤리를 소중히 제 가방에 넣었다. 강의실에 점점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해빛은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해인은 그가 누굴 찾는지 알 것 같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백담호 오늘 안 와.”

“네?”

“백담호 오늘 안 올 거라고.”

마지막으로 백담호에게 보낸 해인의 마지막 메시지 옆엔 1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해인이 휴대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나오세요? 왜요?”

반사적으로 ‘러트 왔어’라고 말하려다가 멈칫거렸다. 이곳에서 러트나 히트사이클이 숨길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게 익숙하지 않은 해인은 함부로 말해도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하는 상대가 해빛이다 보니 괜한 오해를 만들 것 같아 해인은 다른 이유를 찾았다.

“어…. 아파. 몸살 왔대.”

뭐…. 증상은 비슷해 보였으니까 괜찮겠지. 둘 다 열나고 비실비실 거리는 게 똑같았다.

“아 그래서 수요일에도 안 나오셨구나.”

“수요일?”

“네.”

수요일이라는 말에 해인은 자연스럽게 백담호의 시간표를 떠올렸다. 대부분 겹치는 시간표였지만 단 하루 전혀 다른 날이 수요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백담호는 그때 교양 하나가 더 있었지. 그것도 서해빛이랑 같이 듣는구나.

백담호와 서해빛이 함께하는 수업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고 나니 해인은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구나.”

“그럼 계속 안 나왔어요?”

“아니, 화요일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했어.”

그 뒤에 자신이 한 짓 때문에 난리가 났지만. 해인은 그날 일이 다시 떠올라 수치스러웠다. 백담호 얼굴을 어떻게 보지 싶으면서도 오히려 백담호 쪽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것 같기도 했다.

“저녁까지…. 저녁까지 같이 있으셨나 봐요.”

해빛은 계속 백담호에 대해 물어 왔고 해인은 사근사근 대답해 줬다. 백담호가 아프기도 하고 자신과 같이 있었다니까 신경이 쓰이나 보다.

“으응, 과제 때문에 만났다가 저녁에 술 마셨거든.”

“둘이요?”

“아니 아니, 같은 조 사람도 있어서 셋이.”

“그래요? 재밌었겠네요.”

재밌었나…. 그러고 보니 황정운, 걔는 어떻게 된 거지. 그대로 두고 나온 것 같은데. 이제야 떠오르는 황정운의 행방에 해인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하필 또 피피티 담당이 저와 황정운이라 해인은 강의실을 눈으로 끝까지 살펴봤지만, 황정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담호 선배가 몸살까지 날 정도면 밤 새셨나 봐요.”

“아, 그건 아닌데. 걔가 술이 약한가 봐.”

밤을 샜다는 말에 조금 찔린 해인은 다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백담호는 술이 말술이었다. 원작에서 말하길 소주를 혼자 네 병을 깐다고 나온 적이 있었다.

해빛이 “그래요? 의외네요.”라고 대답하고 더 이상 묻지 않자 해인은 안심하며 책상 위에 늘어져 엎드렸다. 그날 있었던 일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구해야 할 극비였다.

“선배.”

해인이 고개를 돌려 해빛을 보려는데,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순간 해인은 서해빛이 자신을 부른 것도 잊고 상체를 벌떡 일으켜 황급히 폰을 꺼내 들었다.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빠르게 화면을 두 번 터치하자 잠금 화면이 떴고 기다리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백담호: 수업 끝나면 말해.] 오후 12:54

옆에서 해빛이 보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해인은 채팅창을 열어 ‘응’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 탓에 해인과 백담호의 메시지 내용이 원치 않게 그대로 해빛의 눈에 들어왔다.

‘나 먼저 들어가 볼게,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오전 2시 48분.

‘아, 나 거기에 모자 두고 나왔다.’

오전 3시 10분

날짜는 수요일이었다. 해인과 백담호가 술을 마셨다는 다음날 새벽. 어디에 모자를 두고 왔다는 걸까. 옅은 색의 홍채가 어두운 빛을 띠다가 뒤늦게 해빛은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의식한 해인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 않게 눈을 휘었다.

“아, 미안. 나 불렀지. 왜?”

“저랑도 술 마셔요. 선배.”

평소처럼 맹하던 해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곤란함에 물들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해인의 속내를 해빛은 약간은 알 것 같아 애처롭게 눈썹을 늘어트렸다.

“이것도 거절하실 건가요?”

“어….”

해인의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표정과 말투에 해인이 말려들었다. 그걸 눈치챈 해빛은 더욱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전 꽤 형…. 아니지. 형이라고 부르지 말랬죠. 선배랑 친하다고 여겼는데 선배는 아닌가 봐요. 요즘 인사도 잘 안 받아 주려 하고 학식도 같이 먹기로 해 놓고 그 뒤로 한 번도 못 먹었는데….”

“어어…….”

여기서 더 친해지면 안 되는데. 해인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입은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마시자….”

해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해빛의 표정은 순식간에 밝게 바뀌었다. 그 표정을 보니 해인은 더욱 복잡해졌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걸 알아 체념했다.

해인은 유독 해빛에게 약했다.

“정말이죠? 그럼 10월 첫째 주 토요일은 어떠세요?”

“10월 첫째 주 토요일?”

약속을 잡자마자 바로 날짜가 잡혔다. 원래 보통은 ‘우리 술 먹자!’ ‘그래! 언제?’ ‘다음에 시간 될 때 날 잡고.’ ‘그래!’ 이러고 1년이 지나는 게 정석 아니었나.

생각보다 추진력 있는 해빛의 행동에 해인은 괜히 휴대폰을 켜 캘린더를 보는 척했다. 그러나 역시나 10월 첫째 주 토요일에 뭐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해인은 비어 있는 칸을 허탈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마요. 선배.”

“으응.”

과하게 반짝이는 눈을 보자니 절대로 이 약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해인은 슬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가 들어왔고 지겨운 수업이 시작되었다. 해빛은 방금까지 신나게 대화하던 게 무색할 만큼 금세 빠르게 집중했고 해인은 힘이 빠져 늘어졌다.

10월이라…. 지금이 9월 셋째 주니 2주 정도 남았다. 그 2주 안에 과연 백담호 호감도는 10을 찍을 수 있을까? 지금이 3이니 7만 올리면 된다. -20에서 시작해서 3까지 3주 안에 올렸다. 그러니까 3주 안에 호감도를 23이나 올렸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합쳐서 보니 새삼 자신이 정말 열심히 했구나 싶었다. 또 많은 변화가 생겼구나 싶기도 했다. 멍한 얼굴로 해인은 아무것도 써지지 않은 칠판을 쳐다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백담호와 호감도, 오피스텔, 서해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 * *

수업이 끝나 갈 즈음이 되니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다. 계속 구름만 잔뜩 껴 있고 비는 안 오길래 이대로 지나가나 싶었더니 날씨 예보는 정확했다. 오후 4시쯤 올 거라더니 3시 30분부터 오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은 언제나 틀리지 않고 일어난다.

“비 오네요.”

“그러게.”

주섬주섬 교재를 가방에 넣던 해빛이 창밖을 쳐다봤다.

“오늘 소나기가 온다고 하긴 했죠. 선배, 우산 있어요?”

우산은 없었다. 하지만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그럼 갈까요?”

“응.”

백담호가 아니라 해빛과 나가는 강의실이 어쩐지 어색했다.

“비가 오려고 해서 그랬나, 아까 그렇게 습하더니.”

“그러게.”

옆에서 떠드는 해빛의 말에 해인은 적당히 대꾸하며 메신저 어플을 들어갔다. 아직 백담호에게 끝났다고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차라리 둘이 만나게 할까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상태의 둘이 만난다고 뭐가 크게 변할 거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백담호는 서해빛이랑 같이 나오는 자신을 아니꼬워할 거고 서해빛은 자신을 만나러 온 백담호를 보고 기분이 안 좋아질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기에 해인은 해빛과 헤어진 다음에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 때문이지. 모자 때문이려나. 하지만 그런 거라면 월요일에 줘도 되는데.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입구로 나왔고 해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뭘 두고 나왔다고 먼저 가라고 해빛에게 말하려는 참이었다.

“아, 해빛아 나…. 어?”

고개를 돌리니 백담호가 건물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얇은 남색 셔츠를 입은 채 주머니에 손을 꽂고 바닥을 보고 있던 고개가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까만 눈동자가 해인을 향했다.

“선배, 왜요?”

자신을 불러 놓고 갑자기 옆을 넋 놓고 쳐다보는 해인에 해빛의 고개도 자동으로 돌아갔다. 아, 해빛의 작게 탄성했다.

안 좋은 일은 언제나 틀리지 않고 일어난다.

해인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상황이 오고 말았다. 세 사람의 시간만 멈춘 듯이 아무도 움직이지도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넘칠 듯 말 듯 한 긴장감이 해인을 옭아매어 오던 찰나 작은 소리에 긴장감은 단숨에 흐트러졌다.

“뭘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굴어.”

백담호가 나긋하게 걸어왔다. 두 눈에서 불쾌함보다는 즐거움이 느껴지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백담호는 해빛을 지나쳤다. 해빛의 시선이 백담호의 움직임을 따라갔고 그러다 백담호의 손에 들린 검은 볼 캡을 발견했다. 볼 캡은 해인이 쓰던 것처럼 컸다.

“끝나면 연락하라니까 왜 안 했어.”

“아….”

당황한 해인이 동그래진 눈으로 백담호를 쳐다봤다가 해빛을 쳐다봤다. 어, 이게 아닌데. 해빛은 표정이 굳은 채 백담호를 쳐다봤고 백담호는 해빛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이게 아닌데.

“그러는 넌 왜 벌써 여기 있어?”

조금 원망하는 투였다. 백담호가 자신이 끝났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온 게 절대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해인은 오늘은 별일 없이 넘어가고 싶었기 때문일까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날카로웠다.

비가 오면 사람은 저기압이 된다고 했다. 단순히 이유 없는 짜증을 포장하려는 핑계일 수도 있었지만 해인은 정말 비가 오는 날을 싫어했다.

“그래서 짜증 났어?”

눈치 빠른 백담호는 묘하게 날이 선 말투를 느끼고 담담하게 물어 왔다. 해인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미안.”

“아…. 선배. 약속 있으셨구나. 저 이만 가 볼게요. 이따 연락할게요!”

굳은 채 서 있던 해빛이 빠르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해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도 유독 명랑한 목소리라 백담호도 해빛을 쳐다봤고 해빛은 또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사라졌다.

해빛이 사라지자 해인은 백담호의 눈도 못 마주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분명 메시지 할 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직접 마주하니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방금 자신이 괜히 백담호한테 짜증을 부려 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뒤늦게 민망함과 곤란함이 한 번에 밀려와 숙인 해인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울상이 되었다가 일그러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정말, 그날 백담호가 초반에 멈춰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더 갔더라면 분명 자신은 너무 창피해 혀를 깨물고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백담호조차 아무런 말이 없어 해인은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방해인 뭐 잘못했어? 왜 그렇게 잘못한 애새끼처럼 굴어.”

고개 들어. 해인의 머리가 드디어 천천히 들어 올려져 백담호와 눈을 맞췄다. 백담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고 그의 머리 위에는 [호감도 3]이 보이는 찰나 곧바로 숫자가 바뀌었다.

[호감도 4],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올라간 호감도에 해인은 순간 포션 효과가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의심해야 했다.

“쪽팔려, 해인아?”

“어, 어?”

“나랑 붙어먹다가 혼자만 쏙 간 다음에 보니까 쪽팔리냐고.”

“아니, 언제 부, 붙어먹었어!”

“그러네. 붙어먹지는 않았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목 아래를 잔뜩 붉힌 채 해인이 백담호를 쏘아봤다. 없던 일인 척 넘길 줄 알았건만 오히려 더 들쑤시는 게 얄미웠다.

자기는 그런 일이 많아서 그런가, 해인도 완전히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았다. 심지어 해 본 연애도 2년 전이었다. 2년이면 해인을 다시 순수한 상태로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시 발랑 까진 놈. 그런 민망한 일을 길다가 넘어진 것 같은 해프닝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 대단했다. 백담호가 뻔뻔하게 나오니 해인은 자신도 비슷하게 나오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시는 없을 일이기도 했고.

“그래,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팔짱을 끼고 해인이 턱을 쳐들었다. 방금까지 어쩔 줄 몰라 하던 게 순식간에 태를 바꾸자 백담호는 짓궂은 태로 해인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그냥 넘겨. 첫 키스였는데.”

“……?”

해인은 살짝 벌어진 입으로 백담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픽하고 비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구라 까네.”

어디서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거짓말을. 딱히 원작에서 백담호의 연애 과거사가 자세히 나온 적은 없었지만 백담호가 이 나이 먹고 키스도 못 해 봤을 놈은 아니었다.

서해빛은 그럴 수 있어도 백담호는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원작 방해인도 첫 키스일 수는 있어도 백담호는 아니었다. 자기를 좆만이로 보냐고 묻는 주제에 오히려 백담호가 해인을 좆만이로 보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원작을 몰랐어도, 아무것도 몰랐어도 해인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삐죽하게 눈을 찡그리고 백담호를 흘겨보니 그는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웃는 건지 어이없어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진짜 잘 아네.”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입매가 움찔거리는 걸 보니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초등학교 때부터 내 뒤를 캐내긴 했지.”

“어?”

“뭘 모르는 척이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걱정 마, 신고는 안 할게. 라고 백담호가 덧붙였지만 해인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백담호랑 방해인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다는 사실이 좀, 많이 놀라웠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오래된 사이였구나 싶었다. 근데 뒤까지 캤다고…. 방해인이 백담호를 얼마나 이겨 먹고 싶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첫 키스라고 거짓말 칠 때는 씨알도 안 먹힌다는 듯 비웃더니 갑자기 뒤 캔 거 안다니까 해인은 넋을 놓았다. 조금 놀란 눈으로 해인이 여전히 백담호를 보자 그는 ‘정말, 신고 안 한다고. 사실 예전에는 할 뻔했는데 지금은 정말 할 생각 없어.’라고 직접 확인까지 시켜 주며 해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해인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자 백담호는 쉽게 손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몸을 조금 숙이고는 물었다.

“너는?”

첫 키스야?

비가 와서 그런지 백담호의 눈동자가 더욱 짙게 보였다. 해인은 그 까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보다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게 무슨 키스야. 뽀뽀지. 해인이 손바닥으로 백담호의 얼굴을 조금 뒤로 밀어내자 조금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뒤로 물렸다.

“아, 그런가. 그럼 뽀뽀는 해 봤어?”

백담호는 대체 뭐가 그리 궁금한 건지 계속 캐물었다. 알아서 쓸 데도 없고 별 의미도 없는 당연한 질문들이 계속되자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원생들도 하는 게 뽀뽀였다.

당연하게 끄덕이는 해인을 조금 묘한 기색으로 백담호가 쳐다봤고 해인은 어디 한 번 더 해 보라는 듯한 눈으로 그를 흘겼다. 하지만 백담호는 더 이상 물어 오지 않았고 정적이 감돌 것 같아 해인이 말을 꺼냈다.

백담호가 자꾸 뻘 소리를 해서 아까보다는 민망함이 줄었지만 해인은 아직 정적이오면 숨이 조금 막힐 것 같았다.

“그보다 무슨 일로 온 거야?”

“모자 두고 갔다며.”

해인의 머리에 까만 모자가 쓰였다. 시야가 반쯤 가려졌지만 거슬림보다는 익숙함이 더 강하게 느꼈다. 모자를 씌워 준 손은 몇 번 모자 꼭대기의 단추를 툭툭 건들다가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정말 모자 주러 온 거야?”

“어.”

학교도 나오지 않아 놓고 겨우 모자를 전해 주러 온 건 아무래도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라는 듯 당당한 대답이 오니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해인은 ‘월요일에 줘도 되는데….’라고 고개를 조금 숙이며 중얼거렸다.

고개가 숙이자 모자챙에 해인의 얼굴이 전부 가려졌다. 정말 더럽게도 큰 모자였다.

“이 뒤에 뭐 할 일 있어?”

자신이 쓰여 줬던 모자를 백담호가 검지로 살짝 들어 올렸다. 들어 올려진 챙 안에 해인과 눈이 마주쳤다. 해인의 눈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니, 없어. 왜?”

“그냥, 그럼 집에 돌아가?”

“응.”

백담호의 손가락 떨어졌고 챙이 다시 훅 내려앉았다. 다시 덮어지는 검은 장막을 보며 해인은 백담호가 왜 자신의 할 일을 물은 건가 고민했다. 역시 뭔가 할 일이 있나? 정말 겨우 모자만 주러 왔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더욱 거세진 빗소리 사이로 백담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서해빛 번호 있어?”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긴장감이 뚝 하고 끊겨 버렸다. 지금까지 하던 대화랑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백담호는 예측할 수 없었다. 늘.

“서해빛 번호 있냐고.”

“응, 있어.”

“그래?”

해인은 이다음 백담호가 할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뒤에 들려오는 물음은 없었고 해인 더욱 의문에 빠져야만 했다. 갑자기 서해빛 번호가 있다는 걸 왜 묻는…. 아, 있으면 안 되나?

방금, 너무 당당하게 있다고 말한 자신이 떠오르면서 해인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서해빛이 떠나면서 자신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같이 나왔을 때는 그렇게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오히려 그 뒤에 호감도는 올랐다. 차라리 백담호가 얼른 다음 말을 해 주기를 해인은 바랐지만, 그는 계속 조용했다.

모자가 또 얼굴을 가려 해인은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스스로 모자를 벗고 백담호의 표정과 그 머리 위에 호감도를 살폈다. 호감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백담호의 표정은 조금 기분 나빠 보였다.

“어…. 지울까?”

“…뭐?”

“서해빛 번호 지울까?”

어차피 자신과 서해빛이 연락할 일은 없었다. 오늘 받아 놓고 이렇게 지우는 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해인에게는 이제 서해빛보다는 백담호의 기분이 먼저였다. 그의 호감도를 빨리 올려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황당하네….”

바람 빠지듯 흘러나오는 말소리에 양손으로 모자를 꽉 쥔 해인은 그새 백담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없다고 구라를 쳤어야 했는데…. 해인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백담호는 해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뭘 지워, 그냥 물어본 거야. 이렇게 보면 눈치는 존나 봐요, 진짜. 사람 무안해지게.”

…지가 눈치 줘 놓고는. 해인은 차마 입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뜬금없이 서해빛 번호 있냐고 물으면 눈치 안 볼 사람이 몇이 나 있을까 싶었다. 백담호 성격상 절대 별 이유 없이 할 질문이 아닌데.

“모자나 쓰고 따라와.”

“엉?”

“따라오라고.”

어, 어디를…? 해인이 뻣뻣하게 굴자 백담호는 친히 어깨에 팔을 둘러 해인을 질질 끌고 갔다.

“아니, 어디 가는데? 나 집에 갈 거야…!”

“그래, 갈 거야, 집.”

“무슨 집?”

백담호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제 손에 들린 우산을 펼쳤다. 우산은 둘이 써도 넉넉할 만큼 컸다. 어정쩡한 걸음으로 해인은 백담호에게 떠밀려 걸어갔고 얼마 가지 않아 단과대 건물 앞 작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중 검은색 승용차 앞에 도착하자 백담호는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백담호는 해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타, 태워 줄게. 집까지.”

“우리 집?”

해인이 차에 타지 않고 있자 백담호는 “어, 너네 집. 빨리 타기나 해.”라고 말하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바람에 해인은 엉겁결에 타고 말았다. 차 안에 타니 차 특유의 방향제 냄새가 풍겨 왔다.

우산을 대충 털어 뒷좌석에 던지고는 백담호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니 아까는 느껴지지 않았던 옅은 단내가 더해졌다. 공간이 밀폐되어서 그런가 갑자기 미약하게 풍기는 향에 해인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구나….

풍기는 페로몬 향에 해인은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예상치도 못하게 백담호의 차에 타게 된 해인은 긴장감과 함께 상황이 주는 어색함에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무릎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차 처음 타 봐? 뭘 그렇게 긴장을 하고 있어.”

안전벨트나 매. 해인은 그제야 안전벨트를 맸지만, 몸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이는 해인의 옆얼굴을 백담호는 힐끗 보고는 재밌다는 듯 웃다가 해인과 달리 편안하게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어디로 가.”

“아.”

해인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학교 근처 원룸이었기에 차로 2분도 안 걸려서 도착하고 말았다.

“여기야?”

“응.”

백담호가 고개를 조금 숙여 창밖으로 보이는 4층짜리 건물을 쳐다봤다.

“존나 좁아 보이네.”

“원룸이 다 그렇지, 뭐….”

저것보다 더 작은 원룸들도 있었지만 백담호는 그걸 알지 못한 채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건물을 쳐다봤다. 해인은 씁쓸하게 백담호를 쳐다보다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모자도 가져다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기까지 했는데 이대로 보내는 건 매너가 없는 행동이지 않을까?

하지만 백담호를 원룸까지 끌어 들이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그랬다. 원룸에 제대로 앉을 곳은 침대밖에 없는데 그러면 해인은 너무 민망할 거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는 건 또….

그런데 뭐라고 물어야 하지? 우리 집에서 쉬다 갈래? 무언가 어감이 단단히 이상했다.

“안 내리고 뭐 해.”

“아.”

벨트는 풀어 놓고 해인이 내리지 않자 백담호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해인은 백담호를 한번 쳐다봤다가 머리 위에 호감도를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에서 차라도 마실래?”

순식간에 차 안에는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만 들려왔다. 백담호는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해인을 쳐다봤고 해인은 생각보다 더 이상해진 분위기에 속으로 당황하는 중이었다.

“또 헛짓거리하네. 빨리 집이나 들어가.”

조금 더 정적이 흐른 후에 백담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빨리 내리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해인은 “어, 응. 그래….”라고 대답하며 빠르게 차문을 열고 내렸다. 공동 현관 앞에 해인이 서자 백담호는 가볍게 눈짓을 하고는 사라졌다.

“아, 미친….”

쪽팔리네. 거절당하니 그건 그거대로 민망해 해인은 뜨겁다 못해 녹을 것 같은 제 얼굴을 문질렀다. 뭔가 거절해서 다행이긴 한데 쪽팔렸다. 그냥 입 다물고 내렸어야 하는걸. 잠시 현관에서 얼굴을 식히고 나서야 해인은 집에 들어갔다.

백담호랑 있으면 쪽팔리는 일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 * *

대충 끼니를 때운 해인은 침대에 몸을 늘어트렸다. 소나기라던 비는 벌써 밤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세차게 퍼부었다. 좁은 공간에 빗소리를 계속 들으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습기가 가득한 원룸 공기가 찐득하게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아 해인은 괜히 신나는 노래를 틀어 놓고 시스템창을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뜨는 광고 창들을 전부 닫아 버리고 바로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그동안 제대로 시스템창을 볼 시간이 없어 해인은 이제야 보상으로 받은 것들을 살폈다.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이 보이지 않을 때 매번 상태창 들어가서 보시는 게 귀찮은 당신! 이 아이템이 그 불편함을 해결해 줄 겁니다! 하트 안에 원하는 공략 인물을 입력하시면 호감도가 오르거나 떨어질 때 자동으로 알림이 옵니다.

(단, 게임을 종료한 상태에서도 알림이 자동으로 갑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설정에서 알림 끄기를 선택해 주세요.)

[공략 인물 위치 지도]

공략 인물을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막막할 때가 있으셨죠? 이 지도에 원하는 공략 인물을 입력하시면 실시간으로 공략 인물의 위치를 알려 줍니다. 이걸 이용해 우연인 척 마주쳐 보는 건 어떨까요? 우연이 계속되면 그건 운명! 공략 인물이 당신을 운명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보세요!

(단, 플레이어의 페널티가 있어 공략 인물이 반경 1km 이내에 있을 때만 알려 줍니다.)

“그놈의 페널티….”

해인은 페널티가 무서운 거라는 것을 포션 사건 때 깨달아 버려 원망스러운 눈으로 시스템창을 쳐다봤다. 구시렁거리면서도 곧바로 호감도 알리미에 백담호를 입력시키고 지도에도 입력시키려다가 멈칫했다.

남의 위치 정보를 자동으로 확인하는 건 사생활 침해 아닐까…? 아무리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백담호는…. 백담호는….

잠시 고민하느라 멈춰 있던 해인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해인은 편리함에 져 버렸다. 네모난 입력창에 백담호의 이름을 입력하고 확인을 누르자 아무것도 떠 있지 않던 지도에 네모난 건물들이 나타났다. 바로 해인의 집 주변 지도였다.

“와, 쩌는데.”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지도를 해인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손으로 쓰윽 만지니 입체처럼 변하기도 했고 다시 쓰윽 만지니 2D로 변했다. 당연하게도 백담호가 지금 해인과 1km 반경에 있지 않을 테니 지도에 뭔가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계속 알려 주는 것도 아니고 겨우 1km 주변에만 있을 때 알려 주는 건데 그 정도 즈음은 괜찮지 않을까. 해인은 자기 합리화를 했다. 차라리 이건 페널티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시시각각 백담호의 위치를 알게 된다면 그건 꽤나 죄책감이 들고 심장이 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이잉-.

“아.”

혼자서 괜한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합리화를 하던 중 침대 옆 핸드폰이 크게 울리자 해인은 괜히 찔려 몸을 움찔거렸다. 원래 핸드폰에 알림이 잘 오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누구한테 온 거지, 올 사람이 없는데. 게임 알림인가? 아닌데, 그런 거 안 오게 해 놓았는데.

해인은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뒤집으니 화면이 자동으로 켜졌다.

[서해빛: 뭐 하세요? 집이세요?] 오후 5:32

“어.”

핸드폰에서 손이 빠르게 떨어졌다. 정말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를 생각했지만, 그중 서해빛은 0.00001퍼센트의 가능성과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했던 일이었다. 신나는 노래가 나오는 휴대폰이 해인에게 곤란함을 안겨 주고 있었다.

설마, 연락을 하겠나 싶었다. 번호는 예의상 주고받는 거고 정말 정말로 급한 일이 생겼을 때만 연락하는 그런 거 아니었나. 휴대폰에 바리케이드라도 쳐진 것처럼 해인의 손이 그 위를 부유하기만 했다.

휴대폰을 만지는 순간 답장을 보내야 할 것 같아 쉽사리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이대로 무시하기에는 마음에 걸릴 게 뻔해 차라리 단답으로 보내서 할 말을 없게 만드는 편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해인은 전생에서부터 상대방과 연락을 하면 뚝뚝 단절되게 만드는 것을 잘했다. 처음에는 모르고 한 거였는데 뒤늦게 자신의 대답이 상대를 할 말 없게 한다는 걸 깨닫고는 더욱 유용하게 쓰곤 했다.

[방해인: ㅇㅇ] 오후 6:01

답장을 보내자마자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바로 답장이 또 왔다. 그런데 이 시간이면 서해빛은 아르바이트 중 아닌가? 아, 거기 사람이 별로 없지.

[서해빛: 아, 집에 들어가셨구나.] 오후 6:03

[서해빛: 전 지금 알바 중이에요.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네요.] 오후 6:04

순간 해인은 ‘거기 비 안 와도 없잖아.’라고 보내려다가 멈칫거렸다. 사실이긴 했는데 어조도 없이 오로지 문장으로만 모든 걸 해석해야 하는 메시지 특성상 시비를 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해인: 그래? 좋겠네.] 오후 06:05

[서해빛: 네 ㅎㅎ 선배는 뭐 하세요?] 오후 6:05

[방해인: 그냥 있어.] 오후 6:05

[서해빛: 아 쉬고 계셨군요!] 오후 6:06

[서해빛: (이모티콘)] 오후 6:06

아, 지금이다.

[방해인: ㅋㅋㅋ] 오후 6 : 07

‘ㅋ’는 정말 신기했다. 하나만 보내면 기분이 나빠 보이고 두 개를 보내면 상대의 말에 할 말이 없어 보였고 세 개 이상을 보내면 그냥 웃은 건데 상대가 할 말을 없게 만든다. 그래서 해인은 ‘ㅋㅋㅋ’를 좋아했다. 해인의 답장 뒤로 채팅창에서 무시하기 힘든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1이 사라진 지 오래였는데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도 답장이 오지 않자 해인이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쉴 때즈음 상단 바에 알림이 떠올랐다.

[서해빛: ㅎㅎ] 오후 6 : 11

해인은 그 별 의미 없는 ‘ㅎㅎ’를 보다가 채팅방에 들어가서 1을 없애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제 서해빛은 다신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겠지. 이렇게 끝나면 대부분 그랬다. 해빛은 딱히 자신에게 잘못한 게 없어 밀어내는 게 조금 미안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모튜브나 보려는 찰나 또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해인은 또 몸을 움찔거렸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강서준]

검은 화면에 떠 있는 이름 보며 해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와, 오늘 방해인 인기 폭발이네.

강서준 전화까지 받으면 오늘 하루 연락한 사람이 3명이나 됐다. 강서준은 백담호와 서해빛과는 결이 다르긴 했지만 이건 해인이 이곳에 온 이후 정말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착신을 밀어 받았다.

“여보세요.”

[아, 해인 씨. 전화 통화 가능하세요?]

밖인지 주변의 소음이 작게 들려왔다.

“네, 가능해요.”

[내일 집에 있으시죠?]

“네. 왜요?”

[내일 먹을 거 만들어서 가져갈까 해서요.]

“아.”

좋아요! 계속 미약하게 가라앉아 있던 해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들떴다. 강서준이 만들어 준 음식은 어쩜 그리 해인의 입맛에 딱 맞춘 건지 어느 식당을 가도 서준의 것을 이길 만한 음식은 없었다.

대부분 가리는 거 없이 먹던 해인의 입맛이 아주 약간 까다로워진 것은 서준 탓임이 분명했다. 슬슬 오피스텔 숙박권을 쓸까 생각하던 찰나였긴 하지만 냉장고를 채워 준다는 데 싫을 리가.

[네네, 그럼 내일 오전에 갈 테니까 비밀번호 문자로 보내 주세요.]

“네, 서준 씨, 내일 봐요!”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해인은 바로 기쁜 마음으로 1층 공동 현관 비밀번호와 자신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바로 보냈다. 내일은 풍요로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 *

토요일 10시, 블라인드로 창문이 다 가려진 좁은 방 안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잔잔하게 깔리고 있었다. 비는 그쳤고 그 탓에 방 안의 온도는 조금 높았다. 반쯤까진 웃통의 하얀 상반신이 고르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거렸다.

띡, 띡, 띡. 띡, 띡. 띡.

버튼이 눌리는 기계음이 울리고 해인의 작은 원룸으로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양손에 큰 아이스 백을 들고 좁은 현관을 지나쳐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서준이었다.

“하….”

아이스 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서준이 조금 몽글몽글 올라온 땀을 닦았다.

“안 더운가.”

자신이 들어왔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는 해인을 쳐다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가까이 보니 앞 머리카락이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게 더운 것 같았다.

그 머리카락을 불편하지 않게 치워 준 서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쪽 창문의 블라인드를 조금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그래도 찬 공기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보나 마나 오랜 시간 밀폐되어 있었을 공간이니 환기가 먼저였다.

자는 해인이 깨지 않게 서준은 자신이 새벽부터 만든 음식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생각보다 냉장고가 작아 몇 개는 들어가지 않아 다시 아이스 백에 집어넣었다.

그다지 어질러진 것은 없었지만 반쯤 꽉 찬 쓰레기통을 치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소설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싱크대와 화장실을 치우고 바닥을 닦으니 더욱 좁은 집 안이 그나마 쾌적해진 느낌이 들어 서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다시 닫고 에어컨을 틀고 나서야 서준은 곤히 자고 있는 해인을 깨웠다.

“해인 씨, 이제 일어나세요.”

“…5, 분만요….”

잠결에 해인이 중얼거리자 서준은 더욱 강하게 해인을 흔들었다.

“벌써 1시가 다 되어 가요.”

책꽂이에 놓인 시계는 11시 2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으어…?”

너무 강하지 않게 빗장뼈 위를 손으로 두드리니 입을 조금 벌리고 자던 해인이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스르르 감았다. 그 모습이 익숙하면서 어색하게 느껴져 서준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해인의 왼쪽 가슴 위를 툭툭 건드렸다.

“해인 씨, 밥 먹어야죠. 벌써 1시가 지났어요.”

“…으…. 벌써 1시…. 지났어요…? 알람 왜 안 울렸지….”

이상…하네…. 서준은 그저 여상하게 웃고 있었다. 눈을 거의 감은 채 해인이 몸을 일으켰고 머리는 부스스하게 잔뜩 까치집을 짓고 있었다.

“먼저 씻으세요.”

“네….”

비척비척 걸어가던 해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서준이 이불을 정리하던 때였다.

쿵-!

“도련님!”

아니, 미친…. 여기 왜 막혀 있어…? 화장실이 아니라 옷장에다가 머리를 박은 해인은 드디어 잠이 확 깨어 제 이마를 문지르며 멍한 얼굴로 옷장을 쳐다봤다. 옷장, 그래, 옷장이었는데 원래 옷장이 이렇게 생겼었나?

일순간 정신이 확 든 탓인가 해인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던 중 해인의 어깨를 붙잡고 뒤를 돌리는 바람에 흐리멍덩한 밤색 눈과 번뜩 떠진 더 짙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왜 옷장에다가 머리를 박아요!”

“어…….”

스스로 이마를 문지르는 해인의 손을 서준이 치우고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니 예상대로 조금 붉어진 살갗이 보였다. 제 이마를 걱정스럽게 보는 서준을 해인은 보다가 뒤늦게야 이곳이 오피스텔이 아니라 원룸이라는 걸 자각했다.

“아, 서준 씨가 깨워 줘서 오피스텔로 착각했나 봐요. 민망하네요.”

전 괜찮아요. 해인은 뒤에서 지켜본 서준이 얼마나 황당할까 창피해 무안한 듯 웃으며 서준을 올려다봤다. 앞머리가 옆으로 까져 있고 그 이마가 붉게 달아올라 있어서 그런지 지어진 미소가 더 어색해 보였고, 그리고….

[호감도 25]

서준 머리 위에 있던 호감도가 24에서 25로 올라갔다. 뜬금없이 올라간 호감도에 해인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심지어 오르기 전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높아진 숫자였다.

“…음?”

저게 왜 올라? 해인이 이상하게 쳐다보던 순간 서준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귀….”

그리고 빠르게 닫았다.

“네?”

제대로 듣지 못한 해인이 되물었지만 서준은 그저 고개만 살짝 흔들 뿐이었다. 어쩐지 당황스러워 보이는 서준의 얼굴에 해인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왜 오른 거지, 웃겼나. 하긴 웃겼을 것 같긴 했다. 그런데 막상 머리를 박았을 뿐인데 오르는 호감도를 보니 기분이 애매했다. 상대가 백담호면 그러려니 넘기겠지만 강서준이라 더욱 묘해진 심정으로 해인은 강서준을 보다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말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이 멍청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 호감도는 편리했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했다.

해인은 정말 알 수가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지러우세요?”

해인이 혼자 표정을 찡그렸다가 머리까지 흔드니 서준은 걱정되는 얼굴로 해인을 들여다봤다. 부딪힌 소리도 꽤 컸기에 서준이 다시 해인의 이마에 손을 뻗을 때 해인이 나직하게 웃으며 서준의 손목을 붙잡고 도리질을 쳤다.

“아뇨, 멀쩡해요. 잠도 이제 완전히 깨서 저 이제 씻으러 갈게요.”

“그럼 다행이네요. 조심하세요.”

“네. 조심할게요.”

해인이 붙잡았던 서준의 손목을 놓자 서준은 자연스럽게 다시 침대를 정리했고 해인은 그런 서준을 짧게 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가 물소리가 새어 나왔고 서준은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평소라면 2분 안에 정리했을 침대를 손이 자꾸 멈칫멈칫하느라 6분이나 걸리고 말았다. 공간이 작아서 그런지, 아니면 침대가 작아서 그런지 전에는 넘겼던 익숙한 체향이 유독 짙게 느껴졌다.

겨우겨우 정돈된 침대 위를 서준은 빤히 쳐다보다가 ‘음….’ 하고 모호한 소리를 흘려보냈다.

“좀 곤란하네.”

서준의 시선은 약간 삐뚤게 개어진 푸른색 이불에 꽂혀 있었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푹 젖은 모습으로 해인이 나왔고 에어컨 덕에 시원해진 방 안과 풍미 가득한 냄새가 그를 반겼다. 수건을 면사포처럼 머리에 쓴 해인은 냄새만으로도 육즙이 느껴져 킁킁거리다가 작은 상에 올려진 음식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비찜이네요?”

윤기가 쟈르륵 흐르는 갈비찜에 국그릇에 담겨 있었고 밥도 직접 해 온 건지 즉석 밥이 아니라 누가 봐도 압력 밥솥에다가 한 밥의 빛깔이었다. 어제 저녁을 대충 먹고 일찍 잠든 터라 오랜 시간 굶은 상태였던 해인의 위장이 맛깔스러운 냄새와 모습에 급격하게 허기짐을 표했다.

오늘 봤던 표정 중 제일 밝은 얼굴이 된 해인이 후다닥 달려가 자리에 앉아 갈비 한 조각을 젓가락과 손으로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맛있으세요?”

해인은 말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고 서준은 그런 해인을 흐뭇하게 보며 ‘많이 먹어요.’라며 덧붙였다. 해인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다른 반찬이 있음에도 해인은 갈비만 집중적으로 먹어 대 빨리 비워지는 그릇 탓에 서준이 보온 통에 있는 갈비를 꺼내 계속 추가해 줘야만 했다.

“아, 잘 먹었다.”

배가 터질 정도로 다 먹어 치운 해인은 몸이 순식간에 무거워진 것 같아 침대 받침대에 등을 기대며 늘어졌다. 만족스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눈을 약간 감은 채 해인은 적당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았다.

그러다 문득, 집이 전보다 깔끔해진 게 느껴졌다. 어제 먹다가 남은 배달 쓰레기도 보이지 않았고 책상 아래 쓰레기통도 깔끔하게 비어져 있었다.

“서준 씨.”

“네.”

“여기도 청소했어요?”

“그렇죠?”

서준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며 해인이 다 먹은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오피스텔에서 서준이 치울 때는 별생각 안 들었는데-솔직히 편했다- 오피스텔이 아니라 자신이 쫓겨난 원룸까지 치우니 왠지 해인은 자신이 악덕 업주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청소는 얼마나 열심히 한 건지 바닥에서 윤이 났다.

권외 밖에 일을 시키는 것 같아 해인은 벌떡 일어서서 상 위의 아직 가져가지 않은 남은 그릇을 모아 싱크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일러를 온수로 틀어 놓고 작은 싱크대에 넣으니 그새 꽉 차 버렸다.

해인은 그걸 잠시 보다가 고무장갑을 끼려는 서준을 제지하고 말했다.

“제가 할게요. 요리도 해서 와 주셨는데 설거지까지 하는 건 조금.”

하지만 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고무장갑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니요, 어차피 해인 씨가 오피스텔에 안 계셔서 크게 할 일도 없는 걸요.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들어가서 쉬세요. 꽤 단호하게 말한 서준이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도와주기에는 주방도 좁았고 고무장갑도 하나였고 다시 들어가기도 뭐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마치 이곳에 빙의하기 전, 제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청소하는 기분이라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자신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거품 가득한 수세미로 그릇을 닦던 서준이 눈으로 옆에 제 눈치를 보는 해인을 힐끔 쳐다보다 살풋 웃었다. 오피스텔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지내더니 원룸이라 그런가, 좌불안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밌었다.

서준은 잠시간 더 아무런 말 없이 옆에서 애처롭게 자신을 쳐다보는 해인의 시선에 속으로 웃다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럼 제가 그릇 헹궈서 주면 닦아 줄래요? 그리고 반찬 통은 아이스백에 넣어 줄 수 있어요?”

그제야 얼굴이 확 펴진 해인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 앞에 있던 아이스백을 가지고 나와 제 발아래 놔두고 서준의 옆에 섰다. 좁은 주방에 남자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 빈틈이 없었다.

서준이 한 덩치 하는 탓에 더욱 주방은 작게 느껴졌고 그 탓에 해인과 서준의 몸이 엇부딪쳤지만 그 누구도 그걸 불편해하지 않았다. 서준이 물로 헹궈 해인에게 건네면 해인은 그걸 새 행주로 물기를 닦았다.

둘 사이에 말은 없었지만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인이 이곳에 온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이 서준이었기에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말이 없다고 어색할 시기는 지나있었다. 최근에는 전보다 급속도로 친밀해진 이유를 생각하며 해인은 그릇을 닦았다. 서준이 자신에게 ‘해인 씨.’라고 불렀던 시점부터 돌이켜 보니 자연스럽게 그날 밤이 새도록 같이 했던 게임이 떠올랐다.

“아.”

해인이 작게 탄성을 내뱉자 서준이 대답 없이 고개를 해인에게로 돌렸다.

“짐승의 숲 몇 구역까지 깼어요? 저번에 하는 거 보니까 지금은 다 깼을 거 같은데.”

“아, 그거.”

아직 다 못 깼어요. 담담한 대답에 해인은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번쩍 뜨고 서준을 쳐다봤다.

“그거…. 네? 아직이요?”

밤에도 몰래 할 정도면 이미 다 깨고도 남았을 텐데?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해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일이 생겨 바빠지기도 했고, 한번 해인 씨랑 같이 하고 나니까 혼자 할 때 좀 재미가 없더라고요.”

“아, 역시 그렇죠? 저도 가끔 인터넷 연결해서 했었는데 가끔 혼자 할 때 좀 지루하긴 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다른 건 혼자 해도 별생각 없는데 게임은 같이 할 때가 더 재밌는 것 같아요.”

조용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해인의 조잘거리는 말소리로 부산스러워졌다. 게임 얘기 나오니까 들뜬 해인을 서준은 약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새 웃으며 대꾸했다.

식기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아이스백에는 조금은 어지럽게 빈 반찬 통이 쌓여 갔다. 해인은 정리에 재능이 없었다. 얼마 안 가 드디어 숟가락과 젓가락을 서준이 건넸고 꽉 차 있던 싱크대가 비워졌다.

“그거, 그 뭐냐. 푸루하의 모험, 미궁의 지하세계는 해 봤어요? 그것도 멀티 가능한데 한번 해 보세요.”

“모르는 사람이랑요?”

해인은 마지막으로 숟가락, 젓가락을 닦아서 통에 꽂아 넣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다 아이스백에 반찬 통이 너무 어지럽게 있는 것 같아 몸을 쭈그리고 앉아 정리했다. 하지만 그다지 변하는 것은 없었다.

“네, 나름 재밌어요.”

“그래요? 근데 제가 좀 낯을 가려서 힘들 것 같네요.”

“아….”

의외네, 라고 해인은 어렴풋이 생각하다 그럴 수 있다고 알아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무장갑을 벗은 서준은 바닥에 쭈그려 앉은 해인에게 다가가 가까이서 보다가 픽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해인 씨, 빨리 오피스텔로 돌아와서 같이해요.”

쭈그린 앉은 탓에 한껏 올려야 서준과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잔잔하게 미동 없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해인은 말없이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밝게 대답하는 해인에 서준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감도 26]

오르는 호감도에 이번엔 의문이 없었다. 같이 돌아가서 게임을 같이 해 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마주 보면서 미소를 짓다가 서준의 시선이 해인의 손 아래로 향했다.

“그런데 해인 씨, 제가 할게요.”

“아.”

해인의 고개도 아래로 향했고 더욱 엉망이 된 가방에 해인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터덜터덜 해인이 안으로 들어갔고 서준이 빠르게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서준은 해인이 유일하게 같이 있어도 별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였다.

* * *

“이제 전 그만 가 볼게요.”

“네, 오늘 감사했어요.”

양손에 다시 아이스백을 들고 서준이 현관을 나섰고 해인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쿵,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자 해인은 묘하게 원룸이 평소보다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닫힌 문을 잠시 보다가 몸을 돌리며 일어나서 처음 휴대폰을 화면을 켰다.

오후 1시 25분. 잠금 화면에 큼지막하게 적힌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넘기던 해인은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아까 서준 씨가 1시 넘었다고 하지 않았나…? 잠결이긴 했어도 똑똑하게 들었다. 1시가 지났다고.

서준이 제게 거짓말을 한 걸 깨닫자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또 속았네.”

서준은 해인이 오피스텔에 살 적 일어나지 않으면 항상 시간을 속이고는 했다. 처음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가끔 자신을 속여 먹었다. 하긴, 숨어서 게임도 했는데 시간 속이는 것쯤이야.

가볍게 혀를 찬 해인은 침대에 누워 모튜브를 보던 중 소리를 뚫고 큰 알림음이 울렸다.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5]로 올랐습니다.

눈앞에 확실하게 떠 있는 건 알림창이었다. 백담호와 강서준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 호감도가 올라가 있을 때가 자주 있었다. 항상 언제 올라가나, 왜 올라가나 궁금했는데 막상 알게 되니 더 모르겠다.

대체 왜 오른 거지?

해인은 보고 있던 먹방 영상을 끄고 바로 메신저를 켜 잠시 고민하다가 제일 무난한 말을 보냈다.

[방해인: 뭐 해] 오후 1:34

보내고 1분 가량이 지났을까, 곧바로 1이 사라져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후다닥 채팅방을 나와 버렸다. 이유는 해인도 몰랐다. 왠지 그냥 나와야 할 같았다.

[백담호: 왜.] 오후 1:35

정말 왜 나갔던 건지 모를 정도로 해인은 답장이 오자마자 바로 다시 채팅창을 열었다.

[방해인: 그냥 궁금해서.] 오후 1:35

보냄과 동시에 1이 사라졌고 띵-, 하는 맑고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알림음이 들렸다.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6]으로 올랐습니다.

겨우 메시지 하나 보냈다고 호감도가 또 올랐다. 순식간에 5를 넘어서 6까지 향한 호감도에 해인은 기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0을 넘어섰기에 이제는 호감도 올리기가 무척 힘들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순조롭게 올라간다.

순조로우니까 좋아야 하는데 또 너무 순조로워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항상 가장 큰 위기는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다가 올 때가 많았다.

애써 떠오르는 여러 가지 불행한 상황들을 묻어 버린 해인이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리니 이미 답장이 와 있었다.

[백담호: 밥 먹어] 오후 1:35

밥 먹는데 호감도가 대체 왜 오른 건지. 차라리 돌직구로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그래, 맛있게 먹’까지 치던 해인은 다시 전부 지워 버렸다. 이유 없이 호감도가 올랐을 때는 단순한 연락으로도 잘 오른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 기회를 쉽게 보낼 수는 없었다.

[방해인: 뭐 먹어? ] 오후 1:37

자신이 조금 늦게 답장해서인지 ‘1’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해인은 이번에는 1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1이 사라져도 후다닥 나가지 않았다.

[백담호: 밥] 오후 1:38

[방해인: 무슨 밥] 오후 1:38

[백담호: 집밥] 오후 1:38

[방해인: 반찬은 뭐야?] 오후 1:39

[백담호: 많아.] 오후 1:39

[방해인: 오 그래? 국은 있어?] 오후 1:40

[백담호: 없어] 오후 1:40

[방해인: 왜 없어?] 오후 1:40

보내자마자 분명 1이 사라졌는데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벌써 3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겨우 ‘왜 없어?’라는 물음이 3분, 아니 이제는 4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해인도 지금 당장 가상으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질문이었다.

해인은 자신이 혹시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어 단조로운 대화를 다시 읽어 봤지만 딱히 모르겠다.

그냥 자신이 백담호에게 관심이 많아 보인다는 정도? 하지만, 이미 백담호에게 관심이 많다고 했으니 그리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봐 놓고 답장이 안 오지?

이제 5분이 지났고 해인은 밥 먹느라 바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자신도 대부분 밥 먹을 때 영상을 보면서 먹기 때문에 그때 연락이 오면 귀찮긴 했었다.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소중한 식사 시간을 방해한 것 일 수도 있다고 여겨져 뒤로 가기를 누르려던 찰나였다.

[백담호: 미친 건가] 오후 1:45

[백담호: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오후 1:45

[백담호: 그럼 차라리 전화를 해.] 오후 1:46

역시, 방해한 게 맞았던 것 같다. 따로따로 보내는 문자보단 전화가 빠르게 끝내는 연락 수단이었다. 이건 백담호가 확실히 자신을 꼽 주는 게 분명해 해인은 제 실수를 깨닫고 황급하게 답장을 보냈다.

[방해인: 밥 먹는 데 방해해서 미안] 오후 1:46

[방해인: 맛있게 먹어. 답장 안 해도 돼.] 오후 1:46

바로 1이 사라졌고 답장은 정말 오지 않았다. 해인도 백담호를 나름 배려해서 한 말이었고 사실 저 말을 안 했더라도 답장이 안 올 것 같았기에 별 생각 없이 메신저 어플을 끄고 아까 보던 먹방 영상을 다시 틀었다.

영상을 재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에 알림에 떠올랐다.

[백담호: ㅈㄴ 빡치네] 오후 1:49

텍스트만으로도 담호의 깊은 빡침이 느껴져 해인은 낭패 어리게 눈썹을 찡그리다가 고심 끝에 귀여운 고양이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봐주라는 의미의 나름 애교 섞인 답장이라고 해인은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의미가 통했는지 백담호는 10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또 빡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이었다.

혹시나 싶어 호감도 살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해인은 안심한 채 다시 먹방 영상을 틀었다.

* * *

월요일 아침, 왜인지 모르겠는데 백담호에게 인사를 건네니 정수리에 주먹이 꽂혔다. 예고도 없이 꽂힌 주먹에 놀랐지만 아프지는 않아 순간 해인은 자신의 머리가 강철 머리가 되었나 했는데 그냥 백담호가 살짝 때린 거였다.

갑자기 왜 맞은 거지. 이유를 물어보니 백담호는 그냥 닥치라고 했다. 짜증이 난 것 같은데 호감도는 떨어지지 않아 해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괜히 물어봤다가 떨어지면 골치 아팠다.

그런데 진짜 왜 맞은 거지.

* * *

“아니, 미친.”

수요일, 해인이 공강인 날이었다. 하지만 해인은 학교 공원 벤치에 앉아 제 휴대폰을 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화공19 황정운: 야, 진짜 ㅈㄴ 미안한데 나 어제 밤에 사고 나서 못 갈 거 같아….] 오후 3:19

[화공19 황정운: ㅅㅂ 진짜 미안하다…. 말한다는 걸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ㅠㅠ] 오후 3:19

[화공19 황정운: (사진)] 오후 3:20

병실로 보이는 풍경과 다리에 깁스를 한 사진이 크게 채팅창을 채웠다. 해인은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모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미간을 찡그렸다가 펴질 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방해인: 괜찮아, 다쳤는데 어떡해. 몸조리 잘해.] 오후 3:22

오늘 약속이 2시 30분이었는데 충분히 먼저 말할 시간이 있지 않았나 싶은 동시에 황정운이 보낸 사진 귀퉁이에 슬쩍 나온 게임기가 하필 해인의 눈에 띄고 말았다. 다리가 다친 거지 손이 다친 게 아니니까 충분히 게임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병원이라는 제한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는 건 알았지만 그럼에도 해인의 짜증이 살짝 치솟았다. 사진 속 게임기를 노려보기만 하다 다친 애한테 또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해 봤자 해결되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해인은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휴대폰을 껐다.

자신 있다며 호언장담하던 황정운을 믿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함께 피피티와 대본을 만들어 담호에게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해인은 아직 다른 팀원들이 보낸 자료를 숙지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팀원의 피치 못할 탈주에 해인은 넋을 놓고 있다가 일단 교내 카페로 향했다. 이왕 나온 김에 차라리 밖에서 다 하고 들어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널널하게 잡아 오늘 하루 안에 다 하려고 했었으니까 혼자 해도 괜찮을 거다. 자신이 피피티를 못 만드는 편도 아니었고.

해인은 그렇게 자꾸만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을 억눌렀다. 하지만, 해인은 몰랐다. 해인의 조 편성은 정말 극과 극이었다는 사실을.

* * *

교내 카페에 자리를 잡은 지 2시간이 넘어가던 때, 해인의 앞의 자몽 에이드는 얼음이 녹아 떫은맛만 느껴졌다. 계속 노트북 화면을 보다 보니 눈이 아팠고 아직도 남은 방대한 양의 자료에 해인은 머리가 아찔했다.

자료 조사를 해서 보내 주는 사람은 강하연, 정수훈이었다. 이 둘은 겉으로 보기에도 절대 버스를 타거나 말없이 잠수를 하지 않을 성격으로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도대체 어디서 정보라도 사 오기라도 한 건지 방대한 분량에 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 정리도 꽤 잘되어 있어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피피티에 다 붙여 넣어 버리고 싶었지만 정리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집에 가서도 해야 할 것 같다는 걸 깨닫자 손이 더 느려지기 시작해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밍밍하고 애매한 자몽향만 나는 에이드를 쪽쪽 빨면서 해인은 아까부터 제 시야 왼쪽 상단에 떠 있는 알림을 쳐다봤다.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 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200m이내에 있습니다.

백담호가 이동할 때마다 숫자가 바뀌었지만 그마나 다행인 건 한번 알림이 뜨면 그 뒤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계속 띵띵, 띵띵, 띵띵거렸더라면 갑자기 혼자 귀를 막고 짜증을 내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해인은 입을 벌린 채 바뀌는 숫자를 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피피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체 채팅방에 황정운이 빠져서 혼자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참고하라고 보내긴 했지만 읽은 건 강하연뿐이었다.

그마저도 도와주고 싶은데 자신이 오늘 바빠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인도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해져만 갔다.

“하아…. 인생 빡세네. 진짜.”

해인은 플라스틱 빨대를 잘근 잘근 씹으며 서서히 느껴지는 허기짐을 참았다. 5시까지 하고 대충 편의점에서 때우고 집으로 들어가든지 다른 카페를 가든지 해야 했다.

한창 해인이 다시 창을 여러 개 띄어 놓고 집중하던 중 누군가가 그의 뒤로 다가왔지만 노트북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몸이 기울어진 해인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선배!”

어깨에 손이 얹어짐과 동시에 해인의 허리가 바짝 세워졌다. 깜짝 놀란 해인이 뒤를 돌아보니 환하게 웃고 있는 해빛이 서 있었다.

“선배, 오늘 공강 아니에요? 학교는 어쩐 일이세요?”

해빛은 자연스럽게 해인의 앞에 착석했다. 해인은 잠시 그를 보다가 조금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거와 문화 피피티 만들기로 했는데 조원이 다쳐서 혼자 만들게 되었네….”

“다쳤다고요? 진짜로 다친 거 맞대요?”

해인은 해빛의 말에 고민하다가 사진도 보냈으니 맞겠지 싶은 마음과 사실은 거짓말이면 화가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빛이 제가 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이번 주에 발표 안 해도 목요일까지 제출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망했어…. 안 그래도 힘들었는데 아는 얼굴을 보니 해인은 본인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며 테이블 위로 몸을 늘어트렸다.

“다른 분들은 바쁘대요?”

“응, 그런 거 같아.”

“할 거 많아요?”

“자료 조사하는 분들이 너무 열심히 하셨네.”

열심히 한 걸 욕할 수는 없었지만 해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반쯤 넋을 놓은 거 같은 해인을 보던 해빛이 슬쩍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저흰 다 끝냈거든요.”

본능이 먼저 “정말?”이라고 외칠 뻔한 걸 해인은 가까스로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해빛과 거리를 둬야 하는 것도 있지만 양심상 같은 조도 아니고 다른 조원한테 도움을 받기에는 미안한 탓이 조금 더 컸다.

“아냐,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지. 괜찮아. 그보다 너 알바 가야 하는 거 아냐? 어서 가 봐.”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며 해인이 다시 무선 마우스를 잡았다. 얼른 가라는 행동이었지만 해빛은 전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런 걸요. 같이 저희 카페 가서 해요.”

“뭐? 너 일해야지. 민폐야. 사장님한테 걸리면 어떡해.”

“거기 사장님 갑부라 카페는 취미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잘 안 와요.”

아, 거기 사장님 갑부였구나…. 해인은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드디어 그 카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어쩐지 사람이 그렇게 없는데 안 망한다 했다.

“그래도 괜찮아. 미안하잖아. 같은 조도 아닌데.”

솔직히 당장이라도 넙죽 고맙다고 하며 쫓아가고 싶었지만 해인은 그런 양심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이거 어때요?”

어차피 저희 술 마시기로 했으니까 그때 형이 맛있는 거 사 줘요. 그럼 안 미안하죠, 선배.

해빛의 눈이 사르르 접히며 해인을 향했다. 해빛은 제 얼굴과 해인이 제게 약하다는 걸 잘 알았고 그걸 이용할 줄도 알았다. 해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해빛은 약간 영악했다. 해인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해빛은 슬쩍, 한 번 더 해인을 건드렸다.

“선후배끼리 이런 거 도와줄 수도 있고 그런 거죠,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그런가…?”

해인이 반짝반짝 웃고 있는 해빛을 보다 시커먼 글자로 가득한 노트북 화면을 봤다.

아…. 해인은 이걸 다시 혼자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해져 버렸다. 해빛과 더는 가까워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도움을 받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혼자 하는 거였더라면 그냥 했겠지만, 이미 같이 하기로 한 과제에 심지어 해빛까지 도와주겠다고 하니 아마 거절을 해 버리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어차피 같이 과제하는 건데…. 모르는 사람이랑도 하는 과제, 차라리 서해빛이 도와준다고 할 때 같이 할걸이라고.

해인은 앞으로 결국 해빛과 함께 했을 때 빠르게 끝날 과제와 덜 힘들 미래에 지고 말았다.

“그래…. 정말 고마워. 내가 꼭 밥 살게.”

“뭘요, 선배. 그럼 갈까요?”

해인은 끄덕이며 노트북을 챙겼고 해빛이 알아서 해인이 먹다 남긴 에이드 컵을 카운터에 놓고 왔다.

* * *

“아, 이 내용은 빼도 될 것 같아요.”

“아, 정말?”

적막한 카페 안에는 오직 둘만 있었다. 카페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그러다 보니 그나마 두어 명 있던 손님들마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로 손님이 이렇게 없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단 한 명도 오지 않아 해빛은 이제는 완전히 해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해인은 혼자 만들 때보단 편안한 표정으로 피피티를 만들었고 옆에서 해빛이 그 많은 양의 자료 중 넣을 만한 내용을 골라 주고 있었다.

빠르게 나가는 진도에 벌써 피피티는 끝물을 보였고 이제 그를 토대로 대충 옆에 휘갈겨 놓은 대본만 정리하면 됐다.

“으으….”

간단한 애니메이션 효과까지 넣고 해인은 해빛이 아까 가져다준,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먹어 치웠다. 다른 카페에서 먹는 것하고 딱히 다르지는 않은데 이토록 사람이 없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창밖에 시선을 뒀다.

“잠깐 쉴까. 눈 아프겠다.”

“약간 뻑뻑하네요.”

해빛이 콧잔등을 조금 찌푸리며 웃었고 해인은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타닥거리던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소리 등 모든 소리가 사라졌고 카페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 정적 속에서 해인은 샌드위치를 느리게 씹으며 해빛이 없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빨리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 게임 할 때 컴퓨터를 오래 하는 건 하나도 안 피곤했는데 하기 싫은 과제로 오래 하려니 너무 피곤했다. 이대로 집 가면 기절할 것 같았다.

해인은 카페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집을 쳐다봤고 해빛은 눈앞의 해인을 쳐다봤다. 해인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띵띵-.

지잉-.

알림음과 긴 의자에 뒤집어진 채 놓인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진동한 핸드폰을 해인이 집어 올리며 시선을 흘끗 위에 뜬 알림창을 쳐다봤다.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 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700m 이내에 있습니다.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 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600m 이내에 있습니다.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500m 이내에 있습니다.

갑자기 훅훅 줄어드는 거리에 해인이 굳은 채 허공을 쳐다봤다. 그 순간 다시 손에 들린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이 켜졌다.

[백담호: 집?] 오후 8:34

그의 위치와 함께 집이냐고 연락이 오니 알 수 없는 긴장감은 더욱 배가 되어 느껴졌다. 채팅창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자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백담호: 너네집 근처에 볼일 있어서 왔는데.] 오후 8:35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 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50m 이내에 있습니다.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 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5m 이내에 있습니다.

카페 창문으로 검은색 승용차가 세워졌다. 해인은 조금 익숙한 차의 형태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차에서 내린 인영은 어두운 하늘에 까맣게 물들어 있었지만 해인은 알아차리고 말았다.

익숙한 키, 익숙한 어깨의 넓이와 그를 이루고 있는 선의 느낌, 익숙한 걸음걸이. 가까워지는 인영이 카페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의해 점점 어둠을 잃어 가고 색을 찾아갔다. 선명하게 보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백담호였다.

해인의 눈이 커진 만큼 백담호의 얼굴도 점점 찡그려졌다. 딸랑-. 문이 열렸고 해인은 입 안에 들키면 안 될 걸 숨기기라도 한 듯이 입을 꽉 다물었고 백담호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안녕.”

해인은 그 인사를 받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가 받았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

해인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있던 서해빛이 여상하게 웃으며 일어서 백담호에게 다가갔다. 백담호는 해인과 조금 떨어진, 카페의 입구에 서서 해인을 가만히 보다가 걸어오는 서해빛을 쳐다봤다.

“죄송해요, 선배. 제가 까먹어서 밤늦게 귀찮은 일 생기셨네요.”

“어.”

해빛은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며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고 백담호는 화를 내지도, 귀찮은 기색도 내비치지 않은 담담한 태로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건넸다. 해인은 저 둘이 대화를 나눌 동안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숨죽였다.

“그래서 방해인, 안녕이라니까.”

서해빛이 조금 앞에 그 뒤에 백담호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해빛은 해인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 아니 선배 하던 거 마저 할까요?”

해인이 아직 백담호의 인사에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해빛은 해인의 옆에 전보다 더 찰싹 붙어 앉아 괜히 해인의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그 탓에 더욱 둘의 어깨가 틈도 없이 붙어 버렸고 해인은 사고가 정지했다. 뻣뻣하게 굳은 해인을 보다 옆에 붙은 서해빛을 본 백담호는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아, 좀 황당하네….”

카페 안이 워낙 조용해서 백담호의 말이 공연 홀처럼 울려 퍼졌다. 그 탓에 해인은 바짝 긴장했고 백담호는 계속 미묘한 웃음을 띤 채 해인의 앞에 앉았다.

“방해인, 입에 풀이라도 칠했어? 왜 말이 없어.”

해인은 그제야 입을 살짝 떨어트렸지만 나오는 말은 ‘아.’ 한 자가 다였다. 머리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빤히 보여 백담호는 해인을 더욱 집요하게 쳐다봤다.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던 해인은 그제야 불안하게 말을 꺼냈다.

“어…. 안녕?”

그렇게 고민하더니 꺼낸 말은 겨우 인사였다. 하지만 해인은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시 정적이 흐르는 때 백담호가 슬쩍 몸을 일으켜 해인의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아, 우리 피피티네.”

백담호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호감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해인은 그가 기분이 나쁜 건지 그냥 그런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정운 토꼈다며.”

“어…. 토낀 건 아니고 사고 났대.”

“그게 그거지. 어쨌든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 아냐.”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 백담호는 해인의 너머를 보듯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네.”

까만 눈이 서해빛을 향했다가 다시 해인에게로 정착했다. 해인이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니 서해빛이 입을 열었다.

“네, 이미 거의 다 끝나 가서요. 괜찮아요, 백담호 선배.”

해빛은 천진하게 웃으며 백담호와 눈을 맞췄다. 해인이 느끼기에도 점점 이상해지는 분위기에 차라리 집에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와…. 착하네. 자기 조도 아니고 다른 조까지 도와주고.”

방해인은 존나 착한 후배도 있어서 좋겠네. 백담호도 해빛의 부드러운 미소에 화답하듯 옅게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분위기는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감사해요. 하지만 저 그렇게 안 착해요. 민망하네요. 그냥 해인 선배가 밥 사 주시기로 해서 그런 거예요.”

“아, 그렇구나.”

둘은 웃고 있었고 해인은 혼란스러운 시선만 왔다 갔다 하며 도망칠 적당한 순간을 찾고 있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분위기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백담호는 자신을 꼽 주는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호감도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해인은 그렇게 느꼈다.

서해빛은 환히 웃고 있는 게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역시 서해빛은 눈치가 그렇게 좋지 못한 것 같았다.

“어…. 저기, 나 이제 얼마 안 남아서 집 가서 해도 될 것 같아. 도와줘서 진짜 고마워. 먹고 싶은 건 생각해 놔. 그럼 다들 내일 봐.”

다다닥 기계적으로 말을 뱉으며 노트북을 닫으려는 해인의 손이 턱하고 잡혔다. 백담호는 나긋하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왔으니까 끝까지 하고 가. 어차피 대본 나한테 줘야 하잖아.”

“…으응.”

해인이 혹시나 싶어 노트북을 한 번 더 덮으려고 힘을 줬지만 역시 백담호가 힘을 주고 있어 전혀 덮어지지 않았다. 결국, 모호하게 웃으며 해인은 눈만 깜빡이며 백담호의 눈치를 살살 봤다.

“아, 그러면 전 그만 카운터로 가 볼게요. 필요하면 부르세요.”

예상 외로 해빛은 순순히 물러났다. 해인과 맞닿아 있던 어깨가 떨어지고 해빛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사라졌다.

해빛이 가니 더욱 해인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심지어 호감도까지 요지부동이니 더욱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떨어지면 기분이 나쁘구나 깨닫고 풀어 주려고 뭐라도 할 텐데 호감도는 여전히 ‘6’이었다.

“방해인.”

“응?”

“그렇게 눈치 보지 마.”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가며 좁은 틈으로 까만 눈동자가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가 서해빛이랑 같이 걸어 다니든, 밥을 먹든, 옆에 앉아 있든 상관없으니까 눈치 보지 말라고. 어?”

“어…….”

진담일까? 하지만 아까 존나 황당하다면서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요즘 서해빛이랑 같이 있었다고 백담호의 호감도가 떨어진 적은 없었다.

이제 자신에 대한 호감도도 꽤 올라서 해빛이랑 같이 있어도 호감도가 떨어질 정도로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건가. 그럼 그냥 정말 황당하기만 한 거였나.

제대로 알 수 없는 백담호의 속내에 해인은 조금 찝찝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본인이 신경 쓰지 말라는데 오히려 눈치만 계속 봤다가 진짜 빡치면 그게 더 곤란했다.

해인이 떨떠름하게 끄덕이자 백담호는 픽 웃으며 일어서 해인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서해빛이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백담호가 앉아 해인과 몸이 부대낄 정도로 가까이 자리했다.

“그래, 해인아. 눈치 보지 마. 눈치 보면 그게 더 빡쳐, 그렇게 바람피우다 걸린 것처럼 굴면 존나 서해빛이랑 떡이라도 친 줄 알겠어.”

해인은 잠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

서해빛이랑 뭘 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상황을 백담호가 조곤조곤 다시 물어 왔다.

“왜, 붙어먹을 거야?”

카운터에 있는 서해빛에게 안 들릴 정도로, 조용한 카페 안에 울려 퍼지지 않을 정도로 백담호가 해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귓바퀴를 직접 건드리고 가는 숨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를 대체 뭐로 보고.”

노골적인 물음에 해인이 기겁을 하며 몸을 옆으로 물리자 백담호가 장난기 가득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래, 방해인. 누구랑 친해지든 내 눈치는 보지 말라고. 자꾸 눈치 보면 이상한 생각 들고 그러면 좀 빡치잖아.”

백담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흐트러진 해인의 머리카락을 검지만 펴서 가볍게 옆으로 쓸어 넘겼다. 아슬아슬하게 피부에 닿지 않는 손가락이 어쩐지 백담호와 자신의 관계 같다고 해인은 문득 느껴졌다.

이대로 누군가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대로 손쉽게 맞닿을 그런 상태.

조금 부담스러운 까만 시선에 해인은 속이 조금 울렁거려 마른 침을 삼키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피피티나 빨리하자. 카페 마감 전에는 해야 하잖아.”

자꾸만 자동으로 돌아갈 것 같은 눈동자를 억지로 노트북에 고정했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옆에는 여전히 백담호가 손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이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마우스만 움직여 여백을 클릭했다. 옆에서 흐트러지듯 웃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얼마 안 가 백담호의 시선이 떨어졌다.

“그래.”

백담호가 노트북을 쳐다보고 나서야 가슴을 움켜잡은 것처럼 조이던 감각이 사라져 해인은 한 번에 숨을 뱉어냈다.

* * *

“하아.”

드디어 끝났네. 오랜 시간 앉아 있느라 저린 다리를 테이블 아래로 쭉 펴고 상체도 뒤로 쭈욱 뻗자 해인의 몸은 일자가 되었다. 정말 피피티를 같이 해 주려고 한 건지 백담호도 노트북을 가지고 와 한결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기지개를 쭉쭉 켜던 해인은 빠르게 예약 메일을 걸어 놓고 모든 창을 닫았다.

노트북을 끄기 전에 보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동안 해빛이 가져다준 간식거리들과 음료가 있었고 그걸 백담호가 계산했다. 해빛은 굳이 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백담호는 기어코 계산했고 해빛은 곤란한 듯 웃으며 결제를 해야만 했다.

해인은 서로 계산하겠다고 하는 광경을 의아하게 지켜보다 ‘그럼 내가 계산할까?’라고 했다가 두 명에게 모두 거절당해 조금 민망해졌다.

너무하네.

아까의 그 민망함이 떠올라 남은 스콘을 마저 입에 털어 넣고 해인은 노트북을 탁 덮었다. 그리고 전보다 밝아진 얼굴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고마워, 덕분에 빨리 끝났어.”

백담호는 노트북을 넣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나도 밥 사 줘.”

“밥?”

“어, 밥. 내가 뭐 먹는지 미친놈처럼 궁금해 하던데 같이 먹으면서 확인해 봐야지. 안 그래?”

“아….”

뭐지, 꼽 주는 건가? 해인은 진짜 밥을 사 달라는 건지 그날의 빡침이 다시 떠올라 비꼬는지 헷갈렸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먹을지랑 날 생각해서 말해 줘.”

“너랑 서해빛은 언제 같이 먹는데?”

“10월 첫째 주 토요일이었나, 그랬을걸?”

해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해빛에게로 눈을 돌리니 아까까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는데 지금은 시선을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해빛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맞나 보다.

“어, 10월 첫째 주 토요일 맞아. 그건 왜?”

“이왕 과제 도와준 사람들한테 밥 사는 거 한 번에 사는 건 어떨까 싶어서.”

해인을 바라보던 백담호가 고개를 반대로 돌려 서해빛을 쳐다봤다. 서해빛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있다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해인 선배만 괜찮다면 저도 상관없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두 명의 시선이 모두 해인에게로 향했다. 제 결정으로 모든 일이 정해지는 상황에 해인은 조금 당황했지만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원래라면 해빛하고 둘이었던 약속에 백담호가 껴든다. 셋이 마주하는 상황은 별로 좋지 않지 않다고 여겨졌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좋은 상황이 되었다.

빠르게 밥만 사 주고 슬그머니 빠지면 괜찮지 않을까? 아직 덜 친한 해빛과 백담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은근슬쩍 빠져나가면,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담호의 호감도를 10월 첫째 주 토요일이 오기 전까지 10을 찍어 두어야 했다.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를 슬쩍 살피고는 가능성이 보여 밝은 표정으로 머리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래, 다 같이 먹자!”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7]로 올랐습니다.

가능성은 넘치다 못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해인이 살짝 미소를 지었고 옆에서 보고 있던 백담호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눈치가 존나 없네. 해인아.”

어느 부분에서 눈치가 없다고 하는지 해인은 이해하지 못해 눈가를 찌푸렸지만 백담호는 즐겁게 눈을 휘며 웃을 뿐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해빛은 조금 허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네.”

혼자 웃느라 눈가가 매끄럽게 접힌 백담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모든 정리를 끝마친 해인은 카페 문을 열며 해빛에게 손을 흔들었다. 해빛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백담호는 이미 나가 있었다.

“내일 봐요.”

“응, 내일 봐. 오늘 정말 고마웠어.”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해인은 ‘응, 너도.’라고 대꾸하며 몸을 돌려 카페 밖으로 나갔다. 점점 여름이 끝나 가는지 약간 쌀쌀해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해인은 카페 앞쪽에 세워 둔 차에 기대 있는 백담호에게 다가갔다.

“오늘 고마웠어, 내일 보자.”

“타.”

“응?”

“집에 데려다줄게.”

해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조수석으로 향했고 백담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얼마 안 가 시동이 걸렸고 백담호는 해인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찾아갔다. 해인은 놀라운 그의 기억력과 밤길임에도 흔들림이 없는 운전 실력에 감탄했다.

“너 진짜 운전 잘한다.”

“알아.”

“아, 아는구나.”

하긴, 원래 잘난 사람들은 자기가 잘난 줄 아는 법이었다. 자기보다 못한 애들이 넘치는데 모르기도 힘들긴 하겠다. 벌써 두 번째 타는 백담호의 차에 해인은 약간의 익숙함을 느끼고는 처음과 달리 의자에 몸을 기대며 넋을 놓았다.

조용한 엔진 소리만이 차 안을 메웠고 얼마 가지 않아 도착했다. 전과 달리 입구를 가리지 않는 길목에 차가 세워졌고 해인은 뭉그적뭉그적 벨트를 풀었다.

“고마워, 조심해서 들어가.”

약간 피로가 몰려와 해인은 빨리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기에 백담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그냥 보내게?”

문을 열려던 손이 멈췄다. 떨떠름하게 백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몸을 창문 쪽으로 기울인 채 한 쪽 손으로 귀 뒤를 받치며 비스듬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뒤편에서 새어 나오는 편의점 조명에 흐리게 백담호의 테두리가 반짝거렸고 그 탓인지 유독 호감도가 눈에 들어왔다.

피곤했다. 얼른 들어가서 자고 싶었다. 하지만…. 호감도를 높일 수 있다면야 참을 만했다.

“차 마시고 갈래?”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8]로 올라갔습니다.

“응.”

호감도가 올랐고 백담호는 나른하게 웃으며 시동을 껐다. 해인은 어쩐지 오늘 호감도 10을 달성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약간 두려웠다.

10을 찍고 백담호를 쌩 깔 때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아서, 제 마음에 스며들고 있는 게 아주, 아주 조금 걱정되었다. 하지만, 해인이 잘하는 것 중 하나가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인은 약간의 두려움을 무시하고 목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 *

강서준 말고 처음으로 해인의 자취집에 타인이 들어왔다. 서준은 고용인-피고용인 관계라지만, 담호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해인은 조금, 사실 조금 많이 긴장되어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켰는지 몰랐다.

해인이 빠르게 집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었다.

“좁지만 환영해.”

먼저 들어선 백담호는 딱히 별다른 뜻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있을 건 다 있네.”

그가 해인의 집에 들어서서 처음 뱉은 말이었다. 있을 건 다 있다는 게 칭찬인지 조금 헷갈렸지만 해인은 ‘그래?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주방과 방이 미닫이문으로 분리되어 있어 담호는 미닫이 문턱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섰다.

그가 낮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해인은 정말 백담호가 자신의 자취집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침대에 앉아 있어.”

“어.”

백담호는 해인이 제일 오랜 시간 뒹군 침대에 걸터앉았고 해인은 가방을 대충 냉장고 앞바닥에 내려놓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이는 걸음으로 삐쭉삐쭉 걸어가 바닥에 앉았다. 역시, 아직은 백담호와 이런 사적인 공간에 있는 게 어색했다.

“왜 바닥에 앉아, 여기에 앉아.”

그에 반해 백담호는 평소와 다를 거 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침대 옆을 퉁퉁 두드렸다. 호감도 올려야 하는 자신은 이렇게 굳어 있는데 혼자만 멀쩡해 보이는 백담호가 조금 얄미워 해인은 자연스러운 척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앉았다.

침대 매트리스가 여리게 진동했다.

“방해인.”

“어, 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버려 긴장한 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휘둥그레 눈을 뜬 해인을 백담호는 픽 웃으며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바닥이 무언가 달라는 것 같은데 뭔지 몰라 해인이 다시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휴대폰 줘 봐.”

“휴대폰?”

“어, 휴대폰.”

해인이 주섬주섬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서 건넸다.

“잠금 풀어서.”

“아, 응. 근데 왜?”

왜냐고 물으면서도 해인은 고분고분 잠금까지 풀어 건네니 백담호는 알려 주지 않고 그대로 폰을 가져가 무언가를 치기 시작했다. 멀뚱히 그가 뭘 하는지 해인이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자 백담호는 즐거워 보이는 눈빛으로 휴대폰을 다시 건넸다.

화면은 켜진 채 내밀어졌고 얼마 없는 연락처 목록에 유난히 2개의 이름이 두드러졌다. 하나는 ‘서해빛’, 남은 하나는 ‘백담호.’ 방해인의 가족들과 같은 카테고리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눈에 띄는 이름에 그걸 빤히 쳐다보다가 받아 들었다.

“이제 집까지 들어왔는데 번호가 없는 게 좀 말이 안 되잖아. 방해인, 내 번호는 내가 줄게. 너 번호는 네가 주고 싶을 때 줘.”

어? 알겠지? 자신의 번호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 휴대폰에만 번호를 찍어 주고, 자신의 번호는 주고 싶을 때 달라는 건 처음이라 해인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백담호가 전화번호를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선택을 배려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목 안에서 뛰는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져 해인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스르르 쌓은 모래가 바람에 흩어지듯 수그러드는 짙은 밤색 머리칼을 백담호가 손을 올려 가볍게 두드렸다.

모자 없이 이 머리통에 손을 올리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손바닥에 닿는 얇은 머리카락들이 유독 간지럽게 느껴졌다. 사실 자취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백담호는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갈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아슬아슬했다.

“이제 갈게. 내일 봐.”

계속 작은 머리통을 만지다가 다른 곳에도 손이 뻗어 나갈 것 같아 백담호는 손을 물리며 일어서려는 찰나였다.

“…벌써 가?”

해인이 백담호의 옷 끝자락을 소심하게 붙잡았다. 약한 힘으로 당겨진 옷자락에 생긴 주름처럼 백담호의 시선이 해인을 향해 기울어진 직선을 그렸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밤색 눈이 백담호를 두려운 듯이, 한편으로는 애처로움이 가득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

방해인, 꼬시는 데 재능 있네…. 요망한 새끼, 진짜.

옷 끝을 잡은 해인의 손등 위를 백담호의 손이 스르르 덮어 올라갔다. 천천히 손목을 지나 팔 안쪽을 쓸어내리며 백담호가 말했다.

“지금 이거 내 마음대로 해석할 것 같은데.”

말 뒤에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어들어가듯 작은 대답이 들려왔다.

“…마음대로 해석해도 괜찮아.”

“…시발.”

그대로 해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상황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이상한 포션도 쓰지 않았다.

겹쳐지는 입술 너머로 해인의 귓가에 띵-, 하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호감도가 올랐다는 뜻이었다. 해인은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안심되었다. 호감도, 그래, 호감도….

제 입술 틈을 파고들어 오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해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담호, 나를 딱 10만큼만 좋아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말 딱 10만큼만.

* * *

가볍게 문질러졌던 지난밤은 어린애의 장난도 아니었다는 듯 다급하게 입술이 살짝 깨물리고 빨려 들어갔다.

“아…. 흣…. 잠시….”

해인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감싼 백담호가 해인이 살짝 손으로 밀어내자 쉽게 뒤로 밀렸다. 섞인 타액으로 해인의 입술이 번들거렸고 얼굴빛은 조금 들떠 있었다. 흐릿한 눈이 마주치자 백담호가 나른하게 웃으며 바스러지듯 말했다.

“방해인, 키스해 봤다며. 왜 이렇게 존나 못 해.”

머리가 살짝 붕 뜬 상태였음에도 해인은 백담호의 말이 민망하게 느껴져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짓궂음이 가득한 두 눈은 해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손으로 서로 얽히고 꼬여 버린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닿는 살갗이 뜨겁게 느껴졌다.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백담호가 이런 상황을 예상했듯이 사실은 해인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래서, 해인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이럴 줄 알고도 백담호를 끌어들인 게 단순히 호감도 말고도 다른 기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해인은 몸을 조금 일으켜 백담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부딪혔다.

머리가 복잡해 입술을 부볐다. 이상한 논리였는데 오늘은 해인은 그 논리를 따르기로 했다. 서툰 움직임으로 백담호의 입술을 해인은 춥춥 핥아 올렸다. 장난기 가득했던 백담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는데 백담호는 순간적으로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게 전신에 퍼져 나직하게 신음을 흘리고 해인의 상체를 끌어 올려 벽으로 밀어붙였다.

해인의 다리를 벌리고 백담호가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전과 똑같은 자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입술 위만 포갰던 가벼운 접촉은 금세 진득하게 변해 해인의 입으로 물컹한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입 안 곳곳을 문지르는 감각과 짙어진 달콤쌉쌀한 향에 해인은 목 안이 간지럽다 못해, 폐까지 간지러운 것 같아 조금 바르작거렸다.

“하…. 흐읏…….”

전에 백담호에게 다정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그저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라, 라고 여겼지만 백담호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 줄 몰라 굳은 자신의 혀에 얽혀 들고 혀 아래, 뿌리를 장난치듯 건드렸다. 감은 시야 안에서 흐릿하게 번쩍였다. 느리고 아주 질척한 호흡이 서로를 오갔고 물기 어린 소리가 입 안에서 울려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제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얇은 바지는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 의식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은 예상대로 한쪽 엉덩이에서 멈춰 섰다.

“아…!”

조금 강하게 둔부를 움켜잡은 탓에 해인이 눈을 살짝 뜨고 허리를 튕겼다. 그 바람에 백담호가 이를 세워 조금 씹고 있던 입술이 빠져나갔다. 입술이 떨어지니 해인은 그제야 자신이 숨이 찼다는 걸 깨닫고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흐릿한 시야에 어두운 눈동자가 달처럼 선명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으…. 흣, 백, 담호…. 엉덩이는 왜 주물러….”

엉덩이를 반죽하듯 주무를 때마다 사이가 벌어져 기분이 이상했다. 알 수 없는 어딘가가 오그라드는 것 같아 해인은 백담호의 손을 떨어트리려 손을 아래로 뻗음과 동시에 다시 입이 겹쳐졌다.

입술을 전부 먹어 치울 듯이 전보다 조금 격해진 입맞춤에 해인의 손에 순식간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입술이 부어오를 정도로 빨아 들이고 아래로는 계속 둔부를 만지작거렸다. 위아래가 전부 자극당하는 탓에 해인은 머리가 붕 떠올라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키스라는 게 원래 이랬던 건가 싶을 정도로 눈앞이 새하얗게 질리고 백담호의 숨소리, 마찰하는 혀와 목 뒤를 쓰다듬는 손길이 자극적이게 다가와 자꾸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고른 치열을 훑던 혀가 입천장의 울퉁불퉁한 살갗을 지나 뒤쪽의 여린 살을 쓸어내릴 때였다.

“흐으…. 이, 이상…해….”

입천장을 넘어서 그 속의 비강까지 간드러진 자극이 느껴져 폐가 자꾸만 쪼그라들고 백담호와 맞닿은 아래가 들썩거렸다.

“거기, 핥지…. 흡….”

투정 부리듯 겨우겨우 뱉어지던 말은 금세 덮어 오는 입술에 먹히고 말았다. 해인의 예민한 반응을 눈치챈 백담호가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그 부위를 혀로 찌르고 문질렀다. 몰려오는 흥분에 해인은 숨이 차올라 얼굴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뒷목을 잡고 있는 손이 그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호흡이 딸리고 입이 완전히 백담호에 의해 막혀 버리니 모든 신경이 입 안에 집중되어 버렸다. 혀가 움직이는 물기 어린 소리가 귀 안에서 웅웅 울려 괴로웠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비벼지는 혀는 미치도록 몸을 들끓게 만들었다. 이 이상 더 하면 기절하겠다 싶을 때, 드디어 백담호가 입을 조금 떨어트려 해인에게 숨길을 터 줬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둔부를 주무르는 손은 노골적으로 변해 엉덩이 골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바지로 막혀 있어 깊숙이 들어가진 못했다.

아까까지는 입술만 타액에 젖어 있었는데 이제는 눈가도 젖어 있었고, 입가도 젖어 있었고, 아마 아래도 젖어 있을 게 분명해 백담호가 눈을 휘며 웃었다.

“해인아, 좋아?”

물에 젖은 눈이 느리게 깜빡거리며 가쁜 숨만 쉬고 있었다. 약간 흐려진 얼굴을 백담호가 손으로 쓰다듬다가 맞붙어져 있는 아래를 흘겨봤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말했다.

“섰네.”

해인이 몸이 조금 경직되었다.

“너 좆 섰다고.”

해인의 시선도 아래로 향했다. 어쩐지 아랫배가 뭉치는 기분이 들더니만 뭘 했다고 앞섶이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백담호도 다르지 않았다.

“…너도 섰잖아.”

자기도 똑같은 주제에. 불만스러운 투와 다르게 해인의 얼굴을 터지기 직전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억누르는 게 우습게 귀여웠다.

“뒤가 아니라 좆 먼저 달래 줘야겠네. 터지겠어.”

“잠, 잠시…!”

해인이 막을 순간도 없이 바지가 주욱 내려갔다. 바깥으로 노출된 검은 브리프는 해인의 몸에 맞게 딱 달라붙어 있었고 그 탓에 반쯤 발기한 해인의 것이 더욱 잘 보였다. 백담호는 그 형태를 진지한 눈으로 빤히 쳐다봤다. 제 좆이 무슨 연구감이라도 되는 건지 집요한 시선에 해인이 가리려고 손을 내렸지만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뭘, 뭘 그렇게 쳐다봐!”

“막상 보니까….”

말끝을 흐린 백담호가 스르르 눈동자를 위로 올려 해인을 쳐다봤다.

“존나 꼴린다, 해인아. 시발. 어쩔 거야.”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10]으로 올랐습니다.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 [10]을 달성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난관을 무사히 통과하셨습니다.

보상, 소원권 1장이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호감도 10을 달성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소원권이 달성되었다는 시스템창이 떠올랐지만 해인의 시선은 그 너머 제게 욕정하고 있는 백담호를 향해 있었다. 그런 탓에 시스템 문구가 전과 조금 다르다는 걸 해인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만져 줄까?”

부푼 브리프 위를 백담호가 아슬아슬하게 문질렀다. 부드러운 듯 까칠한 옷감에 쓸리는 성기에 해인이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차마 흥분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지 방해인은 얼굴을 조금 붉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마주 보는 갈색 눈동자가 곤란한 듯 흔들리고 있어 백담호는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대답을 해야 알지.”

결국 머지않아 자세히 봐야지만 알아차릴 정도로 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던 백담호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리고 브리프 위로 불룩한 것을 손으로 감싸 마찰시키기 시작했다.

벗기고 만질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백담호는 브리프를 입힌 그대로 문질렀다. 딱 달라붙은 브리프가 움직이는 손에 주름지면서 속 안을 어지럽혀 놓았다.

“아…. 하으…. 왜 그대로…?”

맨손에 비해 자극이 약한 것 같으면서 만지고 있는 상대가 백담호라 그런지 흥분이 들끓었다. 손끝을 세워 천 위를 득득 긁으니 해인의 허리가 들썩였다. 속옷이 빠른 속도로 젖어 이제는 백담호의 손짓에 따라 찰박찰박 물소리까지 작게 들릴 정도였다. 잔뜩 엉망이 되어 있을 그 안이 보이지 않아 더 쪽팔렸다.

발기한 것을 팽팽하게 잡고 있는 천 탓에 해인이 달뜬 신음을 흘리며 스스로 속옷을 벗으려 했지만 제지당하다 못해 백담호가 더욱 해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오기까지 했다.

“해인아, 내 손 지금 미끈거려. 이 정도면 젤도 없어도 되겠어.”

물을 왜 이렇게 질질 흘려.

이미 하는 짓거리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백담호는 성기 위를 문지르던 손을 느리게 들어 올려 해인의 앞에서 벌렸다가 모았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붙었다가 멀어질 때마다 얇은 실들이 주욱 늘어졌고 손바닥은 이미 알 수 없는 액에 질척해져 있었다. 그게 제 몸에서만 나온 거라 생각하니 해인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쪽팔려?”

“…시끄러.”

조금 짜증 서린 대답에 낮게 웃는 소리와 함께 호감도가 또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이 고개를 획 돌려 백담호를 쳐다보니 호감도는 그새 [11]이 되어 있었다.

백담호를, 정확히는 그의 머리 위를 바라보는 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가만히 보던 백담호는 그대로 다시 해인에게 입을 맞췄다.

“장난 안 칠게.”

그러니까 저번처럼 얼굴에 손바닥은 후리지 말고. 말하느라 아주 조금 떨어졌던 입이 겹쳐졌고 해인은 생각 대신 눈을 감았다. 아래로 브리프가 점점 벗겨지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던 백담호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 해인의 목 언저리를 살짝 빨아 들였다가 이마를 어깨에 기대었다.

반쯤 벗겨진 속옷에 드디어 지저분해진 해인의 것이 드러났다. 젖은 속옷에 걸쳐져 애매하게 나온 것이 야했다. 겨우 천 위로 긁어 줬다고 질질 싼 것이 귀여웠다.

“해인아.”

넌 왜 시발, 왜 좆도 이렇게 생겼냐.

이렇게 생긴 게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브리프가 던져지듯 완전히 벗겨졌다. 뒤집어진 채 침대에 떨어진 속옷은 지저분했고 해인은 그걸 보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자신은 이제 조금 긴 반팔 티와 흰 양말만 신은 채 백담호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자세가 너무 노골적이라, 제 아래가 그대로 백담호에게 보여 해인이 옷자락을 끌어 내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탁, 하고 해인의 손을 쳐 낸 백담호가 단단하게 세워진 것을 백담호가 콱 움켜잡고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읏….”

방해물 없이 바로 닿은 살이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져 숨이 확 들이마셨다. 느리게 손바닥과 기둥이 마찰할 때마다 해인은 팔이 절로 곱아들고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이곳에 온 뒤로 자위도 잘 안 해서인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성감에 배 안이 움찔거리며 뭉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아 해인이 손을 아래로 뻗어 제 것으로 왕복을 하는 손을 막았지만 돌아오는 건 귀두 끝을 문지른 손짓이었다.

“흐…. 아, 거기, 누르지 마….”

갈…. 흐…. 엄지가 선단 위를 꾹 누르며 비비기 시작했다. 이미 갈 것 같았는데 제일 민감한 피부가 강하게 마찰하자 해인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소리가 튀어 나갔다. 하반신이 들썩거렸고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점점 강해지는 자극에 성기를 타고 전신으로 흐르는 성감이 눈앞까지 차오르고 말았다.

“아, 아흐…. 흐으윽…!”

파르르 허리가 떨리며 요도구를 막은 손 사이로 하얀 액이 흘러나왔다. 사정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사정에 짙고 진득한 액에 백담호의 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내가 살다 살다 방해인 대딸도 쳐 주네….”

손을 가득 적신 정액을 백담호는 오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올리고 흥분에 붉어진 해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벌써 기진맥진한 건지 물기 어린 눈이 멍하니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해인이 우는 걸 보는 건 백담호 생에 처음이었다. 그것도 흥분에 어쩔 줄 몰라 우는 걸. 부끄러워할 힘도 없다는 듯이 늘어진 몸과 조금 들춰진 윗옷과 제 중심부에 올려진 음부에 백담호는 참기 힘든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해인아, 벌써 지치면 어떡해. 아직 내 좆 안 봤잖아.”

보고 나서 이제 당당하게 또 아는 척해야지, 어? 좆이 존나 커서 좆같다고 한다고.

“아…. 너 그 말 좀 진짜….”

해인은 자기가 한 말이었지만 쪽팔려 죽겠는지 흐린 눈으로 있는 힘껏 백담호를 쏘아봤지만 백담호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하게 해인을 마주 보다 그의 손을 잡아당겨 제 앞섶으로 끌어당겼다.

“내 손이 이렇게 돼서. 좀 도와줘.”

해인의 액으로 더럽혀진 제 손을 보여 주며 백담호가 짙게 웃었다. 해인은 아주 짧게 여기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었지만, 왠지 그렇게 하는 순간 다음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떡였다.

조금 떨리는 손이 백담호의 바지 앞섶에 닿았다. 벌써 느껴지는 부피감에 해인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원작에서 백담호 좆 크기에 대해 정확한 수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일단 컸다고 했다. 진짜, 컸다고 했다. 그래, 메인공이 작을 리가 없으니까.

해인은 당연하게 넘겼지만 그걸 직접 눈으로 보게 생긴 지금은 달랐다. 해인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지퍼가 완전히 내려갔고 그냥 보기에도 남다른 크기일 것 같이 불룩한 브리프를 끌어내렸다.

“흐읏…?”

브리프가 내려감과 동시에 어린아이 팔뚝만 한 것이 해인의 회음부를 치고 올라왔다. 분명 브리프를 벗기느라 허리가 전보다 뒤로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길이도 길이였고 이미 빳빳하게 선 것이 다급하게 위로 퉁겨진 탓이었다. 해인은 그만 허리를 뒤로 물리고 멍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미친 거 아냐?”

해인이 백담호의 것을 보고 한 첫 마디였다. 그리고 곧바로 띵, 하는 호감도가 올랐다는 알림이 울렸다.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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