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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 번째 공략 인물(1) (9/17)

9. 세 번째 공략 인물(1)

메시지는 꽤 주고받았지만-씹은 게 반이지만- 전화가 온 적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왜 전화를 한 거지? 해인은 부재중이 떠오른 화면을 심각하게 보다가 결국 잠금을 풀고 들어갔다.

혹시 메시지가 왔나 살폈지만 오전에 해인이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그대로일 뿐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해인은 몇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답장을 보냈다.

[백담호: 시발, 교수.] 오전 11:12

[방해인: 왜?? 문제 어려웠어?] 오후 3:33 -1

[방해인: 그보다 왜 전화했어?] 오후 3:33 -1

1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인이 5분 동안 화면을 뚫어져라 봐도 사라지지 않자 결국 해인은 전화를 걸었다. 규칙적인 수신음이 울리기를 몇십 초. 해인이 슬슬 끊으려는 순간, 뚝 하고 신호음이 끊겼다. 해인은 입을 자신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응, 해인아.]

그날 이후로 전화를 한 적은 처음이라 그런지 유달리 백담호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전화 왔었어서.”

[아, 잠시만.]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뭉개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정확하게 들리는 말들에는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백담호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의 친구인 듯싶었다. 이미 뭉개진 목소리는 더욱 작고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리더니 어느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미안, 옆에 사람이 있어서.]

수화기 너머는 이제 완벽하게 조용했다. 약간 울리는 게 어딘가 들어간 것 같았다.

“아냐, 바쁘면 이따 전화할까?”

[됐어, 안 바빠.]

내심 또 바쁘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던 마음이 단호한 대답에 안도감이 들었다.

[너 내일 시험…. 아, 실험 시험 하나 있나.]

“응.”

수요일 공강이 생기면서 백담호와 겹치지 않는 강의였다. 내일 시험이 있는지는 왜 묻나 싶어 해인이 “왜?”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백담호가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조금의 공백이 흘렀다.

[그거 쉬워. 한 10분이면 다 풀걸.]

“어…. 그래? 우리 조교님도 문제 어렵게 안 낸다더라. 너넨 정말 쉽게 나왔나 보네.”

부럽다. 해인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10분이라니, 해인은 이번에 본 시험 중에 10분 내에 끝낸 시험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과목들이 아니기도 했고.

[공부는 했어?]

“오전에 조금? 자기 전에 한번 더 보려고.”

[그렇구나.]

정적이 흘렀다. 해인은 백담호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 통화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대체 백담호는 자신에게 왜 전화를 했던 것일까. 그냥 안부 전화라도 한 것일까.

“아까는 왜 전화한 거야?”

[아침에 보니까 네 옷, 다 말랐길래.]

“…….”

옷이 다 말랐다는 말에 숨겨진 뜻이 뭔지 해인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답지 않게 직구로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해인은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고집을 부리지 못하는 듯했다. 어설프게 감춘 속뜻에 스멀스멀 해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해인은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면서 책상 위를 쳐다봤다. 오전에 잠깐 보고 펼쳐 놓은 교재가 그대로 있었다. 해인의 대답이 바로 들려오지 않자 백담호가 여상하게 말을 이으려던 참이었다.

[바쁘면-.]

“가지러 가야겠다.”

해인이 담호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잘라 버렸다. 또 말이 멈췄다. 백담호와 전화를 할 때면 다른 사람에 비해 유독 공백이 많은 것 같았다. 많이 하지 않은 탓이었을까.

조용한 흐름 속에 해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일 그거 입으면 되겠다.”

[……데리러 갈게.]

아마 게임이 종료되지 않았더라면 분명 백담호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알림이 왔을 게 분명했다. 해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알림이 왔으면 얼마나 올랐나 수치가 보였을 텐데.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도 나 시험공부 해야 해.”

전화가 끊기기 전에 재빠르게 해인이 말을 덧붙이자 “어.”라는 대답이 멀어지듯 울렸다.

제대로 들은 거 맞겠지.

* * *

“오늘은 걸어서 가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백담호가 해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때 못 걸었던 게 누구 때문이었는데. 해인이 샐쭉한 얼굴로 백담호를 흘기듯 째리고는 퉁명스럽게 뱉었다.

“시끄러.”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제대로 본 차고는 꽤 넓었다. 단독주택에 혼자 사는 것치고는 차도 꽤 여러 대였다. 개중에 한정판으로 나온 디자인의 외제 차도 두어 대 있어 해인은 시선을 떨어트릴 수 없었다. 전에 해인이 정말 잘 뽑았다고 생각했던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풀리자마자 바로 절판되었는데 백담호…. 그걸 성공했구나.

“줄까.”

갑자기 들려오는 나직한 속삭임에 해인이 소스라치게 몸을 움찔거렸다.

“뭐?”

“저거. 가지고 싶어?”

백담호의 손가락이 해인이 걸어가는 내내 쳐다보던 차를 가리켰다. 진지하기보다는 지나가듯 흘리는 가벼운 어조가 농담인 게 분명했다. 애초에 저게 얼마짜리인데. 자신도 농담 삼아 고개를 끄덕여 볼까 잠시 망설이던 해인은 결국 고개를 휘이 저었다.

“됐어.”

“그래? 마음 바뀌면 말해.”

“달라고 하면 진짜 주게?”

말이 되는 소리를. 저게 얼만데. 해인은 백담호의 장난에 맞받아치듯 어처구니없이 웃었다.

“진짠데.”

어깨에 걸쳐진 백담호의 팔이 스르르 위를 올라와 해인의 귀 언저리를 툭툭 건드렸다. 갑자기 의미 모를 손짓에 해인이 고개를 돌려 백담호를 쳐다보자 언제부터 보고 있던 것인지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해인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진짜다. 백담호는 달라고 하면 진짜 줄 기세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비싼 걸 줄 생각을 하다니, 백담호는 정상이 아닌 게 분명했다.

얘•••. 호구 같은 모습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서서 호구 잡히는 스타일인가? 자신도 돈이 많으니 백담호의 등골을 빼먹을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만약 해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이러면 다 빼 먹혔을지도 몰랐다.

“가질래?”

백담호가 한 번 더 물었고, 해인은 그제야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냐…. 필요 없어.”

“그렇구나.”

백담호의 시선이 드디어 떨어졌을 때는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뒤였다. 앞으로 아무거나 빤히 쳐다보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며 해인은 백담호를 뒤따라 올라탔다.

백담호가 신발을 벗자 해인도 얼른 따라 벗었다. 백담호가 해인의 단화를 들어 올려 자신의 것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에 배치되어 있는 작은 신발장에 넣었다. 그러고는 남색 실내화를 꺼내어 해인에게 건넸다.

느리게 닫히던 문이 완전히 닫히자마자 백담호는 바로 2층을 눌렀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어느 정도 해인도 구조를 아는 터라 그가 자신의 침실이 있는 층으로 직행한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다. 해인은 제 어깨에 걸쳐진 메신저 백 끈을 괜히 꽉 잡으며 연신 백담호를 흘겨봤다. 아까 마주했을 때부터 낯설었지만 보면 볼수록 그의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낯설었다. 까만 머리통 위에 항상 호감도 표시가 있었는데.

마치 원래 있어야 할 게 없는 것 같은 이질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첫 번째로 등록되었고 제일 공략에 열심히 했던 인물이라 그런 걸까. 강서준보다 그 낯설음이 더 커 자꾸만 힐끗거리게 되었다.

“뭐지.”

엘리베이터 문이 드디어 열리는 찰나, 백담호가 중얼거렸다. 해인은 문 앞에 서 있는 두식이에 반갑게 미소를 짓다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응?”

해인이 되물었지만 백담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낯으로 해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과 달리 웃음기가 조금 사라진 탓에 해인은 그 짧은 사이에 자신이 무언가 잘못을 했나 이번엔 무의식적으로 머리 위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뭐가 보일리가 없었다.

“하자는 건가.”

“뭐…. 뭔!”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힘과 동시에 백담호가 해인을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맥없이 끌려간 해인은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백담호를 올려다보자 그는 이제야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 너머로 작게 우는 두식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몰래 힐끗거리는 게…. 나랑 같은 생각인가 싶었지.”

“무슨 같은 생….”

아, 해인이 곧바로 탄식했다. 해인의 아랫배보다 조금 더 밑으로 별로 깨닫고 싶지 않은 부피감을 알아 버렸다. 백담호가 말하는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는 건. 해인의 얼굴에 삽시간에 당혹감으로 번졌다.

옷이 다 말랐다는 담호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해인도 예상하고 온 것은 맞지만, 이렇게 오자마자 무방비하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엘리베이터에서 말이다.

“아, 아니. 너무 급발진 하지…. 미친.”

해인이 몸을 버둥거리며 백담호를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게 자극이 되었는지 배 아래를 찌르는 것이 더욱 커지는 걸 느껴 버리고 말았다. 백담호는 이제 완전히 짙게 웃으며 서서히 해인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 잠시.”

해인의 다리 사이로 백담호의 허벅지가 파고 들어와 중심을 꾹 눌러 왔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허벅지는 슬슬 문지르기 시작했다. 통 넓은 트레이닝 바지 탓에 천과 함께 마찰이 되는 아래에 해인의 허리가 살짝 곱아졌다.

회음부와 함께 쓸리는 성기에 비음이 흘러나와 해인이 입술을 깨물며 담호를 올려다보자 그는 해인의 반대쪽 볼을 감싸고는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해인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 제 입술과 문지르던 백담호가 살짝 떨어트리고는 말했다.

“한 번만, 응?”

싫다고 거절하면 바로 그만둘 듯 유순하게 물어 오면서 다리 아래를 비비는 허벅지는 멈추지 않았다. 감질나는 자극이 은밀하게 전신으로 퍼져 가 해인은 조금 원망스러운 얼굴로 백담호를 쏘아봤다. 얍삽하게 구는 게 아주 도가 터 있었다.

매서운 해인의 눈빛에 백담호는 더욱 얼굴을 애처롭게 꾸며 내며 해인의 눈 밑에 입을 맞추며 눈을 살짝 휘어 보였다. 의도가 너무나 명백해서 해인의 시선이 흔들렸다. 결국 힘없이 달뜬 호흡을 내뱉은 해인은 백담호의 가슴에 이마를 묻었다.

“정말 한 번이지?”

“응, 정말.”

이마에 입을 맞춰 오는 백담호의 대답을 듣고 깨달았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겠다는 것을.

* * *

목 언저리가 빨릴 때마다 허리 밑이 저릿했다. 들고 왔던 메신저 백은 어느새 엘리베이터 바닥으로 떨어져 널브러졌다. 아랫배에 닿는 백담호의 것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얇은 맨투맨 속으로 스르르 손이 타고 올라왔다.

“흐….”

백담호의 손이 갈비뼈가 있는 곳을 간지럼 태우듯 쓰다듬었다. 달아오르는 몸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을 자극에도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게 했다. 옆을 매만지던 손이 막힘없이 위로 타고 올라와 빳빳하게 선 돌기를 엄지로 툭 건드렸다.

“아…. 거긴 좀 이상해….”

“어떻게.”

어떻게 이상해. 백담호가 속삭였다. 그러면서 돌기를 건드리지 않고 유륜을 따라 그 주위만 장난치는 것처럼 문질렀다. 돌기가 직접적으로 만져질 때보다는 자극은 덜했다.

하지만 백담호의 손이 제 맨투맨 안에 들어가 가슴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해인은 어쩐지 입 안이 말라 가고 왠지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정신이 아직 꽤 또렷한 탓일까, 얼굴에 열이 몰렸다. 옷 안으로 들어간 손 때문에 불룩한 제 가슴팍을 보다 민망해 시선을 돌린 해인은, 그제야 왜 제가 오늘따라 이리 불안한 기분이 드는지 깨닫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였다. 집 안에 딸린 개인 엘리베이터이기는 했지만, 해인의 눈에 보이는 층수를 나타내는 빨간 숫자와 좁은 공간이 무의식적으로 건물 공용 엘리베이터를 떠올리게 했다. 만약 이곳이 백담호의 집이 아니라 다른 곳의 엘리베이터였더라면•••.

언제 열릴지 모를 아슬아슬한 장소였다. 갑자기 열린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신과 백담호가 벌이는 낯부끄러운 행동을 봐 버린다고 상상하니 목 아래에서부터 열이 올랐다.

게다가 공용 엘리베이터면 CCTV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해인의 시선이 CCTV가 있을 법한 곳으로 옮겨 갔지만 당연하게도 CCTV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미 해인의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상상들에 해인은 두피까지 열이 나는 듯했다.

“할 때마다 얼굴은 금방 빨개져.”

새빨갛게 물든 해인의 얼굴에 백담호는 고개를 기울여 숙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속눈썹 하나하나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해인은 눈을 돌렸다.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 눈을 돌려도 백담호가 보였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호선을 그린 입술만 보일 뿐이었다.

“아래 빨아 주는 거보다 이걸 더 부끄러워하네.”

“흐…으읏….”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륜만 만지던 손이 돌기를 꾸욱 누르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조금 따가운 것 같기도 하고, 날개뼈까지 찌릿한 감각에 해인이 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 위로 입을 가까이 한 백담호는 혀로 입술을 핥아 올렸다. 물지 말라는 듯한 행위에 해인이 입을 조금 벌리자 그 안으로 혀가 바로 파고들어 왔다.

부드럽게 핥을 때는 언제고 입 안에 들어온 살덩이는 해인의 온 입 안을 헤집어 놓았다. 백담호는 늘 키스를 진득하고 끈질겼다. 그 탓인지 어느 곳을 혀로 찌르면 해인이 우는 소리를 내는지, 어디를 훑으면 해인의 몸이 움찔거리는지 외우는 건 시간문제였다.

입 안이 자극당하면서 가슴이 만져지니 그 자극이 배가 된 것만 같았다. 물에 젖은 소리가 목 안에서 웅웅 울려 와 정신이 아득해진다.

“흐으…. 으읍…….”

숨이 가빠 눈물이 살짝 핑 돌 때쯤 백담호가 입술을 떨어트렸다. 해인의 입술은 타액으로 축축해져 있었고 그건 백담호도 마찬가지였다. 벌어진 사이로 나오는 더운 숨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으응…. 아파, 백담호….”

쉬지 않고 만져진 돌기는 조금 쓰라리기까지 했다. 미약한 고통에 해인이 손을 떨어트리려 가슴을 옆으로 돌리려 하는 순간, 유두를 건드리던 한 손이 해인의 등을 붙잡았다.

“흐…. 그만, 그만해…!”

해인이 울먹였지만 백담호는 오히려 문지르기만 하던 것을 꼬집듯 잡았다.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에 잡힌 돌기는 모든 부분이 살갗에 문질러졌다. 예민해진 피부 탓에 금방이라도 유두가 떨어질 듯한 고통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성감이 차올랐다. 고통과 성감이 한 번에 느껴져 해인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도리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아파?”

돌기를 비틀던 손이 드디어 움직임을 멈췄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인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자 백담호는 느른하게 웃음을 흘렸다.

“미안.”

가슴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손이 드디어 빠져나와 해인은 안도에 찬 숨을 내쉬었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젖꼭지가 잔뜩 부어 있을 게 분명했다. 아직도 미약한 얼얼함에 해인이 몸을 버둥거리던 참이었다.

“아…!”

백담호가 해인의 양 손목을 결박하고는 입술을 해인의 가슴 위로 가져다 대었다. 아직 윗옷이 벗겨지지 않은 터라 입술이 옷 위에서 문질러지자 부은 가슴 위로 까슬한 옷감이 쓸렸다.

“흐읏…. 아, 잠깐 아프다니…. 흐윽…!”

백담호는 입술을 문지르다 못해 이제 옷과 함께 바짝 선 것을 빨아 들였다. 눅눅하게 젖어 가는 옷 안으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 와 몸이 자꾸만 안으로 말려들어 가려 했다. 손으로 만져지는 것보다 옷 위로 빨리는 게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입 안을 헤집을 때처럼 물컹한 혀는 그 끝을 세워 돌기를 눌렀다 돌리기도 했다.

백담호의 입 안이 이렇게 뜨거운 건지 제 가슴이 달아오른 건지 이제 고통보단 뜨거운 열감과 성감만이 퍼져 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 탓에 백담호의 허벅지와 제 회음부가 더욱 밀착해 조금만 움직여도 쾌감에 허리가 달달 떨려 왔다.

아까부터 조금 서 있던 해인의 것은 이제는 완전히 발기할 대로 발기에 금방이라도 사정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질질 흘러나온 프리컴이 속옷은 물론 맞닿아 있는 팬츠까지 적셔 갔다.

한쪽 가슴만 집요하게 빨아 들이는 탓에 백담호의 머리를 밀어내고 싶어도 꽉 잡혀 있어 불가능했다. 해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애원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부드럽게 빨던 백담호가 갑자기 이를 살짝 세웠다. 혀와 달리 딱딱하고 조금 날카로운 것에 물리자 결국 눈에 그득 맺혀 있던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흐…. 그만…. 아파, 담호야…. 나 아파…….”

이게 지금 고통인지 쾌락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지 해인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가볍게 가슴에 깨물고 괴롭혔던 담호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떨어졌다.

하필 윗옷도 얇고 하얀 색이라 타액으로 젖은 옷은 속 안이 훤하게 비추고 있었다. 가슴에 달라붙은 반투명한 옷 안으로 잔뜩 붉어진 유두가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가슴 좀 빨아 줬다고 달아올라 헐떡이는 얼굴과 젖어서 다 보이는 붉은 돌기에 백담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만하라고 말리는 걸 보면 별로 자극당한 거 같지도 않은 데, 반응만큼은 민감했다.

“해인이는 몸이 이렇게 쉽게 달아서….”

어떡하지. 잡고 있던 양 손목을 제게 당기며 놓아주자 해인의 몸이 맥없이 딸려 와 품에 안기듯 쓰러졌다. 품 안에서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여린 등을 백담호가 토닥였다. 자기가 실컷 울려 놓고 어르듯 두드리는 행위에 밭은 숨을 쉬던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려 백담호를 향에 눈을 위로 치켜떴다.

“내가… 아프다고 했잖아.”

이제는 미약한 얼얼함이 아니었다. 쓰라렸다. 진짜로 쓰라렸다. 그것도 한쪽만 쓰라려 기분이 묘했다. 해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프긴….”

또 거짓말 친다. 나직하게 속삭인 백담호에 해인이 어이가 없어 말을 하려 입을 벌렸지만 곧바로 나오는 건 짜증 서린 말이 아니라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백담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해인의 앞섶 안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벌써 이렇게 젖었는데.”

파고든 손은 중심을 지나 회음부까지 손가락이 닿았다. 그 상태로 손으로 성기를 압박하고 손가락을 조금 굽혀 주무르기 시작했다. 물이 가득해 질척이는 소리가 은밀하게 흘러나왔고 겨우 서서히 진정되던 몸은 짙은 자극에 빠르게 예민해져 갔다.

기둥부터 음낭까지 전부 속 안에서 짓눌리듯 비틀리고 마찰되는 바람에 해인은 그대로 얼굴을 담호의 어깨에 묻고 억눌린 신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도 가슴이었지만 역시 제일 예민한 곳은 아래였다. 허리가 저릿하다 못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쾌감이 커 몸이 자꾸만 뒤로 빠졌다.

“흐으…. 아으……. 하아…….”

지탱하고 있던 다리는 이제 완전히 힘이 풀려 백담호의 허벅지 위에 앉다시피 되어 버려 회음부를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더욱 살을 압박해 왔다.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살짝 휘어들어 안쪽의 어딘가를 꾹 누르자 무언가 쌀 것 같은 이상한 감각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 전부터 절정 근처에서 맴돌던 터라 사정은 빨랐다. 참지 못한 해인이 그대로 속옷 안에서 파정을 하고 말았다. 프리컴으로 질척할 대로 질척했던 옷은 이제 정액으로 완전히 젖어 들어 백담호의 손까지 적셨다. 괴롭힘이 길었던 탓인지 해인은 한 번의 사정으로 몸에 힘이 주욱 빠져 버리고 말았다.

아직 남은 쾌락에 몸을 조금 바르르 떨며 백담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깊게 파고든 숨에는 그의 체향이 가득해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그보다 바지랑 옷은 어떡하지. 분명 다 마른 자신의 옷을 가지러 온 것인데 오히려 빨랫감을 늘리고 말았다.

벅찬 숨이 드디어 잦아들어 갈 즈음 해인이 흐려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 또 옷 세탁해야 할 거 같아. 이만 내리-.”

“이만?”

백담호가 해인의 몸에 더욱 밀착했고 해인은 무언가 깨달은 듯 나직이 “아.” 하고 소리를 흘렸다. 아직 백담호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묵직한 아래의 부피가 여실하게 느껴졌다. 입은 것도 하필 청바지라 눌리는 압박감이 어떨지 해인은 알아 절로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면 항상 백담호는 늘 해인이 가고 나서야 그제야 제 성욕을 풀었다. 해인이 슬며시 위를 올려다보니 백담호의 표정은 조급해 보였다. 동공이 조금 풀려 더욱 어두워 보이는 까만 눈이 마주치자 그는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해인아, 나도 아파.”

여기가 존나 아프다. 밀착되면서 굽혀진 해인의 허벅지에 백담호는 제 것을 살살 문지르며 해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원하는 듯한 욕망 가득한 눈빛에 해인 역시 쉽사리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혼자서 해인의 허벅지에 자위질을 하던 백담호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쾌감에 의한 반응이 분명했다. 한 번 사정을 해 명확해진 정신 탓에 백담호의 반응 하나하나가 전부 눈에 들어왔다. 들떠 가는 호흡과 점점 뜨거워지는 허벅지,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에 입 안이 말라 갔다.

“하아….”

항상 해인은 백담호보다 먼저 흥분에 잠식되었기에 지금 이런 상황이 꽤 낯설었고 백담호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쾌감에 달뜬 숨을 몰아쉬는 백담호는,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게도 아니고 깔짝깔짝 아래를 비비는 행동이 야하면서도 귀여웠다.

해인의 눈이 점점 짙은 빛을 띠어 갔다. 담호를 보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고 곧이어 앞섶에 해인의 손이 올려졌다. 조심스럽게 위를 쓰다듬는 탓에 담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만져 줄까?”

미약하던 허리짓이 바로 멈췄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분위기에 해인이 슬쩍 위를 쳐다보니 백담호는 한 손으로 제 눈 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손으로 가려지지 못한 볼 아래가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아 해인은 또 한 번 물었다.

“만지지 마…?”

손가락 틈으로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시발, 그럴 리가.”

좆 진짜 터질 거 같아. 백담호는 해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 위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그 숨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얼굴을 보고 싶어 해인이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자연적으로 어깨에 붙어 있던 백담호 얼굴이 떨어졌다.

분명, 지금 호감도가 올랐을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호감도와 울리지 않는 알림이 약간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시 게임을 켤 생각은 없었지만.

백담호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어 해인은 홀린 듯이 그의 뺨을 쓰다듬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향했다.

해인이 백담호의 버클을 내리고 조금 느리게 바지를 끌어 내렸다. 안으로 축축하게 젖어 크게 부풀어 있는 검은 드로즈가 보였다. 외설적인 광경에 자꾸만 입이 말랐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니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몸에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두어 번 더 아슬아슬하게 드로즈 위로 툭툭 건드리다, 위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시선에 얼른 드로즈도 끌어 내렸다.

억압하고 있던 것이 사라지길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거대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핏줄까지 설 정도로 발기한 것은 이미 선단이 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보는 거 같은데 아직도 볼 때마다 속으로 감탄하게 된다.

해인이 손으로 조심스럽게 기둥을 감쌌다. 예상했듯 한 손에 전부 들어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손을 천천히 움직이자 곧바로 위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후…….”

액이 흘러 다른 것 없이도 매끄러운 탓에 해인은 조금 더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질척이는 소리는 더욱 적나라해졌다. 기둥을 쓸어내리던 손이 선단을 엄지로 문지르니 백담호의 허리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흥분할 대로 흥분한 귀두에서 흘러내리는 액이 야해 해인은 배 아래가 간지러웠다. 사정을 해 힘이 없던 제 것도 점점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해인아. 거기, 좀 더….”

전보다 훨씬 낮고 거칠어진 음성이었다. 달뜬 숨결이 머리 위로 느껴져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으로는 기둥을 쓸어내렸다가 올리고 다른 손으로 선단을 문질렀다.

벽을 짚고 있던 한 손이 해인의 팔뚝을 잡았다. 점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해인의 옷이 구겨졌다.

“…시발,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왔어.”

흥분 때문인지 낮아진 목소리가 조금 살벌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해인이 슬쩍 눈을 올려 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찌푸린 얼굴에 짜증이 서린 것 같아 순간적으로 해인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 표정이 단순히 기분이 나빠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둥을 매만지던 손을 아래로 내려 음낭을 건드리니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언뜻 보면 화난 것 같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눈 밑이 붉어져 있었고 호흡은 들떠 있었다.

쾌감에 의한 것이었다. 해인은 아래로는 열심히 담호의 성기를 애무하며 그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일부러 거칠게 마찰하거나 귀두를 콱 누를 때마다 성감에 일그러지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흥분에 풀린 눈도 마음에 들었다.

만져지는 건 백담호인데 오히려 자신도 같이 자극당하는 듯 다시금 아래가 빳빳하게 서는 게 느껴졌다. 백담호가 이런 표정을 짓고 흥분해 밭은 숨을 몰아쉬는 게 저 때문이라는 것에 묘한 정복감이 들었다.

“하…….”

좆을 만지는 손의 움직임은 속도를 높였다. 손아귀에 힘을 더욱 준 채 두터운 기둥을 꽉 잡고 왕복하니 어디서 뛰는지 모를 맥박이 손 안을 울렸다.

금방이라도 갈 듯 손 안에 잡힌 성기가 움찔거렸다. 선단을 문지르는 엄지의 움직임이 거칠어짐과 동시에 해인의 손 안으로 하얀 액이 쏟아졌다. 백담호의 정액은 해인의 손은 물론 윗옷에도, 허벅지 위에도 떨어졌다.

흣, 신음을 흘린 백담호는 해인의 어깨에 맥없이 제 얼굴을 떨어트린 채 문질렀다. 사정을 한 성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해인은 정액으로 더럽혀진 제 손을 옆으로 꺼내 해인은 그걸 봤다. 제 손을 꺼내 바라봤다.

“백담호, 네 기분 좀 알 거 같아.”

어깨 위로 뜨거운 백담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오싹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 손이 주는 자극에 아슬아슬하게 흐트러진 모습이 여전히 망막 속에 떠올랐다. 견디기 힘들어 보일수록 성기를 만지는 손은 오히려 더 빨라졌고 결국 파정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게 묘한 쾌감을 일으켰다.

직접적으로 자극을 당할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쾌감이었다. 이래서 나를 그렇게 몰아붙였구나. 실로 깨달았다는 듯한 말투에 백담호는 그만 실없이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건 좀 반전이네.”

존나 못 할 줄 알았는데. 해인이 혼자서 딸은 많이 쳤나 봐. 이것만 잘하는 거보면…….

“…….”

해인은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입 다물어.”

살벌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수치심에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백담호는 그런 해인의 반응에 혼자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자신이 백담호를 꽉 쥐고 흔들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목까지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나가기나 하자.”

해인은 백담호를 밀어내려 그의 어깨를 잡으려다 이내 제 손이 정액으로 더러워져 있다는 걸 깨닫고 멈칫거렸다.

“아…. 나 손이 더러워서 안 되겠다. 백담호, 비켜 봐.”

백담호가 고분고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계속 붙어 있던 몸이 떨어지며 백담호는 미련 없이 제 아래를 정리했다. 그 탓에 해인은 여전히 서 있는 제 것에 조금 곤란함이 느껴졌다. 정말 각각 딱 한 번씩만 하긴 했네. 진짜로 한 번 할 줄은 몰라 내심 바로 물러난 백담호에 놀라긴 했지만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조금 시간 지나면 가라앉겠지. 그리 생각한 해인은 일단 손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다 닦을 게 있냐고 묻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 닦을 거….”

백담호는 해인이 아니라 해인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덩달아 해인의 고개도 숙여졌고 그 아래는 마치 지리기라도 한 듯이 색이 짙어져 있었다. 하필 드로즈의 색도 회색에 발기된 상태라 눈에 더 띄었다. 민망한 제 모습에 해인이 황급히 윗옷을 끌어 내렸고 백담호는 나긋하게 웃고 있었다.

“해인이 섰네.”

만져 줄까? 유혹하듯 속삭이는 백담호가 해인의 허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끌어 내린 윗옷 아래로 백담호의 허벅지가 파고들어 왔다. 옷이 축축한 탓인지 압박되는 아래가 더 묘하고 움츠러들 것 같은 느낌에 해인은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고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밤색 눈동자에는 열감이 잔뜩 어려 있었지만 해인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백담호가 흥분한 모습을 보고 다시 제 아래가 섰다는 게 좀•••. 많이 민망했다. 심지어 이미 한 번 사정까지 한 상태였는데.

백담호는 여유로운 낯으로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해인을 보며 허벅지를 살살 움직였다. 마치 해인이 싫다고 하면 바로 떨어질 듯이 감질맛 나는 자극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곧이어 즐거운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솔직하니까 얼마나 좋아. 해인아.”

가볍게 해인의 볼에 입이 맞춰지고, 팬츠가 속옷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고, 다시금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 * *

엘리베이터에서 계속 서서 한 탓인지 피로가 몰려와 해인은 발가벗은 채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백담호는 옆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말에 백담호는 몇 번이나 가지 말라고 했지만 이 상태면 아무리 쉬운 난이도라고 해도 제대로 공부도 못 하고 시험을 볼 게 분명했다. 이왕 공부에 대한 기억까지 갖게 되어서 그런지 성적을 잘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집에 가려고 일어나자 백담호는 나긋하게 자고 가라는 직접적인 유혹을 해왔다. 솔직하게 백담호의 말이 끌리기는 했지만 당장 내일이 시험이었다. 아무리 쉽다고는 하나 머릿속은 방해인의 기억에 있는 부분 빼고는 백지와 비슷했다. 그래도 한 번 보면 어느 정도 새겨지니 집에 가는 게 옳았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분명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백담호도 백담호지만 이제는 해인 자신도••• 조금 문제였다.

해인이 강경하게 집에 버스라도 타고 가겠다고 말하자 백담호는 결국 마지못해 씻고 나오면 데려다주겠다고 부루퉁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바지는?”

욕실에서 나온 해인은 조금 긴 윗옷과 헐렁한 드로즈만 입은 채 당황한 눈으로 백담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지가 지금 너한테 맞는 게 없네.”

백담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해인은 황당한 듯 눈을 찌푸렸다.

“…나 집에 이러고 가?”

“집?”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담호에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네가 씻고 나오면 데려다준다며!”

“안 건드릴게.”

“거짓말 치지 마.”

“진짜인데. 아무리 그래도 내일 시험인데 내가 양심도 없겠어? 해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던 거야. 너무하네.”

슬픈 표정을 꾸며 내고는 해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우울한 척하는 백담호의 모습에 해인은 머리를 짚고 말았다.

* * *

해인은 결국 또 백담호한테 지고 말았다. 바지도 못 입고 책상에 앉은 해인은 가져온 교재를 훑어보고 있었다. 맨 다리가 춥다니까 담요를 가져다줄 뿐 백담호는 끝까지 바지는 주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해인은 가방에 미리 한 봉지 챙겨 둔 지렁이 젤리를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이거. 실험 재료, 시약 잘 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깔끔한 종이 위에 백담호가 샤프로 체크를 하면 해인은 그걸 유심히 읽었다. 비록 분반은 달랐지만 과목은 같았고, 과탑인 백담호가 중요하다고 하는 말엔 신빙성이 있었다. 백담호는 진짜로 해인을 건들지 않았다. 나름 이번 시험만큼은 잘 보고 싶었던 해인이었기에 그가 얌전히 있는 것도 모자라 도와주는 것에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집에 가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일지도. 혹시 몰라 서준에게 자신이 늦게 오면 퇴근하라고 하길 잘했던 것 같다. 또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고 백담호가 샤프로 끝으로 콕 집었다.

“이거 실험 방법, 공식.”

“응.”

조금 복잡한 실험 방법에 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보다가 빈 노트에 그대로 따라 적었다. 백담호는 그런 해인을 보다 슬쩍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아직 조금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묻어났고 사락사락 움직일 때마다 익숙한 향이 났다. 자신이 쓰는 샴푸랑 바디 워시를 썼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머리카락을 건드려도 해인이 별 반응이 없자 백담호가 슬그머니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옆구리에 손이 닿자 해인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지만 이내 다시 볼펜을 바쁘게 움직였다. 싫다고 내빼지 않아서 좋긴 한데 이렇게 별 반응이 없으니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건든다고 하긴 했지만….

백담호는 열중하는 해인의 노트를 쓱 훑었다. 너무 열심히 해서 정말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백담호는 괜한 옆구리만 계속 쓰다듬으며 해인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머리에 입을 묻고 바람을 후후 불었다.

“간지러.”

“응, 미안.”

해인이 손으로 밀어내자 백담호는 쉽게 입을 떨어트렸지만 허리를 만지는 손은 절대 떨어트리지 않았다. 방해인은 옆에 있으면 묘하게 괴롭히고 싶고, 건들고 싶고, 만지고 싶게 만들었다. 마음만 같아선 항상 옆에 두고 싶고 단둘만 있고 싶은데 생각보다 둘이 있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이 강제로 붙잡으면 방해인은 쉽게 붙잡히겠지만 그것보단 자연스러운 흐름을 원했다. 자연스럽게 계속 같이 있으려면 아무래도 거리가 가까운 편이 좋을 텐데. 이제 내비게이션 없이도 갈 수 있는 방해인의 오피스텔을 떠올렸다.

자신의 집과는 꽤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캠퍼스를 기점으로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가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시험 기간이 끝나면 같이 있을 이유가 줄어든다. 방해인의 집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강서준이 걸렸다. 그렇다고 매번 집에 데리고 오기에는 방해인이 거부할 것 같았다.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무시했던 그때처럼.

방해인은 나를 좋아한다. 이것만은 확실하다고 백담호는 생각했다. 하지만 해인은 항상 선을 그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게 보이는데도 밀어내고 선을 긋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저 너무 훅 다가갔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원래 이런 관계가 아니었어서 어색해서 그런가, 그런 것치고는 방해인이 먼저 들이댔다. 복잡하기만 한 속내를 언젠가 뜯어 볼 기회가 있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뜯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언제 도망칠 생각인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해인이 제대로 말하지 않는 제 속내는 과연 무엇인지. 왜 갑자기 날을 세우다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모든 걸 알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그래 버리면 방해인은 숨어 버릴 것 같았다.

좀 더 천천히, 방해인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지 않을 속도로, 그리고 아주 완고하게 그를 곁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또 너무 천천히 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해인이었다.

왜 이렇게 방해인하고 연관된 건 어려운 건지.

옆구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 몸이 백담호에게로 기우는 바람에 해인이 퉁명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달기만 하고 식감도 영 별로인 게 그렇게 맛있는지 아직도 입에 젤리 하나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어릴 때는 오히려 군것질을 잘 안 했던 것 그저 그러는 척한 것일 뿐일까. 지금과 달리 예전의 방해인은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했다. 그 노력은 부단한데 성질머리가 죽여지지 않아 오히려 더 애새끼 같았다는 게 흠이었지만. 아니면 단순히 식성이 바뀐 것일지도.

“맛있어?”

방해인은 대답 대신 손을 쭈욱 뻗어 젤리를 하나 꺼내 담호의 입술을 쿡 찔렀다. 백담호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고 입 안으로 알록달록한 지렁이 젤리가 쏙 들어갔다. 혀에 닿자마자 겉에 묻어 있던 가루 탓에 신 맛이 퍼져 백담호는 순간 인상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몸이 당겨져 어정쩡한 자세임에도 해인은 별다른 말없이 오히려 백담호에게 기댄 채 몸에 힘을 쭉 풀고 다시 사각사각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도망갈 틈은 주지 말아야겠다. 그러려면…. 역시 근처로 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캠퍼스 근처에 오피스텔 하나라도 구할까. 정 실장님께 알아봐 달라고 해야 하나.

어느새 이사 생각까지 하는 자신을 깨달은 백담호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신까지 이 집을 비워 버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데도 순간 이사를 생각해 버렸다. 대체 제 머릿속에서 방해인은 얼마만큼 부피를 키워 버린 걸까. 수치로 알 수 있다면 알고 싶을 정도였다. 다시 시선을 책상으로 돌렸을 때는 몇 페이지가 더 넘어가 있었다.

“이거 이론. 실험 방법, 공식.”

“아, 이건 기억난다.”

나직하게 중얼거린 방해인은 착실하게 자신이 집어 준 걸 따라 적었다. 어느 정도 외울 때까지 적는 건지 벌써 노트도 몇 장이 넘어가 있었다. 공부를 미련하게 하는 게 하찮고 귀여워 허리를 만지던 손을 들어 정수리를 토닥였다. 예전부터 방해인은 공부는 열심히 하긴 하는데 간혹 지나가다 보면 방법이 조금 미련했다. 그나마 암기력이 좋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따라 쓰는 문장을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게 퍽 귀여웠고 보는 재미가 있으니 담호는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저 “글씨체가 귀엽네, 해인아.”라고 장난치듯 말을 걸으니 해인은 집중한 듯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턱을 여전히 해인의 어깨에 걸친 채 같이 해인의 노트를 쳐다봤다. 생긴 것과 다르게 둥글둥글한 글씨체가 자기 성격 같았다.

날카로운 펜촉에 사각사각 소리가 울렸다. 그러다 볼펜을 꽉 쥔 하얀 손을 보니 불과 몇 시간 전이 떠오르고 말았다. 먼저 만져 준다고 말할 줄도 몰랐지만 정작 만지더라도 어색하게 조몰락거리다 말 줄 알았는데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백담호의 머릿속에는 혼자서 만지다 흥분에 겨워 우는 해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몸이 예민하니 혼자하면서도 쉽게 절정에 도달할지도 몰랐다. 그것도 꽤……. 볼만하겠는데. 음험한 생각이 뿌리에 뿌리를 뻗어 갔을 때 아래가 조금 부풀었음을 깨달았다.

“으음…….”

하필 이럴 때. 곤란한 탄식을 흘리니 방해인이 그제야 “왜 그래? 뭐 잘못 썼나.”라고 물어 왔다.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는 입에 시선이 쏠렸다. 모르는 척하고 키스 갈기면 화내려나. 순간적으로 충동이 들었지만 해인의 빽빽한 노트가 백담호의 이성을 겨우 잡아 줬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렇지 않은 척 백담호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해인은 의아하게 갸웃거리다 다시 교재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하네….”

빠르게 집중하는 해인에 백담호는 맥없이 중얼거리며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 * *

“아, 드디어 다했다.”

해인이 팔과 다리를 쭉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예상보다 빠르게 끝낸 터라 꽤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수고했어.”

백담호가 교재를 대신 덮고는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중간에 할일도 딱히 없는데 옆에서 계속 있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미안해 먼저 자도 된다고 했지만 백담호는 가지 않았다. ‘그저 피곤하면 갈게.’라고 대답만 할뿐 결국 끝이 날 때까지 옆에 앉아 있었다.

해인은 피곤한 건지 게슴츠레 눈을 감았다 뜨는 백담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깨를 토닥였다.

“도와줘서…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더 늦게 끝났을 거야. 아마 시험 범위까지 저걸 다 노트에 다 적었을 테지…. 그 생각을 하니 끔찍해진 해인은 담호와 눈을 맞추며 웃음을 그렸다. 잠시 헤실헤실 웃던 해인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너도 피곤-.”

“해인아.”

백담호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일어서자마자 더욱 차이가 나는 키에 해인의 얼굴은 저절로 위를 향했다. 한 걸음, 백담호가 거리를 좁혀 와 흘러가듯 말을 했다.

“좋아해.”

훅 치고 들어온 고백에 해인의 몸이 굳었다. 백담호는 약간 피곤함이 묻은 얼굴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갑작스러운…,.아니, 그렇게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백담호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돌발적인 행동에 해인이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동그랗게 커진 해인을 보던 백담호는 한쪽 볼을 쓰다듬으며 잔잔히 물었다.

“나랑 연애할까, 해인아.”

연애, 연애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수백, 수천 커플이 헤어지고 또 만들어졌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만난 여러 인연 중 어쩌다 조금 더 깊어져 잠시 같은 길목에 서게 되는 것뿐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천차만별이고 그 깊이 역시도 다 다르겠지만.

결말은, 늘 이별이다. 연애는 매일 이별로 향한다. 애당초 모든 관계에 영원은 없다. 어차피 끝날 인연들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런 탓인지 해인은 백담호를 좋아한다는 자각을 했을 때도 연애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담호의 ‘연애할까.’라는 말에 지금 해인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과장해서 심장이 모양 그대로 피부에 드러날 정도로 쿵쿵 때리는 것 같았다. 이건, 해인에게 좋지 못한 반응이었다. 해인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입을 살짝 벌렸다 다시 다물었다.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와 동시에 제 볼을 쓰다듬는 백담호의 손을 꽉 붙잡고 싶었다.

검은 눈이 그런 제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 물끄러미 눈을 마주쳐 해인은 그만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음, 하고 그렇게 기분 나쁜 것도,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묘하게 소리가 울렸다.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따뜻했던 잔열이 있어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갈까.”

“…응?”

백담호가 평소처럼 여유롭게 어깨를 감싸며 해인을 이끌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방금 고백한 상황이 해인이 마치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여상하게 구는 백담호의 태도에 해인은 그의 얼굴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그가 기분이 나쁜 건지, 아님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그렇다면 백담호는 차여도 그만, 이대로 여도 상관없는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지.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게임을 다시 시작할 뻔했다. 왠지 그의 호감도를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고백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았다.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상황이고, 호감도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백담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해인은 그 표정으로 담호의 기분을 파악할 능력이, 이제는 없었다.

“아, 젤리 먹었지.”

양치도 해야겠다. 해인의 볼을 엄지로 살짝 털어 내며 백담호는 희미한 미소만 그리고 있었다. 몇 분 전까지 빠르게 요동치던 심장이 차게 가라앉았다. 어정쩡하게 해인이 백담호의 이끌림에 따라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머리가 찌릿하며 동시에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아, 또다. 머릿속에서 장면이 그려졌다.

어두웠고 조금 공기도 습한 것 같았다. 심장이 빨리 뛰었고 시야는 계속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가게 앞인 것 같은데 낯익은 듯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야.’

방해인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답지 않게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귀자.’

……고백이었다. 시야가 드디어 위로 들려지며 앞에 있는 상대의 얼굴을 보려는 순간.

“해인아? 왜 그래.”

해인의 넋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동공이 풀리고 뭐에 홀린 듯한 얼굴에 담호가 해인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해인이 “…어?” 소리를 흘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아픈 거 아냐? 요즘 자주 이러네.”

“아…. 아, 아니야. 아, 너무 졸린가 봐.”

방금 전 기이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해인은 인위적으로 웃으며 도리질을 쳤다. 백담호는 물끄러미 해인의 안색을 잠시 살피다가 해인이 괜찮다고 네 번이나 말하고 나서야 물러섰지만 그다지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다.

아까 그 장면은 대체 뭐였지?

* * *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도 헷갈릴 정도의 암흑이었다. 해인은 정자세로 누워 눈을 깜박였다. 마치 끝이 없는 빈 공간에 있는 기분이었다.

원작의 방해인도 누군가에게 고백을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얘도 사람이니까 고백은 해 봤겠지. 그 시기가 기억나지 않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백담호였다. 백담호는 침대에 누울 때까지 일말의 속상함, 분노, 짜증,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표하지 않았다. 그저 고백을 하기 전처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눈치를 보는 자신을 보며 나긋하게 “왜 그렇게 눈치를 봐.”라고 장난스레 말할 뿐이었다.

고백이 아니었던 건가? 그저 지나가듯 하는 말장난 중에 하나였던 걸까, 설마 진짜로 한번 찔러 보고 안 되면 마는 그런 의미 없는 말이었던 걸까!

몇 시간 내내 봤던 교재의 내용보다 겨우 두 문장, 그래, 단 두 문장이 해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좋아해.’

‘나랑 연애할까, 해인아.’

말할 때 백담호의 표정이 어땠더라. ‘좋아해’를 듣는 순간부터 이미 사고가 정지해 버려 그의 표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피곤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벌써 그 장면만 몇십 번째 리플레이 된 건지 모르겠다.

대체 왜 고백한 거지? 아니, 왜 연애하자고 해 놓고 대답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넘어간 거야. 온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장본인은 이미 잠에 든 건지 고른 숨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태평할 수가 있지? 해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상태면 내일 시험도 망하게…. 설마?

수만 가지의 생각이 뿌리를 뻗던 중 해인이 머릿속에 불현듯 예전에 유행했던 게시글이 떠올랐다. ‘과대 놈 내일 시험 망치게 고백이나 할까.’이런 글이었던 것 같다.

해인은 도리질을 쳤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산발적으로 튀어나가는 생각 탓에 쓸데없는 상상까지 했다. 해인은 다시 고개를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백담호는 대체 왜 고백을 했던 걸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그의 고백은 흐름상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다만, 내가 백담호와의 현재 관계에 대해 안일해졌기에 예상을 못했던 것이지. 백담호는 역시 나랑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은 거겠지. 그럼 왜 지금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넘겨 버린 걸까. 고백을 하고 안 받아 주면 깔끔하게 포기하려고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경이 쏠려 잠이 오지가 않았다. 백담호의 현재 상태에 대한 작은 사실이라도 보고 싶었다. 해인이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몇 번이나 작게 한숨을 내쉬다 결국 속삭이듯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레비티 시작.”

띠링-.

속삭임과 동시에 익숙한 효과음에 해인은 조금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종료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시작해 버린 건지. 종료할 때는 다시는 이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잠깐만 호감도만 보고 바로 끄는 거야.

[플레이어 방해인 님, 다시 <그레비티 in dating sim> 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운영진은 늘 방해인 님이 찾아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럼 즐거운 플레이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안 반가워…. 속으로 해인이 중얼거렸다. 까만 장막에 시스템창이 떠오르자 해인은 자신이 디지털 세상에 들어간 것 같았다. 옅은 푸른빛 시스템창은 3초 뒤에 사라졌고 해인은 고개를 다시 백담호 쪽으로 돌렸다. 방금까지는 깜깜했던 공간에 반짝 빛을 내며 보이는 게 있었다.

바로.

[호감도 45]

“아.”

정확한 수치로 호감도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불안했던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높은 숫자에 안심이 되었다. 몇 번이고 숫자를 눈에 담다가 아예 몸을 완전히 옆으로 돌려 반짝이는 호감도 표시를 쳐다봤다.

그러다 손을 호감도보다 조금 아래로 뻗으니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을 스쳤다. 곤히 잠든 것 같으니 혹시라도 깰까 싶어 쓰다듬는 손짓은 부드러웠다. 역시, 백담호가 좋다. 그러니 혼자가 되면 불안해하면서도 자꾸만 백담호를 만나는 거겠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낯설다. 이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신이 느끼는 게 정말 호감인지도 헷갈렸다. 백담호를 보고 있으면 설레고 떨리고 옆에 앉아 있고 싶었고, 또 그와 동시에 불안했고 무서워지기도 했다. 자신이 담기에는 복잡한 감정임이 확실했다.

백담호가 고백을 하고 계속 자신의 대답을 기다렸다면 해인은 과연 뭐라고 대답했을까. 아마 백담호가 한 번 더 밀어붙였더라면 자신은 곤란해하면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다 도망갔을지도 모르지•••.

답답하다. 자신도 이렇게밖에 못 하는 게 해인은 답답했다. 백담호가 다가오는 게 좋은 데 막상 불쑥 다가오면 거부감이 일었다. 어쩌면 해인은 지금 백담호와 이 거리감이 좋은 걸지도 몰랐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 관계가, 어떤 것도 정의할 수 없어 그 끝도 모르는, 설령 끝나더라도 어떤 것도 형용된 게 없어서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리화할 수 있는 이 관계가 마음에 드는 걸지도 몰랐다.

이기적이었다. 그래, 정말 이기적이었다. 해인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 백담호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백담호를 무시했던 지난 날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정말 거리를 두려면 내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더라도 넌 오지 말았어야 했어.’

백담호는 하는 말마다 틀린 말이 없었고 늘 정곡을 찔렀다. 단단한 골격과 달리 말랑거리던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떨어졌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멀어지는 게 더 나을까, 라고 은연중 들던 생각은 바로 지워졌다. 멀어지긴 이미 늦었다. 늦어도 단단히 늦었다.

‘그런데 해인아, 이미 늦었어.’

그러고 보니 이것도 백담호가 했던 말이네.

백담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백담호는…. 똑똑해서 그런지 자기감정에 솔직하네. 입 안이 묘하게 떫고 단 게 제 기분 같았다. 해인이 몸을 조금 옆으로 옮겨 이불 속으로 손을 넣고 더듬는데 손끝으로 무언가가 닿았다. 길쭉하고 곧은 것이 백담호의 손이 분명했다.

고민하던 해인은 조심스레 담호의 손에 깍지를 끼고 그가 깨지 않을 정도로 엄지로 살살 손을 쓰다듬었다. 굵고 잘 뻗은 손가락이 읽히는 느낌이 좋았다.

“음.”

해인의 입에서 작게 소리가 울렸다. 어쩌면 이대로 백담호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호는 방해인을 좋아하고 해인도 백담호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만나면 되는 건데 쉽사리 고백에 답할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언젠간 헤어질 날이 올 테니까, 이런 생각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미 좋아져 버린 마음을 이대로 계속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평생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마음이 될지도 몰랐다. 걱정이 많은 자신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니•••. 감정의 주인인 해인마저도 부정해 버리면 조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호, 좋아해.”

해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웃음 서린 음성이 들려왔다.

“알아.”

백담호의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빛나던 숫자가 ‘49’로 올라갔다. 게임 종료 전에 알림을 전부 off로 해 놓았기에 알림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해인이 손을 빼내려 하자 깍지를 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자, 자는 거 아니었어?”

분명 자는 숨소리가 들렸는데. 예상치 못한 백담호의 대답에 해인은 방금 전까지 혼자 백담호를 조몰락거렸던 행동이 떠올라 볼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잠깐 잠들긴 했지. 옆에서 너무 꼬물거려서 깨 버렸지만.”

“아, 아니 그럼 말을 해야지!”

자는 사람 상대로 귀 주물거리고, 손 주물거리고, 심지어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해 버렸다. 듣기만 해도 좀 변태 같은 행각에 해인이 깍지를 풀려 손을 흔들었지만 그럴수록 옥죄여 올 뿐이었다.

백담호…. 깼으면서 왜 가만히 있던 건데. 얼굴에 열이 올라 해인은 남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해인아.”

“어, 어….”

부르는 목소리가 잠겨있어서 그런 지 간드러지게 느껴졌다.

“그냥 그렇게 나 좋아하기만 하면 돼. 알겠지, 어?”

저게 무슨 의미인 것일까. 그냥 그렇게 좋아만 하라니. 지금보다 더 좋아하지 말라는 뜻인지, 계속 좋아하라는 뜻인지 모호한 의미가 담긴 문장에 해인은 백담호의 얼굴을 보려 눈을 조금 찌푸렸다.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고 오직 붙잡은 손의 온기만이 해인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좋아만 하라고?”

“응.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나만 좋아하고, 나하고만 이러라고.”

잡힌 손이 확 끌어당겨지며 해인의 몸이 감싸져 같이 당겨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코끝으로 백담호의 체향이 익숙해지고 나서야 해인은 자신의 모습이 예상 갔다. 백담호는 해인이 얌전히 안긴 채 가만히 있고 나서야 맞잡은 손을 풀어 줬다.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해인은 담호에게 꼼짝없이 안긴 채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몰래 말한 걸 들켰을 때는 백담호가 다시금 고백을 해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좋아한다고 이미 들켜 버렸는데 고백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백담호는 말하지 않았다.

해인은 문득 백담호의 호감도가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기 위해 꼬물거렸지만 되레 더 강하게 억압되고 말았다. 결국 호감도를 보는 걸 포기하고 해인이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그래도 직접 들으니 좋네.”

솔직히 아까 말하고 아차 싶었거든. 혼자만 들릴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해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졌다. 감촉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가슴 쪽이 너무 간지러워 해인은 목울대를 일렁였다. 이러니 백담호를 안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쿵쿵쿵 빠르게 울리는 제 맥박을 느끼며 해인이 눈을 다시 감으려던 때였다.

띠링-.

……이건 불안한 소리였다. 감기던 해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들렸고 반투명한 시스템 창의 일부분이 보였다. 아까 호감도만 살짝 확인하고 종료한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품에 안겨 있던 터라 제일 중요한 부분들이 반투명이었던 것 같은데, 담호의 몸에 가려져 해인은 눈만 굴려야 했다.

제발, 별거 아니길. 차라리 호감도가 오르는 소리였으면 했지만 알림음이 달랐다. 스멀스멀 두려움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플레이어 방해인님. <그레이비티 in dating sim>입니다.]

갑자기 귓가에서 울리는 AI의 음성에 해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방해인 님께서 창을 확인하기 힘든 상황으로 파악되어 음성이 지원됩니다.]

이런 배려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보지 못하면 애써 부정이라도 할 수 있는데 이 게임은 그런 것조차 막아 버린다. 종료했다 다시 켜도 여전히 시스템은 멋대로다. 해인이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해인 님, 드디어 공략 인물 백담호에게 사랑 고백을 하셨군요! 그 마음이 진실이든 꾸며 낸 거짓이든, 공략만 잘 성공하시면 되는 거죠. 공략 인물의 특성에 잘 맞추어 하신 선택입니다. 아주 탁월해요! 전부터 느꼈지만 방해인 님은 플레이에 탁월한 재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가끔 성급하게 선택만 하지 않으시면요. 성급함으로 또 일을 그르치면 안 되겠죠? 농담~]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들으면 들을수록 속이 울컥거리는 말이었다. 공략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읽는 게 낫지 들으니까 더 비꼬는 것 같아서 해인은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그리고 성급함은 대체 무슨 성급함? 심지어 이딴 게임에 재능 있다는 말을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이 기세를 이어 쭉쭉 호감도 100을 찍어 공략 인물 백담호를 공략해 보세요! 과연 공략된 백담호는 어떻게 변할까요? 역시나 방해인 님의 막힘없는 플레이에 저는 심장이 두근두근 떨립니다. 어떤 루트가 열릴지 기대되거든요! 제 심장을 떨리게 한 방해인 님, 당신께 좋은 기회를 드립니다. 바로, 공략 인물 백담호의 두 번째 필수 퀘스트! 난이도는 별 다섯 개!]

두 번째 필수 퀘스트도 모자라 난이도 별 다섯 개라는 말까지 들은 해인의 입에서는 절로 욕설이 나왔다. 말하는 것도 빡치는데 난이도도 그동안 나왔던 것 중 제일 어려운 필수 퀘스트까지 생기고 말았다. 게임을 아까 종료했어야 했는데 이걸 놓친 자신의 미련한 행동에 해인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백담호에게 ‘좋아해’라고 말하기 25번, 백담호에게 ‘좋아해’ 듣기 10번, 백담호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기 1번, 백담호에게 ‘사랑해’ 듣기 1번을 달성해 주시면 됩니다. 벌써 이미 한 번 성공하셨으니 그다음은 껌이겠죠? 호감도도 오르고 퀘스트도 달성하면 보상도 받고! 이번 필수 퀘스트로 받으신 ‘방해인의 기억’에 무척 만족하셨죠? 이번 퀘스트 보상도 만만치 않으니 부디 빠른 성공을 기원합니다. 그럼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아, 좆같은 게임. 머리가 띵 울렸다.

* * *

실험 시험을 무사히 끝내고 나오자, 자신을 기다리는 백담호가 보였다. 복도 벽에 기대어 있던 백담호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시험은 잘 봤냐는 얘기와 함께 어느새 캠퍼스를 같이 걷고 있었다.

“백담호.”

“응?”

“너…….”

길을 걷던 해인의 눈이 캠퍼스에 산책 나온 강아지에게 닿았다가 빠르게 백담호를 쳐다봤다.

“강아지 좋아해?”

“싫어하지는 않아.”

“…그래?”

“그런데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백담호는 이건 또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침부터 벌써 해인은 벌써 백담호에게 10가지도 넘는 질문을 해야만 했다. 그 결과 해인이 얻은 건.

백담호는 무채색 계열을 좋아하고, 고양이를 좋아하고, 음식은 딱히 가리는 건 없지만 매운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 계절은 겨울을 좋아하고, 동생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고, 게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책 보는 건 꽤 좋아한다는 거였다. 이것 말고도 몇 개 더 있었지만 이제 머리에 과부화가 올 것 같았다.

“내 취향 조사라도 해?”

차라리 취향 조사면 좋았을 걸. 해인이 지금 이러는 이유는 단순했다. 갑자기 생긴 두 번째 필수 퀘스트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첫 번째 퀘스트를 해결했는데 예고 없이 주어진 두 번째 퀘스트는 난이도가 확 올라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꺼 버리고 싶지만 역시나 필수 퀘스트, 종료하려니까 경고 문구가 떴다.

달성해야 하는 것도 많아 해인은 결국 가장 쉬워 보이는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자신이 ‘좋아해’라고 말하는 것과 백담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것. 그나마 이 두 개가 만만해 보여 해인은 아침부터 백담호가 좋아하는 걸 묻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좋아해’라는 말을 들으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 주체가 자신이어야 한다는 설명은 없었다는 허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백담호의 대답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아 해인은 반 해탈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해인이 원한 건, ‘고양이 좋아해?’, ‘좋아해.’ 이거였지만 현실은 ‘고양이 좋아해?’, ‘응, 그렇긴 하지.’ 이런 식이었다. 이정도면 고의로 이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

해인이 자신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있자 백담호는 그의 목덜미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빤히 쳐다봤다. 짐짓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는 백담호에 해인은 결국 일단은 퀘스트 달성은 조금 미뤄 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더 좋을 성싶었다.

“아니야,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었어.”

“뭔 생각?”

“별일 아니야.”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갈까.”

“벌써?”

“이른 저녁이라고 하면 되지.”

이른 저녁…? 해인이 아직 해가 쨍쨍한 하늘을 보다 제 휴대폰 화면을 켰다. 아직 오후 4시도 되지 않은 시각에 해인이 제대로 말한 거 맞냐는 듯이 백담호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나긋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말이 안 통할 표정임을 깨달은 해인은 납득하기로 했다.

“…그래, 이른 저녁이라고 하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느새 캠퍼스 중간쯤에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제 직진을 하면 정문이었고 왼쪽으로 가면 쪽문이었다. 정문 쪽과 쪽문 쪽에 있는 식당은 서로 종류가 상반되었기에 결정을 하고 가는 편이 좋았다. 해인은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밥은 맛있는 걸 먹어야 했다.

아침은 늦잠 자는 바람에 급하게 나오느라 못 먹었고, 점심은 간단하게 백담호와 교내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해인은 문득 근래에 안 먹었던 음식이 떠올랐다.

“피자?”

백담호의 얼굴이 묘연한 빛을 잠시 띠었지만 빠르게 사라져 해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 * *

시험 기간은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랐다. 시험 기간이라 정신이 없었던 건지 근래 백담호랑 항상 같이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오늘 보는 교양 시험과 다음 주 화요일의 마지막 실험 시험만 보면 끝이 났다.

잠깐 갔다 올 데가 있다며 백담호는 자기 자리를 대충 아무 곳에 잡아 달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해인은 혼자서 주거와 문화 시험을 보기 위해 경상대 입구에 들어섰다.

이 교수 시험 문제 진짜 별로라던데. 마음을 미리 놓고 있는 게 나으려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해인 선배!”

조금 멀리서 외치는 듯한 밝은 목소리.

버튼을 누르려던 해인의 손이 멈칫했다. 해인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해빛이었다.

어색하게 고개가 돌아갔다. 밝은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며 해빛은 해인에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찌나 표정이 밝은지 해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오랜만이네요.”

엘리베이터 버튼 위에서 멈칫한 해인의 손 대신 해빛이 눈웃음을 지으며 버튼을 눌렀다.

“어어, 그런 것 같네.”

저번 주 금요일에 갑자기 교수가 수업을 펑크 내는 바람에 보지 못했으니 거의 2주 만이었다. 기분이 좋은지 작게 흥얼거리던 해빛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잽싸게 올라탔다. 해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금방 비좁아졌다.

밀집한 좁은 공간 탓에 해인과 서해빛의 팔이 빈틈도 없이 맞닿는 바람에 해인이 조금 옆으로 물러나려할 때였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서해빛, 왜 혼자 가. 같이 가.’

익숙한 풍경은 문과대 근처였다. 서해빛이 무표정으로 뒤를 흘긋 보고는 걸음을 멈추자 방해인이 조금 빠르게 걸어가 옆에 붙었다.

이건…. 21살의 기억이었다. 방해인은 2학년, 서해빛은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방해인 선배, 친구 없어요?’

성 붙여서 부르지 말라니까…. 일부러 순수하게 꾸며 낸 목소리에 속이 울컥거리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없어, 시발.’

‘…그럴 거 같아요. 근데 저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이러셔도 소용없어요.’

‘닥쳐. 알고 있으니까.’

서해빛은 정말 입을 다물었고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드디어 서해빛과 방해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해인은 기분이 이상했다. 눈을 몇 번 찌푸린 해인은 슬쩍 해빛을 쳐다보니 그는 순하게 웃음을 머금고 앞을 보고 있었다. 기억 속의 서해빛은 지금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잘 웃는 줄 알았는데 무표정일 때도 있었네.

그리고 보기보다 사람 멕이는 말도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떠오른 걸 보면 분명 방해인의 기억인데 자신이 알고 있는 해빛과 너무 괴리감이 컸다. 왜 방해인과 서해빛의 사이가 묘하게 서로를 편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

해인이 방해인의 기억을 떠올릴 때 그 당시의 방해인의 감정도 어느 정도 공유가 되었다. 기이한 느낌에 해인이 다시 해빛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눈이 마주쳤다. 옅은 눈이 더욱 포근하게 휘었고 해인은 어쩐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험은 잘 보셨어요?”

해빛이 속삭여 물었다. 콩콩콩, 이상하리만치 갑자기 빨리 뛰는 심장에 해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숨을 억눌렀다. 방금 방해인의 기억 때문인가. 마치 백담호와 함께 있을 때와 비슷한 기분 같아 해인은 애써 무시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뭐, 그냥 저냥 봤어. 너는?”

“저도 평소 보던 대로 본 것 같아요.”

잘 봤다는 소리다. 서해빛도 머리가 좋은 편이었으니까. 해인은 이번에 한 중상위, 잘하면 상위권 정도로 보지 않을까 그런 예상이 들었다. 주문(주거와 문화) 시험도 반이라도 맞으면 좋겠다.

2층에서 문이 한번 열리면서 몇몇 사람들이 빠져나가 엘리베이터 안은 약간 널찍해졌지만, 해빛은 여전히 해인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거 같아 해인이 반대쪽을 쳐다봤지만 이미 해인은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있어 더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얼굴을 돌려 해빛을 보니 그는 눈이 마주치자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옆으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잔상이 남은 방해인의 기억 탓인지 이상한 감정이 들어 이 비좁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 숫자만 바라봤다.

“벌써 오늘이네요.”

옆에서 들려오는 해빛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다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눈길에 바로 시선을 피했다. 우연히 마주친 건 줄 알았는데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은 계속 느껴졌다. 힐끔거리며 다시 쳐다보니 또 눈이 마주쳤고 이번에는 그 사람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아는 얼굴인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의아함에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해인은 제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혹시 뭐라도 묻었나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고 옆에 있던 해빛이 “왜 그래요?”라고 물어 와 고개를 저으니 해빛은 옅게 웃으며 말을 다시 이었다.

“그보다 제가 연락하려고 했는데 바빠서 못 했네요. 시간하고 장소도 미리 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뭔…? 아.”

어우, 맞다. 오늘이었지. 백담호와 매일 같이 있는 바람에 잊고 지내고 있던 약속이 이제야 떠올랐다. 하지만 저번에도 잊은 전적이 있었기에 해인은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지었다.

“응, 어디로 갈까.”

“그냥 학교 근처로 가요. 얼마 전에 새로 개업한 곳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개업 서비스도 준다고 하던데.”

어차피 저녁도 같이 먹어야 할 테니까. 어때요?

해인은 친구가 없다. 그러니 학교 근처 술집을 가 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해 어딜 가든 상관없었다. 해인은 그저 해빛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말이 뚝, 끊겼고 해인은 다시 엘리베이터 숫자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해빛과의 침묵이 조금 많이 어색했다. 아니, 솔직히 오랜만에 봐서 그런 게 아니라 서해빛과 있으면 백담호 생각이 나서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중첩되는 여러 감정들과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마주하게 될 때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웠다. 결국 불편한 침묵을 참지 못한 해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 몇 시에 만나?”

“저 알바 때문에 한 7시 되어야 가능할 거 같아요. 괜찮아요?”

“아, 엉. 당연하지.”

시험이 끝나면 넉넉잡아 2시 반쯤 될 것 같았다. 7시까지 시간이 꽤 많이 남는데 그때까지 뭘 하지.

순간 백담호의 집에 가서 노닥거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은 것과 동시에 바뀌는 엘리베이터의 숫자에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원치 않아도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낯부끄러운 기억은 현재 있는 장소와도 비슷해 민망함이 배가 되었다.

얼굴에 열이 몰리기 시작할 즈음,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백담호네 가면 약속이고 뭐고 못 빠져나올 거 같았다.

안쪽에 타고 있던 해빛과 해인은 앞의 사람들이 빠지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선배.”

“응?”

“7시 전까지 할 거 있으세요?”

마침 해인이 생각하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콕 집어 말하는 해빛에 해인은 내심 감탄하며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해빛이 살짝 화색을 띠며 해인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럼 저 알바하는 카페에 와 계세요. 요거트 스무디 만들어 드릴게요.”

주변에 사람이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데 굳이 귓속말로 해야 하나 싶은 말에 해인이 조금 얼굴을 떨어트렸다. 여전히 기분이 묘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돼?”

“네, 오세요. 그럼 끝나는 대로 바로 갈 수도 있고 좋잖아요.”

사실은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듣다 보니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해빛과는 오늘은 계속 마주쳐야 했다.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해인은 잠시 고민을 했다.

백담호도 데리고 가야 할까•••. 조금 더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해인이 서해빛을 흘긋 쳐다보니 눈에 간절하게 빛을 띠고 있었다. 고민이 되었지만 이미 셋이 약속이 잡혀 뭐가 되었든 셋이서 마주쳐야 했다. 오늘 이후로 안 마주치면 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해인의 확답에 해빛은 눈에 띠게 밝아진 기색을 보이며 기껏 멀어진 해인의 옆으로 슬쩍 더 어깨를 붙여 왔다. 원래 해빛이 이렇게 치댔나. 순간 해인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원래 그랬던 거 같기도 했다.

어느새 강의실 앞까지 도착한 해인은 먼저 들어가라고 해빛의 등을 살짝 밀고 그를 뒤따랐다. 강의실 문이 둘이 동시에 들어가기에는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백담호한테도 말해서 같이 갈게, 괜찮….”

들어가던 해빛이 갑자기 멈칫거리는 바람에 해인도 덩달아 멈추고 말았다. 왜 그러나 싶어 해인이 물으려는 순간 해빛이 먼저 선수를 쳤다.

“네, 당연하죠. 같이 오세요.”

아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에 해인은 떨떠름하게 “으응.”이라고 대답하며 발밑을 살폈다. 혹시 뭐라도 걸렸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릴 만한 건 그 어떤 것도 없어 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앞을 쳐다봤다. 시험 시작 20분 전인 강의실에는 사람이 약간 있는 편이었다.

해인은 자리를 대충 훑어보고 뒷자리로 향해 걸어갔다. 아마 자신 근처에는 아무도 앉지 않을 게 분명하니 백담호가 앉을 자리도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시험 잘 봐.”

해빛은 적당히 앞쪽에 앉겠거니 싶어 해인이 해빛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그를 지나쳤지만 그건 해인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해빛은 해인과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 해인이 앉으려는 자리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당황한 해인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바로 앞에 앉은 해빛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하필 해인이 앉은 곳이 뒤쪽의 마지막 빈자리라 근처에 더 이상 빈자리는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해인이 앉지도 못하고 멀뚱히 서 있자 시선이 해인에게 쏠리고 말았다. 결국 얼떨떨하게 해인이 착석하자 해빛이 뒤를 획 돌아봤다.

“형도 시험 잘 봐요.”

“어…. 어.”

웃는 얼굴로 초코 과자까지 해인의 책상 위에 올린 해빛은 금방 앞을 쳐다보는 바람에 “고마워.”라고 말하던 해인의 말끝이 흐릿해졌다. 언뜻 보인 해빛의 책상에 프린터 된 종이가 잔뜩 있었다. 해빛을 가는 길에 만날 줄도 몰랐지만 그가 자신의 앞에 앉을 줄도 몰랐기에 해인은 눈을 다시 빠르게 굴려야 했다.

이렇게 되니 백담호의 자리가 사라져 버렸다. 주변을 살폈지만 이미 근처에 빈자리는 없었고 그나마 뒤쪽에 한 자리 남은 곳을 발견하고 해인이 자신의 가방이라도 올려 두려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해인의 어깨 위로 손이 스르륵 얹혀졌다. 깜짝 놀란 해인이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백담호였다.

“뭐야, 자리 잡아 달라니까.”

“아…….”

타이밍이 이미 늦어 버렸다. 민망해진 해인이 얼굴을 들어 올리며 어색하게 “그게….”라고 운을 떼었지만 백담호의 시선이 해인을 지나 다른 곳을 향했다. 그 끝에는 언제 돌아보고 있던 건지 백담호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해빛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 백담호가 나직하게 뱉었다.

“어, 안녕.”

여전히 해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백담호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서해빛은 미소를 지으며 백담호와 눈을 맞추었고 백담호 역시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의 묘연한 분위기에 괜히 해인이 눈만 깜빡이며 동공만 움직여 눈치를 보다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까에 비해 강의실에 자리는 많이 차 있었고 그 많은 군중들의 눈이 모두 백담호와 서해빛을 향해 있었다. 백담호와 서해빛이 워낙 눈에 띄는 생김새라 더욱 노골적인 시선들에 해인은 슬쩍 어깨에 올려진 백담호의 손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담호야, 뒷자리 다 뺏기겠다. 얼른 가 봐.”

띠링-.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 ‘50’을 달성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보상, 숨겨져 있던 세부적 수치가 나타납니다.

알림창이 사라지고 곧바로 다른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백담호

나이: 22

키: 190cm

특이 사항

- 알파

- 희귀 공략 인물

호감도(50)

- 호감: 26

- 집착:18

- 혐오: 0

- 사랑:10

- 짜증:-1

- 미움:-3

(주의, 각 수치 밸런스를 잘 맞춰주시길 바랍니다. 한쪽 수치가 지나치게 높을 경우 공략 인물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알림, 세부 수치의 종류는 추가될 수도 있고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어와의 관계

자주 곁에 두고 싶은 존재입니다. 왠지 족쇄가 생각나는 사람이네요.

떠오른 백담호의 정보창에 해인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몇 단어에 해인이 결국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응, 시험 잘 봐. 해인아.”

어깨에 얹혀 있던 손은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고 나서야 뭉그적거리다 떨어졌다. 옷 위로 여전히 백담호의 잔열이 남아 해인은 따뜻한 어깨를 괜히 매만졌다. 뒤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하나의 시선만이 남았다. 허공에 있는 정보창 너머로 해빛이 아직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어쩐지 묘한 표정의 해빛에 해인이 갸웃거리자 해빛은 눈을 살짝 휘어 보이고는 금세 몸을 돌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강의실 안은 조용해졌다. 해인은 드디어 불투명한 정보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호감, 집착, 혐오, 사랑, 짜증, 미움…. 이렇게 세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구나. 그간 단순히 기분이 좋으면 오르는 거라 생각했기에 내심 놀라웠다.

항상 맨 밑에 ‘현재까지 열람할 수 있는 정보입니다.’가 사라진 걸로 보아 더 이상 무언가 더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 더 주욱 정보를 읽은 해인의 시선이 집착에 잠시 머물렀다가 미움에서 내려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는 마이너스 표시에 기분이 묘했다.

백담호는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자신이 미운 걸까, 다른 수에 비해 높은 건 아니었지만 미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경이 쓰였다. 원래 99개의 칭찬보다 1개의 비난이 더 눈에 들어오는 법이었다. 이렇게 보니 백담호의 초기 호감도는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알 것 같았다.

혐오에 아마 상당한 숫자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정보창을 쉽사리 닫지 못하고 계속 보던 중 강의실 앞 쪽 문이 열리며 교수가 들어오는 바람에 해인은 그제야 자신이 시험을 봐야 한다는 걸 자각했다. 칠판 선반에 놓인 시계를 살피니 벌써 시험 5분 전이었다.

정보창을 뒤늦게 닫고 해인은 내용을 정리한 노트를 다급하게 훑었지만 얼마가 지나지 않아 앞에서 단호한 박수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자, 이제 모두 보던 거 치우고 핸드폰 무음으로 하고 가방에 넣으세요. 부정행위 적발 시 무조건 F 처리입니다. 시험 시간은 3시까지고 문제는 전부 서술형입니다. 퇴실은 1시 30분부터 가능합니다. 출석은 전자 출결로 하고 출석 안 된 학생만 부를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보창에 해인은 결국 정리해 놓은 노트를 반도 보지 못했다. 낙담스런 탄식을 흘리며 노트와 핸드폰을 모두 가방에 넣고 옆자리에 올려 두니 그세 답안지가 넘어오고 있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물씬 느껴졌다.

* * *

“…조졌다.”

허망하게 중얼거린 해인이 넋을 놓으며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해인의 입은 벌려져 있었다. 메신저 백 앞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 화면을 켜니 1시 34분이었다. 제출하러 가는 해인의 답안지는 반 백지였다. 머리가 복잡한 탓도 있었지만 비단 그것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험 난이도가 교양임에 비해 심하게 어려웠다. 문제를 보는 순간 해인은 난생처음으로 교수님이 양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제는 총 20문제였는데 정말 전부 서술형이었다. 단답형도 아니고 전부 서술형! 이걸 과연 2시간 안에 다 적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고 그건 비단 해인만의 생각이 아님을 시험 시작 2분 만에 알게 되었다.

교수도 자기가 낸 문제가 주어진 시간에 비해 많다는 건 아는 건지 “어…. 지금 학생들이 아마 문제가 너무 많다고 생각할 거 같은데….”라고 운을 뗐고 아래로 수그려져 있던 모든 학생의 시선이 단상으로 향했다. 시간을 늘려 주겠다든지, 아님 뒤에 몇 문제는 보너스 문제라든지, 그런 내용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교수의 말은 얼척이 없었다.

“어차피 여러분 다 풀지 말라고 낸 문제입니다. 그러니 시간 배분 잘해서 한 문제 한 문제 잘 풀어 보세요. 그러니 시험 문제 분량으로 질문하는 학생은 감점 처리하겠습니다. 다른 질문은 마음껏 하세요.”

그때부터였다. 해인이 교수의 인성과 양심에 대해 의심을 했던 것은.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른쪽에서 나직하게 “저 시발….”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 강의실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속으로 저 말을 외쳤을 것이다. 해인도 그랬으니까.

집중은 자꾸 다른 곳으로 새려고 하지, 문제는 많고 서술형이지, 게다가 문제 난이도도 어려워 해인은 자신이 이걸 언제 배웠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전공도 아니고, 이번 학기에 신청한 교양 과목이니 방해인의 기억에도 연관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오로지 해인이 공부한 것들로만 풀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결과 해인의 답안지에는 뒷면은 쓰지도 않았고 앞면의 여백은 반이 조금 덜 되었다.

왜 그리 강의평이 개 같았는지 해인은 이제야 그 의미를 알았다. 다른 것도 별로였지만 시험이… 이 모양이었구나. 게다가 애초에 다 풀지 못하게 낸 교수의 인성에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백담호가 나오면 얼마나 욕을 할까 눈앞에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교양은 망했구나. 해인은 강의실 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으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학생들을 보다가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갔다. 백담호는 한참 뒤에나 나올 것 같으니 3층에 있는 휴게실에 가기 위함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 3층 휴게실에 있을게.’라는 문자를 담호와 해빛에게 남겼다.

휴게실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그래도 자주 사용은 되었는지 창문이 열려 있었고 의자 여러 개와 책상 몇 개가 질서 없게 흐트러져 있었다. 해인은 그중 가장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폰을 만지작거렸다. 할 것도 없어 모튜브를 잠깐 보다 근래에 잘 안 하던 모바일 게임이 이벤트를 한다는 알림이 떠올라 오랜만에 들어가 봤다.

출석 이벤트도 진행 중이었는지 금요일 출석 보상을 받고 한때 미친 듯이 꾸몄던 성들과 뽈뽈뽈 돌아다니는 과자 캐릭터들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잘 꾸몄네. 한참을 그렇게 게임을 하던 중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강의가 끝났나, 한가로운 생각을 하며 가챠를 돌렸다. 벌써 시험에 대한 충격과 백담호의 정보창에 대한 것은 옅어진 지 오래였다.

그다지 좋지 못한 것들만 계속 뽑혀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운이 없나. 시험도 말아먹고 뽑기도 말아먹네. 결국 있던 다이아를 반을 날리고 나서야 해인은 신경질적으로 게임을 종료시켰다. 폰 화면을 끄고 멍하니 창밖을 보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해인이 고개를 돌렸다.

“어…….”

휴게실 안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정운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방금까지 신나게 웃고 있던 황정운은 해인을 보는 순간 입매가 천천히 내려갔고 그건 해인도 다를 바가 없었다. 황정운처럼 확 티가 나는 표정 변화는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얼굴이 굳었다.

“오랜만이다. 시험 잘 봤냐.”

누가 봐도 반가운 말투는 아니었다. 시비조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해인은 모르는 척 애매하게 웃었다.

“아니, 망했지. 뭐.”

“아…. 그러냐.”

황정운은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해인의 근처로 다가오며 썩 좋지 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정운의 무리 중 한 명은 괜히 해인과 황정운의 눈치만 보고 있었고 다른 녀석들은 해인과 조금 멀찍하게 떨어져 앉았다. 그중 한 명이 해인에게 손을 흔들어 해인은 고개를 까딱였다.

누구지.

분위기를 살핀 해인은 자신이 나가야 별 탈이 없을 거란 걸 빠르게 눈치챘다. 해인이 바닥에 놓아 둔 가방을 들어 올리려 숙이는 순간, 황정운이 옆에 털썩 앉았다.

“여기서 혼자 뭐 하냐. 누구 기다려?”

들리는 물음에도 해인은 마저 가방을 주워 올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응. 근데 이제 나가려고.”

“왜, 있어도 돼. 왜 나가고 그래, 사람 무안하게 말이야.”

듣기에도 비꼬는 말투에 해인은 은은한 미소만 띤 채 고개를 저었지만 황정운은 그런 해인의 손목을 붙잡고는 그대로 다시 앉혔다. 갑작스러운 당김에 해인이 맥없이 의자에 앉혀졌고 이내 해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 하는 짓이야.”

해인의 표정이 조금 서늘해지자 황정운의 목울대가 조금 일렁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기분이 많이 나빠진 해인이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황정운이 다급하게 해인을 또 붙잡았다. 이제는 완전히 얼굴이 찡그려진 해인이 황정운을 노려보자 그는 의외로 사뭇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야.”

어딘가 묘한 표정에 해인이 뚝뚝하게 “뭐.”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황정운은 입을 안으로 말아 넣고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곤란한 낯으로 물었다.

“내 이름 뺄 거냐.”

“……어?”

“아, 내 이름 빼지 마라…. 시발. 다음 활동 땐 내가 네 몫까지 다 할게. 이번만 넘어가 줘라. 시발, 진짜…. 입원한 건 맞거든? 아, 근데 시발, 노트북을 가져갈 생각을 못 했다. 이건 진짜인데…. 하…. 미안.”

해인은 턱, 하고 맥이 풀렸고 “병신 새끼.”라고 중얼거리는 정운의 친구 목소리가 나직하게 공간에 울렸다. 지금 이게 무슨…? 해인이 미친놈 보듯 황정운을 내려다봤다. 황정운은 들어올 때와 달리 해인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진짜 미안해하는 거 같기도 했다. 시비조인 말투는 원래 그런 것 같았고. 갑작스러운 태세 변화에 해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더욱 싸한 분위기에 결국 앉아 있던 정운의 친구가 한심하다는 듯이 뱉었다.

“그러니까 황정운, 넌 말 좀 똑바로 해. 맨날 대충 대충 넘기니까 이러는 거 아냐.”

“넌 뭔데 끼어들어. 개새끼야.”

“저거 또 급발진 하네.”

갑자기 자신을 붙잡고 둘이 싸우는 불편한 상황에 해인이 얼굴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그러자 친구와 싸우면서도 해인의 눈치를 보던 정운이 안쓰러워 보이게 눈썹을 추욱 늘어트리고는 물었다.

“내가 발표라도 할까…?”

“쟤 발표 시키면 너네 점수 개박살 나.”

정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그 친구가 말을 덧붙였고 정운은 그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휴게실에 있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었다. 그냥 빨리 벗어나고 싶어진 해인은 애써 괜찮다는 듯 웃으며 정운의 손을 떨어뜨리려 애썼지만 새끼가 힘을 얼마나 준 건지 떨어지지가 않았다.

“됐어, 어차피 이름 뺄 생각도 없었어.”

“정말로…?”

“응, 정말. 그런데 다음에도 또 이러면 그땐 빼자고 할 거야. 그리고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손목 좀 놔.”

별말 없이 넘어가고 싶었는데 자꾸만 정운은 해인의 성질을 건드려 하지 않을 말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제 얼른 자신을 보내 주라는 뜻으로 눈썹을 팍 찡그리자 그제야 정운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해인의 하얀 손목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해인은 이제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짜증 서린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나가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황정운이 일어서더니 해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엔 또 뭔 짓인가 싶어 노려보니 황정운이 덥석 해인을 끌어안았다.

“아니, 미친, 갑자기 뭐-.”

“…방해인, 넌 진짜 좋은 녀석이야. 저번부터 알아봤다고.”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감동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해인은 생각하지도 않은,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정운과의 포옹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몸을 버둥거렸지만 정운은 놓아주지 않았다. 혼자서 우정이라도 다지는 감동적인 장면을 찍는 건지, 연신 넌 존나 착한 녀석, 밥을 사겠다는 둥 지껄였다.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해인이 자신을 끌어안은 정운을 밀어내던 참이었다.

“•••시발, 이게 뭔 짓이야.”

“억.”

황정운의 몸이 종잇장처럼 떨어졌고 그 뒤에는 살벌하게 눈을 뜨고 있는 백담호가 있었다. 아, 미친.

“왜 둘이 끌어안고 있었을까•••. 어?”

백담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살기가 가득한 눈에 해인은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당장 이게 무슨 좆같은 상황인지 설명하라는 강렬한 시선이 계속 해인을 찔렀다.

백담호가 오기 전에도 좋지 않았던 분위기가 이제는 완전히 서늘해졌고 당황한 해인은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목덜미가 잡힌 황정운 역시도 백담호의 기세에 눌린 건지 덩달아 같이 놀란 표정으로 백담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뭔 일이 날 것같이 아슬아슬해진 분위기에 해인은 더 악화라도 될까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얘기 좀 하다가•••.”

“얘기? 뭔 얘기.”

“어, 어•••. 아니, 일단 황정운 좀 놓고 얘기하자.”

백담호에게 잡힌 정운이 계속 이상한 눈으로 해인을 바라보는 탓에 신경이 쓰였다. 백담호는 말없이 해인을 보다 미세하게 한쪽 눈썹을 움찔거리고는 황정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이제 말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해인이 짧게 상황을 이야기를 겨우 하자 백담호는 표정이 한결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은 눈빛에 해인이 자신도 억울하다는 듯이 울상을 짓자 백담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해인아, 일단 나가자.”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에 해인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떡거리며 한걸음 내딛을 때였다.

“그런데.”

옆에서 해인과 담호의 대화를 듣고 연신 이상한 표정을 짓던 황정운이 입을 열었다.

“너네•••. 진짜 사귀냐•••?”

“네?”

정운의 말에 제일 먼저 대답한 건 해인도, 담호도 아니었다. 서해빛이었다. 대답한 해빛은 얼굴을 약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오늘은 무척이나 길고 힘든 하루가 될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해인을 가운데에 두고 해빛과 담호, 이렇게 3명이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미묘하게 해빛이 더 앞쪽에 있긴 했지만. 셋은 조용했고 해인은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 두 사람 다 거지 같은 타이밍에 나타난 건지 이정도면 누군가가 노린 게 아닐 까 싶을 정도였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얼굴을 살짝 찌푸린 해빛에 해인은 황정운의 물음에 “뭔 소리야, 아니야.”라고 대꾸하며 다급하게 담호와 해빛을 끌다시피 휴게실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얼떨결에 셋이 걷고 있었다.

해빛은 아까부터 묘하게 조용했고 백담호에게는 해빛의 카페에 갈 거냐고 묻지도 못했는데 그는 딱히 지금 어디 가냐고 물어 오지 않았다. 단지 가끔 해인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해인은 그럴 때마다 백담호의 호감도를 살폈지만 다행히 숫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침묵만이 흐르며 걷다 보니 해빛이 알바하는 카페에 도착했다.

“저 문 좀 열게요.”

드디어 처음 말을 꺼낸 해빛의 말에 해인은 조금 뒤로 물러섰고 담호 역시도 해인을 따라 뒤로 물러섰다.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참지 못한 해인이 담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빡쳤어•••?”

담호는 고개를 조금 수그려 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다시 앞을 쳐다봤다.

“•••빡치지는 않았고.”

그냥 해인이가 너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해서, 좀 슬프네.

얼굴도, 말투도 덤덤했지만 그래서 더 해인은 미안함이 느껴졌다. 어쩐지 다른 때보다 더 속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않은 호감도에 해인은 목 안이 간지러웠다.

해인이 살포시 백담호의 옷깃을 잡고 “미안•••.”이라고 중얼거리자 백담호의 머리 위의 숫자가 ‘51’로 올라갔다. 올라가 버린 호감도에 해인의 온몸에서 맥박이 강하게 뛰는 것만 같았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렸고 백담호를 보던 해인의 시선이 저절로 앞을 향했다. 카페의 문을 활짝 열고 그 안에서 묘한 낯으로 자신을 보던 해빛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질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야.’

이 장면,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전에 떠올리다 끊긴 방해인의 고백 장면이었다. 장소가 익숙하다 했더니 바로 이 카페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기분이 싸해졌다.

‘사귀자.’

백담호가 말을 걸어와 보지 못했던 상대의 얼굴이 이제야 보였다.

서해빛이었다.

전신에 흐르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에 해인은 해빛의 옅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정확히는 의문스러운 기억을 되풀이하느라 쳐다본 것이었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명료해질 뿐이었다.

해인의 표정은 몇 번이고 일그러졌다 펴지길 반복했고 당연히 해빛은 그런 해인을 기이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선배?”

해빛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부르길 몇 초 후 뒤늦게야 해인은 시선을 돌리고 “…어.”라고 대답했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음성에 옆에 있던 백담호의 시선도 해인을 향했다.

“왜 그래, 해인아.”

담호가 해인의 어깨를 붙잡자 몸은 맥없이 돌려졌다. 누가 봐도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백담호는 상체를 숙여 해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안색이 희게 질린 채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어느새 카페 안에 서 있던 해빛까지 결국 해인에게 다가왔다.

“어디… 안 좋아요?”

“아, 아니야. 갑자기 뭐가 좀 생각나서.”

정신이 돌아온 건지 해인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도리질을 했다. 그러나 이미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에는 자못 시간이 흘러 버렸다. 자신을 향하는 걱정스러운 두 시선은 쉽사리 거두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요즘 자주 넋이 자주 나가네, 무슨 일-.”

“아무 일 없어, 괜찮아. 일단 들어가자.”

해인이 제 어깨를 잡은 담호의 손을 떨어트리고 카페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걱정 말라는 듯 해빛의 어깨까지 툭툭 친 해인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뭐 해, 들어와. 조금 덥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해인은 뒤를 돌았다. 심각했던 얼굴은 어느새 평소와 같았지만 말투에선 단호함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묻지 말라고 경고하듯 약간 날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해인의 말투에 백담호는 은연중에 예전의 방해인을 떠올렸다. 성질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결국, 백담호는 별 다른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담호의 표정이 석연치 않아 보였지만 해인은 못 본 척 그저 백담호가 따라 들어오자 몸을 돌릴 뿐이었다. 이제 혼자 밖에 남은 서해빛은 움직이지 않은 채 해인을 주시했다. 오묘한 빛을 띠던 표정은 해인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갈무리 되었다.

“선배, 더우세요? 에어컨 틀까요?”

늘 다정하고 밝게 물으며 해빛도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금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카페의 문이 닫혔다. 해인은 카운터와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아 허공만 보고 있었다. 해인의 손가락이 탁탁탁, 테이블 위를 잘게 두드렸다. 맞은편에 앉은 백담호는 폰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 연신 해인의 얼굴만 흘긋 쳐다보는 중이었다.

빈 테이블 위만 보던 해인의 시선에 해빛이 들어왔다. 시선은 자연스레 움직이는 해빛을 좇기 시작했다. 해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해빛에게 다가가 예전의 방해인이 너한테 고백했었냐고, 둘이 대체 무슨 사이였냐고 묻고 싶었다. 기억 속에서 둘이 사이가 묘하게 편해 보였을 때부터 의심을 해야 했다.

방해인의 고백 상대가 절대로 서해빛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애초에 그를 떠올리지도 못한 자신이 약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애당초 방해인이 서해빛에게 고백을 했을 거란 예상이 가능할 리 없었다. 예상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 정말로 없었던가.

머릿속에 그동안 서해빛과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방해인이 되고 처음 해빛을 마주쳤을 때 그의 표정이 어땠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서해빛이 자신을 꺼려 한다는 당시의 느낌이 떠올랐다. 그 탓에 해인도 빙의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해빛에게 다가가지 않았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가갔었다.

그러고 보니 해빛의 카페에 처음 갔을 때 그는 자신을 보고 ‘선배가 다시 여기 오실 줄은 몰랐어요.’라고 했다. 당시 공략 인물 등록에 정신이 팔려서 그저 방해인이 전에 왔었나 보네, 하고 넘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도 아닌 오실 줄 몰랐다는 말은 오기에 껄끄러운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 전 선배랑 이러고 있는 게 가끔 신기해요….

- 선배 번호 바뀌셨더라고요, 번호 좀 다시 찍어 주세요.

가끔씩 의문스럽게 느껴졌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드디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방해인은, 서해빛에게 고백을 했고 아마도 서해빛은… 그 고백을 거절했다. 고백 직후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해인은 확신했다. 그동안 떠오른 다른 기억들과 달리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기억에 혼란스러웠다.

“형,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어?”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언제 다 만든 건지 해빛은 네모난 쟁반에 요거트 스무디 두 잔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해인과 백담호 앞에 각각 한 잔씩 놓였고, 제 앞에 놓인 요거트 스무디를 본 백담호는 미간을 일그러트렸지만 아무도 그걸 보지 못했다.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시길래. 할 말 있으신가 해서요.”

방해인하고 너하고 대체 무슨 사이였어? 해인의 입이 달싹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과거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해인은 애써 굳은 얼굴을 풀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미안. 일 해야 하는 데 신경 쓰였겠다.”

해빛은 잠시 해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곧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하세요.”

“응, 고마워.”

해빛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고 해인은 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곤 짙은 갈색으로 칠해진 테이블 위를 보며 요거트 스무디를 빨아들였다. 시고 단 맛에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지만 잠시뿐이었다. 해인의 손가락이 다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방해인의 고백을 찬 서해빛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친근하게 굴고 먼저 다가오는 건지. 무엇보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건 왜 방해인은 원작과 달리 서해빛에게 고백을 했는가였다. 자신이 빙의하기 전, 방해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탁탁탁탁,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왜, 빙의 전 방해인은 원작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거지? 소설 <그레비티>는 자신의 빙의로 인해 전개가 틀어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애초에 원작의 흐름은 진작 틀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해인아.”

기억 하나가 불러온 파장이 너무 거대해 해인은 자신이 알던 모든 게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해인이 알고 있는 원작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전개였다. 이미 원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곳은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던 소설 속 세상이 맞는 걸까. 방해인이 서해빛에게 고백하는 기억 하나가 지금 이 세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방해인!”

담호의 손이 테이블을 빠르게 두드리는 해인의 손을 붙잡았다. 언성이 높아진 부름에 해인은 몸을 움찔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생각에 몰두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는지 눈이 뻑뻑했다.

“왜 그래.”

“아….”

걱정이 담긴 까만 눈동자가 보이고 나서야 해인은 제 손가락이 얼얼하다는 게 느껴졌다.

“아프게 뭐 하는 짓이야, 다 빨개졌다.”

백담호가 해인의 손을 뒤집자 붉어진 검지 끝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색으로 돌아올 별 거 아닌 자국을 담호는 살살 문질렀다. 그래 봤자 붉은 기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해인아.”

무슨 일 있으면 말해, 혼자 머리만 굴리지 말고. 조심스레 손끝을 매만지던 커다란 손이 깍지를 껴 왔다. 손을 잡은 힘에 해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백담호를 보다 결국 중얼거리듯, “응”이라고 대답했다.

* * *

해인은 말없이 소주 한 잔을 들이마셨다. 벌써 혼자 8잔이 넘게 달리고 있었다. 술집은 해빛의 말대로 개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했고 또… 빈 테이블 없이 사람이 넘쳐났다.

“고기도 좀 드세요, 속 버리시겠어요.”

맞은편에 앉은 해빛이 다 익은 삼겹살을 해인의 접시 위에 올려놓자 해인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얼굴에 약간 붉은 기가 도는 것 빼고는 해인은 꽤나 멀쩡해 보였다.

“응, 고마워. 잘 먹을게.”

담담하게 말한 해인은 이미 제 접시 위에 가득한 고기를 드는 대신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 모습에 해빛 역시 배시시 웃으며 소주를 들이마셨다. 벌써 3번째 반복된 풍경이었다. 백담호를 제외한 두 사람은 도착하자마자 말없이 술을 들이마셨다.

해인은 오늘만큼 술이 잘 들어갔던 날이 없었다. 과하지 않게 들뜬 기분도 꽤 좋았다. 몇 시간째 터질 듯이 복잡한 머리가 알코올이 들어갈수록 단순해지고 텅텅 비어 가는 것 같아 좋았다. 게다가 내일은 주말이었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도 지장이 없는 날이었다는 뜻이다.

약간의 흔들림에도 넘칠 것 같은 소주잔을 들고 빤히 보던 해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밝지 않은 조명에 유리잔 가득 담겨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소주가 참.

“예쁘다.”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백담호에게는 들렸다. 얼척 없는 해인의 행동에 백담호는 픽, 웃고 말았다.

“하다하다 소주도 꼬시게?”

해인의 손에 들린 소주잔을 백담호가 빼앗아 갔다. 막을 새도 없이 빼앗긴 술잔에 해인이 입을 살짝 벌리고 보자 백담호는 적당히 식은 고기 한 점을 대신 넣어 줬다.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이미 입에 들어온 걸 뱉을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우물우물 씹었다.

아기 새처럼 받아먹은 해인이 마음에 드는 건지 백담호는 눈을 살짝 휜 채 해인을 보고 있었다. 얘는, 내가 그렇게 좋을까. 해인은 손을 뻗어 백담호의 눈가를 더듬었다. 잘못하면 손끝이 눈을 찌를 듯이 아슬아슬했지만 백담호는 미동도 없었다.

단지 한쪽 눈을 감으며 해인과 계속 눈을 맞출 뿐이었다. 머리 위에 있는 은은한 조명에 백담호의 하얀 살결 위로 속눈썹이 그늘져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쪽 눈을 감고 순진한 척 시선을 얽혀 오는 백담호의 행동이.

“예쁘다.”

해인의 중얼거림에 백담호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나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눈을 더듬는 해인의 손 위로 백담호의 손이 겹쳐지고 담호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쿵-.

조금 큰 소리와 함께 맞은편에 있던 해빛이 벌떡 일어섰다. 혼자서만 우뚝 솟아오른 해빛에 당연하게도 이목이 쏠렸다. 찰나의 순간, 해빛의 얼굴이 굳어 보였지만 눈을 깜빡이니 흐릿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취기가 올라서 잘못 본 건가 싶어 해인이 눈을 비비적거렸다.

“저 잠시 화장실 좀.”

해인이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해빛은 빠르게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황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것 같은 느낌에 해인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취한 줄 알았는데 해빛은 의외로 똑바로 걸었다.

“예쁜 건 난데 왜 아까부터 서해빛만 쳐다봐. 서운하게.”

제 손 아래 깔린 해인의 손등 위로 담호는 엄지로 문질렀다. 얼른 다시 자신을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행동에 해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담호의 얼굴 위에서 겹쳐진 두 손과 눈이 마주치자 만족스럽게 휘어진 두 눈을 홀린 듯이 해인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해인아.”

시끄러운 공간에서도 유독 낮고 좋은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응.”

술기운이 돈 탓인지 백담호의 얼굴에서 눈을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다. 수없이도 봐 온 얼굴이었지만 볼 때마다 새로워 해인은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 하나하나 뜯어봤다.

“키스해도 돼?”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붉은 혀와 입 안이 묘해 해인은 흐려진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정신이 들고 말았다. 지금 뭔. 해인이 다가오는 백담호를 손으로 막아 세웠다. 그러자 곧바로 부루퉁해지는 얼굴에 해인은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여기 밖이야, 누가 보면 어떡해.”

“아무도 안 봐.”

그걸 말이라고! 안 된다는데도 백담호는 더욱 힘을 줘서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한 해인이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리도 구석이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긴 개방적인 공간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진짜 안 돼.”

해인은 격하게 거부했고 이게 통했는지 밀어붙이던 백담호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표정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 보였지만 몸을 고분하게 뒤로 물리고는 소파에 기댔다. 짐짓 아쉬워 보이는 모습에 해인은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뜨거운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해인도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무런 말없이 앉아 있자니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던 찰나 어깨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해도 돼?”

얌전한 말투와 달리 해인의 허리 뒤로 파고든 손은 불순했다. 몸이 비스듬하게 기울인 터라 등 뒤로 공간은 널널했다. 담호가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진동이 간지러워 해인이 허리를 앞으로 주욱 빼자 옆구리가 잡혀 뒤로 당겨졌다.

“왜 대답을 안 해 줘, 해인아.”

옆구리를 주무르는 손이 야릇해 해인은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낮게 들리는 백담호의 목소리마저 무언가를 자극하는 거 같아 해인은 입술을 혀로 훑었다.

“일부러 술도 안 마셨는데.”

해인의 귓가에서 백담호가 은근히 속삭였다. 유유하게 흘러오는 호흡이 귓바퀴를 간지럽혀 해인은 몸을 약간 움츠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백담호가 계속 물만 마셨던 것 같기도 했다. 왜 안 마시나 했더니. 해인이 조금 황당한 눈으로 옆을 흘기니 기울어진 얼굴은 웃고 있었다.

옆구리에 있던 손은 점점 장골 라인을 따라 느리고 은밀하게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다. 손이 안으로 파고 들어올수록 해인의 몸 역시도 백담호에게로 차츰차츰 밀접했다.

“아….”

손이 기어코 허벅지 안쪽까지 다가왔다. 자세가 불편해 깊게 파고들지는 못한 게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본다고 키스하지 말라니까 그보다 더 들키면 위험한 짓을 한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해인은 눈을 대각선 앞쪽으로 힐긋거렸다.

다행히 이미 만취한 무리라 자신과 백담호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 말라고 백담호의 손을 치워야 하는데 아래에서 올라오는 묘한 감각이 무언가를 더욱 갈구하게 만들었다. 허벅지를 만지는 손이 가끔씩 앞섶을 스칠 때면 허리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해인이…. 조금 섰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해인도 알았다. 자기 성기인데 선 것도 모를 리가…. 다만 그게 옷 위로 나타날 정도인 줄 몰랐을 뿐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아래를 세우니, 해인은 자기가 파렴치한 변태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수치스러운 상황에 얼굴에 열이 잔뜩 올라 양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니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나갈까?”

이런 상황에서 싫다고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인내심이 엄청나게 좋거나 같이 나가자고 제안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해인은 인내심이 엄청나게 좋지도 못했고 백담호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밀어내긴 했지만, 해인이 할 수 있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응.”

그가 키스하자고 했을 때부터.

허벅지를 건드리던 손이 빠져나갔고 해인은 손에서 슬쩍 고개를 들어 옆으로 곁눈질을 했다. 눈을 돌리자마자 담호와 시선이 바로 부딪혔다. 부루퉁했던 표정은 완전히 사라져 기분까지 좋아 보였다.

“가자.”

이대로 바로 나갈 듯 구는 담호에 해인은 앞 쪽을 쳐다봤다.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던 해빛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이제야 해빛의 부재가 길다는 걸 해인은 깨달았다.

“잠시만, 해빛이한테는 말해야지. 왜 아직도 안 오지.”

“화장실에서 기절이라도 했나 보지.”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데도 백담호는 일말의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이 무심했다. 그게 어쩐지 안심이 되어 해인은 혼자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백담호가 서해빛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직접적으로 확인할 때마다 안심이 되었다.

그게 조금 못난 마음 같아 해인은 애써 생각을 지워 버렸다. 우선 해빛을 데리고 와야 했다. 두리번거리다 해빛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뭐지, 무슨 일 있나?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해인은 일단 해빛에게 ‘어디야?’라고 문자를 보내 놓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화장실 가서 데려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갈게.”

일어서려는 백담호를 해인이 제지했다. 아무리 백담호가 서해빛에게 관심이 없다 한들 최대한 둘이 함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내가 갈게. 어차피 화장실도 가고 싶었고.”

백담호는 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와.”

“응.”

해인은 대답하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 말라는 의미였다.

해인은 빠르게 걸었다. 술집 화장실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북적이는 좁은 화장실 안을 어떻게든 껴들어 갔지만 해빛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백담호 말대로 화장실 칸 안에서 잠이라도 든 건 아닐까 싶어 닫힌 문을 두드려 봤지만 한 곳에선 토 하는 소리가, 다른 곳은 바로 노크 소리가 되돌아왔다. 나머지 한 곳은 닫혀 있지도 않았고 안에 사람도 없었다.

“뭐지. 어디 간 거야.”

해빛의 행방이 완전히 묘연해졌다. 일어설 때도 조금 취했던 것도 같은데, 어디서 술에 취해 뻗은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됐다. 복잡한 화장실을 빠져나온 해인이 주머니에 있는 폰을 꺼내 들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하려 화면을 켜니 문자가 와있었다. 시끄러워서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서해빛: 저 식당 옆에 골목에 있어요.] 오전 12:09

짧게 고민한 해인은 밖으로 나왔다. 새벽이 되니 기온이 떨어져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얇은 옷감 사이로 찬 기운이 들어와 팔뚝을 문지르며 술집 옆쪽으로 걸어갔다.

해빛이 있다는 골목길 입구에서 풍겨 오는 알싸한 담배 냄새, 썩 좋지 못한 징조에 해인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누구한테 삥 뜯기는 거 아냐? 해인의 얼굴은 불안감에 굳어 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골목은 금방 도착했고 굳었던 얼굴은 예기치 못한 풍경에 풀어지고 말았다.

“…서해빛?”

건물 벽에 몸을 기대어 서 있는 서해빛은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 * *

가로등이 없어서 그런지 해빛의 눈이 어둡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해인을 눈으로 흘긴 해빛은 여전히 담배를 문 채 몸을 돌렸다.

“왔네요, 선배.”

“어…. 어. 여기 있다길래.”

말투 역시도 어딘가 차가워 해인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해빛의 얼굴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전에 방해인의 기억에서 본 서해빛 때문인가. 자신이 상상했던 광경과는 전혀 달라 해인은 해빛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오라고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형, 이리로 와 볼래요?”

낯선 분위기에 해인이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하자 해빛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벽에 비벼 꺼트렸다.

“아, 형 담배 싫어했죠. 죄송해요.”

싫어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해빛이 말하는 형은 아마 자신이 아니라 원작의 방해인일 것이다. 자신이 담배를 싫어한다는 걸 서해빛에게 얘기하거나 티 낸 적은 없었으니까. 담배까지 꺼 준 마당에 계속 서 있는 것도 그래서 해인은 주춤주춤 해빛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니 남아 있는 담배 연기의 잔향이 짙어져 해인의 콧잔등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가 해빛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풀었다. 그걸 본 해빛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요.”

“어…. 아냐. 근데 계속 밖에 있었던 거야?”

“네, 뭐. 좀 복잡해서.”

“그렇구나…. 춥겠다….”

얼른 들어가야 하는데 말을 꺼내기가 이상하게 어려웠다. 이게 원래 해빛의 모습이었던 걸까. 마냥 천진하고 맑은 해빛의 이미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해빛의 이런 모습으로 방해인이 서해빛에게 고백했던 장면은, 역시나 거짓된 기억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

“그…. 이제 시간도 늦었고 그래서 정리하려고 하는데 들어-.”

“형.”

처연한 빛을 띠는 눈동자가 해인을 담았다. 해인은 그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약간 속이 찌릿한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저 이제 안 좋아해요?”

애절하게 물어 오는 질문에 해인은 곧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질문을 몇 번이고 제 머릿속에서 되돌리고 분해를 해도 해인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서해빛을 안 좋아하냐고…? 애당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현재의 해인은, 해빛을 좋아한 적이 없었으니까. 마땅한 말도 고르지 못해 눈만 크게 뜬 해인의 행동이 해빛에게는 대답이 되었는지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 이렇게 마음이 빨리 돌아설 줄 알았으면 그때 거절하지 말걸 그랬어요. 괜히 고집만 부려서….”

보상으로 예전의 방해인과 서해빛의 기억을 보았기에 지금 하는 해빛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러나 이렇게 바로 난감한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차라리 그 나이 대 기억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지금 해빛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그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아마도 서해빛은 방해인의 고백을 거절했던 것 같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후회하는 것 같다.

“형, 저도 양심 없는 거 알긴 아는데 형은 어떻게 그래요….”

백담호 정말 좋아해요…? 제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만질 정도로? 너무해요, 진짜. 이럴 거면 왜 저한테 먼저 다시 다가왔어요?

금방이라도 울듯 물기 가득한 얼굴에 해인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백한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었다는 말이 통할 리도 없었고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기도 조심스러웠다.

해빛의 눈에는 찰랑일 정도로 눈물이 고였지만 흐르지 않았다. 그득 담긴 눈물이 더 그를 애처롭게 보이게 해 가슴이 징징 울리는 것만 같았다. 서해빛은 지금,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까…? 얼굴이 하도 슬프게 일그러져 있어 해인은 그대로 돌아설 수도 섣불리 만져 주지 못했다.

해빛의 코끝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갈 때 즈음 해인의 주머니에 경쾌한 벨소리가 울렸다. 애절하고 아슬아슬했던 좁은 골목길의 분위기에 약간 금이 갔고 해인은 이 순간만큼은 울려 주는 벨소리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받아요.”

“아, 응. 미안….”

해인이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니 발신자는 다름 아닌 백담호였다. 시간을 보니 벌써 해빛을 데려오겠다고 한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안 와.]

골목에 울리는 백담호의 목소리에 해인은 다급하게 볼륨을 최소로 줄였지만 이미 해빛은 들은 표정이었다. 처량하던 낯에 미약한 짜증이 어려 있었다.

“어…. 어, 곧 갈 거야. 지금, 어, 지금….”

해인은 변명을 생각하며 해빛을 계속 힐끔거렸다.

“아, 지금 해빛이가 조금 머리가 울린다고 해서. 금방 들어갈게.”

[……화장실이야?]

분명 통화 음량을 최소로 한 것 같은데도 주변이 조용해 휴대폰 너머로 백담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빨리 끊고 싶은 마음에 해인은 "어어어, 금방 갈게, 끊어"라고 둘러댔다. 무어라 말하는 백담호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던 것 같지만, 이미 전화는 끊은 뒤였다.

무거운 침묵에 해인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해빛아 이제 그만 들-.”

“좋아해요.”

띠링-.

[세 번째 공략 인물 등록 완료]

보상으로 3,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쉽게도 플레이어 페널티로 등록 가능한 공략 인물 슬롯이 소진되었습니다. 추가를 원하시면 슬롯을 늘려 주시거나 기존 공략 인물을 삭제해 주세요.

공략 인물: 서해빛

정보를 재열람하시겠습니까?

이 게임은 도대체 자신을 어디로 보내려는 걸까. 해빛의 고백으로도 모자라 등록된 공략 인물 알림이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절망스러운 건…. 해빛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호감도 71]이었다.

“…제가 선배 좋아할 일 절대 없을 거라고 해 놓고 이러는 거 웃기겠지만.”

해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기만 하자 해빛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현재 해인은 서해빛의 고백보다 그의 공략 인물 등록과 생각보다 훨씬 높은 호감도에 놀라는 중이었지만 해빛은 그걸 알 길이 없었다. 한 걸음, 해빛이 다가오자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 행동에 상처를 받았는지 해빛은 해인의 팔뚝을 잡고 애절하게 말했다.

“내가 졌어요. 형을 좋아해요.”

해빛의 눈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좋아한다고 제 마음을 전하는 서해빛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그 어느 때보다 애달프게 뱉고 있었다. 그 애처로움이 옮은 건지 해인은 이유 모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도망갈 수 없는 분위기에 해인은 차라리 고백하려는 해빛의 입을 틀어막았어야 했다고, 차라리 그러고 도망을 쳤어야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해인의 머리에 잊고 있던 아이템이 생각났고 동시에 알림창이 또 떠올랐다.

띠링-.

[업적 달성]

공략 실패로 삭제되었던 인물을 다시 등록하셨군요. 역시 인간은 도전하는 동물이랬나요? 저는 인간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플레이어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재등록은 난이도가 높았던 만큼 다른 보상도 주어집니다.

보상, 공략 실패 배드 엔딩, “널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잊겠어.” 루트의 잠겼던 기억이 해제됩니다. 실패했던 원인을 알아내고 이번엔 성공해 보세요!

(주의, 열람 시 꽤 긴 시간이 소모될 수 있으니 편안한 환경에서 진행해 주세요.)

[주연 호칭 획득]

<그레비티>의 메인 인물들의 관심을 일정 수치 이상 받았습니다. 호칭 <조연은 이제 주연>을 획득하셨습니다. <조연은 이제 주연> 호칭을 획득하여, 방해인 님은 주연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자격을 획득함으로 인해 앞으로의 이야기가 플레이어의 상황에 맞게 변화할 예정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예정이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떠오른 시스템창에 써진 말들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하지 마세요. 그게 더 상처예요. 형은 나름대로 저를 배려해 준 것이겠지만. 성격은 좀…. 많이 예민해도 선배는 저한테만은 다정했으니까. 이제는 저 말고도 아무한테나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 같기는 하지만•••.”

해빛의 말소리가 웅웅 울리기만 할 뿐, 해인의 귓속까지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해인의 모든 신경은 해빛의 얼굴 앞에 떠 있는 시스템 창에 쏠려 있었다. 해빛이 했던 말들보다 지금 시스템 창에 써진 말들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략 실패…? 주연은 또 뭐고? 저게 무슨 말인지 해인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이다.

“5분 전으로 뿅 간다, 뿅.”

“네?”

띠링-.

[알림]

회귀 타이머를 사용합니다. 5분 전으로 돌아갑니다.

* * *

골이 흔들리는 것 같아 해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지만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화장실이야?]

“…응?”

귓가에 울리는 백담호 목소리에 해인은 눈을 번쩍 뜨니 제 귀에 휴대폰이 닿아 있었다. 귀 옆에서 떨어져 켜진 휴대폰 화면에는 백담호라 적혀 있었다. 멍한 눈으로 화면을 보다 앞을 쳐다보니 해빛은 눈물이 맺혀 있을 뿐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또, 머리 위에 있었던 호감도도 보이지 않았다.

해인은 넋이 반쯤 나가 버렸다. 진짜로 5분 전으로 돌아왔다. 회귀 아이템을 사용한다는 알림이 떴을 때 시간이 되돌아갈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되돌아오니 기분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자신만 5분 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묘하게 만들었다.

[해인아, 어디야? 화장실에 없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백담호의 목소리에 해인은 다시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아…. 나 여기 그 가게 옆 골목인데 금방 갈게. 미리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곧 갈게. 기다려. 오지 말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해인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해빛에게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서해빛.”

해인의 말투, 표정 모든 게 담담했지만 실상 지금 머릿속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정보들에 과부하가 걸릴 거 같아…. 아니, 이미 걸려 버렸다. 모든 회로에 오류가 나 버려 오히려 차분해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주변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해인은 해빛이 입을 벌렸음에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표정, 어조는 모두 담담해 보여도 걸음걸이는 다급했다. 골목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어깨가 붙잡히고 말았다. 떨어트릴 새도 없이 그대로 뒤로 당겨진 해인이 벽에 밀어붙여지고 말았다.

“왜 도망가요?”

안쓰럽게 눈물이 고여 있던 눈은 이제는 살벌하게 해인을 담고 있었다. 순식간에 급변한 해빛의 태도에 해인은 불안정하게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 내가 무슨 도망을 쳐….”

“지금 제가 무슨 말할지 알고 있죠.”

알아도 아는 척하겠냐•••. 서해빛도 방해인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가. 처음에는 자신을 피하고 싶어 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해빛이 먼저 살갑게 다가오곤 했다. 그게 백담호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였나? 원래 착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해인 역시도 머리가 복잡해 그저 이 상황이 점점 짜증 나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알…!”

말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 이럴 거면 왜 저한테 먼저 다시 다가왔어요?

애절하게 뱉었던 해빛의 말이 떠올라 버렸다. 복잡했던 머릿속에서 드디어 조금씩 정리가 이루어졌다. 서해빛은 방해인의 고백을 거절한 상태였고 서먹한 사이였다. 그 후 빙의한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어쭙잖게 원작을 유지하겠다고 해빛에게 적당히 말을 걸다가 오해가 생겨 버린 것 같다. 해인은 이제야 해빛이 왜 화가 났는지 깨달았다.

“…형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저한테 차인 게 그렇게 분했어요?”

해인이 말이 없자 혼자 무슨 오해를 더 하는 건지 눈빛이 살벌하다 못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해빛이 이렇게 싸늘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꼬이고 꼬인 상황 탓인지 가슴이 턱턱 막혀 와 해인은 깊은 숨을 몰아쉬고는 서해빛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해빛아. 오해야. 내가 뭘 일부러 그래.”

“…차라리 일부러 그랬다고 해요.”

“뭐?”

“백담호가 좋아진 게 아니라 차라리 제 관심을 끌려고 이러는 거라고 하라고요.”

“그게 무슨……. 일단 비켜봐.”

“싫어요.”

강경한 해빛의 태도에 해인은 이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못해 둥둥둥, 뇌가 뛰는 것처럼 강하게 울렸다. 개 같은, 진짜. 왜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일로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비키라고!”

결국 폭발한 해인이 해빛의 어깨를 퍽 밀쳐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해빛은 조금 움찔거릴 뿐 밀려나지 않았다. 날이 선 밤색 눈동자가 해빛을 노려봤다. 그 매서운 눈을 보며 해빛은 말했다.

“…좋아해요, 형. 그러니까 이제 다시 저 좋아해 줘요.”

제발. 이게 맞는 거잖아…. 간절하게 떨리는 해빛의 목소리와 함께 ‘띠링-.’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왜 또 이렇게 일이 흘러간 거지. 시간까지 되돌렸는데 또다시 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시스템 창들에 힘이 주욱 빠졌다. 탁하게 풀려 버린 해인의 얼굴에 해빛은 다시금 또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해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해빛의 머리 위에는 [호감도 73]이라고 떠 있었다.

시스템 창을 멍하니 보며 어깨가 젖어 가는 걸 느끼던 해인은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무슨 선택을 하든…. 개 같은 인생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끌어당기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행복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눈을 감으니 훌쩍훌쩍하는 울음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벽을 짚고 있던 손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해빛은 해인에게 몸을 점점 기대기 시작했다. 밀어낼 기력도 없어 해인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얼룩져 있는 잿빛의 건물 벽이 꼭 제 기분 같았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담백한 음성과 달리 해빛을 밀치는 힘은 거칠었다. 해인이 밀어낼 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해빛은 맥없이 떨궈져 맞은편 벽에 부딪혀 휘청거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해인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서 있는 백담호를 보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그대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게 상황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말하기에 해인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일단 들어가.”

* * *

계산을 마치고 가게에서 나오자 해빛이 해인을 붙잡았다. 백담호와 가지 말라는 듯한 제스쳐였지만, 해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단호함에 상처라도 받았는지 힘없이 붙잡고 있던 팔을 풀고 해빛은 뒤돌아 가 버렸다.

백담호와 둘만 남은 상황이 어색해 해인 역시도 따로 가려고 했지만 백담호는 보내 주지 않았다. 백담호는 화를 내진 않았으나 감정을 읽기 힘든 무표정으로 해인을 제 옆에 붙든 채 걸었다.

해인이 파악할 수 있는 건 그저 백담호의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으나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해인은 계속 담호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지. 골목길에서 있던 장면은 다른 사람이 봐도 오해하기 좋은 장면이었다. 서해빛이 울고 있기는 했지만…. 오후에 있었던 황정운과의 일보다 어쩌면 더 백담호가 오해할 만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심지어 자신도 해빛을 밀어내려고 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변명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상황은 충분히 나빴다. 해인은 흘긋, 또 백담호의 표정과 호감도를 살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까처럼 화라도 내면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할 텐데 백담호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다.

담담해 보이는 행동에 해인이 백담호를 피해 다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해빛에게 붙잡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백담호와 마주쳤고 그는 미련 없이 자신과 해빛을 지나쳐 갔다.

먼저 피한 건 스스로였는데도 떨어지는 호감도에, 무심한 듯 지나치는 백담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멀어질 거라고 다짐해 놓고 이기적이게도 백담호가 실망하는 건 원치 않았었다. 그때처럼 무덤덤해 보이는 백담호에 불안해졌다.

이번 일로 실망하면 어떡하지. 그런 건 싫었다. 걷던 해인이 손을 뻗어 백담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담호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해인 쪽으로 비스듬히 돌렸다. 내려다보는 검은 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어서 해인은 옷 아래로 떨어져 있는 손을 꽉 쥐었다.

“미안해….”

불안하게 떨리는 사과에도 백담호는 말이 없었다. 자신을 보는 눈이 마치 남을 보듯 차가워 백담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혹시 무슨 오해를 했다면 그건 오해야….”

해인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백담호는 여전히 미동 없이 해인을 보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야만 한다. 해인은 머리로 다급하게 말을 조합했다. 백담호에게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하면 안 될 것들을 잘 골라 내 그가 이해할 만한 설명을 서둘러 해야 한다고 속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것 같았다.

“해인아, 울지는 말고.”

담호가 한 손으로 해인의 뺨을 보드랍게 감싸고 문질렀다. 초조, 불안, 두려움 등으로 안쓰럽게 일그러져 있던 해인의 얼굴이 풀어졌다. 얼굴을 쓰다듬는 백담호의 손길은 평소처럼 따뜻했고 다정해서 해인은 안심이 들었다.

“서해빛 다시 좋아할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백담호가 언제부터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오해를 풀어 주는 게 우선이었다. 고개를 흔들었음에도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백담호는 물끄러미 해인을 들여다보기만 해, 해인은 그가 제대로 보지 못했나 싶어 입을 열었다.

“안 좋아해, 좋아할 일도 없어.”

짧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응.” 하고 나지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오해가 모두 풀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백담호 역시도 움직이지 않고 해인을 빤히 쳐다봤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아니면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 건가 하고 고민하던 찰나, 담호의 입이 열렸다.

“나는 좋아해?”

피하고 싶으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입 밖으로 내기가 두렵고 불안해서 해인은 질문에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백담호는 이런 질문에 대답을 못 하는 자신을 재촉하지도, 실망한 듯 돌아서지도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미 다 아는 마당에, 해인 스스로도 인정한 마음을 말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워 피하기만 하던 제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적은 없다. 단순히 이렇게 살아오는 게 편해서 불만이 없었을 뿐이지. 게다가 백담호가 실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해인이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응, 좋아해.”

“좋아해. 나도.”

좋아한다고 말하기 무섭게 곧바로 들려오는 말에 달달한 말에 우습게도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종일 벌어진 안 좋은 일들에 기분이 그렇게 가라앉았고 방금까지도 불안함에 휩싸였는데 백담호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게 풀려 버렸다.

훌쩍, 백담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읽기 힘들었던 표정이 지금은 왠지 기분이 좋아보는 것 같아 해인이 힐끔 호감도를 살폈다.

[호감도 55]

호감도가 4나 올라 있었다. 아, 백담호는 지금 기분이 좋았다. 내가 더 좋아질 만큼. 해인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걸 가만히 보던 백담호가 말했다.

“나랑 사귀자, 해인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보다 침묵은 짧았다.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그간의 기억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할 즈음 해인은 고개를 이미 끄덕이고 있었다.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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