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 번째 공략 인물(2)
조급하게 얽혀 오는 혀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흘러나오는 신음마저도 백담호의 입에 막혀 목 안에서만 울렸다. 급하게 아무 모텔로 들어갔고 문이 다 닫히기도 전에 백담호는 입을 맞춰 왔다.
파고들어 온 혀는 모든 곳을 다 헤집어야 직성이 풀릴 듯이 난폭했다. 밖에서 오래 서 있어서 몸이 식어서 그런지 문질러지는 입술과 그 안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한참을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나니 어느새 해인은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흥분으로 동공은 더없이 커져 있었고 밭은 숨을 몰아쉬며 백담호를 보니 그 역시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검은 두 눈에는 평소보다 짙은 음욕이 가득했다. 숨을 고르기도 잠시 해인의 윗옷과 바지가 벗겨졌다. 순식간에 양말과 속옷만 입은 모습에 해인이 양말마저 벗으려 했지만 담호가 그걸 막아섰다.
“안 벗어도 돼.”
왜 안 벗어도 된다는 건지 해인은 알 수 없었지만 양말 정도야 신고 있어도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을 제자리에 놓자 담호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그리며 해인의 목 언저리에 입술을 문질렀다.
“아….”
가볍게 어깨와 목을 깨물던 백담호는 느리게 내려가 이미 딱딱하게 선 돌기를 입에 물었다. 늘 옷 위로 빨린 탓인지 곧바로 혀와 닿은 가슴의 감각이 낯설었다.
까슬한 느낌이 하나도 없이 축축한 게 미묘한 소름이 돋아났다. 혀끝이 돌기를 가지고 놀듯 꾸욱 누른 채 문질렀다. 혀의 움직임이 더욱 선연하게 느껴져 가슴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간질거리는 달뜬 쾌감에 해인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 제 가슴을 빠는 담호를 내려다봤다. 돌기를 담고 있는 백담호의 입술이 타액으로 젖어 있었다.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언뜻 보이는 제 유두가 붉고 번들거려 낯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음란한 장면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게 민망해 해인은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아, 으……. 깨물지는 마….”
해인이 시선을 돌리자마자 백담호는 갑자기 돌기를 가볍게 씹기 시작했다. 미끈한 혀와 달리 이는 날이 서 있어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그러나 자극을 당한 탓인지 예민해진 돌기에서는 통증 말고도 아릿한 성감이 전신으로 퍼져 갔다.
키스할 때부터 서 있던 아래가 이제는 완전하게 뜨거워졌다. 약간만 더 자극이 강해지면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성감에 해인이 본능적으로 손을 아래로 내려 제 성기 위를 문질렀다.
“흐으…. 아…. 가…. 갈 것…….”
아직 쑥스러움이 남아 있긴 한지 제 것을 주무르는 해인의 손짓은 어설펐다. 그 모습을 보던 백담호는 상체를 일으켰고 돌기의 자극이 사라지자 해인의 손도 같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사정의 직전까지 도달했던 터라 해인은 왜 멈추냐는 듯이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조금만 더하면 가슴으로 싸겠다. 해인아.”
백담호의 시선이 프리컴으로 다 젖어 짙어진 해인의 드로즈로 향했다. 그제야 제 모습이 어떤지 깨달은 해인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성기를 만지던 손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르르 치워 버렸다.
해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백담호는 나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 치워. 귀여웠는데.”
“…됐어.”
마주하기가 민망해 해인은 고개를 돌려 버렸고 작게 웃던 백담호는 축축해져 이미 속의 형태가 다 드러나는 해인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예상대로 성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선단은 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커다란 손이 해인의 성기를 움켜잡으며 왕복하니 위에서 억누른 흐느낌이 튀어나왔다. 허리가 튕기며 아래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강한 사정감이 몰려왔다.
“아……. 흐으……. 흣, 무슨…?”
싸기 직전 백담호의 손이 기둥을 강하게 압박하고 요도구를 엄지로 막아 버렸다. 강제로 사정이 막힌 해인이 당황스럽게 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인이 한 번 싸면 지치는데 벌써 싸려고 하면 어떡해.”
언제 꺼낸 건지 모를 젤이 해인의 중심부 위로 쏟아졌다.
“읏, 차가….”
질척하고 차가운 액체에 신경이 분산되어 백담호가 드디어 성기를 놓아줬음에도 사정하지 못했다. 강하게 잡힌 터라 새빨갛게 변한 채 빳빳한 해인의 성기를 무시하고 백담호의 손이 그 아래로 내려갔다.
그 손이 향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눈치챈 해인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말았다. 벌써 두 번째, 처음 안으로 들어왔을 때 초반에는 기이한 이물감과 고통이 따른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굳어 오므라드는 허벅지를 담호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었다.
“긴장 풀어. 해인아. 천천히 할게.”
“으…. 으응….”
아래를 파고든 손은 바로 구멍으로 가지 않고 회음부 위를 맴돌았다. 젤 때문에 미끌거리는 살갗을 문지르며 은근하게 힘을 주어 압박했다. 분명 단순히 성기와 구멍 사이에 있는 부분일 뿐인데 꾹 누르니 오금이 저릿했다.
젤이 워낙 많이 부어져서 그런 건지 손가락이 회음부를 문지를 때마다 골 안으로 흐르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긴장감에 수그러들던 성기는 다시 딱딱하게 기립했고 성감은 빠르게 몸에 퍼져 갔다.
회음부를 누르던 손가락이 느리게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흥분해 약하게 벌름거리는 구멍 위에 손가락이 닿자 해인의 발가락이 살짝 곱아들었다. 전에 만져질 때보다 축축해서 그런지 툭툭 검지가 입구 위를 두드릴 때마다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으……. 좀, 이상한 거… 같아…….”
천천히 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구멍을 건드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입구를 따라 주변의 살들이 문질러질 때마다 아래가 움찔거렸다. 감질맛 나는 성감에 해인의 성기는 그저 물만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이제는 젤인지 액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래가 축축해졌다.
겉만 돌던 손가락 하나가 느리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워낙 젖어 있어 매끄럽게 들어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어색한 이물감은 묘했다. 전에는 내벽 곳곳을 누르며 헤맸던 손가락이 단번에 한곳을 쳐올렸다.
“으흑……. 으응…!”
퍼뜩 해인의 허리가 튕기며 곧바로 티가 나는 반응에 담호는 손가락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들어가기 전까지 조심스러웠던 행동은 곧바로 태도가 변했다. 성기를 애무당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쾌감에 해인은 손을 파르르 떨며 시트를 움켜잡았다.
배 안 어딘가가 지독하게 간지러우면서 몸이 자꾸만 사선으로 비틀어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극점만을 쳐올리는 손가락에 입이 다물리지 않아 신음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나왔다. 점점 흐물흐물 풀려 가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또 하나 들어갔다.
손가락 두 개는 더욱 다양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힘도 당연히 배가 되었다. 갈고리 모양으로 굽힌 손가락이 극점을 강하게 짓누르며 손을 흔들었다.
“아, 흐…. 흐으윽…. 잠, 시마안…!”
도무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쾌감에 눈앞이 뿌옇게 물들어 갔다. 허벅지는 이미 달달 떨리고 있었고 아랫배에는 힘이 자꾸만 들어가 움푹 들어갔다가 부풀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쌀 것 같은 느낌이 징징 배 안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아래를 쑤시면서 성기를 만지지도 않았는데 사정감이 격하게 몰려왔다. 하반신의 모든 살갗이 예민해진 것처럼 몸을 버둥거릴 때마다 스치는 시트의 촉감에도 소름이 돋아났다. 전립선을 누르고 흔들던 손은 스르르 힘을 풀었다가 이번에는 장난질을 치듯 툭툭 부푼 곳을 건드렸다.
강하게 압박되었다 풀리니 신경이 모두 극점으로 집중되어 툭툭 건드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떨려왔다. 밭은 숨을 내쉴 때마다 달뜬 소리가 같이 섞여 나왔고 해인의 얼굴은 이미 눈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흐으…. 담호, 야, 백담호……. 안아, 안아 줘….”
쾌락이 강해질수록 같이 느껴지는 두려움에 해인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었다.
“하…. 손가락만으로 좋아 죽으려고 하네.”
이제 웃음기가 가신 백담호는 낮게 신음을 흘리고는 “이거보다 더 좋은 것도 있는데.” 하고 덧붙였지만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해인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어서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뻗어 올 뿐이었다. 해인을 잡아당기는 대신 자신이 몸을 숙여 애달프게 흐느끼는 해인에게 키스를 했다.
달대로 달은 해인의 몸은 아까보다 훨씬 뜨워져 이제는 안쪽 어딜 건드려도 움찔거렸다. 잠시 내벽 곳곳을 건드리던 손가락이 다시금 전립선을 누른 채 문지르자 해인의 허리가 들썩이며 성기에서 하얀 액이 쏟아져 나왔다.
참았던 만큼 긴 사정이었다. 성기는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며 정액을 내뱉었다. 해인의 입술을 춥춥 빨던 백담호가 입을 떨어트리며 상체를 살며시 일으켰다. 그러면서 구멍을 채우던 손가락도 빠져나오고 말았다. 해인이 흘린 정액은 해인의 가슴께까지 튀어 있었다. 하얀 나신에 흩뿌려진 정액과 벌어진 다리 사이로 구멍은 가시지 않은 흥분에 벌렁거렸다.
오므라들고 늘어날 때마다 흐늘거리는 붉은 속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 야한 광경을 빤히 보던 백담호는 시선을 다시 해인의 얼굴로 돌렸다. 눈물이 얼마나 흘렀는지 축축해진 채 입술은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분명 시작할 때는 몰아붙이지 않으려 했는데.
“…미안해, 해인아.”
갑작스러운 사과에 해인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니 백담호는 제 상의를 벗어 던져 버리고는 해인의 다리를 다시금 벌렸다. 고개를 들 힘도 없어서 숨만 겨우 몰아쉬고 있던 해인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말았다.
“흐읏…! 좀 쉬었다가…!”
갑자기 아래로 손가락 세 개가 바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풀릴 대로 풀린 탓에 다행히도 아프지는 않았지만 내벽은 빠듯하게 손가락을 물어 왔다.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백담호는 나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것보단 더 풀어야 해서.”
“으응…. 뭘 더 풀…….”
아, 해인은 여기서 뭘 더 풀어야 하나 물어보려다 빠르게 깨닫고 말았다. 그래, 이건 지금 백담호의 말이 맞았다. 해인은 버둥거리던 몸을 그대로 멈추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아…. 이제 그만 풀어도 돼…. 제발….”
아래는 이제 완전히 풀리다 못해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그사이 벌써 몇 번이나 절정에 닿았는지 해인은 기력이 완전히 딸려 애원하듯 울었지만 백담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구멍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 손가락 3개가 안에서 벌어지면 그대로 늘어날 정도로 풀려 있었다.
해인이 누워 있는 자리는 시트 아래의 매트리스가 걱정될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 넣어…. 넣어도 된다고…. 담호야, 응?”
살다 살다 해인은 자신이 먼저 아래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간 넣기는커녕 자신이 먼저 기절할 것 같았다. 해인이 버둥버둥 위로 도망가니 백담호는 그대로 몸을 주욱 내리 끌었다.
“해인이가 원래도 내 좆 싫어하는데 더 싫어하면 어떡해…. 난 그런 거 싫어….”
흥분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짐짓 안쓰럽게 뱉으니 어이가 없었다. 눈이 반쯤 맛 간 게 백담호도 제정신은 아닌 거 같았다. 그러면서도 백담호는 인내심이 정말 대단하다고 새삼 느껴졌다. 자신이 몇 번을 가는 동안 백담호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아직 그의 것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아냐, 안 싫어해.”
드디어 내벽을 건드리던 손이 멈추고 까만 눈이 해인과 마주쳤다. 무언가 더 바라는 것 같은 표정에 해인이 “정말이야.”라고 덧붙이자 손이 스르르 빠졌다. 아래에서 나온 백담호의 손은 살짝 불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있었으면 손이 불어…. 백담호랑 있으면… 이런 쪽으로 늘 새로운 걸 경험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속에 잇던 손이 빠지니 아래가 묘하게 허전했다. 멍한 얼굴로 해인이 백담호를 봤고 드디어 바지 버클이 내려가고 드로즈와 함께 바지가 내려갔다.
아파 보일 정도로 발기한 것이 곧바로 튀어나왔고 해인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렸다. 백담호는 서랍장 위에 올려진 제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뜬금없이 뭔가 싶어 해인이 유심히 보니 콘돔이었다. 모텔이라 서랍장에 콘돔이 있을 텐데, 굳이 지갑에서? 왜 갑자기 지갑에서 꺼내나 해인이 의아하게 쳐다보니 백담호는 제 좆에 콘돔을 씌우고는 말했다.
“크기가 안 맞아서.”
“…아.”
아, 하긴…. 납득은 가면서도 자신은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일에 해인은 넋이 나간 채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콘돔을 다 씌운 백담호는 해인의 허벅지를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엉덩이가 공중으로 살짝 들떴고 그 위로 뜨겁고 거대한 것이 문질러졌고 해인이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간을 보듯 살살 엉덩이 골 사이를 문지르던 것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에 해인은 아, 아 같은 뚝뚝 끊긴 신음만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얼얼함을 넘어서 아래가 쪼개질 듯 아팠다. 구멍이 분명 다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아니, 확실한 착각이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에 이제야 귀두만 겨우 다 들어간 채였다.
“아…. 미쳤……. 잠, 시…. 흐으윽…!”
배가 심하게 당기고 아래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기립해 있던 해인의 성기는 채 사정하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손가락 따위는 새 발의 피라는 걸 깨달았다. 눈물만 줄줄 흐르고 숨조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시야는 뿌옜다.
“많이 아파?”
해인은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덜덜 떨고 있었다. 자못 안쓰럽기만 한 모습에 백담호는 진입을 멈추고는 조심스럽게 쉴 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냈다.
말로 대답하기도 힘든 건지 해인은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백담호가 시선을 내려 맞물린 아래를 살피니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벌려진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귀두만 겨우 받았을 뿐인데 꽉 조여들어 더 이상 삽입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조이는 힘이 너무 강해 뺄 수도 없었다. 백담호 역시도 꽤 고통스러운 상황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 이내 다시 해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있을게.”
괜찮아, 괜찮아. 겨우 귀두만 들어간 어정쩡한 자세로 백담호는 최대한 자극이 덜 가게끔 몸을 고정한 채 조심스레 해인을 달랬다. 눈물로 짓무른 눈 주변에 입술을 문지르고 한쪽 손으로는 살살 해인의 가슴 위를 두드렸다.
“숨 쉬고.”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진동에 드디어 해인이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제 호흡을 따라 하라는 듯 담호가 과장되게 숨결을 내뱉었다. 그에 맞춰 해인도 눈을 감고 입술을 모아 같이 후후 숨을 내쉬었다.
땀에 절어 앞 머리카락이 이마에 딱 달라붙고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게 사랑스러워 백담호는 소리 없이 미소만 지으며 부드러이 해인의 볼을 쓰다듬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해인의 반응이 귀엽고 기분이 좋아 백담호는 자조적인 기분이 들었다. 방해인이 초짜처럼 굴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까지 내가 치졸했나. 하여튼, 방해인은 사람 참 유치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은 게 티가 날까 백담호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며 물었다.
“좀 괜찮아?”
“…응…. 아까, 보단….”
드디어 해인은 눈을 슬며시 떴다. 눈물이 잔뜩 맺혀 있는 속눈썹이 유독 짙어 보였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위로 입술을 부빈 백담호는 얼굴의 곳곳에 입을 맞추다 도톰한 해인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숨을 쉬는 데에는 크게 방해가 가지 않게 해인의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졌다가 혀로 핥아 올렸다. 원래 부드러운 키스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백담호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입술을 춥춥 빨다 더욱 가까이 맞대어 벌어진 해인의 입술 사이에 혀를 넣어 더욱 벌렸다. 거부하지 않고 힘없이 입이 벌어지자 물컹한 살덩이는 이제야 과감하게 입 안을 건드렸다.
백담호의 혀가 쿡쿡 입천장을 찌르고 오돌토돌한 곳과 앞니까지 쓸어내리자 묘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으응…….”
해인이 옅게 신음을 흘리자 백담호는 계속해서 같은 부위만을 핥았다. 가슴 위를 토닥이던 백담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배 정중앙을 가르고 중심부까지 내려간 손은 힘없이 쓰러져 있는 해인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몇 번이나 사정한 성기는 부드럽게 주물러 주니 또 기립하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분산된 자극에 해인은 어느 한곳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집중을 하려고도 하지 못해 그저 백담호가 하는 대로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비벼지는 혀를 따라 같이 얽히기를 몇 번 아래가 갈라질 것 같은 고통은 거의 사그라들고 그 빈자리를 성감이 채워 갔다.
느리지만 집요하게 뒤섞이던 뜨거운 살덩이가 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느새 숨까지 가빠 온 건지 해인은 가슴팍은 밭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아직도 아파?”
“아니….”
해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제 괜찮은 거 같아.”라고도 덧붙였다. 실제로도 배 속에 무언가 가득 찬 포만감과 이질감이 느껴질 뿐, 아픔은 없었다.
“다행이네, 이제 다 들어갔거든.”
“정말?”
그 큰 게 다 들어갔다고? 언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던 아픔도 잊고 해인은 아래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반쯤 선 제 성기 밑으로 양옆으로 벌려진 제 아래는 백담호의 하반신과 빈틈없이 밀접해 있었다. 어쩐지 아랫배가 조금 부풀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들어가긴 하는구나…. 상상만 했던 게 현실이 되니 꽤나 신기했다. 상상만 했던 일이었는데, 진짜로 백담호의 것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게 신기했다. 배 안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과 꽉 찬 느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렬했다. 적나라한 아래 광경이 부끄럽고 민망해 눈을 감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빈틈없이 맞물린 아래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네.”
해인이 손을 뻗어 제 아랫배 위를 살살 문질렀다. 살이 별로 없어 판판한 배 아래로 무언가 딱딱한 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하아…. 움직여도 돼, 해인아?”
“으응…!”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담호는 해인의 양 허벅지를 붙잡고는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 순간 해인은 제 배가 부풀어 보였던 게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내부를 가득 채우던 것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아 흐, 잠…. 멈……. 흐윽……!”
“안 돼, 이미 끝났어.”
당황한 해인이 백담호를 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멈추기엔 늦고 말았다. 귀두 끄트머리가 걸릴 때까지 빠져나왔던 좆은 그대로 내벽을 파고 들어갔다. 굵기가 굵기인지라 굳이 극점을 노리지 않아도 이미 들어가는 것 자체로 극점이 꽈악 눌리고 말았다. 여린 살이 한계까지 벌려지고 해인의 몸은 퍼뜩 튀어 올랐다.
손가락으로 쑤셔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에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발끝까지 퍼지는 짜릿한 느낌에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한 번만 더 느끼면 어딘가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또 한 번 허리가 빠르게 물러났다.
그와 함께 빠져나가는 두꺼운 것이 부푼 전립선을 득득 긁었다. 전립선을 자극할 때마다 배 아래 근육이 뭉칠 정도로 움츠러들었고 해인의 허벅지는 달달 떨려 왔다. 전신이 열기에 들끓어 올랐다.
“아아, 흐, 하윽, 안…. 아흑…!”
퍽, 거센 왕복질에 해인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손발 끝까지 퍼지는 강렬한 성감에 몸이 저절로 비틀렸다.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른 채 흐느껴 우는 해인의 얼굴을 보며 백담호는 흉악한 것을 다시 해인의 안에 처박았다.
깊숙이, 최대한 깊숙하게 넣으려 허리를 더욱 밀어붙이니 내벽이 잘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나 세게 박은 건지 쿡쿡 추삽질을 할 때마다 해인의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가 수그러들었다. 판판한 배 위로 드러나는 제 좆의 형태에 오금이 저려 와 백담호는 일부러 허리를 더욱 거세게 쳐올렸다.
쉼 없이 흔들리는 몸은 멀미가 날 것 같기도 했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난폭하게 쑤셔지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감각이 지독히도 강렬해 머리가 빠르게 점멸했다. 마구잡이로 쑤셔지는 것만으로도 죽을 듯이 좋은데 어느새 성기는 조금씩 극점만을 노려 찌르기 시작했다.
“흐아, 아흐…. 아, 하으…. 조……. 좋아…. 이상…. 흑…….”
“하아…. 그렇게 좋아, 해인아?”
백담호가 벌건 눈으로 묻자 해인이 무어라 대답을 뱉었지만 그게 신음인지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낯설고도 강한 이 쾌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해인은 무작정 손을 뻗어 다급하게 담호의 등을 끌어안아 왔다. 흥분에 겨운 해인이 짧은 손톱을 세워 담호의 등에 붉은 줄을 남겼다.
“좋아서 자지러지네, 시발….”
등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느낌에 백담호가 사납게 중얼거렸다.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백담호는 잘게 치대던 허리를 물려 선단 아래까지 빼내었다가 다시 깊게 삽입했다. 부풀 대로 부푼 좆이 막힘없이 단번에 극점을 쳐올리자 해인의 허리가 크게 튕기며 성기에서 뿌연 액이 배 위로 쏟아져 내렸다.
“흐으윽…. 하으…. 으응……!”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거친 쾌감에 몸이 오그라들어 해인은 백담호의 등을 감싸던 제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모인 손이 달달 떨렸다. 하얀 성기는 울컥거리며 여러 번 하얀 액을 뱉어 냈다.
여태까지 느꼈던 절정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해 성기는 사정 후에도 불투명한 액을 뚝뚝 흘렸다. 파르르 몸이 떨리고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내벽이 강하게 수축했다. 덕분에 안에 있던 성기도 꽈악 조여들어 백담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운 숨을 내쉬었다.
뜨겁고 이미 야들야들하게 풀어져 기분 좋게 감싸던 것이 끊어질 듯 압박까지 해 오니 백담호 역시도 사정감이 몰려왔다.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을 옮겨서 해인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머리 옆에 놓아 깍지를 끼자 백담호의 몸이 앞으로 수그러들면서 삽입이 한층 더 깊어졌다.
얽히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자극마저 선연하게 느껴져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쾌락이 채 가시지 않은 해인은 온몸이 성감대라도 된 듯 예민해진 상태였다.
작은 자극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데 가장 민감한 내벽을 두꺼운 선단이 득득 긁으며 들어오니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뜨겁고 찌릿했다. 원래도 충분히 깊었는데 더욱 파고들어 오니 내장이 망가질 거 같은 두려움에 해인은 도리질을 쳤다.
“하…. 으…. 너무, 너무……. 깊……. 흐윽…!”
“너무 깊어서 좋다고?”
“그게 아니…. 아흑…!”
눈물에 불어 터진 해인의 얼굴이 백담호의 이성을 더욱 무너뜨렸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인데 기이하게 불을 지펴 추삽질이 거세졌다. 이미 해인 자체도 액을 많이 흘리는데 젤까지 잔뜩 발라 놓아서일까 살갗이 부딪힐 때마다 물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하게 울려 퍼졌고 해인의 흐느끼는 소리도 같이 격렬해졌다. 살면서 이런 쾌감은 난생처음이었다. 내 몸임에도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강렬한 쾌감에 흔들리는 몸과 함께 꺼떡이는 해인의 성기에서는 이제 정액이 아니라 맑은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하아……. 갈 것 같아, 해인아….”
“나, 흐윽…. 이상…. 잠시…!”
사정감이 몰려올수록 백담호의 허리 짓이 거칠어졌다. 퍽퍽 내벽을 쑤시는 성기가 주는 자극 역시 강해졌다. 정말 죽을 것 같아 해인이 엉엉 울며 애원했지만 멈추지 않고 안을 헤집기를 몇 번, 백담호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긴 사정과 함께 해인의 성기에선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해인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안 들었던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뻑뻑하고 땅겨 손으로 문지르니 땡땡 부어 있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렸으니 안 붓는 게 더 이상할 성싶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백담호의 넓은 등판이 보였다. 가리는 것 없이 드러나 있는 등판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형태가 보였다. 아직 땀이 마르지 않았는지 반지르르한 살갗에 해인은 자신이 그렇게 오래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고 추측했다.
“……백•••.”
하도 울고 애원하느라 목소리는 듣기 싫게 다 갈라져 있었다. 목도 아파 와 해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목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러다 문득 보인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짙게 나 있었다. 흐린 시야로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리니 손목은 약과였다. 성한 곳 하나 없이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얼마나 물고 빤 거야•••. 엉망인 제 몸을 잠시 멍하니 보다 허리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축축함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떠올랐다. 머리를 침대 위로 떨어트리고 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백담호.”
“응, 해인아.”
백담호는 침대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다 내려놓고 바로 몸을 돌렸다. 해인의 퀭한 얼굴이 마음에 들기라도 하는 건지 기분이 심히 좋아 보였다. 뺨을 손으로 문지르고 입술까지 지분거리니 해인이 스르르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이유 모를 외면에 백담호가 의아하게 물으려는 순간 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집에 갈래.”
“……뭐?”
갑작스러운 해인의 귀가 통보에 백담호는 눈을 크게 뜨다 이내 팍 찌푸렸다. 오늘 연인이 된 상대가 섹스 후에 바로 집에 가겠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백담호는 알 수 없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해인은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둔통에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젖꼭지는 아렸고 눈두덩이도 팅팅 부어 제대로 떠지지 않았고 아래는 여전히 뭐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백담호가 한 번만 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 이상 했다면 몸이 완전히 아작 났을 게 분명했다.
표정이 좋지 못한 백담호를 뒤로한 채 해인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시트에 올려진 손에 힘을 주자 아래에서 알 수 없는….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액체들이 흘러나왔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몸을 겨우 일으키자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옆으로 오랫동안 벌려져 있어서 그런지 허벅지 안쪽도 땅겼다. 해인이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 내딛자 손목이 턱 잡혔다. 뒤를 돌아보니 백담호가 꽤나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지.
해인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백담호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호감도는 ‘62’이었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던 것 같기도 했다.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해인은 백담호의 눈을 슬쩍 피했다.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다.
“어디 가.”
“샤워하, 큼, 샤워하러 가는 거야.”
마치 자신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구는 백담호에 해인은 안심하라는 듯 제 손목을 잡은 손등 위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같이 가.”
“어? 아니야. 혼자 들어갈래….”
“왜, 나한테 정 털렸어?”
“응……?”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혼자 샤워하겠다는 걸 어떻게 들어야 정이 털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혹시 장난인가 싶어 해인은 눈만 옆으로 돌려 백담호의 낯을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자못 심각해 보였다.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도 점점 힘이 들어가 조금 아파 왔다.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백담호의 행동에 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썼다.
“갑자기 그게 무슨….”
아, 내 탓이구나.
‘하고 나니까 존나 별로였어? 막상 좀 붙어먹고 보니까 별로였어? 시발, 내가 좀 더 재롱이라도 부렸어야 했나? 나도 몰랐는데 나 존나 못하나 보네…. 본전은 시작도 안 했는데 까인 걸 보면, 시발.’
해인이 피해 다녔던 이유를 백담호는 자기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다. 예전 일이 떠오르자 방금까진 심각해만 보이던 백담호의 얼굴이 조금 불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해 해인은 미안해지고 말았다. 찌푸렸던 표정을 풀고 해인은 고개를 저으며 푹 수그렸다.
“…쪽팔려서 그래.”
“뭐가?”
해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백담호는 한 번 더 되물었다. 그러자 해인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하다가… 지렸잖아….”
아, 하는 탄성 뒤로 백담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정적이 길면 길어질수록 해인의 목과 얼굴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신이 번쩍번쩍 튀며 원치 않게 달달 떨리는 몸, 그리고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제 성기에서 소변처럼 흐르던 맑은 물줄기와 그걸 빤히 보던 백담호……. 하아….
해인도 그게 소변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이고, 너무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제정신이 들었을 때는 민망해서 이대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잘 보이고 싶은 상대 앞에서 밑바닥까지 까발려진 기분이라 눈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여전히 아무런 말 없는 백담호에 쪽팔림이 배가 되는 기분이라 해인이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버둥거리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 좀 현타 오니까 손-.”
백담호는 손목을 놓는 대신 해인을 끌어당겼다. 이미 기력이 다 빠져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해인은 쉽사리 끌려져 백담호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코앞까지 확 가까워진 백담호의 얼굴에 해인이 고개를 획 돌려 버리자 백담호는 해인의 볼에 제 이마를 부볐다.
“난 또 뭐라고. 그게 뭐가 쪽팔려. 내가 지리게 한 건데.”
자기가 지리게 했다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백담호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니 민망함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런 해인의 속내도 모르고 백담호는 이제는 붉은 해인의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가 가볍게 물기를 반복했다. 해인이 살짝 얼굴을 피해도 따라붙어서 계속되는 달달한 스킨십에 수치심에 굳어 있던 해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아직도 혼자 씻고 싶어?”
백담호 역시도 목이 조금 잠겨 있어서 그런지 속삭이는 소리가 오늘따라 귓속을 간지럽혔다. 여전히 백담호를 쳐다보지 않는 해인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소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혼자 씻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 * *
분명 씻기 전까지는 그나마 돌던 혈색이 무언가에 쪽 빨린 듯 해인은 수척해진 얼굴로 욕실을 나왔다. 그의 뒤로 뽀송해진 백담호가 따라 나오며 비틀거리는 해인을 부축했다.
욕실에서 둘은 씻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아니, 처음에는 백담호가 머리 감는 것도 도와주고 몸에 거품 칠하는 것도 도와줬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같이 씻었던 적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좁은 공간에서 함께 부대끼고 있는 게 꽤 마음에 들었고…. 또 정말로 사귀는 사이가 되어서 그런지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백담호가 욕조에 물을 채울 때는 말렸어야 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풀어야 하지 않겠냐는 그의 말을 부정하며 단호하게 나왔어야 했다. 이미 반쯤 서 있는 백담호의 것에 무슨 수작인지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음에도 해인은 미련하게 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온몸이 희롱당하고 다시 씻고 나왔을 때는 정말 아래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얼얼했다. 다행히 백담호가 또 그 무지막지한 것을 넣으려 하지는 않았지만 좆만 안 들어갔을 뿐이지, 집요하게 쑤셔 대는 손가락을 받아 내야 했다.
피곤함에 무겁게 처진 눈꺼풀로 해인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슴팍이고 배 위고 허벅지고 다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백담호는 역시 뇌가 하반신에 달린 게 맞는 것 같다.
“하아….”
이대로 잠들고 싶어 해인은 침대 위를 슬쩍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시트는 다 구겨져 있었고 일부분은 축축하게 젖어 짙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떠오르는 민망한 장면이 많아져 해인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돌려 버렸다. 저기선…. 아무래도 못 잘 것 같다.
백담호가 마른 수건을 하나 더 꺼내 와 해인에게 다가왔다. 해인이 조금 경계 어린 눈으로 노려보자 백담호는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 수건으로 해인의 젖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생각보다 섬세한 손길에 해인은 눈치를 보다 이내 의자 등받이에 몸을 쭈욱 늘어트렸다.
“힘들어?”
“응, 힘들어…. 온몸이 다 쓰라린 것 같아…. 더 하면 죽을지도 몰라….”
해인의 우는소리에 백담호는 물기를 닦아 내던 수건을 치우고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해. 약 발라 줄까?”라고 말했지만 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대충 다 마르자 백담호가 수건을 치우고 해인의 옷을 가지고 왔다. 무슨 시종처럼 스스로 수발을 드는 백담호의 모습에 해인은 힘없이 웃다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 * *
새벽 5시가 넘은 시간, 백담호의 차가 해인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백담호의 말을 거절하는 대신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나서야 백담호는 오피스텔 방향으로 차를 틀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해서 가고.”
해인이 기어코 현관문 앞까지 따라온 백담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게 영 만족스럽지 않은지 입이 살짝 부루퉁하게 나와 있었다. 문고리는 잡았지만 해인이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안절부절못하자 백담호가 옆을 흘겨봤다. 꾸물꾸물 허공에서 가만있지 못하는 손을 백담호가 낚아채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일어나면 연락하고.”
말할 때마다 해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스쳐 지나갔다. 빤히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대답을 요구하는 것만 같아 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연락도 잘 받고.”
해인이 또 끄덕거리자 백담호는 “꼭.”이라고 덧붙이며 강조했다. 해인도 두 번 끄덕이자 드디어 백담호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쪽, 손바닥에 살포시 입을 붙였다 떨어트리고 백담호는 해인의 손과 깍지를 껴서 다시 손등에 입술을 붙였다.
“잘 들어가고 이따 봐. 자기.”
백담호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쿵쿵거리다 못해 쾅쾅쾅 뛰는 심장이 가슴 안쪽을 때려 얼얼하기도 했고 가슴을 중심으로 찌릿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자기라는 낯설고 간지러운 호칭이 귓가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울리는 듯했다.
아, 맞다. 사귀기로 했지. 낯간지러운 호칭을 붙여도 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손이 뜨겁네.”
얼굴은 뭐 더 뜨겁겠고. 백담호가 해인의 귀 언저리를 문지를 때가 되어서야 해인은 멎었던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쿵쿵 울리는 게 기분이 정말 좋은 것 같기도 했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백담호가 갈수록 더 좋아지니까 무서웠다.
“어…. 어…. 이따가… 봐.”
떠듬떠듬 대답하자 백담호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아줬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해인이 드디어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돌아보니 아직 가지 않은 백담호가 손을 흔들어 해인도 같이 손을 흔들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쿵, 작게 울린 소리 뒤로 조용한 복도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긴장이 확 풀린 해인의 몸이 주르륵 아래로 가라앉았다. 굽혀진 무릎에 얼굴을 폭 묻고 긴 숨을 내뱉었다.
새벽 공기에 몸이 차게 식어서 그런지 숨결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깜깜한 집 안, 현관 센서 등까지 꺼지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해인은 굳이 다시 불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와…….”
가슴팍에 손을 살며시 올려 두니 진동이 손등까지 전해졌다. 아직도 크게 박동하는 심장에 해인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겨우 자기라고 불렸다고 이렇게까지 설렐 일인가, 이렇게까지 기분이 들뜰 일인가 의문이 드는데 심장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해인은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몇 번 더 그렇게 문지르다 엉덩이가 얼얼해져 이제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센서 등이 화악 켜지며 해인의 눈에 실내용 슬리퍼가 들어왔다.
“뭐 해요, 해인 씨.”
눈을 끔뻑끔뻑 뜨며 올려다보니 서준이었다. 오늘도 집에 안 들어갔네. 이제는 오피스텔에 있는 게 더 익숙한 서준이라도 지금은 꽤 곤란했다. 방금까지 백담호랑 별짓을 다 하고 와서 그런지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로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뜬 서준이 몸을 숙여 해인의 부스스한 앞머리를 걷어 냈다. 그 순간 서준의 머리 위에 있던 호감도가 ‘35’에서 ‘33’으로 떨어졌다.
“해인 씨….”
서준의 표정이 심각하게 보여 해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 들켰나?
“술을 지금까지 마신 거예요?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아.”
얼굴이 빨개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떨어졌던 호감도는 서준을 걱정시켰기 때문인 건가? 그렇다고 호감도가 ‘2’나 떨어질 일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서준은 자신이 공부한다고 했을 때 호감도가 올랐었다.
부모의 마음…. 뭐 그런 건가…? 다시 보니 걱정스러운 서준의 표정에 해인은 차라리 술로 날밤을 깐 척하기로 했다. 뻣뻣하게 굳은 입매를 곧바로 흐물흐물 풀어 말아 올렸다. 거울이 없어 제 표정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꽤 술에 취한 사람 같길 빌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하하….”
“술 많이 마시지도 않으시면서. 일단 일어서요.”
서준이 해인의 팔뚝을 감싸 일으켰고 해인은 부러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실제로도 엉덩이는 아렸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저절로 후들후들 떨렸다. 잠깐 쭈그려 앉아 있는데도 이러는데 일어나면 근육통이 오는 게 아닌가 걱정이 살짝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해인은 착실히 술 취한 연기를 하며 가끔 머리도 흔들며 서준의 어깨에 부딪히기도 했다.
“어우, 얼마나 마신 거예요. 중심을 못 잡네.”
“아…. 죄송……. 헉.”
너무 술 취한 연기를 잘한 탓일까, 해인의 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서준의 어깨에 들쳐 메지고 말았다. 예상하지 못한 자세에 해인이 몸을 버둥거리자 서준이 “쉬이, 가만히 계세요. 혹시 토 나올 거 같으면 말하세요. 차라리 업을까요?”라고 물어 와 해인은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업히는 것보단 이게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인은 서준에게 들쳐 메져 침실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해인에게 이불까지 꽁꽁 덮어 주고 나서야 서준은 침실을 나갔다.
무사히 넘어간 거겠지…? 해인은 깜깜한 허공을 쳐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이불의 포근함을 느끼며 점점 수마에 빠져들고 말았다.
* * *
눈이 저절로 떠졌다. 맑아진 정신을 보니 꽤 오랜 시간 잔 것 같았다.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생각보다 하체가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 눈을 끔뻑거리며 창문을 바라보니 블라인드 사이로 쨍쨍한 햇빛이 옅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약간 더운 거 같아 이불을 걷어 내니 발밑에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잠들기 전에 주머니에서 안 뺀 것 같았는데 자다가 빠졌나 보다. 몸을 지렁이처럼 늘어트려 휴대폰을 집어 올리니 잘게 진동하면서 화면이 켜졌다.
켜진 화면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오후 5:43’이었다. 엄청 오래 잤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떠올라 있는 여러 알림을 살피다 해인은 멈칫거리고 말았다. 부재중 4통과 문자 12통이 떠올라 있던 탓이었다. 발신인은 모두 백담호였다.
“미친.”
남아 있던 졸음이 전부 달아난 해인은 다급하게 잠금을 풀고 바로 백담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연락도 잘 받고. 꼭.’
헤어지기 전에 백담호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느라 못 받은 거긴 했지만 백담호는 그걸 모를 테니까. 게다가 전에 자신이 도망 다녔던 걸 백담호가 여전히 신경 쓰는 걸 알았기에 불안감은 더해졌다. 통화 연결음이 2번도 울리지 않고 바로 뚝 끊겼다.
[응, 해인아. 일어났어?]
여러 통의 전화와 메시지와 달리 들려오는 백담호의 목소리는 잔잔해 되레 해인이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대답하려던 해인은 목이 완전히 잠긴 것을 깨닫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치 앞에 백담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치를 보듯 해인은 괜히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한 채였다.
“아, 응. 방금 일어났어. 미안, 전화 못 받았네….”
[괜찮아. 자느라 못 받은 건데. 급한 것도 아니었어.]
목소리만 듣기에는 정말 괜찮아 보여 해인은 내심 안도를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시스템창을 열어 백담호의 호감도를 살피고 있었다. ‘64’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랑 똑같은 숫자였다.
[많이 피곤해?]
“아니. 오래 잤더니 괜찮아.”
[몸은.]
“몸도 괜찮아.”
[다행이네. 아픈 줄 알았잖아. 하도 연락이 안 돼서.]
“아…. 미안.”
[아니야. 해인아, 사과 그렇게 안 해도 돼. 괜찮아.]
“아, 응. 미-, 알겠어.”
이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해인은 짧게 대답을 하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목적 없는 전화는 별로 해 보지 않아서 한마디 한마디가 어려웠다.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가끔씩 옅은 숨소리만 들려오다 백담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따 영화 볼까?]
“영화?”
[응,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음, 해인이 소리를 흘렸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는 아는 게 없었다.
“딱히 없는 것 같아. 너 보고 싶은 거 보자.”
[그래?]
“응.”
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알겠어, 그럼 예매하고 말해 줄게.]
“응응.”
이따 봐, 하는 말소리와 함께 전화는 끝났지만 아직 시스템창은 닫지 않은 상태였다. 공중에 떠 있는 백담호의 정보창을 보던 해인은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려 미처 보지 못한 백담호의 메시지를 봤다.
2021년 10월 22일 토요일
[백담호: 해인아 일어났어?] 오후 1:04
[백담호: 아직 자나 보네.] 오후 1:17
[백담호: 아직도 자?] 오후 2:03
[백담호: 많이 피곤한가 보네….] 오후 2:04
[백담호: 이따 영화 볼까.] 오후 2:34
[백담호: 일어나면 전화해.] 오후 2:35
[백담호: 해인아 살아 있지?] 오후 3:27
[백담호: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오후 3:28
[백담호: 몸이 이렇게 약해서 어떡해…….] 오후 3:29
[백담호: ㅠㅠ] 오후 3:29
[백담호: 진짜 쓰러진 거 아니지?] 오후 4:38
[백담호: 보러 가야 하나….] 오후 4:38
시간마다 빼곡하게 쌓인 백담호의 메시지들을 보며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이렇게 간섭하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사귀기 전에는 백담호와 이런 관계가 되는 게 두려웠는데 막상 사귀게 되니 불안보다 행복이 더 커져만 갔다. 앞날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현재에만 머물고 싶었다. 행복한, 지금 이대로.
나가지 않은 채팅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백담호 : 7시에 볼까.] 오후 6:12
[백담호: 7시에 보자. 대충 하고 나와.] 오후 6:12
문자를 보자마자 해인은 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7시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대충 하라고 나오라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대충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처음 하는 데이트인데…. 계속 둘이 붙어 다니긴 했지만, 관계가 달라진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데이트인데 당연히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은 일단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면서 답장을 보냈다.
[방해인: 7시 10분은 어때???] 오후 6:14
[백담호: 응, 괜찮아.] 오후 6:14
* * *
씻으면서도, 옷을 고르면서도, 심지어 시간을 볼 때까지도 늘 반복해 왔던 사소한 행동들이 지금은 생소했다. 괜히 입매가 말려 올라가고 모든 선택에도 신중해졌다. 이토록 외출 준비를 즐거운 마음으로 한 적이 있었던가.
시곗바늘이 ‘7’과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짐과 동시에 들떴다. 아직 준비를 다 끝내지 못했지만, 백담호를 만날 시간이 다가오자 해인은 옅은 미소를 띠우고 작게 흥얼거렸다.
좀 꾸민 것 같으면서도 편한 복장을 고민하다 보니 벌써 시곗바늘이 ‘7’에 도착해 있었다. 심지어 어깨와 빗장뼈 쪽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가득해 입을 수 있는 옷은 더 한정적이었다. 타이밍에 맞춰 울리는 알람을 끈 해인은 결국 적당한 두께의 니트와 연한 청바지를 입고 후다닥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와 정신이 싸해졌다.
서준에게 말한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해인이 곤란해진 얼굴로 빠르게 부엌으로 가니 서준이 상을 차리고 있었다. 어제 술을 마셨다고 해서 그런지 식탁에는 콩나물 계란 국과 여러 가지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아, 해인 씨 마침….”
인기척을 느낀 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이내 미소는 조금 사그라들고 말았다. 해인의 복장이 누가 봐도 외출복인 탓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준비에만 급급해서 서준을 잊고 말았다. 다 차려 놓은 음식상을 힐끔 보고 휴대폰을 보니 7시 2분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빨리 먹는다고 해도 절대 제때 먹지 못할 시간이었다. 저녁 시간이었는데 왜 까먹어서, 해인은 자기 자신을 질책하며 미안함에 눈을 추욱 늘어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준 씨…. 제가 정말 미안해요. 약속이 생겨서 지금 나가야 하는데 말하는 걸 깜빡했어요. 급해 가지고 죄송해요…. 정말.”
“바로 나가야 해요?”
서준은 물어 오며 해인에게 다가왔다.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준은 조금 섭섭한 듯 입술을 안으로 꾸욱 말아 넣었다.
“요즘 많이 바쁘시네요….”
속상해 보이는 서준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해인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눈치만 봤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 지은 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밥은 먹고 들어오실 거 같고,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세요. 날이 추워요.”
서준이 해인이 입고 있는 옅은 베이지색 니트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걱정이 묻어 있으나,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에 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는 황급히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갔다 올게요.”
네, 하고 들리는 서준의 대답을 뒤로하고 해인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행히도 가까운 층에 있었던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도착했고 시간을 살피니 7시 8분이었다. 중간에 안 멈추면 안전하게 제시간 안에 로비에 도착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해인은 내려가는 숫자와 시간을 초조하게 번갈아 봤다. 그동안 한 번도 높은 층에 살면서 불편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좀 불편했다. 로비에 도착하니 시간은 7시 11분이었다.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중간에 사람이 몇 번 탔고 7시 9분이 되었을 때 하필 어떤 사람이 자전거를 들고 타는 바람에 자리를 잡느라 시간이 더 지체되고 말았다.
처음으로 둘이 잡은 제대로 된 약속이었는데 늦고 싶지 않았다. 로비 입구로 달리다시피 나오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익숙한 차가 보였다. 백담호의 차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허리에 팔이 둘러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트렌치코트를 입은 백담호가 웃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급해.”
자신보고는 대충 입고 나오라고 해 놓고 백담호는 누가 봐도 깔끔하게 꾸미고 나온 티가 역력했다. 새벽까지 같이 있으면서 본 얼굴이지만, 새삼 잘생겼다 싶었다.
나올 때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백담호를 보니 너무 대충 나왔나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마침 로비 입구에 달린 조명이 꺼지며 해인이 서 있는 곳만 어두워졌다. 연출된 상황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머쓱해져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미소 짓고 있는 백담호를 보다 문득 쏠리는 시선에 해인이 허리에 둘러진 팔을 떨어트리며 미안한 투로 말했다.
“언제 왔어? 빨리 왔네. 좀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다.”
팔은 쉽게 떨어졌지만 금방 어깨를 감쌌다. 백담호는 이 자세를 자주 하곤 했다.
“괜찮아. 나 기다리는 거 잘해.”
백담호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해인은 조금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치, 백담호 기다리는 거 잘하지.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왜, 해인아.”
백담호가 갑자기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당황한 해인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표정이 왜 안 좋아졌어, 어디 안 좋아?”
“응? 아냐. 괜찮아.”
내 표정이 안 좋았나? 해인이 손으로 볼을 문지르며 도리질을 쳤다.
“괜찮으면 다행이고. 어디 안 좋으면 바로 말해.”
“알겠어. 바로 말할게.”
“그래그래, 늦겠다. 가자.”
* * *
주말의 저녁, 영화관에는 역시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영화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백담호는 표가 아닌 팝콘과 콜라를 해인의 품에 안겨 줬다. 그러곤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쌩하니 표를 뽑으러 갔다.
영화관 자체를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백담호랑 와서 그런가. 표를 뽑으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백담호는 단연 눈에 띄었다. 키도 월등하게 컸고 덩치도 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분위기가 남달랐다.
누가 봐도 얼굴에 ‘백담호’라고 써서 다니는 거 같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백담호는 누가 봐도 백담호였다. 세상 혼자 사는 것 같은 사람. 이 세계의 주연에 정말 걸맞은. 그러니 그에게 눈길이 쏠리는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표를 뽑고 걸어오는 백담호를 곳곳에서 힐끔거리는 게 멀리서 보니 더욱 잘 보였다. 그러나 백담호는 누가 보든 말든, 아니, 시선을 알긴 아는 건지 앞만 쳐다보고 유유히 걷고만 있었다. 성격만 조금 유하면 아마 대학에서도 사람들이 항상 붙어 있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오늘은 힘을 준 탓인지 유독 잘생겼기도 했고.
“흠.”
해인이 턱을 괴고 점점 가까워지는 백담호를 쳐다봤다. 백담호와 사귀기로 했지만 이 관계가 평생 갈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겨우 22살에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희박했다.
백담호는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고 자기 주관도 뚜렷하고 조금 거친 면이 있긴 하지만 친해지면 배려심도 있고 다정하기도 하다. 그러니 살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될 거고 그중에는 자신보다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은 뭘 해도 떨어지지 않는 저 높은 호감도가 시간까지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백담호와 연인이 되는 것을 계속 망설였었다. 연인이었다가, 백담호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좋아해 버리면 그땐 관계가 명백하게 끝나게 된다. 되겠지만, 전처럼 애매한 사이에 지친 백담호의 마음이 떠나게 되면 그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고, 어차피 별 사이 아니었다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해인은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는 쪽을 선택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늘 계속 쳐다보네. 민망하게. 내 얼굴 뚫리겠어, 해인아.”
어느새 다가온 백담호가 이를 살짝 보이며 웃었다. 전혀 민망해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옆자리에 놓은 팝콘을 들자 백담호가 바로 앉았다.
“반했어?”
“응.”
해인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백담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가 ‘65’로 올라갔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백담호에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해인은 그와 조금 더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언제일지 모를 미래에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현재의 자신은 백담호의 곁에 있어야 제일 상처를 덜 받을 테니. 이게 오늘날의 나에게 있어서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미래의 내가 잊지 말아 주기를.
해인은 백담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백담호는 제게 기댄 해인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다가, 그의 얇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간질거리는 접촉과 더불어 주변에서 힐끗힐끗거리는 시선에 백담호의 손을 떨어트리고 몸을 스르르 일으켰다. 그러자 곧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해인이 슬쩍 위를 옆을 돌아봤다.
“우리 영화 뭐 봐?”
다시 머리를 기대라는 듯한 담호의 표정에 해인은 살짝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백담호는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해인은 무수한 시선이 쏠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제게서 떨어진 해인에 백담호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굳이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저거.”
백담호가 손가락으로 현재 상영작들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 포스터 중 하나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다양한 포스터들 중에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가 눈물을 머금고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쓰여 있는 문구나 분위기로 보아하니 세기의 감동적인 사랑을 담은 로맨스 영화 같았다.
포스터만 봤을 뿐인데 내용을 다 알 것 같았다. 제 취향은 딱히 로맨스가 아니었지만 큰 호불호는 없는 편이었다.
다만, 영화나 소설 같은 걸 볼 때면 해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도 작품 속 세계라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조금 불안해져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예 판타지나 SF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배경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게 그나마 편하고 즐거웠다.
포스터에 고정되어 있던 해인의 시선이 잠시 그 옆에 있던 폐허가 된 우주 함선과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찍힌 포스터에 향했다가 떨어졌다. 옆을 돌아보니 백담호는 거드럭거리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니까 저게 평이 좋더라고.”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어조에 해인은 의아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좋아할 거 같기도 하고.”
응? 백담호의 말에 해인은 다시 한 번 여자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흘겼다. 하지만 오히려 더 의아해질 뿐이었다. 내가 좋아할 거 같다고? 백담호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자신이 로맨스 장르를 좋아할 거 같다고 생각한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백담호와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많이 본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영화관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백담호가 오해한 게 분명했지만 해인은 굳이 그걸 정정하지 않았다. 로맨스 장르를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으응, 그러게. 재밌어 보인다.”
미소 짓는 표정이 조금 어색하게 보일까 봐 해인은 괜히 팝콘을 집어 먹었다.
* * *
기나긴 광고가 끝나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해인은 왜 백담호가 자신이 좋아할 것 같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영화의 첫 장면에 우주 함선이 등장했다. 백담호가 예매한 영화는 로맨스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SF 영화였다. 확실히 로맨스보다는 좋았다. 그런데 보통 첫 데이트에선 로맨스 영화를 보지 않나. SF 장르를 좋아한다는 걸 딱히 말했던 기억은 없는데 백담호도 좋아하는 걸까. 취향이 은근 잘 맞나?
해인은 스크린을 보는 대신 옆자리에 앉은 백담호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제 취향을 어떻게 알아냈나 신기한 것도 있었고, 백담호랑 나란히 상영관에 앉아 있자니 새삼 의식이 된 탓도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담호랑 둘이서 영화관에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마음을 자각한 후로는 영화관은 물론 어디든 함께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새삼스러울 게 많았다. 백담호가 새삼 잘생겼다 싶었고, 백담호랑 둘이 있는 게 새삼 낯설게 느껴져 손가락이 꿈지럭거렸다. 영화가 무슨 내용으로 전개되는지 모를 정도로 해인의 신경은 오른쪽에 쏠려 있었다.
스크린에 비추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백담호의 옆얼굴이 여러 색으로 흐리게 물들었다. 해인은 얼굴이 재밌다는 게 어떤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지금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스크린을 보는 척 곁눈질을 하던 찰나, 어깨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백담호가 몸을 기울여 해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해인아, 영화 재미없어?”
조곤조곤 들려오는 속삭임은 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나갈까?”
갑작스런 말에 해인은 다급히 속삭여 대답했다.
“아냐, 재밌어.”
“그런데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아…….”
네 얼굴이 잘생겨서 영화는 눈에도 안 들어온다고 사실대로 말하기 부끄러워 해인은 적당한 말을 골라냈다.
“그…. 그냥 내가 이런 영화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나 해서.”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백담호는 팔걸이 위에 올려져 있던 해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냥. 나도 이제 너 잘 알아.”
담담한 중얼거림에 해인은 입을 살짝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나는 이제 네가 너무 어렵던데, 라는 말은 아무도 듣지 못할 빈 공간에서만 울렸다 흩어졌다.
* * *
“재밌었어?”
“응, 완전!”
해인이 조금 남은 팝콘과 탄산음료를 버리며 밝게 대답했다. 담호의 모습을 눈에 담느라 초반부를 놓치긴 했지만 영화는 재밌었다. 전개도 신선했고 무엇보다 CG에 돈을 많이 들인 건지 시각적으로도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영화권에서 나오니 9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북적거리던 영화관 로비에는 몇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영화관 옥상 주차장을 가기 위해 해인과 백담호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뭐라도 먹을까, 배 안 고파, 해인아?”
라지 사이즈인 팝콘을 거의 다 먹고 탄산음료까지 마시니 배는 고프지 않았다. 약간의 느끼함 때문에 오히려 입맛이 가신 상태였다.
“난 괜찮아. 너는? 팝콘도 내가 다 먹은 거 같던데.”
“나도 별로.”
두세 번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니 옥상 주차장에 도착했다. 자동문이 열림과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한 번에 훅 끼쳐 와 해인은 눈을 감고 어깨를 팍 움츠렸다. 옥상이라 거침없이 불어오는 찬 바람이 그대로 느껴졌다.
“추워?”
백담호가 해인을 거의 품에 안 듯 제게 끌어당겼다. 해인은 얌전히 백담호의 옆에 꼭 붙은 채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갈수록 밤이 추워지는 게 곧 겨울이 오는구나 싶었다. 추운 건 별론데. 둘은 빠르게 걸어가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차 안도 서늘하긴 했으나 밖보다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백담호는 시동을 틀고 조수석 시트 열선 버튼을 눌렀다. 빠르게 따뜻해지는 엉덩이에 해인은 안전띠를 빠르게 매고 조금 차가운 손끝을 덥히려 허벅지 아래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백담호가 글로브 박스를 열어 원통 모양으로 말린 담요를 꺼내 건넸다. 말로 해 줘도 될 걸 굳이 직접 꺼내서 주며 백담호는 눈을 맞혀 왔다.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얼굴에 열이 올랐다.
“고마워.”
담요를 펼쳐 무릎에 덮으며 말하자 백담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차가 곧 출발했다.
“다음에 저녁에 나올 땐 두껍게 입고 나와, 해인아.”
“응, 그래야겠다. 이제 좀 춥네.”
백담호의 걱정 어린 핀잔에 해인은 코를 훌쩍 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창문을 쳐다보니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영화관과 달리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차 안의 훈기에 몸이 점점 따뜻해져서 그런가, 그렇게 잤는데도 눈꺼풀이 조금 무거워졌다.
어제 무리를 하긴 했나 보다. 이렇게 피곤해지는 걸 보면.
“해인아, 피곤해? 집에 데려다줘?”
해인이 눈을 끔뻑거리며 창밖을 보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해인이 눈을 크게 뜨며 백담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했다. 백담호와 조금 더 있고 싶긴 했지만….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세요. 날이 추워요.’
이대로 더 늦게 들어가거나 외박을 하기엔 서준이 마음에 걸렸다. 나간다고 미리 말도 안 해서 괜히 상을 차린 서준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아쉽긴 했으나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응, 피곤하다.”
때 좋게 빨간불에 차가 멈췄다. 고개를 돌린 백담호가 해인의 얼굴을 슥 살피고는 덤덤하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백담호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그 모습에 먼저 집에 가겠다고 하긴 했지만 괜히 섭섭함이 밀려왔다. 언제는 자고 가라고 붙잡고 놔주지도 않았으면서. 하지만 섭섭한 티를 낼 순 없어 해인은 서운함을 애써 감췄다. 차 안을 비추던 빨간 빛이 곧 초록색으로 바뀌고 차가 출발했다.
오피스텔 근처에 차를 세운 백담호는 역시나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엘리베이터 안이라 밖보다 춥지도 않은데 백담호는 해인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심지어 차에서 덮었던 담요를 두르고 가라고 성화여서 해인은 회색 담요를 몸에 두른 채 내려야만 했다. 담요를 두를 정도의 추위는 아니라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기분이었다.
“위에까지 안 바래다줘도 된다니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단호한 백담호의 말에 해인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다는데 할 말도 없었고 무엇보다 내심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타는 사람 없이 엘리베이터는 43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최상층에는 해인밖에 살지 않아 복도는 늘 고요했다. 둘은 그렇게 모퉁이를 돌아 해인의 집 앞에 도착했고 그제야 백담호는 끌어안았던 팔에 힘을 풀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응.”
“조심해서 돌아가고.”
“응.”
나긋하게 웃으며 자신의 말에 짧게 응응거리는 게 사뭇 귀여워 해인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집 가면 연락해.”
바로 돌아오던 그 전 대답과 달리 짧은 공백 후 백담호의 머리 위에 숫자가 올라갔다.
[호감도 66].
“응, 좋아해.”
백담호가 눈을 더욱 예쁘게 휘며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과 듣기 좋은 말에 해인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작게 “나도”라고 뱉었다. 둘의 시선이 맞닿길 몇 번, 해인이 뒤늦게 담요를 아직도 두르고 있는 걸 깨닫고 서둘러 빼내려 했지만 백담호가 제지했다.
“다음에 줘, 해인아.”
흐트러진 담요의 앞섶을 백담호가 다시 꽉 옭아맸다. 다정한 손길에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백담호는 만족스럽다는 듯 해인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헤집어 놓았다.
“춥다, 이제 들어가.”
“으응. 너도 잘 가.”
“응.”
짧은 인사 끝에 해인이 비밀번호를 누르려 손을 들었지만 자꾸만 눈길이 백담호를 향했다. 아쉬움에 옆을 몇 번이나 흘긋거리다가 겨우 감정을 갈무리한 해인이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턱이 가볍게 잡혀 옆으로 돌아가고 그대로 해인의 입술 위에 물컹한 것이 닿았다.
놀란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니 시야에 백담호가 가득했다. 해인의 코끝이 백담호의 코끝과 맞닿아 비벼지고 입술도 함께 비벼졌다. 차게 식었던 콧볼에 따뜻한 숨결이 퍼져 해인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가볍게 입술이 빨리고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은 귓가를 매만졌다.
“후으…….”
문질러지는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인의 것이었다. 귓바퀴를 만지던 손이 귓속을 파고들어 가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싹한 감각이 오른쪽 볼부터 목 언저리까지 퍼졌다. 꼭 저린 느낌이었다. 벌어진 입 틈새로 뜨거운 혀가 파고들어 왔고 해인은 그걸 반기듯 툭 건드렸다.
여기가 집 안이 아니라 복도라는 것도 잊고 해인은 얽히는 혀의 감각과 짜릿한 감각에 몰두했다. 키패드 앞에서 갈 곳을 잃었던 손은 몸이 돌아감에 따라 백담호 쪽으로 향했다. 아릿한 성감에 파르르 떨리던 손이 조심스럽게 백담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얼굴은 차가웠고 겹쳐진 입술은 뜨거웠다. 온도 격차가 커서 입 안의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입맞춤은 달았다. 혀가 깊숙하게 파고들어 입 안 곳곳을 쿡쿡 찔렀다. 목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간질거림에 백담호의 옷깃을 잡은 해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여린 입천장을 간지럽히듯 혀가 진득하게 문지르자 그 너머 비강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각에 허리가 저려 왔다. 키스의 농도가 더욱 짙어져 가던 때 백담호가 스르르 입술을 떨어트렸다. 물고 빨려 붉게 달아오른 해인의 입술에서 은색 실이 음란하게 늘어졌다.
가쁜 호흡에 분홍색으로 물든 두 뺨을 백담호가 사랑스럽다는 듯 은은하게 내려다보다 숨을 내쉬듯 말을 흘려보냈다.
“나 여기서 살까, 해인아.”
“…응?”
어둡게 풀린 해인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지금 백담호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멍해진 머리로 해인은 생각하려 백담호의 까만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물기 어린 눈이 몇 번 더 깜빡이자 백담호는 실없이 웃으며 가볍게 해인의 이마에 입을 붙였다 떨어트렸다.
“귀엽다. 해인아.”
이제 들어가, 정말. 감기 걸리겠다. 백담호가 이제 정신 차리라는 듯 해인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더 나갔을 진도가 끊기니 해인의 눈동자가 백담호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아쉬운 티가 여과 없이 겉으로 드러나 백담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인이 평소보다 피곤해 보이고 열이 나지 않았더라면 더했을 테지만, 아프면 안 되니까. 게다가 어제 무리한 탓에 해인이 아파하는 것을 보니 오늘은 더 참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대해 주려고 해도 방해인은 그걸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 옷도 귀엽게 입어서는 하는 짓은 더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한번 손가락으로 훑고 해인의 몸을 문 쪽으로 돌려 주자 그제야 해인은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해인이 담호를 보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백담호 역시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해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담호는 꾹 눌러 왔던 욕망을 깊은 숨에 담아 뱉었다. 미련이 남은 듯 보이는 해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담호는 벽에 몸을 기대고 잠시 서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 * *
문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입술을 비빈 탓인지 눈두덩이가 뜨끈했다. 서준은 퇴근을 한 건지, 자는 건지 기척이 없었다. 신발을 대충 발로 벗으며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걸어갔다. 열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흥분감은 서서히 진정되었다.
‘나 여기서 살까, 해인아.’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치고는 파급력이 상당했다. 처음에는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백담호랑 같이 살게 되면 어떨까. 아마 매일같이 붙어 있겠지? 딱히 차를 탈 필요도 없을 테고, 새벽에 산책도 나갈 수 있을지 몰랐다. 혼자 앞서나가는 제 상상에 해인은 픽 웃음을 흘렸다.
백담호는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을 테니까. 정말 진심이었더라면 자신이 되물었을 때 백담호는 다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말로 넘어갔다.
같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함께 공유할 것이 많아지니 원치 않는 것까지 공유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좋아한들 생활 방식 같은 건 다를 테니 배려할 부분도 더 늘어나겠지. 또 너무 붙어 있으면 오히려 서로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래도 집이 좀 가까웠으면 좋았을 것 같긴 하네. 해인은 생각하며 눈을 문지르던 손을 떨어트렸다. 압박되면서 눈물이 조금 나온 건지 눈이 촉촉해져 시야가 조금 뿌옜다.
“어.”
그 뿌연 시야 너머로 누군가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빠르게 눈을 깜빡여 물기를 없애니 서준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들어왔네요, 해인 씨.”
“아 네. 기다렸어요?”
아까 일 때문에 해인은 괜히 서준의 얼굴을 보기가 무안했다. 민망해진 해인이 과장되게 웃음을 그려 내자 서준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채 해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도 얼굴이 빨개요. 술 마셨어요?”
“네? 전혀요!”
“그래요?”
한 걸음을 남겨 두고 다가온 서준은 앞에서 서서 해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펴봤다. 쳐다보는 표정이 묘해 해인은 조금 경직된 채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의 서준이 사뭇 다른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서준이 손을 스르르 뻗어 왔다. 턱 근처로 다가온 손은 그대로 위로 올라가 해인의 이마를 짚었다.
“아, 역시 열나네.”
“저 열나요?”
아, 진짜 열나는 거였구나. 해인이 몰랐다는 듯 굴자 서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오늘 춥다고 일찍 들어오라고 했잖아요. 옷도 이렇게 입고 나갔으니 감기에 걸리죠. 다음부터는 따뜻하게 입고 나가세요. 추위에 약하시잖아요. 해인 씨.”
속사포로 쏟아지는 잔소리에 해인은 그제야 굳었던 몸의 긴장이 풀렸다. 익숙한 서준의 행동에 해인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의할게요.”
“일단 올라가 계세요, 제가 약 하고 쿨링 시트 가지고 갈게요.”
“네. 감사해요.”
서준이 먼저 자리를 떠났고 해인 역시도 제 침실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샤워를 하고 나오니 서준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해인은 서준이 주는 약과 함께 물을 마셨다. 열이 난다는 걸 제대로 인지해서 그런가, 어째 아까보다 몸이 더 뜨겁고 물 먹은 솜처럼 추욱 늘어졌다. 목도 조금 뻑뻑한 게 거슬려 해인이 큼, 헛기침을 했다.
“이맘때 항상 아프시더니 올해도 똑같네요. 그래도 이번엔 심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조금 시간이 지나고 서준이 누우라는 듯 이불을 들어 올리자 해인이 자연스럽게 몸을 눕혔다. 이 시기에 항상 아팠구나. 어쩐지 보살피는 서준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그 보살핌을 어느새 자신도 익숙하게 받고 있는 게 꼭 매년 받아 왔던 사람 같았다. 고작 반 년 빙의해 있었다고 서준의 챙김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가요….”
“네네, 얼른 주무시고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문자라도 하세요. 버티다가 결국 응급실 가지 말고.”
“……네.”
서준이 해인의 이마를 가르고 쿨링 시트를 붙였다. 머지않아 느껴지는 시원한 감각에 해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깜빡였다. 곧이어 서준이 문으로 걸어가며 불을 껐고 깜깜해진 침실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의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을 등진 서준이 그림자가 보였다가 문이 닫힘과 함께 사라졌다. 뭔가 익숙한 광경에 해인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러다 서준이 자주 자기 전에 자신을 돌보고 나가니까 익숙하겠지, 하고 납득했다.
내가 애새끼도 아니고. 강서준은 처음 봤을 때부터 유난스러웠다. 나쁘게 대해도 꿋꿋하게 자신을 챙기는 게 사실은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큼, 목 안이 간지러워 해인이 또 헛기침을 했다. 동시에 아까 집 앞에서 키스했던 게 떠올랐다. 백담호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집에 잘 갔으려나? 아, 근데 백담호 감기 옮으면 어떡하지. 아프면 안 되는데. 열이 들끓어서 그런지 생각이 산만하게 튀어올랐다.
* * *
이마를 건드리는 손길에 해인이 눈을 천천히 떴다. 꿈을 꿨다. 꿈속에서도 열이 났고, 침대에 누워 계속 끙끙거렸고 그때도 지금처럼 강서준이….
“아, 해인 씨 깼어요?”
“어……. 네.”
흐릿하던 시선이 선명해지자 제 이마에 손을 대고 있는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열은 다행히 거의 내렸네요. 정신 들면 바로 내려와요. 아침 먹어야죠.”
서준이 섬세한 손길로 해인의 앞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곤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멍한 해인의 시선이 아직 잠에서 덜 깼다고 생각한 건지 서준은 해인의 대답을 듣지 않고는 가볍게 미소만 띠운 채 침실을 나갔다. 멍하니 서준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문을 닫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건 꿈이 아니라 방해인의 기억이었다. 침실은 깜깜했고, 방해인의 몸은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불덩이 같았다. 온몸이 고통스러워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미련한 방해인은 그걸 참았다. 뭐가 그리도 고집스러운지 몇 번이나 휴대폰을 흘겨봤지만 꾹 참다가 결국 기절을 하고 말았다.
방해인의 기억을 되짚어보던 해인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방해인의 기억이 떠오르면 그때 방해인의 기분도 같이 느껴진다. 방해인은 아픈 몸뚱이에 화도 났고 또 좀 서럽고 슬펐다. 코도 막혀 입으로 숨 쉬느라 목도 아프고 눈물도 자꾸만 흘려 시야가 뿌옜다. 그렇게 아프면 강서준을 부르면 될 걸 방해인은 고집스럽게 참았다. 아픈 제 모습이 싫어서 다른 사람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다 결국 서준이 말했던 것처럼 방해인은, 아침에 찾아온 서준에게 발견되어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때 방해인의 기억과 감정이 느껴졌다.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감정이 공유되어 그런가 씁쓸했다. 해인은 순식간에 흘러들어 온 방해인의 기억과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숨을 고르게 쉬었다. 그러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약이 잘 들은 건지 열은 전부 내렸고 몸도 가뿐했다. 침대에서 발을 내리고 자연스럽게 침대 테이블 옆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올리자 진동이 느껴졌다. 천천히 걸으며 화면을 켜니 3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떠올라 있는 이름은 역시나 백담호.
“아.”
어제 자기가 먼저 집 들어가면 연락하라고 했다는 게 떠올라 해인은 머리가 조금 싸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2021년 10월 22일 토요일
[백담호: 나 집 왔어.] 오후 10:17
[백담호: 잘 자, 해인아.] 오후 10:37
[백담호: 일어나면 연락해. 놀라서 하지는 말고.] 오후 10:38
놀라서 하지는 말고. 이 말을 보는 순간 해인은 정말 진정되었다. 겨우 네모난 화면에 떠 있는 텍스트일 뿐인데 진정 효과라도 있는 건지 해인은 차분히 답장을 보냈다.
2021년 10월 23일 일요일
[방해인: 미안해…. 나 바로 잤어….] 오전 9:45
해인이 답장을 보낸 지 1분이 지나기도 전에 1이 바로 사라졌다.
[백담호: 그럴 거 같았어. 괜찮아, 피곤해 보였어.] 오전 9:45
[백담호: 아프지는 않았지?] 오전 9:46
[백담호: 약간 열이 좀 나는 것 같더라.] 오전 9:46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응, 안 아팠어.’라고 보냈다.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는 괜찮으니까 굳이 말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다’라고 돌아온 대답을 보고 나서야 해인은 드디어 침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맛있는 냄새를 맡으니 그제야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걸음을 내려가는 해인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부엌에 들어서자 반찬이 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서준은 싱크대에 서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서준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해인과 눈이 마주치자 서준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오셨네요. 앉으세요.”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고 서준은 바로 약불로 끓이고 있던 계란 국을 국그릇 담고 그 옆에 끓였던 전복죽도 같이 퍼서 해인의 앞에 놓았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소한 계란 국 냄새에 해인은 입맛을 다셨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해인이 “맛있게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서준은 미소로 화답했다.
해인은 손에 들려 있던 폰을 내려놓으려다 아직 백담호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장 대신 해인은 잔뜩 차려진 상 위를 죽은 안 보이게끔 찍었다.
[방해인: (사진)] 오전 9 : 57
[방해인: 냠] 오전 9 : 57
해인은 메시지가 전송되자마자 화면이 아래가 되도록 놓고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해인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계란 국을 퍼서 후후 불어 식혔다. 조금 식은 국물을 마시니 계란의 고소한 향이 입 안 가득 맴돌아 죽었던 입맛이 확 돋아난 기분이었다. 따뜻한 국물이 식도를 덥히는 감각이 기분이 좋았다. 적절하게 맞춰진 간과 깔끔하고 깊은 맛이 혀 위에서 감돌았다.
몽글몽글한 계란도 부드러워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강서준은 한식 자격증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서양식이나 중식 같은 것도 잘했지만 한식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잘했다. 몇 번 계란 국을 떠먹던 해인은 서준을 흘긋 쳐다봤다.
고작 계란 국을 한 입에 이기적이게도 서준을 평생 붙잡아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준이 떠나면•••. 다시는 제 입맛에 꼭 맞는 음식을 먹기 힘들 테니 말이다.
* * *
아직 미열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으니 하루는 쉬라는 서준의 당부에 해인은 꼼짝없이 다시 침실행이었다. 그런 것치고 해인은 전복죽을 두 그릇이나 해치워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상태였다. 이제 다 나은 거 같은데. 백담호의 연락에 간단히 답장을 하고 해인은 멍하니 벽을 쳐다봤다.
이렇게 혼자 여유로운 게 얼마만이지. 시험기간이기도 했지만 그 짧은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일까. 며칠 전부터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좋은 일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은 일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심지어 아직도 해결은 무슨, 일부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중이다.
“으흠…….”
곤란한 신음을 흘린 해인은 여러 번 고민하다가 시스템창을 열었다. 공략 인물 목록 위에서 해인이 손가락이 주춤거리다 결국 목록을 터치했다.
[공략 인물 목록]
강서준 호감도 34
백담호 호감도 67
서해빛 호감도 74
예상치 못하게 등록된 사람 하나, 원치 않았지만 등록된 사람 하나, 원하긴 했지만 이젠 원치 않았는데 등록된 사람 하나. 어째 모든 공략 인물 중에 의도대로 등록된 사람이 하나 없었다. 그중 단연 바라지 않았던 사람은, 서해빛. 74, 불안한 빛을 띠는 갈색 눈동자가 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1’이 올라 있었다.
‘좋아해요, 형. 그러니까 이제 다시 저 좋아해 줘요.’
아직도 간절함이 가득해 애처롭게 들리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장 늦게 등록되었으면서 가장 호감도가 높았다. 그러나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속내였고 다시없던 일로 해 버리고 싶은 사실이었다.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해인의 손가락이 서해빛을 꾹 터치했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서해빛
나이: 21
키: 179cm
등록 조건
- 고백.(거짓된 고백은 포함되지 않는다)
특이사항
- 재(再)공략인물
- 희귀 공략 인물
- 베타(현재)
호감도 (73)
- 애정: 30
- 집착: 52
- 소유: 24
- 원망: -29
- 증오: -9
(주의, ‘집착’ 수치가 조금 높습니다. 공략 인물에게 영향이 미치질 않길 원하시면 수치 밸런스를 잘 맞춰 주시길 바랍니다. )
(알림, 세부 수치의 종류는 추가될 수도 있고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뭔 소리야….”
호감도의 세세한 수치까지 본 해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해인이 알고 싶은 정보는 ‘이름, 나이, 키’까지가 끝이었고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특이 사항에 적혀 있는 ‘재공략 인물’부터 월등하게 높은 집착 수치와 백담호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던 소유, 원망, 증오 모든 게 믿기지도,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이래서 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열이 내렸던 머리에 다시 열이 오르는 듯이 지끈거렸다. 다른 무엇보다 신경에 걸리는 건 ‘재(再)공략 인물’이었다. 해인이 알고 있는 게 맞다면 공략인물 앞에 붙은 저 ‘재(再)’는 두 번, 즉, 재차라는 뜻이 분명했다. 혹시나 다른 의미로 생각할까 굳이 써 놓은 한자가 더럽게도 친절했다.
왜 서해빛이 재공략 인물이지? 오류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서해빛이 공략 인물로 등록될 당시에 떠올랐던 시스템창에도 다시 공략한다고 써져 있었다. 심지어, 공략에 실패했었다는 말과 함께. 해인은 정보창을 닫고 업적란을 열었다.
열자마자 바로 ‘특별 업적 달성, 실패 공략 인물 재등록’이라는 문구가 띄어져 있었고 작은 글씨로 ‘배드 엔딩 열람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배드 엔딩이라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해인은 쭉 펴고 있던 다리를 굽혀 가슴 앞으로 모으고 팔로 감쌌다. 단순한 오류라기엔 의심스러운 지점이 너무 많았다.
갑작스레 떨어진 거대한 의문덩어리를 모르는 척 덮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서해빛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공략 인물로만 등록되었더라면 이토록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해빛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고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단 확실한 건 현재의 해인은 서해빛을 공략 인물로 등록한 적이 없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남은 건 말도 안 되지만•••. 원래의 방해인이 서해빛을 공략 인물로 등록했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원작의 방해인도 이 게임에 참가했다는 것일까? 이미 방해인이 서해빛에게 고백했던 기억을 가지면서부터 원작이 틀어져 있었다는 건 진작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래의 방해인도 이 게임에 참가했다고…? 자신이 빙의를 하기도 전 <그레비티>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감도 잡히지 않는 현재 상황에 해인은 입을 꾹 다물고 쭉 폈던 다리를 오므렸다. 원작, 빙의, 기억. 이 세 단어와 관련된 사고가 뻗어 나갔고 그에 따라 무수한 의문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내가 이 소설을 왜 봤더라…? 해인의 미간이 짙게 일그러지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가 <그레비티>를 봤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레비티>를 전생에 읽었다.’ 하는, 기억이라 말하기도 애매한 정보만 있었다. 어쩌다 읽었는지, 왜 읽었는지, 어디서 읽었는지 어렴풋한 기억도 없다.
마구잡이로 뻗어 나가는 사고는 정리되지 않았다. 분명 어떤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듯한데, 기억이 없으니 속과 머리가 답답하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해인이 손가락을 깨물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며 무수한 생각을 머릿속에 칠했다. 목적 없이 칠해진 생각들은 결국 더는 덧칠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의 대부분을 검게 물들여 버렸다.
혼자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의문들이라는 걸 머릿속에 까맣게 되고 나서야 해인은 깨달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에 드디어 초점이 잡혔고 그 초점의 중심에는 ‘배드 엔딩 열람 가능’이 써져 있었다.
짓씹던 손가락을 입에서 떨어트려 시스템창으로 뻗었다. 손가락은 혹은 손가락 끝은 하도 세게 물어 잇자국 모양대로 붉어져 있었다. 손끝이 ‘배드 엔딩 열람 가능’에 닿자마자 곧바로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알림]
특별 업적 달성으로 잠금이 해제된 기억, 배드 엔딩 ‘널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잊겠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엔딩에 관련된 기억은 게임 시작 날부터 정해진 날짜의 중요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장된 기억은 총 45개입니다. 열람 방식은 영상의 형태로 보여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화면도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한 기억을 재생 시 중간에 끌 수 없으니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재생 시간은 최대 1시간 이상입니다. 하지만 재생이 끝난 후에는 창을 닫아도 다시 열람이 가능합니다.
만약, 불가피한 사항으로 엔딩 열람 중 강제로 종료되면 해당 기억은 손실되어 다시 재생할 수 없습니다.
(주의, 엔딩 열람 시 감정과 생각이 공유되어 동화될 수 있습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열람하지 않길 권장합니다)
[예 아니오]
최대 1시간…. 게다가 저장된 기억이 45개? 많기도 엄청 많다. 이래서 오래 걸린다고 경고가 떴던 건가.
해인의 손은 계속 허공에 떠 있었지만 쉽사리 대답을 누르지 못했다. 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체 모를 엔딩을 열람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열람하는 순간 되돌아올 수 없으니까, 해인이 늘 그랬던 것처럼 모르는 척하고 도망가고 싶었다.
백담호를 좋아하는 걸 모르는 척하고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때처럼, 서해빛이 공략 인물로 등록되는 순간 회귀 타이머를 쓰고 없던 일로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알게 되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것들과 직면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동안 외면해서 해결된 일이 있었던가. 전혀 아니었다. 결국 해인은 백담호를 좋아하는 걸 인정했고 서해빛은 공략 인물로 등록되었다. 도망쳐 봤자 되는 일 하나도 없다는 말이 참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것만큼 틀린 말이 없었다.
백담호한테서 도망치려는 걸 포기하고 그를 좋아하는 걸 인정하고 관계까지 진전했을 때가 오히려 더 후련했다. 그리고 전보다 더 즐겁고 설레고…. 아무튼 그랬다. 불안감과 두려움,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던 감정이 백담호와 함께한 날들을 떠올리니 흐려지는 듯했다.
피하기만 해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해인의 표정이 굳건한 기색을 보였다. 허공을 방황하던 손가락이 마침내 목적지를 향했다. ‘예’에 손가락이 닿자마자 영화나 드라마 관람 사이트 같이 생긴 창이 떠올랐다. 네모난 영상 썸네일들이 여러 개 떠올랐고 각 영상마다 가운데에 [DAY 1], [DAY 3]등 날짜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해인은 [DAY 1]이 써진 영상을 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