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잊혀진 주인공(1)
반투명한 시스템창 뒤로 정작 이걸 봐야 하는 방해인은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화면을 꽉 채운 시스템창이 사라졌다. 끝날 줄 알았던 영상은 끝나지 않은 채 바닥에 쓰러진 방해인을 계속해서 보여 줬다.
대체 무슨 상황이 더 있길래 영상이 안 끝나는 거지? 아직 생각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해인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화면을 쳐다봤다.
‘기억을 삭제하고 그에 따라 생긴 공백에 적당한 설정 부여와 전생의 기억을 주입했습니다.’
시스템창은 사라진 지 한참인데 해인의 눈앞에는 여전히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엄청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알아 버린 것 같은데 그게 충격적이라 해인은 넋이 나가 버렸다.
기억 삭제, 설정 부여, 전생의 기억 주입. 이것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화면을 보던 중, 방해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에 손을 대며 몸을 일으킨 방해인이 주변을 둘러보다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방해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저 마지막에 눈을 뜬 방해인은•••, 해인 자신이었다. 해인이 기억하는 빙의한 첫날과 똑같았으니까. 아직 마지막 영상 하나가 남았지만 재생 버튼을 감히 누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해인은 창을 닫아 버리고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서 창가로 이동했다. 여태껏 자신은 방해인의 몸속에 빙의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빙의한 초반에는 전생의 기억이 흐릿하게 존재했고, 해인이 기억하는 <그레비티> 소설 속의 인물들과 똑같았으니까 당연히 여기는 소설 속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엔딩이라고 보여 준 영상 속에서는 방해인이 단지 공략 실패로 기억을 잃은 상태라고만 말한다. 해인은 입술을 짓씹다가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방해인 (조연은 이제 주연: 호칭에 맞게 이야기가 조정되는 중입니다… 5%)
나이: 22
키: 177cm
능력치
-힘: 중하 / 외모: 최상 / 매력지수: A
스킬
-협박(희귀 스킬): 화난 표정으로 윽박지르면 대부분 겁을 먹고 당신의 말을 따릅니다. (소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너 오타쿠니?: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1.8퍼센트(%) 빠르게 호감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눈치 없이 이 세상 살아남기 : 4.8%의 확률로 눈치가 없어도 상대가 넘어가 줍니다.
특이 사항
-열성 알파
-페널티에 대한 손실 복구 (대기: 4시간)
“미친.”
바로 특이 사항을 읽은 해인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분명 자신의 상태창에 있었던 ‘빙의자’가 사라졌다. 이로써 명확해지고 말았다.
나는, 방해인이다. 나와 방해인은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정황으로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지만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왜 그리 방해인의 감정이 영상을 안 볼 때도 짙게 남아 있는지 이해가 갔다.
해인이 본 건 다른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방해인, 자신의 과거였으니까. 해인은 다시 제 상태창을 쳐다봤다. 협박 스킬은 원작의 방해인 때문에 있는 것이라 자연스럽게 여겨 왔는데…. 그 ‘방해인’이 나라니. 혼란스러운 마음에 상태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도중 ‘페널티에 대한 손실 복구’ 옆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저 대기 시간은 또 뭐야?
손실 복구? 뭐 게임을 시작하기 전으로 돌려보내 줄 건가? 아니면 대체 무슨….
“하…….”
지끈, 머리가 꽉 조이는 것처럼 아파 왔다. 해인은 이마를 짚다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몸을 벽에 기댔다. 일단…. 그래, 일단 남은 영상을 마저 보자.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해인은 플레이어 정보창을 끄고 다시 영상을 재생하기 위해 창을 열었다.
마지막 영상 가운데에 적혀 있는 날짜는, [DAY 129]이었다. 이미 방해인이 기억을 잃은 지 한참 지난 시점이었다. 대체 이 영상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해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DAY 129]
욕실이었다. 이 침실에 있는 욕실. 밤인지 욕실 안은 깜깜했고 아무도 없었다. 해인이 의아하게 쳐다보며 화면을 한번 터치하니 영상 길이는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어둡고 아무도 없는 욕실의 분위기가 조금 음산한 탓에 약간 긴장이 되었다.
1분가량이 지났을 때 욕실 거울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창의 밝고 푸른 형광색 덕에 자연스럽게 해인의 시선은 거울로 쏠렸다.
[알림]
플레이어 방해인 님, 장기 미접속으로 플레이어 자격이 박탈됩니다. 그동안 플레이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해인 님의 플레이는 개발과 수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임이 개발과 수정을 거치는 동안 푹 쉬시고 다음, 방해인 님께 걸맞은 게임으로 ‘특별’ 초대권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후에 보여 주실 방해인 님의 플레이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해인이 다 읽자 마치 예측이라도 한 듯 시스템창이 사라지고 [Real-life dating sim 테스트 플레이 종료]라는 문구가 5초간 빛났다 사라졌다. 그렇게 영상은 끝났다.
마지막 영상까지 본 해인의 표정은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욕실에 떠오른 시스템창에 쓰여진 문구는 마치 지금 자신이 엔딩을 열람할 거라는 걸 모두 예견한 것 같았다. 자신이 다시 게임 플레이를 할 거라는 것, 그리고 다시…. 서해빛을 공략 인물로 등록하게 될 거라는 것 전부를.
해인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이함에 휩싸였다. 이미 다 정해 놓은 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연신 소름이 돋아나는 기묘한 감각에 시스템창을 쳐다보는 해인의 마음속에서 두려움, 공포, 증오, 혐오 등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다시 생각해도 마지막 영상을 굳이 보여 준 이유는 나중에, 그러니까 지금 엔딩을 열람할 자신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분명했다.
게다가 뭐…? 테스트 플레이? 그러니까 지금 자신은 원치도 않게 이상한 게임의 베타 테스트를 하다가 기억을 잃어버린 거란 의미인가. 몸을 감싸던 여러 감정들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어 갔다. 기억도 잃게 만든 주제에 빙의한 거라고 철석같이 믿게 만들고 억지로 다시 게임에 참여시키고…?
“미친 거 아니야?”
자신이 방해인이라는 사실과 지금 현재 이 꼴이 난 게 개 같은 게임 탓이라는 사실이 뒤섞여 해인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다 문득, 뒤늦게 깨달았다. 왜 다른 전생의 기억은 흐릿하게 형태라도 남아 있는데 이름만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방해인의 오만하고 성급한 성격을 없애는 데 전생의 이름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애초에 전생이라고 믿었던 기억이 전생이 아니었던 걸까?
해인은 자신의 생이라고 믿었던 정보들을 차분하게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선 자신은,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그건 전생에 있었던 최악의 날들이 전부 비 오는 날에 일어났었다는 각인 때문이었다. 또 타인에게 정을 주는 걸 꺼려 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오르진 않지만.
이름이 기억이 안 나도, 전생의 기억이 대부분 떠오르지 않아도 한 번도 방해인이 자신일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해인은 방해인과 전혀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방해인이라고?
해인은 제 정체성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이 사실을 모르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기분이 참담하게 가라앉았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졌고 자신의 존재마저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창을 해인은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그래 봤자 시스템창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방해인은 시스템창을 계속해서 싸늘하게 노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드 엔딩 열람 같은 거 하지 말걸. 자주 그래 왔듯 모르는 척하고 그냥 살걸. 그랬더라면 지금같이 참혹하고 모든 게 엉망인 상황을 겪지 않았을 텐데. 게임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화가 나는 동시에 힘이 빠졌고 원망스러운 동시에 다 알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체념밖에 할 수 없었다.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해인이 아래로 쓰러지듯 내려가 다리를 모으며 주저앉았다. 시스템창도 해인을 따라 같이 내려와 정면에 자리했다. 개 같은 게임, 좆같은 게임. 꼴도 보기 싫어 시스템창을 닫으려던 해인이 멈칫했다. 허공에서 움찔거리던 손은 창을 닫는 대신 시스템창 메인 화면 아주 맨 아래 작게 써 있는 [게임 종료] 위로 향했다.
필수 퀘스트가 있는 걸 안다. 이걸 누르면 경고창이 뜨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해인은 [게임 종료]를 눌렀다.
[경고]
아직 백담호의 필수 퀘스트가 남아 있습니다. 게임 종료 시 필수 퀘스트가 자동 포기 되며 페널티 또는 리스크가 주어집니다. 정말 종료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페널티, 리스크. 세상에 어떤 게임이 플레이어가 종료하겠다는데 퀘스트가 남았다고 페널티를 주겠다고 할까. 심지어 그 페널티 중에는 기억을 삭제하고 조작하는 것까지 있었다. 처음부터 정상적인 게임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이 게임은 미쳤다. 애초부터 참여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개거지인 채로 지내고 말지.
해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예’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해인은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그대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은 곳은 예가 아니라 ‘아니오’였다. 창이 닫히고 해인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겁만 존나게 많은 병신이다. 페널티고 뭐고 할 수만 있다면 게임을 당장 종료해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걸 전부 감내할 용기는 없었다.
지금 엔딩을 본 것도 후회하는 마당에, 페널티를 받을 용기가 있을 리가.
‘방해인 님의 오만하고 성급한 성격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창은 방해인의 오만하고 성급한 성격을 없애기 위해 남의 기억을 전부 엉망으로 망가트렸다. 얼마나 망가트렸냐면 자신이 정말로 누군지 알게 되었는데도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전히 방해인과 자신은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만약 원래의 방해인이라면 지금 페널티고 리스크고 뭐고 다 무시하고 게임을 종료해 버렸을까. 기억을 잃은 자신은 시스템이 말하는 대로 오만하지도 않았고 성급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만 싶은 머저리였다.
“……등신.”
해인은 낮게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 앞에서 해인은 모든 전의를 잃어버렸다. 결국 서해빛과의 문제도 자신의 탓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 해빛에게 했던 행동들 때문에 지금까지 이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까.
기억을 잃게 만들고 억지로 게임에 참여시킨 시스템에도 화가 났지만 엔딩을 열람해 버린 지금,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는 걸 알아 더욱 힘이 빠졌다. 애초에 서해빛을 공략 인물로 등록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님 적어도 공략 실패 경고가 떴을 때 서해빛에게 다시 돌아가든가, 아님… 엔딩을 열람하지 말았든가. 의미 없는 가정을 시작하자 비관적인 수렁으로 파고들어 가는 생각 때문에 도무지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해인은 서준에게 저녁을 거른다는 말을 전하고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전날 밤을 새운 여파도 있었지만, 이틀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한 번에 피로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복잡한 이 상황을 잠시라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잠을 자는 것밖에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잠이 들기 직전에 문득 백담호에게 이따 연락하기로 했는데, 전화는 하고 자야 하는데, 라고 웅얼거렸지만 이미 수마가 해인의 몸을 덮치고 있었다.
잠드는 해인의 머리 위로 시스템창이 떠올랐지만 해인은 그걸 보지 못했다.
[알림]
지난 게임에서 받은 페널티로 인해 생긴 손실 복구를 시작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방해인 님.
* * *
기나긴 꿈을 꿨다. 어떤 이의 어린 시절을,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을, 가족들과 여행을 갔던 날들을.
누군가의 일생을 꿈속에서 보고 느꼈다. 그 일생이 끝나 갈 즈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검은 공간에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이 없이 둥둥 떠 있는 내 발을, 내 손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내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러자 눈앞에 커다란 벽이 생겼다. 그 높고 거대한 벽은 티끌 하나 없이 반짝였다.
반사되는 벽은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내가 경험한 다른 이의 일생은 방해인의 삶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나의 과거이기도 했다. 그걸 깨닫자마자 검은 공간이 갑자기 붕괴되기 시작했다.
“미친!”
해인이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악몽이라도 꾼 듯이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해인은 방금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밭은 숨을 쉬고 있었다. 지금 무슨, 해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것인 듯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그 순간 무언가가 해인의 뺨에 닿았고 소스라치게 놀란 해인이 그걸 퍽 쳐 냈다.
해인이 옆을 획 돌아보니 보이는 건 다름 아닌 백담호였다.
“…백담호?”
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왜 얘가 여기에? 백담호는 다시 천천히 손을 뻗어 해인의 볼을 감쌌다. 이번에는 쳐 내지 않았지만 두 눈은 복잡했고 불안한 빛을 띠었다. 그런 해인에게 백담호는 살짝 눈썹을 일그러트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좋은 꿈 꿨어? 자면서 계속 끙끙거리더라.”
안 좋은 꿈. 그건 꿈이 아니었다. 좆같은 게임이 지워 버린 제 기억이 다시 돌아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자신과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의 차이가 워낙 커서 그런지 둘은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마치 동시에 두 사람의 기억을 가진 것만 같은 불쾌감에 해인은 눈을 지그지 감았다. 엔딩 영상 다 봤다고 냅다 과거의 기억을 한 번에 돌려주는 이 게임은 정말 무책임했다.
원작의 방해인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섞여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억이 거의 대부분 돌아와서인지 어제처럼 지나친 정체성의 혼란은 잠재워졌다는 것. 다만 앞으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뿐이었다.
“손 좀 치워, 정신 복….”
쓰다듬는 손길이 무의식적으로 거슬려 짜증스럽게 뱉던 해인은 말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백담호의 손은 떨어지고 있었고 당황한 해인이 백담호를 쳐다보니 그의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말이 잘못 나왔다고, 미안하다고 해명해야 할 것 같은데 해인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어쩐지 사과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 관계가 어찌 되었든, 과거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탓일까. 백담호가 평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까만 눈으로 해인을 직시하던 백담호가 “해인아.” 하고 불렀다.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해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백담호 때문인지 돌아온 기억 때문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단순히 엔딩을 열람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더 선명하고 짙은 감정과 기억이 느껴졌다.
해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백담호가 한 번 더 해인을 불렀다.
“해인아.”
“…왜.”
“내가 마음대로 집에 찾아와서 화났어?”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눈치를 보는 쪽에 훨씬 가까운 투였다. 그 안쓰럽게 들리는 말투에 해인이 무어라 대답하려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백담호는 듣지도 않고 해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을 제 얼굴에 가져다 대며 입매를 조금 아래로 늘어트렸다.
“그런데 핸드폰도 계속 꺼져 있어서 연락도 안 되지, 학교도 안 오지…. 걱정돼서 미칠 뻔했어.”
백담호의 얼굴에 미세하게 우울함이 나타나고 나서야 해인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깨달았다. 백담호가 자신 때문에 불안해하는 걸 알면서도 걱정시킬 대로 걱정시키고 그걸 못 견뎌 찾아온 애한테 매정하게 굴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이러는 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백담호는 그걸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뒤늦게야 죄책감이 느껴져 해인은 입을 뗄 수 있었다.
“미안…. 어제 너무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폰 껐나 봐….”
자신이 말하고도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담호의 볼에 닿은 제 손을 살며시 쓰다듬듯 움직이며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니 백담호는 가만히 해인을 들여다봤다. 자세히 보니 눈가가 평소보다 어두운 듯하다.
“잠 잘 못 잤어?”
해인이 부드럽게 물으니 백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금세 우울해하던 기색은 어디 가고 슬금슬금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백담호는 기어코 해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해인의 허리를 감은 백담호가 그대로 다시 해인을 눕혔다. 잘못 움직이면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해인은 목울대를 일렁였다. 이보다 더한 짓도 했는데 겨우 코앞까지 온 백담호의 얼굴이, 강하게 조여 오는 허리의 감각에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이게 좋은지 싫은지 분간이 되지 않아 해인은 곤란했다.
돌아온 기억과 함께 백담호에게 느꼈던 열등감과 시기도 같이 돌아와 상반되는 두 감정이 계속 충돌했다. 해인은 백담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평소처럼 대하고 싶은데 자꾸만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래…. 생각해 보면 거의 십몇 년을 그저 혼자서 경쟁자로 생각하고 질투했었다. 쉽게 사라질 감정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백담호가 싫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얼굴 계속 마주하기엔 제 감정이 혼잡해 해인은 결국 눈을 피하고 몸을 일으켰다.
“…학교 가야지. 늦겠다. 그런데 지금 몇 시지?”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에 해인이 손을 뻗자 곧바로 백담호가 그 손을 잡고 다시 제 쪽으로 해인을 돌렸다.
“이미 늦었어, 지금 12시 넘었어.”
“…응?”
지금 몇 시라고? 12시가 넘었다는 말에 해인의 시선이 잠시 창문으로 향했다. 혹시 밤 12시가 지났다는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고 창문은 대낮처럼 화창했다. 그럼에도 해인은 백담호에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몇 시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해인에게 백담호는 손수 제 휴대폰 화면을 켜서 보여 줬다. 화면에는 잘못 볼 수도 없이 크게 ‘오후 12:12’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말로 12시가 넘었다는 걸 깨닫자 해인은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오늘 10시부터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조금 늦어 봐야 9시쯤일 거라고 여겼다. 그 이상 넘어가면 분명 강서준이 깨웠을 게 분명하니까.
“왜 내가 지금 일어난 거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었지만, 백담호는 “많이 피곤했나 보지.”라고 덧붙였다. 피곤한 건 피곤한 거고 서준은 절대 자신을 안 깨울 사람이 아니었다. 전에는 일부러 시간을 늘려 말하면서까지 깨웠던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해인이 혼란스러운 침음을 흘리다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백담호가 놓아주지 않았다.
“나 잠시 아래 좀 내려갔다가 오게 이것 좀 놔 봐.”
허리를 감은 손을 풀어내려 힘을 주면 줄수록 백담호는 더욱 해인을 꽉 옭아맸다. 무슨 장난질인가 싶어 백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내려가?”
아, 그게 궁금해서 그런 건가. 해인은 어서 서준에게 이유를 물으러 가고 싶었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서준 씨한테 가 보려고.”
“왜?”
“물어볼 게 있어서.”
“뭐?”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물어도 될 거 같은데도 백담호는 계속 물었다. 얼른 내려가고 싶은 걸 참으며 해인은 최대한 나긋하게 대답했다.
“아침에 무슨 일 있었냐고. 원래 늦게 일어나면 서준 씨가 깨워 주거든.”
“…원래 깨워 준다고?”
드디어 백담호의 팔에 힘이 서서히 빠졌고 해인은 몸을 무사히 일으킬 수 있었다. 백담호가 하도 들러붙는 탓에 구겨져 말려 올라간 제 윗옷을 정리했다.
“어어, 내가 아침에 눈을 잘 못 떠-!”
백담호를 지나쳐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찰나, 몸이 뒤로 훅 당겨졌다. 깜짝 놀란 해인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버둥거렸지만 백담호는 기민하게 제지했다. 순식간에 양손이 머리 위로 결박되고 몸 위로 백담호가 올라탔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백담호는 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반전시켰다. 이유를 캐묻는 백담호가 귀찮다고 생각한 게 방금인데, 순식간에 그 생각을 한 자신을 질책해야 할 것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어두운 눈동자가 어쩐지 아슬해 보여 해인은 무슨 짓이냐고 물으려던 말을 집어넣었다.
아무런 말 없이 백담호는 해인을 내려다봤다. 웃고 있지도 않고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서 해인은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 같기도 해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를 보려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호감도 : 68]
마지막에 봤던 것과 같은 수치에 안심하려다 호감도 위쪽에 있는 작은 글씨에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설정 조정 중 : 12%]
마지막에 봤던 것에 비해 9%나 늘어나 있었다. 해인의 머릿속에 자신이 기억을 잃기 직전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설정 조정 중이 100%가 되고 자신은 기억을 잃었다. 백담호와 서해빛의 머리 위에 있는 ‘설정 조정 중’이 어떤 설정 조정을 의미하는 것일지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나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은 확실했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백담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해인은 백담호가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잠시 잊고 미간을 찌푸렸다. 백담호도 기억을…? 설마, 자신이 기억을 잃은 건 공략 실패 페널티 때문이었다. 저게 떠오른 원인은 조연은 이제 어쩌고 하는 호칭 때문인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무엇을 변화-.
“해인아.”
음산한 목소리에 해인이 그제야 백담호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강서준 없어.”
단호한 말에 해인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서준이 없다고? 분위기가 형형해 마치 세상에서 지워졌다는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으니 아마 아래층에 없다는 말인 것 같은데 왜 강서준이 없지? 백담호는 마치 해인의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바로 말을 이었다.
“가라고 했어. 내가.”
“응?”
“너 깨워도 안 일어난다길래, 내가 돌볼 테니까 일찍 퇴근하라고 했어.”
그리 말한 백담호는 스스로 생각해도 잘했다는 듯 만족스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해인은 순간 이 이야기를 왜 이런 자세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강서준이 백담호가 가란다고 그냥 간 게 더 의문이었다.
“그래서 서준 씨가 바로 퇴근했어?”
“응.”
강서준은 백담호랑 자신이 같이 있는 걸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착각이었나. 해인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의아해하던 해인은 이내 곧 차분하게 들려오는 백담호의 발언에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너랑 사귄다니까 별말 없이 나가던데.”
“…어?”
백담호와 사귀는 걸 강서준에게 꼭꼭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먼저 말할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 아, 이게 숨기려고 했던 건가? 예상치 못하게 들켜 버린 제 연애사에 해인은 당황한 듯 끝맺지 못한 애매한 소리만 뱉으며 눈을 굴렸다. 그런 해인의 반응이 거슬렸던 건지 백담호는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왜,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강서준이 백담호를 경계하는 것 같아서 말을 안 한 거지, 만약 강서준이 먼저 눈치채고 물으면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단지…. 강서준의 귀에 들어가면 최소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갈 수도 있었다는 게 조금 걸릴 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백담호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고 있는 엄마는•••. 까무러치려나•••? 어쩌면 정작 기억 잃고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때는 전혀 못 해 본 의심을 이젠 할지도 모른다. 우리 아들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간 게 분명하다고.
해인은 잠시 생각을 하다 이내 점점 부루퉁해지는 백담호의 얼굴에 결국 바람 빠지듯 웃고 말았다.
“아냐, 괜찮아. 뭐…. 언젠간 말해야 하긴 했으니까.”
“그래? 다행이네. 난 또 내가 말하면 안 되는데 말한 줄 알고 걱정했네.”
걱정은 무슨, 말하면 안 되는 거라고 했으면 말해도 되는 거라고 할 때까지 협박할 기세였으면서. 불만 가득했던 표정은 금세 지워 버리고 백담호는 짙게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붙잡고 있던 해인의 손목을 놔주고 몸을 일으켜 해인의 옆에 앉았다. 해인도 같이 일어나 침대 헤드에 기대다가 벌떡 상반신을 곧추세웠다.
“아, 그럼 나 학교는! 1시 수업이잖아!”
“가지 마. 쉬자.”
백담호의 입에서 수업을 가지 말자는 소리가 이토록 쉽게 나오다니 이것만큼 낯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기억까지 돌아온 지금, 백담호가 학점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고 있는 해인은 황당한 듯 백담호를 쳐다봤다.
“뭔 소리야, 근데 너 몇 시부터 여기 있던 거야?”
해인이 침대 끝자락으로 발을 내리며 끄트머리에 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백담호는 내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있었으니 3교시 끝나고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중 해인의 휴대폰 전원이 켜졌다. 전원이 켜짐과 동시에 떠오르는 무수한 알림에 의아해진 해인이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백담호의 손이 화면을 덮었다.
“수업 시작할 때까지 너 안 오는 거 보고 바로 왔으니까, 아마 10시 20분?”
그럼 백담호도 통으로 수업을 그냥 빠졌다는 소리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해인도 자신이 원인 제공을 했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백담호가 과민하게 반응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떨떠름하게 백담호를 보니 그는 평소처럼 나긋하게 웃으며 해인의 휴대폰을 가져가 버렸다.
“아니, 왜 가져가.”
해인이 손을 주욱 뻗으며 제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지만 멀리 치워 버리는 백담호가 더 빨랐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니 백담호는 해인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말자, 해인아. 응?”
오늘은 그냥 이러고 있자.
해인의 몸이 미세하게 뻣뻣해졌다. 백담호는 슬그머니 얼굴을 들어 올려 해인의 어깨에 턱을 받치고 허리에 손을 둘렀다.
“하루만 쉬자, 너랑 둘이 있고 싶어.”
어디도 가지 말고 둘이서만 있자는 백담호가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귀엽기도해 해인은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작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바로 해인의 몸이 백담호와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둘은 다시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해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백담호는 그를 더욱 세게 끌어당겨서 완전히 제 품에 파묻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수그려 해인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옷 안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살갗을 간지럽혔다.
어깨 위에서 문질러지던 감촉은 서서히 안쪽으로 움직여 드러난 해인의 목덜미에 닿았다. 맨살에 바로 닿는 살덩이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물컹한 게, 해인은 보지 않아도 입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백담호의 입술이 그저 목덜미에 닿았을 뿐인데, 해인은 불현듯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백담호와 제 침대에서 몸을 딱 붙이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무언가 떨쳐 내고 싶은 좋지 못한 기분이 스멀스멀 들었다.
춥, 옅은 물소리를 내며 입술이 피부를 약하게 빨아 들였다가 떨어트리기를 반복했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해인이 목을 앞으로 수그려 피하니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놀란 해인이 몸을 버둥거리자 백담호는 더욱 거세게 해인을 끌어안았다. 판판한 배부터 가슴 정 가운데를 훑는 손끝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스치고 지나간 길을 따라 소름이 돋아 해인의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가슴에서 멈출 줄 알았던 손은 미련 없이 지나쳐 목 위로 올라왔다. 그렇게 해인의 목이 스르르 감싸졌고 제 쪽으로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앞으로 수그러졌던 몸이 반항 없이 뒤로 젖혀지자 백담호는 헐렁한 옷 틈으로 드러난 하얀 살을 물고 빨기 시작했다. 점점 적나라해지는 접촉에 자꾸만 드는 이상한 기분을 잊기 위해 해인은 1차원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읏……. 간지러….”
저릿한 느낌에 해인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앞으로 숙이려 해도 이미 목이 잡힌 터라 그럴 수 없었다. 아직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느리게 명치 부근을 쓰다듬다 아래로 내려갔다. 바지의 허리 경계선에서 아슬하게 파고들듯 말듯 훑었다.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해인도 이상한 기분이 점차 사라졌고, 흥분감에 숨이 가빠지고 아래로 열이 몰릴 즈음이었다. 해인의 배에서 조금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백담호는 물론 해인까지 멈칫거리고 말았다.
“…….”
삽시간에 해인의 목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뒤에서는 실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미친. 타이밍도 이렇게 최악의 타이밍이 없었다. 순식간에 음습하고 달뜬 분위기는 무너져 버렸고 백담호는 그게 그렇게 웃긴지 아직도 픽픽 웃고 있었다.
쪽팔림이 몰려와 해인이 나직하게 “입 닥쳐.”라고 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조용히 해.”라고 순화시켜 뱉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도리어 백담호는 해인의 배 위를 둥둥 두드리며 즐겁게 웃었다.
“해인아.”
“…뭐.”
자신은 민망해 죽겠는데 배까지 굳이 두드리며 웃는 백담호에 해인의 대답은 삐딱했다. 그러자 백담호는 진정하라는 듯 이제는 배를 살살 문질렀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는지 해인이 몸을 뒤로 획 돌려 사납게 쏘아봤다. 백담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눈을 휜 채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나도 배고프다, 밥 먹을까.”
놀릴 거 실컷 놀리고 자기도 배고프다고 밥 먹자고 하는 게 해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 어이가 없긴 했지만….
“…응.”
기분 좋게 휘어져 있는 백담호의 두 눈과 마주하니 짜증이 빠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더불어 아까 느껴졌던 벗어나고 싶은 이상한 기분 역시도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 * *
늘 강서준만 있던 주방에 낯선 존재가 서 있으니 기분이 묘해 해인은 빤히 쳐다봤다.
혼자서 어색한 손놀림으로 백담호는 양파를 썰고 있었고 해인은 식탁 의자에 앉아 그걸 지켜봤다. 있는 반찬으로 대충 먹자는 해인의 말에 백담호는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냉장고에 먹을 게 가득한데 굳이 그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강경해 보이는 백담호의 태도에 해인은 수긍하고 말았다. 그럼 같이 준비하자고 해인이 말했으나 백담호는 그것도 싫다고 했다. 알 수 없는 고집에 해인은 결국 가만히 앉아서 백담호의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다.
백담호는 크림 파스타를 하려는 건지 냄비에 파스타 면을 삶고 심지어 우유를 부어 소스까지 직접 만들고 있었다. 방법을 제대로 아는 건 아닌지 가끔씩 핸드폰을 빤히 들여다보는 모습에 해인은 남모르게 웃었다.
멍하니 웃으면서 보다가 머리 위의 호감도가 언제 오른 건지 ‘69’가 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위에 있는 ‘설정 조정 중’의 숫자도 15%로 올라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숫자가 생각보다 빠르게 오른다.
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저게 대체 뭘까, 15%면 뭔가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해인은 시선을 내려 백담호의 등을 보다 그 너머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을 쳐다봤다.
잘게 썬 재료들을 프라이팬에 볶으려는지 백담호는 기름을 두르고 예열된 팬에 부었다. 그리고는 다져져 있던 마늘을 숟가락으로 퍼서 넣으려는 순간 해인이 벌떡 일어섰다.
“잠깐, 잠깐, 잠깐.”
다급하게 외친 해인이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백담호의 말을 어기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백담호는 갑작스러운 해인의 행동에 놀란 건지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해인은 말 대신 백담호의 손을 붙잡아 흔들었다. 그러자 숟가락에 퍼올린 다진 마늘이 다시 통 안으로 쏟아졌다.
한 숟가락 가득 퍼졌던 마늘을 반의반의 반만 남기고 다 덜어 내고 나서야 해인은 백담호의 손을 놓아줬다. 그제야 해인의 행동을 깨달은 백담호가 멋쩍게 웃었고 해인은 그런 그를 잠시 보다가 불을 줄여 줬다.
백담호는 또 답지 않게 아, 하고 탄성을 흘리며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미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늘 자신보다 우위에 있던 백담호에게 무언가 알려 주고 도와줬다는 사실이, 그리고 무엇보다 멋쩍어 보이는 미소에 해인은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별거 아닌 것들이긴 했지만 백담호는 별거 아닌 것들까지 잘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왠지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휴대폰은 침실에 두고 와 버렸다.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해인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백담호를 빤히 쳐다봤다. 옆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백담호는 채소를 볶다가 얼굴을 돌렸고 그대로 한쪽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해인아, 왜 그렇게 혼자 히죽거려•••?”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해인이 씰룩거리던 입매를 황급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누그러트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백담호는 종종 걸어가는 해인을 황당한 듯 보다 이내 마늘 덜어 주고 불을 줄여 준 걸로 묘하게 우월감에 차오른 표정이 다시 떠올라 혼자서 픽 실없이 웃었다.
* * *
마늘을 한 숟가락 퍼 넣으려고 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간이나 다른 것들은 적당했고 맛있었다. 아까, 백담호를 드디어 한번 이겨 먹었다고 무의식적으로 기뻐했던 것이 민망해 해인은 더욱 과장되게 맛있다고 말했다. 기억이 돌아오니 인격이 두 개가 생겨 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기억을 잃기 전의 원래 성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제 과거의 모습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니, 자신이 얼마나 개차반이었는지 깨달았다. 엔딩을 열람하며 방해인의 태도를 욕했었는데, 결국 스스로를 욕한 거였다. 해인은 몰려오는 민망함과 다시금 스멀스멀 느껴지는 게임에 대한 분노에 입술을 콱 씹다가 접시를 치우던 백담호와 눈이 마주쳐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
해인이 어색하게 웃으니 백담호도 나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거의 다 치워진 식탁에 해인은 다급히 반찬이라도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불과 어제까지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괴로웠는데 기억이 돌아온 여파 때문인지, 아니면 백담호한테 신경이 쏠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오늘 하루가 힘들지 않았다. 가끔씩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제가 방해인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백담호와 서해빛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지 비관적인 생각들만 떠올랐는데 예고 없이 찾아온 백담호와 직면하니 생각한 것만큼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백담호를 좋아하는 제 마음도 여전한 것 같았다.
해인은 거실 책꽂이를 구경하고 있는 백담호를 쳐다봤다. 오히려 엔딩을 열람할 때 감정 동화가 더 심했던 것 같기도 했다. 다행이긴 한데, 해인은 이상하게 아까부터 가끔씩 불쑥 느껴지는 기이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익숙한 듯 낯선 애매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정의 내리기 힘든.
백담호는 해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책꽂이를 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손을 뻗어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졸업 앨범이었다. 백담호 역시도 졸업 후 어딘가 처박아 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터라 표지가 익숙한 듯 낯설었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순간 해인이 옆으로 다가왔다.
“뭐 봐?”
“우리 졸업 앨범.”
해인은 앨범을 잠시 쳐다보고는 “아, 그러네.” 하고 졸업 앨범을 쳐다봤다. 그러자 백담호는 페이지를 넘겼고 해인은 그걸 빤히 쳐다봤다.
기억을 잃은 뒤 졸업 앨범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빙의한 줄 알았으니, 졸업 앨범을 봐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양심의 가책만 심어 줄 뿐이었다. 원해서 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타인의 삶을 자신이 뺏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니 씁쓸한 기분이 들어 해인은 앨범에서 눈을 돌려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해인의 얼굴에 미세하게균열이 일어났다.
[설정 조정 중16%]
또 올라가 있었다. 저게 대체 뭘까, 생각하던 중 눈이 마주쳤다. 해인은 곧바로 일그러트렸던 표정을 풀며 여상하게 물었다.
“이제 뭐 할까?”
백담호는 물음에 답 대신 “음.” 하고 소리를 흘렸다. 해인은 벽면에 붙은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이제 겨우2시30분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강의를 짼 탓에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런데 백담호는 언제 갈 생각인 거지, 저녁쯤 가려나, 그리 생각하며 해인은 다시 백담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저 ‘설정 조정 중’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다른 것들과 달리 저건 계속 눈에 밟히니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백담호를 볼 때마다 자꾸 생각날 게 분명했다.
시스템창을 열어서 이것저것 뒤지다 보면 정보가 나오려나. 그런데 그러려면 혼자 있는 편이 더 나았다. 생각만으로도 시스템창을 열고 닫을 수 있기는 했지만 백담호에게는 그저 허공을 노려보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아니면 적어도 지금처럼 백담호가 자신 말고 다른 거에 집중을 하고 있다거나. 백담호는 졸업 앨범을 통째로 외우기라도 할 생각인지 한 장 한 장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졸업 앨범을 처음 보는 건가, 해인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옆에 있는 TV에 시선이 닿았다.
“아, 우리 영화나 볼까?”
“그래, 너 보고 싶은 걸로 골라.”
언제 앨범에 정신이 팔렸냐는 듯 백담호는 바로 해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번에도 내가 보고 싶은 거 봤잖아.”
“괜찮아, 원래 영화 보는 거 좋아해서 가리는 거 없어.”
어차피 자신은 안 볼 거긴 한데, 백담호의 말에 계속 우기기도 애매해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리모컨을 들었다.
백담호는 무슨 몇 장 없는 졸업 앨범을 분석이라도 하는지 아직도 페이지가 남아 있었다. 추억이라도 회상하나 싶어 해인은 굳이 백담호를 건들지 않았다. 어차피 영화를 골라야 하기도 했고. TV가 켜지고 적막했던 넓은 공간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채워졌다. 해인은 소파에 앉아 적당히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백담호는 반 단체 사진에서 부루퉁한 얼굴로 끝쪽에 서 있는 해인을 보고 있었다. 이미 졸업 앨범을 끝까지 다 봤지만,어떤 사진에도 해인이 웃고 있는 걸 못 봐 정말 없는 건가 싶어 다시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방해인이 웃고 있는 걸 본 게 정말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던 것 같았다. 어쩌면 없을 지도 몰랐다. 방해인이 자신의 앞에서 웃기 시작한 건 이번 학기가 시작되면서 부터였으니까.
다시 앨범을 살펴도 그나마 밝은 게 무표정인 걸 깨달은 백담호는 픽 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제일 표정이 구린 사진은 제 옆에 있는 사진이었다. 이름 순서대로 조를 만들고 조끼리 사진을 찍었는데 방해인이 바로 제 앞 번호였다. 잔뜩 성난 얼굴로 렌즈도 쳐다보지 않고 있는 방해인의 모습과 여유롭게 웃고 있는 제 모습이 백담호는 문득 어색하게 느껴졌다.
‘씨발•••. 왜 성이 방 씨여서는•••. 이름도 좆 같고 성도 좆 같네•••. 저 새끼는 왜 또 백 씨야. 성을 갈 수도 없고.’
고등학교 시절 두 명이서 하는 수행평가 때 제 옆에 앉은 방해인이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니 해인은 소파에 앉아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누르고 있었다. 저 심각한 표정이 사진 속의 표정과 비슷했지만,사진에서는 자신과 함께 서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었고 지금은 자신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르느라 심각한 것이었다.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사진들을 봐서 그런 가 백담호는 기분이 새삼 묘해졌다. 지금까지는 해인을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덮어 왔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어때?”
드디어 고른 건지 해인은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 백담호를 쳐다봤다. 백담호는 앨범을 덮으며 TV 화면을 보고는 그만 웃고 말았다. 심각한 얼굴로 신중하게 고르고 고르더니 화면에 있는 영화는 인기 순위 1위였다. 학창 시절의 추억에 빠져든다고 인기를 몰고 있던 청춘 로맨스물이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니 방해인이 옅게 웃으며 얼른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백담호는 웃고 있는 해인을 잠시 응시하다 앨범의 사진을 흘겼다. 왤까, 방해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백담호는 앨범을 덮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으니 해인이 자연스럽게 제 몸을 살짝 옆으로 옮겼다.
해인이 영화를 재생하려는 순간, 백담호가 해인을 불렀다. 해인은 리모컨 버튼을 누르던 손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왜 갑자기 나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뭐라고?”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백담호는 마치 별거 아닌 일처럼 똑같이 물었다.
“그냥, 졸업 앨범 보니까 궁금해져서. 넌 늘 날 싫어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가 싶어서.”
질문에서 숨겨진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백담호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평소와같은 얼굴이었다.
“전에는 엿먹으라고 그런 건가 생각하긴 했는데…….”
백담호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이 없는 해인을 물끄러미 들여다봤지만 해인에게서는 약간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까 싶어 백담호는 마저 말을 이었다.
“그건 역시 아닌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잘 모르겠거든. 좀 신기해서, 그렇게 싫어하더니 갑자기 바뀐 게.”
갑자기 그렇게 싫어하던 백담호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 시작은 호감도 때문이었다. 단순히 호감도를 높여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그러다 정말 감정이 생긴 것이다. 애초에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백담호를 싫어했던 감정도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백담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유를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해인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방해인과 현재의 방해인, 전부 똑같은 방해인이자 자신이었지만 그 둘 사이에는 전혀 연결점이 없었다.
만약 자신이•••.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백담호에게 다가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것 같았다. 만약 다가갔더라도 백담호를 향한 열등감과 시기를 버리고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못나게 행동했는지를 깨닫고 나서일 것이다. 아마도 그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겠지.
그렇다면 기억이 돌아온 지금, 백담호를 좋아하는 이 감정은 온전히 진실되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별안간 그런 의문이 드는 것과 동시에 아까 침대에서 백담호의 입술이 닿을 때부터 가끔 튀어나오던 기이한 감정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무언가 떨쳐내고 싶은 그런 이상한 느낌이 억누르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표정이 갑자기 왜 그래.”
급격하게 어두워진 해인의 얼굴에 백담호가 손을 뻗었다. 손끝이 해인의 볼에 닿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해인이 백담호의 손을 거세게 쳐 냈다. 걱정이 어려 있던 검은 눈동자가 당황한 듯 커졌다. 그건 해인도 마찬가지였다.
혼란스러운 듯 백담호를 담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들던 백담호에 대한 불편한 감정, 사소한 것으로 백담호를 이겼다고 자신도 모르게 좋아했던 감정들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 감정들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이건, 혐오였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과거의 방해인이 백담호에게 느꼈던 감정이었다. 오랜 시간 품고 있던 감정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다시 제게 스며들고 있던 것이었다.
백담호를 좋아하는 마음에 과거의 감정에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해인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백담호를 향했다. 백담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당황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해인이 얼마나 세게 쳐 냈는지 빨개진 백담호의 손이 다시 해인에게로 뻗어졌다.
백담호의 손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리모컨을 쥐고 있는 해인의 손이었다. 백담호의 손끝이 닿자 해인이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대로 손끝은 미끄러지듯 살갗을 훑고만 지나갔다. 백담호는 해인을 무표정인 듯 아닌 듯한 애매한 얼굴로 바라보며 그대로 리모컨을 가져가더니 영화를 재생했다.
서늘한 적막감이 감돌던 넓은 공간에 잔잔한 빗소리가 울렸다. 그 탓인지 그나마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영화가 재생되었음에도 백담호는 여전히 해인을 보고 있었다. 해인도 백담호를 보고 있었다. 슬쩍 해인이 머리 위를 살펴봤다. 다행히 내려가지 않은 호감도와 그와 달리 어느새 20%로 변한 설정 조정 수치가 보였다.
“해인아, 화났어?”
일순간 서늘해졌던 분위기와 달리 차분한 음성에 해인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참을 수 없이 느껴지던 혐오감은 그새 흐려져 있었다.
“그래, 다행이네.”
백담호가 그대로 TV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딱딱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해인은 낭패감이 들었다. 화가 났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백담호였다. 영화를 보는 백담호와 달리 해인은 계속 백담호를 쳐다보다가 자책하듯 말했다.
“미안해, 딴생각하고 있다가•••. 갑자기 닿아서 놀랐나 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정말로•••. 해인은 솔직할 수 없어 거짓말 반을 섞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괜찮아.”
백담호가 비스듬히 얼굴을 돌린 채 옅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정말 괜찮아 보이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해인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해인도 애써 입매를 끌어 올리며 “정말 미안.”이라고 덧붙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백담호는 해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뜬금없이 내밀어진 손에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쳐다봤다가 백담호를 쳐다봤다.
“손잡아 줘.”
“아.”
해인이 조심스럽게 백담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피부가 맞닿았고 해인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아까처럼 자제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부감이 흐릿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백담호에게 느껴지는 과거의 감정이 현재의 감정을 흐트려 놓고 있었다.
겹쳐진 두 손을 해인은 바라봤다. 백담호를 좋아한다, 기억을 잃지 않았으면 좋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좋아한다.
‘넌 늘 날 싫어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가 싶어서.’
마음이 바뀐 게 아니었다. 백담호를 싫어하는 감정은 강제적으로 지워져서 나타나지 않았을 뿐,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돌아온 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감정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섞이지 못할 정도로 양극적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둘은 자신이 어느 한쪽을 떼다가 버리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충돌할 것이다.
아까처럼 갑자기 숨기지도 못하고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러니 자신이 노력해야 한다. 해인은 백담호와 겹쳐진 손가락 사이를 벌리고 깍지를 꽉 꼈다. 지금의 상황이 온 건 자신의 선택들로 만들어진 결과였기에. 그리고 과거의 감정으로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이상 이미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중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뽑자면 지금이었다. 과거가 어떠했고 자신이 얼마나 백담호를 싫어했던지 간에 현재가 중요했다.
해인이 힘을 주어 백담호의 손을 움켜잡으니 그의 옅은 미소가 조금 더 진해져 있었다. 기분 좋다는 듯이.
“좋아해, 해인아. 넌?”
나는.
“좋아해, 많이.”
오랜 시간 쌓아 온 싫어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몇 년을 싫어했는데 고작 몇 개월의 호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맞잡은 백담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려 검은 눈을 보니 백담호는 여전히 해인을 보고 있었다.
띵-.
[호감도 달성]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70]을 달성했습니다.
보상, 순간 이동 티켓 1장이 지급되었습니다.
보상, 두근두근 상대의 마음 엿보기 아이템 2개가 지급되었습니다.
떠오른 시스템창 너머로 백담호의 호감도는 ‘71’이 되어 있었다. 해인은 불투명한 창을 치우지 않은 채 눈을 조금 휘어서 웃어 보였다. 이런 행복한 순간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되도록, 잘못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 * *
백담호는 맞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고 해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해인도 TV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해인은 백담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시스템창을 열었다.
그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늘 봐 오던 시스템 메인창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잡스럽게 배치되어 있던 목록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들어갈 때마다 뜨던 광고도 창이 뜨는 대신 상단에 배너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리저리 산만하던 색감 역시 옅은 분홍색과 흰색으로 통일되어 해인은 순간 다른 게임인가 싶어 당황하던 중 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림]
플레이어 방해인 님, <그레비티in dating sim>이 업데이트되면서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추가된 기능들에 대해 간단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업데이트•••? 뜬금없는 업데이트 소식에 해인은 별 고민 없이 ‘예’를 눌렀다. 잘 모르고 있다가 괜한 게임의 장난질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인은 새로 추가된 기능들과 추가로 수정된 것들에 대해 짧게 설명을 들었다. 전과 완전히 달라진 메인창 만큼 생각보다 추가되고 수정된 부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의외로 이게 추가되었다고 하는 기능들도 조금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문의’ 기능이었다. 문의라•••. 일대일 형식의 질문이 아닌 FAQ처럼 몇 가지 질문들을 알아서 정해 놓고 거기에 대한 답변만 있는 그런 걸 말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게임이 순순히 일대일 답변을 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마침 궁금한 게 있었으니 타이밍은 너무 좋았다.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아니, 어쩌면 의도한 것일지도.
메인 시스템창 디자인이 바뀌면서 [게임 종료]가 메인 창 오른쪽 아래에 생겼고 그 옆에 [문의]가 나란히 있었다. 그 문구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해인이 상상으로 터치하자 예상외로 메신저창처럼 생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의도했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건 사용해야 했다.
[system: 안녕하세요, 방해인 님. <그레비티 in dating sim>을 플레이 하던 중 궁금하거나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나요? 편하게 물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커다랗게 ‘입력’이라고 써진 칸과 화상 키보드가 떠올랐다.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키보드에 손을 뻗을 뻔했지만 백담호와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금방 깨닫고 멈칫했다. 제 어깨에 있는 백담호를 흘긋 살피고 영화도 슬쩍 살폈다. 영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으니 아마 중후반쯤 된 것 같았다.
해인은 키보드를 보며 묻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자 입력 칸에 빠르게 글자가 쓰여졌다.
뭐야, 생각만으로도 입력이 되는 거였어?
[player : 개씨발놈아.]
글이 다 써지자마자 자동적으로 발송이 되더니 얼마 안 가 입력 중인 것 같은 뜻의 ‘•••’이 깜빡거렸다.
[system : 이런T^T 방해인 님, 화가 많이 나셨군요. 죄송합니다. 방해인 님의 불만 사항<개씨발놈아>가 접수되었습니다.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지랄하네.
[player : 지랄하네.]
“아.”
이번에는 보내려는 게 아니었는데 마찬가지로 생각을 하자마자 자동으로 보내졌다. 조금 당황한 해인이 몸을 움찔거리자 백담호가 고개를 돌렸다.
“왜?”
“아, 아니야.”
해인이 어색하게 대답하자 백담호는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고는 미심쩍게 해인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담호는 TV를 쳐다봤고 그사이에 답변이 또 와 있었다.
[system : 이런T^T 방해인 님, 화가 많이 나셨군요. 죄송합니다. 방해인 님의 불만 사항<지랄하네.>가 접수되었습니다.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똑같은 답변에 해인은 진이 주욱 빠지고 말았다. 게임에 반강제로 참여시켰던 시스템과 기반이 다른 건가. 타격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시스템은 AI 같았다. 해인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결국 본격적인 질문을 했다.
[player : 백담호와 서해빛의 머리 위에 있는 ‘설정 조정 중’은 뭐죠?]
한5초가량 지났을 때 답장이 도착했다.
[system : 네, 방해인 님. 공략 인물에게 떠오른 ‘설정 조정 중’에 대해 궁금하시군요! ‘설정 조정 중’은 방해인 님의 호칭 ‘조연은 이제 주연’에 의한 것으로 주요 공략 인물들의 설정이 방해인 님의 플레이에 흥미를 더하기 위해 변경이 되는 것입니다.]
플레이를 더욱 흥미롭게? 설정이 변경? 그래서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 주지 않았다. 애매모호한 대답에 해인이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다시 문의를 했다.
[player : 설정이 변경된다는 것이 정확히 뭐죠?]
[system : 게임의 재미를 위해 자세한 사항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player : 재미? 지랄하고 있네. 좆 까.]
[system : 이런T^T 방해인 님, 화가 많이 나셨군요. 죄송합니다. 방해인님의 불만 사항<재미? 지랄하고 있네. 좆 까.>가 접수되었습니다.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아, 또 잘못 보내고 말았다. 해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player : 그럼 설정 조정이 내가 기억을 잃은 것처럼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건가요?]
[system : 방해인 님의 경우, ‘공략 실패’ 페널티로 인한 것이므로 현재 공략 인물들과는 다른 영향을 끼칩니다. 영향의 장단점을 판단하는 건 주관적인 해석이므로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주관적, 다른 영향. 어찌 되었든 기억을 잃은 것은 페널티로 인한 것과는 다르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player : 설정 조정 중을 없앨 수는 없나요?]
[system : 네, 호칭에 대한 효과이므로 불가능합니다.]
[player : 그럼 호칭을 없앨 수는 없나요?]
[system : 불가능합니다.]
[player : 뭐 다 불가능하네요. 개좆같은 게임 지워 버리고 싶어요.]
[system : 대답 거부!]
- system과의 채팅이 끊겼습니다. 다음에 다시 시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
채팅창이 사라진 자리를 해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 이딴…. 문의하라고 만들어 놓고 대답 거부를 하고 먼저 사라진 상담원은 난생처음 봤다. 해인이 황당함에 메인 시스템창을 가만히 쳐다보던 중이었다.
“읏.”
별안간 콱 잡힌 아래에 해인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놀란 눈으로 아래를 보니 백담호의 손이 바지 위를 움켜잡고 있었다.
“아, 아파!”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인가 싶어 해인이 백담호를 쏘아보니 되레 백담호가 퉁명하게 대답했다.
“해인이가 내 말 계속 씹길래.”
“•••나 불렀어?”
“응, 세 번이나.”
시스템과의 채팅에 집중한 탓에 전혀 듣지 못했나 보다. 시스템창 너머TV 화면을 보니 어느새 영화도 끝나 있었다. 그제야 해인은 노려보던 인상을 풀고 무안하게 웃으며 “미안.”이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앞섶을 잡고 있는 백담호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해인은 조금 고통 어린 표정으로 손을 떨어트리려 했다.
“그 손 좀, 나 아픈데•••.”
“영화 끝난 것도 모르는 걸 보면 영화에 집중한 것 같지도 않고.”
백담호는 손을 떨어트리지 않고 손에 힘을 조금 풀고 스윽 스윽 문질렀다. 헐렁한 옷감은 손의 움직임에 따라 주름지며 쓸렸고 구겨진 주름대로 불퉁불퉁한 자극이 미약하게 속옷 위로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해인아.”
“아•••.별생각•••.흣!”
대답을 하라는 건지,말라는 건지 성기 위를 문지르던 손이 아래를 파고들어 가 회음부를 꾸욱 눌렀다. 배가 뭉쳐 들며 간지러운 감각에 해인이 몸을 굽혔다. 덕분에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이 들어 올려져 당겨지며 해인의 몸이 옆으로 돌아갔다. 한쪽 다리가 소파 위로 올라와 백담호의 허벅지 위에 애매하게 올려졌다.
“정말 별생각 안 했어?”
표정이 심각하던데. 오늘 해인이 계속 심각하기만 하네. 내가 괜히 왔나.
…실망스러워서 하는 말이라기에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커다란 손이 성기부터 회음까지 꾸욱 꾸욱 누르니 해인은 점점 아래가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줘. 네가 말하고 싶을 때, 응? 해인아.”
짐짓 다정한 말투와 달리 아래를 건드리는 손은 거칠었다. 손끝을 세워 회음부를 쿡쿡 쑤시는 탓에 해인은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백담호의 물음에 대답 대신 해인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대답.”
거칠게 문지르던 손이 느려졌다. 어서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해인은 숨을 가볍게 헐떡거리며 백담호를 쳐다봤다.
내가 말하고 싶을 때…. 백담호가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 해인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마 아까,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냐는 것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말하고 싶다 한들, 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마음이 바뀐 게 아니었고 그나마 이유라면 기억을 잃고 호감도를 높이기 위해 게임에 참여했다는 것인데, 그러면 처음부터 모두 설명해야 했다. 이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좋은 얘기라고•••. 말해 봤자 좋지 못할 게 분명한 사실은 덮어 버리는 쪽이 나았다.
“으응…. 나중에….”
말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 속마음과 달리 해인은 거짓을 내뱉었다. 그러자 어딘가 불안해 보이던 백담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겨우 지금도 아니고 나중에 말해 주고 싶을 때 말한다는 대답에 금세 만족스러워하는 백담호에 해인은 가슴이 쿡쿡 쑤셨다. 이건 죄책감이었다.
백담호는 잡고 있던 해인과 손을 놓고 그대로 해인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완전히 소파에 눕혀진 해인이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쉽사리 벌려지고 그 사이로 백담호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해인의 손을 다시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이 좀 남는 해인의 윗옷을 백담호가 살짝 걷어 올렸다. 드러난 하얀 살갗이 마음에 드는 듯 나른하게 입매를 끌어 올리고 입으로 빨아들였다.
“하아••••••.”
부드러운 살결이 물기 어린 입술에 닿을 때 떨어질 때마다 축축한 소리를 흘렸다. 백담호가 혀를 빼내어 핥아 올리니 앓는 소리와 함께 해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혀로 핥은 피부가 전등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둥근 엉덩이를 주물렀다.
“으응•••. 간지러•••.”
엉덩이를 콱 움켜쥐고 옆으로 벌릴 때마다 아래가 벌어지면서 묘한 감각을 일으켰다. 은밀하게 녹아드는 성감에 해인이 흐릿해진 얼굴로 아래를 내려봤다. 백담호는 갈수록 더욱 거칠게 둔부를 꽉 쥐었다가 놓았고 배를 핥고 빨던 입술은 더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치켜 뜨여진 까만 눈과 마주치자 나른함 대신에 욕정이 가득 차 있었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위로 올라가 바지를 그대로 벗겨 버렸다.
“아….”
순식간에 벗겨진 하반신에는 빳빳하게 서 있는 해인의 것이 어두운색 브리프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안에서 느끼던 질척한 감각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듯 천은 젖어 있었다. 발기한 탓에 눌린 압박감이 답답해 해인이 스스로 브리프를 내리려 했지만 백담호가 막아섰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백담호가 브리프를 전부 다 내리는 대신 성기가 튀어나올 정도로만 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백담호의 행동에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는 대답 대신 발기한 해인의 것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해인의 성기를 백담호가 가볍게 혀로 훑자 들뜬 몸은 기분 좋은 쾌감에 곱아들었다. 뜨겁고 미끄러운 살덩이가 선단을 꾸욱 눌렀다.
“흐으…. 아흐…….”
움찔거리는 성기를 백담호가 입 안에 넣고 굴렸다. 습하고 가끔씩 목 안에서 바로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숨결이 선단에 닿을 때마다 몸이 저릿했다. 예민한 살갗을 혀로 강하게 문지르고 빨아들이니 참기 힘든 쾌감에 해인은 울먹이는 소리를 내뱉었다.
“담…. 담호야…. 아, 아흐….”
금방이라도 사정감이 몰려올 것 같아 해인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백담호는 골반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흥분감에 조금 붉어진 입이 해인의 성기를 뿌리 끝까지 집어넣고 볼우물이 파일 정도로 거세게 빨아 들였다. 성기의 모든 부분이 자극을 당하니 미칠 것 같은 쾌감에 발가락이 곱아들고 배 아래는 완전히 뭉쳐 들었다. 가쁜 호흡에 따라 회음부 그 아래 구멍까지 움찔거렸다.
성감에 먹먹하게 젖어 드는 시선으로 해인이 백담호를 보며 도리질을 쳤다. 이러다가 또 입 안에 쏟아 낼 게 분명했다. 백담호 입 안에 또 제 정액을 분출하고 싶지 않은 해인과 달리 백담호는 집요했다. 고개를 조금 위로 들었다 다시 내려놓으며 왕복했다. 몸이 달달 떨리고 굽혀진 손끝이 소파 가죽을 지익 긁어 올렸다. 머릿속이 번쩍거림과 동시에 해인은 결국 절정에 다 다르고 말았다.
“하으윽•••!”
제 입 안에 정액이 쏟아지고 나서야 백담호는 해인의 성기를 입 안에서 빼내었다. 눈물로 젖어 흐려진 시야로 해인은 백담호를 허탈하게 쳐다봤다. 꾹 다물린 백담호의 입은 점성 있는 투명한 액과 유백색을 띠는 액들이 음란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얼굴을 치우라니까, 왜 꼭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해인은 알 수가 없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해인은 테이블 위에 있는 각티슈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해인의 몸이 뒤로 뒤집혔다. 더불어 아슬하게 엉덩이에 걸쳐져 있던 브리프가 조금 더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둔부가 옆으로 벌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해인이 다급하게 외치며 뒤를 돌아보다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백담호가 자신의 정액을 뱉고 있었다. 바로 제 엉덩이 사이에. 유백색의 액체가 붉은 혀를 타고 흘러내렸다. 외설스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에 해인은 불편한 자세로 굳은 채 백담호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읏•••.”
질척한 액이 곧이어 엉덩이 골에 닿아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입 안에 있어서 그런가 미묘하게 따뜻한 액체가 사이로 파고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묘한 감각에 해인이 얼굴을 움찔거렸고 그렇게 제 입 안에 있던 정액을 모두 흘려보낸 백담호는 제 입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넣었다가 빼내었다.
체액과 타액으로 뒤섞여 질척해진 손가락이 벌름거리는 입구에 닿았다. 골을 타고 흘러내린 액을 입구 주위에 펴 바르듯 둥글게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움찔거리는 입구 안으로 액이 스며들었다. 그게 제 정액이라는 사실이 야하고 수치스러워진 해인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갛게 변했을 때 백담호가 나긋하게 말했다.
“바를 게 없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뱉는 담담한 태도에 해인은 황당해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입구를 지나 엉덩이 골 위쪽까지 손가락이 훑었다. 백담호는 미끈거리는 구멍 입구를 간 보듯 살포시 문지르기만 했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해인이 허리를 미약하게 들썩거리며 신음을 삼켜 냈다.
움찔, 입구가 저절로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백담호는 손가락을 곧바로 집어넣었고 느른한 쾌감에 풀려 있던 입구가 예기치 못한 침입에 꽈악 조여들었다.
‟으읏….”
손가락을 쉽사리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강하게 조이기도 잠시 손가락에 힘을 주어 움직이니 금세 내벽은 잘게 경련하며 부드러워졌다. 뜨거운 내벽을 헤집으며 백담호는 한쪽 둔부를 옆으로 잡아당겨 벌렸다. 그러자 가리는 것 없이 손가락을 삼키고 있는 불그스름한 입구가 고스란히 외부로 노출되었다. 정액이 흘러 들어간 구멍 안은 손가락으로 가위질을 할 때마다 언뜻 비추는 백색 빛으로 음란했다.
찌꺽이는 소리와 잘게 흔들리는 해인의 반응에 백담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이제 처음의 뻣뻣하던 것과 달리 몇 번 쑤셔졌다고 빠르게 녹진해지는 모습을 제가 이리 만들었다 생각하니 백담호는 이미 열이 잔뜩 몰린 아래가 아릴 정도로 더욱 딱딱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으…, 흣….”
천장에 달린 조명이 바로 위에 있어서 그런가 유독 살갗은 하얗고 내벽은 붉어 보였다. 백담호는 손가락을 더욱 깊숙하게 넣으며 엉덩이를 잡아 벌린 손으로 반죽하듯 주무르니 해인의 허리가 더 거칠게 들썩였다.
앓는 소리와 함께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걸 백담호는 아예 골반을 잡고 허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들려지는 허리 아래로 바짝 서 있는 해인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액이 소파 가죽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미 해인의 성기와 맞닿아 있던 부분은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둔부만 위로 치켜세운 외설적인 자세에 해인이 젖은 눈으로 고개를 돌려 백담호를 흘겨봤다. 도망가기에는 여전히 허리는 꽉 잡혀 있었고 아래에 박힌 손가락은 갈고리 모양으로 굳혀진 채 내벽을 득득 긁고 있었다.
자신의 은밀한 곳을 빤히 쳐다보는 검은 눈에 욕정이 가득해 해인은 오금이 저려 결국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과거에 의한 거부감이 지금은 오히려 알 수 없는 배덕감이 되어 몸을 더욱 달뜨게 만들었다. 왠지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서 흥분되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래를 집요하게 쑤시던 손가락이 돌연 빠져나갔고 둔부 사이로 손가락보다 훨씬 두꺼운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무엇인지 느낀 해인이 고개를 뒤로 돌렸고 이번에는 눈이 마주쳤다. 열기에 차 조금 거칠게 숨을 내쉬는 백담호가 웃지 않은 채 목소리만 나긋하게 물었다.
“해인아, 넣어도 돼?”
뜨거운 살덩이가 골 사이에 문질러졌다.
“하…. 이따, 이따 다 씻겨 줄게. 응?”
해인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담호가 다시 물어보았다. 물음에는 간절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처음도 아니고 왜 굳이 물어 오는지 해인은 아래에서 문질러지는 살결에 의해 알 수 있었다. 전과 달리 조금 거칠고 훨씬 더 뜨거웠다. 적나라한 맨살끼리 비벼지는 자극에 해인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훑으며 옅은 신음을 뱉었다.
배 아래가 뭉쳐 들고 입구가 벌름거리는 게 여과 없이 느껴졌다. 흥분에 들뜬 두 시선이 얽히기를 몇 초, 해인이 작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TV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백담호는 그 작은 대답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해인의 양 골반을 손으로 꽈악 잡았다.
귀두 끝을 입구에 맞춰 살짝 누르니 구멍이 서서히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크기에 해인의 손은 본능적으로 오그라들었다. 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가죽이 긁혔다. 느긋하게 들어오나 싶던 두꺼운 좆은 어느 순간 강한 힘으로 내벽을 빠르게 가르고 들어왔다.
“흑, 하윽…!”
순식간에 뿌리까지 파고들어 온 것에 몸이 휘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극점을 단번에 짓이기는 선단 탓에 고통과 함께 그보다 더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성감에 호흡이 가빠져 뱉어지는 숨결이 불안정했다. 바르르 떨리는 해인의 몸과 함께 내벽 역시도 경련하며 성기를 강하게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뜨겁고 질척거리는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 백담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 조금 말려 올라간 해인의 윗옷을 더욱 위로 들춰내니 얇은 허리가 바들바들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해인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백담호 역시 숨을 골랐다. 쾌락에 흐트러진 해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엎어 놓으니, 이건 이거대로 다른 음습함을 건드렸다.
맥없이 추욱 수그려진 상반신과 달리 제 좆에 꽂혀 들려 있는 하반신과 허벅지가 바짝 힘이 들어가 달달 떨리는 게 느껴져 아래가 저려 왔다. 허리를 뒤로 빼내니 빈틈없이 닿아 있던 둔부와 제 앞 골반 사이로 흉흉하게 부푼 성기가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후…….”
시야가 조금 흐려져 백담호는 한 손으로 거칠게 제 얼굴을 비볐다. 오늘따라 유독 흥분감이 짙었다. 얼굴이 조금, 많이 뜨거운 것 같았다.
느리게 뒤로 물리던 허리에 빠져나오던 이제 성기는 귀두 끄트머리만 아슬아슬하게 입구에 걸쳐 있었다. 한계까지 벌어져 있는 붉어진 입구 주위의 살을 보다 강하게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흐윽, 아, 으응, 잠…. 하윽…!”
퍽, 퍽. 격렬하게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TV소리를 뚫고 공간에 울렸다. 완전히 벌어지는 내벽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난폭하게 들어갔다 나가는 좆 때문에 해인은 끝맺지 못한 어눌한 말들을 겨우 뱉을 수밖에 없었다.
윤활액이 전에 비해 적어서인 탓일까, 아니면 얇은 콘돔 없이 바로 닿은 살갗 때문일까. 아래에서 화끈거리는 감각이 전보다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추삽질뿐만 아니라 허리를 잡은 손이 성기가 빠져나갈 때는 앞으로 밀었다가 다시 내벽을 가르고 박힐 때는 뒤로 끌어당겼다. 그 탓에 더욱 깊숙하게 들어오는 것에 해인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자비하게 쑤시는 것 같은데도 선단은 꼭 극점을 짓누르고 그 안까지 파고들어 갔다.
“아으, 하윽…. 아, 나…!”
머리를 강타하는 짙은 쾌락들이 쌓여 절정에 도달했다. 몸과 함께 흔들리던 해인의 성기에서 허연 액이 터져 나왔고 배가 움푹 파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수축하는 내벽에 백담호의 움직임은 격렬해졌고 어두운 소파 위에 유백색 액이 흩뿌려졌다. 이미 벌써 두 번의 사정으로 해인의 몸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버렸다.
계속 부푼 극점을 쳐올리는 선단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해인이 헐떡이며 소파 팔걸이로 손을 주욱 뻗었다. 위기감에 의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쉬지 않고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입구를 스치는 두꺼운 것에 아래가 타 버릴 것 같았다. 쓰라린 것 같기도 했고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망가질 것만 같은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해인이 버둥거리며 겨우 팔걸이를 붙잡고 도망치려 하자 등 뒤로 따뜻한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팔걸이를 붙잡은 해인의 손목이 붙잡혔다.
‟하아…. 해인아. 읏…. 힘들어?”
‟아, 흐…. 응, 으응, 힘들어…. 응…….”
물기에 완전히 젖어 버린 낯으로 해인은 애처롭게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잔뜩 빨개진 양 눈가와 코끝에서 백담호는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난폭하게 안을 헤집던 허리 짓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제야 해인은 몸에 완전히 힘을 풀며 밭은 숨을 몰아쉬었고 백담호는 나른하게 웃었다.
미안, 자제가 좀 안 되네. 중얼거리듯 말한 백담호는 해인의 눈물 맺힌 눈꼬리에 몸을 수그려 입술로 문질렀다. 백담호가 가까이 오자 해인의 코끝으로 단내가 후욱 파고들어 와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래를 조였다. 그 탓에 백담호는 나직하게 신음을 삼켰다.
어쩐지, 오늘따라 백담호에게서 풍기는 향이 유독 짙은 기분이었다. 허리 짓은 느려졌지만, 몸이 더욱 겹쳐지는 바람에 한층 더 성기가 깊게 파고들고 말았다. 완전히 해인의 몸을 깔아뭉개듯이 올라탄 백담호는 허리를 잘게 움직였다.
‟응, 흐윽…. 그….”
칭얼거리는 해인의 뺨을 빨아들이고 턱, 목, 어깨, 등, 점점 아래로 붉은 자국을 만들어 내려갔다. 해인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떼어 내어 옆구리를 간지럽히듯 매만지다 아래로 손을 뻗었다. 정액뿐만 아니라 다른 액들로도 푹 절여져 있는 해인의 성기를 백담호가 움켜잡았다.
손으로 기둥을 살살 문지르니 내벽이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몰려오는 사정감에 백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허리를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해인의 것을 놓지 않고 같이 만졌고 힘겹게 흐느끼던 소리가 점차 달아올랐다.
“아, 흐…. 응……. 좋…. 으응…!”
힘없이 처져 있던 해인의 것도 빠르게 발기하기 시작했고 백담호의 허리 짓도 더욱 급박해졌다. 빠르게 내벽을 쳐올리던 것이 돌연 끝에만 걸치도록 빠져나갔다가 순식간에 깊숙하게 파고들어 갔다. 곧이어 안에서 뜨거운 것이 내뱉어지는 게 느껴졌다. 기이한 감각에 해인은 허리를 굽히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울컥울컥 뱉어지는 액체의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들어가면 안 될 게 들이부어지는 기분에 해인이 눈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정이 끝나고 눈가가 조금 붉어진 백담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레 허리를 뒤로 물리니 빠져나오는 성기와 함께 입구에서 하얀 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성기가 빠지자마자 아슬하게 치켜 올라가 있던 해인의 엉덩이가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아직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은 구멍이 움찔거릴 때마다 정액이 회음으로 흘러내려 소파 위를 적셨다.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해인은 색색 위태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백담호는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 해인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다 슬그머니 엉덩이를 가볍게 주무르며 허리로 한 손으로 허리를 감쌌다. 그러곤 그대로 다시 해인의 몸을 뒤집었고 해인은 맥없이 뒤집혔다. 해인은 멍하니 하얗고 높은 천장을 바라보다 가슴 위까지 말려 올라간 윗옷을 아래로 슬슬 끌어 내렸다.
“죽겠다.”
조금 쉰 목소리로 해인이 중얼거렸다. 가시지 않은 쾌감에 심장은 여전히 가슴을 때릴 정도로 쿵쿵 울렸다. 가쁜 숨소리만 작게 들리던 중 슬금슬금 무언가가 허벅지를 벌리고 안쪽 살을 주물렀다. 다시 오므릴 기력이 없는 해인이 대신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벗은 건지 상반신이 나체가 된 백담호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뭐 해?”
백담호는 대답 대신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불안감이 문득 들어 해인은 몸을 조금 일으키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 흔들리는 눈으로 백담호를 쳐다보던 해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제 불안감이 적중했다는 걸 깨닫고는 표정을 굳혔다.
“야, 잠시…. 미친, 담호야…!”
다급하게 해인이 외치며 손사래를 쳤지만 때는 늦었다. 은은하게 미소를 지은 백담호는 해인의 발목을 잡고 주욱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힘겹게 일으킨 몸이 다시 눕혀지자, 해인이 버둥거렸다. 백담호는 도망치려는 해인의 양 허벅지를 위로 들어 올렸다.
들린 허리와 함께 엉덩이 골 사이로 부푼 성기 끝이 문질러졌다.
“해인아.”
한 번만.
* * *
‟으…….”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해인이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방금 씻어서 몸은 노곤한데 아래가 얼얼했고 허리도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뭐가 그리 흥분되었던 건지 백담호는 평소보다 더 집요했다. 무심코 창밖을 쳐다보니 해가 저물어 하늘은 완전히 까맸다. 벌써 저녁이네.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해인은 옆에서 북북 가죽이 닦이는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백담호가 물티슈로 열심히 소파 위를 닦아 내고 있었다.
“이따 하자니까….”
“다했어.”
온갖 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던 소파 위는 이제 거의 깨끗해져 있었다. 이따 같이 치우자는 말에도 백담호는 기어코 혼자 닦았다. 사실 좀 귀찮았는데 해인은 내심 잘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원래 저 위에 뭐가 묻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깔끔해진 소파 위를 보던 백담호는 고개를 들어 해인을 쳐다봤다. 마치 어떠냐고 묻는 것 같은 시선에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백담호는 바닥에 놓인 휴지와 물티슈 뭉치를 주섬주섬 모았고 해인은 그걸 빤히 쳐다봤다. 책상다리를 한 채 휴지와 물티슈를 집어 드는 백담호의 모습이 조금 이질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어 해인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입고 있는 옷도 제 옷 중 가장 큰 옷이었는데도 몸에 지나치게 딱 맞아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담호 모르게 웃던 해인은 백담호의 머리 위를 흘겼다.
[설정 조정 중27%]
[호감도76]
호감도가 그새 ‘80’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담호의 호감도는 평소에도 잘 오르는 편이었지만 관계를 하고 나면 훨씬 더 빠르게 올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호감도‘10’을 넘어섰던 그날, 아마 하룻밤에 한 20이 넘게 올랐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갈수록 미미해지는 편이긴 했지만, 그때보단 호감도가 훨씬 높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가면 호감도100을 찍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기도 해 해인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호감도100을 찍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공략 성공이니까 게임을 종료할 수도 있으려나? 공략 실패는 해 봤어도 공략 성공은 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전에 현질하고 백담호 호감도별 보상을 봤을 때 ‘100’에 뭐가 있었더라. 그땐 ‘100’까지 갈 거라곤 생각도 안 해서 제대로 안 본 것 같긴 하다.
까만 봉지에 쓰레기를 다 담은 백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해인은 그에 따라 시선을 들어 올려 호감도 표시를 빤히 보다 결국 시스템창을 열었다. 전보다 깔끔해지고 정돈된 메인창 덕에 해인은 곧바로 보상 탭을 찾을 수 있었다.
[백담호 호감도 달성 보상]
…
50 : <숨겨져 있던 세부적 수치 오픈>
60 : <예언자의 편지1장>
예언자의 편지? 처음 보는 보상에 해인은 이런 아이템을 자신이 받았나 떠올리다 ‘호감도60’을 언제 달성했는지 깨달았다. 백담호와 사귀기로 한 그 날, ‘호감도60’을 달성했다. 흥분감에 정신이 없어 그대로 다 닫아 버렸기에 보지 못했나 보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해 해인은 홧홧해진 것 같은 귀 끝을 괜스레 문지르며 다시 시스템창으로 신경을 돌렸다.
70: <순간 이동 티켓1장>, <두근두근 상대의 마음 엿보기 아이템2개>
80: <공략 인물 슬롯1칸 늘리기 아이템1개> , <공략 인물1명 삭제 아이템1개>
90: <회귀 타이머(s) 1개>, <예언자의 편지3장>
100: <랜덤(플레이어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가 주어집니다)>
랜덤? 플레이어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가 주어집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 해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필요한 한 가지는, 어떻게 생각해도 이 게임을 종료하고 영영 안 나타나게 해 주는 것뿐이었다. 아까 게임을 지우고 싶다고 했을 때, ‘대답 거부!’를 외치며 사라지던 시스템이 떠올랐다.
저 상황에서 대답 거부를 한 건, 지울 방법이 있는데 안 알려 주는 거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혹시 그 방법이 백담호 호감도100 달성일까?
하지만 보통 보상은 아이템 형태였다. 게임의 일부에 포함된 아이템이 게임을 지우는 효과를 낼 수 있긴 한 걸까. 굳이 ‘랜덤’이라고 적어 놓은 걸 보면 문의해 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문의하라고 만들어 놓고 대답해 주고 싶은 것만 대답하는 불친절함, 이미 멋대로인 게임 방식에 질린 해인은 겨우 이런 거에 짜증도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일들 투성이라 그런지, 이제 웬만큼 넘길 수 있는 건 납득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호감도100 달성 보상을 시작으로 다시금 마인드맵처럼 뻗어 나가는 생각에 해인은 날 잡고 문의 시스템을 또 이용하기로 다짐했다.
“재밌어? 빨려 들어가겠어.”
“응?”
뜬금없는 물음에 시스템 창을 노려보던 해인이 몸을 움찔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쓰레기를 전부 다 치운 백담호가 소파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뭐가 재밌냐는 건가 싶어 해인이 눈을 굴리다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담호는 시선을 TV쪽으로 돌렸다. 그제야 해인은 물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런 것도 좋아하나 봐? 귀엽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백담호가 해인의 정수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웃음기 서린 말에 해인은 작게 탄식하고 말았다. 왜 채널이 대체 어린이 채널로 넘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TV에는 영유아들이 볼 만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었다. 뒤를 힐끔 돌아보니 백담호도 가만히 TV를 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채널을 돌리려는 순간 백담호가 말했다.
“안 돌려도 돼. 꽤 재밌네.”
“아…. 응.”
해인은 결국 다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재미없다고 할 수도 없었고 제 취향에 어울려 주려는 백담호의 배려에 해인은 양심에 찔려 깜찍한 곰돌이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끝날 때까지 봐야 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생각보다 재밌긴 했다.
* * *
냉동고에 있던 냉동 피자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나니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다 해인은 백담호에게 물었다.
“집엔 안 가게?”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응.”
해가 다 저물어 갈 때쯤 씻고 나와서 옷을 달라고 할 때부터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해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준도 없는데 굳이 백담호를 내보낼 이유는 없었다. 해인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는 백담호와 눈을 맞췄다. 살짝 감긴 눈이 피곤해 보였다.
“졸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백담호는 나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금, 피곤하네.”
“그럼 자자.”
“응.”
해인이 몸을 일으켰고 백담호는 여전히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고 해 놓고 왜 가만히 있나 싶어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담호는 어깨에 추욱 힘을 빼고는 말했다.
“움직이기 귀찮다.”
이렇게 뭉그적거리는 백담호는 또 처음이라 해인은 황당해하며 웃다가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얼른 올라가서 양치하고 자자.”
해인이 달래듯 백담호의 허리를 토닥이니 백담호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척비척, 누가 봐도 피곤해 보이는 걸음걸이에 해인은 걱정스럽게 쳐다보다 이내 몸을 섞었던 일들이 떠올라 납득했다.
피곤할 만도 했다. 자신도 아마 오래 자지 않았으면 이미 진작 기절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백담호가 이렇게까지 잠을 이겨 내지 못하는 건 처음 봐 내심 신기하기도 했다.
2층에서 양치까지 어찌 저찌 끝내자마자 둘은 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졸린 와중에도 백담호는 해인과 눈을 맞추며 뺨을 쓰다듬다가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 해인아.”
“엉, 너도.”
불이 꺼지기 무섭게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고 해인은 눈을 똘망똘망 뜬 채 허공을 봤다. 피곤하긴 한데 아까 많이 자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몸을 뒤척이던 해인의 정강이에 무언가가 걸렸다. 이불 속으로 손을 뻗어 집어 드니 자신의 휴대폰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어나서 휴대폰을 한 번도 안 봤구나. 아까 백담호가 휴대폰을 가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알림이 엄청 많이 떠 있었다.
해인은 잘 보이지는 않지만, 괜히 백담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화면을 켰다.
응?
-2021년10월25일 월요일-
[백담호: 해인아, 폰이 꺼져 있네.] 오후5:23
[백담호: 왜 이렇게 오래 꺼져 있어. 켜면 바로 전화해.] 오후6:13
[백담호: 무슨 일 있어?] 오후11:01
[백담호: 너.] 오후11:12
[백담호: 아니야.] 오후11:19
[백담호: 걱정되니까, 보면 연락해. 해인아. 꼭.] 오후11:20
-2021년10월26일 화요일-
[백담호: 어디야.] 오전10:01
-2021년10월25일 월요일-
[서해빛: 선배, 뭐 해요? 바쁘세요?] 오후4:31
[서해빛: 뭐야, 폰 끄셨네요. 바로.] 오후4:33
-2021년10월26일 화요일-
[강서준: 저는 잠시 다른 볼일 보고 오겠습니다. 필요하면 바로 연락 주세요.] 오전10:14
백담호와 서해빛, 그리고 강서준에게 온 메시지는 단 9통, 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운 메시지의 출처는.
-2021년10월2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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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0월26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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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이 꺼져 있던 사이 온 부재중에 대한 메시지 알림이었다. 대부분은 백담호의 번호였고 사이사이 가끔 서해빛 번호가 껴 있었다. 부재중이 좀 찍혀 있을 것 같긴 했다. 집에 백담호가 불쑥 찾아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해인은 경악에 찬 눈으로 메시지창을 계속 쳐다봤다. 왜 백담호가 휴대폰을 못 보게 했는지 해인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었다. 이렇게 연락이 안 되면 화를 낼 법도 한데,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말도 없이 휴대폰을 꺼 둔 자신의 책임도 있고 중간에 켜 놓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내심 충격적인 부재중 횟수에 해인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러다 뒤척이는 소리에 휴대폰 화면을 다급하게 껐다. 옆을 힐끔 봤지만 뭐가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가 아직 그가 자고 있다는 걸 알려 줬다.
저 무수한 전화 시도는 정말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담호의 문자에서 느껴지는 건, 단순히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불안이었다. 아마도 이대로 자신과 연락이 계속 두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지난번처럼 방해인이 거리를 둘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겠지. 서로를 좋아하긴 하지만, 신뢰감은 얕았다.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백담호를 싫어하고 티를 냈는지 이젠 기억하기에, 지금의 관계는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일반적인 관계라면 서서히 감정이 변화하면서 감정이 진전해 나가야 하는데 백담호와 자신은 중간 과정이 뭉텅 잘려 버리고 빠르게 진행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해인도 자신이 백담호에게 숨기는 게 많으니 더더욱 서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기는 어려울지도 몰랐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줘. 네가 말하고 싶을 때, 응? 해인아.’
귓가로 어딘가 간절한 기색을 띠는 백담호의 말이 웅웅 맴돌았다. 백담호가 좋아질수록 그에게 숨겨야 하는 게 있다는 것이 괴로워진다. 이 모든 사실을 말해서 백담호가 가진 불안이 해결된다면, 기꺼이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믿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고 결국에는 또 다른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다.
아직도 뭐 하나만 살짝 어긋나면 바로 금이 가는 믿음인데, ‘내가 갑자기 너에게 다가갔던 이유는 사실 호감도를 올리고 소원권을 얻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내가 그때 널 피했던 이유도 소원권을 얻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은 널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일까?
아마 백담호는 믿을 것이다. 아니, 믿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만약 백담호가 제게 이런 말을 한다면 자신도 믿으려고 할 것이니까.
하지만 결국 실망할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백담호를 이용한 것이니까. 그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사실에 걷잡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끝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할 것이다. 지금은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한들, 오늘처럼 연락이 안 된다거나 의심할 여지가 있다면 불쑥 그 일을 떠올릴 것이다.
만약, 아직도 방해인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고 이제 얻을 거 다 얻으면 버릴 생각이라고 의심하겠지. 이건 아마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감정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기에 불안감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불안해하고 있는 녀석에게 다른 불안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얕은 믿음으로 지낼 생각은 아니었다. 백담호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으니 조금 더 조심하고 더 자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 주며 그렇게 지내다 보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백담호가 자신을 믿지 않을까.
머리가 복잡해 해인은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휴대폰을 켰다. 무수한 부재중 알림 메시지를 다시 보니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아직도 내가 갑자기 도망갈 것 같은가, 그래도 나름 백담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말하고 표현한 것 같은데 하나도 백담호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함이 조금 들었다. 애초에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 할 말은 없지만.
긴 숨을 푹 내쉰 해인은 씁쓸함을 뒤로하고 부재중 메시지를 전부 지웠다. 백담호도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해인 역시도 보고 있자니 생각만 많아졌기 때문이다. 흔적도 없이 부재중 알림 메시지가 사라지고 나서야 해인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 *
잠결에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해인이 눈을 천천히 뜨고 옆을 돌아보니 흐린 시야로 백담호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게 보였다.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정신에 해인은 멍한 시선으로 백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니 인기척에 백담호가 뒤를 돌아봤다.
“아, 깼어? 미안.”
“아냐 아냐. 가게?”
해인이 잠긴 목소리로 물으며 휴대폰을 켜 시간을 봤다. 그 순간 백담호의 표정이 아주 잠깐 경직되었지만, 해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야, 아직 8시도 안 됐네. 너 10시 수업 아냐?”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해인이 휴대폰을 보던 시야를 들어 올리니 어느새 백담호가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스스한 해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정리했다.
“응, 근데 집에 들렀다가 가려고.”
“아.”
그렇군. 납득한 해인은 머리를 쓰다듬던 백담호의 손을 잡고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자 백담호가 살짝 제지했다.
“더 자. 졸리잖아.”
“아냐, 잠 깼어. 가자.”
“괜찮은데.”
괜찮다고 돌아오는 대답과 달리 해인을 저지하던 손은 빠르게 사라졌다. 피식 웃음을 흘린 해인은 백담호와 함께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는 순간 해인은 발걸음을 멈칫거렸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서준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
서준의 작은 탄성을 뒤로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안녕하세요.”
예상 외로 정적을 깬 건 백담호였다. 백담호가 가볍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까딱이니 서준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백담호의 뒤에서 그걸 보던 해인 역시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서로 제대로 된 말은 안 해도 묘하게 턱턱 막히는 분위기에 해인은 괜히 서준에게 말을 건넸다.
“아, 어. 일찍 오셨네요.”
“네, 뭐…. 가시나 봐요?”
서준은 해인의 옆에 있는 백담호를 힐긋 쳐다봤다. 백담호는 대답 대신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는 해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서준을 지나쳐 갔다. 덩달아 몸이 당겨진 해인은 어정쩡한 자세로 끌려갔다.
현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백담호는 어깨에 두른 팔을 떼어 냈다 백담호가 신발을 거의 다 신어 갈 때즈음 해인은 구석에 놓인 슬리퍼를 신으려 걸음을 내디뎠지만 막히고 말았다.
“됐어. 밖에 추워.”
“금방인데, 뭐.”
이번에는 진심인지 어깨를 잡은 백담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 해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바라보는 눈빛에서도 나오지 말라는 의미가 분명히 느껴져 해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담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토닥이더니 목덜미까지 손으로 훑고는 해인의 얼굴을 살포시 감쌌다.
“갈게.”
“으응.”
귀 뒤로 넘어간 백담호의 손가락이 살갗을 간지럽히듯 문질렀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해인의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흐트러졌다. 다정한 눈빛으로 해인을 보던 백담호는 해인의 오른쪽 눈꺼풀 위에 짧게 입술을 붙였다 떨어트렸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해인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백담호는 귀엽다는 듯이 해인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따 전화할게.”
귀 뒤를 간지럽히던 손이 아쉬움을 남긴 채 떨어졌고 이내 백담호는 살짝 몸을 돌리며 해인의 뒤로 시선을 흘렸다. 그 짧은 시간에 강서준과 마주친 까만 시선은 해인을 담을 때와는 사뭇 다른 빛을 띠었다. 서준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지만, 백담호는 이미 완전히 몸을 돌려 버렸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집 안으로 빨려 들어와 해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일 봐.”
“엉, 내일 봐.”
한쪽 팔뚝을 문지르며 해인이 손을 흔들었다. 백담호도 문을 닫으며 손을 흔들었다. 쿵, 문이 닫혔고 해인은 닫힌 현관문을 계속 쳐다봤다. 어쩐지 뒤를 보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로 서준과 마주칠지는 몰랐다. 필요하면 연락 주라는 메시지를 봐서 그런가 당연하게 서준이 오늘 아침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잘못한 건 없었지만 괜히 민망했다. 기억을 잃기 전, 집에서 백담호 욕을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 강서준은 그걸 가장 많이 보고 들은 인물이었다.
대체 내가 그동안 어떻게 보였을까, 해인은 이제 단순히 백담호와의 사이를 서준에게 들킨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민망함이 몰려왔다. 목덜미가 화끈거려 해인은 괜히 손으로 문지르며 진정시켰다.
이상했다. 기억이 돌아온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해인 씨.”
“네, 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해인이 뒤를 돌아봤다. 언제 가까이 온 건지 서준은 해인의 바로 뒤에 서 있었고 손에는 담요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도 전에 백담호가 나중에 돌려주라며 준 담요였다. 갑자기 이걸 왜 들고 온 건가, 해인이 눈을 조금 빠르게 깜박였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제 하도 안 일어나셔서 놀랐어요.”
“아….”
서준은 담요를 해인의 어깨에 둘러 줬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말투였다.
“어제 조금 피곤했나 봐요. 지금은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식사는 30분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요.”
“아, 네네. 괜찮아요.”
“감사해요.”
부드럽게 웃어 보인 서준은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담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서준에 해인은 내심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조금 의아했다. 예전부터 담호와 함께 있는 것을 경계했던 서준인지라. 그래도 뭐라도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서준이 둘러 준 백담호의 담요를 손으로 꽉 쥔 해인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서준을 잠시 응시하다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호감도29]
아까는 당황해서 신경 쓰지 못했던 호감도가 눈에 보였다. 언제 떨어진 거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굳이 깊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과거에 백담호를 그렇게 욕해 놓고 이러는 모습에 실망한 것일지도 몰랐다. 설령 그런다 한들, 해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인은 서준의 호감도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 * *
오후4시13분, 해인은 인상을 팍 찡그리고 교재와 이것저것 난잡하게 적힌 노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방해인, 이 미친 새끼.”
원망 서린 어투로 해인은 자신을 욕하며 펜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기억이 돌아온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3학년 성적을 다 말아먹었다. 1학기는… 말할 것도 없고2학기는 그나마 중간에 기억 일부가 돌아와 어떻게 풀기는 했다만, 백담호가 도와…줘서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강의를 하나도 듣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과제로 주어진 문제는 총 10문제. 9문제는 교재와 인터넷에서 구한 솔루션을 보고 완벽하게 풀었지만 남은 한 문제가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음 제어 시스템이 왜 불안정한지 규명하는 문제인데 중간에 나온 임계 주파수 값이 왜 저런지 모르겠다. 솔루션을 봐도 대체 왜, 왜, 왜! 이게 왜 이 값이 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탁, 탁, 탁. 해인이 펜촉으로 책상 위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정해진 값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뭐지, 내가 진짜 빡대가리가 된 건가?
태블릿 PC에 떠 있는 솔루션을 살벌하게 해인이 노려보던 중 책장 위에서 울리는 큰 벨 소리에 몸을 움찔거렸다. 일부러 책장 높은 곳에 놓아둔 휴대폰을 일어서서 뒤꿈치를 세워 꺼냈다.
[백담호]
예상대로 백담호였다.
“여보세요.”
“응, 해인아. 뭐 하고 있었어.”
아직 밖인지 휴대폰 너머로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과제하고 있었어.”
해인이 잠깐 노트를 흘겨보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로 걸어가 드러누웠다.
“과제? 아, 공정 제어?”
“어어, 너 다했어?”
“응, 주말에 다했지.”
“…그래? 금방 해?”
낮게 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은 왜인지 들려올 백담호의 대답이 조금 긴장되었다.
“금방은 아니고 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렸던 거 같은데.”
“한 시간 조금 넘게…?”
“응, 그 정도 걸린 것 같아.”
한 시간 조금 넘게…. 해인은 벌써 두 시간째 붙들고 있었다. 아니다, 자신도 강의만 제대로 들었고 계속 공부했으면 한 시간도 안 넘기고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막히는 문제 1개 빼면 실상 해인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인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합리화하며 애써 진정시켰다. 해인이 조용해지자 백담호가 물었다.
“왜, 어려운 거 있어?”
“아-.”
니. 해인은 말을 끝까지 뱉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아니, 내가?’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대로 자존심을 내세우면 오늘이 지나도록 저 문제만 붙들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백담호한테 물어보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전혀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는 걸 해인도 이제 알았지만 오랜 시간을 이렇게 살아와서 하루 만에 변하기는 힘들었다. 기억을 잃었으면 몰라도…. 그래, 이건 차라리 기억 잃었던 때가 더 나았던 거 같다.
“해인아?”
“아…. 응. 하나 막히는 게 있긴 해.”
속에서부터 치미는 약간의 치욕스러움을 억누르며 해인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노력했다. 최대한 기억이 없던 그때처럼.
“어떤 거?”
다행히 평소와 같았는지 백담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 13단원 연습 문제 31번 문제.”
“31번? 31번이 뭐였지.”
“잠시만, 찍어서 보내 줄게.”
해인은 스피커 폰으로 바꾸고 누웠던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태블릿 PC에 띄어진 솔루션 위에 막혔던 부분을 밑줄을 긋고 물음표를 적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백담호에게 보냈다.
“보냈어.”
“응, 볼게.”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작게 “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원래는 값을 직접 구해야 하긴 하는데 전에 교수가 방법 너무 복잡하다고 그냥 0.23 넣어서 풀라고 했어.”
“아.”
“나도 이거 구해 보려고 했는데, 솔루션하고 계속 다르게 나오더라고. 그래서 그냥 0.23 넣어서 했어.”
조금 웃음기 머금은 백담호의 말투와 다르게 해인의 표정은 완전히 힘이 풀려 있었다. 대체 저 문제에 시간을 얼마나 낭비한 거지…. 이 모든 일이 수업을 듣지 않았던 자신 탓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허탈함에 해인은 물음표를 지워 버리고 0.23이라고 썼다.
“그래…. 고마워.”
“다른 건 없어?”
“없어.”
휴대폰을 집어 든 해인은 터덜터덜 침대에 쓰러지듯 다시 드러누웠다. 그렇게 제 이야기에서 넘어가고 해인은 머리맡에 휴대폰을 둔 채 천장을 보며 담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휴대폰을 들어 올려 확인해 보니 다름 아닌 교양, 주거와 문화 팀플 단체 채팅방이었다.
[강하연 : 다들 시험은 다 끝나셨나요??ㅠㅠ] 오후 4:48
[강하연 : 이번 주 금요일에 저희 발표하잖아요] 오후 4:49
[강하연 : 이거 발표 점수 꽤 큰 거 다들 아시죠??ㅠㅠㅠㅠ 교수님도 좀 빡빡하시고 그래서…] 오후 4:49
“아, 맞네.”
채팅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상단에 떠오르는 메시지만 읽던 해인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그때 만들었던 조별 과제 피피티 발표가 중간고사 이후였지. 짧은 시간 사이에 이런저런 사건들이 벌어져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인데 벌써 한 몇 달은 지난 것만 같았다.
[뭐가?]
“우리 그 주문 발표, 이번 주 금요일이었지.”
[응, 그건 갑자기 왜?]
“아, 지금 연락 왔어.”
[뭐라고?]
“어….”
어느새 상단에 떠오르는 알림이 빨라져 읽기가 힘들었다. 결국 해인은 단체 채팅방을 터치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부터 읽어보니 발표 전에 한번 다 같이 만나서 맞춰 보자는 이야기였다.
“우리 만나서 발표 연습해 보자는데.”
[그래? 언제?]
“아직 정하고 있어. 오늘 저녁 후나 목요일 저녁 전 둘 중에 하나.”
[오늘?]
“엉, 근데 내일로 될 듯. 황정운 오늘 안 된대.”
해인은 말하면서 ‘저도 목요일 괜찮아요.’라고 보냈다. 곧바로 화색하는 강하연의 답이 오고 이제 안 본 사람은 백담호밖에 남지 않았다. 하필 발표자가 백담호인 터라 강하연은 조금 걱정스러운 듯 백담호를 언급했지만, 여전히 채팅 옆의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전화 너머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백담호가 아직 밖이라는 걸 알려 줬다.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백담호에게 물었다.
“담호야, 너는? 너도 목요일 5시 반쯤 시간 괜찮아?”
[아, 응. 괜찮아. 왜, 빨리 답해야 해?]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럼 너 대신 내가 보낼게.”
[응, 고마워. 해인아.]
“별거 아닌데 뭘….”
채팅을 치는 해인의 말끝이 점차 흐려졌다. 타자 치는 데 집중한 듯 보였다.
[강하연 : @백담호 씨ㅠㅠㅠ 보면 답해 주세요!] 오후 4:52 -1
[강하연 :혹시 내일 시간 안 되면 오늘 저라도 같이 맞춰 보게요..!!ㅠㅠ] 오후 4:54 -2
[방해인 : 백담호도 목요일 5시 반에 시간 괜찮대요.] 오후 4:55 -3
[강하연 : 아앗, 다행이네요ㅠㅠ 그럼 제가 학교 근처에 진짜 조용한 카페 발견했거든요] 오후 4:56 –3
[강하연 : 조금 걸어가긴 해야 하는데 여기 진짜 사람 없어서 발표 연습하는데 괜찮을 것 같아서요…!] 오후 4:57 –4
“보냈다. 내일 5시 반에 다 같이 만••••••.”
[응?]
강하연의 답을 보고 나가려던 해인은 그만 멈칫거리고 말았다. 곧바로 강하연이 지도 맵과 함께 주소를 보냈는데 어쩐지 그 주소가 눈에 익어 보였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해빛이 알바 하는 카페였다.
왜, 여길…? 해인은 혼란에 빠졌다.
[해인아?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어…. 우리 만나기로 한 장소가 정해졌는데, 거기야….”
[어디?]
“서해빛이 알바 하는 카페….”
이번엔 백담호가 말이 없어졌다. 해인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올라오는 채팅들을 읽었다. 이미 싫다고 하기에는 이미 다른 조원들이 전부 자신과 백담호 빼고 다 좋다고 하고 있다. 심지어 황정운은 서해빛이랑 친분이 있었던 건지, 자신이 아는 후배가 알바 하는 곳이라며 조잘조잘 떠들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단순히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서해빛과 마주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바꾸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하필 여기지?
[그렇구나.]
드디어 백담호가 입을 열었다. 기분이 나쁜 건지, 어떤 건지 가늠이 안 가는 무심한 대답이었다. 생각보다 큰 반응이 없어 해인은 의아했다. 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해인아.]
“응?”
[내일 5시 30분에 만난다고?]
“아, 으응.”
[그럼 끝나고 밥 먹어야겠네.]
갑자기 나오는 밥 얘기에 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대답했다. 백담호는 그 뒤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하필 서해빛의 카페에서 만나는 게 마치 별일 아니라는 백담호의 태도에 해인의 불안했던 마음도 잦아들었다.
보통 대학가 근처 카페에 사람들이 항상 많은 것에 비해 그 카페는 정말 조용한 편에 속했다. 강하연이 조별 과제를 위해 찾은 카페라고 하니 그곳이 적격이었을 것이다.
카페가 꽁꽁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조원들도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해인은 떠오르는 의문을 지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했다.
* * *
“집 가고 싶다.”
캠퍼스에 들어선 해인이 뱉은 첫 말이었다. 벌써 패딩을 입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추운 날씨에 해인은 몸을 한껏 오그리고 코트 단추를 단단히 잠갔다.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만 갔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탓에 목 폴라 니트에 하관이 묻혀 마스크라도 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해인은 바닥만 보고 걸으면서도 사람들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서 걸었다.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니 건물 입구가 저 멀리 보였다. 강의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널널한 편이라 그런지 입구는 꽤나 한산했다. 왔다 갔다 거리는 몇몇 사람들을 아무 생각 없이 보던 해인이 걸음을 멈췄다.
“어.”
서해빛이었다. 건물에서 나오는 중이라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대로 멈춰 선 해인은 서해빛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기억 돌아오고 처음 보는 거였다. 실제로는 며칠 전에 본 얼굴인데 이상하게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았다. 감회가 남다르다고 해야 하나.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그와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해인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 했던 짓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래도 전에 처음, 그래….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니 한구석 어디 깊숙하게 남은 미련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이 마구잡이로 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감도 71]
호감도 표시 위에 작게 쓰여진 것은 거리가 있는 터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설정 조정 중’인 걸 이미 알고 있어 굳이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떨어져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71이라고 적힌 호감도를 보니 기분이 더욱 이상했다.
왜 이제야 저렇게 오른 채로 등록이 된 건지, 해인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떨어졌으면 몰라도.
다행히 서해빛은 해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그대로 건물을 나와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서서히 작아지는 서해빛의 인영을 해인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순간 해인의 코트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꺼내 들어 확인하니 백담호에게서 강의실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해인은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휴대폰을 쥔 손이 살짝 힘이 들어갔다가 빠르게 풀렸다. 다시금 휴대폰을 보다 이내 주머니에 넣고는 빠른 걸음으로 건물 입구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따 카페에서 서해빛을 마주하겠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거고 대화를 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 설령 마주친다 해도…. 피해야겠지.
서해빛과 자신은 엮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해인은 강의실 문을 열었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와중에 해인과 눈이 마주친 사람은 백담호였다. 해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뒷자리로 걸어가 옆에 앉았다.
“뛰어왔어? 볼이 빨개.”
해인의 양 뺨과 코끝이 진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백담호가 제 손등을 해인의 볼에 가져다 대니 해인이 헤실 입을 살짝 벌리고 웃었다.
“따뜻하다.”
백담호는 한참을 말없이 해인을 바라보다 나직하게 “그러게, 얼굴이 차네.”라고 중얼거렸고 그와 동시에 머리 위의 호감도가 ‘77’로 올라갔다. 그리고 설정 조정 중은 의외로 ‘31%’에 머물러 있었다.
* * *
졸리다. 해인은 감기려는 눈을 겨우 부릅뜨며 앞을 쳐다봤다. 강의 시간에 졸다니 원래의 자신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억 잃고 반년을 넘게 강의 때 자고 딴짓을 하다 보니 그새 습관이 되었나 보다. 교수 목소리가 이렇게 잔잔할 일인가….
가방에 들어 있던 생수를 마셔도 영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눈을 가볍게 문지른 해인은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아린 고통과 함께 해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고 덕분에 잠은 조금 깨는 듯했다. 해인은 새빨갛게 변하는 손등을 흘긋 보고는 가볍게 손으로 문질렀다.
별로 좋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지만, 성적이 아직 나오진 않았어도 중간고사는 그냥저냥 본 것 같으니 기말고사는 무조건 잘 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졸음 따위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반년이나 넘게 수업을 안 들었다는 것은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보다 반년이나 뒤처져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니 해인은 조금 짜증이 치밀어 완전히 잠이 가셨다.
해인은 딴생각을 하다가 놓친 강의 내용을 얼른 옮겨 적으며 귀로는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옆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있던 백담호는 열중하는 해인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다 새빨갛게 변한 해인의 손등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 * *
강의 첫 교시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10분 뒤에 시작하겠다는 교수의 말과 함께 해인은 뭐라도 마실까 싶어 강의실을 나섰고 당연하게 백담호도 해인을 따랐다.
“열심히 듣더라.”
“아, 응. 기말••••••.”
해인이 말을 멈췄다. 백담호의 머리 위의 설정 조정 중의 수치가 ‘35%’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31% 아니었나. 생각보다 많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수치에 해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마주치는 까만 시선에 아무렇지 않은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기분 탓인가.
“기말은 잘 봐야지. 중간 말아먹었잖아.”
“그래? 꽤 열심히 하지 않았나.”
백담호의 말에 해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야…. 개망했어. 기말 잘 봐야지 A 받을까 말까야. A+은 물 건너간 거 같고….”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강의실을 나가는 해인을 백담호는 의아하게 바라봤다.
“성적에 이제 크게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뭐? 내가 언••••••.”
황당하다는 듯 말을 뱉은 해인은 이내 빠르게 백담호에게 그동안 보여 준 제 행실을 깨닫고는 말을 멈췄다.
그래, 그랬지. 열심히 놀았지. 정말 열심히. 빠르게 납득한 해인은 자조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미쳤었나 봐. 이젠 정신 차려야지.”
뒷수습해야지. 허탈한 말소리와 함께 해인은 도착한 자판기 앞에서 이온 음료를 가리키며 백담호에게 눈짓했다. 백담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해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 손짓에 나쁜 의미가 없다는 걸, 오히려 위로 같은 차원에서 하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순간 애 취급당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아야 한다. 이건 단지 과거의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덜커덩, 음료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해인이 몸을 푹 숙였고 그대로 백담호의 손도 떨어졌다.
“여기.”
백담호에게 캔 음료를 건네자 백담호는 캔을 받아 드는 척하며 해인의 손등을 감싸 엄지로 문질렀다. 정확히는 붉은 기가 가라앉고 조금 파랗게 자국이 남아 있는 피부 위를.
해인이 그걸 인지한 순간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자신의 이런 행동을 백담호가 봤기 때문일까, 조금 부끄러워졌다. 펜촉으로 손등을 찍은 것보다는 가벼운 자국이었지만 보이면 안 될 것을 보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인의 손이 움찔거리자 백담호는 그제야 음료수와 함께 제 손을 떨어트렸고 해인은 슬쩍 손을 주머니 속에 넣어 가렸다.
“강의 녹음한 거 있으니까 필요하면 말해, 해인아.”
딸각, 음료수 캔이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백담호가 한 모금 마시면서 해인을 흘겨보는 순간,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해인이 무언가 충격적인 말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당황스러운 표정의 백담호가 눈을 깜빡였고 해인은 이제 사뭇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해인의 반응에 백담호는 조심스럽게 다시 해인의 이름을 불렀고 해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녹음…. 녹음을 하면 되는구나…. 그러네. 휴대폰은 녹음도 할 수 있지…?”
대체 왜 녹음할 생각을 하지 못한 건가, 이렇게 간단한 해결 방안이 있었는데. 해인은 제 미련함에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가만히 보고 있던 백담호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응, 녹음도 할 수 있지. 휴대폰은.”
괜히 해인의 말을 한 번 더 따라 하며 백담호는 짓궂게 미간을 일그러트렸다가 폈다. 해인은 그런 백담호의 행동에 살짝 쏘아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휴대폰을 정말 폼으로 들고 다녔네, 그리 생각하며 해인은 이제야 제 몫으로 뽑은 캔 커피 따개를 젖혔다.
따뜻하고 달짝지근한 액체가 곧바로 식도를 타고 넘어가니 몸 안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온기를 느끼며 해인은 작게 나 있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백담호도 해인을 따라 밖을 봤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해인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강의 시작까지 4분 정도 남아 있었다. 강의실이 그리 멀지 않으니 충분한 시간이었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가••••••.”
움직이던 해인의 입이 굳었다. 창을 보던 백담호가 고개를 돌려 해인을 쳐다봤다. 해인은 백담호가 아니라 계단 쪽을 본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별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해맑게 들려왔다.
“선배!”
해빛 역시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그러다 옆에 있는 백담호를 보고는 미묘하게 얼굴이 찡그렸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화사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아, 어어. 그렇지….”
천진하게 꼬리치는 해빛과 달리 해인은 당황스러웠다. 얘가 왜 여깄지, 아까 건물 나간 거 아니었나. 조금 의문스러운 마주침에 해인은 곤란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해빛은 그걸 모르는 척, 둥글게 눈을 휘었다.
“오늘 저희 카페 오신다면서요. 어제 박정훈 선배…. 맞나? 어쨌든 아는 선배한테 들었어요.”
박정훈이 아니라 황정운이지만 그건 지금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인은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치면 바로 피해야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실제가 되니 머리가 굳어 버렸다. 혼란스러움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해인은 해빛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속이 조금 어지럽혀지는 기분이었다.
“그…. 그런데 우리 곧 수업 시작해서, 이만 갈게.”
가자, 백담호. 뻣뻣하게 해빛과 마주치치 않으려 해인은 사선으로 고개를 틀고 그대로 발걸음을 떨어트렸다. 그렇게 해빛을 지나쳐 가는 순간이었다.
“형.”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손목이 잡혔다. 그러나 그 손은 금세 떨어졌다. 강한 힘에 의해 해인의 몸이 당겨졌다. 그대로 넘어질 듯 뒤로 기울던 몸이 딱딱한 것에 기대어졌다.
“뭐 하는 짓거리지.”
해빛을 향해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살벌했다. 해인이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백담호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사나운 기세에 해인이 마른침을 삼키고 앞을 쳐다봤다. 서해빛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는 게 눈에 뻔히 보여 해인은 조심스럽게 제 팔을 잡은 백담호의 손을 살살 쓸었다.
“수업 시작했겠다. 가자, 담호야. 응?”
말하는 해인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날이 서 있던 표정이 한층 누그러진 백담호가 해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해인의 팔을 잡은 채 서해빛을 지나쳐 갔다.
서해빛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런 말이 없어서 다행이었고 한편으로는 아무런 말이 없어서 불안했다. 지금, 서해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해인은 뒤를 힐끔 돌아보려다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백담호는 말없이 조금 빠르게 걸을 뿐이었다. 팔을 꽉 잡은 손아귀의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뜨거웠다.
강의실에 도착하니 이미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둘은 조용하게 자리에 앉았고 앉아서도 말이 없었다.
해인은 백담호의 눈치를 살피면서 휴대폰으로 녹음을 켜 놓고 책상 위에 뒀다. 아무래도 이번 수업은 집중하기 글러 먹었기 때문이다. 힐끔힐끔 백담호의 안색을 보던 시선이 머리 위를 향했다. 그대로 호감도는 그대로였고 설정 조정 중은 ‘35%’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해빛은 얼마였지? 정신이 없던 터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글자 크기가 작은 편이기도 했고.
분명 건물을 나갔던 해빛과 왜 이렇게 좋은 타이밍에 마주친 건지 무언가 조금 꺼림칙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단순히 잠깐 나갔던 거일 수도 있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해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딴 길로 샜던 사고가 마주친 검은 눈동자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백담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지만 날 서 있던 분위기는 거의 풀린 듯했다.
해인을 말없이 빤히 보던 백담호는 불만족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그 탓에 해인이 여전히 눈치를 보며 입 모양으로 ‘화났어?’라고 물었다. 백담호는 이제는 입까지 꾹 다물고는 그대로 해인의 교재 한 구석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 걔 싫어.]
나 걔 싫어.
교재 모퉁이에 작게 적힌 짧은 문구를 해인은 말없이 내려다봤다. 아까 여차하면 주먹이라도 갈길 듯이 매서운 기색을 보였던 것치곤 말이 순했다. 최소 ‘그 새끼 존나 싫어’ 정도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나 걔 싫어, 웅얼거리듯 투정하는 백담호의 목소리를 입혀서 해인은 다시 속으로 읽었다. 그러니 조용하게 웃음이 터졌다. 어느새 책상에 엎드린 백담호는 해인이 웃자 표정이 더욱 부루퉁해지고는 또 교재 구석에다 글을 적었다.
[그 새끼는 왜 함부로 손목을 잡고 그러지….]
다 적은 백담호가 우울해 보이는 눈으로 해인을 바라봤다. 그런 백담호에 해인은 가슴 한구석이 짓눌리는 듯했다. 서해빛의 행동엔 해인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환하게 웃는 서해빛을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까.
해인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다 내리깔렸다. 잠시 아래의 허공을 응시하기 몇 초, 해인이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떨림은 멎어 있었고 백담호는 어느새 또 모퉁이에 끄적…이라기에는 그 범위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고 형이래]
[또 생각하니까 개빡치네]
[뭘 자기를 다시 좋아하래. 해인이는 나 존나 좋아하는데]
[그치 해인아?]
[그 새끼 눈치가 존나 없는 건지 없는 척하는 건지 빡치네.]
[서해빛 앞에서 키스 갈겨도 돼, 해인아?]
[네가 허락만 한다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해인아 차라리 예전처럼 욕 박고 다녀. 나한테도 해도 돼.]
[……아니다, 나한테는 좀 살살해….]
[아니 다시 생각하니까 욕하는 거로는 부족해. 그냥 전신을 꽁꽁 싸매고 다녀, 해인아.]
[왜 요즘은 그 더럽게 큰 모자 안 쓰고 다녀, 얼른 다시 써. 그리고 나랑 있을 때만 벗어.]
[아예 복면은 어때.]
백담호가 쓰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해인은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지듯 웃었다. 한 페이지에 빈 공간이란 공간은 다 채울 것 같은 기세에 해인이 백담호의 손을 잡고 저지했다. 진정해, 해인이 소리 없이 입만 움직였다.
백담호는 겹쳐진 해인의 손을 무시하고는 제가 한 낙서 중 하나를 쿡쿡 펜 끝으로 찍었다. 그 낙서는 다름 아닌 복면은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장난치곤 사뭇 진지해 보이는 눈빛에 해인은 진심이냐는 듯 웃으니 결국 백담호도 싱겁게 한번 웃고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강의를 들을 생각인지 백담호는 한쪽 턱을 괴고 앞을 쳐다봤다. 강의는 이미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해인도 기분이 한층 풀려 보이는 백담호에 안심을 하고 앞을 봤지만, 여백을 채운 글자들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백담호는 지금 서해빛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는 걸까. 쓰여진 글자를 손으로 살짝 문지르니 글자가 약간 흐려졌다. 그러다 해인은 [그 새끼 눈치가 존나 없는 건지 없는 척하는 건지 빡치네.]에서 눈길이 멈췄다. 그래, 맞다. 서해빛은 지금 눈치가 없는 척을 하고 있었다.
‘전 고백한 거 무를 생각도 없고 형이 백담호를 좋아하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어요.’
지난날, 서해빛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백담호와 자신의 사이를 눈치챘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그래도….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대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연락도 무시했고 심지어 백담호가 옆에 있는데 말이다.
백담호 말대로 다시 그 더럽게 큰 모자라도 쓰고 다녀야 하나.
학교는 넓고 서해빛과는 학년이 다르니 또 마주칠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실제로도 전에 그렇게 자주 마주칠 수 있는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해인은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지 기묘한 불안을 느꼈다.
상황이 참, 거지 같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시발점을 되짚어 보던 해인은 갑자기 게임이 나타났던 그때를 떠올렸다. 만약, 만약 기억을 잃기 이전에 이상한 게임 같은 게 나타나지 않았으면 현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백담호와는 이렇게 되지 않을 테고 어쩌면….
그레비티, 해인은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이제는 정체 모를 이 소설 속 내용이 생각났다. 자신이 이 세계의 원작이라고 여겼던 그 소설. 하지만 자신은 소설 속에 빙의한 게 아니었다. 여기는 해인에게 있어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레비티>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억을 잃은 해인이 소설 속이라고 착각하게끔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하지만, 소설의 내용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다. 게임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자신의 상황이 소설 속 내용과 똑같이 흘러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해빛은 백담호를 짝사랑하고, 백담호는 그런 서해빛을 가지고 놀다가 결국, 후회하고 화해하게 된 둘은 영원한 행복을 약속한다. 그 사이 방해인은 완벽한 이물질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영 개 같은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이물질로 쓰이다니.
그저 게임이 만들어 낸 가짜 소설일 뿐일까, 도대체 이 게임은 뭘 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까. 소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신경은 서해빛과 백담호의 머리 위에 있는 ‘설정 조정 중’에 쏠렸다. 문의했을 때 시스템이 말하길, ‘주요 공략 인물들의 설정이 방해인 님이 플레이가 더욱 흥미롭게….’라고 했다.
주요 공략 인물, 생각해 보면 강서준 머리 위에는 호감도 표시만 있을 뿐이었다. 그건 강서준은 주요 공략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주요 공략 인물은 서해빛과 백담호였다.
어떻게 생각해도 강서준과 저 둘의 차이점은 소설 <그레비티>에서의 역할 차이였다. 서해빛과 백담호는 주연, 강서준은 자신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 어쩌다 나오는 엑스트라. 의문만 쌓여 가던 중 앞에서 쿵쿵, 보드 마카로 칠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집중이 흐트러졌다.
“이거 별 백 개짜리. 자는 사람들한테 절대 말해 주지 마세요.”
짓궂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교수는 한번 더 칠판을 두드렸고 자고 있던 학생 몇몇이 눈을 떴다. 점점 딴 길로 흘러가던 생각을 밀어 두고 해인은 그제야 부랴부랴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역시 녹음해 놓고 있길 잘했다.
* * *
기억이 돌아왔다고 신고식이라도 치르는 건가. 학교 우체국 앞 벤치에서 해인은 당혹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좀 자주 마주치네요. 신기하게.”
하필 백담호가 학과 사무실에 볼일 보러 갔다 온다고 사라진 그 틈이었다. 아까 서해빛과 마주칠 확률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예외인가 보다. 해인이 도망을 가야 하나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중 서해빛이 휴대폰을 갑자기 꺼내 들었다. 곧이어 해인의 코트 주머니 안에 들은 휴대폰이 진동했다. 꺼내서 확인하니 서해빛이었다.
눈앞에 있는데 갑자기 전화를 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해인은 의문스럽게 해빛을 올려다봤다. 마주치는 옅은 눈동자는 묘한 빛을 띠고 있었고 해빛의 호감도 표시 위에 ‘설정 조정 중 14%’라고 쓰여 있었다.
백담호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에 해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훅 허리를 숙이는 해빛에 뒤로 물러섰다.
“뭐야, 차단한 건 아니었네요.”
“아….”
그제야 해인은 서해빛의 행동을 이해했지만 할 말은 없었다. 해인이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해인의 옆자리에 앉으며 해빛은 짐짓 우울한 목소리로 ‘한 번 정도는 받아 줄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 해인은 고집스럽게 정면만 쳐다봤고 서해빛은 개의치 않고 해인을 쳐다봤다. 달갑지 않은 정적에 해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할 말 없으면 나 갈게. 그리고….”
해인이 흔들리는 눈으로 해빛을 내려다봤다.
“…이제 별로 아는 척 안 해 줬으면 좋겠어.”
불안정한 시선을 따라 목소리도 떨렸다. 지금 서해빛에게 자신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은 죄책감을 가중시키기라도 하듯 해빛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꽉 쥔 해인은 옅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수그리며 몸을 돌렸다. 떠나려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몸은 뒤로 기우뚱거렸다.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지. 고백 찼다고 이렇게 차가워질 줄 알았으면 역시 더 신중했어야 했나 봐요.”
손목이 잡혔다. 느껴지는 악력이 강해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해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빼내려 했다. 해빛의 손은 미동도 없었고 되레 해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다시 의자에 앉혔다. 막무가내인 서해빛의 행동에 해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멈칫했다. 자신도 서해빛에게 똑같은 행동을 했던 기억이 난 탓이다.
결국 해인은 제대로 거절하지도 못하고 표정을 구긴 채 서해빛을 쳐다봤다. 서해빛은 그런 해인을 조금 원망이 서린 눈으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선배, 진짜 밉다.”
그리고 서해빛의 호감도와 함께 설정 조정 중 수치가 올라갔다. 밉다는 말과 반대로 호감도가 올라갔다. 왜 오른 건지 그 이유를 해인은 추측할 수 없었다. 설정 조정 중은 그저 시간에 따라 오르는 것 같으니 그렇다고 쳐도 호감도는 왜 오른 걸까. 서해빛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어 해인이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연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는 척은 계속할 거예요. 그리고 전화도 받을 때까지 할 거고요, 이제 문자도 답장 올 때까지 할 거야.”
그러니까 전화든 답장이든 하나라도 대답해요. 형. 해인이 대답을 하기 전에 서해빛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원망이 서려 있던 표정은 사라지고 서해빛은 작위적인 미소를 보이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서해빛의 뒷모습과 그의 호감도에서 해인은 시선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더 이상 머리 위의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즈음에야 해인은 제 손목이 시큰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붙잡혔던 손목을 들어 올리니 옷소매가 내려가면서 빨갛게 부어오른 살갗이 보였다.
“나 왔어. 뭐 하고 있었어?”
몸을 움찔거린 해인이 다급히 소매를 끌어 올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백담호가 다가와 있었다.
“아, 그냥 앉아 있었지.”
“그래?”
“응,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오래 걸릴 일은 아니라.”
혹시 백담호가 봤을까 싶어 표정을 살폈지만,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서해빛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 * *
그 뒤로 서해빛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 뭐 하는가, 지금 서해빛이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인걸.
해인은 카페와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뭉그적거렸다. 싸늘한 분위기를 감당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할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하지만 어제는 오늘 이렇게 마주칠지 몰랐기에 카페에서 잠깐 불편하고 말지, 정도라고만 여겼다.
카페에 거의 다와 갔을 때 즈음 해인은 고개를 돌려 백담호를 쳐다봤다. 백담호도 별로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표정은 차분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 탓에 해인은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하는 거.
카페 앞에 도착해서 해인이 문고리를 잡자 유리창 너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쏠렸다. 안에는 백담호와 해인을 뺀 다른 사람들이 다 와 있었고 왜인지 서해빛은 그 세 명과 함께 앉아 해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해인의 손 위를 백담호가 겹쳐 잡았다. 저절로 해인의 시선이 백담호를 향했고 그 순간 딸랑,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백담호의 머리 위의 설정 조정 중이 ‘40%’로 올라갔다.
“아, 안녕하세요!”
가장 바깥쪽에 앉아있던 강하연이 밝게 인사를 건넸고, 황정운은 그 전의 일은 전부 잊은 건지 해인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해인도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하며 걸어갔다.
“해인 형, 또 보네요.”
해빛의 말에 해인은 웅얼거리듯 “어…, 그러게.”라고 대답하며 남은 자리를 살폈다. 그런데 자리가 조금 애매했다. 서해빛이 책상의 좁은 부분에 의자를 가지고 와서 앉아 있었기에 남은 두 자리 전부 서해빛과 가까웠다.
해인은 해빛과 떨어져 앉고 싶은 것도 그랬지만 백담호가 서해빛과 가까이 앉는다고 생각하니 오전에 느꼈던 살벌함이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차라리 자리가 부족하면 서해빛 보고 일어나라고 하면 될 거 같은데, 심지어 자리도 부족하지 않았다.
해인이 멈춰 서 있으니 그걸 빤히 보고 있던 해빛이 테이블 위를 살짝 두드렸다.
“형, 여기 자리 있어요.”
그건 나도 알아…. 그걸 몰라서 이럴까. 해인이 곤란한 눈으로 해빛을 보던 중 백담호가 해인을 앞질러 해빛 쪽으로 걸어갔다.
“비켜. 앉게.”
백담호가 해빛의 옆에 바로 서서 그를 무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서해빛의 웃고 있던 낯이 살짝 굳어졌다. 순간, 작은 카페 안에 묵직한 정적이 흘렀다. 역시나, 좋지 못한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해인은 백담호의 옷깃을 잡고 당기려던 찰나였다.
“아, 네. 이제 다 오셨으니 전 이제 가 봐야겠네요.”
명쾌한 음성과 함께 해빛이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강하연과 황정운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아까 음료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섯 잔 맞으시죠?”라고 물었다. 강하연이 무거워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해빛은 백담호를 지나치면서 해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해인은 곧바로 고개를 획 돌리고 못 본 척 빈자리에 앉았다.
백담호도 서해빛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고 해인은 백담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고 백담호의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호선이 그려졌다. 백담호의 확연한 표정 변화에 해인의 앞에 있던 황정운이 “와…, 지릴 뻔.” 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 이제 시작해 볼까요? 얼른 하고 다들 저녁 먹으러 가셔야죠. 하하….”
강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그제야 뻣뻣하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는 듯했다.
“일단, 제가 피피티 다운받아서 왔고 이거는 음…. 제가 넘길게요?”
강하연이 한 명 한 명 확인하듯 눈을 마주쳤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노트북을 반쯤 돌려 모두가 볼 수 있게끔 조정했다.
“자, 다들 보시고 뭔가 문제 될 거 있거나 교수님이 하실 거 같은 질문 있으시면 끝나고 얘기해 보도록 해요.”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섯 잔 나왔습니다.”
커피가 가득 올려진 들고 온 해빛이 굳이 한 명 한 명 앞에다가 유리잔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커피는 제가 살게요.”
강하연의 말에 황정운이 오버스럽게 그녀를 치켜세웠고 강하연은 그저 애써 웃을 뿐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마지막으로 해빛이 해인의 앞에 잔을 내려놓자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경직했다. 하지만 서해빛은 정말 잔만 내려놓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 해인은 굳었던 몸을 풀며 대본을 그대로 다 외운 건지 오로지 피피티만 보며 말하는 백담호를 바라봤다.
약 20분 정도의 분량이니 양도 많았을 텐데 저걸 또 언제 외운 거야, 해인은 새삼 감탄했고 그건 해인뿐만이 아닌 듯했다. 덤덤한 사람은 백담호밖에 없었다.
발표 예행은 순탄하게 흘러갔고 이제 교수가 질문할 만한 것들을 대충 뽑아서 얘기하던 중이었다. 말을 하다 보니 목이 마른 해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셨다. 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시럽을 넣은 건지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단맛에 해인이 조금 동그래진 눈으로 유리잔을 내려다보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백담호의 앞에 놓인 유리잔을 가져와 홀짝 마셨다. 이건 썼다. 자신의 것에만 시럽이 들어가 있었다. 사람들 앞에다 따로따로 잔을 내려놓던 서해빛의 행동이 해인은 이제야 이해가 갔다. 해인은 제 잔을 보다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자신을 보고 있는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백담호의 물음에 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 * *
6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발표 준비는 슬슬 끝이 보였다. 그사이 가끔 황정운이 서해빛을 불러서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서해빛과 생각보다 별다른 문제없이 끝날 것 같아 안심이었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쪽에서 발생했다.
물기 맺힌 유리잔을 꽉 쥐고 있는 해인의 손이 움찔거렸다. 해인은 괜히 자세를 바꾸는 척, 몸을 들썩이며 제 허벅지를 주무르는 손등을 꼬집었다. 주물럭거리던 손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더욱 과감하게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었다.
해인은 고개를 살짝 돌려 백담호를 쏘아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해인의 옆으로 의자를 미세하게 옮기던 백담호는 이제 완전히 해인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하지 마. 해인이 이를 꽉 물고 백담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백담호는 가증스럽게도 해인을 쳐다보기는커녕 마치 강하연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듯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해인의 옆에는 백담호 말고도 박정훈이 있는 터라 해인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백담호의 손을 떨어트리려 끙끙거렸다. 발표 준비하다 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해인이 다시 한번 백담호에게 경고하려는 순간,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럼 오늘 정말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발표 잘해 봐요. 전 이만 약속이 있어서 가 볼게요!”
언제 마무리가 된 건지 강하연이 몸을 일으키며 빈 유리잔을 트레이에 담고 있었다. 하나둘씩 일어나자 해인도 이때다 싶어 퍼뜩 일어섰다. 그제야 더더욱 은밀한 부위로 파고들던 손이 떨어졌고 백담호는 장난스럽게 웃는 낯짝으로 해인을 바라봤다.
“해인아, 화났어?”
백담호는 뭘 잘했는지 실실 웃었고 해인은 퉁명스럽게 그를 노려보다 테이블을 치우는 강하연을 도와 유리잔으로 꽉 찬 트레이를 들어 올렸다.
“아, 감사해요.”
“아니에요.”
해인이 소란스러운 문 쪽을 힐끔 쳐다봤다. 서해빛이 황정운에게 붙잡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신없는 틈을 타 나가면 소란 없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해인이 빠르게 걸어가 카운터 위에 쟁반을 올려 두고 몸을 돌렸다.
백담호가 해인의 가방까지 멘 채 아직 테이블 근처에 서 있었고 어느새 문 앞에서 떠들던 황정운은 물론 강하연, 박정훈까지 전부 나가고 없었다.
갑자기 카페는 연출이라도 한 것처럼 고요해졌다. 서해빛은 아직 문 쪽에 서 있었다. 아니, 왜 이렇게 순식간에 다들 사라진 건데. 조금 더 빨리 나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해인은 숨 막히는 정적 속에 백담호에게 가방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해인의 손에 닿은 건 백담호의 손이었다. 맞닿은 손이 뜨거웠다.
“얼른 가자. 배고프다.”
백담호는 카페에 내려앉은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 아니, 백담호라면 이 분위기를 일부러 개무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백담호지.
느긋하게 웃음을 띤 백담호는 해인의 손을 꽉 잡고 문 쪽으로 향했다. 점점 문과 가까워질수록 자신을 향하는 해빛의 시선이 진해져 해인은 시선을 약간 바닥으로 내렸다.
해인이 고개를 숙이자 백담호는 머금었던 웃음을 지워 내고 서해빛이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 눈길조차 한 번 주지 않고는 이미 열려 있는 문을 통과했다.
“안녕히 가세요, 형.”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았다.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슬쩍 뒤를 바라보니 해빛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며 또 한 번 말했다.
“나중에 봐요.”
[호감도72]
[설정 조정 중22%]
해인의 시선이 서해빛의 머리 위에 뜬 호감도와 설정 조정 중 수치로 향한 순간이었다.
“뭐 먹을까, 해인아.”
잡았던 손이 놓아지고 뒤로 돌아간 해인의 얼굴이 손으로 감싸졌다. 백담호의 강렬한 시선에 해인은 머릿속에 남은 서해빛의 흔적을 지워 냈다. 나중에 보자는 말이라든가, 자신의 것만 달게 타 준 커피라든가, 굳게 마음을 잡아도 계속 마주쳐 속을 헤집어 놓는 모든 것을 까맣게 칠해 덮어 버렸다.
“음, 따뜻한 거 먹고 싶다.”
해인이 평소처럼 말하니 백담호는 골똘히 생각하듯 눈썹을 까딱거리며 “따뜻한 거….”라고 말끝을 흐렸다. 여전히 제 한쪽 귀와 볼을 감싸고 있는 손을 해인이 떨어트리고 깍지 껴 잡았다. 차가운 온도에 식은 제 손과 달리 백담호의 손은 따뜻했다. 따뜻함을 넘어서 조금 뜨겁기까지 해 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이렇게 백담호의 체온이 높았던가.
카페가 있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오자 썡, 부는 찬 바람에 해인은 목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백담호의 손을 잡은 채 제 손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춥지, 이제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니까.”
“나름 입는다고 입은 건데, 추위를 얕잡아 봤어. 내일부터 패딩 입어도 될 듯.”
해인이 주변을 둘러보니 많지는 않지만 한두 명씩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긴 했다.
“일단 차로 가자.”
백담호의 말에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해인의 머릿속에 서해빛에 관한 것은 완전히 덮어져 떠오르지 않았다.
* * *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캠퍼스에서 조금 떨어진 샤브샤브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차에 올라탄 해인이 백담호를 빤히 쳐다봤다. 제 얼굴만큼은 아니지만 백담호의 얼굴도 차가운 바람에 붉어져 있었다.
“어떤 거?”
코를 한번 훌쩍한 해인이 운전석으로 몸을 쭈욱 뻗어 백담호의 양 볼을 감쌌다. 한 뼘도 남지 않게 훅 다가온 해인의 얼굴과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백담호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능청스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뭐 하게, 해인아.”
해인의 손 위를 백담호가 겹쳐 잡으며 눈을 반쯤 감았다. 해인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지고 백담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마가 맞붙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곳이 접촉해 백담호가 곧바로 눈을 가늘게 뜨니 사뭇 심각해 보이는 해인의 눈이 시야를 꽉 채웠다.
“…해인아?”
이번에는 백담호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키스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이마를 맞대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백담호는 그저 눈만 깜빡이며 해인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음, 하고 침음을 흘린 해인이 두어 번 이마를 부비더니 조금 더 지나고 나서야 얼굴을 떨어트렸다.
“아닌가.”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너 열나는 거 같기도 해서, 근데 그냥 내 몸이 차가운 거 같기도 하고. 헷갈리네. 몸은 괜찮아?”
“아.”
해인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이제 이해한 백담호는 허탈하게 웃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아파.”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해인은 볼마저 감싼 손을 떨어트리고 몸을 스르르 뒤로 물렸다. 아무래도 제 체온이 낮아져서 그랬나 보다. 미련 없이 조수석에 바르게 앉은 해인을 백담호는 조금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기대했건만.
백담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해인은 왜 그러냐는 듯이 아무것도 못 알아챈 순진한 낯을 하고 있었다.
“방해인.”
해인이 대답도 할 여유도 없이 백담호는 해인의 뒤통수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드디어 입술이 겹쳐졌고 해인은 예고 없는 키스에 몸을 움찔거렸다. 입술 위에서 붙었다 떨어지길 몇 번, 백담호가 해인의 다물린 입술 사이를 혀로 쿡 찍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입.”
해인이 입술을 살며시 벌렸고 그 사이로 지나치게 뜨거운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 * *
“됐어, 나 혼자 올라갈게. 계속 집까지 데려다주는데, 괜찮아.”
“나 멀쩡해.”
“조용히 해, 추워. 얼른 집이나 가.”
후다닥 내린 해인이 기어코 또 같이 올라가겠다는 백담호를 억지로 운전석에 힘을 주어 앉혔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기는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바람도 찬데 진짜 아프면 어떻게 하려고. 해인은 극구 거부했다. 몇 번 아웅다웅 다툼 아닌 다툼을 하다 보니 백기를 든 건 백담호였다.
“…해인이가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네.”
입을 삐죽 내밀고 백담호는 차 밖으로 향했던 몸을 결국 안쪽으로 돌렸다. 그러자마자 해인은 곧바로 차 문을 닫아 버렸고 안에서는 기가 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창이 내려가고 백담호는 여전히 부루퉁하게 해인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다 인위적으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해서 가고 내일 보자.”
“…어.”
기어들어 갈 듯 작은 대답에 해인이 픽 웃고는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 백담호의 정수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하기에 해인이 그 손을 콱 잡아 떨어트렸다.
아니, 진짜.
“씨발, 빡치게 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집에 가라. 날씨 개춥-.”
다고…. 일순간 백담호는 근래에 가장 충격을 먹은 건지 까만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고 곧 상황 파악이 된 해인 역시도 덩달아 놀라 입이 크게 벌어졌다.
“…미안.”
사과를 해 봤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이 거지 같은 주둥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구나.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 가끔씩 속에서 울컥울컥하던 게 잠잠해졌나 싶었더니 이렇게 자각도 없이 튀어나올 줄 몰랐다.
낭패감 어린 해인이 백담호의 호감도를 빠르게 살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 다행이었다.
“걱정을 좀 살벌하게 하네. 해인아.”
알았어, 그만 고집 피울게.
놀란 듯 경직되었던 백담호의 표정은 금세 장난기를 머금고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가 폈다. 화, 안 난 건가…? 안절부절못하며 백담호의 눈치를 살피는 해인에 백담호는 웃으며 해인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백담호의 입술 위에 해인의 손끝이 닿았고 곧이어 백담호가 장난스럽게 해인의 손가락을 콱 씹었다 빼내었다. 아릿한 고통에 해인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제 잇자국이 난 손가락을 치료하듯 백담호는 입술로 문질렀다.
“그렇다고 너무 빡치지는 말고.”
“으응, 미안해.”
“뭐가 미안해, 괜찮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떨어트린 백담호가 살벌한 게 귀엽네, 라고 말하자 해인은 그 말에 긴장했던 몸이 탁 풀리고 말았다. 겨우 미소를 띤 해인에 백담호는 창밖으로 손을 뻗어 해인을 오피스텔 쪽으로 살살 밀었다. 힘없이 밀려난 해인은 몇 번 백담호의 눈치를 더 보다가 결국 그가 먼저 손을 흔들고 떠날 때가 돼서야 제대로 앞을 보고 걸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백담호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아서. 백담호는 기억을 잃기 전, 그러니까 원래의 방해인을 싫어했으니까. 해인은 저도 모르게 옛날의 자신처럼 말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주둥아리, 나대지 말자.”
조심해야지, 해인은 제 입술을 약간 힘을 주어 툭툭 때리듯 두드렸다.
* * *
다 씻고 강의 때 들었던 걸 다시 한번 쭉 살펴보고 해인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 위에 엎어 뒀던 휴대폰을 들어 올리니 전화가 오고 있었다.
서해빛이었다.
“아….”
난감한 눈으로 액정을 바라보니 전화가 끊겼다. 잠금 화면이 나타나고 떠오른 부재중 알림은 3통째였다. 복잡한 신경으로 화면을 보던 중, 다시 전화가 왔다. 또 서해빛이었다. 받을 때까지 한다더니 진짜였다. 또 혼자 끊겼다가 울리는 전화를 보다 보니 해인은 문득 예전이 떠올랐다.
자신도, 서해빛이 전화를 안 받으면 수차례 하고는 했다. 그리고 메시지도-.
[서해빛: 형 뭐 해요.] 오후10:12
생각하기 무섭게 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제 보니 서해빛이 하는 짓거리가 예전의 자신이 했던 짓과 똑같았다. 서해빛은 대체 왜 이렇게 구는 걸까, 대체 뭘 어떻게 느꼈기에 호감도가 현재의 백담호와 맞먹을 정도일까. 기억을 잃은 자신의 행동이 과거의 잘못을 다 덮을 정도로 친절했던가.
화면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이 해인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서해빛이 이러니까 신경이 쓰였다. 물론 연애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신경이 쓰였다. 대꾸도 안 하는 사람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으면서도, 과거 서해빛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또 한 번 진동이 울리자 결국 해인이 전화를 받았다. 받고 나서 정적이 흐르길 잠시, 곧이어 서해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받을 줄 몰랐는데 받았네요.]
“그렇게 전화하고 메시지를 휴대폰 뜨거워지게 보내는데 어떻게 안 받아.”
[차단하지 그랬어요.]
“…어, 이제 하려고.”
해빛은 대답하지 않았다. 작게 숨소리만 들려왔다.
[난, 지금 이러는 게 정말 싫어요.]
전화 너머로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원망이 어린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이러는 게 정말 싫다는 게 무슨 뜻일까. 지금 전화로 이러고 있는 게 싫다는 걸까.
해인은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형이 이제 저 안 좋아하는 거, 앞으로도 안 좋아할 거라는 거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요. 상황 한번 거지 같네요.]
해인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차단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학교에서 볼 텐데.]
그래도 형이 마지막 전화는 받아서 좀 기쁘네요. 전화가 그대로 뚝 끊겼다. 끊어진 전화에도 해인은 귀에 대고 있는 휴대폰을 떼어 내지 못했다.
서해빛의 말이 잔상처럼 남아 귓가에서 계속 울리는 것만 같았다. 서해빛의 체념한 듯한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이.
* * *
해인은 강의실 책상 위에 엎어져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했다. 백담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어제저녁에 잠깐 전화를 한 후로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방해인: 어디야?] 오전9:50 -1
3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1에 해인은 결국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뚜루루 신호음이 오랫동안 가더니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 안내음만 나올 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점점 걱정이 커진 해인은 또 메시지를 보냈다.
[방해인: 담호야, 무슨 일 있어?] 오전9:54 -1
그렇게 백담호는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오지도 않았고 연락도 없었다. 걱정과 답답한 마음에 해인은 강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몇 번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결국 수업마저도 끝나 버렸고 해인은 또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여전히 백담호는 받지 않았다.
이따 끝나고 집에 한번 가 봐야 하나.
* * *
백담호가 없으니까 시간이 안 간다. 인적이 드문 장소에 앉아 해인은 답장이 없는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봤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디 아픈가? 걱정되는 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커져만 갔다. 점심으로 사 온 샌드위치는 뜯지도 않고 해인은 겨우 두유만 홀짝였다.
설마 어제 일 때문인가?
비록 백담호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연락이 통 안 되니 자연스레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순간 해인의 머릿속에 호감도 달성으로 받았던 아이템 중 상대의 마음 엿보기 어쩌고를 받았던 게 떠올랐다.
남의 마음을 엿본다니, 정말 사생활 침해에 상대가 불쾌할 행동이라 사용할 생각조차 없었는데 지금이 이런 상황이 되니 백담호의 머릿속까지 까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답장이라도 오면 좋을 텐데. 휴대폰에 얼굴을 박을 듯이 보는데 계속 따사롭게 내리쬐던 햇빛이 가려졌다.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리니 누군가가 앞에 서 있었다.
[설정 조정 중 24%]
[호감도 72]
“…서해빛.”
“안녕하세요.”
서해빛이 웃으며 서 있었다. 예전에는 저 웃음이 해맑고 천진하게 느껴졌는데 요즘은 의심쩍게 느껴졌다. 얘가 또 어떻게 여깄어. 근처에 큰 수풀이 있어 숨겨지다시피 한 곳인데 서해빛은 대체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온 걸까.
해인이 의심스럽게 올려다보니 해빛은 그저 미소를 유지하며 해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는 여기 왜 왔어.”
대답 대신 해빛은 제 겉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해인에게 건넸다. 핫 팩이었다. 해인은 그 핫 팩을 빤히 내려다보다 외면했다.
“필요 없어.”
“추우면서.”
“안 추워.”
고개를 빳빳하게 쳐올리며 해인이 절대 돌아보지 않자 해빛은 어깨를 으쓱하고 내밀었던 손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예요? 혹시 둘이 싸웠어요?”
“아니.”
“아쉽네요.”
해인이 황당하게 옆을 돌아보니 해빛은 핫 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서해빛은 머리색이 옅어 햇살이 좋은 곳에 서 있으면 영롱한 빛을 내곤 했다. 특히 노을이 지는 하늘과 함께하면 옅은 빛깔이 같이 물들어 갔다.
스스로도 뜬금없는 감상이었다. 서해빛에게 이런 감정이 불쑥 들 때마다 마음이 심란했다. 과거의 감정 때문이겠지. 계속 과거의 감정이 치고 올라오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과거의 감정에 휩쓸리는 이유는 아마 서해빛을 좋아했던 감정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감정이 퇴색하며 그저 한 편의 추억으로 남아야 할 짝사랑은, 기억이 지워지는 바람에 그럴 시간을 갖지 못했다. 기억과 함께 잊혀진 감정들이 반년이 지난 지금 고스란히 돌아왔다. 그것도 새로운 감정이 움튼 몸속으로.
그렇기에 과거의 감정이 불쑥 올라올 때마다 흔들리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해인은 그리 생각하며 해빛의 머리카락에서 눈을 돌렸다.
“야, 서해빛.”
“네.”
“예전에 했던 행동, 그리고 그 뒤로 내가 했던 행동들 다 미안해.”
“…알긴 아네요.”
“근데 네가 이런다고 뭐가 바뀌지 않아. 너도 안다며.”
내가 앞으로도 널 다시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거. 숙였던 해빛의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해인과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해빛은 시선을 앞으로 돌려 버렸다.
“그리고 나 백담호랑 사귀는 사이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고.”
“알죠, 다 알고 있죠….”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는 말은 물기를 머금은 듯 먹먹했다.
“그런데.”
해빛이 머리가 해인 쪽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머리 위에 호감도가 ‘73’으로 올랐다. 그걸 발견한 해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수록 더 포기를 못 하겠어요.”
해빛이 해인의 비어 있는 한 손에 핫 팩을 올려 주고는 억지로 꽉 쥐게 만들었다.
“나 그냥 쓰레기 할래요.”
무겁게 가라앉은 옅은 눈동자가 애처로워 해인은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해빛도 해인에게서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물기에 젖은 시선으로 해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차마 말로 다 담아내지 못한 복잡한 감정들이 표정과 눈에서 엿보이던 찰나, 서해빛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 가 볼게요. 형. 이따 수업에서 봐요.”
목소리가 티 나게 밝았다. 억지로 꾸며 낸 게 빤히 느껴지게끔. 서 있는 서해빛 뒤로 아까보다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져 해인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서해빛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서해빛은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탓에 해인은 서해빛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설정 조정 중 30%]
[호감도 73]
무슨 이유인지, 설정 조정 중이 짧은 순간에 훅 올라가 있었다. 이제 서해빛과 해인의 관계가 깊어질 수 없다는 걸 서해빛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해빛이 해인은 곤란했다.
그와 동시에 왜인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서해빛이 제게 이랬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왜 어디에선가 이런 장면들을 본 것만 같을까. 혹시, 또 제가 모르는 기억이 있는 걸까.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물어뜯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설정 조정 중, 호칭:조연은 이제 주연, 그레비티, 주요 공략 인물.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것들 중 유독 네 개가 해인의 머릿속에서 도드라졌다.
* * *
해인은 경상대 건물로 향하며 백담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초조함이 불안감이 될 무렵, 오늘 백담호가 발표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백담호가 발표하기 싫어서 안 올리는 절대로 없으니 해인은 더욱 심각해졌다. 발표 점수가 큰 수업을 빠질 정도로 큰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이렇게 연락이 안 된 적이 없었는데…. 시간은 벌써 12시 40분이었다.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백담호는 안 올 것 같아 해인이 팀플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내려던 찰나였다. 해인의 시선 끝에 익숙한 인영이 걸렸다.
남들보다 월등하게 큰 키와 덩치와 반듯한 자세로 건물 입구를 들어가고 있는 건 백담호였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가 완벽하게 그가 백담호라는 걸 확신시켜 줬다. 해인은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백담호!”
백담호는 듣지 못했는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빠진 숨을 내쉬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겨우 백담호의 뒤에 도착한 해인이 그의 팔을 잡는 순간이었다. 백담호가 거칠게 뒤를 돌아보며 살벌하게 굳은 표정으로 해인을 내려다봤다.
모자를 쓰고 있어 백담호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던 탓에 더욱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 기세에 눌린 해인이 몸을 움찔거리며 황급히 잡고 있던 백담호의 팔을 놓았다. 해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호감도로 향했다. 호감도는 그대로였다.
누가 봐도 겁먹은 듯한 해인에 백담호는 빠르게 제 표정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놀랐지.”
“어…. 아냐. 내가 갑자기 잡아서 그런 걸, 미안….”
옅은 미소를 띠운 백담호가 제 눈치를 보는 해인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끌어당기며 살살 쓰다듬었다. 목덜미에 감싸진 살갗이 소스라치게 뜨거웠다.
“너 아파?”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얼굴이 평소보다 붉었다. 해인이 손을 뻗어 백담호의 뺨에 대려는데 손목이 낚아채지고 말았다. 백담호는 갑자기 냄새라도 맡듯 해인의 손목에 코를 가까이했다. 뜨거운 숨결이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의미 모를 백담호의 행동에 해인이 당황스레 눈을 깜빡이니 곧이어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해인아, 누구랑 있다가 왔어.”
“…응?”
서해빛과 얘기 나눈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서늘한 담호의 눈빛에 해인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해인이 입술만 움찔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백담호는 곧바로 표정을 풀고 살벌한 기세를 갈무리했다.
“아니야, 아냐. 방금 건 잊어, 해인아. 내가 좀 상태가 별로라 그래.”
“어…. 으응.”
백담호는 미안하다는 듯 꽉 잡았던 손목에 힘을 빼고 엄지로 문질렀다. 백담호는 억지로 웃고 있는 듯했다. 몸이 지나치게 뜨거운 게 아픈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아프면 대다수가 예민해지니까, 그렇긴 한데….
해인은 백담호의 팔을 잡았던 처음, 그의 살벌하고 싸늘한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백담호가 자신에게 정이 떨어진 줄 알았다.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놀랐는지 해인의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격렬했다.
* * *
해인은 비척비척 아슬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백담호를 연신 살폈다. 백담호는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굳이 계단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워낙 강경한 태도에 해인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많이 아파 보여.”
“응, 괜찮아.”
강의실 입구에서 백담호는 해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들어서다가 대뜸 발걸음을 멈췄다. 백담호의 뒤쪽에 있던 해인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옆으로 빼내니 백담호와 해인이 항상 앉던 자리 옆에 서해빛이 앉아 있었다. 해빛과 다섯 걸음도 채 되지 않은 거리, 백담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해인이 슬그머니 위를 쳐다보니 백담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일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 백담호의 설정 조정 중과 서해빛의 설정 조정 중이 동시에 올라갔다. 정말, 완벽하게 같은 타이밍에 올라간 적은 처음이라 해인은 말없이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쩐지 둘 사이의 기류가 몹시 이상해 해인은 일단 서해빛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호 앞에서 기도 안 죽고 늘 싱글싱글 웃고 있던 녀석이 웬일인지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점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하기도 했다. 해인이 조심스럽게 담호를 지나치려 했지만, 팔뚝이 잡혔다. 어찌나 강한 힘인지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윽, 하고 신음을 작게 뱉었다.
“어디 가.”
“서해빛 자리로 돌려보내려고…?”
감정을 읽기 힘든 표정으로 해인을 응시하던 백담호는 이내 해인을 제 뒤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팔을 놓아줬다. 오늘따라 흉흉한 백담호의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기가 죽은 해인은 끌려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상황도 언젠가 겪어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굴욕감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왜지, 해인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백담호는 서해빛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싸움이라도 날까 싶었지만 해인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빛이 일어났다. 서해빛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원래 제자리로 돌아갔다. 서해빛이 사라지자 백담호는 원래 앉았던 자리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았다. 해인도 그제야 백담호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교류가 있었던 걸까.
해인이 힐끔 백담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바로 눈이 마주쳤다. 백담호가 이미 해인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화난 것도 아닌 묘한 무표정으로 바라보기를 몇 초, 백담호는 그대로 해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래로 추욱 쳐진 백담호의 손이 슬그머니 해인의 한쪽 손을 붙잡고는 조몰락거리기 시작했다.
맞닿은 곳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해인이 걱정스레, 감기냐고 물으니 백담호는 몇 초 뒤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건 뭐지. 또 약은 먹었냐고 물으니 위장이 터질 정도로 먹고 왔다며 백담호는 너스레를 떨었다.
* * *
해인이 백담호가 어디가 아픈지를 깨달은 건 조 발표가 거의 끝나 갈 시점이었다. 백담호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는 걸 눈치챈 강하연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 명 더 앞에 나가 있자고 했다. 백담호가 발표 도중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면 해인이 대타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백담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발표를 이어 나갔고 해인은 남는 인력이 되어 멀뚱멀뚱 서 있던 때였다. 갑자기 해인의 콧속으로 달고 씁쓸한 향이 훅 들어왔다. 해인은 이 향의 근원을 알았다. 앞쪽을 보던 해인이 흔들리는 눈으로 발표를 하는 백담호를 쳐다봤다.
백담호는, 아픈 게 아니라 러트가 온 것이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단내는 확실히 백담호의 향이었다. 백담호가 러트라는 걸 깨닫자마자 해인은 아까 느꼈던 기분이 뭔지도 함께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였다. 자기 관리가 늘 철저하던 백담호가 웬일인지 흐물거리길래 가서 시비를 털었는데 백담호는 아까보다 더 지독하게 사나운 기세로 화를 냈다. 평소와는 달리 본능적으로 감지한 위험에 쫄아 해인은 그대로 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백담호에게 두려운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어찌나 굴욕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쫄았던 거지 싶어 알아봤더니 당시 백담호는 갑자기 러트가 터져 집에 돌아가려고 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백담호는 우성 알파였다. 해인은 열성이었기에, 자신보다 우세한 성질을 가진 담호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엔 원인을 알아냈음에도 찝찝했고, 오히려 패배감까지 들었다. 형질의 우세함은 어떤 노력으로도 바뀌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이상으로 5조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발표가 완전히 끝났다. 백담호의 안색이 아까보다 더욱 안 좋아 보여 해인이 괜찮냐고 물으려 했지만,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교수의 질문이 시작되고 말았다.
* * *
백담호를 대신해서 해인과 강하연이 교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발표는 무사히 끝났다. 자리로 돌아가 앉으니 바로 옆에 앉은 백담호에게 향이 더욱 짙게 느껴져 해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너 집에 가야 할 거 같아.”
호흡도 조금 가쁜지 백담호는 책상 위에 몸을 늘어트리고 색색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와중에도 학교에 올 생각을 한 게 새삼 대단했다. 해인은 열성이라 러트가 와 봤자 1년에 두 번꼴이었다. 게다가 기미가 보일 때쯤 약을 먹으면 금방 잦아들었기에 제대로 된 러트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러트가 오면 얼마나 힘든지는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심하면 이성을 완전히 잃는다고도 들은 것 같았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서 그럴 일은 거의 없기는 했지만.
“약빨 다 떨어졌나 보네…. 한 움큼은 먹은 거 같은데.”
시발…. 괴로운지 욕을 작게 읊조리던 백담호는 엎드렸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해인아, 나 갈게. 안 되겠다.”
힘없이 중얼거린 백담호는 해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백담호가 나가자 해인도 주변의 눈치를 보다 조용하게 강의실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계속 비틀거리던 녀석이 뛰어가기라도 했는지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뭐 벌써 안 보여.”
나오자마자 바로 보일 거라고 예상했기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해인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숨이 찰 정도로 달려 해인은 1층에 도착했고 두리번거렸지만, 백담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빨라도 벌써 건물 밖으로 나갈 수가 있나 이상했다.
발에 모터라도 달린 거야 뭐야.
혹시 쓰러졌나 싶었지만, 계단을 내려갈수록 진해지는 백담호의 향에 해인은 걸음을 더 빨리했다. 아까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을 고집했구나, 해인은 깨달았다.
1층에 도착한 뒤 두리번거리며 건물을 나가려는 순간 해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는 자판기의 옆면에 백담호가 머리를 박고 멀뚱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푹 자판기에 박은 탓에 모자가 위로 들려 떨어질 듯이 아슬아슬했다.
해인은 주변을 살피며 백담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행히 한창 수업 시간이라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있는 사람들마저도 짙은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백담호?”
해인이 다가가니 백담호가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눈에 반쯤 초점이 없었다. 설마, 정신이 나갔나…? 해인이 툭툭 건드니 백담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차는 있는데 차 키가 없어. 시이발…….”
백담호가 차키를 찾는 건지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또 칭얼거렸다.
“휴대폰도… 없네. 좆같네…. 시발….”
아. 해인은 나직하게 뱉었다.
* * *
급하게 아무 택시나 잡고 백담호의 집에 겨우 도착했다. 백담호를 어떻게든 끌고 겨우겨우 현관 안까지 들어왔다. 자꾸만 들러붙는 백담호를 해인이 바닥에 패대기쳤다. 이제 보니 백담호의 옷이 엉망이었다. 패딩은 이미 반쯤 벗겨졌고 바지엔 언제 손댄 건지 버클이 풀려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에 띄게 강렬해진 단내에 해인은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일반적으로 알파와 오메가가 풍기는 향은 성감을 자극했다. 그 형질이 서로 다르든, 같든. 물론 개인 취향이라든지, 상성 같은 게 기본적으로 맞는다는 하에.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공중시설 등과 같은 곳에서 제 페로몬을 풍기는 건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조금 예외지만.
백담호는 해인이 바닥에 던진 그대로 드러누운 채 해인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야해 보여 해인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백담호의 신발을 벗겼다. 아마 자신이 그나마 베타에 가까운 열성이라 그나마 제정신이었지, 아니었으면 같이 정신이 나갔을지도 몰랐다.
“아, 힘들어…. 백담호, 일어서.”
신발을 다 벗긴 해인이 제 신발도 벗고 백담호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백담호는 힘이 없어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고분고분하게 일어서서 해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렸고 해인은 2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가만히 있던 백담호가 열림 버튼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닫히던 문이 다시 열렸고 해인은 예상치 못한 백담호의 행동에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혔다.
“해인아.”
부르는 목소리가 속에서부터 긁히듯 낮고 거칠었다.
“내가 지금 정신이 나갈 거 같거든.”
달콤 씁쓸한 향이 농도 짙게 풍겨 와 해인은 입 안이 메말랐다.
“그러니까 지금 갈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내가 셋까지 셀 동안 가고 싶으면 얼른 나가. 알겠지?”
어둠이 드리워 아슬하게 번들거리는 시선이 해인을 응시했다. 해인은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어 경직된 채 바라봤다. 잠시 뜸을 들이던 백담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셋.
그와 동시에 열림 버튼을 누르던 손이 떨어졌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백담호가 해인을 벽면에 몰아붙였다.
“나는.”
기회를 줬어, 해인아.
백담호가 이를 드러내며 짙게 웃어 보였다. 기회를 버린 건 해인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환한 미소에 해인은 제가 잘못 선택을 한 건가 후회가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 *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고분고분했던 게 무색할 만큼 입 안을 탐하는 백담호의 행동은 난폭했다. 뒤통수가 차가운 벽면에 짓눌릴 듯이 압박되고 손가락이 넣어져 완전히 벌려진 입은 아려 왔다. 2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백담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문, 열렸…….흡….”
입을 억지로 벌리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그 대신 불덩이같이 뜨거운 혀가 파고들어 와 입 안 곳곳을 헤집어 놓았다. 호흡마저 앗아 갈 듯이 강하게 빨아들이더니 데일 듯 화한 숨결이 단내와 함께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입 안에서 섞이는 타액마저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코로도, 입으로도 오직 백담호의 달고 쓴 향만 스며들어 와 해인도 점점 정신이 흐려졌다 맑아졌다를 반복했다.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틈새를 비집고 흘러내렸고, 백담호는 입술을 떨어트려 해인의 아랫입술을 콱 씹었다. 따끔한 고통에 해인이 신음을 흘리자 욕망만이 남은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었다.
자기가 씹어 놓고 위로라도 하려는 건지 입술을 백담호는 입술을 춥춥 빨아들였다.
겨우 키스만 하고 있을 뿐인데 벌써 전신이 끓어올랐다. 벽에 빈틈없이 밀착된 해인의 몸 뒤로 백담호가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기울어지면서 공간이 생긴 덕분에 드디어 압박감이 사라지자 해인이 그제야 수월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물에 젖은 해인의 속눈썹 위를 백담호가 주욱 핥더니 가볍게 빨아들였다. 살다 살다 눈이 빨린 적은 처음이라 이상한 감각에 해인이 밀어내려 했지만 백담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 거기 빨지 마…. 이상해….”
애원이 통한 걸까, 백담호가 핥던 혀를 뒤로 물렸지만 이미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잘 떠지지 않았다. 결국 한쪽 눈을 뜨는 걸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백담호는 곧바로 하반신을 뭉그적거리며 비비기 시작했다. 해인의 샅을 파고든 백담호의 허벅지가 같이 움직이며 빳빳하게 선 백담호의 것도 해인의 아래에 같이 문질러졌다.
옷 위로 쓸리는 서로의 성기에 백담호가 나직하게 신음을 흘리며 해인의 손을 제 앞섶 위로 당겼다.
“하…. 해인아, 여기 만져 줘.”
하의가 트레이닝팬츠라 그런지 커질 대로 커진 성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백담호가 발기한 것이 아픈지 끙끙거리며 해인의 손바닥에 앞섶을 치댔다. 흥분에 취해 눈 주변이 붉게 달아오른 백담호의 얼굴을 보던 해인이 목울대를 일렁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으로… 해 줄까…?”
백담호는 멍해진 눈으로 해인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떤 말을 하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열감에 벌게진 눈만 느리게 깜빡일 뿐이었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못 들은 건가 싶어 해인은 제 손바닥에 닿아 있는 불룩한 것을 살며시 움켜잡았다.
“이거…. 입으로 해 줄-.”
“와…. 씨발.”
해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담호가 ‘제대로 들은 거 맞네.’라고 말을 이었다. 약간 거친 숨을 몰아쉬던 백담호는 잠시 해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몸을 물렸다. 벽에 밀착되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던 해인의 몸이 자유로워지고 백담호는 미소를 지었다. 흉흉하게 선 제 아래를 자위하듯 문지르면서 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딱히 앉을 곳이 없었으니 백담호는 해인을 빤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해인이 주춤주춤 다리를 접으며 무릎을 세워 앉았다. 얼굴 앞에 바로 백담호의 부푼 앞섶이 보였다.
팬츠 허리 부분을 잡고 해인이 끌어내렸다. 백담호의 성기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긴장이 되어 자꾸만 입 안이 말랐다. 드로즈와 함께 바지가 완전히 내려가자 두꺼운 것이 퉁겨 나와 해인의 입술을 스치며 위로 솟았다.
“아….”
드러난 성기와 함께 지금까지 뿜어진 향은 맛보기였다는 듯 농도 짙은 달고 씁쓸한 향이 해인의 살갗을 찌를 듯이 풍겼다. 이미 바싹 마른 입 안이 더욱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해인의 아래가 움찔거렸다. 눈앞이 조금 하얘진 해인이 몸을 살짝 물리려는 찰나였다.
“해인아.”
머리 위에서 들리는 음성이 지나치게 낮았다. 해인의 커다란 손에 감싸진 뒤통수가 곧이어 팍 당겨졌다. 그 탓에 번들거리는 선단이 해인의 입술을 가르고 조금 들어서고 말았다. 해인이 그대로 시선만 위로 들어 백담호를 쳐다봤다.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백호가 말했다.
“사람 기대 시켜 놓고 내빼기 없기.”
음성은 나긋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협이 느껴졌다. 꾸욱, 해인의 머리통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콧속에 스며들다 못해 코를 찌를 듯한 담호의 향에 해인이 신음을 나직하게 흘리며 입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담호는 손에 힘을 빼고는 해인의 정수리에 얹었다.
입 안으로 이미 들어선 귀두를 해인이 조심스럽게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백담호의 단 향이 너무 강해 혀끝에는 비릿한 맛보다 달큰함이 더 짙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남의 성기를 빠는 건 처음이라 해인은 어설프게 혀를 놀리며 살며시 채 입에 담지 못한 기둥을 양손으로 감쌌다.
“하아…….”
낮은 신음이 머리 위로 들려왔다. 쾌감에 의한 것이 분명한 소리에 해인은 더욱 과감하게 좆을 핥고 빨았다. 백담호가 제게 해 줬을 때를 생각하며 해인은 최대한 성기를 입 안에 넣었다.
하지만 다 넣기에는 너무 큰 성기에 막대 사탕이라도 먹는 것 같은 춥춥거리는 모양새밖에 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어설픈 행동이었지만 백담호의 성기 끝에서는 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이게 백담호의 것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이미 단 향으로 후각과 미각이 절여진 탓인지 전혀 역겹지 않았다.
머리를 물렸다가 다시 앞으로 움직이며 해인은 고개를 왕복했다. 해인의 정수리에 얹어진 백담호의 손이 조금 굽어 들며 해인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금방이라도 갈 것처럼 성기는 뜨거웠고 해인도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백담호의 좆을 빨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건지 그저 향에 취한 건지 모를 정도로 해인의 아래 역시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귀두 끝이 입천장을 긁으며 안으로 들어갈 때면 해인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발가락을 곱았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뜨거운 살덩이를 좀 더 깊숙하게 집어넣고 싶었다.
목구멍이 간지러운 것만 같았다. 해인의 눈이 반쯤 풀려 흐리멍덩했다. 다물지 못한 입가로 타액이 흘러내려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인은 한껏 입을 벌려 성기를 집어넣다가 선단이 목젖을 찌르고 말았다.
“컥….”
구역감에 해인이 황급히 입을 떨어트리고 마른기침을 했다. 그런 해인이 귀엽기라도 한지 백담호는 옅은 미소를 띠며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인의 기침이 점점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머리만 쓰다듬던 백담호가 해인의 볼을 감싸며 엄지를 해인의 입 속에 집어넣어 벌렸다.
벌려진 입술에 다시금 백담호가 제 것을 가져다 댔다. 기침을 하느라 눈물로 촉촉해진 눈으로 백담호를 올려다보던 해인이 슬쩍 고개를 비틀었다. 입에 넣는 대신 귀두부터 뿌리까지 쪽쪽 입을 맞추듯 가볍게 빨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길게 혀를 빼내어 핥아 올리니 백담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백담호의 체취와 열기가 머릿속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해인은 스르르 한 손을 아래로 내려 제 앞섶을 살살 문질렀다.
“하아….”
더 이상의 수치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인은 한 손으로 바지 버클을 풀어 내리고 발기한 제 성기를 밖으로 꺼내어 움켜잡았다.
“후으……. 아, 해인아…. 시발….”
백담호는 흐려진 눈으로 제 것을 물고 있는 해인을 내려다봤다. 처음에 뻣뻣하던 모습과 달리 이제는 대담해져 있었다. 작은 머리통 아래로 자위까지 하는 모습에 눈앞이 아찔했다.
춥춥, 좆이 맛있기라도 한지 곳곳에 침질을 해 놓으며 열심히 빠는 모습에 그대로 머리를 움켜잡고 목구멍까지 깊숙하게 넣어 버리고 싶었다. 억제제 약발까지 이제 완전히 떨어지니 뇌가 성욕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 같았다. 이래서 러트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건데. 이 시기만 되면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정말 짐승이 되는 것 같았다. 좆질에 미친 짐승이.
해인의 머리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성기를 물고 있는 입 안이 지독히도 뜨거워 백담호는 목이 긁히는 소리를 흘리며 가볍게 해인의 머리를 잡고 앞뒤로 움직였다. 그렇다고 너무 깊숙이 넣지 않기 위해 백담호는 최대한 애를 썼다. 하아, 하아. 호흡하는 게 이렇게 힘드나 싶을 정도로 숨이 가빠 왔다.
“후우…….”
백담호가 고개를 위로 젖히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해인의 머리통을 계속 움직이자 서서히 강한 사정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담호는 더 강한 쾌감을 좇았다. 아래에서 괴로운 듯 우는소리가 흐릿하게 들리는 것 같았지만 백담호의 온 정신은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성감에 집중되어 있었다.
짙은 사정감이 몰려오자 백담호가 해인의 머리를 제 성기 쪽으로 꾸욱 눌렀다. 목구멍을 억지로 열고 들어간 성기에서 울컥, 뜨겁고 질척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곧바로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정액에 해인이 다급하게 백담호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도 백담호의 눈빛은 흐렸다. 숨이 막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해인의 얼굴을 봤음에도 백담호는 사정이 끝날 때까지 해인의 머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목을 비집고 들어간 두꺼운 것에 정말 기절하겠다 싶을 때, 드디어 해인의 머리를 강하게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곧바로 도망치듯 몸을 뒤로 자빠트린 해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했다. 콜록거릴 때마다 목 안에서 비릿한 냄새와 단 향이 섞여 올라왔다.
“하아, 하아, 백담호야……. 이 미친 새끼야…!”
사람 죽일 일 있어? 체액으로 질척이는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해인이 큼큼거렸다. 목 안이 긁힌 건지 따끔따끔했다. 식도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해인이 연신 목을 매만지며 백담호를 노려봤다.
평소처럼 미안하다며 달래 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백담호는 나긋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해인은 그런 백담호의 표정에 당황하고 말았다.
“갔네.”
뭐가 갔다는 거지, 자기가 갔다는 건가?
뜬금없는 백담호의 발언에 해인은 머리를 굴렸지만 정확히 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내 하찮은 펠라 실력에도 자기가 갔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저 미소가 비웃는 것 같아 보였다. 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뭔 소리냐고 되물으려 했지만,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백담호의 다리가 앞으로 뻗어졌기 때문이다. 그 뻗어진 발끝으로 해인의 시선이 저절로 옮겨 갔고 그곳에는 유백색의 액체가 바닥에 얼룩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마치 이리저리 흔들며 뿌린 것처럼. 백담호는 발끝으로 그 액체를 바닥에 펴 바르듯 문질렀다. 점성 있는 액은 묽은 크림처럼 펴 발렸다.
“내 좆 빨면서 갔네, 해인이.”
해인이 푹 죽어 있는 제 성기를 내려다봤다. 아까 혼자 만질 때 간 적은 없으니 저건 백담호가 억지로 제 목구멍에 좆을 처박을 때 나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취향이었던가….
해인은 얼굴뿐만 아니라 목까지 새빨갛게 붉어졌다. 슬쩍 위를 올려다보다 백담호와 눈이 마주쳐 해인은 시선을 빠르게 피하고 말았다.
“하…. 다시 설 것 같아.”
백담호가 헛웃음을 치며 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고 그의 성기는 이미 다시 처음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백담호가 한 걸음, 해인에게 다가갔고 해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엉덩걸음 쳤지만 때는 늦었다. 해인의 팔이 잡혀 일으켜지고 얼굴과 가슴이 엘리베이터 벽에 닿게 몸이 돌려졌다.
“해인이는 어디로든 내 좆 먹으면 싸네.”
그거, 존나 꼴린다….
습한 숨결이 귓속을 간지럽혔다. 몸이 벽 쪽으로 밀려 해인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볼에 닿은 엘리베이터 벽이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갑고 점점 압박되는 몸이 불편해 해인이 입을 벌려 말하려던 참이었다. 벌어진 입 안으로 손가락 두 개가 파고들었다.
손가락은 입 안을 거칠게 헤집어 놓았다. 혀 위를 꾸욱 누른 손가락이 혀 아래를 파고들어 갔다. 그 탓에 자극된 침샘에서 타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완전히 해인의 침으로 젖은 손가락이 빠져나오고 그 움직임에 따라 얇은 실이 늘어졌다.
“이게 갑자기 무슨…!”
아래가 언제 완전히 벗겨진 건지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벽에 붙은 상반신과 달리 뒤로 쭈욱 빼진 둔덕 사이를 백담호가 손가락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대로 다물려 있는 입구를 가르고 손가락 두 개가 한 번에 파고들었다.
“아윽…. 흐으….”
얼마 전에 했기 때문일까, 고통은 없었다. 대신 파고들어 오는 이물감과 평소보다 다급하고 거친 손짓에 해인은 몸을 바르작거렸다. 이미 한 번 사정을 해 풀려 있던 근육이 백담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씹었다.
곧바로 백담호는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으며 안을 쑤셨다. 이미 백담호의 것은 완전히 발기해 해인의 엉덩이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조금만 방향을 틀면 그대로 들어갈 듯한 아슬한 위치였다.
“아……. 백담호….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찌꺽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엘리베이터 안에 퍼졌다. 손가락을 벌릴 때마다 드러나는 붉은 내벽에 백담호는 속이 지독하게 들끓는 것을 느꼈다. 몸 안의 모든 액체가 증발해 버릴 듯 열이 났고 자꾸만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이제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마저 후끈하게 달아올라 숨을 깊게 쉬어 봤자 소용이 없었다.
“하…. 해인아. 넣을게.”
“흐, 벌-!”
벌써 넣냐고, 차마 묻지도 못하고 해인은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훨씬 두껍고 뜨거운 것이 여린 속살을 가르고 파고들어 왔기 때문이다.
“후우……. 하아…. 미친.”
강하게 성기를 압박하는 내벽에 사정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짙은 사정감이 몰려올 것 같았다. 해인의 허리를 움켜잡고 백담호는 천천히 허리 짓을 시작했다.
한 번에 치고 들어온 살덩이가 스르르 뒤로 움직이니 해인은 미칠 것 같았다. 빠져나가는 좆과 밀접한 내벽이 마찰할 때마다 배 안이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퍽, 반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깊숙한 곳까지 한 번에 파고들며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하윽…!”
착각인지 평소보다 더 깊숙하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은 아슬한 그 경계까지 닿은 것 같아 해인이 뒤를 돌아보며 백담호를 향해 도리질을 쳤다.
“담호, 담호야…. 잠시, 잠시……. 이상해…. 오늘은 이상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줄도 모르고 해인이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아무 방해물도 없이 직접적으로 닿은 살이 며칠 전보다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해인의 성기도 빳빳하게 서서 프리컴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배 안이 이상하게 뜨거웠고 제 좆은 미칠 듯이 간지러웠다.
“으흣…. 아으…….”
참을 수 없는 감각에 해인이 허리를 잘게 흔들며 제 성기를 감싸 잡았다. 마치 허공에 허리 짓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행동에 백담호는 기가 찬 듯 실소를 터뜨렸다. 눈가를 발갛게 붉히고 하얀 엉덩이에 제 좆을 꽂은 채로 좆질이라도 하려는 모습에 숨이 가빠 왔다.
“그래, 너도 알파였지……. 맞아…. 그랬지….”
백담호가 혼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제정신인 해인이 들었더라면 지금 비꼬는 건가 싶을 발언이었지만 현재의 해인에게는 백담호의 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백담호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해인이 알아서 허리를 앞으로 뺐다 뒤로 물렸다. 벌써부터 완전히 흥분에 절어 넋이 나간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열띤 미소를 그린 백담호가 해인의 니트를 벗겨 버렸다. 노출된 등조차 조금 붉은 빛을 띠었다. 그 빛깔이 탐스럽게 느껴져 백담호는 이를 세워 날개뼈 위를 콱 씹었다.
조금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함께 해인이 백담호를 쏘아봤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사정감이 몰려오는지 해인은 달뜬 소리를 흘렸고 내벽이 강하게 수축했다가 팽창하기를 반복했다.
같이 자극이 되는 성기에 백담호는 한 번 더 해인의 살갗을 씹다가 자위하는 해인의 손을 잡아 빼내었다. 그리곤 양손을 벽에 결박하듯 붙잡았다.
“해인아, 좆질은 이따가 내 손에다가 실컷 하자…, 응?”
그렇게 깔짝깔짝 움직이지 말고.
* * *
온몸이 성감대라도 된 것만 같았다. 내벽은 난폭하게 파고드는 성기를 이제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들어올 때면 힘을 풀었고 뒤로 빠져나갈 때는 아쉬운 듯 꽈악 조였다. 퍽퍽, 셀 수도 없이 부딪히는 엉덩이에서 통증보다는 묘한 쾌감까지 일었다.
아, 흐읏, 흐윽, 끝맺지 못한 음절들만이 입에서 튀어나올 뿐이었다. 머리가 완전히 쾌락에 절여져 벽에 빈틈없이 맞닿은 피부가 뜨거운지 차가운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부푼 귀두가 통통 부어오른 극점 위를 할퀴듯 긁고 내려갈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이미 한 번 내벽에 뿌려진 정액이 담호가 추삽질을 할 때마다 흘러나와 질척하게 해인의 허벅지에 흘러내렸다. 해인은 몸이 절로 파르르 떨렸고 질식할 정도로 가득한 백담호의 페로몬에 숨까지 턱턱 막혀 왔다.
“으응, 하으…. 응…!”
벌써 몇 번이나 갔는데 또다시 짙은 절정이 몰려왔다. 달아오른 내벽이 잘게 경련하며 들어오는 성기를 반기듯 꽈악 조여들었다. 생각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오직 쾌감만 떠올랐다. 다리에 자꾸만 힘이 풀려 해인이 몸을 비틀거리자 백담호는 그를 더욱 벽으로 밀어붙여 허리를 치댔다.
“흐으윽….”
쿵쿵쿵, 아래에서 맥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전립선 부근만 집요하게 쳐올리는 선단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가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겨우겨우 내뱉으며 퍽퍽 치대는 백담호의 몸을 해인이 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백담호는 더욱 몸을 밀착했다. 열기에 눅눅해진 해인의 목덜미를 백담호가 무의식적으로 씹으며 해인의 가슴과 배를 손으로 꽈악 감싸 끌어당겼다. 백담호의 코끝으로 미세하게 코튼 향이 느껴졌다.
“하아……. 좋아해, 해인아…….”
그 향이 마음에 드는지 백담호는 깊게 숨을 들이 마시며 허리를 느리게 뒤로 주욱 빼내었다가 단번에 깊은 곳까지 쑤셔 박았다. 수십 번을 짓눌린 극점이 또 한 번 거칠게 선단이 득득 긁고 올라가자 해인의 몸이 들썩였다.
벽을 겨우 짚고 있는 해인의 손이 드드득, 벽을 긁으며 곱아들었다. 눈물인지 체액인지 모를 액들이 해인의 아래로 뚝뚝 떨어지며 해인의 성기에서 말간 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몸이 간헐적으로 파르르 떨렸고 내벽 역시도 잘게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았다. 해인은 제 발 위로 떨어지는 수치스러운 액체를 느끼며 울상을 지었다. 멈추지 않는 쾌감이 괴로웠다. 눈앞이 번쩍번쩍거려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백담호의 허리 짓은 멈추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흐윽…. 담호, 야……. 잠깐…. 쉬자…. 응?”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지만 백담호는 들을 생각도 보이지 않았다. 해인이 울먹거리며 제 가슴과 배를 감싼 백담호의 손을 떨어트리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흐…. 아, 흐…. 죽을 것 같아…!”
허리만 움직일 줄 아는 짐승처럼 백담호는 강하게 추삽질을 하며 해인의 몸에 잇자국을 남겼다. 고통과 쾌감이 한데 뒤섞여 뭐가 뭔지 하나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해인이 버둥거리던 몸에 힘을 풀자 백담호는 더욱 거센 허리 짓으로 좆을 박아 넣었다. 안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해인의 몸이 맥없이 흔들렸고 귀두 끝만 남기고 쑤욱 빠져나간 성기가 깊숙이 박히고 얼마 가지 않아 뜨거운 정액이 배 안에 들이부어졌다.
백담호는 벌써 세 번째 사정이면서 처음과 똑같이 사정 시간이 길었다. 그만큼 꿀렁꿀렁 배 속을 채우는 양도 엄청나 해인은 울렁거리는 느낌에 헛기침을 했다.
“하아…….”
방금 사정을 한 탓에 꽈악 끌어안은 백담호의 팔의 힘이 약해졌다. 정말 죽을 것 같아 해인은 생존 본능으로 백담호의 팔을 떨쳐 내고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연타했다. 일단, 일단 이 엘리베이터를 벗어나야 했다. 그래 봤자 집 안이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해인의 부르튼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로 후욱 들어오고 해인이 달려 나가려 발을 뻗는 순간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발이 닿는 곳에 두식이가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다리를 틀은 탓에 해인의 몸이 기우뚱 옆으로 쓰러졌고 해인은 나직하게 “…씨발, 조졌다….”라고 중얼거렸다. 두식이가 야옹 울며 자빠져 바닥에 엎어진 해인의 머리통에 제 몸을 부볐다.
아직 하반신은 엘리베이터 안쪽에 있었다.
“해인아.”
해인이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으로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마자 몸이 뒤로 기울었다. 해인의 어깨를 뒤로 확 잡아당긴 백담호는 음산하게 말했다.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아까 줬잖아. 응?”
해인이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해인의 시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닫히는 게 보였다.
* * *
해인의 몸이 힘없이 추욱 늘어졌다. 백담호의 품에 안겨 해인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떨구고 우는 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흐읏……. 이거 싫어, 힘들어…….”
백담호는 해인의 양 허벅지를 받치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백담호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해인은 배 속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아직도, 해인의 엉덩이 안으로 흉흉하게 발기한 백담호의 성기가 꽂혀 있었다.
백담호는 미쳤다, 아까 가라고 할 때 갔어야 했다. 해인은 다시 오질 않을 기회를 떠올리며 후회했다.
아래는 이제 얼얼하기까지 했고 전신이 따가웠다. 백담호가 개처럼 물어뜯은 탓이었다.
“백…담호…. 개새끼…….”
네가 날 정말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내가 미쳤지. 그때 토꼈어야 했는데….
해인이 원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백담호의 어깨를 콱 씹었지만 제대로 된 잇자국도 남지 않았다.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인은 계속 백담호의 어깨에 이질을 했고 백담호는 간지럽다는 듯이 웃으며 해인의 볼 옆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떨어트렸다.
“침대 거의 다 와 가, 해인아. 아까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화 풀어, 응?”
“그럼 좆부터 빼고- 하윽…!”
해인이 몸을 퍼뜩 움직이다가 박혀 있는 성기가 크게 진동하면서 극점을 자극하고 말았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에 울컥한 해인의 성기에서는 이제는 맑은 액만 흘러나왔다. 절정에 파르르 내벽이 떨리며 강하게 수축했고 백담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해인의 엉덩이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놓기를 반복했다.
좆이 박혀 안긴 채 걸은 것도 모자라 허공에서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높이 몸이 들렸다가 아래로 쑤욱 내려가며 빠른 속도로 성기가 내벽을 가르고 박혔다. 몸이 추락하는 느낌 때문인지 정말로 꼬챙이에 꽂히는 것만 같았다.
푹푹, 파고든 성기는 백담호가 움직일 때보다 훨씬 마구잡이로 내벽 곳곳을 찔러 댔다.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아 해인은 다급하게 백담호의 목에 손을 둘러 끌어안았다.
구멍 안부터 엉덩이 골 가득 정액으로 더럽혀져 움직임에 막힘은 없었다. 오랜 시간 쑤셔진 내벽은 눅진하게 풀려 축축하고 기분 좋게 성기를 감쌌다. 하아, 백담호가 해인의 머리에 코를 박으며 옅은 향을 가득 들이마셨다. 찌꺽, 찌꺽 음란한 젖은 살 소리가 하반신에서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원망 어리게 쏘아보던 것이 무색하게 금세 쾌락에 젖어 흐느끼는 해인의 신음이 귀를 자극했고 유일한 버팀목이라도 되듯 자신에게 꽉 달라붙은 살갗이 마음에 들었다. 박으면 박을수록 이상하게 더욱 갈증이 일었다.
백담호는 해인의 목 언저리를 씹으며 점점 추삽질에 속도를 높였다. 계속 마찰되는 살갗에서 느껴지는 쓰라림마저 쾌감으로 느껴졌다.
“흐응, 흐아…. 아…흑……. 아 거기…. 으응…!”
여기 저기 난잡하게 쑤시던 좆을 조금 안쪽, 처음에 비해 방대하게 부푼 곳을 푹 찌르니 해인의 허리가 달달 떨렸고 고통 같은 쾌락에 손발이 곱아들었다. 모든 신경이 다시 배 안, 성기와 맞물리는 점막에 집중되었다.
더 이상 뱉을 것도 없는데 성감이 끝도 없이 느껴져 눈앞이 까맣게 깜빡이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철썩, 살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격해지기 시작했고 백담호는 속도가 붙고 나서야 자세가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드디어 침대 위로 해인을 내려놓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침대 시트가 흔들리는 해인의 몸과 함께 구겨졌다. 천장을 보고 누운 해인의 몸에 가득한 잇자국을 백담호는 만족스럽게 보며 자국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백담호는 해인의 온몸을 다 씹어 먹을 기세였는지 어깨부터 심지어 배 위까지 안 물은 곳이 없었다.
내 것이었다. 완벽한. 눈물로 짓무른 해인의 얼굴을 백담호가 혀로 핥으며 또 콱, 이를 세워 씹었다. 찌릿한 고통에 해인이 고개를 움츠리자 잇자국으로 울긋불긋한 쇄골을 씹었다. 백담호는 해인의 온몸에 제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제 좆을 받고 있는 이 존재를, 누구도 넘볼 수 없게끔. 철저하게 본능에 지배된 알파의 욕구였다. 빗장뼈 위를 실핏줄이 터지도록 씹다 허리를 잡은 손을 올려 바짝 서 있는 짙은 분홍빛 돌기를 강하게 꼬집었다.
“아흑……!”
해인의 허리가 들썩이며 몸이 꼬였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세게 꼬집었다가 손을 떨어트리니 유륜이 붉게 부어올랐다. 그 모습이 꼭 탐스럽게 익은 과실 같아 백담호는 입술로 쭙 빨아들였다. 콧속으로 옅고 단정한 향과 제 향이 섞여 스며드는 게 기분이 좋았다.
하…. 살면서 이렇게까지 흥분한 적은 없는데.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백담호가 생각했다. 돌기를 혀로 쿡쿡 찌르고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는 해인의 골반을 잡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렬한 성감이 몰려오고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뛰었다.
숨이 가빠진 백담호가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고는 해인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접합부가 더욱 밀착했고 성기가 내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백담호는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정신이 나갈 듯이 애타는 쾌감을 좇아 속도를 높였다.
이미 피멍이 들듯 붉어진 해인의 둔부를 거세게 때리며 백담호는 제일, 가장 깊은 곳까지 단번에 박아 넣었다. 들어오면 안 될 곳을 기어코 넘어선 성기에 해인이 고통과 함께 배가 타들어 가는 열감에 휩싸였다. 해인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그저 몸을 완전히 휘며 달달 떨었다. 속으로 또 정액이 부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 흐으……. 해인아, 하, 어떡해…. 내가 여기 다 망가트릴 것 같아…….”
미안해…. 이러면 안 되는데……. 쉽지가 않네. 온순한 척 사과를 건네면서도 백담호는 깊숙하게 박힌 좆을 빼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른 뱃가죽 위, 성기 모양대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곳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아…. 아아……. 뭔가……. 흐으윽……!”
배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단순히 부어지는 정액만은 아니었다. 배 안쪽에서 무언가가 부풀고 있었다. 헉헉, 누군가 숨구멍을 전부 막은 것처럼 해인은 아슬아슬하게 호흡을 하며 흔들리는 눈으로 아래를 쳐다봤다.
성기로 꽉 찬 배가 이미 부풀어 있었지만 조금 더 아래, 아랫배 쪽이 서서히 더욱 부푸는 게 눈에 보였다. 저기가, 왜 더 부풀어…? 한계까지 늘어난 내벽이 더욱 팽창하면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노팅이었다. 일반적으로 알파가 오메가에게 하는 그것.
경악에 찬 해인이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나른한 눈을 하고 있는 백담호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너…. 너…. 너 이 미친 새끼!”
지금 나한테 뭔 짓거리를…!
믿지 못할 백담호의 행동에 아픈 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지르던 해인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아래가 정말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해인이 격렬하게 버둥거리자 백담호는 다정하게 해인을 끌어안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쉬이…. 해인아. 지금 그렇게 움직이면 다쳐.”
“아흐…. 아, 백담호…. 이 발정난 개새끼…. 아파, 흑…. 아프, 다고!”
언제까지 커질 건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기둥의 아랫부분이 내벽을 벌리는 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아무리 열성 알파라고 해도 오메가는 아니었다. 당연히 노팅을 무리 없이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걸, 백담호가 지금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이미 배 안을 가득 채운 정액이 출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몸이 정말 반으로 똑 쪼개질 것 같은 통증과 두려움에 해인이 목 놓아 울자 백담호는 달래려 해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을 쪽쪽 문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한번 시작된 노팅을 멈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서럽게도 우는 해인이 안쓰럽고 미안했지만, 그와 동시에 타오르던 갈증이 점차 해소되어 만족감도 같이 느껴졌다.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자 백담호는 해인을 강한 힘으로 끌어안았다. 우는 것도 지쳤는지 해인은 훌쩍거리며 매가리 없는 손으로 백담호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간지럽지도 않은 주먹질을 백담호는 얌전히 맞으며 땀에 절어 있는 해인의 이마에 코끝을 문질렀다.
전부 부푼 성기에 서서히 익숙해져 갈 때 즈음 해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난……. 곧 죽을 거야…….”
분명해…. 벌써 황천길이 보이는 것 같아……. 범인은… 백담호… 개새끼…. 다시 태어나거든 백담호 뒤부터… 뚫을 거야…. 내가….
살기 가득하게 중얼거린 해인은 마치 꿈을 꾸듯 흐려진 눈으로 백담호의 가슴팍을 보다 까무룩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이 까만 허공을 부유하는 것 같다. 몸이 지나치게 뜨거워 뼈마저 녹아 버린 것 같았고 입에서는 쇳소리같이 다 쉰 흐느낌이 막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탱탱 부어오른 눈을 힘들게 뜨니 커다란 창 너머로 깜깜한 하늘이 보였다. 멍하니 그걸 보던 해인은 밤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깼어, 해인아?”
뒤에서 낮은 백담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인이 느리게 뒤를 돌아 올려다보니 백담호의 게슴츠레 떠진 눈과 마주쳤다. 이상하게 몸이 자꾸 흔들려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 멀미가 날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지끈 아파 와 해인은 다시 고개 앞으로 돌리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 * *
백담호는 책상 서랍에서 억제제를 꺼내 5알을 입에 털어 넣고 생수 한 병을 벌컥벌컥 전부 다 들이마셨다. 벽에 걸린 시간을 보니 벌써 새벽 4시였다. 몇 시간째 한 건지, 백담호는 멍해진 눈으로 시간 계산을 하다가 그만뒀다. 몇 시간을 했든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갖 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침대 위에서 해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백담호는 빈 페트병을 아무렇게 바닥에 던지고 새 물병을 꺼내 들고 침대로 걸어가려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진동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러트 때만 되면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날이 섰다. 평소라면 넘길 사소한 것들도 쉽사리 넘길 수가 없었다.
백담호가 웅웅, 울리는 소리를 따라 걸어가니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버튼을 눌러 문을 여니 짙은 냄새가 화악 풍겨 나왔다.
“…난리 났네.”
백담호는 엘리베이터의 풍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안은 난장판이었다. 바닥에 허연 정액이 이리저리 묻어 있었고 작은 물웅덩이까지 있었다. 그 위에 아무 곳에 널브러져 있는 옷 무더기 사이에서 징징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백담호가 고개를 가볍게 젓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인의 니트와 바지가 있는 옷 무더기를 뒤적이니 휴대폰이 잡혔다. 해인의 것이었다. 그리고 떠올라 있는 이름은 ‘강서준’이었다. 백담호는 고민도 없이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해인 씨, 어디예요?]
강서준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해인 씨?]
“백담호입니다.”
아, 하는 탄성 뒤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백담호는 강서준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 알기에 해인이 제집에 있다는 걸 말해 주려는 순간 멈칫했다. 지금은 새벽 4시였다. 아무리 방해인이 연락이 안 되었다고 한들, 애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부터 방해인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긴 했어도 그때는 친밀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러게 방해인은 왜 갑자기 맹해져서는…. 백담호는 가볍게 혀를 찼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끊겠습니다.”
백담호는 친절한 설명 대신 딱딱하게 말하며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미 자신이 받았으므로 강서준은 방해인이 어디 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방해인은 은근히 주변에 사람이 없었는데,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다 속내가 시커멨다.
성격이 개차반이었을 때도 이상한 것들이 꼬였는데, 예전에도 지금 같은 성격이었다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백담호는 휴대폰을 다시 옷 무더기 위에 던져 놓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해인이 갑자기 자신을 대하는 행동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아마, 이런 관계는 절대 될 수 없었겠지. 방해인이 그토록 자신을 싫어했는데. 그런데 사람 마음이 이리도 한순간에 변할 수 있었던 것인가. 백담호는 왜 마음이 바뀌었냐는 질문에 곤란한 듯 아무런 말도 못 하는 해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백담호는 침대 위에 곤히 잠든 해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몇 시간 동안 울어 퉁퉁 부어 있었다. 음, 소리를 흘린 백담호는 눈썹을 까딱이고는 해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방해인이 무엇을 숨기든, 방해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러니 된 거다. 그거면 된 거다. 힘을 주어 볼을 문지르는 데도 해인은 반응이 없었다.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대니 미약한 숨결이 느껴져 안도했다. 백담호는 침대로 올라가 해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려 눕혔다. 드러난 둔부는 매라도 맞은 것처럼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이제 와 미안해진 것일까, 백담호가 엉덩이를 살살 문지르다 주룩, 흘러나오는 백탁액에 목울대를 일렁였다.
힘을 주어 옆으로 벌리니 퉁퉁 부어올라 있는 입구가 채 다물어지지 못해 벌렁거리고 있었다. 붉은 속살이 움찔거릴 때마다 줄줄 흘러나오는 유백색 액이 음란했다.
쯧, 혀를 찬 백담호가 어느새 다시 힘이 들어가고 있는 제 성기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낮게 한숨을 쉰 백담호는 움찔거리는 입구 주위를 뭉근하게 꾸욱 눌렀다. 부어오른 입구가 쓰라린지 작게 고통 어린 소리가 들렸다.
끊임없이 나오는 정액을 입구 주위에 펴 바른 백담호가 손가락 두 개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열이 나 뜨겁고 눅진한 내벽이 들어온 이물질을 밀어내려 꾸욱 조였다. 가위질을 하듯 손가락을 벌리니 파르르 해인의 허리가 잘게 떨리며 몸을 휘었다. 아무것도 바르지도 않았는데 내벽을 휘젓는 손가락이 그새 진득거리는 게 느껴졌다. 제가 잔뜩 쏟아부은 것들이었다.
손가락을 빼내니 춥, 물소리가 났다. 정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해인의 골반, 허리, 옆구리를 쓰윽 훑었다. 가빠지는 호흡에 백담호가 옆에 누워 해인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 안으로 꼿꼿하게 선 제 것을 비집어 넣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더 넣었다가는 정말 아래가 망가질 것 같았기에, 여린 허벅지 안쪽 살에 좆을 문지르는 것으로 백담호는 만족했다. 사실 다시금 따끈하게 성기를 감싸던 속을 마구 들쑤시며 듣기 좋게 우는 신음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방해인이 다시는 저를 안 볼 것 같아, 참았다. 허리를 잘게 움직이며 해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니 완벽하게 제 향만 났다.
후우, 후우….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백담호가 해인의 한쪽 손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다른 쪽에 비해 유독 잇자국이 가득한 손목은 처참해 보였지만 그게 마음에 들었다. 멍이 들 게 분명한 손목을 혀로 핥아 올렸다. 감히, 제 것에 흔적을 남긴 놈을 생각하니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지나치다 페로몬을 묻혀 왔겠거니 넘겼다. 백담호가 알기론 해인의 근처에 있는 형질인이라곤 알파인 방해인의 형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도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서해빛. 방해인의 손목에서 나던 향은 분명 서해빛의 것이었다. 그것도,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허, 시발….”
아무리 서해빛이 억제제를 잘 챙겨 먹었더라고 해도 지금까지 감쪽같이 모를 수 있는 일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없는 녀석이었다. 방해인이 예전에 좀 잘해 줬다고 아직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꼴부터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페로몬과 성욕을 어느 정도 해소한 탓일까, 드디어 억제제 약발이 도는 것 같았다. 백담호는 이제 성욕보다 피곤함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해인의 허벅지 사이에 비비던 성기가 드디어 힘이 빠진 게 느껴졌다. 제대로 사정하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수그러든 성욕이 찝찝했지만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백담호는 해인을 꽈악 끌어안은 채 마침내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