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2) (7/17)

7.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2)

해인은 혼란스러웠다. 이건 그냥 큰 게 아니잖아…. 같은 사람인 건가 싶어 해인이 손가락으로 딱딱하게 선 것을 두 번 건드렸다. 진짜 좆이었다.

“어…. 좀 놀랍다….”

이러니 안 크다고 했을 때 호감도가 내려갔지. 해인은 그때 백담호가 자신을 때리지 않았음이 크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걸 대체 서해빛은 어떻게 넣은 거지…? 그 신기함에 해인이 다시 거대한 선단을 건드리는 때에 손이 잡혔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해인이 느리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백담호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금 맛이 간 눈으로.

그 눈이 익숙해 해인은 입을 벌린 채 작게 도리질을 쳤고 그와 동시에 해인의 양다리가 들어 올려지고 몸이 거의 눕다시피 뒤로 넘어갔다.

“앗.”

“시발, 해인아. 자꾸 재촉하지 마.”

충분히 돌겠으니까…. 애새끼도 아니고 좆을 왜 그렇게 툭툭 건드려. 네가 미쳤지, 존나.

“아니, 백담호 잠시…. 그거 넣을 거 아니지…?”

뭉툭한 것이 해인의 엉덩이 골을 느리게 문질렀다. 아까보다 확연하게 진해진 향이, 백담호의 어두워진 눈에 해인이 얼굴에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하, 미친….”

미간을 찌푸린 백담호는 낮게 그르렁대며 마치 추삽질을 하듯 허리 짓을 했고 그 탓에 엉덩이 골을 지나 해인의 성기까지 같이 문질러졌다.

“방해인, 콘돔 있어?”

약하게 마찰되는 성기가 점점 질척해져 갔다. 해인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도 없었지만 있다고 해서도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본능적인 부정이었다. 백담호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동시에 또 호감도가 올라갔다.

“없구나…. 시발, 없구나…. 하 근데…. 아니야.”

해인아, 넌 진짜 사람 이상하게 만들어. 뭉그적거리던 허리 짓이 점점 빨라졌다. 분명 넣지도 않았는데 섹스 하는 것 같은 자세에 해인은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다.

“아, 흐…. 응, 없으니까…. 그만, 아흣….”

철퍽철퍽 백담호의 성기에 제멋대로 비벼지는 제 좆에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백담호는 해인의 울음 섞인 제지에도 걱정 마라는 말만 반복하며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양 허벅지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강해 해인과 백담호의 하반신은 틈도 없이 맞물렸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해인의 몸이 맥없이 흔들리며 머리가 쿵쿵 벽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인지 해인은 벽에 찧어지는 머리보다 쓸리는 성기와 그 아래 회음부부터 엉덩이 골에 온 신경이 다 쏠려 버렸다. 백담호의 좆과 닿는 모든 곳에 불이 닿은 듯 뜨거워 허리가 들썩였다.

“흐읏…. 아, 흐…. 백, 담호….”

욕정에 가득 차 있던 까만 눈이 잘게 쿵쿵거리며 벽에 부딪히는 머리를 뒤늦게 발견하고 혀를 찼다.

“시발, 해인아. 머리 깨지겠어. 왜 말을 안 해.”

허벅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해인의 등으로 팔을 둘러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코앞까지 얼굴이 가까워지자 해인은 고개를 조금 돌려 버렸고 백담호는 잘게 웃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호감도가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쾌감 때문인지 격한 움직임 때문인지 모르게 해인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왜 고개를 돌려.”

백담호가 다시 고개를 자신을 보도록 돌리고 해인의 윗옷을 위로 걷어 올려 입술에 문질렀다. 갑자기 무슨 짓인가 싶어 해인이 의아하게 쳐다보니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물어.”

옷에 정액 묻으면 잘 안 지워진대. 거짓말이었다. 빨면 잘 지워졌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 붕 뜬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윗옷을 입으로 물었다.

그 탓에 올라간 옷 아래로 뽀얀 상체와 조금 딱딱해진 선홍빛 돌기가 슬쩍 드러나고 말았다. 그 선정적인 광경에 백담호는 자기가 시켜 놓고 그걸 진짜 하냐며 투덜거렸지만 제 성기와 해인의 성기를 한 번에 쥐고 흔드는 손은 더욱 빨라졌다.

두 곳에서 흐르는 액들로 아래는 이미 질척하다 못해 물소리까지 날 정도였다. 윗옷을 물고 있느라 억눌린 소리를 내며 해인은 백담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하반신이 타오를 정도로 강렬한 열감에 허리가 자꾸 곱아 들었고 다물리지 않은 입에서는 타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분명 좋지 못할 꼴인 걸 알아 해인이 고개를 숙이면 백담호가 억지로 다시 들어 올리며 눈 주변을 빨아 댔다. 백담호와 가까워지니 코 안이 찌릿거릴 정도의 달고 쓴 향에 해인이 결국 입에 물고 있던 옷을 놓쳐 버리며 몸을 휘었다.

하아, 낮은 신음과 함께 맞닿은 두 성기에서 하얀 액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동시에 사정한 것이었다. 해인은 벌써 두 번째 절정에 바르르 몸을 떨며 백담호의 가슴팍에 몸을 쓰러트리며 헐떡였고 백담호는 그런 해인의 머리통에 얼굴을 부볐다.

띵, 해인의 귓가에 또 호감도가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많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해인이 이제야 느끼기 시작할 즈음 아직 성기를 쥐고 있는 손이 움직였다.

“흐읏…. 또 해?”

놀란 해인이 얼굴을 떨어트리고 묻자 백담호는 대답 대신 풀린 눈으로 해인의 입술을 먹어 버렸다.

* * *

아, 조졌다. 해인이 조금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으며 제 좁은 침대에 낑겨 선잠을 자는 백담호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그의 머리 위 호감도는 ‘24’였다. 10만큼만 올리려고 했는데 단 하룻밤에 24를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백담호는 불편하지도 않은 건지 큰 몸을 어떻게든 벽과 자신의 사이에 끼워 넣은 채 눈도 뜨지 않았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고 다시 한번 봐도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24….

새벽 내내 흔들리는 몸과 뜨거운 열기 사이로 띵, 하는 소리를 몇 번 들은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하룻밤 만에 ‘16’이나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아마 평생 이런 신기록을 세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뭐 이제 원하는 건 다 얻었으니까.

해인이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동안 미동도 없는 백담호의 몸이 갑자기 움직였고 그 탓에 해인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마치 크나큰 죄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라도 보듯 해인이 백담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눈을 뜨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이제 그만 집에 가라고 쫓아내야 할까? 마음 같아선 그래 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무례했다. 심지어 자신이 먼저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그래, 내가 먼저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덕분에 호감도 10을…. 아니, 훌쩍 넘겨 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24’는 너무했다. 중간에 멈췄어야 했는데! 하지만 중간에 멈추기에는 자신도 너무 즐겨 버린 탓에 할 말이 없었다.

정신이 드니 해일 밀려오듯 머리를 가득 채우는 민망함과 질책, 수치스러움에 해인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문댔다.

“…이게 현실인가.”

다시 한번 백담호를 쳐다보니 어쩐지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숫자와 눈앞에 아른거리는 불과 몇 시간 전의 행적들에 울상이 지어졌다. 허벅지고 중심부…. 마지막으로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불편하고 따가운 감각에 해인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어젯밤엔 호감도에 눈이 돌아 버린 게 분명하다. 차라리 백담호가 깨기 전에 자신이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 해인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찰나였다. 정자세로 누워 있던 몸이 순식간에 획 옆으로 돌아가고 해인의 허리에 팔이 둘러졌다.

언제 틀은 건지 에어컨 바람으로 조금 서늘한 공기에 반해 맞닿은 곳은 따뜻했다. 낯간지러운 접촉에 해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디가. 또 토끼게?”

“아니야. 그리고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가….”

닫혀 있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창문에서 살짝 들어오는 햇살을 뒤로 방해인이 어색한 얼굴로 백담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그제야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은 낯설었고 생각보다 흡족스러웠다.

[호감도: 25]

“그것도 그러네.”

가볍게 웃은 백담호는 일어나는 대신 해인의 허벅지를 손으로 주물렀다. 아래 좀 같이 맞대 비볐다고 주무르는 손짓에는 성적인 의미가 다분하게 느껴졌다.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파고들자 근육이 잔뜩 경직된 게 느껴져 백담호는 흘리듯 웃으며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렸다. 전과 달리 해인의 얼굴을 조금 붉어져 있었다.

“…손 치워.”

나직하게 말하며 해인이 쓰라린 제 허벅지를 희롱하는 손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손은 더욱 강하게 해인의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읏, 아파.”

새벽 내내 얼마나 문지른 건지 얇은 반바지 아래의 살이 따끔거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백담호를 쳐다봤다가 나른하게 풀린 눈매에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파?”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담호는 눈썹을 까딱이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 틈을 타 해인이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얇은 이불이 걷어지고 백담호가 해인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당황할 새도 없이 짧은 반바지 안으로 파고든 손은 곧바로 안쪽 살에 닿았다. 조금 뜨거운 살갗이 닿자 피부가 까지기라도 한 듯이 따가워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닦을 때 너무 세게 문질렀나.”

“닦아?”

“어. 씻기려다가 화장실이 존나 좁아서 대충 휴지로 닦았어.”

바지를 조금 걷어 낸 백담호는 까져서 작고 붉은 반점이 올라온 살갗을 봤다. 그의 좁혀진 눈가는 조금 심각해 보였다. 해인 역시도 드러난 허벅지 안쪽 피부를 보며 정말 휴지로 닦아서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원룸 화장실이 다 그렇지 뭐. 그보다 이제 손 좀 치워. 닿잖….”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던 해인에게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해인이 다시 제 아래를 쳐다봤다. 분명 바지를 입고 있는데 옷 안을 파고든 백담호의 손가락이 그대로 살갗에 닿는 기분이었다.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보기 좋게, 정확히는 불안하게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해인이 좆도 헐었네.”

한껏 걷어진 바지 안으로 살짝 튀어 나와 있는 제 것에 해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해인은 노팬티였다. 당황한 해인이 재빠르게 옷을 끌어 내리며 침대에서 도망치듯 내려왔다. 다리를 움직일 때 마다 정말 좆도 헐어 버린 건지 쓰라렸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맹수를 눈앞에 둔 듯 옷장에 딱 붙은 해인은 경계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백담호는 느긋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이미 볼 거 다 봤잖아.”

“조용…!”

“입술은 진작 부볐고 이제 좆도 비빈 사이에 그렇게 굴면 나 속상해?”

속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여전히 눈은 즐겁게 휘어 있었다. 백담호는 다 괜찮은데 말을 너무 막 했다. 좆도 비빈 사이…. 해인은 순화할 만한 단어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 입을 꾹 물었다. 그사이 어느새 백담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지 마!”

해인이 손사래까지 치며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옷장에 달라붙었지만 백담호는 멈추지 않았다. 되레 해인의 허리를 콱 끌어당기고 몸을 조금 숙여 이마를 맞대었다. 해인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린 채 백담호를 올려다보며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고뇌했다.

그런 속내가 엿보이지도 않는지 백담호는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새벽까지 좋다고 울어 놓고 너무 매정하다, 해인아.”

“내가 언, 제.”

해인도 말하면서 양심이 조금 찔려 주춤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성기를 비비는 데 안 좋을 사람이 어디겠어. 하지만 인정해 버리는 순간 백담호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갈 게 뻔해 해인은 힘을 주어 그를 밀어냈다. 오지 말라는 것도 무시하고 다가온 것치곤 쉽게 밀려난 백담호는 그대로 뒤로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 갈까?”

물어 오는 말투는 담담했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도 아쉬운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담담함이었다. 이제 더 이상 백담호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음에도 해인은 습관처럼 담호의 표정과 분위기를 살펴보다 호감도에 시선이 꽂혔다.

먼저 가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백담호가 먼저 물어 왔으니까, 내쫓는 거라고 하기엔 아니라고 자기 합리화할 어느 정도의 연유가 생긴다.

그리고…. 계속 있어 봤자 뭐 하겠어. 백담호랑 나랑 무슨 사이라고.

“응, 학교도 가야 하잖아.”

게다가 이제 곧 멀어질 사이기도 하고.

어젯밤과는 사뭇, 아니 많이 달라진 해인의 태도에도 백담호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저 나직하게 “학교….”라고 중얼거리며 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켰다. 화면에는 10:28AM이라고 띄어져 있었다.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고 가 봤자 지각 처리도 못 받을 시각이었다. 오후에는 가야겠지만.

잠시 화면을 보던 백담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시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해인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담호가 몸을 일으켰고 바닥에 버려지듯 놓인 제 웃옷을 주워 입었다.

다행히도 갈 생각인가 보다. 백담호가 가방까지 주워 들었을 때 해인은 긴장했던 몸을 풀며 숨을 내쉬었고 백담호는 가볍게 현관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배웅은 하라는 뜻인 것 같아 해인은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잘 가.”

운동화도 다 신지 않았는데 해인은 작별 인사부터 건네는 속내가 뻔히 보여 백담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게 바로 들어갈 때하고 나갈 때 다르다는 건가. 해인이 존나 매정하다, 진짜.”

아니면 아직 떡을 안 쳐서 그런가….

아래 한번 좀 문질렀다고 어째 전보다 말의 수위가 세진 것 같아 해인은 황당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해인을 내려다보다 문고리를 돌리며 폰을 가볍게 흔들었다.

“간다.”

단순히 손을 흔든다기에는 손에 들린 폰이 눈에 걸려 해인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닫혔고 원룸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텅 비어 버린 현관을 해인은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봤다.

아, 진짜 끝났다. 불과 몇 주 전에 호감도 10을 찍고 소원권을 얻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분명 그때 상상에서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훨씬 기쁘고 날뛰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막상 달성하니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좋긴 한데 조금…. 조금. 뭐라고 해야 할까. 찝찝하다…? 씁쓸하다…? 아쉽다…?

아, 시원섭섭하다. 그래, 딱 이런 감정이었다. 온전히 후련하지도 않았고 약간의 섭섭함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으니 약간은 정이 들었으니 그러겠지. 단순히 그런 거다.

해인은 정을 떼는 걸 잘했다. 해인이 백담호가 사라지고 한참이나 지난 현관에서 드디어 몸을 돌렸다.

끝이었다.

백담호가 사라짐과 동시에 떠오르는 여러 창들을 다 닫아 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인은 시스템창들을 대충 흘러 넘겼다. 침대에 늘어지게 누우니 미세하게 풍기는 단향에 창문을 열려다 이제 곧 나갈 방인데 굳이 그래야 하나 싶어 그대로 뒀다. 왼쪽 상단에 떠 있던 백담호의 거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살짝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을 나둔 채 시스템창을 열어 인벤토리를 들어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아이템들도 있는 가운데 황금색 테두리까지 둘러진 것이 가장 눈에 띄었다.

[소원권]

고난과 역경에 맞서고 뚫은 당신! 힘들었던 만큼 달콤한 보상이 있어야 또 다음 스테이지를 향해 갈 힘이 나지 않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지 이루어드립니다. 소원은 딱 한 가지! 한 문장으로 끝내야 합니다.

만약 강아지하고 고양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면 고양이와 강아지 중 한 가지만 이루어지니 잘 생각해서 빌어 보세요~!

(소원권으로 이루어진 일은 게임이 종료가 되어도 유지되니 잘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플레이의 페널티가 있어 기본 실패 확률이 가중되어 25% 확률로 실패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걸 본 것 같아 해인은 눈을 깜빡였다가 다시 시스템창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25%’라는 믿고 싶지 않은 숫자가 떠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실패 확률 중 가장 큰 게 5%였다. 실패를 한 적은 아직 없었지만 그래도 5%와 25%에서 오는 불안감은 그 크기가 너무 달랐다. 이 정도면 실패할 거라고 저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25’ 라는 숫자가 두렵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 좀 거절한 대가가 너무 과해 해인은 잠시 잊고 있던 억울함이 느껴졌다.

실패 확률에 주춤거렸던 손이 결국 소원권을 향했다. 생각보다 큰 확률이 두렵긴 했지만 이걸 위해서 그간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해인은 분명 보상받아야 마땅했다. 적어도 해인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고생만 했다기엔 양심에 찔리는 게 있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해인은 굳건한 눈으로 소원권을 터치해 입력란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평생 물질적인 풍요가 끊이지 않게 해 주세요.]

해인이 원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복합적이었다. 오피스텔로 다시 돌아가야 했고, 끊겼던 용돈도 다시 받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적에 깐깐해진 부모님도 돌려놓아야 했다.

단순히 게임 전과 같은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하기에는 바꿔야 하는 게 많다고 거지 같은 게임이 실패를 때릴지도 몰랐다. 심지어 최악의 경우는 ‘게임 시작 전과 같은 삶’이라는 문장 그대로 과거로 자신을 보내 버리면 답이 없었다.

게임 시작 전으로 돌아간 해인은 필시,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게임창이 뜨기 전에 아직 거절하기 전에 보내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이미 거절한 직후로 보내거나 회귀했다고 리스크를 더욱 가중시킨 채 다시 게임을 시작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말만 들으면 무슨 양아치 같은 게임인가 싶었지만, 이 게임은 진짜 양아치였다. 그러니 해인은 이곳에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적었다. 게임이 어떻게 되든 유지된다고 하니 이루어진다면 더 바랄 것 없이 이득이었다. 해인은 다시 한번 자신이 써 내려간 소원을 찬찬히 살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확인] 버튼을 터치했다.

“윽.”

순간, 강렬한 빛이 팡 터지는 바람에 해인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눈을 떴을 땐 소원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심지어 무슨 문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갈색 눈동자가 다급하게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무언가 달라진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친, 설마. 몰려오는 불안함에 표정이 점점 일그러질 때 침대 옆 탁상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어머니]

원룸으로 쫓겨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연락 온 적 없던 사람이었다. 갑자기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빈 직후 온 방해인 엄마의 전화는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알려 줄지 몰라 해인이 머뭇거리다 결국 수신 버튼을 밀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해인아.]

중저음이지만 조금은 발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도 그다지 익숙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네, 어쩐 일이세요?”

[뭐 하고 있었니?]

“그냥 있었죠.”

[그렇구나. 집은 어떠니, 계속 살 만하니?]

계속 살 만하냐고? 그럴 리가. 그랬으면 애초에 게임에 참가도 안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곧이곧대로 말해도 될까? 순간 해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의 가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전에 부작용이 일어난 것도 자신이 포션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25%의 실패 확률이 자신의 행동에 달린 거라면?

보상으로 얻은 건데 이런 숨은 퀘스트가 있는 건 게임 개발자가 양아치 같긴 했지만 이 게임은 이미 처음부터가 양아치였다. 사람이 위급해지면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더니 해인이 지금 딱 그 모습이었다. 단숨에 결론을 내린 해인은 이제 방해인의 엄마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옳은 선택일지 빠르게 결정해야 했다.

[해인아?]

몇 초간 대답이 없자 다시 의아한 부름에 해인이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 살만 하기는 하지만 제가 너무 온실 속에서 자랐다는 걸 알겠더군요.”

해인은 짐짓 우울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제가 그동안 너무 편안함에 해이하게 지내 어머니께 큰 심려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그동안 죄송했어요…. 정말.”

방해인의 엄마는 방해인을 아끼는 축에 속했다. 비록 거지 같은 게임 탓에 방해인을 쫓아내긴 했지만 원래의 본성이 어디 갈 리 없었다. 이렇게 보면 방해인은 무엇보다 부모 한번 잘 만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는 것은 게임이 원하는 방향이 아닐 것 같았다. 오피스텔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방해인의 부모의 결정을 따른다. 해인은 빙의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방해인이 사람이 되었다고 기뻐하던 부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발.

[…해인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잡은 해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를 너무 고생시켰나 보구나…. 사실 너를 그렇게 내쫓고 나서도 단 하루도 맘 편히 잔 적이 없었단다. 그래도 이왕 마음 굳건하게 먹은 거 끝까지 버티려고 했지만…. 얼마 전에 강서준 씨가 밥도 잘 못 먹고 다니는 거 같아서 음식 가져다준다는 이야기 듣고 어찌나 속이 철렁하던지.]

엄마가 미안해, 해인아. 다시 돌아오렴.

돌아오라는 말에 제일 처음 들었던 감정은 안도, 그 다음은 미묘한 죄책감이었다. 해인은 마냥 웃을 수만 없는 상황에 애써 감동한 척 말투를 꾸며 내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겼고 해인의 앞에 시스템창이 화려하게 떠올랐다.

[소원권 사용 완료]

축하드립니다. 방해인 님! 무사히 방해인 님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더욱 즐거운 플레이를 위해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플레이….”

지랄하네. 이제 안 할 건데. 복잡한 신경에 해인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끝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심정은 빙의를 했을 당시보다 더욱 복잡해져 버리고 말았다. 이 게임이 제게 남긴 건 대체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망할 게임이었다.

끝 맛이 이상하게 허무했다.

* * *

돌아오라는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그날 오후에 해인은 자신을 데리러 온 서준의 차에 올라탔다.

“해인 씨, 드디어 오시네요.”

“그러게요.”

희미하게 웃은 해인은 차 뒷좌석에 앉아 창문 밖을 쳐다보다가 다시 폰 화면을 두 번 두드렸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지만 괜스레 한번 보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점점 익숙해지는 창밖을 쳐다봤다.

분명 아까까지는 백담호부터 방해인을 너무나 아끼는 그의 부모 때문에 복잡했는데 막상 자신을 데리러 온 서준과 익숙한 차 뒷좌석에 올라타니 우습게도 해인은 좀 설렜다. 그리고 계속 시큰거리던 부위가 덜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짐은 내일 중에 다 옮겨 놓도록 하고 당장 필요한 것 있으시면 말해 주세요.”

“네.”

“아, 그리고 사모님께서 이번 주 토요일에 같이 저녁 식사 같이하자고 하십니다.”

“어머니가요?”

“네.”

해인은 잠시 고민하는 척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알겠어요.”

차가 지하 주차장에 세워지고 서준과 해인은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차장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콧속을 가득 메우자 해인은 집으로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이제야 입꼬리가 조금 씰룩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해인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걸었고 서준이 뒤따랐다.

“아.”

갑자기 해인이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섰다.

“왜 그래요?”

서준이 옆으로 가까이 붙어 해인을 살피니 그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서준을 흘긋 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냥 별거 아니에요.”

좆이 쓰라려서 멈췄다고 해인은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못 참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라 해인은 다행히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을 수 있었다.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해인은 여전히 마음에 애매하게 침전된 찝찝한 기분들을 전부 버렸다. 다시 돌아온 넓고 쾌적한 공간은 그걸 잊기에 충분했다. 곧바로 널찍한 소파에 다이빙하듯 드러누우려다가 하늘을 본 채 뒤로 쓰러지듯 누웠다. 해인을 뒤에 서있던 서준이 웃으면서 쳐다봤다.

“그렇게 좋으세요?”

“아, 당연하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네요.”

방긋거리는 해인의 얼굴에 서준은 그제야 내심 안심했다. 처음 차에 올라탔을 때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무슨 문제라도 있나 걱정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주차장에서도 가끔씩 멈칫거리며 눈가를 조금 찡그리는 게 아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금방 좋아하는 걸 보니 별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기뻐하는 건 누구나 알 정도였다. 서준이 소파에 드러누운 해인에게 다가가면서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아니요, 아직. 그런데 제가 잠을 잘 못 자서 먼저 좀 자고 싶네요.”

해인이 가볍게 도리질을 하면서 상체를 일으켰고 서준은 어느새 해인의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인의 눈이 조금 부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붉은 기 도는 눈가에 서준은 걱정이 어려 해인의 이마에 손을 뻗다가 조금 주춤거렸다.

해인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봤고 빠르게 오묘한 감정을 지운 서준은 해인의 이마에 위에 손을 얹었다. 조금 서늘한 살갗이 느껴졌다.

“열은 없네요. 아픈 건 아니죠? 아픈 곳 있으면 바로 말하세요.”

해인의 시선이 잠시 방황을 했다가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조금 미심쩍었지만 서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서준이 뒤로 몸을 물리자 해인은 일어서 발걸음을 계단으로 향했다. 서준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고 느리게 올라가던 해인이 계단 난간에 팔을 걸쳤다.

“아직도 다 못 깼죠?”

잡생각을 정리하는 데 게임만큼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

“뭘…. 아. 네, 그 뒤로 건들지도 않았어요.”

“그럼 이제 저 돌아왔으니까 기념으로 오늘 집에 가지 마세요.”

해인이 장난스레 웃으며 서준을 쳐다봤다. 분명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서준의 표정은 조금 미묘했다. 혹시 이 뒤에 일정이라도 있나 싶어 ‘일 있으면 다음에 하고요.’라고 말을 덧붙이려던 찰나였다.

서준의 머리 위의 숫자가 변했다.

“좋아요. 해인 씨.”

눈을 살짝 접으며 그가 대답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