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올라간 호감도를 멍하니 쳐다보던 해인은 서준이 자신을 의아하게 볼 때 즈음에야 살짝 웃어 보이고는 침실로 올라갔다.
해인은 넓은 침대에 몸을 눕히고 가만히 있다가 시스템창을 열었다. 잠시 들어간 ‘공략인물 목록’에 강서준과 백담호의 이름이 나란하게 있었고 그 둘의 호감도 역시도 나란하게 쓰여 있었다.
[강서준 호감도 28]
[백담호 호감도 25]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격차가 엄청났던 것 같은데 이제는 고작 3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복잡해진 신경으로 그걸 보던 해인은 혼자 얼굴을 붉혔다가 도리질 치기를 반복하더니 목록을 닫아 버렸다.
드디어 게임을 종료할 때가 왔다. 더 깊은 감정을 느끼고 관계를 맺기 전에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창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게임에 참여한 이후 단 한 번도 게임을 종료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임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에, 종료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러려고 해도 필수 퀘스트가 있어서….
“아, 잠시만.”
그러고 보니 백담호 필수 퀘스트를 아직 다 못 깼던 것 같다. 시간은 꽤 채웠던 것 같은데. 해인은 종료 버튼을 대신 이곳저곳을 뒤지다 퀘스트란에 들어갔다.
[필수 퀘스트]
-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 앉기(37hr/50hr)
“진짜 얼마 안 남긴 했는데…. 하.”
이걸 생각 못 했다. 필수 퀘스트가 있을 땐 게임을 종료할 수 없다는 걸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해인은 혹시나 싶어 종료를 터치해 봤지만 떠오르는 경고창에 ‘취소’를 눌렀다.
필수 퀘스트를 무시한 채 살기에는 또 양심 없는 게임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소원권에 평생 오피스텔에 살게 해 달라고 했으나 페널티라고 우기면서 다시 원룸으로 내쫓을 가능성이 다분한 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시작도 멋대로였으니 언제 불쑥 또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시스템창을 닫았다. 갑자기 마지막에 걸린 장애물에 해인은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고뇌를 해야만 했다. 이제 백담호랑 같이 앉을 생각이 없었는데 그러기엔 평생 게임을 종료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할까.
“아.”
해인이 작게 탄식했다. 어차피 금요일은 백담호랑 같은 조였기에 피치 못하게 같이 앉아야 했다. 게다가 서해빛과 백담호와의 술 약속도 아직 유효한 상태였다.
눈꺼풀이 조금 무거웠다. 남은 시간은 13시간. 교양은 3시간짜리였고 술 약속까진 시간이 있으니 어느 정도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보기보다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갑자기 완전 생 까는 사이가 되기엔 이미 벌인 짓이 너무 많았으니까.
몰려오는 졸음 탓인지 억지로 생각을 마무리 지으려는 듯 사고가 중간 중간 멈췄다. 결국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해인은 스르르 수마에 빠져들었다.
해인이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을 때 옆에 놓인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백담호: 안 왔네.] 오후 5:31
* * *
금요일 백담호와 겹치는 전공 시간. 해인은 일부러 조금 늦게 강의실에 들어섰다. 늦어서 급하게 앉는 바람에 따로 앉게 되었다, 라는 나름 나쁘지 않은 핑계를 위해서였다.
사실 수업을 안 나오는 것도 한 가지의 방법이긴 했지만 해인은 F를 받을 수 없었다. 적어도 졸업은 해야 하니까…. 이미 저번 학기에 받은 F탓에 다음 학기에 재수강까지 해야 했다. 그러니 매번 아슬아슬하게 강의에 들어가 같이 못 앉는 척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가볍게 숨을 고른 해인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에서 출석을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가 돼서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백담호는 늘 그러하듯 마지막 줄에 앉아 있었다. 해인은 그를 못 본 척 다급하게 후다닥 걸어 중간 줄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이게 뭐라고 손바닥에 약간 땀까지 송골송골 맺혀 왔다. 가방을 바닥에 내리고 대충 교재를 꺼내려는 순간 후드 집업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방해인.”
“네!”
타이밍 좋게 불린 이름에 해인은 자연스럽게 진동을 무시하고 시작된 수업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래봤자 칠판에 써진 걸 그대로 베끼느라 엉뚱한 페이지에 적은 것밖에 없었지만.
그러는 내내 해인은 어쩐지 뒤통수가 신경 쓰임과 동시에 맥박이 쿵쿵 울렸다.
아주 조금.
* * *
안 듣던 수업을 들으니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벌써 진이 빠진 것 같았다. 그래도 개발새발 글씨체로 빽빽하게 채워진 메모를 보니 나름 뿌듯하긴 했다.
교재를 챙긴 해인이 슬쩍 뒤를 살피니 벌써 많은 학부생들이 빠져나가고 없었다. 모자를 조금 들어 올려 보니 백담호도 없는 것 같았다. 해인은 왼쪽에 떠 있는 백담호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걸 확인했다. 그냥 나갔나 보다. 그제야 휴대폰 화면을 켜 보니 역시나 진동의 근원은 백담호였다.
[백담호: 방해인] 오전 10:02
조금 목덜미를 붉힌 해인은 알림을 지워 버리고 혼자 남은 강의실을 나섰다. 아직, 백담호 이름만 봐도 해인은 조금 민망했다. 어쩌면 이렇게 피할 수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잠들기 전에 자꾸 떠오르는 잔여 기억들과 감각에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홧홧한 열기를 식히며 하릴없이 걷던 해인은 원룸이 사라져서 중간에 있을 곳이 없어져 버렸다. 해인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중도나 가기로 했다. 아침을 오랜만에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지 속이 약간 더부룩했기에 점심은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건물 입구를 나와 조금 서늘했던 오전과 달리 쨍쨍한 햇살에 후드 집업을 벗던 때였다.
“억!”
갑자기 모자가 뒤로 당겨져 대처할 새도 없이 해인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등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
보지 않아도 알았다. 말투는 짐짓 다정했지만 괜히 찔려서 그런 건지 바로 귀 옆에서 들어서 그런 건지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아…. 안녕. 백담호.”
어색하게 웃으며 해인이 백담호의 가슴팍에 기울어진 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모자를 더욱 콱 잡는 게 느껴졌다.
“방해인.”
“으, 응?”
“혹시 폰 부서졌어?”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연락을 씹어 대.”
애매하게 웃느라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곧이어 몸은 바로 세워졌지만 여전히 백담호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불편했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느껴지는 시선이 살벌해 해인은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손가락만 꿈지럭거렸다. 잠자코 있던 백담호가 작게 숨을 내쉬다 해인의 모자를 벗겨 버렸다.
그제야 해인의 시야에 백담호의 거리가 보였다. 아…. 앞으로 모자도 안 쓰고 다녀야겠다. 죽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해인에 백담호의 얼굴이 굳어 가는 것도 모르고 해인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백담호와 덜 마주칠지를 고민했다.
“이제 쳐다도 안 보게?”
“아….”
일부러 그런 건지 바로 귀 옆에서 나직하게 속삭이는 탓에 뜨거운 숨결에 고개가 움츠러들었다. 입 안이 버적버적 마르는 것 같아 해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나직하게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절대 백담호 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을 더 닦달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백담호는 의외로 쉽게 자신을 놓아주었다.
“애도 아니고….”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26]으로 올랐습니다.
해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백담호의 손이 잔뜩 붉어져 익어 버린 것 같은 해인의 귓바퀴를 문질렀다.
“해인아, 이따 봐. 메시지는 씹지 말고?”
알겠지. 떨떠름하게 눈만 깜빡이는 해인의 머리통을 백담호가 두어 번 쓰다듬듯 두드리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백담호는 살벌했던 목소리와 다르게 마지막에 자신을 보던 눈빛은 꽤 부드러웠다.
갑자기 왜 기분이 좋아진 건지는 모르겠다. 해인은 멀어지는 백담호의 머리 위로 둥둥 떠 있는 호감도를 빤히 쳐다봤다. 사람들이 몰려도 백담호의 머리 위에만 호감도가 있기에 해인은 그를 계속 찾을 수 있었다. 곤란한 일이었다.
백담호가 완전히 사라질 때 즈음 해인은 깨달았다.
아, 내 모자. 백담호가 또 자신의 모자를 뽀려 갔다.
* * *
금요일 교양이 시작하기 전 해인에게는 두 명에게 연락이 왔다. 바로 서해빛과 백담호에게서였다. 해빛에게서는 어디냐는 말과 함께 아직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는 이야기였고 백담호에게는 수업 시작하기 20분 전 어디냐는 물음이었다. 해인은 당연하게 둘 다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번에는 오전과 달리 시작 5분 전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해인에게로 두 개의 시선이 쏠렸고 해인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둘을 쳐다봤다.
아니, 왜 저렇게 앉은 거야…? 백담호와 서해빛은 가운데 한 자리를 남기고 떨어져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가운데에 앉아야만 할 것 같은 풍경에 해인은 입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심지어 해빛의 조는 저 앞쪽에 앉아 있었다.
“해인 선배!”
활짝 웃은 해빛이 벌떡 일어서 굳어 있는 해인에게 다정히 팔짱까지 끼며 그를 제 옆에 앉혔다. 그 옆에는 당연하게도 백담호가 있었다.
“선배, 제가 아까 메시지 보냈는데 못 봤어요?”
“미안. 무음이라서 못 봤어.”
같은 교양인 이상 피할 수가 없었지만 해인은 자신에게 말 걸고 있는 서해빛도 아니고 옆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백담호도 아닌 고개를 조금 숙여 책상만 바라봤다. 백담호 옆에 앉을 걸 알긴 알았지만 서해빛까지 옆에 있을 줄은 몰랐다. 원래 이 의자가 이렇게 불편했던가 싶어 해인은 괜스레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런데 너, 너네 조랑 같이 앉아야 하지 않아?”
해인이 드디어 해빛을 흘기며 물었다.
“아, 그런데 아직 수업 시작 안 했잖아요. 이따 가게요. 밥은 드셨어요?”
먹었다고 거짓말을 치려는 찰나 해인의 옆으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속삭임이었다.
“방해인, 내가 메시지 씹지 말라니까. 또 씹었네?”
도무지 옆을 돌아볼 수 없었다. 해인은 차라리 못 들은 척 서해빛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백담호와 완전 등지려는 찰나.
“윽!”
“선배?”
한쪽 엉덩이가 강한 힘에 잡히고 말았다.
“이제 나로 모자라서 서해빛도 꼬시게?”
조금 빡치려고 그러네….
백담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해인이 다급하게 손을 뒤로 뻗어 엉덩이를 뜯을 기세로 잡은 것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되레 더욱 강해지는 악력에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질 뿐이었다.
“선배, 왜 그래요? 표정이….”
“해빛아!”
제 얼굴에 뻗어 오는 손을 잡은 해인이 최대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수업 시작하는데 가, 는 게 좋지 않을까?”
“아…. 그러죠. 선배도 수업 준비해야 하는데 제가 너무 방해했다. 미안해요.”
다행히도 해빛은 조금 아쉬운 기색만 남긴 채 빠르게 떠나 줬다. 해빛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드디어 거머리처럼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떨어지고 싸한 감각이 둔부 전체에 퍼져 나갔다. 어릴 때 친구들끼리 전기 통한다고 손목을 세게 움켜잡고 손바닥을 내리친 다음 손목을 놓았을 때랑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아났다.
싸한 감각 뒤에 화끈거리는 엉덩이를 해인이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백담호를 원망 어린 눈으로 쏘아봤다. 그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나긋하게 웃고 있었다.
“난 또 이제 한번 했다고 버리려는 줄 알았지. 내가 괜한 착각을 했다. 그렇지?”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정말 엉덩이를 떼어 낼 기세라 해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한번 하고 버리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조금 거리를 두려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하지도 않았고…. 해인은 머릿속으로 자기합리화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 회로가 돌아가는 것부터가 스스로도 잘못한 일인 걸 증명하는 꼴이 된다는 것은 애써 무시한 채 말이다.
“그래도 말이야, 해인아. 같이 좋아해 놓고 연락도 씹고, 좆같이 늦게 와서 혼자 떨어져 앉으면 보통 오해해. 그러니까 적당히 하자.”
해인의 앞에 그의 검은 볼 캡을 내려놓고 백담호는 딱딱한 단추를 손톱으로 긁다가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모자가 해인의 머리라도 되듯 까만 시선은 해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제 앞의 모자를 보다 백담호의 눈치를 보고, 또 호감도도 슬쩍 살핀 해인은 결국 강수를 두기로 했다.
“웃기는 소리.”
팽하고 외친 해인은 모자를 획하고 낚아채고는 빠르게 옆자리로 옮겨 갔다. 혹시라도 또 정수리를 맞거나 엉덩이가 잡히면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모자를 건드리던 백담호의 손이 모자가 빠져나가는 바람에 그대로 공중에 떠 버리고 말았다. 그 상태로 굳은 손처럼 백담호의 얼굴도 입을 살짝 벌린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해인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백담호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호감도를 너무 높여 버린 탓에 백담호가 예상보다 더 들러붙었다.
당최 호감도가 왜 이렇게 빠르게 오른 건지도 모르겠어서 해인은 차라리 호감도를 떨어트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급속도로 친해진 만큼 그 호감이 빠르게 올랐으니 그만큼 빠르게 무너질 게 분명했다. 백담호와 자신 사이에 호감은 분명 존재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을 만한 유대는 없었다.
원래 빠른 공사일수록 뼈대가 부실했다. 그 탓에 해인 나름대로 강수로 두었지만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지 심히 눈치가 보였다.
“존나…. 뭐 하자는 거지…?”
슬쩍 쳐다보니 백담호는 넋을 놓을 대로 놓아 정말 말 그대로 ‘황당’이라고 적힌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담호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교수가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둘의 시선은 앞으로 향했다.
“조별로 앉아 주세요.”
해인이 다시 슬그머니 백담호의 옆에 앉았고 어디에 있다가 온 건지 나머지 조원들도 해인과 담호의 앞자리에 앉았다. 대뜸 퉁명스럽게 모자를 낚아채 옆으로 도망치더니 다시 자신의 옆에 앉은 해인을 담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난 가끔 널 존나 모르겠어.”
해인은 못 들은 척 모자를 눌러쓸 뿐이었다.
* * *
백담호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빤히 쳐다봤다. 금요일에 교양이 끝나자마자 이상한 이유를 대며 방해인이 도망쳤고, 그렇게 주말이 되었다.
분명 연락을 씹지 말라고 했는데도 방해인에게서 돌아오는 답장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발.”
커서가 깜빡이는 워드 화면에는 겨우 서론 한두 줄만 써진 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작업 표시줄에 있는 메신저창을 열어 방해인의 이름을 클릭했다.
2021년 9월 23일
[백담호: 어디야.] 오후 5:23 -1
[백담호: 안 왔네.] 오후 5:31 -1
2021년9월24일
[백담호: 방해인] 오전 10:02 -1
[백담호: 해인아, 어디야.] 오후 12:40 -1
2021년9월25일
[백담호: 와 아직도 씹네.] 오후 1:12 –1
벌써 사흘째 자신만 보낸 메시지들이 마치 안달 난 사람처럼 보여 열이 확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백담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방해인이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목요일, 집에 나오기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비록 방해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해인이 그런 게 한두 번 일도 아니었기에 백담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제 메시지에 답장이 없었던 것도 넘겼다. 바로 금요일 오전에 해인이 혼자 저 멀찍하게 앉기 전까지는.
전혀 틀어질 만한 일이 없었는데도 방해인은 자신을 피하려는 티가 역력했다. 아직 쪽팔려서 그런 건가. 하긴 겨우 입술만 비볐을 때도 지나치게 민망해하던 그였다. 그러니 그것보다 훨씬 더한 짓을 했으니 훨씬 얼굴 보기 창피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은 풀어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그렇다고 연락 두절까지 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골 때리는 새끼….”
나직하게 중얼거린 백담호는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다 지워 버렸다. 자신도 나름대로 계속 연락을 했고 아무래도 이건 방해인이 먼저 보내기 전까지는 전혀 풀릴 일이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무엇보다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 하고, 아니, 그건 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밤을 보내고 상대가 연락 두절인 건 처음이라 담호는 꽤나 기분이 좋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게 계속 연락이 씹히면서도 메시지를 줄기차게 보낸 적도 없었다.
전에는 먼저 연락도 하더니….
“이해가 안 가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짜증이 났고 이해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방해인과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고민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백담호는 채팅창을 완전히 닫아 버리고 다시 워드창을 띄웠다. 몇 줄 더 끄적이던 백담호는 결국 노트북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설마 이대로 계속 쥐새끼처럼 나를 피할 생각인 건가?
담호는 순간 제일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와 동시에 자꾸 끙끙거리는 제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개빡치네….”
* * *
담호의 최악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적중했다. 벌써 주말이 지나고 다시 또 주말이 다가오는 금요일, 방해인과 인사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은 지 닷새째였다. 영악한 게 항상 강의가 시작하고 들어오거나 가끔은 결석 처리는 안 될 정도로 아슬아슬한 시간에 출석했다.
강의실 문은 대부분 앞문과 뒷문 두 군데였기에 방해인은 재빠르게 토꼈고 드디어 강의실 입구가 하나인 곳에서 하는 수업은 아예 출석을 안 해 버렸다.
또 자신에게 위치 추적기라도 달아 놓은 건지 강의실만 빠져나가면 당최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그랬으면 고소라도 해서 경찰서에서라도 마주쳤을 텐데 화요일에 제 물건과 휴대폰을 싹 다 살펴봤지만 위치 추적기는커녕 도청기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담호는 점점 진심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고 더불어 혼자 이상한 추측까지 하게 되었다.
막상 하니까 내가 존나 별로였나? 아님 그만하라고 울 때 그만했어야 했나? 존나 이게 밀당은 아니겠지?
방해인은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지 않게 맹해 보이는 해인의 얼굴이 선명해져 짜증이 치밀었다.
방해인은…. 정말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남의 집에 콘돔이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겨우 그런 거에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 자체가 유치했다. 방해인은 자신을 치졸하게 만들었다.
멀쩡한 사람 다 헤집어 놓고 대체-.
“하, 시발.”
백담호도 연애하다가 차여 본 적은 있었지만 보통은 그 징조가 보였다. 이렇게 바로 쌩 하고 까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왜 그러는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가 벌써 가냐고 해 놓고, 애초에 먼저 이상한 짓거리를 한 것도 방해인이었다. 가만히 서로 쌩이나 깠으면 서해빛하고….
“시발.”
서해빛을 생각하니 다시 열이 뻗쳐 왔다. 전에는 전혀 그런 놈이라고 생각 못 했는데 지금 보니 영 하는 짓이 여우 같기 짝이 없었다. 순진한 줄만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왜 그걸 예전에는 눈치 채지 못한 건지 놀라울 정도였다. 이제 보니 처음엔 방해인이 먼저 서해빛에게 추근덕거렸어도 뒤로 갈수록 서해빛이 먼저 쫄래쫄래 갔던 것 같기도 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니 담호의 눈에는 모든 게 아니꼽게 보였다. 지금 수업을 집중해서 듣는 건지 계속 칠판을 봤다가 교재를 보는 맨 앞의 뒤통수를 그대로 잡고 제 옆에 끌어 놓고 싶을 정도로.
마치 불안 증세라도 온 듯 백담호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해인의 뒤통수를 노렸다. 주말 이후로 몇 번 더 메시지를 보냈지만 연이어 씹혀 버린 탓에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 보지도 않는 상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할 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방해인을 제 눈앞에 갖다놓아야만 했다.
이따 교양 때는 제 옆에 앉겠지.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바로 토낄 테니까 그냥 끝나자마자 손을 잡든 팔을 잡든 엉덩이를 잡든 해서 뭐라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연이 끊긴 적은 처음이라 백담호는 좀 빡쳤다.
* * *
오늘은 이만 마치겠다는 말과 함께 학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빠져나갔다. 해인도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끼어 후다닥 강의실을 나온 뒤 공략 인물 위치 정보를 살폈다.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 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5m 이내에 있습니다.
더 이상 모자를 쓰지 않아 바로 보이는 알림을 살피고 좌우전후까지 살피며 걸음을 바쁘게 했다. 백담호를 철저하게 피해 다닌 지 5일째, 무척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 같았다. 보지도 않는데 간간히 계속 오던 연락도 뚝 끊겼고 의외로 저 위치 정보를 잘 활용해서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내내 백담호와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상승세를 보이던 백담호의 호감도가 떨어졌다. 비록 1밖에 안 떨어졌지만, 그간 폭주 기관차처럼 오른 것에 비하면 큰 발전, 변화였다.
백담호의 마지막 연락과 함께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알림이 왔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좋지는 못했다. 애초에 자신이 이러는 게 맞는 건가 종종 헷갈리기도 했다. 해인도 이제는 백담호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꽤 괜찮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지금 백담호와 자신의 관계가 잘못된 노선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방해인은 백담호와 어느 정도 친해질 수는 있다. 그렇다고 섹스를 하는 관계가 될 수 없었다. 이건…. 백담호가 이 세상의 메인공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해인에게 약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담호가 자신에게 욕정을 느끼고 자신과 더한 짓을 하고 싶고 그래서 친밀함을 넘어서 밀접한 관계가 되고 싶어 한다면 해인은 그걸 응해 줄 수 없음을 잘 알았다.
반강제로 시작된 관계였다. 해인이 갑자기 백담호에게 관심을 두고 잘해 준 건 단순히 게임 때문이었다. 자신의 소원권을 얻기 위해 백담호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일반적인 인연도 안 좋게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런 인연이 좋게 끝날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해인은 그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먼저 관심을 두게 해 놓고 백담호에게 이러는 게 못 할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길게 보면, 먼 미래를 보면, 이게 맞는 일이라고 계속 합리화를 했다.
해인은 걸음을 바삐 옮겨 계단을 뛰다시피 하며 내려갔다. 학교에서 거의 붙어 다녔던 터라 옆자리가 허전한 거 같아 해인은 예전보다 걸음이 빨라졌다.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꼽고 앞만 보고 가던 해인의 어깨가 붙잡혔다. 갑자기 잡힌 어깨에 크게 놀란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니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있는 해빛이 서 있었다. 해빛이 뭐라 입을 벙긋거렸지만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너무 커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한쪽 이어폰을 빼내니 약간의 이명 뒤에 드디어 시끄러운 주변의 소음이 들려왔다.
해인은 들려오는 해빛의 목소리에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실망감이 들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어쩐지, 뒤에서 불렀는데. 노래 듣고 계셨구나.”
해빛이 화사하게 웃으며 해인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해인은 그런 그를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마주 웃지도 않은 채 그저 말없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응, 왜.”
말투가 다소 딱딱했음에도 해빛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오늘 마침 수업 일찍 끝나서 선배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 마주쳤네요.”
해인이 딱히 대답이 없었음에도 해빛은 말을 이었다.
“오늘도 점심 걸러요? 오늘은 같이 밥 먹어요, 선배.”
해인의 분위기가 어쩐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져 해빛은 그의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며 조심스럽게 권했다. 전이라면 슬쩍 꼈을 팔짱도 끼지 않고 다소곳하게 옆에 따라붙었다.
음, 하고 짧게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어느새 건물 입구에 도달했고 첫 번째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해인이 몸을 조금 뒤로 돌려 해빛을 쳐다봤다. 아까와 달리 옅은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평소의 해인과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미안, 오늘은 할 일이 있어….”
말하던 해인의 시선에 빠르게 변하는 숫자를 발견함과 동시에 중앙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왜인지 어느 때보다 낭패감이 들었다. 이 정도면 공과대 건물이 제게 저주를 내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백담호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는 게 보였다.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23]로 떨어졌습니다.
굳은 해인의 얼굴에 서해빛 역시도 뒤를 돌아봤고 그 순간 같이 굳어 있던 백담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긋하게 미소를 지은 채 둘에게로 백담호가 다가왔다.
“오랜만 보네. 해인아.”
큰 손이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제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백담호에게 해인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미련도 없이 멀어지는 백담호를 해인은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백담호를 쳐다보는 해인을 서해빛이 조금 곤란한 눈으로 바라봤다. 느리게 해인의 옷깃을 움켜잡고 힘을 아주 살짝만 주어 두어 번 당겼다. 그러자 그제야 해인의 시선이 해빛에게로 옮겨 갔다.
그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밥은 다음에 먹고, 어디로 가세요? 같이 가요.”
“아냐, 괜찮.”
“같이 가요. 제가 혼자 가려니까 조금 쓸쓸해서 그래요.”
눈매가 안쓰럽도록 추욱 처졌고 옷깃을 슬쩍 잡은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 얇은 천이 구겨졌다. 잠시 해빛을 보던 해인은 힘없이 웃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금세 해빛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선배.”
“아니야.”
백담호가 나타났던 순간에 지나치게 수그러들어 있던 해인의 기색이 지금은 괜찮아진 듯 보였다. 그럼에도 해빛은 여전히 눈치가 보이는지 평소에 비해 말수가 줄어들었고 거리를 걷는 둘 사이는 조용했다.
“어디까지 가세요?”
“너 식당까지 데려다 줄게. 난 좀 멀어.”
“아…. 감사해요.”
다시 또 대화가 단절되었다. 따가운 햇살 그대로 맞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식당 근처까지 다 오고 말았다.
“맛있게 먹어.”
해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해빛도 고개를 꾸벅하다가 우물쭈물 말했다.
“…저, 선배.”
“응?”
“그… 저희 내일 약속…. 불편하시면 깨도 돼요…. 아까 보니까, 음….”
해빛이 곤란한 듯 웃어 보였고 해인은 잠시 잊고 있었던 약속을 이제야 기억해 냈다. 아, 맞다. 약속한 날짜가 벌써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정말 완전히 까먹고 있던 터라 해인은 조금 얼이 빠지고 말았다.
해빛이 왜 곤란한 표정을 짓는지 해인도 곧바로 깨달았다. 이 상태로 셋이 만나면…. 분위기가 말도 못하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애초에 백담호가 나오긴 할까?
해인의 머릿속에 떨어지던 호감도와 미련 없이 스쳐 가던 백담호가 떠올랐다.
서해빛이 있으니까 나오긴…. 아니, 잘 모르겠다. 그래도 예전에는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느껴졌던 거 같은데 자신이 개입함으로 인해서 이제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안 나오려나…. 아까, 그렇게 가기도 했고. 자신이 아는 백담호는 떠나는 사람을 구태여 붙잡는 편이 아니었다. 필요하다고 여기는 이는 조금 회유하긴 했지만 그것도 일정 수준이 지나면 끝이었다.
해인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 제 앞에서 우물쭈물 서 있는 해빛을 보고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냐, 괜찮아. 원래는 네가 과제 도와줘서 사는 거잖아. 얼른 들어가서 밥 먹어.”
그래도 일단 약속은 했으니 나오겠지. 해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서해빛은 여전히 썩 불안한지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선배, 그냥 약속을 중간고사 끝나는 날로 미루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시험공부도 해야 하니까.”
“중간고사 끝나고?”
“네네, 전 한 10월 22일에 끝날 것 같은데, 선배는요?”
학교를 얼렁뚱땅 다녀서인지 해인은 곧바로 시험 끝나는 날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한두 과목이 아직 시험 공지를 안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인은 결국 애매한 투로 “너랑 비슷한 것 같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뒤에 있어도 한두 과목 정도 일 테고. 괜찮겠지.
“그럼 22일 금요일 저녁 어때요.”
백담호한테는 안 물어봐도 되는 건가.
“백담호 선배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어? 어, 그래. 고마워.”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곧바로 해인이 고민하는 걸 알아서 말해 주는 해빛에 해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해빛은 해맑게 웃었다.
* * *
“곧 중간고사 보니까 오늘 어디냐…. 그래. 시간 관계상 발표 못 한 5조부터는 중간고사 이후부터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이상.”
긴장했던 것과 다르게 주거와 문화 시간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일도 없이 끝났다. 옆에 앉은 백담호는 제게 딱히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옆에 앉고 나서부터 이 정도로 말을 안 한 건 처음이라 해인은 조금, 많이 어색했다. 애초에 자신이 먼저 거리를 두겠다고 해 놓고 막상 일이 잘 풀려 가니 느껴지는 떫음은 어쩔 수 없었다.
생각보다 자신이 백담호에게 정을 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긴, 신체적 접촉까지 했는데 다른 정들과 같을 리도 없었겠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일어선 것은 백담호였다. 그가 휑하니 떠나 버리고 해인에게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필수 퀘스트]
-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 앉기(44hr/50hr)
앞으로 2번의 교양 시간이 지나면 옆자리에 앉기 퀘스트는 끝이 난다. 이제 백담호와 자신을 연관 짓던 유일한 연결고리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럼 게임도 종료할 수 있을 거고…. 그럼 백담호가 어디에 있는지-이제 딱히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지만- 백담호의 호감도가 오르는지 떨어지는지도 안 보게 될 것이다.
분명 원했던 일인데 해인은 기쁘지 않았다. 왜 기쁘지 않은지 해인은 알았고 그렇기에 처음부터 계속 보고 나아온 목표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만이 해인이 원하는 것이었다.
* * *
또다시 온 주말에 해인은 이번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넋이 나간 얼굴로 맵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군을 힐 해 주다가 그만 상대편 저격에 어이없게 죽고 말았다.
“아이, 미친.”
[쌍문동칼잡이: 아니 ㅅㅂ 힐 ㅈㄴ 앞ㅍ서가지 말라고 ㅅㅍ]
[jopalnom09: 아니 저기여 뒤지면 같이 기다렸다가 한 번에 가요 왜 자꾸 혼자 쳐가는데;;]
팀전에서 개인플을 난무하는 덕에 게임은 당연히 해인의 팀이 지고 말았다. 애초에 힐러 1명에 거지같은 탱커 1명만 있고 딜러만 가득할 때부터 예고된 결과였다.
“에이씨.”
오늘 날씨도 흐리더만 되는 일도 없었다. 짜증스럽게 헤드셋을 책상 위에 던지듯 놓아 버리고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방해 금지 모드도 안 해 놓았는데 휴대폰은 잠잠했다. 자꾸 봐 봤자 뭐가 나온다고 해인은 금요일 이후로 자주 폰을 들여다봤다.
볼 때마다 별거 없는 알림들이 가끔 떠 있거나 아무것도 없을 뿐이었다. 이번 역시도 그랬다.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폰이 진동했다. 해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확인했다.
그리고 굳어 버렸다.
[백담호: 너네집 앞이야.] 오후 9:12
잘못 봤나 싶어 다시 봤지만 여전히 상단에는 ‘너네집 앞이야.’라는 말이 그대로 떠 있었다. 해인의 시선이 왼쪽 위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백담호가 지금 보낸 ‘너네집’은 그 원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오피스텔로 다시 돌아왔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하게도 원룸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갑자기 왜 찾아온 거지? 온다고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앞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해인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그 집도 아닌데.
창을 누를 생각을 못하고 해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계속 떠 있는 메시지만 봤다. 그런다고 답장이 되지도 않고 왔던 메시지가 삭제되지도 않는데.
답장 안 하면 알아서 가지 않을까? 이렇게 말도 안하고 찾아오면 설사 해인이 아직 그 원룸에 살고 있다 해도 집에 없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백담호는 멍청하지 않으니까…. 한 10분 정도 보지 않으면 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계속 기다리면 어떡하지? 요즘의 백담호는 해인이 가장 예측하기 힘든 상대 중 한 명이었다.
사람이 친해질수록 더 잘 알아 가야 할 텐데 백담호는 그 반대였다. 해인의 머릿속에 고정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지 백담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고민만 했는데 벌써 10분이 지났다. 여전히 백담호에게서는 또 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1~2분 더 고민하던 해인은 드디어 채팅방을 터치했다. 그러자 며칠을 걸쳐 축척되어 있던 ‘1’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보니 정말 징하게도 씹었고 백담호도 징하게도 보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내려니 채팅을 치는 게 어색해 뭐라고 쓰든 다 마음에 들지 않아 해인은 몇 번이나 전부다 지웠다 쓰기를 반복했다. 자기도 모르게 구구절절하게 쓰다가 그동안 다 씹은 주제에 구차한 거 같아 또 지웠다. 그렇게 고민하던 해인은 결국 짧은 문장 하나를 겨우 보낼 수 있었다.
[백담호: 너네집 앞이야.] 오후 9:12
[방해인: 나 이제 거기 안 살아….] 오후 9:28 -1
채팅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그의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1은 사라지지 않았고 해인은 초조해져만 갔다. 진짜 안 본 걸까. 아님 상단에 뜬 거 보고 집 갔으려나.
5분이 지났을 때 해인은 앞으로 안읽씹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보고 씹었으면 그나마 안심했을 텐데 이건 본 건지 안 본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백담호도 이랬을까. 이랬겠지….
뻔한 의문이었다. 8분이 더 지났을 때 해인은 밤에 잠깐 비가 내릴 수도 있다는 예보가 문득 떠올랐다. 하필 지금 왜 떠오른 건지 더욱 신경이 쏠려 날씨를 보니 9시부터 강수량이 60%였다. 60%면 대부분은 비가 내렸다.
해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위로 올려 창문을 열어 봤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습했고 그 특유의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결국, 해인은 메시지를 또 보냈다.
[방해인: 집에 가는 중이지?] 오후 9:34 –1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1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 더 답은 안 해도 되니 봐 달라고 쓰던 걸 전부 지워버렸다. 끙끙거리며 방 안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해인은 백담호 전화번호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연락처로 돌아가 바로 보이는 ‘백담호’를 옆으로 밀려다가 주춤거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온 답은 결국 하나였다. 이건 예외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백담호가 미련하게 집 앞에서 계속 서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찾아온 백담호 책임도 있었지만 이대로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백담호와 거리를 두고 싶은 거지, 척을 지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통화 연결음이 몇 번 들려왔다. 백담호는 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좀 오래 울리는 연결음에 해인은 머리로 또 여러 가지 상황을 그렸다. 운전 중인가. 무음인가. 아님 그냥 존나 빡쳐서 안 받는 건가. 온갖 생각이 난무하던 가운데 드디어 통화 연결음이 뚝 하고 끊기는 순간 모든 생각들이 바람에 모래 날아가듯 전부 지워졌다.
…….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해인은 마치 눈앞에 백담호가 있기라도 한 듯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담호.”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나 방해인인데, 나 이제 거기-.”
“와….”
진짜 방해인이네. 물속에 약간 가라앉은 듯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답지 않게 기운이 쭉 빠져 있는 것 같았지만 해인은 그저 전화로 듣는 목소리는 또 다르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방해인 번호 따기 존나 힘들다. 아님 그냥 번호 줄 정도로 내가 마음에 들지는 않은 건가.”
그럼 시발, 몸도 맞대지 말았어야지. 이런 적은 처음인데 좀 개 같네.
잔잔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뱉는 말 마디마다 살기가 어려 있어 해인은 휴대폰을 집은 손이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쉽사리 해인이 말을 꺼내지 못하자 서로의 미약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둘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미안.”
해인의 사과에도 정적은 걷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무거워질 뿐이었다.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은 채 액정의 시간만 바뀌어 갔다. 결국 또 먼저 입을 연 것은 해인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거기야?”
“어디.”
“원룸….”
“어.”
“나 거기 이제-.”
안 살아. 라는 말은 겹쳐 오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비 오네.”
해인은 다시 열린 창문을 쳐다봤다. 하지만 해인이 있는 곳은 비가 오지 않았다. 그저 비가 올 듯이 잔뜩 흐려져 있을 뿐이었다.
“저녁에 비 온다고 했어…. 얼른 집에 들어가.”
차라리 비가 와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비도 오고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 야밤에 원룸 건물 앞에 서 있는 건 꽤 미련한 짓이었다. 백담호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해인아.”
나 차가 없어. 차 두고 왔어. 아, 배터리도 이제 별로 없네.
전화 너머로 빗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차가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들리니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차가 없을까? 그럼 애초에 뭘 타고 원룸까지 간 건지?
너무 뻔한 거짓말 같은데도 해인은 초조해졌다.
“거짓말 치지-.”
전화가 그대로 뚝 끊겼다. 갑자기 끊긴 전화에 다시 걸어 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 안내음만 나올 뿐이었다.
차가 없다니 거짓말일 게 뻔했다. 자신은 이제 그곳에 없다고 말도 전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했다. 해인은 다시 창문을 쳐다봤다. 하늘이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 낼 듯 구름이 잔뜩 껴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가 금방이라도 내릴 듯했다.
* * *
“…하, 방해인 개씹멍청이.”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으니까 절로 몸이 굳었다. 심지어 야간 운전이라 해인은 온 신경을 앞에 집중하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해인은 결국 20분 더 발을 동동 구르다가 확인만이라도 하기로 했다.
시간도 흘러서 백담호가 갔을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아무도 없는 원룸 건물 앞을 봐야지 마음 편하게 잠을 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담호, 분명 일부러 거짓말 했겠지. 원룸까지 왔다가 허탕이나 치고 가라고…. 그런 거겠지. 응, 그런 거야. 백담호는 존나 빡쳤으니까….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빨간 불로 바뀐 신호를 계속 쳐다보다 앞유리창에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방울을 쳐다봤다. 오피스텔 주변에는 안 오더니 캠퍼스로 갈수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징조인가…. 가다가 사고 나는 건 아니겠지. 해인의 인생사 중 비 오는 날 좋은 일을 겪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죽하면 해인의 전생의 가장 최악이었던 기억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해인은 자연스레 비오는 날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는 온갖 잡생각들과 불안감을 지우려던 찰나 불이 바뀌었다. 차가 다시 출발했고 이제 캠퍼스까지 3분도 남지 않았다.
띵띵-.
[공략 인물 위치 정보]
공략 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1km 이내에 있습니다.
“미친.”
다른 예감은 다 틀려도 불길한 예감은 그렇게 틀리지 않더라. 해인은 오늘 그 말의 증거를 하나 또 찾은 것 같았다. 40km로 탈탈탈 가던 고급 세단이 드디어 80km로 속도가 올라갔다.
내리던 비가 점점 거세져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였다. 일렁이는 창으로 점점 익숙한 골목이 보였고 해인은 원룸과는 조금 떨어지고 차 빼기 쉬운 길목에 주차를 했다. 해인은 조수석에 던지듯 놓아 둔 크고 검은색 장우산을 들고 내렸다. 그나마 도착 직전까지는 차를 때리듯 내리던 비가 조금 약해져 있었다.
비가 오니 더욱 쌀쌀한 날씨에 해인은 입은 후드 집업 앞지퍼를 꼭 잠그고 모자까지 머리에 썼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원룸이 나왔다.
해인은 낭패 어린 눈으로 계속 줄어가는 제 시야에 있는 숫자를 쳐다봤다. 모퉁이를 돌았다. 짧게 살긴 했어도 익숙한 건물 입구 앞에 덩치 큰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비를 피한 채 벽에 기대에 서 있었다.
그는 멍하니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채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공략 인물위치 정보]
공략인물 백담호가 플레이어와 약 3m 이내에 있습니다.
찰박, 내딛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하늘을 쳐다보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까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0]으로 올랐습니다.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 [30]을 달성했습니다.
보상, 회귀 타이머 1개가 지급되었습니다.
보상, 스킬 눈치 없이 이 세상 살아남기를 획득했습니다.
보상, 호감도 2.5배 업 포션 1개가 지급되었습니다.
보상, 1,000,000원이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30은 30인 건가. 몇 개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아이템들과 길어진 시스템창을 해인은 빠르게 닫아 버렸다. 겨우 눈 하나 마주쳤다고 바로 올라버린 호감도가 원망스러웠다. 해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고 백담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띄어졌다.
해인은 백담호와 일정거리 유지한 채 걸음을 멈춰 섰고 주변을 살폈다. 정말.
“차가 없네.”
손이 비어 있는 걸 보니 우산도 없고. 해인이 움직이지 않자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가려고 발을 뻗던 백담호가 멈칫거렸다. 그는 다시 벽에 기댄 채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이쪽으로 오라는 뜻임을 해인은 눈치챘다.
진짜 차가 없다는 게 황당해서 그런지 해인은 이제 낭패감보다 그냥 멍했다. 시선이 몇 번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백담호에게로 옮기던 해인은 결국 너털대며 걸어와 그 앞에 다가섰다.
“드디어 보네. 해인아. 얼굴 보기 더럽게 힘들다.”
가까이 다가서니 백담호의 앞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좁은 난간 탓에 들이치는 비를 피하지 못한 듯 보였다.
“너…. 아니 무슨…. 하아….”
차라리 거짓말을 했어야지. 그랬어야지. 진짜로 여기서 이러고 죽치고 있으면 어떡해. 입 안에 당장이라도 뱉고 싶은 말이 천지였지만 해인은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젖은 머리칼을 조금 안타깝게 보던 해인이 조심스레 옷소매로 톡톡 두드려 닦았다. 그 손길을 가만히 받던 백담호는 천천히 해인의 우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추워 뒤질 뻔했어.”
옷도 반팔을 입은 백담호의 살갗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차는, 차는 진짜 없어?”
“응.”
백담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해인과 더 밀착했다. 해인은 슬쩍 옆으로 피하며 우산을 백담호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다. 우산 손잡이를 낚아채듯 백담호가 가져가 버리고는 기어코 해인을 제 옆에 꼭 붙여 놓았다. 허탈한 얼굴로 해인은 백담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럼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데?”
“공과대 쪽 주차장에 세워 놓고 걸어왔어.”
…그럼 그렇지. 아예 차 없이 왔을 리는 없었다. 그나마 이건 다행이었다. 캠퍼스와 가까워지자 떠오르는 알림창과 정말로 홀로 건물 앞에 서 있는 백담호를 봤을 땐 간담이 내려앉았었다. 뚜벅이도 아니고 여길 걸어서 온 줄 알고.
백담호가 사는 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를 집까지는 안 데려다 줘도 된다는 사실이 현재로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이 상태로 집에 데려다줬다간 왠지 그대로 끌려 들어갈 것 같은 강렬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추워, 해인아. 어?”
“…춥겠지. 비도 오는데 한여름도 아니고 반팔을 입고 몇 시간을 서 있었으니. 차라리 물어보고 오지 그랬어.”
“네가 내 말을 존나 씹어 대는데 어떻게 물어봐. 전화번호는 가르쳐 주긴커녕, 갑자기 생 까는데.”
해인은 본전도 못 찾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보자마자 쌍욕을 박을 줄 알았는데 그에 반하면 백담호는 생각보다 화가 안 나 보였다.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마주치면 정수리에 주먹이 아니라 망치가 꽂힐 기세였었는데.
해인은 정말 춥긴 많이 추운지 한쪽 손으로 반대 팔뚝을 문지르는 백담호를 흘겨봤다. 어두워서 그런지 입술이 조금 퍼런 것 같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해인은 입고 있던 회색 후드 집업을 벗어 백담호에게 건네고 우산 손잡이를 다시 가져왔다.
“일단 그거라도 둘러. 차까지 좀 걸어야 해.”
비는 아까보다 그쳤지만 찬바람이 서늘하게 불어 외부로 노출된 살에 닭살이 돋아났다. 백담호는 해인이 건넨 후드 집업을 받아 들고는 멀뚱거리다가 팔 한쪽을 넣었다가 다시 빼내곤 어깨에 둘렀다.
그걸 옆에서 바로 보고 있던 해인은 입꼬리가 좀 간지러워 입매에 힘을 꾹 줬다. 키는 그래도 나름 엇비슷…. 아니고 그렇게 많이 차이 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덩치 차이가 크다 보니 자신한텐 좀 큰 후드 집업이었는데 백담호한테는 너무 딱 맞았다.
백담호가 그대로 입었더라면 아마…. 쫄쫄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떠오르자 해인은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 꾹 눌렀다.
“넌 가만 보면 너무 말랐어.”
네가 그냥 존나게 덩치가 큰 거야. 속으로만 말하며 해인은 걸음을 옮겼다.
해인의 체격은 평균에서 약간 마른 편이었지, 절대로 삐쩍 마른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담호의 체격이 지나치게 좋은 것이었다. 우성 알파 유전자가 어느 정도 체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 있긴 했지만 지금 보니 백담호는 그 영향을 너무 잘 받은 것 같았다.
걸어가는 내내 둘 사이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점점 그쳐 가는 빗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워 갔다.
* * *
“내가 발로 해도 이것보단 잘할 것 같아. 해인아.”
“…조용히 해.”
해인이 모는 차를 탄 백담호가 처음으로 뱉은 첫마디였다. 어두운데 비까지 오고 옆에 사람까지 태운 바람에 차는 느릿느릿 기어가다시피 움직여 겨우 공과대까지 도착했다.
힘겹게 백담호의 차 옆에 주차를 하고 나서야 해인은 한숨을 돌렸다. 거의 장롱 면허였는데 큰 사고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점점 그치던 비는 이제 보슬비같이 내려 우산 없이 나와도 될 정도였다.
“이제 차 타고 갈 수 있지? 얼른 집에 돌아가.”
해인은 어서 내리라는 듯 턱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하지만 백담호는 미동도 하지 않고 해인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난 아직 방해인 장례식에 가고 싶지 않은데.”
내리라니까 대뜸 나오는 장례식 이야기에 해인은 눈만 깜빡였다. 지금 대화에서 대체 장례식이 나올 만한 경로가 있었던가? 다시 되짚어 봤지만 그냥 얼른 차로 돌아가라는 말밖에 한 게 없었다.
뭐지, 머리 깨겠다는 협박을 돌려서 하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살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짐짓 걱정스럽고 슬프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례식과 왜 자신을 저딴 표정으로 보는 게 무슨 의중인지 몰라 해인이 눈가를 찌푸리니 백담호가 말했다.
“너 이따위로 운전해서 4차선 도로 가면 바로 박을 것 같아. 아니면 뒤차가 화병 나서 들이박든지.”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해인아.
백담호의 말이 끝나고 해인은 잠시 동안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렸다. 그러다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가 번뜩 어이없다는 듯 백담호를 향한 것이 이제야 장례식을 운운한 그의 말을 이해한 듯 보였다.
“…뭐?”
자신이 그 정도로 운전을 못 했나 싶은데 백담호가 운전 잘한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해인은 몇 번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됐고, 빨리 내려. 나 피곤-.”
“집까지 데려다줄게. 차 여기다 두고 가.”
“싫…어.”
핸들에 올려진 해인의 손 위를 커다란 손이 겹쳐 잡아 스르르 아래로 끌어 내렸다. 겹친 손이 슬며시 해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꽉 잡았다가 힘을 풀었다. 약간 뻐근한 감각이 지잉 손바닥을 울려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손가락은 엉겨 붙어 왔다.
이대로 자신이 내리지 않는다면 백담호도 절대 내리지 않을 기세였다. 해인은 대체 백담호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호감도가 쭉쭉 오른 탓도 있긴 하겠지만 말도 씹고 연락도 씹고 학교에서도 피해 다니는 상대를 계속 붙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시선을 눈치 챈 백담호는 슬쩍 해인의 안전벨트도 버튼도 눌러 풀어 버렸다.
“태워 줄게. 가자.”
“…그럼 나 내일모레 학교는 어떻게 가.”
“내가 데리러 갈게.”
“말도 안 되는-.”
마주하는 까만 눈동자는 잔잔했다. 그리고 집요했다. 해인은 결국 계속 거절하는 대신 한 수 뒤로 물러나기를 결정했다. 슬쩍 유리창을 보니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알겠어. 일단 손 좀 놔. 내리게.”
“그래, 해인아. 잘 생각했어.”
꽉 잡혀 있던 손이 드디어 떨어졌고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손바닥이 얼얼했다. 해인은 잠시 문을 여는 척하며 백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웃으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내려서 차에 가 있어.”
백담호 자식…. 눈치 빠르긴.
“…응.”
덜컥 문이 열리고 해인은 좌절하며 마른세수를 하곤 백담호의 차 옆에 섰고 그제야 백담호가 해인의 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림과 동시 해인이 곧바로 몸을 틀어 도망치려는 때였다.
“으억!”
허리가 낚아 채인 해인이 그대로 언제 열렸는지 모를 백담호의 차 뒷좌석에 던져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 빠르게 일어난 상황에 해인이 파악을 하려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이미-.
“드디어 잡았네.”
차 지붕에 위협적으로 손을 얹은 백담호가 활짝 웃었다. 아주 환하게.
아, 조졌다. 해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미소에서 목숨이 위협적일 만큼 아릿한 섬광이 느껴지는 듯했다. 해인은 제 다리를 끌어당기며 슬금슬금 뒤로 도망쳤고 백담호는 전의 조금 애교스러웠던 분위기를 싹 지운 채 여유롭게 뒷좌석에 올라탔다.
도망치기에는 한없이 좁은 차 안, 해인의 등이 결국 반대쪽 문에 닿고 말았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설마 죽이겠나 싶은데 자기 차에 가둬 놓고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빤히 보는 백담호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침묵이 주는 위압감이 때로는 더욱 몸을 굳게 만드는 법이었다. 절로 바싹 말라 들어가는 입 안에 해인이 목울대를 일렁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내 장례식 보기 싫다며….”
느긋하게 깜빡이던 눈이 얼척 없는지 조금 커졌다가 이내 헛웃음을 쳤다. 문 열어, 뭐 하는 짓이야, 뭐 이런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건만 한다는 말이 자기 장례식 이야기라.
“누가 죽인대?”
지금 분위기로는 그런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해인은 고개를 저으며 5초마다 백담호의 호감도를 살폈다. 여전히 반짝이는 ‘30’이 지금만큼은 안심이 되었다. 죽이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설마 호감도 30이나 되는 사람을 패지는 않겠지. 눈치를 살살 보며 해인은 몸을 돌려 비스듬하게 앉아 차 문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지금 도망치면 네 차 뒤에 들이박는 건 내가 될 것 같은데.”
해인의 손이 빠르게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안 도망쳐….”
“그럼 다행이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에도 백담호는 턱을 괸 채 해인을 지켜보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인은 더 죽을 맛이었다. 분위기에 질식사 할 수도 있겠구나 싶을 때 드디어 백담호가 침묵을 깨트렸다.
“야.”
“으, 응.”
“하고 나니까 존나 별로였어?”
“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해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져 담호를 향했다. 처음에는 뭘 하고 났다는 거지 싶어 눈이 커졌고 금방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니 뭐라고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는 네가 생 까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거든.”
막상 좀 붙어먹고 보니까 별로였어? 시발, 내가 좀 더 재롱이라도 부렸어야 했나? 나도 몰랐는데 나 존나 못 하나 보네…. 본전은 시작도 안했는데 까인 걸 보면, 시발.
조금 억울하게 들리는 음성에 해인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백담호는 잘했다. 충분히 잘했다. 해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해인이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막판에는 체력이 부치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지금 앞에서 자신 때문에 땅굴 파는 상대한테 존나 별로였다고 말할 정도로 해인은 뻔뻔하지 못했다.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는 게 해인도 답답했지만 나오는 건 그저 ‘어…. 그건 아니긴 한데….’ 따위의 애매하고 얼빠지는 말뿐이었다. 해인은 중간 중간 사고가 멈출 정도로 느껴지는 곤란함에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그래, 차라리 내가 존나 못 했다고 하자. 그래도 해인아.”
백담호가 잘근잘근 씹히는 입술에 손을 뻗어 물지 말라는 듯 엄지로 밀어 내렸다.
“이러는 건 아니지. 우리가 섹파도 아니고 못 한다고 생 까는 게 어디 있어.”
어두운 눈동자가 잔잔하게 해인을 들여다봤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백담호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해인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미안.”
“방해인, 나 좀 서운했어. 알아?”
이 정도로 서운해할 거라고는 예상 못 해 해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나거나 어이없어 할 줄만 알았지 백담호가 정말로 서운해할 줄은 전혀 몰랐었다.
“다른 건 다 알면서 왜 이건 몰라. 이제 알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해인은 멈칫거렸다. 이렇게 계속 백담호에게 말려들었다간 그동안 힘들게 도망 다닌 게 전부 헛짓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원룸 앞에 있는 백담호와 마주친 순간부터 망한 것 같기는 했지만 차라리 이렇게 된 거 백담호에게 직접 말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그런 건 미안해. 그런데 앞으로도 지금하고 비슷할 거 같아. 아, 그래도 지나치다가 인사 정도는 할게….”
해인은 여전히 제 턱을 붙잡고 있는 손을 떨어트렸다. 어느새 구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건지 백담호의 얼굴에 흐린 달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푸른빛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전보다 서늘해 보여 해인은 몸을 해인이 몸을 약간 돌리며 차문 쪽으로 더 붙었다.
“왜.”
왜? 복잡한 상황과 달리 이유는 명료했다.
“그 정도 사이가 적당한 것 같아서…. 미안.”
듣는 사람은 어이없을지 몰라도 정말 그랬다. 백담호와 자신, 아니 굳이 백담호가 아니라도 해인은 자신과 이곳의 모든 인물 사이는 정말로 그 정도 내외가 적당하다고 여겼다.
애초에 해인이 게임에만 참여하지 않았어도 둘의 사이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인사도 하지 않았고 백담호는 방해인을 별로 아는 척하지 않았을 거고 해인 역시도 그런 백담호에게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남았을 것이다.
강제적으로 참여한 게임에 갑작스럽게 백담호가 공략 인물로 등록되어 버렸으니 해인에게도 모든 상황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니 되돌릴 수 있을 때, 더 감정이 깊어져 불안해지기 전에 선을 긋는 게 맞았다.
“와…. 이건 정말 몰랐는데. 해인이 보기보다 개새끼였네.”
개새끼…. 해인이 쓰리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아니긴 한데 해인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 조금 혀끝이 썼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백담호는 바스라지듯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먼저 이상한 짓거리하면서 관심 끌고, 계속 신경 쓰라고 꼬시고, 먹을 거 주면서 꼬시고, 벽 치기 하면서 꼬시고, 귀여운 짓거리 하면서 꼬시고, 집에서 차 먹고 가라고 꼴리게 해 놓고, 참….”
해인아, 너 진짜 개새끼다.
해인은 할 말이 없었다. 백담호도 딱히 해인의 변명을 들으려는 게 아닌지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랬어?”
“그건 아닌-.”
“하긴 그랬으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순간 섬찟해져 슬그머니 백담호를 보다 눈이 마주쳐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래서 나랑 계속 쌩 까고 싶다고.”
“응, 미….”
“또 시발, 미안하다고 하면 입을 꿰매 버리는 수가 있어.”
“응.”
다시금 정적이 흘렀고 비마저 완전히 그친 터라 차 안에는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지금 백담호에게 그 누구보다 개새끼인 해인은 혹시라도 그의 신경을 더 거슬리게 할까 딱딱하게 굳은 채 숨도 가늘게 내쉬었다.
해인은 자신을 주변에 흐르는 공기마저도 뻣뻣한 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 ‘먼저 꼬셔 놓고,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빡치네.’라고 백담호가 정적을 가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겸연쩍게 힐끔 쳐다보니 눈이 마주쳤다. 백담호는 가볍게 웃어 보였지만 누가 봐도 그 미소는 전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해인은 또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뱉을 뻔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일단 네가 지금 나하고 뭘 하자는 건진 알겠네.”
생각해 볼수록 빡치긴 했지만 백담호도 자신과 너무 친해지는 것도 좀 이상하다는 걸 드디어 깨달은 걸까. 말투가 전보다는 무미건조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새끼네. 그동안 꼬셔 놓은 건 다 개씹구라였어? 다른 사람이었으면 고소했어, 이거.”
그냥 여전히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근데 고소할 정도인가…?뭐, 사람마다 다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제 백담호에게 해인이 할 말은 사과밖에 없는데 그 사과를 하면 입이 꿰매진다 하니 해인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죄인처럼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맞으며 제 무릎 위에 올려진 손만 쳐다봐야만 했다.
“그런데 해인아.”
해인은 다음 말을 기다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으응.”
딱딱한 명령조에 해인은 다급하게 고개까지 돌려 담호를 쳐다봤다. 그는 한쪽 눈썹을 불만족스럽게 찡그리다가 해인이 자신을 쳐다보니 그제야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그래 봤자 오히려 서늘한 눈빛이 섬뜩해질 뿐이었다.
“늦었어.”
“응?”
갑자기 뭐가 늦었다는 건가 싶어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0초가 지나서야 설마라고 쓰고 역시라고 읽는다는 예감과 함께 해인은 뭐가 늦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백담호는 뒤로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숙여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움찔거린 해인이 얼굴을 뒤로 빼려 했지만 큰 손에 뒤통수가 잡히고 말았다.
숨결이 닿는 사정거리, 잠깐의 감정마저도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백담호가 제 머릿속을 전부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해인이 조심스레 시선을 옮겨도 너무 가까워 그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만화적 표현이 존재하는 곳이었다면 아마 해인의 머리통에는 난감함을 표현하는 무수한 물방울 표시가 잔뜩 그려져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인을 계속 붙잡은 채 그 얼굴을 감상하듯 느리게 눈꺼풀을 감았다 뜨던 백담호는 픽, 웃었다.
곧이어 손에 힘이 풀렸고 해인이 백담호의 눈치를 보며 스르르 얼굴을 뒤로 물렸다. 백담호는 또 머리통을 잡아 두는 대신 해인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받쳐 올렸다.
“갑자기 거리를 두겠다는 연유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정말 거리를 두려면 내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더라도 넌 오지 말았어야 했어.”
길바닥에 얼어 죽다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단적인 선택지라는 생각에 약간의 변명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해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지만 말은 할 수 없었다.
“방해인이 날 너무 성공적으로 꼬셔서 지금 거리를 두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내가 보내 줄 거 같거든. 애매하게 거리 두는 건 내가 좀 빡치고 서운할 거 같네.”
난, 해인이처럼 매정하지 못하고 존나 질척거리는 타입이라.
진지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나긋한 음성이 귀부터 목 언저리까지 전부 간지럽혔다. 어깨에 얹혀 있던 손이 해인의 푹 들어간 등골 선을 따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뭉근하게 건드리며 올라갔다.
“그 짓도 내가 더 잘해 볼 테니까, 이제 그만 쌩 까. 해인아. 이러다 나 진짜 울겠어.”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해 버렸다. 달라붙어 오는 손길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 해인은 난처했다. 애써 다른 감정을 무시하고 피하려 버둥거려 봤지만, 이미 오른쪽 어깨는 차문에 딱 붙어 있었고 그렇다고 앞으로 도망갈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움직여 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었다. 등골을 훑던 손은 어느새 목덜미를 감싸서 어루만지고 있었다. 백담호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점점 뜨거워지는 살갗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목부터 가슴께까지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아직 연습은 안 했지만 그래도 저번보단 잘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원래 하다 보면 는다고 하잖아. 다른 사람 좆 잡고 연습할 수는 없으니까 해인아, 좆 좀 빌려줘.
어떻게 방금까지 자기를 쌩 까서 서운하네, 빡치네, 입을 꿰매 버리네 하던 대화가 이리로 튈 수 있는 건지 해인은 얼척이 없었다. 그 흐름이 또 자연스러워 놀라울 따름이었다.
“뭔 소리 하는 거야…. 싫어.”
고양이 매만지듯 계속 목을 간지럽히는 손을 해인이 떨구어 내고 나름 단호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잔뜩 붉어진 귀와 목은 전혀 그 말을 신빙성 없게 만들었다.
“정말 싫어?”
해인의 고개가 주춤거리긴 했지만 확실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백담호는 아까 자신의 말처럼 재롱이라도 떨려는 건지 해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어깨에 제 이마를 문질렀다.
“그거 다시 좋게 만들어 줄게, 응? 그러니까 나 좀 그만 밀어내. 그리고.”
해인이 조금이라도 버둥거릴수록 옥죄여 오는 힘은 강해졌다. 머리를 들어 올린 백담호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미 늦었다고 했잖아.”
입술이 연신 가볍게 붙으며 문질러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계속 살벌했던 기색은 모조리 방향을 바꾼 건지 백담호는 퍽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건지 아님 그냥 입술만 부비고 싶은 건지 모를 정도로 백담호는 그저 해인의 몸을 제 쪽으로 약간 돌리고 입술만 문댔다. 담백하다면 담백할 수 있는 행위인데도 제 속의 심장은 날뛰고 있었다.
눈 아래, 왼쪽 볼 중앙, 코 옆, 왼쪽 입꼬리가 끝나는 지점. 모두 백담호의 입이 닿았다가 떨어진 곳이었다. 입술은 떨어진 지 오래인데 그 부분들이 화끈거리고 간질거려 아직도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몸이 완전히 옆으로 돌아갔고 신발은 어느새 벗겨져 차 시트 밑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백담호도 제 한쪽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 굽혀 해인과 마주 보게끔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애매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백담호가 몸을 살짝 숙인 뒤, 해인의 어깨를 잡고 톡톡 두드리며 눈을 살포시 휘며 양 입꼬리를 아주 약간만 말아 올렸다.
해인의 몸에 가려 아까보다 환해진 달빛은 백담호의 얼굴을 사선으로 비추고 있었다. 유독 눈만 돋보이게 스며든 빛의 흐름에 그의 까만 속눈썹 사이사이까지 반짝였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가장 예쁘게 보일지 알고 그러나 싶을 정도로 그간 봐 왔던 백담호 중 탑3에 안에 들 정도로 잘생겼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눈을 떼야만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시선이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시선을 떨어트리는 대신 해인은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눈을 가려 버렸다. 그러자 작게 웃는 소리가 간드러지게 들려오고 곧이어 어깨를 두드리던 백담호가 나직하게 말했다.
“해인아, 너 얼굴 존나 빨개. 그리고 섰네.”
무슨 벌써 섰-. 아, 미친.
백담호는 대체 언제 본 것인지 해인이 시선을 내려 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살짝 부푼 제 앞섶이 선연하게 보였다. 백담호랑 키스를 했어, 아님 좆을 만졌어, 겨우 눈 좀 맞추고 얼굴에 입술 좀 문질러졌다고 그새 선 것이 원망스러웠다.
“싫다면서 그것도 구라였네. 해인이 존나 거짓말만 치고 나쁘고 매정한 새끼네.”
“아, 아니 이건-.”
무어라 발뺌할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여전히 해인의 손이 백담호의 눈을 가리고 있던 터라 제 손등이 해인의 눈앞까지 가려 버렸다. 시야가 차단되니 맞닿는 입술이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진다.
백담호의 양 입술이 해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 잡아당겼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입술 속이 간지럽고 혀끝과 혀 아래의 부드러운 근육들에 싸르르한 감각이 퍼졌다.
공간이 유달리 좁기 때문인지 습한 살들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물기 가득한 소리가 유독 음란하게 들려왔다. 입술만 주욱 잡아당겼다가 빨더니 살짝 벌려진 잇새로 혀가 파고 들어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호흡이 살덩이와 함께 훅 들어와 온 입 안을 전부 헤집어 놓았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 해인의 허리를 붙잡았고 백담호의 눈을 가리던 해인의 손은 점점 힘이 빠져 스르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쿡, 하고 입천장의 여린 살을 혀가 찔러 오자 해인이 잘게 몸을 떨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손에 까만 눈동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백담호는 눈을 감지도 않은 채 불과 5cm도 남짓한 거리에서 작은 변화라도 놓칠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손바닥도 그렇게 쳐다봤을 거라고 생각하자 해인은 손바닥이 홧홧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렇게 낯부끄럽게 닿은 것은 입술이었는데 해인은 오히려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렇게 눈에다 키스를 하는지 입에다 키스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 닿길 30초, 백담호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느리게 배회하던 혀가 더 격렬하고 집요하게 해인의 입 안을 탐하기 시작했다. 고른 치열을 훑어 내린 살덩이는 유려하게 허공에 뜬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혀의 끝을 문질렀다. 아주 살짝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찬 공기가 들어와 다음 혀가 훑고 입술이 깨물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목구멍으로 더운 숨이 부딪힐 때마다 전신이 뻐근하고 입 안과 아래로 열이 몰렸다.
느리게 입 안을 핥을 때는 점진적으로 쌓이던 성감이 거세게 얽혀 오는 순간 한 번에 터지듯 찌릿거려 카 시트 위에 놓인 해인의 손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하…. 흐음….”
숨을 들이쉬는 것보다 뺏기는 시간이 더 길었다. 눈앞이 뿌옇게 변할 정도로 숨이 부족했지만 싫지 않았다. 어느새 해인의 머릿속에서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백담호가 제 호흡을 가져갈 때마다 사라져만 갔다.
가슴이 가쁘게 색색거릴 즈음에야 백담호가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타액이 잔뜩 묻어 번들거려 더욱 야살스런 입술을 위를 담호가 엄지로 문질렀다. 피가 몰려 붉어진 입술이 손짓에 따라 탐스럽게 일렁였다.
“어때, 키스는 저번보다 잘하는 거 같아? 이번에 더 열심히 해 봤는데.”
백담호가 농도 짙어진 눈빛으로 해인의 입술에 머물었다가, 제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입술도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것들로 음란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는 해인은 이제 볼까지 붉게 물들인 채 아득한 눈동자로 백담호를 쳐다보다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소리가 더 적나라해서인지 저번보다 느껴지는 성감이 소름 돋게 좋아서 사실 이미 아래가 아려 오고 있었다.
“아직 별로인가 보네. 분발할게.”
해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백담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이번에는 목덜미를 춥, 빨아 들였다. 축축함과 조금 따끔하면서 간질거리는 이질감에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키스를 할 동안 살짝만 움직였던 손이 크게 등을 훑더니 골반뼈를 재듯 천천히 앞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
손이 불룩한 앞섶 위를 꾸욱 누르고 지나가는 바람에 허리가 바르르 떨려 왔다. 속옷이 누르는 압박감에도 아릿했는데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할 압박이 주어지니 찌릿거리면서도 묘한 쾌감이 올라왔다.
앞섶을 지나친 손은 그대로 오른쪽 허벅지 안쪽 살을 주무르다 그대로 안쪽으로 파고들어 치골을 따라 손가락을 세워 문질렀다. 목덜미에 가득 자국을 남기고 나서야 백담호는 만족스러운 낯으로 얼굴을 떨어트렸다.
“흐으….”
정작 빳빳하게 서 가장 예민한 곳을 만지지 않고 그 주위만을 살살 간지럽히며 배회하는 자극에 해인의 허리가 꿈틀거렸다. 차라리 바지 위에서라도 만져 줬으면 하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아래로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그대로 잡혀 버렸고 제대로 풀리지 않는 성감에 해인이 조금 간절한 눈으로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해인이는 쉬어, 내가 할게.”
백담호는 해인의 손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끔 뒤로 넘기고 난 후 양손으로 해인의 양쪽 허리를 붙잡고 살짝 제 쪽으로 당겼다. 그 탓에 몸이 눕다시피 기울어져 거의 해인의 몸 위로 백담호가 겹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허리를 붙잡은 손은 약간 힘이 풀린 채 가슴 위로 스멀스멀 올라갔다. 가볍게 가슴팍을 문지르자 얇은 천 아래로 돌기가 같이 쓸려 등이 곱아들어 갔다. 그렇게 두어 번 더 문지르자 옷 위로 딱딱하게 선 돌기가 언뜻 솟아올랐다.
“아으…. 잠시만, 거기 별로….”
튀어 오른 유두를 백담호가 검지로 살짝 튕기듯 긁었다. 다른 곳보다 유달리 자극을 많이 받지 않았던 곳이라 그런지 조금 생소한 감각 탓에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해인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피하려 했지만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다. 가볍게 돌기를 옷 위로 꼬집고 지장 찍듯 꾸욱 눌러 문지를 때마다 가슴 근육 안으로 찌릿거리는 전율이 흘렀다. 좆을 만지는 것보단 약했고 입술을 빨아 들이는 것보단 강한 쾌감에 해인의 입에선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린 살갗이 계속 거친 옷에 긁히니 약간 쓰라렸지만 그보다는 아래 발기할 대로 발기한 제 것이 더 아파 왔다.
“방해인은 여기도 잘 느끼네….”
귀엽게.
조금 풀린 눈으로 백담호는 몇 번 더 돌기를 가지고 놀다가 더욱 해인과 몸을 가까이 하고는 물었다.
“좆 좀 만져도 돼요?”
내가 이번엔 잘해 볼게.
흐읍,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틈으로 앓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해인은 물기가 가득 어린 눈으로 제 아래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백담호를 믿을 수 없이 내려 봤다.
아래가 벗겨지고 백담호는 자신의 성기가 미술품이라도 되듯 만지지도 않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차 안이라도 비가 와 낮은 기온 탓에 하반신이 차게 식을 때쯤 백담호가 상체를 푹 숙이고는 기둥을 살포시 움켜잡으며 물었다.
“빨아 줄까?”
잠시 말없이 쳐다본 건 혼자 고민한 탓이었던 건가. 눈꺼풀이 닫혔다 열리는 게 워낙 느려 마치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제 성기를 잡고 짐짓 순수한 척 꾸며 낸 얼굴로 백담호는 자신을 올려다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넋을 놓은 해인이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백담호는 해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차가웠던 공기 탓일까 선단에 닿은 점막이 미치도록 뜨겁게 느껴졌다. 누군가 제 것을 입에 담은 것은 처음이었다. 손으로 마찰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에 해인은 입이 절로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 흐아…. 백, 백담호, 그만, 그만해….”
백담호는 위에서 애달프게 들리는 소리를 만족스럽게 들으며 입 안을 채운 기둥을 뿌리까지 집어넣었다가 빨아 들이며 천천히 빼내었다. 츕츕, 거리는 소리가 작은 공간에 적나라하게 퍼졌다.
꼬리뼈까지 전해지는 아찔한 감각에 해인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먹먹하게 젖어 드는 시야 속으로 얌전하게 몸을 숙이고 성기를 빠는 백담호의 모습이 뇌리에 짙게 박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입에 가득 넣었던 것을 빼낸 백담호는 그대로 입술을 음낭부터 기둥까지 자국을 남기려는 듯 조금 세게 빨아 들였다. 통증이 약간 느껴질 정도로 자극적인 행위에 해인의 입술 사이에서는 간헐적으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짙게 풍겨 오는 백담호의 체향에 입 안에서도 그가 느껴져 자극되지 않은 감각이 없었다.
뭉근하게 혀끝으로 선단을 쿡 찌르다 문지르는 감각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아….”
“좋아?”
일부러 그러는 건지 백담호는 입술을 완벽히 성기에서 떼어 내지 않고 속삭이듯 물어 왔다. 유독 숨소리가 많이 섞여 예민한 살갗에 달아오른 공기가 닿자 해인은 흐리게 울먹였다. 공기의 진동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대답 안 들어도 알겠네.”
말이 끝나자마자 그전까지는 그저 미약한 자극이었다는 듯 백담호는 해인의 성기를 입에 담고는 거칠게 빨아 들였다. 왼쪽 허벅지를 벌리고 있던 손이 더듬더듬 쓰다듬듯 안쪽으로 파고 들어와 음낭을 굴리듯 건드렸다.
“흣, 아, 으응…. 너, 갑자기 아…. 아흐…. 너무…!”
선단에서 흘러나온 프리컴으로 백담호의 입가는 물론 해인의 아래까지 전부 질척이고 있었다. 배 아래가 잔뜩 뭉쳐 들었고 강렬하게 제 몸을 때리는 성감에 해인은 어쩔 줄 몰라 한 손으로는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팍의 티셔츠를 꽉 움켜잡았다.
뭐라도 잡고 있어야 정신이 아릿해지는 감각에서 조금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아래에서 제 것을 빠는 백담호는 더욱 집요해졌다. 입 안에 넣고 혀로 선단을 굴릴 때면 해인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뜨겁고 미끄덩한 것이 발갛게 부푼 것을 문질러 대니 누구라도 버틸 재간이 없을 게 분명했다.
“나, 갈…. 흣, 백담, 호…! 얼굴, 얼굴 치워……. 아흐…….”
금방이라도 분출할 듯 아래로 열이 가득 몰리고 눈앞이 뿌옜다. 입을 막은 손을 내려 백담호의 머리통을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백담호는 더욱 얼굴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아아……. 흐으윽…!”
결국 지는 쪽은 해인이었다. 백담호의 입 안에 가득 정액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빨 때보다 더욱 비린 향에 백담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바로 뱉어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려 해인과 계속 눈을 맞췄다. 잔뜩 기운이 빠진 듯한 해인은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백담호를 쳐다보다가 뒤늦게야 그의 입 안에 제 정액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미친. 티슈, 티슈 어디 있어!”
문 쪽으로 기울어졌던 상체를 일으킨 해인이 두리번거리자 백담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센터 콘솔에 달린 수납장을 가리켰다. 해인이 다급하게 몸을 기울여 센터 콘솔 커버를 꾹 누르자 안에는 얼마 쓰지 않은 물티슈가 들어 있었다.
물티슈를 들어 올리자 밑에 두어 개 놓인 정사각형의 작은 박스에 해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재빠르게 커버를 닫아 버리고 해인은 몰려오는 민망함에 물티슈를 마구잡이로 뽑았다. 엉망으로 뽑힌 물티슈를 백담호의 입 아래에 가까이 가져갔다. 여전히 얼굴이 뜨거워 해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제 낯을 가렸지만 이미 온 얼굴이 빨간 게 백담호의 눈동자에 가득히 담겨 있었다.
“얼른 뱉어. 그러니까 얼굴 치우라니까….”
약간의 질책과 민망함에 말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백담호는 그 특유의 나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1]로 올랐습니다.
알림이 뜸과 동시에 당황한 해인이 곧바로 물티슈를 뒤로 물리려고 하던 찰나였다. 느른하게 떠져 있던 눈이 조금 부릅떠지고는 백담호가 해인의 손목을 콱 움켜잡았다. 억센 힘에 잡힌 손목이 조금 아려 와 해인은 이미 물리기엔 한참 늦었음을 깨닫고는 버티던 힘을 뺐다. 그러자 물티슈가 금방 백담호의 턱에 폭 닿았고 액으로 번들거리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붉은 속살 안에 고여 있던 하얀 액이 침과 섞여 묽게 흘러나왔다. 음란한 모습에 해인은 눈을 돌렸지만 집요하게 자신을 향하는 백담호의 시선은 그대로 느껴졌다.
정액을 뱉으면서 백담호의 눈은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치 자신이 싸지른 게 어디서 나오는지 보라고 요구하는 것만 같은 시선에 해인은 고개를 돌렸는데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또 이렇게나 싸 놓고 감히 물티슈도 안 받쳐 주려고 했냐는 듯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혀 위에 허연 액이 옅게 남았지만, 백담호는 몸을 뒤로 물리고는 손등으로 제 입술을 닦아 내며 말했다.
“쉽지 않네.”
입 안에 있는 정액을 뱉는 게 쉽지 않다는 뜻인 줄 알고 해인은 그제야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질책하듯 노려봤다.
“그러니까, 내가 얼굴 치우라고-.”
“난생처음으로 좆물 먹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물티슈나 주려고 하고, 해인이 쉽지가 않다.”
하…. 개새끼. 백담호가 나직이 속삭였지만 고스란히 해인의 귀에 들어왔다. 누가 빨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자신은 얼굴까지 치우라고 밀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해인은 짐짓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흘겨보는 백담호에 말문이 막혀 결국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해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백담호는 정액이 가득 고인 물티슈를 집어 올리고는 한 겹 더 감싸 그대로 옆으로 치워 버렸다.
강렬했던 열감이 주변의 온도처럼 점차 식어 갔다. 백담호는 제 다리에 팔꿈치를 올려 두고 턱을 괸 채 해인을 빤히 쳐다봤다. 식은 열처럼 차 안은 급속도로 조용해져 마치 냉각한 것만 같았다.
비마저 그친 건지 차 천장을 잘게 때리던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해인은 이제 뭘 어떡해야 하는 건가 싶어 백담호의 눈치를 살피다 문득 제 아래가 썰렁하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주섬주섬 아래를 추스르려던 때였다.
“아직.”
내가 아직 재롱을 더 떨 수 있어서.
백담호가 완전히 해인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서 던지듯 날려 버렸고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아가는 제 옷을 바라봤다.
아, 조졌다.
입이 몇 번이고 또 겹쳤다 떨어진다. 차갑게 식은 허벅지가 계속 쓰다듬어졌고 백담호는 끊임없이 눈을 마주하려 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한 번에 다 담으려는 듯 말이다.
“흐읍…. 숨, 막…혀….”
입술이 약간 떨어질 때 겨우겨우 말을 뱉으며 백담호의 어깨를 밀어내자 물소리와 함께 입술을 완전히 떨어트리고는 음산하게 말했다.
“안 죽어.”
어느새 몸이 완전히 눕혀진 건지 백담호의 얼굴이 제 얼굴 바로 위를 덮고 있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같이 흥분에 젖어 있는 백담호와 마주하니 문득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백담호의 말이 맞았다. 자신과 백담호가 멀어지려면 그가 길 위에서 얼어 죽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담호는 죽어도 자신과 멀어질 생각은 없어 보였고 자신은?
해인은 막연하게 백담호와 적당한 선을 그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백담호와 멀어지는 걸 원한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백담호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해인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이기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해인은 백담호와 처음처럼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와 멀어지기를 원했다.
난…. 대체.
“방해인,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이러는 게 그렇게 싫어?
해인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백담호가 매만졌다. 전처럼 쾌락에 못 이겨 우는 게 아니라 괴로운 듯한 해인의 얼굴을 백담호는 묘하게 내려다봤다.
“전이라면 여기서 멈추겠는데….”
말끝을 흐리며 백담호는 해인의 코끝에 입술을 부비며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한번 열어 보고 싶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코끝을 살짝 씹고는 길 위에 흔적을 남기듯 느리게 입을 맞추며 내려갔다. 뜨거운 숨이 목 언저리에 닿자 해인은 잘게 몸을 떨었다. 얇은 살갗을 잘근잘근 씹고 핥는 감각에 소름이 사르르 퍼져 나갔다.
간지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자극에 해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자신한테 집중하는 백담호의 말이 마치 명령이라도 되는 듯 신경이 전부 그와 맞닿아 따뜻한 곳으로 쏠렸다. 어쩌면 해인 스스로도 그에게 집중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하얀 피부 위에 붉은 것들이 점점 늘어갈 때, 딸깍-.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리게 시선을 소리가 난 쪽으로 돌리니 백담호의 손에 작은 박스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목 주위를 입으로 빨아 들이던 백담호가 몸을 조금 일으켜 박스를 뜯고 안에 들어 있던 콘돔 하나를 꺼냈다.
다시 백담호가 키스를 할 때부터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로 끝까지 갈 줄은 몰랐다. 머릿속에 갑자기 저번에 봤던 백담호의 거대한 성기가 떠오르자 시선이 아래로 쏠렸다.
제 하체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보이는 것 같은 환각이 들었다.
진짜 엄청 컸는데.
“그렇게 보고 싶어?”
“아.”
너무 빤히 봤다. 해인이 황급히 중심부를 향하던 고개를 조금 들어 백담호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별로 안 보고 싶었다. 지금은.
그러자 백담호는 얼척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다른 거짓말은 잘하면서 이건 또 왜 솔직하고 지랄이야. 진짜 이대로 넣어 버리고 싶게.”
“미…. 아냐.”
듣기만 해도 살벌한 소리에 해인이 본능적으로 사과를 하려다 입을 닫았다. 사과까지 했으면 진짜 큰일 날 기세였다. 근데 넣을 것도 아닌데 콘돔은 왜 꺼낸 거지? 문득 해인은 어느새 백담호의 손가락에 끼워진 콘돔을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읏.”
순식간에 허벅지가 벌어지고 미끈한 것이 한 번도 만져진 이 없는 곳 위를 살짝 문질렀다.
“좆 빨아 주는 것으론 안 되니까. 다른 곳은 어떨까 해서.”
“안 넣는…. 아으….”
아까 백담호의 입 안에 차마 담기지 못했던 프리컴과 그의 입에서 흘러내린 타액이 고여 있어 구멍 위를 톡톡 두드리는 손짓이 더욱 적나라했다.
“응, 좆은 안 넣어. 오늘은.”
백담호는 입구 위를 꾸욱 눌러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끝을 넣었다가 빼내기를 반복했다. 처음 느껴 보는 기이한 감각에 발끝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애매하게 찔끔찔끔 입구의 주위 살이 비벼졌다.
“여기가 그렇게 미친대.”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이 해인의 아랫배의 한 부분을 살짝 누르자 형용하기 힘든 자극이 느껴졌다. 해인도 그가 지금 어디를 말하는지 기본 지식이 있으니 단번에 알았다. 전립선, 백담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헤어 나올 수 없이, 아니, 헤어 나오지 말라는 듯, 백담호의 손가락이 해인의 아래를 급하지 않게 두드리며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랫배를 꾹 누르는 손에 정신이 팔린 해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갔을 때가 돼서야 해인은 아래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별로 좋지 못한 불쾌감이 들어 해인이 몸을 조금 뒤로 물리려 버둥거리자 백담호가 한 손으로 해인의 등허리를 감싸고는 제 아래로 끌어당겼다.
“읏!”
갑자기 당겨진 탓에 깊숙이 들어온 이물질에 해인이 조금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백담호가 반쯤 섰다가 죽어 가는 해인의 것을 한손으로 움켜잡았다. 기둥을 감싼 손이 느리게 위아래로 추삽질을 시작하다 미약했던 고통은 쉽게 묻혔다.
힘없이 쓰러져 가던 것이 무색하게 해인의 것은 본능에 충실했다. 금세 빳빳하게 서는 자신의 것을 보며 해인은 신음을 참으려 입을 꾹 다물었지만 백담호가 그걸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부드럽게 왕복을 하던 손이 곧바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마찰하는 살갗에 닫혀 있던 해인의 입이 결국 벌어지고 달뜬 소리가 연신 튀어나왔다. 이미 한번 절정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전보다 민감해진 것만 같았다.
“아…. 아아…. 잠시…. 진짜 이상…!”
손가락 하나도 버거워 꽉 물던 아래는 달아오른 흥분에 어느새 풀어져 손가락이 두 개가 들어가 있었다. 계속 손으로 왕복을 하면서 아래에 파고들어 간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두 손가락으로 뜨겁고 눅눅한 내벽을 꾸욱 누르며 문지르자 해인의 허벅지가 달달 떨려 왔다.
성기와 배 안이 동시에 만져지니 정신을 차릴 틈이 전혀 없었다. 잠시 성기를 애무하는 손이 멈췄다 싶으면 제 속 안에 들어온 손가락의 움직임이 여과 없이 전해져 몸이 움츠러들었다. 분명 처음에는 불쾌하기만 했는데 몸이 달아서 그런지 내벽이 손끝에 득득 긁힐 때마다 버틸 수 없는 쾌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벌써 좆은 안 만져 줘도 될 것 같네.”
완전히 기립해 프리컴에 잔뜩 젖은 성기에서 손을 떼고 담호는 몸을 앞으로 수그려 가쁜 숨을 겨우 내쉬는 해인의 얼굴 쳐다봤다. 흥분에 져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늘 가학심을 자극했다. 이대로 더 펑펑 울리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려 백담호는 구멍을 쑤시고 있던 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굽혀 내벽의 한 부위를 위로 쳐올렸다.
“아흣, 아, 흐으…. 응, 아, 안 돼, 흐, 아파, 흐윽…!”
하필 손가락이 닿은 곳은 전립선이었다. 쿡쿡 극점이 눌릴 때 마다 해인은 백담호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팔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물기에 가득 젖은 눈이 백담호만을 간절하게 담고 있었다.
“시발…. 이러니 내가 넘어가지.”
목소리에 거친 숨이 가득 담겨 있어 얼핏 들으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만, 해인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은 행동은 그와 정반대였다.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2]로 올랐습니다.
떠오른 알림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인은 알림창을 그대로 지나쳐 백담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배 안을 헤집어 놓는 쾌감이 너무 강해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절정의 한계선을 넘을 듯 굴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그 주위만을 돌았다.
이 모든 건 극점을 건드리는 백담호 탓이었다. 강렬하게 눈앞이 번쩍일 정도로 강하게 쳐눌렀다가 갈 것 같으면 손을 떨어트리고는 근처 내벽을 달래듯이 살살 긁어 댔다.
“흐윽, 하으…. 담, 담호야…. 아흐…. 그거 이상해…. 으응…!”
“하…. 안 이상해.”
담호의 손가락이 거칠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여린 살을 가르며 푹 들어가길 반복했다. 덩달아 해인의 몸도 잘게 진동했고 그럴 때마다 딱딱하게 선 해인의 것이 담호의 배를 연신 때려 그의 옷을 더럽혔다. 질질 흐르다 못해 푹 젖은 성기에서는 계속 물이 흘러나와 아래는 마를 새가 없었다. 맥없이 제게 폭 안긴 해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옅은 체향에 백담호는 그의 어깨에 연신 이를 박았다.
“나, 하윽…. 가…. 아…. 백…. 담호….”
“그냥 가.”
손끝까지 빠져나간 것이 그대로 극점을 거칠게 쳐올림과 동시에 해인은 또 한 번의 사정을 맞았다. 바르르 해인의 몸이 경련을 하며 추욱 쳐지며 헉헉 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백담호의 배 위로 흩뿌려진 정액에 옷이 완전히 젖어 들었고 백담호는 그대로 해인을 뒤로 눕혔다.
“하…. 방해인, 못 참겠다.”
좆 보기 싫다고 해서 참으려 했는데. 시발,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백담호는 부풀어 아릴 대로 아린 제 앞섶을 드디어 풀어 내렸다.
* * *
불어 터진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아 힘을 주면 아려 왔다. 결국 다시 눈을 감으니 미세한 진동이 더욱 선명해졌다. 제 몸을 칭칭 두른 담요는 백담호의 작품이었다. 속에서 꼬물거리며 해인이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눈을 살포시 뜨니 흐리게 운전을 하고 있는 백담호가 보였다. 백담호는…. 정말 쟤는…. 바로 10분 전까지 맞붙어 있던 아래가 여전히 뜨겁고 얼얼했다. 게다가 엉덩이에서는 썩 좋지 못한 이물감에 해인은 괜히 아래를 더듬었지만 당연하게도 뭐가 들어 있을 리가 없었다.
벌게져 형형한 눈으로 바지를 풀어 내린 백담호는 그대로 지난번처럼 해인의 것과 같이 제 것을 문질렀다. 한참을 문지르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해인의 허벅지를 모으고 그 사이에 잔뜩 큰 것을 끼워 넣고는 허벅지 살갗이 쓰라릴 정도로 허리짓을 하는 바람에 해인은 아프다고 애원을 해야만 했다.
백담호는 날이 샐 때까지 뒹굴 생각이었던 게 확실하다. 쓰린 감각에 버둥거리는 해인을 절대 놓지 않았다. 끝내 넣지 않은 그의 인내심이 용할 정도였다. 그렇게 해인이 진심으로 그만하자고 열 번을 말했을 때야 백담호는 해인을 놓아줬다. 사실 그것도 콘돔을 다 썼기에 멈춘 게 분명했다.
자꾸만 픽픽 싼다고 이러다 차 시트가 다 젖어서 마르지 않겠다는 둥 듣기에 민망해지는 소리를 하며 해인의 것에도 몇 번이나 콘돔을 씌워 놨다. 차 시트가 더러워지는 게 싫으면 그만두면 되는 것을-.
“…뇌가 하반신에 달린 새끼.”
해인이 원망을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심지어 차 안에서, 그것도 캠퍼스에 세워진 차 안에서 이 정도로 할 줄은 몰랐다. 퉁퉁 부운 눈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가슴, 허리, 허벅지, 엉덩이, 아니 그냥 안 아픈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뭐라고?”
“…아냐.”
오랜 시간 울어 해인의 목소리는 다 쉬어 있었다. 신호에 걸린 것인지 백담호가 뒤를 돌아 해인을 쳐다보자 해인은 그대로 담요에 얼굴을 묻고는 몸을 웅크렸다. 백담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화났어?”
“…….”
“미안, 내 뇌가 하반신에 달려 있어서.”
저게, 다 들어 놓고는. 조금 장난기 어린 백담호의 말투에 짜증이 확 솟구친 해인이 그제야 눈만 쏙 빼 백담호를 쏘아봤다. 그와 동시에 신호가 바뀌었고 백담호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방해인.”
해인은 대답 없이 그의 뒷모습과 핸들을 쳐다봤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걸까, 백담호는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해인은 작게 “응.”이라고 하자 그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성공했네.”
갑자기 뭘 성공했다는 건지 몰라 해인은 부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전에 신경 쓰라고 할 땐 존나 어이없었는데.”
해인은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웅웅 규칙적으로 느껴지는 엔진의 진동과, 신호등, 그리고 여러 인공적인 빛들 반사되는 백담호의 뒷모습이 선연하게 보였다.
“원하는 대로 되니까 어때?”
차가 또 신호에 멈췄다. 백담호가 뒤를 돌아봤다.
“내가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거, 너도 알잖아.”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음에도 해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빛이 마치 ‘너는?’이라고 물어 오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 체감 상으로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 해인이 겨우 입을 벙긋거릴 때였다.
“나 책임져야지. 해인아.”
붉게 반사되던 빛이 녹색을 띠었다.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백담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차는 또 출발했다. 해인은 다시 담요를 제 얼굴 끝까지 덮었다. 콩콩콩,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가슴에 멍이 들 것 같았다.
‘내가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거, 너도 알잖아.’
담담했던 말투와 달리 그 파장이 너무나 크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백담호
나이: 22
키: 189cm
플레이어와의 관계 (호감도: 32)
당신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 관계를 진전해 나가고 싶어 합니다.
나 책임져야지. 해인아.
귓가에 다시금 울리는 듯한 백담호의 말에 해인은 눈을 감아 버렸다.
* * *
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백담호 차 좋아서 승차감이 이렇게 불안정할 리가 없는데…. 해인이 무거운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차 내부가 아니라 백담호의 하관이었다.
“엥.”
담요에 얼굴을 처박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눈을 뜨니 백담호에게 안겨 있었다. 여전히 담요를 꽁꽁 두른 채 말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벙벙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백담호가 말했다.
“우리 집이야.”
백담호네…? 자신이 왜 백담호네 온 건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던 해인은 그가 자신의 집 주소를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지금 그럼 자신이 담요로 둘둘 쌓인 채 백담호에게 안겨서 왔다는 사실에 얼굴이 달아오를 때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나 걸을 수 있어. 내려 줘.”
혹시라도 복도에 누군가라도 있으면 큰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웬 남자 한 명이 남자한테 안긴 채로 내린 모습은 누구라도 오해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해인이 몸을 버둥거렸다.
“담요를 그렇게 두르고 걷다가 코 깨져.”
하지만 백담호는 더욱 해인을 꽉 끌어안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해인이 혹시라도 누가 있을까 긴장한 채 열리는 문틈 사이를 집중했다. 그리고 완전히 나타난 풍경에 해인의 눈동자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집…?”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보이는 것은 복도가 아니라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의 집 안이었다. 백담호에게 여전히 안겨 있다는 것도 잊고 두리번거리니 자신이 타고 온 엘리베이터가 일반적인 엘리베이터와는 사뭇 다른 걸 이제 눈치챘다. 타고 온 건 가정용 엘리베이터였다. 해인도 들어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던 터라 엘리베이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백담호는 소파 위에 해인을 내려놓고 자신이 꽁꽁 싸맨 담요를 살짝 풀어 줬다. 그러니 전보다 훨씬 움직이기 편해진 해인은 맨살인 하체만 담요로 가리고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해인은 제 앞에 서 있는 백담호를 올려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괜히 천장에 높이 달린 전등으로 눈을 돌렸다. 천장에는 크고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새삼 자신의 오피스텔보다 훨씬 넓고 좋은 집에 해인은 작게 감탄을 했다. 가끔 갔던 방해인의 본가에도 내부에 엘리베이터는 없었는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백담호가 부담스러워 해인이 괜히 손가락질까지 하며 물었다.
“저건 너희 집만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어, 할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셨어.”
“아.”
해인은 그 뒤로 말을 잃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편찮으셨어’라는 말만 맴돌았다. 과거형이었다. 지금은 몸이 괜찮아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뭐가 되었든 백담호와 자신이 하기에 적절한 대화가 아닌 거 같아 해인은 엘리베이터에서 완전히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정체 모를 위화감이 계속 들었다. 쩔쩔 매는 해인의 낯에 백담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뭘, 그런 표정을 지어. 예전에 장례식도 와 놓고선. 금방 다시 가긴 했지만.”
“아.”
작게 탄식만 했을 뿐, 해인은 여전히 누가 봐도 곤란한 얼굴로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하얀 손가락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걸 보다 백담호가 해인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가지고 올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어.”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어차피 어딘지도 모르잖아.
까만 눈동자가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해인이 조금 겁먹은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백담호는 미소를 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뭐지, 나 감금당하나…? 대체 뭘 가지러 가는 건데.
해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 * *
따끈따끈한 물로 샤워를 마친 해인이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손가락만 넣었는데도 이렇게 아픈데, 백담호의 것이 들어가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가능하기는 한 걸까? 처음 백담호의 성기를 봤을 때가 떠오름과 동시에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 근데 애초에 왜 넣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지워 버렸다.
입은 티셔츠는 워낙 커서 엉덩이를 다 가렸고 바지는 다행히 허리끈이 있어 꽉 조여 묶으니 흘러내리진 않았지만, 기장이 길어 발이 다 끌렸다.
잔뜩 굳은 채 초조하게 있던 해인은 뭘 가지고 간다고 하고 사라진 백담호가 옷을 들고 온 걸 보자마자 내심 마음이 놓였다. 혹시 족쇄라도 들고 오면 어쩌나 싶었다.
그는 옷과 새 속옷을 해인에게 건네며 씻고 나오라고 했고 해인은 백담호의 집에 와서 처음 한 일이 샤워가 되어 버렸다.
그게 좀 민망해 해인은 쭈뼛거리며 소파에 있는 백담호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앉아 폰을 하고 있던 백담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이 씻는 동안 백담호도 씻은 건지 늘 정돈되어있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해인이 가까이 다가서자 담호의 시선이 해인의 발치에 닿았다.
“온 집을 걸레질 하고 다니겠네.”
백담호가 해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해인은 움찔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 내가 할게.”
제 허리춤에 뻗어 온 손을 마다하고 해인이 스스로 허리를 두어 번 접자 바지 끝으로 해인의 발등이 보였다. 백담호는 여전히 해인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해인은 제 정수리 꽂히는 시선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까까지 심하게 건드려졌던 아래가 여전히 얼얼했고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느꼈던 감각이 너무 강렬해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꼼지락꼼지락 옷단을 매만지는 해인의 손이 부드럽게 감싸졌다.
“이제 자야지. 해인아.”
잔다는 게 자신이 아는 그 자는 게 맞는 거지.
손등을 덮은 손이 손톱을 세워 살살 손가락 위를 긁다가 은밀하게 마디를 파고들려 하며 꾸욱 눌렀다. 하지만 해인이 손에 힘을 주고 있어 손가락은 그대로 막혔고 대신 백담호는 팔을 타고 올라가 팔뚝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피곤하잖아.”
아무것도 안 해.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목 안이 간지러웠다. 묘하게 들러붙던 손길은 금세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멀어지는 손을 해인이 무의식적으로 좇았다.
해인이 드디어 얼굴을 들어 올려 백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그저 나긋한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얼른 가자.’ 해인에게는 그런 의미로 느껴졌다.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말없이 있던 해인은 여리게 끄덕였다.
“으응.”
아까보단 많이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조금 부어 있는 눈 주변을 백담호는 쓰다듬은 백담호는 해인의 어깨를 감싸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맞닿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백담호는 2층을 눌렀다. 해인도 층을 누르는 손을 멍하니 보다 층이 3층까지 있는 걸 보고는 동그래진 눈으로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1층 아래에 지하 1층까지 있는 걸 보니 아까 차에서 내렸던 곳은 지하 1층이었나 보다. 그렇다는 것은 백담호의 집은 총 3층에 지하까지 달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너희 집 3층이야?”
“응. 단독주택이라.”
“아…. 그래?”
단독주택이란 말에 해인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해인은 왜 자신이 아까부터 위화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백담호도 오피스텔에 살지 않았나? 원작의 수위가 수위인 만큼 장소도 한정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한 곳이 백담호의 오피스텔이었다.
정확한 위치까지는 기억이 안 났지만 분명 오피스텔이었던 것 같은데. 그곳에는 아마 내부에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대체 뭐지? 오피스텔에서 이사를 한 건가? 하지만, 왜?
“너 혹시 전에-.”
해인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백담호를 쳐다보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백담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분위기였는데 백담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의 엘리베이터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묽던 것이 점점 짙어져 끈적해지는 것만 같다. 도대체 분위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아무 짓도 안 한다는 듯이 담백하더니 예고도 없이 금방이라도 덮쳐 올 듯이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힐 때까지 몰라.”
“어, 열렸었어…?”
“응.”
어깨를 감싼 백담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해인의 등허리를 문지르더니 엉덩이 위에서 맴돌았다. 한쪽 엉덩이를 움켜잡는 손아귀 힘에 해인이 몸을 펄떡 뛰며 빛만큼 빠른 속도로 열림 버튼을 연타했다.
파닥거리는 해인에 백담호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고 해인은 목덜미가 빨갛게 익은 채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뛰어내렸다. 백담호도 그 뒤를 따라 내리던 때였다.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3]로 올랐습니다.
오늘 벌써 몇 번째 듣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체념할 것 같은 마음으로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를 직접 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먕-.
“…고양이?”
눈을 땡글땡글 뜬 고양이 한마리가 해인의 앞에서 울고 있었다. 정확히는 해인을 보고 조금 놀라더니 곧바로 옆에 있던 백담호의 다리에 제 몸을 부비기 시작했다. 작은 고양이를 보는 순간 계속 느껴지던 위화감에 한 줄기 안도감이 들었다.
원작을 읽을 당시 백담호는 동물을 키워도 자기처럼 커다란 개 같은 걸 키울 것 같았는데 고양이를 키워서 반전이라고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고양이였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레비티>에는 서해빛의 과거 20%, 서해빛과 백담호 둘이 뒹구는 거 80%, 서해빛과 백담호가 꽁냥거리는 거 19%, 백담호의 집안과 과거 1%, 도합 120%의 소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해빛의 집안과 과거는 어느 정도 알아도 백담호는 조금 미지수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고양이 이름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두…. 아니, 그래.”
백담호는 말을 멈추고는 다리를 조금 굽혀 고양이의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익숙하게 두어 번 쓰다듬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얼룩무늬가 있는 작은 크기의 고양이는 기분 좋게 골골거리다 해인의 다리에도 제 몸을 부비기 시작했다.
다리 아래에서 느껴지는 작은 부피감에 해인은 몸을 살짝 굳히고는 놀란 눈으로 백담호를 쳐다보며 모르는 척 물었다.
“고양이 키워?”
“아, 어. 원래 동생이 데려왔는데 지금 다들 다른 곳에 있어서.”
어쩌다 보니 내가 맡게 됐네. 백담호의 시선은 어느새 백담호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려는 고양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손톱을 박고 올라오는 작은 고양이에 백담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안아 들었다.
덩치 차이도 저런 덩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백담호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미니어처처럼 작아 보여 해인은 신기함 반, 귀여움 반으로 둘을 빤히 바라봤다.
해인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름이 뭐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조용하기만 한 주위에 해인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백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뭔가 곤란한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이름이 없나? 아닌데, 이름이 있을 텐데. 뭔가 되게 강해 보이는 이름이면서 좀 웃겼던 거 같다.
“…두식이.”
푸웁. 백담호의 입에서 ‘두식이’라는 정겨운 이름이 나오자마자 해인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맞아, 저런 이름이라서 보다가도 황당하게 웃었었지.
막을 새도 없이 터진 웃음에 해인은 황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백담호의 표정은 조금 서늘하게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아, 어 미안. 웃으려고 웃은 게 아니라….”
당황한 해인이 버벅거리며 뒷걸음질을 쳤고 백담호는 좋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 두식이만 백담호의 가슴팍에 안겨 그의 팔뚝을 신명나게 물어뜯고 있었다.
“됐어. 어차피 그 개새, 동생이 지은 거야.”
이름을 왜 다 저따위로 짓는지 이해가 안 가네. 짜증 서린 말투로 중얼거리던 백담호는 두식이를 내려놓고는 해인을 다시 끌어당겨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빨리 화제를 돌리고 싶은 듯 보였다.
“방해인.”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거의 백담호에게 안기다시피 한 자세가 되자 속삭이는 소리도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너 아직도 나 피하고 싶어?”
아, 조졌다. 해인은 대답 대신 자신을 꼭 끌어안은 팔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억죄어 오는 힘이 강해졌다.
“내가 미쳤지.”
백담호는 낮게 중얼거리며 해인을 제 품에 완전히 가두고는 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박은 채 문질렀다. 얇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때마다 풍기는 제 샴푸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하, 빡치는데….”
어쩔 수 없네.
백담호가 웅얼웅얼거리듯 말해도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해인은 그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적어도 연락은 받아, 해인아. 정말 연락도 좆같이 씹으면 엉덩이 두 쪽 으깨 버릴 줄 알아.”
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한 쪽 으깨져 볼래.”
“…미안. 연락은 볼게.”
그제야 백담호는 만족스럽다는 듯 해인의 머리를 토닥이며 “자자.”라고 작게 말했다. 곧이어 담호는 아까 침대에 내려놓았던 폰을 들어 불을 전부 껐다.
암막 커튼까지 내린 방 안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백담호와 거리를 두기 위해 피해 다니고,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끔 살갗이 맞닿아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좋아서 불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함이 잠잠해지기는커녕 어느 날 눈을 뜨면 다른 곳일까 두려웠다. 지금 느끼는 이 좋음이 마지막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빛이 차단된 방 안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오로지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옆에서 느껴지는 따끈한 온도만이 강렬하게 감각을 자극할 뿐이었다.
문득 불을 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날, 방해인의 원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냈던 날. 블라인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잠든 해인의 얼굴이 깜깜한 장막 위로 그려졌다.
사납고 늘 퉁명스럽게만 봐 왔던 9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조금 부은 얼굴이 통통하니 계속 보고 싶었다. 곤히 자고 있는 걸 깨워 버리면 어떤 반응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슬쩍 입술을 깨물어 버리면 어떨까 온갖 질 나쁜 장난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손가락이 달싹 거리는 것도 참고 자게 내버려뒀건만, 돌아오는 게 무시와 도망이라는 사실에 속이 뒤틀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이게 그 먹버인가, 싶기도 했고 방해인의 목적이 사실 이런 거였나 싶기도 했다. 전에 늘 해인보다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자신을 지독하게도 싫어했으니 이번에 한 번 제대로 엿 먹어 봐라 하는 그런 수작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 좆같아진 관계를 끝내기에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방해인은 늘 예전처럼 자신을 엿 먹인 거고 이번에는 내가 아주 완벽히 그 수작질에 놀아난 거였다고.
바로 방해인이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방전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점점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본 지 30분. 여전히 불이 꺼져 있는 방해인이 살았던 원룸 방을 확인하고 또 10분. 그가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것쯤은 진작 눈치챘다.
기다려 봤자 시간 낭비였다. 고작 방해인 때문에 며칠을 초조했던 것부터 이미 자존심이 상해 신경을 꺼 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방해인이 이미 떠나 버린 원룸 앞에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진짜 이래도 안 올 거냐고. 이제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버렸다. 백담호는 어떻게든 방해인을 만나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겨 버렸다.
정말로 방해인이 오지 않는다면 그간 행동은 정말 다 엿 먹이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을 것이고, 방해인이 온다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죽일까.
방해인은커녕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은 지 몇 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을 즈음이었다. 커다란 우산과 함께 누가 봐도 방해인인 사람이 나타났다. 우산에 살짝 가려진 얼굴은 조금 울상이 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 가득 들어가 있던 힘이 완전히 풀리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갈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방해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들었던 살벌한 생각과 감정보다는 웃기게도 조금 기뻤다.
‘차가 없네.’
발걸음도 떼지 않는 해인에게 무의식적으로 발을 뻗었다가 그대로 다시 집어넣었다. 방해인이 직접 제 앞까지 와 줬으면 좋겠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까.
고개를 살짝 까딱이니 해인은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제대로 자신을 마주하는 얼굴을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지가 꼬셔 놓고 갑자기 버린 매몰찬 새끼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가까이 다가서니 방해인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소매 끝으로 볼을 톡톡 두드린다. 진짜 차가 없을 줄을 몰랐던 건지 방해인은 계속 한숨을 쉬며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아, 적어도 한 대는 갈기려고 했는데 이미 그럴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너…. 아니, 무슨…. 하아….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했어야지….’
뒷말은 웅얼거려 빗소리에 가려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말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너 오라고 이러는 거잖아. 앞말은 일부러 속으로 삼키고 투정만 내뱉었다. 더 걱정하라고.
‘나 추워 뒤질 뻔했어.’
가까이 다가서 해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니 익숙한 향에 기분이 좋았다. 애교를 부리듯이 머리를 조금 부비니 방해인은 밀어내지 않았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울려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일부러 속삭였다.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비가 올 때라고 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할 수 있는 가장 달은 말이 아름답게 들리길 바랄 뿐이었다.
‘보고 싶었어.’
나는 지금 너에게 로맨틱하고 싶었다. 아마도 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네가 날 무시해도 좀 봐줄게. 하지만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백담호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여전히 방 안은 깜깜했지만 폰을 켜서 시간을 보니 벌써 아침 9시였다. 커튼을 조금 걷으니 환한 빛이 들어왔다. 옆에서 해인은 곤히 자고 있었다. 바지 허리끈이 풀려 벗겨졌는지 이불 밖으로 나온 다리 한 짝이 맨살이었다. 바지는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었다.
뽀얀 허벅지를 보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종아리를 쳐다보다 자신보다 얇은 발목에 저절로 담호의 시선이 향했다. 손을 뻗어 한 손으로 감싸니 중지와 엄지가 맞닿았다.
“흠-.”
발목에 감싸진 손이 마치 족쇄 같아 보였다. 그게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사람을 감금하는 취향은 없는데 방해인은 그러고 싶게 만들었다. 손에 잡힌 발목과 드러난 허벅지를 눈으로 훑다가 다른 손을 뻗던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담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언제 올라온 건지 두식이가 담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 해.”
결국 뻗던 손을 빼내고 침대를 내려오려고 하니 언제 온 건지 두식보다 훨씬 큰 고양이 한 마리가 경계 어린 눈으로 침대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철이었다. 해인이 들었더라면 또 비웃을 이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고양이 이름 지을 때 자신이 지었어야 하는 걸. 담호는 약간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담호는 그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얼마 안 가 2층에서 자동 사료 급식기에서 사료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자 두식과 두철이 재빠르게 침실 구석에 있는 계단을 타고 빠르고 올라갔다. 사라진 고양이 두 마리를 보던 백담호 어디선가 울리는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에 놓인 해인의 폰이 울리고 있었다.
백담호가 일어서 보니 화면에는 ‘강서준 씨’라고 띄어져 있었다.
“강서준?”
3년 전쯤인가 바뀐 방해인 비서였나. 말만 비서였지, 실상 뒤처리 담당이었다. 비서도 딱히 명확한 명칭이 없어 그렇게 부르는 거기도 했고. 비서라고 부르는 이유도 명확한 호칭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전화를 한 거지. 백담호는 폰으로 손을 뻗다가 뒤를 한번 돌아봤다. 해인은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
[해인 씨, 어디에요! 왜 이렇게-.]
“여보세요.”
다급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잠시간 조용함이 흘렀다.
‘해인 씨.’ 퍽 친밀하게 느껴지는 호칭이었다. 백담호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방해인 씨 전화 아닌가요?]
“아니요, 맞습니다.”
[누구신데 해인 씨 전화를 받으십니까?]
낯선 목소리 탓인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처음에 비해 날이 서 있었다. 백담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백담호입니다.”
[네?]
예전에 두어 번 마주친 적도 있으니 알아들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의문문이었다. 백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해 주려는 찰나였다.
[백담호 씨라고요?]
“네.”
‘아, 해인 씨 결국….’이라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뭔 반응인가 백담호는 알 수가 없었다.
[하…. 혹시 해인 씨, 아니, 도련님 많이 다치셨나요?]
백담호의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왜 이상한 질문을 하나 머리를 굴리던 담호는 금방 깨닫고 말았다.
“…안 팼습니다. 해인이 멀쩡히 자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해인과 자신이 얼마나 사이가 더러웠었는지 다시 깨달았다.
[네? 그럼 왜 해인 씨가 백담호 씨 옆에서 자고 있어요?]
멀쩡하다면 멀쩡하다는 거지 왜 이렇게 물어보나 슬슬 백담호는 신경이 거슬렸다. 겨우 뒤처리 담당치고는 관심이 과했다. 계속 해인 씨, 해인 씨 하는 것도 거슬린다. 전에 봤을 때는 깍듯이 도련님하고 불렀던 것 같은데. 대체 방해인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이렇게나 꼬이는 거야.
“그것까진 알 필요 없고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아니, 잠시만요! 해인 씨 바꿔 주세요.]
“잔다니까요.”
[그러니까 왜 해인 씨가 백담호 씨 근처에서 잡니까? 기절한 것도 아닌데.]
“하, 사람을 대체 뭘로 보고. 해인이 바지까지-.”
짜증 서리게 말을 뱉던 백담호는 멈칫거렸다. 아니다, 이것까진 말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백담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바지가 뭐라고요?]
“됐고, 방해인 제 침대에서 잘 자고 있으니까 끊겠습니다.”
[아니, 해인 씨가 왜 백담호 씨 침-.]
“알아서 잘 생각해 보세요.”
전화를 끊어 버린 백담호는 그대로 전원을 끄려 버튼을 꽉 누르고는 해인의 손가락을 지문 인식에 대었다. 곧이어 전원이 꺼져 버렸고 백담호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좆같네.”
한 손으로는 마른세수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해인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었다. 자기 얼굴은 거칠게 문대는 것과 해인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백담호는 그대로 다시 옆에 누워 버렸다.
“서해빛만 문제가 아니네.”
백담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둥글게 튀어 나와 있는 코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니 작은 소리와 함께 해인이 백담호의 손을 밀쳐내 버렸다. 손을 쳐버린 것도 모자라 몸까지 옆으로 돌려 누워 버리는 행동에 백담호는 얼얼한 제 손등을 보다가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자면서도 밀어내네. 해인의 뒤태를 보다 백담호는 그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약한 버둥거림이 느껴졌지만 이내 금방 잠잠해진 채 얌전해졌다.
띵-.
백담호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가 해인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지만 해인은 눈을 뜨지 않았다.
* * *
해인은 뽀송해진 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며 백담호를 쳐다봤다. 좋은 향이 나는 반팔 티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해인이 물었다.
“내 후드 집업은?”
“아직 안 말랐어. 그러니까 다음에 가지러 와.”
바지도 이렇게 잘 말랐는데 후드 집업이 안 말랐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백담호가 당당하게 대답하니 해인은 할 말이 없어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그냥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거짓말 치지 말고 당장 주라고 해야 할지 아님 못 이기는 척 알겠다고 해야 할지 해인은 정하지 못했다.
밤사이에 호감도는 언제 오른 건지 그새 ‘34’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호감도가 30을 넘어섰을 때부터 해인은 거의 반 체념 상태였다. 자신이 그렇게 무시해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직진해 오는 백담호를 해인은 막을 수가 없었다. 피하려다가 오히려 호감도만 더 올려 버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강서준을 공략하면 소원권이 또 생기진 않을까 생각했다가 바로 지워 버렸다. 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었다.
애초에 서준 씨 호감도 보상에 소원권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알겠지, 꼭 가지러 와.”
백담호는 자연스럽게 해인의 뺨을 문질렀다. 해인은 더 이상 그의 접촉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피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지럽게 쓰다듬어지는 해인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집에 데려다줄게.”
“응.”
“내일은 데리러 갈게?”
해인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백담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호감도만 아니었으면 해인은 자신이 게임에 참가했다는 사실도, 심지어 자신이 방해인의 몸에 빙의했다는 것도 잊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게 더 나았을지도.
“가자.”
“으응.”
담호를 뒤따라가던 해인이 괜히 폰 화면을 터치했지만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왜 폰이 꺼져 있지? 의문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백담호는 그 작은 소리를 들은 건지 바로 대꾸했다.
“방전이라도 되었나 보지.”
“그런가? 이상하네.”
어제 나올 때 풀충이었는데. 백담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언제 온 건지 두식이가 해인과 담호의 근처를 맴돌았다. 해인은 얼쩡거리는 두식을 보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두식이 안녕.”
* * *
“이제 가도 된다니까.”
“응. 갈게.”
백담호는 결국 해인의 오피스텔도 모자라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떠날 기미를 보였다. 해인은 담호의 눈치를 보며 비밀번호를 쳤고 그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다행히 비밀번호까지 볼 생각은 없나 보다.
이제 마지막 번호만 치면 되는 순간, 문이 먼저 열렸다.
“해인 씨!”
나온 사람은 당연하게도 서준이었다. 동그래진 눈으로 해인은 서준을 쳐다봤고 서준 역시 해인을 보다가 옆에 서있던 백담호에게로 시선이 저절로 옮겨 갔다. 백담호만이 여유롭게 미소를 짓다 서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꾸벅했다.
“그럼 가 볼게. 내일?”
‘데리러 온다.’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해인과 서준은 멀어지는 백담호를 멍하니 쳐다봤다.
“…해인 씨, 저 묻고 싶은 게 참 많은데 이야기 좀 할까요?”
“…아니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단 들어와요.”
“…네.”
* * *
대체 왜 백담호와 자신이 함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서준을 해인은 설득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해인은 백담호와의 관계를 서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애써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해야 했고 서준은 둘의 관계를 계속 추궁했으니까.
‘그러니까 왜 해인 씨가 백담호 씨 침대에서 자요…?’
‘어, 그게…. 놀다가 깜빡 잠이-.’
‘둘이 침대에서… 놀았다고요?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서준에 질문에 해인은 곤란한 표정을 짓다 또 이것저것 아무 말로 얼버무리기를 몇 번, 결국 먼저 항복한 사람은 서준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서준은 몸 괜찮으면 다행이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에 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이것마저도 거짓말이었다. 옷 아래로 감쳐진 곳들이 아직 좀 얼얼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서준과의 가시밭길 걷는 것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서준은 기어코 밥까지 먹이고는 자신을 놓아줬다. 전혀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먹으니 한 그릇을 다 비워 버리고 말았다. 부른 배를 문지르며 해인은 침대 헤드에 걸터앉아 시스템창을 열었다.
[공략 인물 목록]
강서준 호감도 29
백담호 호감도 34
-빈 슬롯-
미묘한 눈으로 백담호의 호감도를 빤히 쳐다보던 해인은 더 이상 울상을 짓지 않았다. 그저 온갖 감정이 뒤섞인 그런 시선이었다.
‘내가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거, 너도 알잖아.’
그러게, 이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보기 싫어도 보이는데. 해인은 그대로 공략 인물 창을 닫아 버리고 필수 퀘스트를 확인했다.
[필수 퀘스트]
-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 앉기(46hr/50hr)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게 아니라 그런지 겨우 2시간밖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이 퀘스트는 빠르게 완료될 것이라는 걸 해인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마지막으로 인벤토리에 들어가니 낯선 것들이 꽤나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것들도 몇 개 있긴 했지만 대부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소원권처럼 반짝거리는 게 유달리 눈에 들어왔다. 다만 소원권은 금색이었다면 이건 은색 테두리를 두르고 있고 그 안에는 회중시계 아이콘이 둥둥 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회귀’ 어쩌고 아이템을 받았던 것이 이제야 흐리게 떠올랐다.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다 대니 ‘회귀 타이머’라는 문구가 작게 떠올랐다. 순식간에 자신을 내쫓았던 방해인의 부모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꾸게 했던 소원권처럼 회귀 타이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만약, 회귀 시점이 언제든 상관없다면 자신이 방해인으로 빙의하기 이전으로도 돌아갈 수 있는 걸까?
해인이 허공에 떠 있는 ‘회귀 타이머’를 터치했다.
[회귀 타이머]
살면서 예기치 못한 일들에 당황해 실수를 할 때가 많지 않나요? 그런 실수들이 매일 밤마다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아 괴롭지 않았나요?
그런 실수를 지워 버리기 위한 획기적인 아이템! 바로 5분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회귀 아이템! 실수를 해 버렸다면 재빠르게 “5분 전으로 뿅 간다, 뿅!”을 외쳐 주세요!
네? 외치기 쪽팔리다고요? 어차피 5분 전으로 돌아가면 당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설마 평소에도 저 문구를 자주 사용하시나요? 그럼 “회귀 타이머”를 가지고 있으실 때에는 주의해 주세요! 사용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니, 정말 필요한 순간에 사용해 주세요!
(주의, 본 아이템은 플레이어가 속한 세계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주의, 아이템 사용 시 취소는 불가능하니 신중하게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설명을 다 읽은 순간 긴장되어 있던 몸에 맥이 주욱 풀렸다. 이름은 무슨 회귀라고 거창하게 지어 놓고는 겨우 5분 전이라니. 그럴 거면 애초에 5분 전 타이머라고 써 놓든가. 게다가 ‘5분 전으로 뿅 간다, 뿅!’이 뭐야. 아무리 다른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들 자신은 기억하는 거 아닌가.
불과 몇 초 전까지 회귀를 2년, 5년 전으로 해 버리면 원래 자신이 살고 자랐던 곳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빙의하기 전 알지 못하는 방해인의 과거로 가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던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원권보다는 쓸모가 덜해서 테두리가 은색이었던 건가. 모든 걸 이루게 해 준다는 소원권은 금색이었으니 나름 아이템 별 레벨이 나누어져 있었나 보다.
자신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고, 숨쉬고, 감정을 느끼며 모든 것이 생생하지만 여기는….
해인은 허공에 떠 있는 창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플레이어가 속한 세계…. 해인은 지금 소설에 속해 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제게만 보이는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이상한 아이템의 영향을 받고 책 속의 인물들이 존재하고 이제는 게임까지 참여시키는, 이 세계는 아직도 알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이 세계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전생의 기억들도 흐릿해져 갔다. 방해인으로 살기 시작한 첫날부터 원래 제 이름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떠오르던 단편적인 기억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몇몇 기억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지워진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차라리 모르기 때문에 방해인이 되어 이 세계에서 사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으음.”
해인은 작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왜인지 회귀 타이머의 설명을 읽고 나니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회귀 타이머가 겨우 5분 전으로 밖에 못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허탈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해인은 멍하니 밝은 벽지를 쳐다보다 반쯤 눈이 감기던 찰나였다. 아까 켜서 침대 위에 던지듯 놔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반쯤 감겼던 눈은 다시 스르르 떠지고 해인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해인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사람의 연락이었다. 잠금을 풀고 들어간 채팅방에는 사진이 하나 와 있었다.
2021년 10월 3일 일요일
[백담호:(회색 후드 집업이 뽀송하게 말려져 옷걸이에 걸려 있는 사진)] 오전 11:48
[백담호: 옷 이제 다 말랐네. 빨리 가지러 와야겠다.] 오전 11:49
[방해인: 그럼 내일 네가 가지고 오면 되겠다.] 오전 11:51
보내자마자 1이 사라졌고 곧바로 온 짧은 대답에 해인은 고민하던 것도 잠시 잊고 픽 웃고 말았다.
[백담호: 다시 만져 보니까 덜 마른 것 같네.] 오전 11:51
* * *
로비를 나오니 검은 세단이 서 있었다. 선팅 처리가 짙게 된 창문이 느리게 내려갔고 그 안에는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는 백담호가 있었다. 해인을 보고 있던 시선은 자연스레 옆에 서 있는 서준에게로 옮겨갔다. 나른하게 올라가 있던 입매가 굳었지만 그 움직임이 워낙 미세했던 터라 해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진짜네요.”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백담호에 서준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차가 없어졌다는 서준의 말에 해인은 어쩌다 보니 학교에 두고 왔다고 했다. 그러자 서준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살짝 찡긋거렸다.
‘학교요? 주말인데?’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해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쩌다 보니.”라고 무마했다. 명쾌한 대답이 아니라 서준은 여전히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도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럼 오늘은 자신의 차로 가자는 말이 나왔고 해인은 다급하게 ‘백’까지 뱉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서준이 어제 백담호를 경계하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괜히 또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버스 타고 가면 된다고 했지만 서준은 굳이 왜 버스를 타고 가냐며 자신의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평소라면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을 해인이기에 거절하면 할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져 해인은 결국 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었다. 백담호가 자신을 데리러 온다고 말이다.
해인이 슬쩍 서준을 쳐다보니 그는 눈앞에 백담호가 있는데도 영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인은 조심스럽게 서준의 옷자락을 잡고는 툭툭 당겼다.
“그럼 저 가 볼게요? 집 갈 때는 학교에 세워 둔 차 타고 갈 거니까 안 오셔도 돼요.”
“그래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해인에게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서준은 미소를 그렸지만 여전히 묘한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이따 봐요.”
해인은 손을 흔든 서준에게서 멀어져 검은 세단을 향해 걸어갔다. 앞으로 돌아가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니 “안녕.”이라는 인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목소리가 나긋한 게 꽤나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안전띠를 매며 옆을 슬쩍 보니 백담호는 의외로 창 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철컥-. 소리가 울리니 곧바로 그의 고개가 해인을 향했다. 가볍게 호선을 그린 까만 눈과 마주치니 해인은 고개를 획 앞으로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안녕.”
이게 과연 들릴까 싶을 정도로 작게 말했는데도 1초도 지나지 않아서 대답이 돌아왔다.
“응, 해인아. 아침부터 보니 좋네.”
원래 백담호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던가. 분명 로비를 나올 때만 해도 조금 쌀쌀했는데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해인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백담호는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귀 끝이 짙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해인아.”
“응.”
해인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강서준 씨하고 꽤 친한가 봐. 마중까지 나오는 걸 보면.”
친한가? 백담호와 이런 관계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강서준 씨가 그나마 편한 사이라고 볼 수 있겠지. 빙의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일 오래 옆에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상대적으로 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보통 ‘그렇구나’ 혹은 ‘그래.’ 같이 대답이 바로 돌아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아 해인이 옆을 쳐다봤다.
백담호는 입을 다문 채 핸들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는 처음에 비해 수그러들었지만 딱히 불만스러운 표정은 아닌 듯 보였다. 해인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멀리서 캠퍼스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 “방해인 생각보다 인기가 많네.”라고 백담호가 중얼거렸다.
해인은 그 말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부분에서 인기가 많다고 느낀 건지도 모르겠고 다소 민망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기는 자기가 더 많을 것같이 생겨서는. 백담호가 조금만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대했더라면 아마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꼬였을 게 분명했다.
백담호 곁에 늘 사람이 바글바글한 상상을 하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 * *
이제는 창문을 열면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해가 반짝이고 유달리 하늘이 푸르러 단풍이 지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더욱 독보였다.
앞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교수의 목소리는 계곡물 흐르듯이 해인의 귀를 통과했다. 불어오는 바람 덕에 선선함과 동시에 햇빛이 따사로워 해인의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팔이 앞으로 밀려나며 몸이 수그러지려는 찰나, 허벅지 위로 무언가가 쑤욱 올라왔다. 느닷없는 감각에 서서히 감기던 눈이 번쩍 떠지고 말았다. 놀란 눈으로 해인이 고개를 옆으로 획 돌리니 백담호는 여상하게 칠판을 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해인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
사람 가득한 강의실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해인이 황급히 그의 손을 빼내려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렸다. 정신이 나간 건지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목을 잡아 뒤로 당겼다. 다행히도 쉽게 당겨지던 손이 허벅지에서 완전히 떨어졌고 해인이 백담호의 허벅지 위에 그의 손을 올려 두고 떠나려는 때에 손이 잡히고 말았다.
흠칫, 꽉 잡힌 손에 해인이 어깨를 떨며 “뭐 하는 거야.”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손이 떨어지기는커녕 손가락이 사이사이 얽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인들이 손을 잡듯 어느새 손은 깍지가 껴지고 말았다. 빼내려 할수록 강하게 조여 오는 악력에 맞닿은 손에는 빈틈이 없었다. 잠이 정말 완전히 확 달아나 버렸다. 해인은 빼내려는 걸 포기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띵-.
[호감도 알림]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5로 올랐습니다.
떠오른 알림창을 해인은 바로 닫아 버렸다. 알림창은 굳이 터치 하지 않고 생각만으로도 닫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은 마음이 복잡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백담호의 호감도가 올랐다는 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정말, 그런 이상한 기분이었다.
백담호를 무시하기 시작한 날, 다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다. 오히려 사이가 나빠지면 나빠졌지, 강의실에서 이러고 수업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해인이 여전히 꽉 맞잡고 있는 자신의 손과 백담호의 손을 내려다봤다. 얽힌 손가락은 슬슬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멍하니 아래를 보던 해인의 책상 앞으로 노트가 쓰윽 밀려왔다. 깨끗한 줄 노트의 한구석에 작게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학교 끝나고 일 없지?]
다 읽고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자 백담호는 어느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니 백담호가 갑자기 손을 놓고는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학교 끝나고 중도?]
처음 적은 글씨보다 훨씬 정갈한 글씨체였다. 해인은 떨어진 제 손을 괜히 접었다 펴며 펜을 집어 들었다.
[공부하게?]
[응 다음 주부터 시험이잖아. 해인이 머리도 멍청해졌는데 공부해야지. 알려 줄게.]
[혼자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너 못 가르치잖아….]
[지랄 마. 밥 사 줄게. 나 족보도 있어, 같이해.]
[…응.]
무시하고 도망 다닌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백담호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해인이 고개까지 끄덕이고 나서야 백담호는 살벌했던 눈빛을 풀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결국 일찍 집에 돌아가려던 해인의 계획은 전부 무산되고 말았다. 밥까지 사 준다는 건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겠지.
백담호와 계속 노닥거리는 사이 수업이 곧 끝나 가는지 몇몇 학생들이 벌써 짐을 슬금슬금 싸고 있었다. 해인도 챙길 건 없지만 괜히 볼펜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책을 덮던 중이었다.
띠링-.
[필수 퀘스트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와 바로 옆자리에 50시간 앉기를 성공하셨습니다. 방해인 플레이어님 축하합니다! 업적 보상은 방해인의 “기억”입니다. 다음 목록에서 시기를 골라 주세요. 골라 주신 시기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단, 지정된 시기의 모든 날이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1) 0~13세
2) 14~18세
3) 19~ 21세
(알림, 실수로 창을 닫으신 경우 퀘스트란으로 들어가 주시면 됩니다.)
기억? 드디어 필수 퀘스트를 깼다는 기쁨보다는 그동안의 보상과는 전혀 다른 보상에 대한 의문이 먼저 들었다. 빙의를 했음에도 기존 방해인의 기억이 없다 싶었더니 다 이러려고 그랬던 건가 싶었다.
이왕 줄 거면 그냥 다 주지 뭘 또 고르라는 건지. 해인은 눈앞에 떠 있는 목록을 눈으로 살폈다. 0~13세, 방해인의 유년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면 백담호하고 방해인은 초등학생 때부터 알았다고 했지. 해인은 곁눈질로 백담호를 흘겼다.
입을 다물고 무표정으로 있는 백담호는 선이 굵었다. 해인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는 늘 인상을 쓰고 있어 더욱 매섭게만 느껴지기만 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에 대한 인상은 변해 갔다. 관계가 변해 가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직도 백담호가 나긋하게 웃을 때는 새삼 낯선 기분이 들고는 했다.
백담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면 유독 눈과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보기보다 속눈썹은 더 길어 하늘거렸고 말려 올라간 입매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끝을 맺었다.
무표정일 땐 잘생겼는데 웃으면 잘생기고 예쁘기까지 했다. 세상 혼자 사는 얼굴이 바로 이런 얼굴인가 싶었다. 다 큰 지금도 이런데 어릴 때는 엄청 귀여웠겠지?
문득 해인은 백담호의 어릴 때가 궁금해졌다. 그때도 말하는 데에 거침없었을려나. 앳된 얼굴로 ‘좆같네.’라고 말하는 백담호를 생각하니 해인은 슬며시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백담호가 입모양으로 물어 왔다. 백담호 몰래 백담호를 생각하며 웃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해인은 재빠르게 아무렇지 않은 척 도리질을 치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싱겁긴. 가자.”
백담호가 해인의 어깨를 두드렸고 해인이 그제야 앞을 보니 교수는 나가고 없었다. 알림창은 닫지 않은 채 해인은 담호와 함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알림창이 반투명해 해인은 앞을 보는 척 알림창을 계속 볼 수 있었다. 역시 19~21세가 좋으려나. 게임에 참여하기 전이었다면, 굳이 방해인의 기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으나, 현재로서는 궁금한 게 많았다. 자신이 모르는 백담호와의 관계도 궁금했고 책에서 본 방해인의 정보는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뭔 생각을 그렇게 해.”
특히 20~21세의 기억이면 공부에 관한 것도 상당수가 있을 테고 그럼 성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억을 가졌다고 해서 그걸 자신이 이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원래 시험은 암기가 반 이상을 차지했다.
“방해-!”
“윽!”
반투명하다고는 하나 해인의 정신이 전부 알림창에 쏠리는 바람에 그만 앞에서 오던 사람과 충돌하고 말았다. 담호가 급하게 해인을 옆으로 당겼지만 그건 이미 부딪히고 나서였다.
“아, 죄송해-.”
조금 세게 부딪힌 건지 얼얼한 어깨를 쓱쓱 문지르며 해인이 앞을 보니 있는 상대는 놀랍게도 교양 같은 조원인 황정운이었다. 놀란 건 해인만이 아니었는지 황정운도 무의식적으로 밀려난 해인을 붙잡은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둘이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길 1초 해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향했다. 황정운의 발에는… 깁스가 있었다. 어쩐지 그걸 보는 순간 해인은 안도감과 함께 약간의 미안함이 느껴졌다. 사진까지 보냈었으니 다친 건 맞았겠지만 사실 반쯤은 살짝 다친 걸 핑계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 오랜만이다. 내 몫까지 네가 다했다며. 고맙다, 야. 나중에 내가 밥 살게. 아 그리고 백담호 너한테도 미안하다. 진짜.”
해인은 고개를 들어 황정운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그는 전에 비해 꽤 뻣뻣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지도 않고 해인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보자 정운은 입이 마르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정운의 옆에 있던 그의 친구들도 덩달아 긴장되는지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아니, 진짜 미안…. 진짜로 발목이 완전 어긋났었어. 전에 사진도 내가 보냈지?”
“응, 많이 아팠겠다.”
해인이 자신의 말에 공감해 주자 곧바로 황정운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덥석 해인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잡힌 손에 해인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고 옆에 있던 백담호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진짜. 너 존나 착하다, 진짜. 우리 지금 닭갈비 먹으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아, 괜찮아.”
“하, 내가 진짜 다리만 안 다쳤어도 열심히-.”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해인의 손을 놓지 않고 떠들던 황정운의 손이 거칠게 내쳐졌다. 그의 손을 쳐 낸 사람은 다름 아닌 백담호였다.
“좆같은 소리하네.”
“…뭐?”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모든 이목이 복도에 서 있는 백담호와 해인, 그리고 황정운 무리에 쏠렸다. 황정운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백담호를 쳐다봤다.
“자료 정리랑 피피티 만드는 건 발로 하나 봐. 아작 난 건 발인데 왜 노트북 두드리는 걸 못 하지…. 이상하네.”
비꼬는 게 역력한 말과 달리 백담호의 목소리는 나긋했다. 그래서 더 얄밉게 들리는 이상한 조화에 해인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니 백담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존나 병원에 입원했-.”
“병원에 게임기는 쳐가져-.”
“우리 급하게 가던 곳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살벌해진 분위기에 해인이 다급하게 백담호를 앞으로 밀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획 뒤로 돌려 다시 되돌아가려는 백담호의 등을 해인이 퍽 내리쳤다. 등을 맞은 백담호가 굳은 얼굴로 해인을 내려다보다 결국 한숨을 쉬고는 순순히 앞을 봤다.
“너는 거기서 응, 많이 아팠겠다가 뭐야, 호구야?”
해인에게 순순히 밀리기는 했지만 입은 다물 생각이 없나 보다.
“앞으로 종강할 때까지는 계속 봐야 할 텐데 괜히 문제 생겨서 뭐 해. 게다가 진짜로 다치긴 했잖아.”
“야, 너도 단체방에 올린 사진 봤잖아. 시발 게임기는 가져가고 노트북은 왜 안 가지고 가. 그리고 무슨 병원에 몇 달 입원한 것도 아니고, 끽해야 며칠 가지고. 저 새끼 그냥 이름 빼.”
“…같은 과야. 괜히 밉보일 필요 없어.”
이젠 밀지 않아도 알아서 걸어가는 백담호에 해인은 옆으로 섰다. 급한 마음에 알림창은 이미 닫은 상태였다. 자신의 말에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해인은 백담호가 이해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옆에서 계속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돌아보니 백담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래?”
“네가 언제부터 저런 새끼들 눈치를 봤는데.”
“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백담호의 말에 해인은 머리가 텅 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지. 방해인이나 백담호나 누구의 눈치를 보며 사는 성격은 아니었다. 집안도 그렇고 모든 방면에서 상대적으로 뛰어났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성격이 지랄 맞은 건 백담호도 마찬가지였지만, 예전의 방해인도 못지않았다. 이렇게 보니 방해인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새삼 또 느껴졌다. 백담호는 분명 이전과 달라진 제 성격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호감도가 이렇게 올라갈 수 있다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번엔 백담호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거리니 해인은 담담하게 “아니야.”라고 대꾸하며 앞을 쳐다봤다.
건물을 나서니 강의실에서 볼 때보다 더 쨍쨍해진 햇살에 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고 어차피 이따 저녁도 밖에서 먹을 테니 피시방이나 갈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한 시간 뒤면 실험이 있었다. 차라리 카페를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는 김에 보상 선택도 하고.
“이따 봐. 점심 맛있게 먹고.”
백담호는 점심때가 되면 늘 사라지고는 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해인은 따로 먹을 줄 알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웬 걸 예상했던 “그래, 이따 봐.”라는 대답과는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다.
“뭘 이따 봐, 야.”
“응?”
“너랑 먹을 건데.”
해인이 눈을 크게 깜빡이며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나랑?”
“응, 너.”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도 해인이 멀뚱멀뚱 서 있자 백담호는 되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따로 먹으려고 했어?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해인의 어깨가 감싸졌고 얼떨떨하게 해인은 백담호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 근데, 진짜 배 안 고픈데.
* * *
아, 배불러.
해인은 강의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만족스럽게 제 배를 살짝 두드렸다. 배가 터질 거 같은데 아직도 해인의 눈앞엔 치즈가 잔뜩 올라갔던 계란찜이 아른거렸다.
둘은 학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백담호는 입맛도 까탈스러워,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만 갈 줄 알았는데 그런 곳을 안다니 의외였다.
그게 바로 엄마의 손맛이라는 걸까. 멍하니 거대한 계란찜과 백담호의 의외의 모습에 생각하던 중 해인은 자신이 잊고 있던 중요한 걸 떠올렸다. 바로 아직도 보상 받을 기억 시기를 고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계속 백담호와 있느라 까먹고 있었던 해인은 이제야 다시 퀘스트란에 들어가 창을 열었다.
다행히도 실험 강의는 조교가 임의로 지정한 조별로 앉아야 하기 때문에 담호와는 떨어져 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해인은 티 나지 않게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백담호와 있으면서도 틈틈이 고민을 했기에 움직임은 조심스러웠지만 막힘없이 ‘3) 19~21세’로 향했다.
최근의 기억이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지정된 시기의 모든 날이 기억되지는 않는다는 걸 보아 랜덤으로 떠오르거나 특별했던 일들만 떠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사람이 모든 날들을 기억할 수 없듯, 실제 사람의 기억과 같은 시스템이라면 제일 가까운 과거가 좋을 것 같았다.
해인의 손가락이 ‘3) 19~21세’를 터치했다.
[방해인의 19~21세 기억을 선택하셨습니다. 맞으십니까?]
[ 예 아니오 ]
예를 누름과 동시에 알림창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1초 뒤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기억이 돌아오는 중입니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 주시길 바랍니다…… (11%)]
기억이 돌아오는…? 해인은 점점 변하는 숫자를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쳐다봤다. 순식간에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기억이 돌아오는 중입니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 주시길 바랍니다…… (67%)]
……(74%)
……(96%)
……(100%)
띠링-.
[알림]
기억이 성공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알림이 떠오름과 동시에 흐리멍덩했던 갈색 눈에 반짝 초점이 돌아왔다.
“응?”
블랙홀에 정신이 빨려 들어갔다가 뱉어지듯 튕겨 나온 것 같았다. 정말 무언가 연결이 끊기듯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번쩍하고 돌아왔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감각에 해인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눈을 찌푸리며 깜빡였다. 머릿속에 물이 찬 거 같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무수한 기억들이 어지럽게 떠오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뭐지, 사기인가? 해인은 괜히 답답하게 느껴지는 머리를 손으로 퍽퍽 치고 흔들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 온 건지 칠판 앞에 서 있던 조교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조교는 이상한 눈빛으로 해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그 탓에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조교의 행동에 당황한 해인이 눈을 스르륵 피하자 그제야 조교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찍어 준 실험 이것들이랑 오늘 할 거 포함해서 랜덤으로 시험 볼 거야. 조별로 볼 거고 날은 다다음주 오늘 이 시간.”
칠판에는 실험 제목으로 추정되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해인은 그것들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에게 실험 강의란, 졸업 이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과목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멍청하게 눈치를 보며 뭐라도 하는 척하며 보냈다.
실험은 어떻게 한다고 쳐도 아는 게 없으니 결과 보고서는 늘 엉망이었고, 당연하게 그 실험으로 보는 시험도 망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겨우 실험 도구가 뭔지 익힌 것만으로도 다행인 수준이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마커를 쥔 손이 어느새 두 번째 적힌 실험 제목을 가리켰다.
‘선형 열전도율 실험’
해인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대충 저 명칭은 기억이 났다. 아마 해인이 또 헤매고 눈치 보며 했던 실험 중에 하나겠지. 그러나 단순히 헤맸던 실험이라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 순간 조교가 “이거 실험 방법 외워.”라고 말함과 동시에 해인의 머릿속을 빠르게 무언가가 훑고 지나갔다.
1. 시험편을 장치의 a(4mm두께), b(2mm두께)에 각각 설치하고 유량계를 동하여 냉각수를 일정량 아래로 흘려보낸다.
2. 온도 조절계로 일정 온도를 올려 주고 냉각수량을 조절
3. 판넬의 온도 지시계의 온도를 순서대로 읽고 정상 상태의 값을 시험 결과로 기록
4. 시험 4번 반복.
미친. 해인은 육성으로 나올 뻔한 말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지금 제 머릿속에서 맴도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실험 순서가 칠판에 써져 있는 실험의 순서라는 걸 직감이 알려 주고 있었다.
해인이 다급하게 실험 교재를 펼치고 확인하려는 순간 짧은 기억도 떠올랐다. 책상에 프린트한 듯한 종이가 보였고 그걸 이 기억의 주인은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종이에 써진 글씨가 흐릿흐릿해 자세히 보려 힘을 주니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선형 열전도율 실험’
이건, 방해인의 기억이었다. 정확히는 21살의 방해인의 기억. 해인은 펼치던 교재를 다시 힘없이 덮었다. 아•••. 예전의 방해인은 2학년 때도 3학년 과정을 공부했구나.
해인은 정말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조교가 하는 말을 전부 경청했다. 전에는 한귀로 들어오고 한귀로 흐르던 게 오늘은 조교가 무슨 말을 하는지 70%나 이해할 수 있었다.
* * *
“아까 무슨 문제 있었어?”
실험실을 나오던 중 백담호가 물어 왔다.
“응? 뭐가?”
“아까 앞에서 혼자 머리를 막 흔들고 부산스럽길래.”
“어…?”
해인은 칠판과 가까운 앞쪽이었고 백담호는 그보다 한참 뒤쪽 자리였다. 그런데 그런 백담호가 신경 쓰일 정도였다는 건 대체 자신은 어떻게 머리를 흔들고 친 것일까. 어쩐지 실험 내내 조원들이 평소보다 자신의 눈치를 보더라니. 단순히 오늘 버벅거리지 않고 묻지 않고 실험에 참여하는 자신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다 너 쳐다보더라.”
해인의 목뒤가 빨갛게 달아올라 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조교도 이상하게 보더라니. 수치스러움에 절로 해인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리고 고개를 푹 숙이자 백담호는 즐겁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해인의 목을 주무르며 백담호가 해인의 귀에다가 속삭였다.
“괜찮아, 네가 이상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빨리 가기나 하자. 자리 없겠다.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수치심은 공동 사물함에서 교재를 꺼낼 즈음에는 사그라들었다. 다행히 중도에는 두 명 정도 같이 앉을 자리는 한두 곳 정도 남아 있었다. 나란히 앉아 먼저 교재를 꺼낸 것은 의외로 해인이었다.
저번처럼 또 온갖 SF, 판타지 소설을 가지고 왔을 거라는 예상과 전혀 달라 백담호는 의외라는 듯 해인을 쳐다봤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라고 공부를 할 생각이 있기는 한가 보다. 그러다가 방해인은 원래 공부를 꽤 하던 애였다는 걸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학고 맞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교재를 얌전히 내려다보고 있는 해인을 보던 백담호의 시선도 교재로 향했다. 그리고 백담호의 사고가 아주 짧게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거 저번 학기에 배운 거야. 해인아.”
아, 깨달음이 가득한 짧은 소리와 함께 해인의 시선이 담호에게로 향했다. 담호를 향한 채 깜빡이는 눈이 마치 순백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백하게.
“어딘지 몰라?”
묻는 어투에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해인은 어색하게 웃다가 황당함을 넘어서 경이에 찬 것 같은 시선에 입을 꾹 다물고 끄덕거렸다. 내용이 익숙하길래 폈더니 그게 저번 학기 범위였을 줄이야. 나직하게 들려오는 헛웃음 소리에 해인은 괜히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곧바로 정말 진짜 머리가 멍청해졌냐며 뭐라고 할 줄 알았던 백담호는 손을 들어 해인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순간적으로 쫄은 해인이 몸을 움찔거리자 안심하라는 듯 살포시 머리를 두드렸다.
“해인아.”
“으응.”
“솔직하게 말해 봐.”
“뭐를…?”
“너 방해인 아니지.”
해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백담호의 표정이 어쩐지 평소보다 심각하게 보이는 건 착각일지도 몰랐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해인은 바로 아니라고 발뺌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지금까지의 방해인과 다르게 행동했어도 다들 단지 성격이 변했다고 인식했지, 영혼이 바뀌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 백담호도 분명 그럴 테고 지금 이건 평소와 같은 농담일 게 분명했다.
애초에 누가 성격이 변했다고 빙의했다고 생각하겠어.
다급할 때만큼은 머리 회전이 빠른 해인이 싸하게 굳었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뭔 소리야. 그럼 내가 방해인 아니고 누구겠어.”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다. 해인은 당장 거울을 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제 표정이 지금 얼마나 어색할지, 얼마나 뻣뻣할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갈 수도 없는 노릇에 해인은 괜히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백담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해인은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제발! 해인은 거의 울듯이 속으로 외치고 외쳤다.
“너….”
드디어 백담호가 입을 열었지만 말끝이 흐려지며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시험 기간이라 사람이 북적거리는 1층인데도 썰렁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분위기가 이상해질 게 분명했다. 결국 해인은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획 돌려 다시금 백담호를 쳐다봤다.
“야, 네가 이상한 소리-.”
“숨겨진 쌍둥이 있어?”
말이 겹쳤지만 알아듣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해인은 눈썹을 찌푸리며 “뭐?”라고 무의식적으로 묻고 말았다. 그러자 백담호는 꽤 심각한 얼굴로 해인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라 정말 심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원래 방해인은 집에 감금당하고 지금은 숨겨진 쌍둥이가 대신하고 있다고 그런 말이 돌던데.”
대체 저런 말은 어디서 돌고 있는지, 해인은 난생처음 듣는 말에 긴장감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이번에야 말로 해인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역시 영혼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대체 쌍둥이설은…. 방해인이 무슨 유명인도-, 아.
해인은 순간 책에서 본 방해인의 불량한 행적이 떠오르며 다른 의미로 유명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해인에 백담호는 결국 맥없이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야. 뭘 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가 먼저 또 구라 치길래 나도 해 봤어. 진짜 숨겨진 쌍둥이라도 있어?”
구라…? 해인은 방금 자신이 무슨 구라를 쳤는지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해인 아닌 거 아니냐는 대답에 방해인이 맞다고 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니 이 상황을 빨리 넘기고 싶은 해인이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호는 해인의 정수리를 장난스레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뭐, 진짜로 있으면 재밌긴 했겠네.”
“재미는 무슨….”
한번 해인의 머리칼을 흩트린 손이 담백하게 떨어졌다. 백담호는 느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교재를 펼치고 있었다.
결국, 백담호가 말한 구라가 뭐였던 건지 해인은 모른 채로 주제는 넘어갔다. 백담호는 해인의 교재까지 펼쳐 주고는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풀어.”
정말 자기중심적인 백담호의 과외가 시작되었다. 해인은 지난날의 괴로웠던 그날을 떠올리며 백담호를 쳐다봤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이미 중도에 같이 온 시점부터 늦었다. 결국 체념을 한 해인은 교재로 시선을 내려야만 했다.
또 한 1분 가만히 있으면 금방 풀이를 적어 주겠거니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담호는 턱을 괴고 해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담호의 시선에 해인은 문제를 푸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괜히 펜을 쥐었다.
문제를 계속 노려보던 해인은 문득, 풀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해인은 볼펜을 들고 의식이 이끄는 대로 풀이를 쓰다가 공학용 계산기를 두드렸다. 손가락이 저절로 log로 향했을 때는 어쩐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확신에 찬 답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무언가 써 내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해인이 드디어 답을 적어 내렸다. 해인이 떨리는 눈으로 백담호를 올려다보니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쓴 답에 확신이 없는 지금 과연 그의 표정이 긍정을 뜻하는지 부정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고 백담호의 입이 열렸다.
“해인이….”
백담호는 잠시 뜸을 들이며 해인이 적은 풀이를 보다 해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빡대가리 컨셉은 어느 정도 벗어났나 보네.”
빡대가리 컨셉…. 컨셉은 아니었지만 벗어났다는 말에 해인은 학고 맞을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어느 정도라는 말이 붙은 걸 보면 완전히 정답은 아닌 거 같았지만 풀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뜬금없이 공대생이 된 지 반년이 조금 넘은 현재, 해인은 처음으로 4줄 이상의 풀이를 적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감격에 젖어 있기도 잠시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풀었어, 해인아. 그리고 여기 부호도 틀렸네.”
백담호는 해인의 풀이 옆에 자신의 풀이를 쓰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적힌 두 개의 풀이는 당연하게도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5줄이나 나온 해인의 풀이와 달리 백담호는 3줄 정도로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괜히 어렵게 풀었네. 넌 항상 그렇더라. 왜 굳이 이렇게 풀어? 복잡해 보인다고 잘 푼 게 아니야.”
복잡해 보인다고 잘 푼 게 아니야. 이 문장이 해인의 귀에 들어온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왜 점수가 깎인 건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풀어도 맞잖아요.’
‘맞긴 맞는데 내가 이렇게 푸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수업 때도 말한 거 같은데. 그리고 내가 뭐 완전히 틀렸다고 한 것도 아니고 겨우 2점 깎은 거 가지고…. 아, 거 자식 참….’
모근 쪽으로 갈수록 머리카락이 희게 변한 나이 든 남자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 고3 때 확률과 통계 선생이었다. 고지식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애들만 챙기기로 유명했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틀린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점수를 깎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확통 선생은 해인을 한번 째려봤다가 누구를 발견한 건지 갑자기 표정이 화악 밝아졌다.
‘어어, 백담호. 이리 좀 와 봐라.’
‘아니, 갑자기 백담호는 왜-.’
말을 다 뱉기도 전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무슨 일이세요?’
왈칵, 미간이 구겨졌다. 시선이 바들바들 옅게 떨리다 옆으로 획 돌아갔고 그곳에는 베이지색 조끼와 하얀 와이셔츠, 조금 풀린 넥타이 그리고 지금보다 머리가 조금 짧은 백담호가 서 있었다.
19살 기억이었다. 3학년 1학기의 중간고사 때였던 것 같다.
선생은 방해인의 답안지를 획 뺏어 가더니 백담호에게 보여 주기 시작했다. 방해인은 짜증이 확 솟구쳐 “시” 까지 나왔다가 겨우 입을 다물었다. 교무실이기도 했고 이 선생한테 성질을 부려 봤자 생기부에 안 좋은 말이 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담호야, 내가 이렇게 풀지 말라고 수업에서 했냐, 안 했냐?’
‘아, 네. 그러셨죠. 이렇게 풀어 봤자 복잡하기만 하다고 하셨죠.’
‘그래, 인마. 잘 기억하네.’
선생은 방해인에게 알아들었으면 이제 꺼지라는 듯 곁눈질 했다. 허무하게 답안지를 뺏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복잡하게 푼다고 잘 푼 게 아니긴 하죠.’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뱉은 백담호의 눈에는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따지러 갔다가 되레 기분만 잡친 방해인은 화가 났지만 알겠다, 하고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아, 근데 여기 부호가 틀렸네요. 그런데 답은 또 맞았네.’
‘어이구, 그러네. 괜히 따지러 왔다가 점수 더 깎이게 생겼네. 방해인이.’
방해인의 동공이 커진 채 백담호를 향했고 백담호는 웃고 있었다. 저, 저 개시.
“…발 새끼.”
“뭐?”
해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붕 뜬 기분도 잠시, 백담호의 굳은 얼굴에 해인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기억의 여파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백담호, 얄밉긴 했네.
“어,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시발 새끼야?”
이거야 말로 진정한 싸한 분위기였다. 설명을 멈춘 백담호는 빨리 대답을 요구하는 듯 해인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네가 왜 시발 새끼야. 시험공부도 도와주는데.”
“그럼?”
백담호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서둘러 생각해야 했다. 까만 눈동자가 더욱 싸늘해질수록 해인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구세주 외치듯 대답했다.
“아까, 아까 걔 생각하니까 화가 나서.”
“아까?”
해인은 다급하게 주위 눈치를 보다 백담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밀접해진 해인에 백담호는 티 나지 않게 몸을 움찔거리다 “황정운”이라고 작게 들리는 말소리에 굳었던 입매가 풀리고 말았다.
갑자기 욕먹은 황정운에게는 미안하긴 하지만…. 아니 사실 그렇게 미안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천천히 얼굴을 떨어트리니 백담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러나 전에 비해 살기가 많이 줄어든 것 같아 해인은 습관처럼 백담호의 호감도를 또 살피고 말았다. 눈치를 보느라 유달리 크게 떠진 눈이 도르르 굴러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이었다.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6으로 올랐습니다.
그와 동시에 백담호는 장난스레 웃음을 흘리고는 턱을 괴어 비스듬히 해인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그 좆같은 모자 안 쓰고 다니네.”
드디어 버렸어? 백담호의 손이 뻗어져 해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건드렸다. 눈썹을 조금 가리는 머리카락 탓에 손가락이 은근하게 눈꺼풀 위를 건드려 해인은 눈을 감고 몸을 움찔거렸다.
“안 쓰니까 마음에 드네. 앞으로 쓰고 다니지 마. 응?”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며 해인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백담호와 자신만 남은 것 같은 울렁이는 기분에 해인은 얼굴을 획 돌리고는 얼굴을 양손에 묻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손과 맞닿은 얼굴이 지나치게 열이 올라 있어 손이 뜨거운 건지 얼굴이 뜨거운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었다.
으음, 역시 좀 큰일이 난 것 같다. 지금 백담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띵-.
울리는 소리에 해인이 살짝 고개만 돌려 옆을 보니 그럼 그렇지, 호감도가 또 올라가 있었고 알림창이 떠 있었다.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7로 올랐습니다.
해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백담호를 쳐다봤고, 백담호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너….”
나 이제 그만 좋아해 봐, 제발.
뒷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 * *
늦은 저녁을 먹고 후드 집업을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묻던 백담호의 수작을 거절하고 해인은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백담호도 공부는 해야겠는지 해인을 전처럼 끈질기게 붙잡지 않았다.
해인은 또 탈탈탈 시속 50km로 운전을 해서 오피스텔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어섰다. 공부하느라 힘이 다 빠져 몸을 추욱 늘어트리고 들어서니 현관에 서준이 서있었다.
“어서 와요, 해인 씨. 좀 늦었네요.”
“서준 씨? 안 가셨네요!”
“네, 해인 씨 들어오는 거 보고 가려고 했죠.”
서준은 자연스럽게 해인의 백팩을 가져가다가 허리를 푹 접고 말았다. 덩달아 같이 놀란 해인이 제 가방을 같이 잡았다. 꽤 묵직한 가방에 서준은 당황한 건지 커다래진 눈으로 가방을 보다 다급히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제가 들게요. 근데 그것 보다 책이… 들어 있네요. 만화책이죠?”
만화책이라고 확신하는 서준에 해인은 겸연쩍게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안 했는지 새삼 느껴져 어쩐지 민망했다.
“아뇨, 교재예요. 곧 시험 기간이니까.”
“교재…….”
나직하게 서준이 중얼거렸고 곧바로 서준의 머리 위 숫자가 변했다.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강서준의 호감도 [30]을 달성했습니다.
보상, 강서준 호감도 알리미 1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이게 지금 왜 올라. 해인은 뜬금없이 오른 서준의 호감도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시험 기간에 교재를 가지고 집에 돌아온 게 그렇게 기쁜 일인가 싶기도 했고 왜 서준이 그걸 기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서준은 단순히 오피스텔 관리인이 아니라 방해인의 보모였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공부한다는 사실에 기뻐할 만큼 너무 막 살았던 것…. 맞긴 맞네. 학고의 충격은 해인의 부모뿐만 아니라 서준에게도 해당됐던 모양이다. 알아서 납득한 해인은 더욱 민망하게 웃었다.
“그럼 오늘 늦은 것도?”
“아, 네. 시험공부 좀 하다가. 그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실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할 걸 그랬네요.”
서준과 같이 있다간 계속 민망함이 느껴질 거 같아 해인은 슬쩍 제 가방을 다시 가져오려고 손을 뻗었다.
“이제 가 보셔도 돼요. 다음부터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제 가방 좀…. 서준은 해인에게 가방을 넘겨주는 대신 물었다.
“그럼 또 밤에 공부하시려고요?”
“어…. 아마도요?”
“그렇군요. 그럼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네?”
서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해인의 되물음은 무시하고 가방을 자신이 메고 해인의 허리를 슬쩍 계단 쪽으로 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이없는 눈으로 서준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기어코 방까지 자신을 배웅하고 나서야 가방을 건네 준 서준은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라는 말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강서준의 뒤태를 보는 순간, 또 낯선 장면이 떠올랐다.
‘강서준 씨, 간섭하지 마시고 자기 할일이나 하세요. 존나 짜증 나네, 진짜.’
날이 서 있는 목소리와 정장을 입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준이 보였다. 해인은 또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건 강서준이 방해인의 오피스텔을 관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네, 죄송합니다. 방해인 씨.’
‘아, 존나. 내가 이름, 성까지 붙여서 부르지 말랬죠.’
‘그럼 어떻게…?’
‘알아서 잘 불러요. 그것까지 제가 알려 줘야 해요?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요.’
‘…네, 도련님.’
서준은 그렇게 방해인의 침실을 나갔고 방해인은 여전히 성질이 가득 난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번뜩 떠오른 기억의 잔상이 사라지자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방해인, 이 싸가지 없는 놈….”
왜 서준이 처음에 그렇게 도련님, 도련님 하고 오버스러운 호칭을 사용하는지 깨달아 버려 해인은 민망해졌다. 빙의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서준이 무뚝뚝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을 줄은 몰랐다.
이런 줄도 모르고 그동안 자신은 서준에게 어떤 짓을 한 건가 싶어 해인은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서준은 하룻밤사이에 달라진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 미안했다.
근데 방해인은 성까지 붙여서 불리는 걸 정말 싫어했구나. 그러고 보면 백담호는 제게 호감도가 올라갈수록 이름만 불렀다.
‘해인아.’
다정하게 울리는 백담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 * *
어느덧 벌써 첫 번째 시험 날이 오고 말았다. 그동안 해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백담호, 그리고 강서준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 백담호가 시험 공부하자며 달라붙고, 집에 가면 강서준이 공부 힘내라고 퇴근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뜬금없이 떠오르는 방해인의 기억에 민망할 때도 많았고 원치 않게 기억의 감정과 동화되어 화가 날 때도 많았다.
방해인은 참,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교복 입은 백담호는 지금보다 귀엽다는 걸 깨달았다. 앳되고 앞머리카락이 지금보다 좀 짧아서 그런가. 기억은 주로 백담호나 강서준과 관련된 것들만 떠올랐다. 공략인물과 관련된 인상 깊은 일들이 떠오르는 건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렇게 기억의 회오리 속에서 버티길 며칠, 드디어 시험 날이 되었다.
해인은 살면서 가장 긴장을 했다. 전생에 수능을 봤을 때도 이렇게 긴장되지는 않았을 거다. 당연하다. 수시로 대학을 들어갔으니까.
“시험 시간은 총 2시간이고, 10시 40분부터 답안지 제출 후 퇴실 가능합니다. 혹시 공학용 계산기 안 가져온 사람 있어요? 없으면 시험지 돌리겠습니다. 시험지 받고 7쪽인지 모두 확인해 주세요.”
곧이어 시험지가 차례차례 넘겨지고 해인의 앞에 도착했다. 문제를 본 순간 튀어나올 뻔한 탄성을 해인은 가까스로 막았다. 시험 문제는 총 13문제이며 모두 서술형이라는 극악의 난이도였다. 전이라면 찍을 수도 없다며 울상을 지었을 해인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번 쭉 훑어본 결과, 반 정도는 바로 풀 수 있을 정도였다. 해인은 샤프를 들었고 쭉쭉 풀이를 써 내려갔다.
해인이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본 첫 시험. 그는 시험이 시작하고 1시간 30분 후에 강의실을 나왔다. 시험을 1시간 넘게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든 문제를 제대로 풀지는 못했지만 13문제 중 7문제에 풀이와 답다운 것들을 적었다는 뿌듯함은 생각보다 더 해인을 들뜨게 했다. 비록 방해인의 예전 기억이 없었더라면 거의 불가능했을 테지만.
강의실을 나와 복도를 걷던 해인은 멈칫, 뒤를 돌아봤다. 아직 백담호는 안에서 시험을 보고 있었다. 아마 2시간 꽉 채워서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은 가방에 넣었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11:38 AM이었다. 원래라면 오후에 있던 실험이 다음 주 시험 탓에 개별적 자습으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이대로 집에 가면 된다는 뜻이었다. 휴대폰을 보며 고민하는 사이 1분이 지나갔다. 백담호가 나오기까지 남은 예상 시간 28분, 거의 30분이었다.
해인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 가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계단 근처에 도착한 해인은 내려가는 대신 벽에 서 있는 자판기로 다가갔다.
탄산음료와 이온 음료를 각각 하나씩 뽑은 해인은 다시 시험을 봤던 강의실로 향했다.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백담호가 집어 줬던 문제 중 두 개 정도가 시험에 나와 양심에 걸렸다.
거리를 두겠다고 한 다짐이 우스울 만큼 쉽게 옅어져 간다. 백담호에게 잡힌 이후부터 해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애매한 마음이 되어 버렸다. 백담호와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건, 모두 그의 탓이라고 책임을 돌리기도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비까지 오는 날 무턱대고 찾아온 백담호를 차라리 무시했으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을까? 그러면 정리는 되었을지 몰라도 백담호는 우산도 없었고 옷도 얇게 입었으니 크게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두 사람 사이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인은 원룸 앞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백담호는 우산도 없었고 차도 멀리 있었고 옷도 얇았으니까 잘못하면 아팠을 수도 있었다. 아픈 백담호를 생각하니 해인은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 그 짧은 사이 또 백담호가 아픈 건 싫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드는 백담호의 걱정에 해인은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먼저 백담호를 꾀어낸 건 자신이었는데 이제는 점점 자신이 백담호에게 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지럽게 산발적으로 튀어 오르던 생각이 뒤늦게 차게 식어 가는 손바닥에 흐려졌다. 해인은 캔을 빤히 쳐다봤다. 자판기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음료수는 벌써 물기가 어려 있었다.
“너무 일찍 뽑았나.”
축축해진 손에 신경이 쏠리기도 잠시, 금세 또 머릿속에는 무수한 것들이 꽉꽉 자리를 채워 가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불안함 사이로 백담호와의 기억도 같이 자리를 차지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해인은 백담호가 부러웠다. 앞뒤 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게 자신과 전혀 달랐다. 물론 주관이 너무 뚜렷한 탓인지 말도 거침없었고 가끔은 강압적이라 휘둘릴 때도 있었다. 해인은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잔잔한 제 일상을 어지럽히는 게 싫었다. 하지만 백담호가 매달려 올 때면 속절없이 받아 주게 된다. 항상 직구로 말하고 행동하던 것과 다르게 슬픈 표정으로 안쓰럽게 굴어 오면 거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모습들이 보이기 때문일까.
요즘엔 가끔 호구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호구와 백담호, 절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조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백담호는 보기보다 다정했고 가끔은 귀엽기도 했다. 제 머릿속에 박혀 있는 백담호의 이미지는 그와 가까워질수록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쪽으로.
해인은 공략 인물창을 열었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백담호
나이: 22
키: 190cm
플레이어와의 관계(호감도: 37)
당신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 관계를 진전해 나가고 싶어 합니다.
‘호감’, 해인이 그다지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호의가 아닌 호감은 부담스러웠고, 제 인생에 없을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면 당연하게 정이 따라오고, 정을 주면 그만큼 실망할 일과 상처를 받을 일이 늘어난다. 이미 생겨 버린 호감만큼 없애기 힘든 건 없었다. 쉽게 돋아나는 주제에 뽑아내기는 힘드니, 실망이 따르지 않을 리가. 이걸 잘 알면서도 백담호의 호감도가 오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기대를 하고 마음이 기울었다.
갑작스럽게 해인의 머릿속에 시끄럽게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날카로운 외침이 웅웅 울렸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리던 소리가 뚝 끊기고,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와 어슴푸레한 하늘,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낡은 집 안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뇌리에 짙게 박혔다.
해인이, 아니 빙의 전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이었다. 모든 기억이 흐릿해져도 이 집만큼은, 그날의 집 풍경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끝까지 제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한테 버려졌던 날이었으니까. 엄마는 자신을 곧 부서질 것 같은 낡은 빌라에 남기고 홀로 떠나 버렸다.
마치 금방 겪은 일처럼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내어 주면 반드시 상처로 되돌아왔다. 계속 자신의 곁에 있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등을 돌렸다. 제대로 된 이유도 모른 채 곁에 있던 사람들 혹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자신을 떠나갔다.
다른 이와 함께 만들어진 행복한 기억은 혼자가 되면 힘을 완전히 잃고는 발목에 매달려 더욱 빠르게 절망으로 빠트렸다.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워 억지로 잊으려고 노력하니 자신을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지워졌지만 감정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글이 꽉 차 있던 노트를 지우개로 벅벅 지운 것 같았다. 다시 백지가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국은 남아 있었고 강하게 문지른 탓에 뜯어져 있는 곳도 있는 그런 노트의 한 페이지. 처음과 같은 상태로 절대 되돌아갈 수 없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들이 남긴 감정은 유독 비가 오는 날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몰아치곤 했다. 여전한 감정이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일정한 선을 긋게 만들었다. 애초에 혼자인 건 외롭긴 했지만 둘이었다가 혼자가 되는 건 괴로웠으니까.
그러나 속으로는 누군가 다가와 주며 호감을 표현해 주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쉽게 떨어지지 않을 그런 호감을.
강의실의 문이 열렸다. 문 옆에 바로 서 있던 해인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고 그곳에는 백담호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이 부드럽게 휘며 해인을 향해 걸어오자 심장이 빠르게 울리고 귓가에서는 이명이 울렸다. 백담호를 보자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던 마음에 서서히 다른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조금 따뜻하고 속이 간질거리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래,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자신은 백담호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박수가 방금 깨달은 제 호감 때문인지, 과거에서 물 밀려오듯 타고 온 두려움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두 감정 모두일지도 몰랐다. 그 탓에 구분이 가지 않는 거라고 해인은 생각했다. 호감은 두려움과 함께 찾아온다.
해인의 앞으로 다가온 백담호는 나직하게 ‘안 갔네.’라고 말을 건네 왔다. 해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한 손에 들려 있던 이온 음료를 그에게 건넸다. 제게 건네진 푸른 색 캔 음료를 잠시 보던 백담호는 바람 빠지듯이 웃으며 받아 들었다.
“고마워, 해인아.”
백담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해인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호감도가 오를 것 같다고.
띵-.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8’로 올랐습니다.
역시나.
“왜 그렇게 빤히 봐?”
해인은 계속 빤히 쳐다보던 백담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떨어트리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도리질을 쳤다. 까만 눈동자가 해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 금방 떨어졌다.
“시험은 어땠어.”
“네가 전에 집어 준 문제 나왔더라.”
“오, 기억하네.”
백담호의 손이 해인의 뒤통수를 기특하다는 듯 가볍게 두드렸다.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니 어느새 건물 밖이었다. 쨍한 햇빛에 해인은 눈을 찌푸렸다.
“이제 집 가게?”
“응, 아마도.”
걷던 걸음을 멈추고 백담호가 고개를 돌렸다. 해인은 그가 이제 어떻게 나올지 본능적으로 예측이 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서준 씨에게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던 참이었다.
“그럼 내일 봐.”
“응?”
지금 잘못 들은 건가?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잘못 들었다는 듯 백담호를 쳐다봤다. 백담호는 그런 해인을 여상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이 있어서. 내일 봐, 해인아.”
“어, 어…. 그래, 내일 봐.”
멀어져 가는 백담호를 해인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분명 같이 공부하자거나 아님 자신의 집에 가자거나 최소 집에 데려다준다고 할 줄 알았다.
어떤 형태든 좀 더 같이 있을 거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계속 붙어 다녀서 잊고 있었는데, 백담호가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다.
백담호는 해인과 달리 친구가 있었다. 혼자 설레발을 치고 앞서 나간 것 같아 머쓱해졌다. 해인은 괜히 씁쓸한 기분을 애써 갈무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시험 첫 주는 그전까지 붙어 다녔던 게 무색할 정도로 바쁘게 흘러갔다. 해인이 백담호에 대한 제 마음을 자각했어도 둘 사이가 크게 변하진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백담호는 과탑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고 해인도 해인 나름대로 시험에 의의를 두니 둘은 가끔 겹치는 시험에서 마주치면 간간히 대화만 할 뿐 별다른 일은 없이 일주일이 끝나 버렸다.
일정이 바쁘니 자연스레 연락도 뜸해졌다. 원래도 길게 하지 않았던 연락이 줄어들기까지 하니 그건 그거대로 신경이 쓰였다. 시험 기간이니까 자연스러운 현상임에도 해인은 조금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문득 먼저 연락할까 싶어 뒤집어 놓은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어 올렸다. 하지만 겨우 연락 좀 뜸하다고 벌써 서운해하는 제 모습이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시험공부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 하고 괜한 사족을 붙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백담호와 관련된 행동들에 혼자서 애써 납득할 만한 변명을 하며 괜찮은 척을 하곤 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머리가 복잡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담호를 보지 못하는 수요일, 교재가 눈에 안 들어와 멍하니 천장을 보던 해인은 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벌써 오후 2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시간을 보는 순간 백담호는 지금쯤 시험을 보려나, 하고 은연중 생각하던 때, 휴대폰 화면을 가리고 알림창이 떠올랐다.
[호감도 알리미]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가 ‘39’로 올랐습니다.
알림창을 보는 순간, 해인에게는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필수 퀘스트를 끝내면 게임을 종료하겠다는 다짐과 달리 종료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두 번째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또 백담호의 호감도가 이유 없이 올랐는지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세 번째는 ‘1’만 더 오르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떠오른 알림창을 보던 해인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게임을 종료하면 백담호의 호감도는 그대로 유지가 될까? 아니면 종료 시점의 호감도 수치에서 멈춰 오르지 않을까?
호감도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방해인의 기억에 대한 것도 의문이 들었다. 이건 게임의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럼 게임을 종료하면 갑자기 기억이 삭제되는 걸까? 보통의 게임은 온, 오프라인이 나뉘어 있고, 세계가 달라 게임 속의 아이템들은 게임을 종료하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해인은 <그레비티> 세계 속에서 진행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을 종료한다고 해도 자신은 여전히 소설 속 이 세계일 것이다.
이곳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 해인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오게 된 이유도 모르니 어쩌면 해인이 알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자기가 사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면 이 거지 같은 게임, 종료해 버리고 다시는 시작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상황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해인은 이제 작은 원룸이 아니라 오피스텔이었고, 카드 정지도 풀렸고, 필수 퀘스트도 달성했다.
게임을 종료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바로 게임을 종료하지 않고 심지어 잊고 살기까지 했다는 건 자신의 정신이 다른 곳에 단단히 빠져 있었다는 뜻이었다.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제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명확했다. 백담호였다.
해인은 허공에 떠 있는 알림창을 빤히 쳐다봤다. 마치 그곳에 해인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라도 써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백담호의 호감도를 시시각각 알려 주는 건 가끔 곤혹스럽거나 의아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았다. 올랐다는 알림이 오면, 머리 위의 숫자가 오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벅참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게임을 종료하지 않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그레비티 in dating sim> 속에서 자신은 ‘플레이어’였고 백담호는 플레이어가 공략해야 하는 ‘공략 인물’이었다. 해인의 마음이 어떠하든, 게임은 백담호가 계속 해인을 좋아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또•••. 혹시나 백담호가 뒤늦게라도 서해빛에게 관심을 보인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더라도 해인은 백담호를 공략해야만 한다. 이건 해인 자신은 물론, 백담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백담호의 마음까지도 깡그리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이 게임은 역시 종료해야 하는 게 맞았다. 이미 해인은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백담호에게 지은 죄가 많았다. 더 이상 백담호를 공략 인물로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호감도를 올리도록 요구되는 상황이 싫었다.
해인은 단호히 알림창을 닫아 버리고 시스템창을 열었다. 전에 게임이 종료 후에도 알림이 온다고 했던 것 들을 전부 ‘off’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게임 종료에 손을 가까이 댔다. 어쩐지 입이 말라 해인은 헛숨을 들이마시고는 터치를 했다.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 예 아니오 ]
저번과 같은 경고 문구 대신 평범한 게임인 듯 다시 한번 종료하겠냐고 묻는 문구만 떠오를 뿐이었다. 너무 평범하게 물어서 오히려 더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해인의 손이 몇 번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조금 더 망설이기를 몇 초, 하얀 손이 드디어 ‘예’에 닿았다 떨어졌다.
[게임을 종료합니다. 플레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플레이를 원하시면 ‘그레비티 시작’이라고 말해 주세요. <그레티비 in dating sim>은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투명한 시스템창이 점멸되더니 사라졌다. 미련 없이 사라진 창의 빈자리를 해인이 얼떨떨한 낯으로 바라보던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방해인의 기억이 떠오를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방해인의 기억이 떠오를 전조 증상은, 흔히 말하는 데자뷰와 비슷했다. 분명 오늘 처음 겪은 일인데 익숙한 기분이 드는 그것.
현재 해인이 그랬다. 시스템 창이 점멸하는 순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창이 사라진 자리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렇게 게임 참여 안 한다고 할 때는 닦달하고 괴롭히더니 막상 종료한다니까 미련도 없이 꺼져서 어이없어서 그런 건가. 그렇다고 해서 종료를 못 하게 하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정말로 게임 개발자를 찾아내려고 했을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정말로 종료하실 건가요? ㅠ.ㅠ 아직 방해인 님이 즐기실 수 있는 퀘스트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라든가, [지금 종료하면 저번에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 3대 탈모가 될 겁니다^^* 더 플레이 하세요!] 같은 무언가 더 플레이하기를 원하는 문구가 뜰 거라 생각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이 게임이 딱 그랬다. 하라고 달라붙을 때는 언제고 참여하고 떠난다니까 이렇게 쉽게 보내 주니까 왠지 좀 허망했다.
종료가 제대로 되었음에도 해인은 후련함보다 어쩐지 힘이 쭈욱 빠지면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호감도 알림이 안 뜬다고 생각하니 어색함과 함께 혹시 시스템창이 불쑥 떠오르진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아….”
해인은 허탈하게 숨을 길게 내쉬고는 해인은 몸을 벌떡 일으켜다가 문득 눈을 퐉 찡그렸다. 게임이 정말 자신이 다시 시작을 외치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종료된 상태인지 알아야 찝찝함이 가실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 계단 난간에 서서 거실을 봤지만 서준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방에 있나 보다. 해인의 오피스텔에는 서준에게 주어진 방이 하나 있었다. 아마 방해인의 24시간 보호 겸 감시 목적으로 주어진 듯 보였다. 서준은 그 곳에서 가끔 자고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거의 매일 살다시피 하는 것 같았다.
1층으로 내려가 현관 바로 근처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서준이 나왔다.
“네, 해인 씨. 무슨 일 있어요?”
해인보다 서준이 조금 더 키가 큰 탓에 해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서준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듯 자연스럽게 있던 호감도 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서준의 머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임이 종료되었다고 떴을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 차올랐다. 허전한 머리 위가 신기하면서도 드디어 진짜 게임이 끝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왔다.
“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며 해인은 입을 살짝 벌리고 다시 서준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진짜 없네. 해인이 무의식적으로 서준의 얼굴로 손을 뻗다가 당황스러워 보이는 서준의 얼굴에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뜻이 고스란히 담긴 눈빛에 해인이 빠르게 눈을 도르르 굴렸다.
“아, 어, 머리에 뭐가 묻어 있어서…요?”
“아, 그런가요?”
서준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리고는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털었다. 조금 밝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해인은 서준의 머리 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쩐지 한번 저 위를 휘이 저어 보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이렀다. 손을 가져다 대어 봤자 허공을 가를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서준이 머리를 털어 내고 제 손을 한번 흘긋 보고는 됐냐는 듯 고개를 해인에게로 숙였다.
“떨어졌나요?”
예기치 못하게 서준의 머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당연하게 뭐가 묻어 있지 않았지만 해인은 짧은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
“아, 그래요? 뭐가 묻은 거지.”
서준이 다시 머리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해인이 서준의 어깨를 잡고는 슬쩍 자신에게로 당겼다.
“제가 털어드릴게요. 잠시만요.”
“아, 아니…. 제가 해도 되는데!”
서준이 급하게 외친 것치고는 해인에게 끌려가는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서준의 다급한 외침에 해인은 빠르게 서준의 머리 위를 쓱 훑은 해인이 손을 뗐다.
하지만 서준의 몸은 여전히 미동 없이 해인에게 숙여진 채였다. 바로 일어설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해인은 여전한 서준의 머리통을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고개 들어도 돼요. 함부로 만져서 미안해요. 그런데 붙은 거는 떨어졌어요.”
아, 서준이 짧게 감탄을 흘리고는 머리를 들어 올리며 ‘감사합니다.’라고 대꾸했다. 조금 어색하게 말려 올라간 입매가 겸연쩍어 보여 해인도 미안하다는 듯이 같이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가 서준과는 오랜만이라 해인은 입을 꾹 말아 넣고 괜히 다른 곳을 흘겼다. 서준과 이런 서먹한 분위기는 빙의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빼고는 처음이라 해인은 괜히 확인을 한다는 이유로 무례하게 굴었나 생각이 들었다.
호감도가 안 떠오른다는 걸 확인했으니 게임이 정말 종료되었다는 게 이제야 와닿았다. 조금 더 신중하게 게임 종료를 눌렀어야 했나, 하는 마음이 문득 들었으나 이내 해인은 마음을 지워 버렸다. 지금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고 했으니.
허공으로 돌렸던 시선을 서준에게 향하니 곧바로 정적이 깨졌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해인은 말문이 순간적으로 턱 막히고 말았다. 그저 서준의 머리 위 호감도나 뜨는지 확인하러 달려왔던 터라 마땅하게 둘러댈 연유가 없었다. 서준의 눈빛이 더 이상해지기 전에 해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냥 서준 씨 잘 있나 보러 왔어요.”
그럼 잘 있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끝까지 웃음을 유지하며 해인은 서준의 팔뚝을 툭툭 치려다 주춤하고는 그대로 손을 거둬 멀어졌다. 서준이 여전히 황당해 보이는 눈으로 해인을 쳐다봤지만 해인은 획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뛰다시피 걸어가는 해인의 뒷모습을 보며 서준은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건드렸다.
“잘 있나 보러 왔다고?”
요즘의 해인은 정말 이상했다. 예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들을 서슴없이 했다. 이게 서준도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다. 방해인은 확실히 무언가가 아주 크게 변했다. 단순히 성격뿐만 아니라 정확히 콕 꼬집기 힘든 무언가가.
사람 자체가 변했다고 하기에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의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라든가 사소한 습관들은 여전했다. 그러나 해인은 가끔 허공을 진지한 눈으로 본다거나 자신을 쳐다봐도 그 시선의 위치가 이상할 때가 간혹 있었다. 가끔 그럴 때 오싹하기는 했지만 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냥 습관이려니 서준은 치부했다. 그게 나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같은 한 사람이니 똑같은 게 당연한 거겠지. 서준은 한쪽 팔뚝을 문지르며 가볍게 혀를 차고는 다시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다. PC 화면에 떠 있는 영어가 가득 써져 있는 메일을 읽다가 턱을 문지르다 그림 사진들이 가득 붙은 벽을 멍하니 쳐다봤다.
“만져도 되는데.”
괜히 거절했나. 진짜로 그만둘 줄은 몰랐지만.
* * *
다시 침대로 돌아온 해인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서준의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으니 게임이 종료된 것은 확실했다.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묘하게 허탈했다.
이 게임에 참여하고 나서는 무언가 달성하면 항상 이랬다. 호감도 10을 달성했을 때도, 옆자리 앉기에 성공했을 때도, 게임을 무사히 종료한 지금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 게임을 통해 자신이 얻은 건…. 백담호의 호감과 덩달아 자신도 백담호를 좋아해 버리게 된 것.
백담호를 떠올리면 가슴 안쪽이 간지러운 것과 동시에 아슬아슬한 기분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건 자제하기 힘든 감정이라는 걸 해인은 몸소 체험 중이었다. 인정해 버린 순간부터 돌아가기에는 늦은 것이다.
백담호의 호감도는 게임을 통해 올라갔다. 퀘스트를 하기 위한 행동들에, 아이템을 사용하기도 했으니, 평범하게 올린 건 아니었다. 게임은 해인이 백담호를 공략하기 쉽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게임은 종료되었다. 이 의미는 더 이상 백담호가 해인의 공략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원작의 흐름을 제일 방해하던 게임이 종료된 시점, 이제 그 영향력이 없으니 백담호의 관심이 본래 흐름대로 서해빛에게 돌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돌연 좋지 못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곳에 빙의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괜히 건드려 봤자 좋을 것도 없었고 그 당시에는 백담호에게 관심도 없었으니 별 문제없이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으음…….”
갑자기 복잡해지는 기분에 해인은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미 자신으로 인해 많은 게 바뀌었다지만 백담호와 서해빛이 계속 같이 존재하는 한 이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백담호와 서해빛이 뒤늦게 서로에게 감정을 품어 버리면 그때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전에는 백담호가 원하는 관계에 제가 응해 줄 수 없어서 안 된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자신이 상처받을까 걱정이 된다. 이별은 함께한 추억이 많을수록, 쏟았던 애정이 많을수록 지독하게 느껴진다. 귓가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생각해 봤자 마음만 괴로워져 결국 해인은 정신을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해 폰을 집어 들었다. 폰을 집어 올리니 그러자 잘게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켜서 보니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백담호였다.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 웅웅 시끄럽게 울리던 빗소리가 조금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