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서해빛
[DAY 1]
욕실 거울 앞에 서 있는 방해인이 보였다. 방금 씻은 건지 앞머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배드 엔딩 열람이라더니 익숙한 광경에 해인은 눈을 의문스럽게 찌푸렸다. 뭐지, 내 과거인가? 고민하던 찰나.
띵-.
익숙한 시스템창의 알람 소리가 울려 해인은 몸을 움츠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허공에 다른 창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선이 다시 영상으로 향했고 창은 원작의 방해인이 서 있는 거울 위에 떠올라 있었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인의 시선이 다시 영상으로 향하자, 원작의 방해인이 서 있는 거을 위에 시스템창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 게임 참여창이 떠올랐던 그때처럼.
[안녕하세요, 방해인 님. 당신은 에 초대되었습니다. 튜토리얼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방해인이 얼굴을 짜증스럽게 일그러트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욕실 거울에 떠오른 이상한 창이 믿기지 않는 듯 손으로 문질러도 보고 냅다 물을 뿌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히 지워지지 않았고 그걸 모르는 방해인은 혼란 가득한 얼굴로 거울을 빤히 쳐다봤다.
“시발…. 이게 뭐야.”
방해인이 물까지 뿌려 손가락으로 더욱 세게 문질렀지만 떠오른 창이 지워질 리가 없었다. 거울에 비친 방해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욕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욕실을 나오니 역시나 익숙한 침실이 보였고 방해인이 향한 곳은 바로 1층이었다.
“강서준 씨!”
버럭, 방해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서준이 약간 몸을 움찔거리더니 뒤를 돌아봤다.
“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빨리 따라와 봐요.”
“네?”
당황스러워 보이는 서준에도 방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준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힘 차이가 명확해 서준이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자 방해인은 팔을 계속 툭툭 당기며 버럭 외쳤다.
“아, 좀! 빨리 따라와 보라고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요!”
“…네, 제가 가겠습니다. 놓아주세요.”
방해인이 거칠게 손을 놓았고 서준은 약간 경직된 얼굴로 옆에 따라붙었다. 그렇게 방해인은 서준을 이끌고 욕실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여전히 시스템창이 떠 있었다. 방해인이 손가락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저거 보이죠.”
서준이 거울을 이리 저리 쳐다보다가 다시 방해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눈가가 조금 찌푸려진 게 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한 방해인은 자기가 더 당황해서는 서준의 옷깃을 잡고 또 툭툭 당기며 말했다.
“저기, 저거. 리얼 라이프 데이팅 심에 초대되었습니다, 튜토리얼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예, 아-.”
흡, 방해인이 말을 하다 말고 숨을 멈췄다. 분명 거울 위에 떠 있던 시스템창이 그의 코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튜토리얼 진행을 요청하셨습니다. 튜토리얼이 시작됩니다 :)]
“이게 시발 뭐야…. 내가 언제 요청했어•••?”
몸을 움찔거린 방해인이 경악한 눈으로 허공에 뜬 시스템창을 쳐다봤다. 내가 미친 건가? 아님 강서준도 보이면서 안 보인다고 구라를 까는 건가? 방해인은 나지막하게 욕을 짓씹었다. 혼란스럽기만 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방해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시스템창과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방해인이 느끼는 혼란이 해인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기억을 열람할수록 방해인의 감정이 해인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느껴졌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방해인은 계속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고 그러다 문턱에 발이 걸려 몸이 휘청대다가 자빠지고 말았다.
“악!”
“도련님!”
엉덩이에서부터 얼얼한 둔통이 느껴져 방해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뒤늦게야 다가온 강서준이 손을 내밀었지만 방해인은 손을 잡는 대신 얼굴을 찌푸린 채 굳어 버렸다. 방해인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강서준에게 대뜸 시스템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략 인물 추천!]
이름: 강서준
난이도 ★★ + ★(추가, 난이도: 강서준이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초기 공략 난이도가 어려운 인물이 아닙니다. 첫 공략 인물로 제격일지도! 등록을 원하면 강서준이 건넨 손을 맞잡으며 옅은 미소를 띠어 주세요!
멍하니 강서준을 쳐다보던 방해인은 당황했는지, 낮게 중얼거렸다. 뭔 시발, 개소리야.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지만 꿈이라기에는 아직도 엉덩이 한쪽이 둔통이 선명했다. 방해인은 스스로의 뺨도 때려 보았지만, 그의 눈앞에 뜬 상태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방해인이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자 강서준은 심각한 얼굴로 방해인에게 손을 뻗어 왔다.
“못 일어나시겠어요? 많이 아프십니까?”
가까이 다가오는 서준의 손에 방해인은 기겁을 하며 쳐 내고 벌떡 일어섰다.
“내 몸에 허락 없이 손대지 마요!”
도와주려고 손을 뻗었을 텐데 갑자기 치한 취급당한 서준은 황당하다는 듯이 방해인을 바라봤지만 방해인은 지금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강서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하룻밤 사이 어떠한 징조도 없이 틀어진 제 일상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방해인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착실하게 준비를 하고 서준이 이끄는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방해인은 가는 내내 강서준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튜토리얼 진행 중! 첫 번째, 공략 인물 등록하기]를 흘긋거리며 계속 폰을 만지작거렸다.
인터넷 검색 목록에는 ‘Real-life dating sim, 허공에 이상한 창이 보여요, 피곤할 때 증상, 환시, 정신병원…(생략)’ 같은 서준이 봤더라면 당장 병원에 끌고 갔을 것들만 늘어 갔다.
휴대폰 화면이 클로징 된 채 영상은 끝이 났다. 자동으로 창이 사라지고 [DAY 1]을 시청한 해인의 감상은, 멍했다. 정말 그냥 멍했다. 해인의 고개가 아래쪽으로 푹 수그려졌다. 방해인이 정말 게임에 참여했구나. 그리고 원래의 방해인은 정말 싸가지가 없구나, 등등 오만가지 감상들이 영상의 끝과 함께 우르르 몰려오니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왜 게임 이름이 <그레비티 in dating sim>이 아니지. 순간 다른 게임인가 싶었지만 처음 나타난 장소나 흡사한 시스템창의 디자인, 공략 인물을 등록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같은 게임이거나 적어도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배드 ‘엔딩’이었다. 이 게임에서 엔딩을 봤다는 뜻이었다. 그럼 중간에 이름이 바뀐 건가.
게임 이름에 대해 생각하던 해인은 아직 보지 않은 영상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제 허벅지만 보던 시선이 위로 들렸다. [DAY 1]은 다른 영상들에 비해 어둡게 변해 있어 그 옆에 [DAY 3]이 더욱 눈에 띠었다.
해인은 누르는 것을 망설였다,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켰다. 창을 가만히 보던 해인은 옅게 곤란한 신음을 흘렸다. 열람 시에 감정과 생각이 공유되어 동화될 수 있다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영상 관람 내내 방해인이 떠올리는 것들과 느끼는 감정이 날 것 그대로 옮는 것 같았다. 매 순간 느껴지는 게 자신의 것인지 방해인의 것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선연했다.
오죽했으면 방해인이 욕을 하거나 짜증 서리게 소리칠 때 자신의 입술도 움찔거렸다. 이러다 성격까지 옮는 거 아니야…? 다음 영상을 보는 게 조금 망설여졌지만 이미 시작한 걸 멈출 순 없었다. 영상들 속에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대한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해인은 [DAY 3]을 재생했다.
* * *
[DAY 3]
방해인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올라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 사람 머리 위로 [공략 인물 추천!]이란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그걸 보자마자 방해인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 씨발. 누군지 몰라도 이딴 거 만든 새끼 걸리면 족쳐 버릴거야.”
누구든 눈만 마주치면 ‘공략인물 추천’이라고 떠올랐다. 심지어 교수한테도 떠올라 강의에 집중하기가 여간 좆같은 게 아니었다. 심지어 어떻게든 종료를 하려고 해도 튜토리얼을 끝내야만 종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시발. 방해인은 또 욕을 했다. 차라리 대충 아무나 공략 인물로 등록해 버리고 종료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이 근본도 모를 것의 말을 듣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대체 왜 내가 이딴 거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짜증이 치밀 대로 치민 탓인지 방해인은 웬만하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휴대폰에 얼굴을 박고 걸었다.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고. 방해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죽어도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듯했다. 고집스럽게 휴대폰 액정을 응시하며 방해인은 빠르게 다른 건물로 들어섰다. 사람들과 최대한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계단을 선택했다.
3층까지 올라가며 살짝 숨이 차는 듯 보였지만, 방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 떠오르는 시스템창과 궁금하지도 않은데 알게 되는 타인에 대한 정보가 뜰 때마다, 이미 구겨졌던 표정이 끝을 모르고 구겨졌다.
계단을 겨우 다 올라가고 복도 역시도 막무가내로 걸어가다 시야 끝부분에 다른 이의 발과 다리를 뒤늦게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이미 가속도가 붙어 방해인은 멈추지도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앞 사람 등판에 박고 말았다. 아, 좆 됐다. 방해인이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딱딱한 등판에 튕긴 몸이 뒤로 꼬꾸라졌다.
그러면서 덕분에 휴대폰을 보던 시야가 위로 올라가 앞에 있던 상대가 손을 뻗어 오는 게 보였다. 다행히 앞에 있던 사람은 반사 신경이 좋은 건지 허우적거리는 방해인의 팔을 잡았고, 그 덕에 엉덩이가 깨질 뻔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방해인이 몰래 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곧바로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방해인을 잡아 준 이는 다름 아닌 백담호였기 때문이다. 백담호는 무표정을 한 채 방해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는 당연하게도 시스템창이 떠올라 있었다.
[공략 인물 추천!]
이름: 백담호
난이도:★★★★★ +★★★(추가 난이도: 백담호가 당신을 조금… 많이 싫어합니다.)
난이도도 높고, 현재 관계도 정말 좋지 않군요! 8ㅇ8 하지만 어려운 난관일수록 정복했을 때 성취감이 큰 법! 등록을 원하시면 백담호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고마워.’라고 대답해 보세요!
창에 떠오른 걸 다 읽은 방해인은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리고 중얼거렸다.
“좆같은 소리하네.”
“시발, 뭐?”
백담호가 살벌하게 방해인을 내려다보았지만 방해인은 기가 죽기는커녕 되레 자기가 더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놓으라고. 이 시발. 가뜩이나 빡치는데 뭘 계속 처잡고 있어. 더럽게.”
지가 와서 부딪혀 놓고 넘어질 뻔한 거 잡아 줬더니 돌아오는 게 욕이라 백담호의 표정은 여간 빡친 게 아닌 것 같았다. 방해인의 팔을 잡은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고 있었다.
백담호가 붙잡은 부분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음에도 방해인은 꾹 참고 사나운 백담호의 눈초리에 자기도 눈을 부릅떴다.
“귓구녕 막혔어? 놓으라고, 개새끼야.”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그렇게 힘든가 보네.”
“뭐? 네가 뭐가 예쁘다고.”
결국 나직하게 한숨을 쉰 백담호는 비소를 짓고는 “애새끼도 아니고. 발전이 없어.”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밀쳐 버리듯 방해인의 팔을 놓았다. 결국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방해인은 얼굴에 열이 몰린 채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백담호는 저 멀리 가고 말았다.
씩씩거리는 방해인은 일어서려다 통증이 밀려오는 탓인지 다시 복도에 주저앉았다. 주변 사람들이 힐긋거리는 시선에 쪽팔렸는지 괜히 입을 꾹 다물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썼다.
겨우 바들거리며 일어선 방해인이 넘어지면서 놓친 폰을 주우려 절뚝절뚝 걸어가 허리를 느리게 숙이려는 순간, 누군가가 대신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방금 일로 심기가 좋지 못한 방해인이 눈을 찌푸리며 ‘뭔데 내 폰을.’까지 뱉다가 멈추고 말았다.
“여기요. 힘들어 보여서요.”
휴대폰을 건네며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해빛이었다.
드디어, 서해빛이 나타났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서해빛의 머리 위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공략 인물 추천!]
이름: 서해빛
난이도:★★★★
처음 만나는 사이군요! 난이도가 다소 높기는 하지만 공략 성공 시 높았던 난이도보다 배를 얻게 될 겁니다! 등록을 원하시면 서해빛에게 ‘안녕, 서해빛.’라고 인사를 건네 보세요! 서해빛이 인사를 받지 않아도 등록은 성공이니 걱정 NO!
방해인의 시선이 잠시 ‘서해빛’이라는 이름에서 머물다 다시 해빛의 얼굴로 향했다. 옅은 눈동자가 깜빡거리는 게 예뻤다.
예뻤다…?
이 생각이 방해인과 동화가 되서 그런 건지, 그저 해빛의 외모에 해인이 새삼 놀라서 그런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저기요?”
빤히 얼굴만 보고 있자 서해빛이 의아하게 방해인을 쳐다봤다. 방해인은 답지 않게 바로 거친 말을 뱉지 않고 서해빛이 건넨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서해빛을 응시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쌩하니 서해빛을 지나쳤다. 공략 인물로 등록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방해인은 이미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들어가고 있었다.
방해인은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방해인은 빨리 걸어서 그런가, 하며 심장이 빠르게 뛰는 이유를 멋대로 추측했다. ‘서해빛’ 방해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이름에 놀랐는지 내뱉고 나서도 주변을 살폈다.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은 방해인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끝으로 영상이 종료되었다. 해인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시스템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도 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콩콩콩 뛰는 맥박에 조금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필 다음 영상의 썸네일이 서해빛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 해인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반응이 무엇에 의한 건지 알았다. 이건 반한 거다. 방해인은 저때 서해빛에게 첫눈에 반한 거였다.
연애보단 다른 것들에 시선을 돌리고 사느라 방해인은 그걸 깨닫지 못한 거겠지만, 이걸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해인은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확실한 감정이었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겼을 때 반응임이 분명했다. 해인은 마치 제가 서해빛에게 호감을 가지기도 한 듯한 이상한 기분을 쉽사리 떨쳐 내기가 힘들었다.
섞이면 안 될 것들이 섞이는 느낌에 해인은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차라리 다음 걸 빨리 봐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다음 영상을 터치하려던 손이 순간 멈칫거렸다. 다음 영상은 [DAY 17]이었기 때문이다. [DAY 3] 다음 바로 [DAY 17]이라는 건 그 사이에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감정에 둔하고 서툰 방해인은 [DAY 17] 전까지는 서해빛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17일째 되는 날 서해빛을 다시 만난 게 아닐까?
그렇게 추측한 해인은 제 의지와 달리 계속 둥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DAY 17]을 눌렀다. 앞으로 봐야 할 영상이 43개나 남아 있었다.
빨리 보자, 빨리….
* * *
[DAY 17]
방해인은 중앙 도서관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내일 보는 시험이 워낙 어렵다는 평이 자자해 집에 가는 대신 중도에서 공부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 가면서도 가기 싫은 티가 역력하거나 억지로 가는 듯한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해인은 왜 방해인이 공부를 잘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끄러운 1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니 시험 기간 끝물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리저리 자리를 물색하던 방해인의 눈에 한 인영이 걸렸다. 홀로 6인용 책상에 앉아 있는 서해빛이었다.
방해인은 움직임을 멈추고 서해빛을 쳐다봤다. 서해빛은 교재에 코를 박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혼자 우뚝 서 있던 방해인은 서해빛, 하고 작게 이름을 굴렸다.
방해인은 다른 빈 책상을 놔두고 굳이 서해빛과 정 반대되는 맨 끝 자리에 앉았다. 녀석 모르게 슬쩍 볼 수 있는 그런 위치에 굳이 앉았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하면서도 머쓱한지 머리를 몇 번 매만졌다. 깔짝깔짝 괜히 이미 풀이가 다 되어 있는, 몇 번이고 풀어 주변이 지저분한 문제 위에 괜히 샤프를 끄적거렸다. 그러면서 방해인은 슬쩍 서해빛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문제가 잘 안 풀리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요즘은 점점 보기 힘든 줄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언제 적 줄 이어폰이야.
줄 이어폰을 보고 웃으며 작게 고개를 내저은 방해인은 계속 서해빛을 흘겨봤다. 뚫어지게 쳐다보는데도 눈치가 하나도 없는지 해빛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방해인의 오기를 자극한 듯했다. 굳이 왜 이딴 짓에 시간을 들이는지도 모르겠지만 방해인은 일단 제 기분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대놓고 서해빛을 빤히 쳐다봤다. 저 새끼는 뭐 저렇게 눈치가 없어. 방해인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을 들어 턱을 괬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시선은 서해빛에게 고정이었다. 그렇게 바라보기를 10분쯤 됐을까,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린 서해빛이 방해인 쪽을 쳐다봤다.
서해빛이 자신을 쳐다봐 주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눈이 마주치자 방해인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눈에 방해인의 마음이 쿵 떨어졌는지, 해인의 가슴도 같이 쿵 떨어진 기분이었다. 다시 방해인이 조심스레 시선을 돌렸을 때 서해빛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가니 그 끝에는 백담호가 있었다.
아. 소리 없이 입을 살짝 벌린 방해인은 차게 식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역대급으로 더러워졌다. 서해빛이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쌩하니 걸어가는 백담호를 보다 해인도 책상 위를 정리했다. 기분을 잡쳐 더 이상 여기에 있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떨렸던 마음이 단번에 추락하고 방해인의 기분은 더러워졌다. 백담호는 서해빛이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쌩하니 자리를 떴다. 싸늘하게 방해인의 얼굴이 굳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해인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챙기는 손길이 우악스러워 그 소리에 서해빛의 시선이 방해인에게 닿았다. 그러나 금방 서해빛은 고개를 수그렸다. 백담호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던 것과 딴 판이었다. 가방끈을 잡은 방해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방해인은 가방을 싸매고 다른 자리로 옮겼다. 서해빛 때문에 도서관을 나가는 것은 방해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서해빛이 절대 보이지 않는 반대편 쪽 아무 빈자리에 털썩 앉아 다시 가방을 풀었다. 교재를 펼치고 이어폰을 낀 뒤 드디어 집중을 하려는 찰나,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곳에는 백담호가 있었다.
“아이 씨발.”
방해인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하필 있어도. 오늘은 운이 지지리도 없나 보다. 백담호는 그런 방해인을 응시했다. 정말 얼굴의 어떤 근육도 사용하지 않은 듯한 무심한 낯짝으로 쳐다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 행동에 방해인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자신도 백담호 따위는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공부를 했다.
왠지 영상이 끝나야 할 시점인 것 같은데 끝나지 않고 계속 방해인이 공부하는 것만 보였다. 뭔데, 왜 계속 보여 주는 건데. 당황한 해인이 이걸 끌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하던 찰나 왼쪽 아래에 작게 빠르게 넘기기 버튼이 보였다. 아, 살았다. 해인은 그걸 바로 터치했다. 하마터면 지지리도 재미없고 지루한 공부 스트리밍을 볼 뻔했다.
* * *
장면이 전환되고 공부를 하던 방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넘긴 시간이 꽤 되는 듯 방해인의 노트는 많이 넘어가 있었다. 가볍게 팔을 앞을 쭉 뻗던 방해인의 시선이 저절로 백담호가 앉아 있던 곳으로 향했다. 언제 나간 건지 백담호는 자리에 없었다.
백담호가 먼저 자리를 떴다는 사실에 혼자서 승리감을 느꼈는지 개운하게 기지개를 켠 방해인이 폰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9시 정각이었다. 방해인은 저도 모르게 서해빛이 앉아 있던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려는 걸 겨우 참아 내며 억지로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방해인은 애써 고개를 털어 가며 서해빛의 생각을 털어 내려는 듯했다. 방해인의 마음에서 약간의 부담감이 느껴졌다. 집안이 집안인 만큼 먹고 살 걱정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무척 염려하고 있는 것이 해인에게까지 와닿았다.
방해인은 집에 갈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한 문제 한 문제를 놓치지 않고 쳐다봤다. 오래 본 것은 아니었지만 방해인은 단순히 자기가 원해서 한다기보다는 강박적으로 공부하는 듯했다. 해인이 영상을 빠르게 넘기는 동안 공부하는 내내 졸거나 집중이 떨어지면 볼펜으로 손등을 찌른 건지 왼손에 볼펜이 잔뜩 묻어 있었다. 더러워진 손등에 시선이 쏠린 해인은 방해인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한 방해인은 흐름이 끊기는 것보단 집에 가서 마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기다리면서 바람도 쐴 겸, 강서준에게 한 30분 뒤에 오라고 보내 놓고 해인은 가방을 쌌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가 입구를 나가던 중 문득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고개를 돌린 방해인은 곧바로 후회했다. 조금 멀지 않은 곳에서 백담호하고 서해빛이 서 있었다. 그들도 시선을 느꼈는지 방해인이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서해빛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고 백담호는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미친.”
둘이 친했어…? 집에 갈 생각에 들떴던 방해인의 기분이 확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DAY 17]의 방해인은 몇 번이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다. 영상을 보는 도중 해인에게도 간간이 느껴지는 그의 기분이 그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왜.”
백담호가 방해인에게 던지듯 물었다. 방해인은 그 말을 씹고 썩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방해인이 다가오자, 백담호는 의아하다는 듯 점점 미간을 좁혔다. 방해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방해인은 백담호를 뒤로 밀어내듯 손으로 어깨를 툭 쳐 버렸다.
“이런, 씹.”
강한 힘은 아니라 뒤로 밀리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어깨가 밀쳐진 백담호가 살벌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나 그런 백담호를 무시한 방해인은 한껏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서해빛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돌렸다.
“안녕, 서해빛.”
갑작스러운 방해인의 인사에 해빛의 눈이 커졌고 백담호는 더욱 인상이 구겨졌다. 그리고 곧이어 알림창이 떠올랐다.
[공략 인물 등록!]
서해빛을 공략 인물에 등록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방해인 님. 첫 번째 튜토리얼을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서해빛의 머리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호감도 0]
호감도 알림창에 방해인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시스템창이 떠오를 때도 믿기지 않았지만 정말 호감도 표시까지 떠오르니 이제야 정말 게임에 참여한 것 같았다. 빛나는 호감도를 잠시간 응시하다 느껴지는 시선에 방해인은 앞으로 수그려졌던 몸을 물렸다.
“어…. 누구세요?”
두 번이나 마주쳤는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쳐다보는 해빛의 시선에 방해인은 얼척이 없었지만 짜증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담호에게 관심 있는, 그리고 백담호도 관심 있는 듯한 서해빛을 공략 인물로 등록했다는 데에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방해인은 찡그리는 대신 옅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방해인.”
자신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정말 이름만 말할 줄 몰랐다는 듯한 서해빛의 표정을 끝으로 영상이 종료됐다. 해인이 홀린 듯이 다음 영상을 클릭하려는 때였다. 침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해인이 휴대폰을 들어 올리니 수신인은 백담호였다.
아, 하필. 무의식적으로 백담호에게 걸려 온 전화에 짜증이 살짝 서리고 말았다. 뭐야, 왜 전화질이야. 정말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해인은 되레 자신이 더 놀라 숨을 흡 들이마시고 말았다.
방금까지 영상 속 서해빛 옆 백담호에게 느꼈던 방해인의 질투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감정 동화가 부작용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미안해 해인은 방해인의 감정에서 벗어나려 심호흡을 했다.
그러는 동안 뚝, 벨 소리가 끊기는 바람에 해인이 다급하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수신음이 끊겼다.
[해인아.]
낮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백담호의 목소리는 해인이 방금까지 봤던 영상에서 듣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이름 하나 부르는데 다정함, 더불어 애정이 느껴져 해인은 어색했다. 이게 원래 백담호가 날 부를 때인데. 방금 왜 짜증이 났을까. 이 정도로 감정 동화가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영상 시청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해인의 감정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도록 말이다.
[해인아?]
한참이고 대답이 없자 백담호가 또 해인을 불렀다.
“아, 응. 나 뭐 좀 하느라. 미안.”
[바빠?]
해인은 아니, 안 바쁘다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갈색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창으로 향했다. 아직 볼 게 많았다. 차라리 빨리 보고 끝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응, 미안. 오늘 좀 할 게 많아져서 바쁠 거 같아.”
[괜찮아, 해인아. 그런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
무슨 일이 생기긴 했지, 방해인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 하지만 이걸 그대로 전할 수 없어 해인은 곤란한 소리를 흘리며 적당한 변명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백담호가 말하는 게 더 빨랐다.
[말하기 곤란하면 나중에 말해도 돼.]
백담호의 목소리가 다정한 게, 배려하는 게 느껴질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이상했다. 마치 백담호의 호감도가 서서히 높아지던 초반, 그가 의외로 다정하다는 걸 깨달아 가던 그때보다 더 낯설었다. 겨우 영상 몇 개 보고 이렇게까지 감정 동화가 될 일인가 싶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게임 자체가 제멋대로이기에 충분히 이런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이 또 백담호의 말에 대답하는 것도 잊고 혼자 심각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이만 끊을까.]
“…어? 아, 어…. 음.”
목소리만 들어서는 백담호는 그저 담담하기만 한 것 같아서 해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해인이 전화에 집중하지 못 하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얼른 끊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정작 이렇게 끊자니 백담호가 안 좋아할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끊으면 아마 저 영상들을 다 볼 때까지 연락이 안 될 게 뻔했다. 저것들을 내일 학교 가기 전까지 다 볼 생각이니까.
백담호는 해인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고민하길 몇 초, 해인은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시스템창이 보이지 않는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야, 잠깐 전화할 정도는 돼.”
[그래? 다행이네.]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은 건 착각일까, 해인은 문득 백담호의 호감도가 보고 싶었지만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스템창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호감도는 여전히 궁금했지만, 지금 시스템창을 보면 계속 영상에 대한 생각과 동화된 감정 때문에 백담호와의 통화에 집중할 수 없을 터였다.
이미 섞여 들어온 방해인의 감정 때문에 백담호에게 미안한 상태인데, 더 미안할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화창한 하늘을 보며 귀에서 들려오는 백담호의 목소리에 해인은 이제야 평소와 같아졌다. 해인이 옅게 미소를 띠며 전화를 이어 나갔다.
20분이 넘는 조금 긴 통화가 끝났을 때, 해인은 완전히 제 감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봤자 다시 영상을 봐야했지만. 해인은 밀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고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 * *
[DAY 20]
아침부터 방해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서해빛을 생각하고 있는지 늘 찡그리고 있던 얼굴에는 미세하게 웃음꽃이 펴 있었다. 서해빛을 공략 인물로 등록한 지 나흘째, 방해인은 그새 제 재력으로 서해빛의 시간표를 줄줄 꿰차고 있었다. 그리고 서해빛이 항상 강의 시작 10분 전에 강의실에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야.”
자신이 들어가야 할 강의실 복도 앞에 있는 방해인을 본 해빛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한 학년 선배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건지, 아님 인성이 안 좋기로 유명한 방해인이 주는 관심이 싫은 건지 서해빛은 모르는 척 강의실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볼 방해인이 아니었다. 방해인은 해빛의 손목을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힘없이 끌려온 해빛이 잔뜩 부루퉁한 얼굴로 방해인을 쏘아봤다. 방해인은 그럼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은 봐 줄 만해서 그런지 저런 표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세하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서해빛은 ‘DAY17’까지만 해도 억지 미소라도 짓더니만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것 같았다.
“선배,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세요?”
“이따 점심때 밥 사 줄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밥 사 줄까’로 답하는 방해인에 해빛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선배가 왜 저한테 밥을 사 줘요?”
“그냥, 사 주고 싶어서. 왜 싫어?”
“…네, 싫어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부담스러워요.”
딱딱하게 선을 긋는 해빛이 제 손목을 잡은 방해인의 손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방해인의 눈에 짜증이 서리자 해빛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만해 주세요. 그리고 매번 강의실 앞에 찾아오시는 거 쪽팔려요.”
요즘 중고등학생도 유치하게 안 이러겠어요. 직격으로 들어온 말에 방해인은 뻣뻣하게 굳었고 서해빛은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그대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허…….”
순진해 보이더니 영 아니었다. 이래서 난이도가 높았던 건가. 방해인은 서늘하게 헛웃음을 치면서도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서해빛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방해인은 서해빛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번 눈에 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성질머리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처음에는 홧김에 등록했던 것 같았으나 ‘DAY 20’에 도달하니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동물 같았다.
* * *
지금까지 본 14개의 영상에서는 무식하게 들이대는 방해인과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짜증 내는 서해빛의 반응이 계속 나왔다. 그래도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아니, 방해인은 그냥 도끼가 아니라 불도저를 냅다 나무에 박는 격이었다.
그러니 서서히 서해빛도 체념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갈수록 불쌍해지는 서해빛에 해인은 측은지심까지 생겨 방해인이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미친놈, 저러니까 공략을 실패했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해빛의 호감도가 오르긴 올랐다. 방해인이 무턱대고 질척거리긴 했어도 꽤 해빛에게 잘해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격은 좀…. 많이 예민해도 선배는 다정했으니까.’
며칠 전에 서해빛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해빛의 입장은 생각도 않고 부담스럽게 들이대는 방해인의 행동을 보고 대체 어디가 다정하다는 건가 싶었다. 처음엔 이해가 안 갔지만 영상을 보면 볼수록 서해빛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방해인은 강의가 먼저 끝나면 서해빛 강의실 근처에서 커피라도 사서 기다렸고 서해빛의 짜증을 견뎠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견디기는커녕, 네까짓 게 나한테 짜증을 내고 지랄이냐고 욕을 퍼부었을 텐데 말이다.
방해인의 모든 행동은 서해빛 한정으로, 서해빛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사람이 봐도 틱틱 대긴 했으나 서해빛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심지어 서해빛도 방해인을 떠보는 걸 보면 눈치를 챈 것 같기도 했다.
떠보는 건지 정말 궁금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서해빛이 방해인에게 질문을 한번 던진 적이 있다. ‘선배 저한테 왜 자꾸 이러시는 거예요?’라고. 서해빛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던 방해인이 뱉은 말은.
‘재밌잖아.’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다. 성의도 없고 예의도 없으며 재미까지 없는 답변에 화가 난 해빛의 호감도는 당연히 뚝 떨어졌다. 방해인은 떨어진 호감도보다 처음 보는 싸늘한 해빛의 얼굴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겨우 남이 싸늘한 표정 좀 지었다고 당황한 방해인은 자기가 당황했다는 사실에 더 당황하기도 했다.
“…등신.”
영상을 보던 해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랜 시간 영상을 본 탓인지 눈이 뻑뻑해진 해인이 두 눈두덩이를 지그시 꾹 눌렀다. 언제 다 보나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은 탓에 지금까지 31개나 봤다.
날이 갈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방해인의 태도가 놀라웠다. 감정이 공유돼서 몰입하느라 그랬나. 그게 아니면 종종 방해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가. 조금 과장을 보태면 과거의 한 조각을 보는 기분이 드는 장면도 있었다. 쓴 기억도 없는 일기장을 들추어 볼 때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해인은 영상을 멈출 수 없었다.
* * *
[DAY 37]
사람도 없는 카페에서 뭐 그리 할 일이 있다고 서해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만 내놓고 카운터에서 나오질 않는다. 한 모금 들이마시다 입을 떼고 인상을 썼다. 쓴 것을 넘어서 약간 잿물을 먹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걸 왜 마시는 거지. 강서준도 가끔 마시던데. 이거 먹을 바엔 돈 좀 더 내서 다른 걸 먹겠다.
구시렁거리면서도 방해인은 해빛이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홀짝 들이마셨다. 눈은 여전히 서해빛을 향한 채로. 처음은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호감도 27]을 만족스럽게 보다가 바로 그 아래로 시선을 내려 서해빛에 대한 감상을 이어 갔다.
서해빛은 머리카락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밝은 편이었다. 특히 해가 저물어 갈 때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서 있으면 유독 영롱한 빛을 내고는 했다. 색이 옅어서 하늘과 같이 물들어 가는 게 꼭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방해인의 시선이 서해빛의 머리카락을 지나 휴대폰을 보느라 아래로 깔린 해빛의 눈으로 향했다. 서해빛은 속눈썹도 굉장히 긴 편이었다. 방해인은 자신도 속눈썹이 꽤 길다고 생각했지만, 길고 숱도 많은 서해빛에 비할 건 못 됐다. 하지만 색이 옅어서 그런지 짙은 인상을 주기보다는 오묘한 인상을 줬다. 그래서인지 인상을 써도 꼴 보기 싫다기보다는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지 방해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남의 얼굴을 이렇게 심도 있게 본 적이 없었으니 알 턱이 있나.
빤히 해빛에게 향해있던 시선이 그만 들키고 말았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연한 갈색 눈동자에 방해인은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약간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리고는 방해인은 커피를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심장이 빨리 뛰는 이유가 카페인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방해인 선배.”
카운터에 앉아 있던 해빛이 드디어 해인에게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성 붙여서 부르지 말라니까….”
방해인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지만 해빛은 무시했다.
“할 일도 없으세요? 자꾸 저만 졸졸 쫓아다니게?”
“…뭐? 누가 졸졸 쫓아다녔어.”
“그럼 이게 쫓아다니는 거지, 뭐예요.”
방해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듣고 보니 해빛의 말에 반박하기 힘든 듯했다. 쫓아다닌다는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뿐이었다. 조용해진 방해인을 물끄러미 보던 해빛은 어두운 방해인의 머리칼에 붙은 먼지를 슬쩍 떼어 내며 말했다.
“쫓아다니는 건 이제 뭐 저도 포기했는데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때는 제발 놔두세요. 특히 백담호 선배랑 있을 때요.”
“백담호가 그렇게 좋냐?”
서해빛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 제일 거슬리는 이름에 방해인은 톡 쏘듯 물었다. 전에도 한번 물었던 질문이라 방해인은 사실 답을 알고 있었다. 맞다고 하면서 그만하라고 하겠지. 방해인은 조금 짜증이 나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선배는요?”
방해인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뭐? 내가 백담호를 왜 좋아해, 미쳤냐?”
세상이 멸망해도, 이 세상에 백담호랑 자신 둘만 남아도 절대 백담호를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방해인의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영상을 보던 해인에게까지 전달됐다. 방해인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노려보니 서해빛은 맥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요, 선배가 백담호 선배 싫어하는 건 이미 잘 알고. 저 말이에요. 선배, 저 좋아해요?”
백담호를 좋아하냐고 물은 줄 착각했을 때는 바로 나왔던 대답이 이번에는 잠잠했다. 방해인은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하는 것 같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에…. 뭐 재밌으니까 이런다고 하긴 했는데 단순히 재미로 이런다기엔 열정이 넘치던데요.”
“…내가 언제.”
방해인의 가슴이 쿵쿵 울렸다. 속이 무언가로 막힌 듯한 기분인지 가슴께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런데도 울림은 잦아들지 않은 듯했다. 방해인은 서해빛의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 보였다. 티 나게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행동의 방해인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영상을 봤지만, 타인을 비롯해 백담호에게, 심지어 공략 인물인 서해빛에게도 이렇게 우물쭈물했던 적이 없었는데.
“아직도 그냥 재미로 저한테 그러시는 건가요?”
서해빛은 그런 방해인의 뺨을 손으로 살짝 감싸 그의 고개를 돌렸다. 흔들리는 방해인의 눈동자, 불안한 듯 떨어지는 그의 시선에 서해빛 역시 당황한 듯했다. 방해인은 서해빛의 손을 쳐내고 벌떡 일어났다. 볼부터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방해인이 중얼거렸다.
“당연한 걸 물어…. 나 집 갈래, 기분 잡쳤어.”
그대로 카페를 박차고 나가는 방해인의 뒤로 서해빛의 호감도가 ‘27’에서 ‘25’로 내려갔지만, 방해인은 그걸 보지 못했다. 영상이 끝나고 남은 영상들의 목록이 떠올랐다. 해인은 다음으로 넘기는 대신 시트 위에 올려진 손을 꽉 쥐었다.
‘아직도 그냥 재미로 저한테 그러는 건가요?’
조금 기대감에 차 있는 옅은 눈동자가 여전히 망막 위에 새겨진 것 같았다. 단순히 영상에서 본 것이 남은 게 아니라 잃었던 걸 헤집어 찾아낸 것처럼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때, 당연한 걸 물어, 라는 말이 아니라 재미로 그러는 거 아니라고 대답했더라면 더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문득 들었다.
왜 자신이 후회를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 * *
영상을 보면 볼수록 무언가에 홀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생각은 할 틈도 없이 영상에 집중하다 문이 열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남은 영상은 단 3개였다. 해인은 방금까지 시청한 영상 탓에 멍한 시선으로 들어오는 서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해인 씨, 괜찮아요?”
하룻밤 새에 다크서클이 짙어진 해인의 얼굴에 서준이 걱정스레 다가갔다. 서준을 바라보는 해인의 눈빛이 조금 오묘한 빛을 띠어 서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열을 재려는 순간이었다. 찰싹, 날카로운 마찰음이 일었다. 해인이 얼굴에 닿는 서준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쳐 냈기 때문이다.
빠른 겨울이라도 온 듯 침실 안은 순식간에 차가운 정적에 휩싸였다. 서준은 밀쳐진 제 손에 당황스럽게 해인을 쳐다봤고 그건 해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피로에 흐려진 초점이 돌아오며 해인은 덥썩 서준의 손을 잡았다.
“아, 미안해요, 제가 잠을 잘 못 자서 예민해졌나 봐요. 갑자기 놀라셨죠, 아니….”
당황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해인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빨갛게 물든 서준의 손바닥에 해인은 어떡해, 아프겠어요, 미안해요를 반복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곤 서준의 얼굴과 꽉 잡은 손을 반복해서 쳐다보며 그의 기분을 살폈다.
서준 역시도 오랜만에 겪는 해인의 날카로움에 당황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순간 예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하지만 미안하게 축 처진 눈매로 올려다보는 해인과 마주치니 놀랐던 감정은 빠르게 갈무리되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니, 그보다 해인 씨 손등이 더 빨개졌어요.”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손을 떨어트리고 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깐 열 좀 재도 되겠습니까? 불편하시면 체온계 가져올게요.”
평소와 달리 거리감이 느껴지는 서준의 모습에 해인은 제 실수를 속으로 자책하며 당연하다는 의미를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방금은 정말 실수였어요. 안 물어보고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해인은 손수 서준의 손을 제 이마에 올려 두며 기가 죽은 작은 동물처럼 서준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서준의 머리 위 호감도가 ‘34’에서 ‘35’로 올라갔다.
예전에는 남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게 보여 서준은 기분이 묘했다. 정말 사장님 말씀대로 철이 든 건지, 아님 원래 이랬던 건지.
그러고 보니 가끔 사장님과 해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래도 해인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참 순하고 귀여웠다고 했다. 너무 예전 이야기이긴 했지만 지금 보니 부모의 착각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해인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해인의 머리를 어린아이 다루듯 쓰다듬다가 빠르게 거둬들였다.
“열은 다 떨어진 것 같네요.”
이마에 올려진 손도 떨어트리며 서준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몸 상태 안 좋으시면 오늘은 집에서 푹 쉬세요.”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밤을 하루 정도 새운다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수업은 들어야 했다. 남은 영상 3개는 집에 와서 보면 볼 것 같았다.
* * *
강의 시작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한 해인이 백담호에게 먼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강의실에 들어가려는 때였다.
“선배.”
해인의 어깨가 잡혀 뒤로 돌아갔고 해인을 잡은 건 다름 아닌 서해빛이었다.
“갑자기 무슨….”
당황한 표정을 짓던 해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설정 조정 중 : 6%]
호감도 표시 위에 뜬금없이 나타난 작은 글씨 때문이었다. 해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문구를 쳐다봤다. 설정 조정 중? 아까 강서준 머리 위에는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있었으면 바로 발견했겠지.
갑자기 서해빛 머리 위에 나타난 의문스러운 글자를 해인은 빤히 보다 들려오는 말소리에 그제야 해빛의 눈을 쳐다봤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둥둥 울리는 심박수가 빨라지는 것만 같았다.
“잠시 얘기 좀 할까요.”
이상하게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해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이내 스르르 옆으로 돌아갔다. 그 행동을 거절이라고 받아들인 건지 해인의 어깨를 살포시 잡은 해빛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대로 해인의 몸이 당겨졌다.
“정말…. 잠깐이면 돼요.”
목소리가 아슬하게 흔들려서, 어깨를 잡은 손에서 간절함이 느껴져서 해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유독 해빛에게 약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약했지만 엔딩을 열람한 지금은 어쩌면 처음보다 더 해빛을 밀어내기 힘들지도 몰랐다.
“고마워요. 해인 선배.”
해빛이 옅게 미소를 띠며 붙잡았던 해인의 어깨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강의실 앞에서 하기에는 이목이 지나치게 끌리는 탓인지 해빛은 발걸음을 옮겼고 해인도 자연스럽게 해빛을 따라 걸어갔다. 복도 끝 쪽에 있는 빈 강의실이었다. 서해빛이 안으로 들어섰고 해인은 고민하다가 결국 같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쿵-, 문이 닫히고 해인은 여전히 서해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책상 위에 걸터앉은 해빛의 허벅지만 괜히 보았다. 얘기를 하자고 해 놓고 정작 해빛은 조용했다. 숨 막히는 정적에 버티지 못한 건 해인이었다.
“그…. 무슨 얘기 하려고-.”
“죄송해요.”
말을 가르고 사과가 파고들었다. 아래만 내려다보던 해인의 고개가 해빛의 얼굴을 향해 들렸다. 그는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대답해도 될까? 여기서 괜찮다고 대답하면 서해빛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됐다. 방해인과 서해빛의 관계를 알아 버렸으니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해인은 지금 방해인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고, 방해인과 서해빛의 관계를 알아 버렸으니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긴 힘들었다.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해인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섣부르게 대답하는 것보다 침묵이 때때로 나은 결과를 가져오곤 하니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해빛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많이… 화나셨나 봐요…. 그러시겠죠. 제가 그때는 너무 막무가내였어요. 마음이 조급해져서…. 사실 그 뒤로 선배한테 연락하고 싶었는데 받지 않을 거 같아서. 아니, 사실은 조금 선배가 원망스러웠어요…. 이럴 거면 그냥 계속 거리를 두지, 왜. 대체 왜 또 갑자기 다가왔던 걸까. 나한테 뭘 원해서…. 혹시 제가 후회하고 있는 걸 선배가 눈치라도 챈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건….”
해빛이 해인을 힐끔 쳐다보자 해인은 죄인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역시 그건 아닌 거 같네요. 그럼 대체 왜 그러셨어요…? 그저 차인 게 분해서 그런 거예요?”
옅은 갈색 눈동자에 원망이 서려 해인은 옷 끝자락을 꽉 잡고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자신도 두 사람 사이의 일들을 알았더라면 절대 괜히 어설프게 원작 흐름 지키겠다고 서해빛에게 다가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인도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건 해인만 알고 있는 일이다.
난 방해인 몸에 빙의했을 뿐이고 단지 너랑 백담호 잘되라고 좀 도와주려던 것뿐이었어. 원작의 방해인이랑 너랑 과거에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어, 라고 말했다가는 미친놈 취급당하거나 헛소리한다고 화를 낼 텐데 대체 여기서 뭐라고 답을 하란 말인가. 적당히 둘러댈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 끝에 해인은 겨우 한 문장을 뱉을 수 있었다.
“…차인 게 분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럼요?”
또 말문이 턱 막혔다. 또다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조금 숙여진 해인의 얼굴은 괴로움과 곤란함에 물들어 있었다.
“하아…. 형 고개 들어요.”
짐짓 평소같이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목소리는 무언가 억눌린 듯 훨씬 낮았다. 해인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지만 해빛은 말을 이었다.
“따지려던 건…. 아니, 사실 따지고 싶은데 그러진 않을게요. 그날 저도 같이 잘못했으니까. 솔직히 분해서 그랬다고 해도 딱히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궁금하잖아, 형 속내가…. 원래는 항상 속이 잘 보이더니 요즘은 감이 안 잡혀요, 대체.”
해빛의 지친 기색이 엿보여 해인은 “…미안.”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사과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네요.”
목소리의 떨림은 완전히 잦아들어 있었다. 담담한 해빛의 말에 해인은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숙여져 있던 해인의 얼굴에 손이 닿았다. 그날, 영상에서 봤던 것처럼 해빛이 해인의 뺨을 살짝, 손끝만 닿게끔 감싸 조심스레 제 쪽으로 들어 올렸다.
“형이 왜 그랬는지, 이유가 뭐가 되었든 이제는 상관없어요.”
해빛이 몸을 일으켰다. 영상에서 보던 해빛은 방해인과 키가 꽤 비슷해 보였는데. 그때보다 키가 자란 건가? 늘 짓던 미소가 해빛의 얼굴에서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전 고백한 거 무를 생각도 없고 형이 백담호를 좋아하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어요. 선배가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할 거예요.”
가슴을 누르는 듯한 알 수 없는 느낌에 해인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긴장감에 몸이 경직되고 그 와중에도 맥박이 빠르게 뛰어 입 안이 말랐다.
“그러니까 형-.”
위험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끊고 해인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덕에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몰아 내쉬었고 해빛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전화를 꺼내라는 듯 해인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뒤로 물려 줬다. 곧바로 해인이 주머니에 있던 폰을 꺼내 드니 수신인은 다름 아닌 백담호였다.
화면에 크게 떠 있는 ‘백담호’를 해인뿐만 아니라 해빛도 같이 발견했다. 하필, 지금. 해인은 조금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얼른 전화를 받으려는 수신 버튼을 옆으로 밀던 때였다. 서해빛이 해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옆으로 밀었다. 한 걸음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이따 연락할게요. 형.”
귀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호흡에 열감이 가득해 목덜미가 저려 왔다. 손 위를 겹치고 있던 해빛의 손이 해인의 손가락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불순한 의도가 적나라하게 섞인 손길에 해인은 떨어트려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해인이 가만히 있자 해빛은 해인에게 보이지 않게 옅게 미소를 띠며 “수업 잘 들어요.”라고 말하고는 대로 해인을 지나쳤다. 밑에서 ‘해인아?’ 하는 백담호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 *
강의실에 들어서니 이미 수업은 시작하고 있었다. 맨 뒤에 앉아 있던 백담호가 들어오는 해인을 보고는 옆에 놓인 제 가방을 치웠다. 옆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해인은 백담호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일찍 온다면서, 왜 늦었어. 내가 너 화장실 갔다고 했어.”
쉬는 시간에 교수님한테 말해. 해인이 옆자리에 앉자마자 백담호가 작게 속삭였다. 해인은 그걸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어어, 고마워….”라고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얼이 빠져 있는 해인에 백담호는 의아하게 해인의 안색을 살폈다. 눈 밑이 평소보다 캄캄했다.
교재도 안 꺼내고 책상 위를 바라보던 해인의 얼굴 쪽으로 몸을 수그려 불쑥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해인은 담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낯에 해인은 몸을 움찔거렸다.
“해인아,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 담호가 해인의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기듯 쓰다듬었다. 걱정이 비치는 까만 눈에 해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서해빛에 대한 방해인의 감정 때문일까 죄책감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다 엔딩 영상을 봐서 그런가. 자꾸 방해인이 느낄 법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아니라면 밤새워 영상을 본 탓에 과몰입이라도 한 건가. 예전처럼 백담호에 대한 좋은 감정들만 떠오르는 게 아니라 해인도 당황스러웠다.
“해인아?”
대답이 없자 백담호가 조심스럽게 다시 불렀고 해인은 그제야 흐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냐, 잠을 좀 못 자서. 괜찮아.”
백담호가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살짝 고개를 든 해인은 멈칫하고 말았다. 뒤늦게야 백담호의 머리에 있어야 할 호감도 대신 다른 게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설정 조정 중 : 3%]
서해빛과 같은 문구였다. 하지만 숫자는 더 작았다.
저게 대체…. 뭐야. 해인의 손이 백담호의 머리 위로 향했다. 역시나 호감도 표시처럼 손이 글자를 통과할 뿐이었다. 설정 조정 중…?
“뭐 해, 해인아?”
의아한 시선에 해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백담호의 정수리를 토닥였다.
“어, 이제 그만 앞에 보라고. 수업 들어야지.”
누가 봐도 무언가 감추는 게 뻔히 보이는 행동에 백담호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해인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향해 있던 시선이 사라졌다. 해인은 슬쩍 백담호의 머리 위를 봤다. 왜 서해빛하고 백담호에게 갑자기 저런 게 생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 아침에 강서준을 봤을 때는 저런 게 없었는데. 심지어 강서준은 호감도가 오르는 것도 봤다.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해인은 칠판을 보는 척 시스템창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예전에 한 번 열어 보고 단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방해인 (조연은 이제 주연: 호칭에 맞게 이야기가 조정되는 중입니다… 3%)
나이: 22
키: 177cm
능력치
- 힘: 중하/ 외모: 최상/매력 지수: A
스킬
- 협박(희귀 스킬): 화난 표정으로 윽박지르면 대부분 겁을 먹고 당신의 말을 따릅니다 .(소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 너 오타쿠니?: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1.8퍼센트 빠르게 호감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 눈치 없이 이 세상 살아남기 : 4.8%의 확률로 눈치가 없어도 상대가 넘어가 줍니다.
특이사항
- 열성 알파
- 빙의자(?)
- 페널티 존재
그 사이 뭐가 바뀌기는 한 것 같다. 제 상태창에는 특별한 게 없는 걸 알기에 해인은 밑 부분까지는 보지도 않고 다시 위를 쳐다봤다. 방해인 옆에 써 있는 ‘조연은 이제 주연: 호칭에 맞게 이야기가 조정되는 중입니다’의 문구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 전에 배드 엔딩 열람 말고도 호칭이 획득했다는 시스템창이 떠올랐었다.
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조정된다는 거야.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여기서 뭐가 더 달라질 것이라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측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무엇보다 밤을 새워서 그런지 머리가 무거웠다.
해인은 시스템창을 닫아 버리고 칠판을 쳐다봤지만, 강의 내용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서해빛…. 마주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서해빛을 좋아하는 방해인의 감정이 동화되어 있으니 어느 정도 영향이 있겠구나 생각은 했다. 그러나 영상을 보던 중간에 백담호와 전화했을 때는 금세 멀쩡하게 돌아왔었고. 그래서 방해인의 감정과 제 감정을 구분 지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따 연락할게요. 형.’
하지만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서해빛을 보는 순간 방해인의 감정과 제 감정의 구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엔딩을 열람하기로 한 제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때는 지났다. 해인이 양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쉬니 곧바로 백담호가 괜찮냐고 물어 왔다.
백담호의 얼굴을 보니 더욱 생각이 더욱 복잡해져서 “괜찮아”라고 애써 웃어 보였다. 그리고 뺨을 두어 번 살짝 쳤다.
정신 차리자, 이미 지나간 과거 때문에 현재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남의 과거를 보고.
* * *
무슨 정신으로 하루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혹시라도 서해빛이 보일까 봐 신경은 곤두서 있었고 백담호의 말에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다. 백담호도 자신의 상태가 안 좋은 걸 눈치챘는지 강의가 모두 끝나자마자 곧바로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했고 해인은 그걸 거절하려다 그의 표정도 조금 불안해 보여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프면 바로 말하고.”
“응.”
“괜찮아도 연락하고.”
“으응.”
해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백담호는 어린 학생에게 신신당부하는 선생님처럼 말했다. 해인의 대답에도 영 못 미더운지 백담호는 들어가라는 말만은 꺼내지 않았다. 그게 좀 귀엽게 보여 해인은 결국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늘 중 처음으로 진심인 웃음이었다.
“나 정말 괜찮아. 이따 전화할게.”
해인은 제 머리칼을 매만지던 백담호의 손을 살포시 잡아 볼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 애교를 부리듯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자기가 해 놓고도 이런 행동이 아직은 민망해 해인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뺨을 감싼 손 안의 온기가 익숙해 마음에 들었다. 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백담호의 호감도가 ‘68’로 올라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해.”
아래로 내리깔려 있던 해인의 눈꺼풀이 들렸다. 백담호는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가 있는 입매, 예쁘게 휜 두 눈. 담호가 해인에게 자주 짓는 웃음이었음에도 해인은 새삼스레 그가 짓는 표정이, 이런 표정을 보여 주는 백담호가 너무 좋았다. 그저 좋았다. 오늘 하루 복잡했던 속과 머릿속이 훨씬 나아졌다.
어쩌다 이렇게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이 그냥 좋았다. 제 속을 괴롭게 하던 것들을 백담호는 너무나 단숨에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다. 문득 무서워졌다. 백담호가 너무 좋아져서 무서웠고 영상을 보고 동화되었던 순간적인 감정들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나치게 행복해 이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오래, 현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허공에서 얽히는 시선을 해인이 먼저 피했다.
“이제 들어가 볼게.”
해인이 손을 떨어트리고 몸을 돌렸다. 백담호의 손끝이 떨어지기 아쉬운 듯 돌아가는 해인의 고개도 따라 움직였지만, 해인은 그걸 모르는 척했다. 키패드가 눌리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옆에서 “푹 쉬어.” 하는 소리가 들려와 해인은 안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해인은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왔냐는 서준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섰다. 지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가장 큰 원흉을 빨리 끝내야 할 것 같다. 아직 엔딩을 끝까지 보지 못해 이런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공략에 실패한 방해인의 감정에 동화되면 방해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해인의 생각이었다.
* * *
[DAY 69]
“야, 너 왜 또 내 전화 안 받았어.”
같이 가자니까 혼자서 앞서가는 서해빛의 뒤를 방해인이 따라붙었다. 방해인은 자신을 무시하는 서해빛의 뒤를 재빨리 쫓았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서해빛과 방해인이 드디어 나란히 섰다. 그러자 서해빛은 방해인을 쓱 흘겼고 방해인은 서해빛의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 수치를 슬쩍 쳐다봤다.
[호감도 28]
“어쩌다 보니, 바빴어요.”
무신경한 투에 방해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무슨 삼 일 내내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바쁘냐?”
‟뭐…. 가끔은 안 받고 싶은 날도 있기도 하고요. 우리 사이에 꼭 받아야 하는 일은 없잖아요, 그쵸?”
저게…. 말을 해도 꼭. 서해빛은 카페에서 자신을 좋아하지 않냐는 얼척 없는 질문을 뱉은 뒤로부터 미묘하게 더 비딱해졌다. 내가 얘를 좋아하긴 뭘 좋아해. 얘가 더 날 좋아하는 거 같은데.
방해인은 의기양양하게 해빛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호감도를 살폈다. 벌써 ‘28’이었다. 처음에 ‘0’이었다가 중간중간 마이너스로로 떨어진 적도 있었으니 ‘28’은 절대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
다만 조금 거슬리는 건 요즘 호감도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간 적이 더 많다는 거였다. 원래 그제까지만 해도 호감도는 ‘30’이었다. 요 근래 서해빛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전과 달리 뭐만 하면 호감도가 뚝뚝 떨어졌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방해인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 선배. 안녕하세요.”
“어, 안녕. 해빛이 시험 잘 봤어?”
나란히 걷던 서해빛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웬 낯선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방해인은 키만 멀대같이 큰 자식이 서해빛을 보고 쪼개며 다가오는 것을 쳐다봤다.
“네, 선배 덕분이죠. 감사해요.”
그러다 옆에 서 있는 방해인을 보고는 그대로 가던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밥…. 나중에 연락할게.”
“네.”
방해인은 그 모습에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겨우 백담호와 떨어트려 놨는데 다른 사람들을 붙이고 다닌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너 요즘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제가 선배하고만 다닐 수는 없잖아요. 선배가 계속 쫓아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 저 피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해인은 유독 서해빛의 곁에 오는 사람들에게 심하게 날을 세웠다. 오죽하면 영상을 보는 해인도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예민해질 정도였다.
“그럼 편하게 나랑만 다녀.”
그 순간 서해빛의 호감도가 ‘25’로 훅 떨어졌다. 자신이랑 다니자는 말에 대체 왜 호감도가 떨어진 건지 이해가 안 되는지 방해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제가 왜 선배랑만 다녀요. 선배는 그냥 재미로 이러는 건데.”
떨어진 호감도와 달리 서해빛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삐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린 채 방해인을 보다가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고 말았다. 방해인은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졸졸 쫓아다니는지, 선배가 계속 쫓아다니는 바람에…….’
서해빛에게 쩔쩔매는 스스로가 짜증이 난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직도 그냥 재미로 저한테 그러시는 건가요?’
서해빛이 다시 물어보면 그때도 당연하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지금 하나도 재미없는데. 해인에게 느껴지는 방해인의 감정이 이전과 달리 많이 깊어진 느낌이 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멀뚱히 서 있던 방해인은 이내 머리를 털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험이 끝난 방해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걸어가며 습관처럼 서해빛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채팅창에 읽씹당한 메시지들을 보고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이 오는 것은 열 번 중 두세 번 꼴이었다. 연락을 씹히는 일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보낸 거지. 방해인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단순히 재미로 이런다기엔 열정이 넘치던데요.’
서해빛은 방해인이 만나 봤던 사람들 중에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외관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온갖 착한 척하면서 방해인에겐 거침없이 말하는 게 조금 짜증 나긴 했지만, 그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감도가 올라가는 걸 보는 것도 재밌었다.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방해인은 묘한 쾌락과 고양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서해빛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방해인도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던 예전과 다르게 서해빛 때문에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져도, 서해빛이 조금 건방져도 방해인은 봐줬다. 하지만 이게, 좋아하는 걸까? 방해인은 확신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건 뭔가 좀 더 특별한 감정이라고 방해인은 막연하게 생각했기에 알 수 없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감정이라 물음에 바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지난 행동을 떠올리며 걷던 방해인이 문득 정신을 차리니 자연스럽게 서해빛이 시험을 보는 강의실이었다. 문에 뚫린 작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시험은 거의 끝나 가는지 사람은 몇 없었다. 그중에 서해빛은 없었다. 방해인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지만 어떠한 알림도 떠 있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서해빛의 호감도가 잘 오르던 그 시기엔, 가끔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다. 방해인은 그때 꽤 우쭐해하기도 했다. 그러던 서해빛의 행동이 냉랭해진 기점은.
‘선배 저 좋아해요?’
카페에서 물었던 그날부터인 게 틀림없었다. 방해인은 고민했다. 서해빛은 왜 자신에게 저런 물음을 한 것일까. 저 물음에 뭐가 담겨 있었길래? 저러고 다음 날 만나니 호감도가 떨어져 있긴 했다. 만약 저기서 좋아한다고 대답했더라면 서해빛은 냉랭해지지 않았으려나.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뭐가 되길래. 방해인은 그간 서해빛에 대해 떠올리다 그가 근래에 꽤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선배랑 제가 무슨 사이라고.’
‘우리 사이에 꼭 받아야 하는 일은 없잖아요.’
가끔은 부루퉁하게, 아니면 아까처럼 무신경한 듯 툭툭 서해빛은 방해인과의 사이에 대해 자주 언급했었다.
“아.”
왜 이제까지 생각을 못 했지?
방해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둔함을 탓했다. 방해인의 추론은 이랬다. 서해빛 역시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다. 호감도가 그걸 정확한 수치로 알려 주고 있으니까.
서로 관심 있는 사람들이 그걸 서로 알게 되면 대체로 결론은 똑같았다. 연애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유대감이 되었다는 걸 티 내기 위해 만든 관계. 서해빛은 그런 걸 원했던 건가. 그 귀찮고 별로 도움도 안 될 것 같은 관계를…?
게다가 자신은 알파고 서해빛은 베타였다. 사귄다고 한들 아무것도 이득이 없다는 뜻이었다. 방해인은 의아함에 계속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만약 서해빛에게 사귀자고 하면 전처럼 웃기도 하고 먼저 연락도 하고 전화도, 메시지도 안 씹을까. 그렇게 된다면, 또 서해빛이 그러기를 원한다면 방해인은 기꺼이 사귀자고 말할 수 있었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서해빛이 자신의 행동을 명확한 호감이라고 느꼈다면, 정정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걸 막연하게 다른 것과 달리 특별한 감정이라 여겨오긴 했지만 서해빛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제게 특별한 존재이니 어쩌면 좋아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서해빛을 조금 특별하게 여기니까 그가 지금보다 제게 다정해진다면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비록 아무런 이득도 쓸모도 없을 것 같은 관계였지만 상대가 서해빛이라면 완전히 쓸모없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방해인은 문득 들었다.
방해인은 휴대폰을 켜 서해빛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방해인: 나 오늘 니네 카페 갈래. 강의실 앞에서 기다린다.] 오후 3:23 -1
* * *
“어디 가. 문자 못 봤어?”
강의실을 나와 자신을 지나치려는 해빛을 방해인이 붙잡았다. 방해인을 못 본 건지, 못 본 척하는 건지 해빛은 살짝 눈을 크게 뜨고는 그제야 제 폰을 확인했다.
“못 봤어요. 저 시험 보는 중이었잖아요.”
그러네. 납득한 해인이 꽉 잡은 해빛의 손을 놓아줬다. 해빛은 물끄러미 방해인을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그럼.”
“응.”
서해빛은 가는 동안 별다른 말이 없었고 방해인 역시도 머릿속으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생각하느라 둘 사이는 조용했다. 말없이 걷다 보니 한 건널목만 건너면 곧 카페가 있는 골목이 나왔다. 신호등의 빨간 불에 멈춰 섰고 방해인은 서해빛의 얼굴을 흘겨봤다.
방해인은 초조해했다. 사귀자고 하면 서해빛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웃을까? 좋아할까? 아님 좀 놀라 할까? 어느 쪽이 되었든 싫어할 것 같지는 않았다. 꼴에 고백이라고 할 생각을 하니까 손끝이 달달 떨리는 것 같아 주먹을 꽉 쥐니 이번에는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선배 추워요?”
“아니.”
“…네.”
아무리 봐도 몸을 덜덜 떠는 게 조금 추워 보여 해빛은 살짝 해인의 옆으로 붙어 섰다. 신호등 불이 바뀌었고 먼저 앞으로 걸어간 건 방해인이었다. 조금 뒤늦게 서해빛도 발걸음도 떨어트렸다. 카페가 있는 골목 길목에 들어서니 사람이 거의 줄어들었다.
카페 앞에 도착하자 방해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요즘 왜 그러나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문을 열던 해빛이 멈추고 뒤를 돌아봤지만, 방해인은 해빛의 발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사귀자.”
오는 내내 몇 번을 되뇌었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내며 방해인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단순히 상황을 좋게 만들기 위해 고백하는 것치고는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방해인의 고백에 덩달아 움찔거리던 해인의 입매는 해빛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서해빛은 기뻐하지도, 웃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눈은 놀란 듯 크게 떠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지금 저 표정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썩 좋은 표정은 아니라는 거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잘게 떨리던 방해인의 몸이 가라앉고 손끝이 차게 식는 듯했다.
네가 원하던 게 이거 아니야? 방해인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주변이 워낙 조용해 그 중얼거림은 정확하게 해빛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서해빛의 표정에 놀람 따위는 없었다. 오직 일그러짐만 남아 있었다.
“…네? 제가 원했던 거라고요?”
서해빛에게 하려던 말은 아니었기에 방해인은 낭패감이 밀려와 입술을 짓씹으며 잘못 말했다고 하려 했지만 서해빛은 틈을 주지 않았다.
“제가 언제 선배가 고백하는 거 원한다고 했어요…? 왜 선배는 늘 자기 멋대로예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격정적인 해빛의 분노에 방해인은 당혹스러움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해빛에게 손을 뻗어 봤지만 거칠게 쳐 내질 뿐이었다. 따끔거리는 손을 방해인이 멍한 눈으로 봤다.
“선배는 늘 그런 식이에요. 제가 좋든, 싫든,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원하는 대로만 하려고 하고. 대체 제가 뭘 했길래 선배의 그런 적선하는 듯한 고백을 듣길 원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적선…? 내 고백이 적선이라고. 나름 어렵사리 한 고백이 그런 취급을 당하니 방해인의 표정도 조금 싸늘하게 굳었다.
“적선이라고? 넌 고백을 적선하듯 할 수 있어?”
“지금 선배가 그러고 있잖아요. 애초에 선배, 선배는 자기 마음을 잘 알기나 하는 거예요? 그냥 재밌어서 이러는 거라면서요, 지금도 그냥 제 반응이 재밌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 확신할 수 있어요?”
방해인은 후회했다. 예전에 서해빛이 방해인에게 왜 그러냐 던진 물음에 대충 했던 대답이 아직까지 그의 발목을 붙잡을지는 몰랐던 것 같다. 재밌냐고, 아직도 재밌냐고. 전혀 재미없었다. 이런 말싸움 따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방해인은 이대로 닥치라고 욕하며 가 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하…. 서해빛. 내가 미쳤다고, 그냥 재밌다고 너한테 사귀자고 할 리가 없잖아.”
“그럼 왜 한 건데요. 선배가 갑자기 이럴 리가 없잖아요. 저 좋아하세요?”
해빛이 위압적으로 한걸음 바짝 다가오자 방해인은 뒤로 주춤거렸다. 특별하게 여기는 감정을 좋아한다고 칭하기로 했지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스스로에게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해도 저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이게 좋아하는 건지 뭔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면 관계가 끝나 버릴 게 불 보듯 뻔해 방해인은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으로 서해빛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좋아해.”
힘겹게 뱉은 말에 돌아오는 건 차가운 멸시와 떨어지는 호감도뿐이었다.
“거짓말하지 마요. 선배 모르죠, 선배는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티 나요. 설령 그 말이 진심이라고 해도……. 전 선배 싫어요. 단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었어. 어차피.”
‟……뭐?”
전 선배 싫어요. 단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었어. 분노 서린 말이 해인의 귓가에 계속 울리는 것 같았다. 방해인의 얼굴이 한순간에 괴롭다는 듯 일그러졌다. 방해인이 서해빛의 머리 위 호감도를 한번 쳐다봤다. [호감도 22], 방해인의 고백의 결과는 ‘-6’이었다.
분노를 넘어서 진절머리가 난 듯한 서해빛의 얼굴에 방해인은 시선을 돌려 버렸다. 목 안에서 무언가가 울컥울컥 넘어올 것 같은지 목울대가 연신 일렁였다. 가시 돋친 정적 속에 방해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말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물음과 함께 방해인이 다시 서해빛을 쳐다봤다. 방해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간절한 빛이 미약하게 떠올랐다. 서해빛이 방해인과 있으면서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리는 없었다. 해빛의 호감도가 올랐으니까. 그러니 저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단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방해인도 알고 있었지만….
불안하게 떨리는 방해인의 눈동자에 서해빛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단호한 빛을 띠며 대답했다.
“네, 정말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서해빛이 정말이라고 대답해 버리면 방해인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서해빛이 제 입으로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방해인은 그걸 알 수 없었으니까. 방해인에게 보이는 서해빛의 호감도는 그저 기이한 시스템으로 인해 엿본 것에 불과하니까.
방해인이 고개를 힘없이 수그렸다. 모든 게 허탈했고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서해빛이 저리 단호하게 말하는데, 자신의 고백에 진심이 없다고 단정 짓는데 방해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귀긴, 내가 누굴 사귀어.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방해인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감정이 격렬하게 드러나던 방금과는 전혀 다르게 방해인은 허탈하게 소리를 흘렸다.
“아…. 그래. 내가 오해했다. 방금 일은 잊어.”
이제 재미없다. 그만할게. 방해인은 그대로 돌아섰고 서해빛은 굳은 표정으로 방해인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끝이다, 방해인은 생각했다. 카페가 있는 골목을 빠져나온 방해인이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였다. 초록불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방해인은 다급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대신 멈춰 서서 강서준을 호출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불이 빨간불로 바뀌고 방해인이 작성한 메시지를 전송하는 순간, 강렬한 경고음이 방해인의 귓속을 날카롭게 때렸다. 영상을 보고 있던 해인도 덩달아 놀라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찌푸렸다. 방해인은 심하게 놀란 듯 몸을 움츠리며 휘청거렸고 그 탓에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휴대폰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방해인의 시야에 새빨간 시스템창이 가득 채워졌다.
[경고]
공략 인물 서해빛의 <공략 실패> 루트가 열리려고 합니다. 24시간 이내에 서해빛의 마음을 풀어 주지 않으면 <공략 실패>가 됩니다. 공략 실패에는 큰 페널티와 리스크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 23:58:46
“공략 실패…….”
방해인은 멍한 눈으로 시스템창을 쳐다보다 날카로운 경고음이 사라졌을 즈음 그대로 창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남은 시간 표시는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체념한 방해인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봤다. 하필 액정 쪽으로 떨어져 있는 휴대폰을 방해인이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럼 그렇지 액정이 전부 파손되어 있었다. 거미줄처럼 조각난 화면 너머로 강서준의 답장이 보였다.
[강서준 : 알겠습니다. 5시 10분까지 학교 정문으로 가겠습니다.] 오후 4:58
문자를 보던 방해인은 깨진 액정에 비치는 제 얼굴이 못나 보여 근처 쓰레기통에 휴대폰을 던져 버렸다. 신호등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건너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린 방해인의 얼굴은,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영상이 끝나고 해인은 겨우 2개 남은 영상의 썸네일을 넋을 놓고 쳐다봤다. 나머지 내용은 보지 않아도 예상이 되었다. 방해인은 결국 서해빛의 마음을 풀어 주지 못하고 공략 실패를 하겠지. 결말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인은 방해인이 공략 실패 루트를 열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
고백을 하지 말지, 아님 ‘네가 원하던 게 이거 아니야?’라는 말을 뱉지 말지, 아님…. 다시 돌아가서 서해빛에게 사과라도 하지. 이미 다 지난 일에, 해인은 제가 더 후회가 들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 순간 침대 위에 올려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은 서해빛이었다.
떨리는 시선으로 보던 해인은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칫했다. 허공 위에서 움찔거리던 손은 전화가 끊길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화가 끊어지고 떠오른 부재중 알림에 해인은 그제야 휴대폰을 집고는 그대로 전원을 꺼 버렸다.
혹시라도 또 전화가 올까 봐. 그러면 그때는 받아 버릴 것 같아서. 방해인은 인지 못 한 후회와 미련이 아직 제게 선연해, 해인은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차라리 빨리 배드 엔딩을 맞는 방해인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Day 70]
다음 날, 방해인은 서해빛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도 않았고 강의실에도 가지 않았다. 방해인이 찾지 않으니 서해빛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방해인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방해인이 공략 실패까지 남은 시간을 흘긋 쳐다봤다. 시험 보는 내내 저 타이머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멈추지 않고 흐른 시간은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저 시간이 끝나면 서해빛과는 완전히 끝이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방해인은 자꾸만 시선이 가는지 허공을 계속 힐끔거렸다. 볼 때마다 확확 줄어드는 숫자에 조급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2분이 남았을 때는 방해인은 할 것도 없이 애꿎은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봤다. 2분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곧이어 숫자가 모두 0이 되는 순간, 강렬한 경고음이 귀를 때리듯 울렸다. 깜짝 놀란 방해인은 몸을 움찔거렸고 그건 영상을 보는 해인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겪은 일인데도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소리였다.
방해인의 눈앞으로 새빨간 시스템창이 거대하게 떠올랐다.
[공략 실패]
방해인 님, 아쉽게도 서해빛 공략을 실패하셨습니다. 예고한 대로 공략 실패에는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방해인 님께 주어질 페널티 분석을 시작하겠습니다.
“…뭐래. 미친.”
짐짓 담담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방해인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빨간 빛을 내는 시스템창은 ‘…분석 중…’이라는 알 수 없는 문구를 띄워 놓은 채였다.
방해인이 눈을 찌푸리며 다른 시스템창을 띄우고 게임 종료를 누르자 우습게도 게임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분석 중…’이라는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낯으로 방해인이 그 창을 보고 있길 몇 분,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분석 완료]
방해인 님의 공략 실패 원인에 대해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공략 실패 원인은 ‘오만함’, ‘성급함’입니다. 특별히 다음 게임 플레이에 도움이 되게끔 이를 보충할 수 있는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오만함’, ‘성급함’을 없애기 위해 기억이 조작됩니다.
모든 창이 사라지고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설정 조정 중… 4%]
[설정 조정 중… 8%]
[설정 조정 중… 13%]
영상을 보고 있던 해인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설정 조정 중, 백담호와 서해빛의 머리 위에 있던 말과 똑같았다.
“기억 조작…? 설정 조정 중…?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다신 게임 안 할 거야, 씨발. 낮게 욕을 짓씹으며 방해인은 시스템창 이곳저곳을 터치했지만, 창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해인이 이곳저곳 허공에 헛손질을 하는 내내 숫자는 멈추지 않고 점점 커져 갔다. 숫자가 ‘100’과 가까워질수록 허공을 휘두르는 방해인의 손짓 역시 다급해졌지만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다.
“왜 안 멈춰. 미친, 이게 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커진 방해인은 시스템창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숫자는 이미.
[설정 조정 중… 100%]
100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대로 몸이 굳은 방해인이 겁에 질린 눈으로 보길 3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가 싶던 그때, 방해인이 그대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갑자기 방전된 휴대폰처럼 방해인은 바닥에 널브러져 미동도 없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해인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이던 찰나였다. 영상 화면을 시스템창이 꽉 채웠다.
[설정 조정 성공!]
방해인 님의 오만하고 성급한 성격을 없애기 위해 기억을 삭제하고 그에 따라 생긴 공백에 적당한 설정 부여와 필요한 전생의 기억 일부분을 주입했습니다. 방해인 님의 설정에 ‘빙의자(희귀)’가 추가됩니다. 에 대한 기억 포함 기억 손실의 페널티 또한 주어졌습니다. 또한, 배드 엔딩 <널 가질 수 없다면 잊겠어>를 달성하셨습니다. 배드 엔딩의 경우 특수한 목적 달성으로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엔딩 열람을 통해 방해인 님께 주어진 기억 손실 페널티를 극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즐거운 플레이 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