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3. 잊혀진 주인공(2) (13/17)

13. 잊혀진 주인공(2)

해인이 눈을 번쩍, 떴다. 피로가 조금 풀려 정신이 돌아온 덕분인지 정신을 놓기 전의 시야보다 훨씬 선명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좋아진 건 그것뿐이었다. 몸은 끓어오를 듯이 뜨거웠고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니 환한 대낮이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보며 해인은 자신이 살아 있음에 안심했고 드디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행위가 끝났음에 안도했다.

러트 기간이 평균 이틀이고 게다가 우성의 경우는 더 길다고 들었다. 그래서 약을 털어 넣지 않으면 밥이고 뭐고 밤낮으로 붙어먹기만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건가, 지난번 러트 때는 백담호가 이틀 만에 모자를 주러 오기도 했었지.

하긴 어떻게 며칠 내내 밥도 안 먹고 떡을 치겠어. 어찌 되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해인은 느릿느릿 몸을 완전히 창문 쪽으로 돌려 누웠다. 계속 한 자세로 있으니 몸이 배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따 백담호 일어나면 밥부터 먹자고 해야겠다, 하고 평화로운 생각을 하던 해인이 몸을 흠칫 떨었다.

“백담호.”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아 바람 빠지는 소리만 들렸다. 해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백담호는 언제 깬 건지 흐물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 허벅지 사이로 딱딱하고 뜨거운 것이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전혀 잘못 듣지 않은 것 같다.

해인이 멍한 눈으로 불그스름한 하늘을 바라봤다. 얼굴이 금요일과 다르게 푸석 지쳐 보였다. 저건 지는 해일까, 뜨는 해일까.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점점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가는 게 지는 해였나 보다. 궁금증을 해결한 해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생수병을 들어 입에 대고 물을 흘려보냈다. 분명 입 안을 축여야 할 물이 뚝뚝 턱을 타고 흘러 해인이 허벅지를 베고 곤히 자고 있는 백담호의 옆얼굴을 적셨다.

“음….”

차가운 감촉이 싫은지 백담호는 몸을 바르작거리며 해인의 배 쪽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세상 만족스럽게 자고 있는 백담호를 해인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해인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어코 손바닥을 번쩍 들어 올려 백담호의 머리통 위를 후려갈기려 했지만 결국 막판에 힘이 풀려 가볍게 머리 위에 손이 얹어졌다.

“…이 시팔.”

해인은 다 쉬어 바람 빠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백담호의 머리를 토닥였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해인을 붙잡을 백담호가 왜 가라고 기회를 준 건지 해인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마 2층에 정사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을 게 분명했다. 다시는 러트를, 그것도 우성 알파의 러트를 만만하게 보지 말자고 해인은 속으로 다짐했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며 해인은 넋 놓고 백담호를 내려다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저게 언제 저렇게 올라갔지? 마지막으로 봤던 수치가 정확히 얼마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점점 참기 힘든 피곤이 몰려왔다. 해인은 결국 생각을 멈추고 그대로 눈을 스르르 감았다. 무언가 생각하기엔 몸이 너무 지쳐 버렸다.

[설정 조정 중 64%]

[호감도 82]

* * *

백담호의 러트는 완전히 끝이 났고 그동안 해인이 연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서준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후에 몇 개의 부재중과 수신되어 있는 한 개의 목록을 보고 백담호가 받았구나 하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강서준은 아무래도 자신이 민망할까 봐 모르는 척을 하는 듯싶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이제는 별 탈 없이 시간이 흘러가길 해인은 바랐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형 안녕하세요”

전에는 이렇게 자주 마주친 적이 없었거늘, 벌써 3일째 서해빛과 계속 한 번 이상은 마주치고 있다. 해인이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심스러운 해인의 눈초리에 해빛은 그저 웃으며 ‘요즘 자주 보네요.’라고 여상하게 말할 뿐이었다.

백담호가 한 걸음 내디뎌 해인의 시야를 반쯤 가렸다. 서해빛의 머리카락만 겨우 보이고 얼굴은 백담호의 몸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화 하나 오가지 않았지만 해인은 보이지 않는 백담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알았다. 서해빛과 마주칠 때마다 백담호의 표정은 늘 똑같았으므로.

백담호는 서해빛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날 벼리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전부터 백담호가 서해빛을 싫어하는 티를 냈지만 요즘은 그 깊이가 다르게 느껴졌다. 전에는 ‘나 쟤 싫어! 놀지 마!’ 이런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죽인다.’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 백담호가 아직 자신을 싫어할 때보다 더 살벌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서해빛도 웃는 낯으로 피하지 않아서 그런가 분위기는 가만히 있는 자신까지도 긴장될 정도로 형형했다. 처음에는 싸움이라도 날까 조마조마했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서해빛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지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빛이 말도 없이 백담호를 지나쳐 갔고 그제야 백담호의 기세는 한결 누그러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백담호가 서해빛를 경계하는 건 해인도 이해가 가긴 하지만 이 정도로 굴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서해빛하고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건 백담호인데 말이다. 아니면 딱히 저거 말고도 서해빛이 백담호에게 무슨 죄라도 지은 걸까.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자, 해인아.”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백담호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해인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해인이 빈틈없이 밀착하자 그의 머리통에 백담호는 코를 박고 개처럼 킁킁거리듯 냄새를 맡았다. 요 근래 백담호가 자주하는 행동이었다. 뭔 짓인가 싶어,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만 백담호는 그저 그냥 냄새가 좋아서라는 말을 뱉을 뿐이었다.

최근에 바꾼 샴푸 향이 좋은 걸까. 그런데 그거 바꾼 지 좀 되었는데. 길거리의 사람들 시선은 보이지도 않는지 한참을 킁킁거리던 백담호가 드디어 코를 떨어트렸다.

해인은 그사이에 바로 백담호의 머리 위를 흘겨봤다.

[설정 조정 중 75%]

[호감도 82]

75%….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백담호의 설정 조정 중 수치가 5단위가 될 때마다 서해빛을 마주친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아닌 것 같다. 항상 5단위가 된다고 마주치진 않았다. 아마도 장소의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캠퍼스에서 5단위가 되면 서해빛이 나타났다. 마치 정해진 흐름처럼. 캠퍼스 어디에 있든. 전에는 공과대 뒤편, 사범대 입구, 심지어 화장실 앞에서까지. 저 설정 조정 중이 미치는 영향은 서해빛과 백담호, 그리고 자신이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해인이 백담호의 머리 위를 심각하게 노려봤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해인아, 뭘 그렇게 봐.”

내 머리에 뭐라도 묻었어? 백담호가 제 머리를 스윽 털어 내며 물었다. 의아한 시선에 해인은 아무 말이나 뱉었다.

“어…. 그냥. 서해빛하고 요즘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서.”

서해빛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백담호의 눈썹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서해빛이 사라지고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다시금 뻣뻣하게 경직되는 게 스멀스멀 느껴졌다. 말없이 까만 눈동자가 해인을 들여다봤다.

“해인아.”

평소와 같은 목소리인데 해인은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으응?”

“서해빛하고 눈도 마주치지 말고, 이름도 부르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그 새끼가 뭐라고 하던. 어깨를 감쌌던 손이 해인의 목폴라 속에 손을 넣어 목 언저리를 주물렀다. 백담호는 자신이 피멍이 들도록 씹어 놓아 아직도 자국이 남은 해인의 목덜미를 하나하나 건드렸다. 단순한 접촉이라고 하기에는 위협적인 기분이 느껴져 해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백담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목폴라 속에 넣었던 손을 빼내어 다시 해인의 어깨를 감쌌다. 해인이 조심스럽게 옆을 흘겨봤다.

[설정 조정 중 76%]

또 다른 문제는, 저 숫자가 자신과 있을 때 더 빠르게 올라가는 것 같았다는 점이었다.

* * *

백담호가 서해빛과 눈도 마주치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고 한 지 겨우 하루 지났을 때였다. 해인은 서해빛과 단둘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백담호는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를 떴고, 해인은 배가 고파 백담호에게 문자를 보내 놓고 편의점에 들른 참이었다.

음료수를 고르던 해인이 손을 뻗은 채 굳었다.

“네가 왜 여깄어…?”

“편의점에 왜 있겠어요.”

해인이 집으려던 오렌지 주스를 해빛이 집어 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왔겠지, 맞는 말이긴 한데. 해인은 그동안의 서해빛과의 잦은 마주침으로 인해 이 상황이 꺼림칙했다.

서해빛의 머리 위를 한번 흘겨봤다.

[설정 조정 중 39%]

[호감도 74]

설정 조정 중 창이 처음 나타났을 땐 서해빛의 수치가 더 높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백담호가 훨씬 더 높았다. 역시 설정 조정 수치는 자신과 붙어 있을 때 빠르게 오른다는 추측이 맞는 건가.

“너.”

“네?”

“넌 요즘 이상한 일 같은 거 없어?”

백담호 옆에는 항상 있으니 그의 변화를 눈치채기 쉽지만 해빛은 알 수 없었기에 떠보듯 물었다. 아무런 일도 없다고 대답한다는 예상과 달리 서해빛은 잠시 뜸을 들였다.

설마, 무슨 일이 이미 생긴 건가.

“왜, 무슨 일-.”

“아니요, 없어요.”

뜸 들였던 것과 달리 단호한 대답에 해인이 미심쩍게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들고는 홱 서해빛을 지나쳐 카운터로 갔다. 자기가 멀쩡하다는데… 괜찮겠지. 게다가 아까부터 서해빛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백담호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아 그가 없는데도 초조함이 느껴져 더욱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계산을 하고 나오고 나서도 서해빛은 해인의 옆에 붙었다. 해인이 왜 따라오냐는 듯 못마땅하게 쳐다보니 서해빛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형, 저도 형하고 같은 강의 듣잖아요.”

그 말에 해인은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맞다, 서해빛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서해빛하고 나란히 강의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백담호에게 절대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왠지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에 해인이 가던 길을 멈췄다.

걸어가던 해빛이 뒤를 돌아봤고 해인은 모르는 척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곧바로 서해빛이 해인의 옆에 따라붙으며 걸어갔다.

“왜 따라와.”

“그러는 선배는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화장실 갈 거야, 따라오지마.”

“때마침 저도 가고 싶네요.”

“어떤 새끼가 화장실을 같이 가, 넌 다른 화장실 가!”

“화장실 형이 전세 냈어요? 같이 좀 써요.”

끈질기게 들러붙는 해빛을 결국 떨어트리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따라온 해빛에 해인이 밭은 숨을 몰아쉬며 황당하다는 듯이 쏘아봤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 한 명이 썩 좋지 못한 분위기에 후다닥 손을 씻고 나갔고 화장실에는 해인과 해빛만이 남았다.

“너… 내가 너한테 개쓰레기 짓 했는데도 왜 이러는 거야?”

해빛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다시 치켜뜨며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해인의 주머니에 있던 폰이 지잉지잉 울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탓인지 평소에는 잘 인지도 못 하는 진동 소리가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가 싶었다. 휴대폰을 꺼내서 보니 백담호였다.

시간을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해인이 해빛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머릿속으로 어느 수가 더 최악일까를 고민했다. 받았다가 서해빛과 함께 있는 걸 들키는 것과 안 받았다가 백담호가 왜 안 받았냐고 살벌하게 말하는 것 둘 중….

서해빛만 입 다물면 무사히 넘어가는 게 베스트였다. 해인이 고민하다가 해빛에게 검지를 입에 대자 해빛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왠지 해인은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어 해빛에게 조용히 하겠다는 확답을 얻었고 나서야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해인아, 오렌지 직접 갈아서 만들어 와? 왜 이렇게 안 와. 어디 편의점이야.]

“아, 나 잠시 문과대 화장실 들러-.”

“제가 생각보다 더 형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요.”

해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해빛은 짓궂게 웃고 있었고 휴대폰 너머로 백담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해인은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살얼음 서린 정적에 해인이 굳어 버렸고 얼마 가지 않아 휴대폰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방해인, 어디야.]

뚝-

놀란 해인이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너…. 너 이 새끼….”

해인의 원망 어린 눈초리에도 서해빛은 방긋 웃고 있었다.

“물음에 대한 답이 이제 생각나서요.”

왠지 불안하더니. 왠지 서해빛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더니!

서해빛이 그동안 백담호의 전화를 못 받게 한 적은 있어도 받았을 때 이렇게 방해한 적은 없었기에 방심해 버렸다. 감을 믿었어야 했다. 뻔뻔하게 웃는 낯에 해인이 뭐라고 화를 내려는 찰나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말했잖아. 나 쓰레기 한다고. 잊었어?’

“제가 말했잖아요. 나 그냥 쓰레기 한다고. 잊었어요?”

이게 무슨. 해인은 벙찐 얼굴로 해빛을 바라봤다. 지금 제 머릿속에서 대뜸 떠오른 문장을 서해빛이 완전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하게 말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해인은 위화감이 들었고 저절로 시야가 화장실 문 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백담호가 나타났다. 해인은 놀랐고 서해빛은 그런 백담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아,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냄새도 잘 맡으시고…. 좀 개 같네요.”

백담호가 노려보자 서해빛은 “욕 아니고, 정말 멍멍이.”라고 말하며 비죽 웃었다.

“입 다물어.”

백담호는 서해빛을 노려보다 해인에게로 다가왔고 해인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백담호가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그가 올 타이밍을 정확하게 예측한 자신이 놀라웠다. 나는 이 장면을 알고 있다. 어렴풋이. 마치 데자뷔 같은 이상한 기분이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고 곧이어 어떠한 장면을 서술한 글 같은 게 어지러이 해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전화가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문이 열렸다. 백담호였다. 해빛은 놀란 채 눈을 크게 떴고 두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방해인은 벽에 몰아붙여 밀접해 있는 서해빛과 자신의 모습을 더욱 노골적으로 백담호에게 보이려는 듯 비소를 머금었다.

“빨리도 왔네.”

“씨발, 무슨 짓거리야.”

무슨 짓이긴, 흐트러진 해빛의 옷 틈새로 방해인이 손을 집어넣어 희롱하듯 매끄러운 살갗을 훑다 바짝 서 있는 돌기를 건드렸다. 불과 어제까지 백담호에게 시달렸던 해빛의 몸은 아직도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어 소름이 돋았다. 흣, 해빛이 신음을 흘리며 파르르 몸을 떨자 백담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방해인, 네가 뒤지고 싶지, 아주.”

“너야말로, 이렇게 네 좆같은 냄새로 애를 절여 놓으니까 내가 참을 수가 없잖아.”

그냥, 가지고 노는 거라며. 같이 좀 놀자. 악랄해 보이는 해인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방해인은 자빠져 바닥에 뒹굴었고 백담호는 거칠게 서해빛을 제게 끌어당겼다.

“한 번만 더, 이런 짓거리 하면 네 명에 못 살고 뒤지는 줄 알아.”

백담호는 방해인에게 사납게 으르렁거리고는 서해빛을 끌고 나갔다. 눈물 자국이 가득한 해빛은 바닥에 넘어져 있는 방해인을 원망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서해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린 방해인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나 쓰레기 한다고. 잊었어?”』

이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도 뭣도 아닌 소설 <그레비티>의 내용이었다. 해인은 그제야 최근에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가끔 서해빛이 하는 말이 마치 어디서 본 것만 같이 느껴졌던 게 무엇인지. 이건 전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레비티> 속 대사와 장면이 비슷했던 것이었다. 일순간 해인은 뇌가 정지하는 게 느껴졌다.

공략에 실패해 기억을 잃었을 때 게임시스템은 방해인에게 <그레비티>에 빙의되었다는 설정과 대략적인 줄거리와 세부적인 정보만 입력했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책을 보는 것처럼 장면이 떠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시스템이 소설 전체적인 스토리를 모두 주입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것도 설정 조정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 개 맞나. 하긴 묻혀 놓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계속되는 서해빛의 비아냥을 백담호는 무시하고 멍한 해인에게로 걸어가 손목을 낚아챘다.

“따라와, 방해인.”

“아.”

강한 힘에 해인이 본의 아니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흘리자 서해빛이 얼굴을 찌푸리며 백담호의 손을 쳐 내려 했다. 하지만 밀쳐진 건 서해빛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까만 눈이 서해빛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적당히 해.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뭘 적당히 해요, 언제는 방해인하고 잘해 보라면서요.”

백담호는 해빛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그래서 이제 한번 잘해 보려고요.”

“이 새끼가.”

서해빛의 멱살이 우악스럽게 잡혀 끌어 당겨졌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백담호의 얼굴에도 서해빛은 무감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큰일이 날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방해인은 어떤 행동을 취하지도 못하고 굳은 채 그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아직 왜 <그레비티>의 내용과 현실이 겹치는 건지 제가 제대로 기억하는 건 맞는지도 파악하지 못해 해인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시발, 네가 먼저 방해인 걷어차 놓고 이제 와서 왜 이렇게 꼴사납게 굴어.”

“그럼 그렇게 싫어하다가 방해인이 잘해 주니까 바로 좋다고 꼬리치는 건 안 꼴사납고?”

쿵, 멱살을 잡은 백담호가 서해빛을 벽 쪽으로 밀치듯 놓아 버렸다. 타일 벽에 부딪힌 서해빛이 자빠졌다. 어지러웠던 해인의 정신이 큰 소리에 번쩍 깨어났다. 넘어져 있는 해빛의 모습에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고개를 바로 뒤로 약간 돌린 백담호와 눈이 마주쳐 움찔거리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살기를 감추지 않은 두 눈이 자신이 앞으로 나가면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될 거라는 걸 알려 줬다. 해인도 그제야 일단 현재 상황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는 걸 깨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당장이라도 서해빛의 얼굴에 주먹을 꽂을 것 같던 백담호는 해인이 뒤로 물러나자 팔을 내렸다.

“이제 좆도 관심 없다는 사람한테 들러붙는 것보단 덜 꼴 사납지. 안 그래?”

백담호가 다시 고개를 돌려 해인을 쳐다봤고 해빛의 시선 역시도 해인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일제히 제게 향한 집요한 시선에 해인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안해 보이는 백담호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서해빛에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던 목소리와 달리 눈은 간절하게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잡힌 손목에 더욱 힘이 들어가 이제는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응, 꼴사납네….”

해인이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다 뱉고 나서야 해인의 시선이 서해빛에게로 옮겨 갔다. 입을 꾹 다문 채 올려다보는 옅은 눈이 괴롭게 일렁였고-.

[설정 조정 중 48%]

[호감도 69]

호감도가 순식간에 훅 떨어졌다. 눈앞에서 떨어지는 해빛의 호감도에 해인의 눈꺼풀이 티가 날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예전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해빛의 호감도가 훅훅 떨어지고 얼마 가지 않아 떠오른 경고 시스템창이. 해인의 표정이 복잡한 심경으로 가득해 백담호는 해인을 제게 끌어당겼다. 휘청거리는 몸과 함께 서해빛에게 고정되어 있던 눈길이 백담호에게로 향했다.

“방해인, 가자.”

해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담호가 먼저 앞서서 나가고 뒤따라 나가는 해인의 발걸음마다 서해빛의 호감도가 1씩 떨어졌다. 닫혔던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해인의 몸이 반쯤 나갔을 즈음이다.

“형, 정말로 형한테 저에 대한 어떤 것도 안 남아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가, 바라보는 시선이 자신을 향한 서해빛의 모든 게 애처롭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휘둘리기만 한 채 상처만 받은 서해빛. 해인은 더 이상 그에게 괴로움을 주고 싶지 않아 죄책감을 감추고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량하던 낯에 절망이 드리웠다. 해빛은 허망한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수그렸고 해인은 그런 그를 못 본 척 밖으로 나갔다. 쓰레기는, 자신이었다. 해인은 백담호의 손에 힘없이 이끌려 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해인의 귀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크게 울렸다.

[경고]

재공략 인물 서해빛의 <공략 실패> 두 번째 루트가 열리려고 합니다. 30시간 내에 서해빛의 마음을 풀어 주지 않으면 <공략 실패>가 됩니다. 재공략 실패는 처음보다 더 강력한 페널티와 리스크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29:59:48

새빨갛게 빛나는 시스템창에 해인의 발걸음이 멈춰 버렸다. 심장 박동이 머리 꼭대기까지 울릴 정도로 크게 쿵쿵쿵 빠르고 강하게 뛰기 시작했고 날카로운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처음보다 더 강력한 페널티와 리스크. 그 무엇보다 해인을 두렵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상황이기에 공포는 더욱 가증되었다. 동공이 두려움에 확장된 채 해인이 중얼거렸다.

“…가야 해.”

해인이 화장실 쪽으로 몸을 다급하게 돌렸지만 손목이 잡힌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이 붙잡힌 손목의 힘과 부딪혀 오히려 해인의 몸이 계단 쪽으로 기울어졌다.

“방해인!”

그대로 계단 아래로 떨어질 뻔한 해인을 다행히 백담호가 제 품에 안아 붙잡았다.

“정신 나갔어? 뭐 하는 짓이야.”

해인은 백담호의 품에 안겼지만 시선은 허공에 떠 있는 빨간 시스템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죽음이 드리우는 거 같아 목구멍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얼른, 서해빛에게 가 봐야 한다. 어떻게 마음을 풀어 줘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29시간이 해인에게는 29분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촉박하게 느껴졌다.

해인이 몸을 버둥거리며 연신 ‘가야 해, 이것 좀 놔.’를 반복했다. 게다가 처음보다 더 강한 페널티와 리스크라고 한다. 그전 페널티로 과거를 모두 잃었는데 이보다 더 강한 페널티를 해인은 예측할 수 없었다. 기억을 잃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이 들었고 그 불안은 설마 백담호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치달았다.

예측할 수 없었기에 더욱 두려웠다.

해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백담호는 혼란스럽게 해인의 안색을 살폈다. 해인의 눈동자에 분명 자신의 얼굴이 비추는 데 해인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백담호가 그 눈길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방해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진정해, 해인아.”

백담호는 해인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보게끔 했다.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백담호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해인이 몇 번 몸을 간헐적으로 떨며 눈을 깜빡이자 서서히 떨림이 잦아드는 듯했다.

해인은 곧게 자신을 마주하는 까만 눈을 계속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경고 알림에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버린 정신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해인의 안색이 한결 누그러졌다. 몸을 버둥거리는 대신 해인은 놓아 달라는 듯 자신을 붙들고 있는 백담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미안, 이제 괜찮아.”

안정된 해인의 음성에 백담호는 힘을 주었던 팔을 스르르 풀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둘에게 현재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인은 힐끔 시스템창을 쳐다봤다.

[남은 시간: 29:54:22]

그래, 아직 하루도 넘게 남았다. 일단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 불안감을 억누른 채 해인은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얼굴을 돌렸다. 백담호가 의심쩍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아파?”

“아…. 그건 아니야. 괜찮아.”

해인의 대답이 영 못 미더운지 백담호는 해인의 이마에 손을 살짝 얹었다. 평소보다 조금 차게 식은 체온이 느껴졌지만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해인의 얼굴을 살핀 백담호는 해인이 정말 괜찮아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화장실에서 살기 어리던 기세는 거의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일단 따라와.”

백담호가 해인에게 잡으라는 듯 손을 건넸지만 해인은 머뭇거리자 백담호는 말했다.

“수업은 이미 글렀어.”

“수업 때문이 아니라….”

“그럼?”

“그 갈 곳이….”

“어딜.”

지금 이 상황에서 서해빛에게 간다고 하면 그건, 아마 최악의 발언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땅하게 할 만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고 방금까지 백담호는 제게 화가 난 상태였다. 해인이 힐끗 백담호의 호감도를 살폈다.

[호감도 82]

그대로였다. 다행이었다. 내밀어진 백담호의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고 쳐다보는 눈동자의 빛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상황도 상황인지라 이대로 서해빛에게 가도 백담호가 뒤쫓아 올 것 같았다. 차라리 빠르게 백담호의 기분을 풀고 가는 편이 나을 성싶어 해인은 백담호의 손을 잡았다.

해인의 손이 닿자마자 꽈악 움켜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정하면서 살벌한 미소였다.

[남은 시간: 29:50:30]

* * *

차 안은 조용했다. 해인은 달갑지 않은 침묵에 괜히 창밖만 쳐다봤다. 백담호의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에 타는 순간까지 백담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인아.”

정적 속에 들린 부름에 해인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놀랐어, 정말.”

백담호는 앞을 쳐다보고 있었고 해인은 말없이 백담호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좌측 위쪽에 떠 있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별일 아니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가 오피스텔로 보이는 건물 주차장에 세워지고 나서야 “그렇구나.”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해인이 고개를 돌렸다.

[호감도 80]

백담호의 호감도가 떨어져 있었다.

“…왜.”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에서 눈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백담호의 호감도가 떨어진 적은 별로 없었기에, 자신이 어떤 실망스러운 짓을 해도 괜찮다는 듯 떨어지지 않는 호감도였기에, 해인은 백담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호감도만 쳐다봤다.

“…해인아, 또 어딜 봐.”

내려. 백담호는 그 말만 남기고 먼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해인은 어쩐지 냉정하게 보이는 백담호를 보다 그가 한 번 더 내리라고 말하고 나서야 내릴 수 있었다. 정신이 멍했다. 코 안이 약간, 지잉지잉 울리는 것 같았다.

약간, 그러니까, 약간 해인은 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의 상황으로 백담호의 호감도가 왜 떨어졌는지 이해는 갔지만 자신 역시도 이 상황이 싫기는 매한가지였다. 호감도가 2나 떨어졌다. 마이너스에서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오른 호감도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슴이 아팠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백담호를 해인은 죄지은 사람처럼 추욱 늘어져 터벅터벅 쫓아갔다. 떨어진 호감도가 보기 싫어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고개를 수그려 바닥을 보니 이제는 카운트 되고 있는 남은 시간이 해인의 숨통을 조여 온다. 벌써 1시간이 지났다.

푹, 땅만 보고 걷던 해인이 머리가 부드러운 곳에 닿았다.

“앞은 보고 걸어야지.”

고개를 들어 올리니 백담호의 손바닥이었다. 어느새 어느 집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문에는 ‘1801’라고 적힌 문패가 달려 있었다. 1801, 왜인지 낯익은 숫자였다. 백담호가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었다. 해인의 등을 밀어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해인은 멍한 얼굴로 깔끔한 오피스텔 내부를 훑었다.

1801호, 1801호….

『무채색 계열로 색을 완전히 빼앗긴 것만 같은 내부. 최소한의 가구들만 있는 삭막한 공간.』

“아.”

여기는…. 소설 <그레비티>에 나오는 백담호의 오피스텔이었다. 갑자기 여기가 왜 나와? 해인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도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백담호는 차 안에서와 다르게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학교 근처에 새로 구했어. 집이 너무 먼 것 같아서.”

해인이 대답 없이 보기만 하자 백담호는 말을 덧붙였다.

“바람이라도 좀 쐴 겸 방금은 좀 돌아서 왔어.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조금 안 되게 걸려.”

해인의 표정이 어딘가 묘해 백담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별로야?”

“아니…. 그건 아니고.”

해인이 한 번 더 집 안을 훑고는 “조금 놀랐을 뿐이야.”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백담호는 왜 놀랐냐고 묻지 않았다. 백담호의 오피스텔의 등장으로 확실해졌다. 지금 모든 상황이 소설 <그레비티> 속 내용과 비슷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조연은 이제 주연.

이 칭호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말 그대로였다. 나는, 그러니까 나 방해인은 지금 <그레비티> 속의 주연이 되고 있다. 그것도 원래 메인수인 서해빛과 자신의 역할이 뒤바뀐 채.

언제 들어간 건지 백담호가 그새 두식을 품에 안고 어서 들어오라는 듯 해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담호의 머리 위에 있는 ‘설정 조정 중’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설정 조정 중 87%]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해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오피스텔에 들어온 직후부터 방해인은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았다. 갑자기 집을 구한 일이 그렇게도 이상했던 걸까, 아님 여전히 제 눈치를 보는 걸까. 백담호는 일부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해인을 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드디어 해인이 주춤주춤 백담호의 곁으로 다가섰다.

영 어색하게 구는 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백담호는 두식이를 내려놓고 해인을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예전보다 조금 가벼워졌나. 마른 허리를 감싸 품에 가두니 그제야 날카롭게 일렁이던 감정이 진정되었다.

“어차피 학교 끝나면 같이 있는데 집이 너무 먼 것 같아서.”

원래 이렇게 데리고 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우울함을 담아 중얼거리니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게 마음에 들어 백담호는 퍽 애교스럽게 해인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볐다.

“방해인 조금이라도 혼자 두면 자꾸 다른 게 들러붙어서 걱정이야.”

부비던 머리를 떨어트리고 백담호가 해인을 올려다봤다. 나름 장난스럽게 말한 건데 방해인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시선이 불안정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너인걸….”

아까 차 안에서 너무 매정하게 대했나, 기가 죽은 듯 해인의 목소리는 웅얼거렸다. 결국 눈 녹듯 사르르 꼬였던 감정이 풀려 백담호는 흐드러지게 웃었다.

“알아. 해인아.”

그러니까 참고 있는 거야.

백담호는 뒷말을 삼켰다. 이미 풀이 죽어 있는 녀석에게 굳이 자신이 참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웃음을 보여 주니 방해인은 안심한 듯 살풋 미소를 같이 그렸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하면서 왜 정작 중요한 말들은 하지 않으려는 걸까.

제게 무언가 숨기려는 방해인을 보면 속에서 무언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뒤틀림은 방해인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원하면 원할수록 강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대해 주고 싶으면서 동시에 억압하고 겁을 주고 싶었다.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게 고립시켜 방해인에게는 자신만이 전부이게 하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이성을 넘어 차오른다.

좋지 못한 감정이라는 걸 백담호도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막기란 힘들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강렬한 충동이 불현듯 들 때가 많았다. 원래 제 성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나빴나 싶을 정도였다.

무릎 위에 고분고분하게 앉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해인을 백담호는 빤히 바라봤다. 연한 분홍빛의 뺨이 사랑스러웠고 은은하게 말려 올라가 있는 입매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그 누구도, 그 아무도 방해할 이가 없다면 방해인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며 웃고 제 이름만 부르며,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모든 걸 드러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방해인이 의지할 곳이 오직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고, 백담호는 생각했다.

해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백담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탓에 해인의 몸이 백담호에게로 밀착되었다.

“앗.”

백담호는 해인의 허리를 감싼 손을 내려 둔부를 주물렀다. 해인의 몸이 잘게 떨리고 해인은 푸욱 백담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자연스럽게 백담호는 해인이 입고 있던 패딩을 벗겨 내고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다 해인을 번쩍 들어 올려 소파 위로 눕혔다. 해인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백담호를 미세하게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 떠는 것 같기도 했고 은근하게 조르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시선이었다. 백담호가 해인의 한 손목을 붙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스르륵 아래로 내려간 옷 소매 안으로 붉고 파랗게 멍든 자국이 나타났다. 백담호는 그 자국에 잠시 멈칫거렸다. 아까 화장실에서 자신이 꽉 잡았던 손이었다. 이 정도면 꽤 아팠을 텐데 아무런 티도 안 냈다고. 복잡해진 신경으로 백담호는 해인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분노에 못 이겨 멍을 낸 자신에 대한 실망과 아팠을 텐데 말할 상황을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담아서. 또 미안함이 드는 이 순간에도 아까 해인이 계단에서 다급하게 어디를 가야 한다고 했을까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게 서해빛은 아닐까 하는 치졸한 의심이 드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백담호는 말없이 해인의 손목에 또 입을 맞췄다.

“해인아, 나 좋아하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해인은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곧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백담호가 한 번 더 물었다.

“나만 사랑하는 거지?”

“응, 당연하지.”

대답하는 방해인의 시선에 거짓은 없었다. 감정엔 거짓 하나 없는데 갈수록 어딘가 어긋나는 것 같은 건 왜일까.

“나도 사랑해.”

백담호는 대답하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 * *

깊게 잠들었던 백담호가 스르르 눈을 떴다. 오늘 처음 오피스텔에서 자는 건데도 해인이 있었기 때문인지,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푹 잠이 들었다. 백담호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지르며 다른 손은 해인이 있을 옆자리로 뻗었다.

바로 손끝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차가운 온도만 손에 맴돌았다. 느긋하던 백담호가 즉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해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해인은 급하게 아무 택시나 잡아탔다. 그리고 계속 상단에 자리 잡고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11:47:19]

이제 시간은 10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어찌 보면 널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서해빛의 마음을 풀어 주는 방법이 정확히 뭔지 모르기에 해인은 다급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저녁에 집에 간다는 이유로 나와 서해빛에게 가는 게 계획이었는데 백담호가 집요하게 몰아붙이는 바람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나왔다. 백담호가 일어나기 전에 못 올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문자도 남겨 두었다.

잠깐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좀 갔다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10분도 걸리지 않아서 택시는 서해빛이 일하는 카페 근처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찬 바람이 쌩 불어 해인은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급하게 나온다고 깜빡하고 겉옷도 안 입고 나와 버렸다.

해인은 서해빛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리고 곧이어 음성 사서함 안내음이 들렸다. 서해빛은 주말에도 일을 했지만 정확히 서해빛이 몇 시부터 시작하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시간을 살피니 아직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카페 오픈 시간이 9시였던가. 인터넷에 카페 상호를 쳐 봤지만 오픈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그 흔한 블로그 후기도 3년 전이 가장 최근 것이었다. 초조하게 해인이 서해빛에게 전화를 걸며 걷다 보니 어느새 카페 앞까지 도착했다.

건물 안은 아직 불이 꺼져 있었다. 해인은 유리문에 몸을 기대며 해빛에게 문자를 하려다 멈칫거렸다. 어제 그렇게 가 놓고 오늘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행동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서해빛의 감정이 상하면 어떡하지. 서해빛은 보기보다 자존심이 센 녀석이었다.

과거의 해인은 그걸 몰랐지만, 지금의 해인은 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카페 앞만 서성이며 손끝만 물어뜯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10분이 더 흘렀을 때 해인은 해빛에게 문자를 보냈다.

[방해인: 갑자기 이래서 미안한데 카페 몇 시에 열어?] 오전 8:41

전화는 안 받더니 보내자마자 ‘1’이 사라졌다. 역시 일부러 안 받은 것이었다. 그럼 답장도 안 하려나. 해인이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4분 뒤.

[서해빛: 왜요.] 오전 8:45

해인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방해인: 나 카페 앞이야.] 오전 8:45

이번에는 5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점점 줄어드는 시간에 해인이 한 번 더 문자를 보내려던 참이었다.

“왜 왔어요.”

해인의 앞으로 서해빛이 나타났다.

[설정 조정 중 58%]

[호감도 65]

해인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해빛을 쳐다봤다. 일단 만나야 할 것 같아서 왔지만 불과 어제 상처를 준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해인은 알지 못했다. 입만 멍청하게 벌린 채 벌벌 떨고 있는 해인의 모습에 해빛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으, 응.”

해빛은 카페 안에 들어가자마자 난방을 틀었다. 해인은 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눈만 굴렸고 해빛은 앞치마를 두르며 눈짓으로 카운터와 제일 가까운 자리를 가리켰다. 해인은 해빛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남은 시간: 11:09:19]

11시간, 일단 해빛을 만났으니 한고비는 넘겼다. 솔직히 바로 내쫓는 것까지 예측했던 해인이기에 지금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단은.

“그래서 진짜 왜 온 거예요. 이 아침부터.”

해빛이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고 와 해인의 앞에 내려놓았다. 코코아였다. 초콜릿의 단 향과 함께 흐릿한 과일 향이 풍기는 듯했다.

“…고마워.”

해인은 얼음장 같은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잡았다. 조금 뜨거운 온도에 손가락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떨어트리지 않았다. 해빛이 맞은편에 앉아 해인을 빤히 쳐다보며 제 물음에 답을 재촉했다. 해인은 그 집요한 시선에 일단 계속 고민하며 그나마 제일 나아 보이는 말을 꺼냈다.

“어제는… 미안했어.”

“뭐가요.”

“…꼴사납다고 한 거.”

아, 해빛은 나직하게 탄성을 뱉었다. 해인은 해빛의 눈치를 보다 눈이 마주치면 빠르게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꼴사납다고 한 건 실제로도 미안하긴 했다. 한 번 더 힐끗 해빛을 보는 순간 설정 조정 중 수치가 오르는 게 보였다.

[설정 조정 중 59%]

“그건 별로 신경 안 써요. 틀린 말도 아닌데, 뭐.”

해빛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표정이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여 해인은 순간 경고가 풀렸나 확인했지만, 여전히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까? 아니다, 애초에 이 경고는 해빛이 자신에 대한 마음 정리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공략 실패 루트가 열리는 거니까.

그러면… 자신을 다시 좋아하라고 그렇게 말이라도 하라는 걸까? 말도 안 된다. 사람 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으면 오히려 더 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해도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찰나, 해빛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제가 물었잖아요. 왜 왔냐고.”

드르륵-

의자가 끌리고 해빛은 몸을 일으켜 해인에게로 허리를 숙여 가까이 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해인의 턱을 잡아 올려 자신을 보게끔 했다. 해인의 코로 초콜릿 향을 뒤로하고 산뜻한 과일 향이 풍겨 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백담호 몰래 뒤에서 붙어먹자고 그런 말이라도 하려고 왔어요?”

해빛은 비웃듯 해인을 내려다봤다.

“그런 거라면, 전 좋아요.”

턱을 잡고 있는 해빛의 손이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설정 조정 중 수치가 또 올랐다.

[설정 조정 중 60%]

은은하게 풍기던 과일 향이 순식간에 짙어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해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해인의 턱을 붙잡고 있던 해빛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휘청거렸다.

띵-.

오랜만에 듣는, 절대로 반갑지 않은 소리가 해인의 귀에 울렸다.

[특별 퀘스트]

형질은 다양할수록 좋다. 다다익선! 공략 인물 서해빛의 형질이 오메가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파로 갑작스러운 히트가 발생해 버렸네요 ㅠ.ㅠ 얼른 공략 인물 서해빛의 히트를 해결해 주세요!

보상: <공략 실패> 경고 해결

(특별 퀘스트이므로 실패해도 페널티, 리스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저 시스템 창이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 해인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시스템 창을 쳐다봤다. 서해빛의 형질이 오메가로 바뀌는 중이라고?

해인이 고개를 돌려 서해빛을 쳐다봤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연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서해빛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고 그 숨결마다 머리를 마비시킬 만큼 점점 짙어지는 페로몬 향이 맡아졌다.

이건…. 명백한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묵직하고 잡아먹힐 것 같은 백담호의 것과 달리 그대로 깔아 눕히고 싶은 그런 냄새.

“…선, 배. 일단 오늘 가세요….”

말하기조차 버거운지 해빛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당장 카페를 나갔을 것이다. 열성 알파임에도 벌써 기묘한 흥분이 몰려오는데 더 있으면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보상: <공략 실패> 경고 해결’, 이 문구가 해인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퀘스트에 실패해도 페널티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히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결국 서해빛의 마음을 풀어 주지도 못하고 더 큰 리스크를 받아들여야 한다. 개 같은 게임! 이 게임은 결국 어떻게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해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곤란한 낯으로 해빛을 바라봤다.

“선배…. 아직 제정신이죠…?”

해인이 가지 않고 얼굴만 곤란하게 일그러트리고 있자 해빛은 서서히 불안해졌다.

“어…. 어. 괜찮아….”

“그럼 안 나가고 뭐 하고 있어요. 뭐, 움직이는 게 힘들어요?”

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은 움직일 수 있지만 나갈 수는 없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해인은 계속 머리를 굴렸지만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그러는 순간 해빛이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풀썩,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서해빛!”

놀란 해인이 벌떡 일어나 다가가니 해빛은 풀린 동공으로 해인을 올려다봤다. 붉게 물든 양 뺨과 벌어진 입술 틈새로 보이는 혀에 해인은 입 안이 말랐다. 안 돼, 방해인, 안 돼. 해인은 계속 속으로 되뇌며 일단 해빛을 부축했다.

해빛은 더 이상 해인에게 가라는 말을 하지 않고 고분고분 해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몸이 밀접되니 더욱 농도 짙어진 산뜻한 향에 머리가 아찔했다. 기본적으로 형질에 관계없이 모든 페로몬은 성적인 흥분감을 유발하지만, 특히 다른 형질의 페로몬은 유독 효과가 세다고 했다. 해인은 어쩐지 백담호의 향을 맡을 때보다 더 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휴게실, 휴게실 어디야. 해빛아.”

해빛은 말 대신 손가락으로 카운터 안쪽을 가리켰다. 해인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해빛을 부축해 겨우 휴게실 안까지 들어섰다. 사장이 갑부라더니 휴게실 크기도 남다르다. 휴게실 벽면에 놓여 있는 중간 크기의 소파에 해빛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억제제는 있어?‟

열기에 몸이 둔해진 건지 해빛은 말없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운터 안쪽 서랍….”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다행이었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억제제가 구비되어 있다는 건 서해빛도 자신의 형질이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인가?

해인은 해빛의 머리 위에 있는 설정 조정 중 표시를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일단 억제제를 가지고 와야 했다. 이미 터진 히트에 억제제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이대로 정신이 나간 서해빛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게 더 문제였으니까.

해인은 평생 자신이 열성 알파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근래, 정확히는 기억을 잃은 뒤로는 형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지금 상황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 가지고 올 테니까, 기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해인의 손 위로 해빛의 손이 얹어졌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서해빛의 뜨거운 체온이 등 뒤로 느껴졌다. 해빛의 거친 숨결이 해인의 귓가를 자극했다. 농밀해진 분위기에 해인이 문을 마저 열려고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해빛이 몸을 더욱 밀착했고 해인의 몸은 굳어 버렸다.

“나, 약 가지고….”

“형.”

하아, 뜨거운 호흡이 진득하게 피부를 타고 흘렀다.

“형은 정말, 놓을 수 없게 만들어요. 여기 대체 왜 온 거예요.”

“아, 잠시…!”

해빛이 해인의 허리를 감싸고 제 부푼 앞섶을 해인의 엉덩이 위에 문질렀다. 해인도 이미 향에 몸이 달아올라 있어서인지 몸이 흠칫 떨렸다. 단순히 살과 살이 옷 위로 비벼지는 것일 뿐인데 미묘한 성감에 배가 뭉쳐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해인은 속으로 계속 되뇌며 몸을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해빛의 것이 더욱 선연하게 느껴졌다.

“혀엉……. 어떡해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울먹거린 해빛이 해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해인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아래가 완전히 밀착됐다. 빈틈없이 맞붙은 엉덩이와 허리 중간에 딱딱한 것이 문질러지자 해인은 기이한 기분을 삼켜 냈다.

“앞이고 뒤고 다 간지러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아요, 흐…….”

“그러니까 억제제 가져오게, 놔줘…. 그거 먹으면 훨씬 나을 거야.”

해인은 버둥거려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제 어깨에 올려진 해빛의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진정하라고, 괜찮다고. 하지만 그 다정한 손길이 발화제가 되어 버린 것인지 해인은 그대로 몸이 뒤집혔다.

“도와줘요, 형. 제발……. 나 이상해, 무서워요…….”

무섭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해빛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처진 눈꼬리가 애처로워 해인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해빛이 갑자기 오메가로 변하기 시작한 이유는…….

해인은 해빛의 머리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자신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조연은 이제 주연’이라는 호칭 때문인지 지금 모든 상황이 소설 <그레비티>와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해빛과 자신의 역할이 뒤바뀌었는데도 왜 서해빛은 오메가가 되는 것일까.

해인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해빛은 제 얼굴을 해인의 얼굴 가까이 마주 댔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아슬아슬한 거리에 해인은 가까스로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해빛은 멈칫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선배는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게 하면서 가지지도 못하게 하네요.”

안 건드릴 테니까, 대신 나한테서 눈 떼지 말아요. 해빛은 얼굴을 뒤로 떨어트리고 해인의 턱을 잡아 자신을 향하게 했다. 또렷하게 마주치는 밝은 해빛의 눈동자에는 괴롭게 일그러져 있는 해인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해빛이 한 손으로 자신의 바지 버클을 내리고 드로즈를 아래로 치우자 잔뜩 발기한 것이 튀어나왔다. 빳빳하게 선 성기는 제 주인을 닮아 하얗고 곧았고… 생각보다 컸다. 해인은 지금 자신이 뭘 보고 있는 건가 넋을 놓고 생각했다. 지금 서해빛의 좆을 보고 있는 건가. 일순간 뇌가 정지했다.

얼이 빠진 해인을 본 해빛은 나직하게 웃고는 제 것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해빛의 하얀 손이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컴이 줄줄 흘러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고 해인은 그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서해빛이 지금 자신을 앞에 두고 자위를 하고 있었다. 안 건드리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건지 해빛은 그저 해인을 집요하게 쳐다보며 손만 움직였다.

“흐…. 형……. 아래 말고 나를, 나를 보라고요.”

문을 짚고 있던 해빛의 손이 해인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정욕에 물든 두 눈과 마주치고 나서야 해인은 자신이 너무 빤히 쳐다봤다는 걸 깨달아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당장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해빛의 밭은 숨소리와 자신을 짓누를 듯 위협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에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았다.

해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자위하는 서해빛을 바라보는 것일 뿐인데 이상하게 제 아래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갈수록 짙어지는 해빛의 향 때문일까, 해인도 점점 한계에 몰리는 게 느껴졌다.

흐윽, 작은 신음과 함께 서해빛의 한쪽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해빛은 풀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고 해인도 덩달아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해빛의 손에는 하얀 액이 묻어 있었다. 사정한 것이었다. 하얀 정액과 붉게 물든 성기, 그리고 가쁘게 내쉬는 숨결, 그 모든 게 자극적으로 느껴져 해인은 뒷걸음질을 치려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사정을 하고도 해빛의 성기는 여전히 발기해 있었다.

형, 흥분에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해인이 흔들리는 눈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니 해빛의 동공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안 된다. 해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제 그 약, 그 억제제, 그래 억제제 가지고….”

더 이상 해빛과 같이 있으면 정말 안 될 것 같아 해인이 다급하게 몸을 돌리며 나가려던 때였다. 해빛이 해인의 한 손을 붙잡고 제 것에 가져다 대었다.

“형, 형이 한 번만 만져 주면 안 돼요? 그럼 좀, 괜찮아질 것 같아….”

해빛은 해인의 손과 함께 제 성기를 감쌌다. 뜨겁고 질척한 감각이 날것 그대로 전해졌다. 백담호의 것보다 조금 덜 굵고 훨씬 매끄러웠다.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백담호와 서해빛의 성기를 비교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소리치는 이성과 달리 어느새 자신의 손은 해빛이 잡고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정액과 프리컴으로 젖은 성기에 해인의 손은 막힘없이 왕복했다. 정확히는 해빛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해인은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흐으…. 아…! 형, 해인 형….”

서해빛은 스스로 만질 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허리를 떨었다. 애달프게 해인을 연신 부르며 해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곱슬기 있는 얇은 머리카락이 해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고 작게 흘러나오는 신음은 더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해인은 어정쩡한 자세로 허공을 보다 목울대를 일렁였다. 밀착된 서해빛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향이 자꾸만 제 안에 있는 난폭한 욕구를 건드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이대로 이성이 끊길 것 같아 해인은 가늘게 숨을 쉬며 서해빛을 조금 밀어냈다. 쉽게 밀려난 서해빛은 해인을 흐린 눈으로 보더니 다시금 들러붙었다.

이번에는 목덜미가 아니라 다시 또 입을 겹칠 듯 다가오는 얼굴에 해인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해빛의 성기를 만지는 손은 멈추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서 강한 모순이 느껴져 죄책감이 들었다.

“이미 더한 곳도 만지면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해인은 서해빛하고 입까지 맞춘다면 제 모든 도덕적 관념과 백담호와의 관계를 완벽하게 저버릴 것만 같았다. 섹스는 해도 키스는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그 말을 해인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든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키스는 안 했다, 이렇게.

“윽!”

얼굴을 매정하게 돌려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처럼 구는 해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해빛은 그의 볼을 콱 씹었다. 입 안을 채우는 말랑거리는 살덩이가 생각보다 만족스러워 해빛은 볼을 문 채 그 살갗을 혀로 핥았다.

“하지 마.”

뺨을 문지르는 미끄덩거리는 혀의 느낌이 꼭 개가 핥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 해인은 해빛을 밀어냈다. 춥,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떨어진 해빛은 다시 해인의 어깨에 이마를 툭 떨어트렸다. 해빛의 성기에서 수도꼭지 물 새듯 질질 나오는 액에 해인의 손은 이제 흠뻑 젖어 버렸다.

왕복하는 손이 점점 빨라지고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더욱 격렬하게 들려왔다. 달뜬 숨을 내쉬던 해빛은 어깨에 이마를 부비고 해인의 목덜미를 가볍게 빨아들이고 혀로 핥았다. 간질거리는 약한 자극인데도 해인은 제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신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서해빛을 도와주고 있는 거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취한 해인은 그렇게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도망갈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이렇게라도 여기지 않으면 백담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해빛의 손에 이끌려 움직이던 해인의 손이 이제는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담호의 것을 만지듯이 해인은 눈을 감고 손을 움직였다.

“아흐……. 형…. 좋아요……. 흑, 더 만져 주세요…….”

억지로 잡고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해인의 손에 서해빛은 제 손을 떨어트리고 해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선단에서부터 기둥까지 한 번에 주욱 훑어 내리자 저릿한 성감에 해빛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히트가 와서 몸이 더 예민한 탓도 있겠지만 만져 주는 사람이 해인이라는 것에 더 큰 쾌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해인을 깔아뭉개고 싶은 충동과 함께 배 안 어딘가가 저릿거렸다.

해빛은 더욱 강렬한 쾌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는 해인의 손에다가 허리 짓을 하듯 앞뒤로 움직였다. 그러자 해인이 움직이는 속도와 자신이 허리 짓을 하는 속도가 엇갈려 기이한 자극이 주어졌다.

엇박자로 움직이는 탓에 해인의 손이 버벅거리며 더욱 성기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고 해빛은 시야에 새하얀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해빛은 얼마 전부터 이상해진 제 몸이 싫었다. 자던 중에 갑자기 확 열이 오르거나 배 안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이 점점 반복될 때 즈음, 베타인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어야 할 페로몬의 향이 예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다들 감추느라 억눌린 페로몬까지 옅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장 병원에 달려가니, 의사가 말하길.

‘형질이 오메가로 변환되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불안정하긴 했지만 변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최근에 강한 페로몬에 노출될 일이 많았나요? 아직 완전히 변환된 건 아니라 약물 치료로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만 변환을 막기는 힘들 겁니다.’

그 말을 듣고 해빛은 머리가 띵했다. 평생을 베타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오메가로 변한다니.

예전에 비해 차별이 많이 줄어들긴 했다지만 아직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는 아니었다. 애초에 평등한 사회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알파에 비해 오메가는 상대적으로 질 나쁜 취급을 받았고 해빛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숨기고 감추고 최대한 변환을 막아 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해빛은 자신의 페로몬 향에 취해 눈가를 붉힌 해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페로몬 앞에서 흥분하지 않을 알파, 오메가는 없다더니 사실이었다. 자신 때문에 해인이 이런 얼굴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무언가가 단단히 들끓었다.

아주, 아주 치졸하고 야비한 방식이었지만 해인이 이렇게라도 자신에게 넘어온다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그동안 이렇게 해인을 독차지한 적이 있었는가.

해빛은 흥분에 젖은 해인의 얼굴을 보다 그의 두꺼운 옷 사이로 언뜻 보이는 울혈 자국에 눈가가 움찔거렸다. 아주 새빨갛고 아직 부기 있는 게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쩐지 백담호 냄새가 더럽게도 안 빠지더니.

해빛은 계속 배려 차원에서 살살 빨고 핥기만 했지만, 막상 선명하게 자리 잡은 백담호의 흔적을 보니 심기가 뒤틀렸다. 그는 이를 세워 콱, 해인의 하얀 살갗을 물어뜯었다.

“으윽…. 물지 마…….”

해인의 말을 무시하고 한 번 더 해빛은 자국을 남기려 했지만, 해인은 손으로 제 목덜미를 가려 버렸다. 아파서 그런 걸까, 아님 자국이 남아서 그런 걸까. 뭐가 되었든 간에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해빛은 한 발 물러났다. 대신 목덜미를 가린 해인의 손등을 잘근잘근 씹으며 제 아쉬움을 달랬다.

예전에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던 방해인을 받아들였더라면 지금보다 더한 짓을 했을 텐데. 하지만, 그때의 방해인과 지금의 방해인은 달랐다. 비슷하긴 해도 지금이 더 좋았다. 자기 뜻을 내세우기보다는 한발 물러나는 유한 방해인이 좋았다.

이제 안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방해인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좋았다. 그를 가지고 싶다.

서해빛은 몰려오는 사정감을 느끼며 해인의 허리를 제 쪽으로 꽈악 끌어당겼다. 해인의 옷 위로 닿은 선단이 쓸리면서 강렬한 자극과 함께 허리가 잘게 떨렸다.

“하아…….”

짙은 절정으로 해빛의 몸이 해인에게로 추욱 늘어졌다. 해인은 유백색 액으로 엉망이 된 제 손과 옷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해빛의 머리통을 힐끔 쳐다본 해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미친…. 서해빛과 맞붙어 있는 제 앞섶이 기어코 부풀어 올랐다. 해인이 책임감을 느껴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 흥분하지 않았다고 합리화를 해 봤자 눈치 없는 몸뚱어리는 고스란히 제 정욕을 드러냈다.

서해빛은 사정의 여운으로 정신이 없어 이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인은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해빛의 팔을 떨어트렸다.

“진정은 좀 된 것 같아?”

해인은 자신이 묻고 곧바로 답을 깨달았다. 싼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해빛의 성기가 지치지도 않고 발기해 꺼떡거리고 있었다. 백탁액으로 더럽혀진 탓에 그 모습이 더 야하게 비쳐 되레 해인이 눈을 돌려야만 했다.

“약… 가지고….”

“필요 없어요.”

서해빛은 입매를 끌어 올려 짙게 미소를 그렸다. 해인은 그 미소에 불안감이 느껴져 나가려 했지만 해빛의 행동이 더 빨랐다. 서해빛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해인의 버클을 풀어 내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당황한 해인이 해빛의 손을 치우려 했지만 이미 바지는 발아래로 내려갔고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제 드로즈가 드러났다. 이미 물을 흘려 드로즈는 짙게 젖어 있었다. 화악, 느껴지는 수치심에 해인이 손으로 앞을 가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해 드릴게요, 선배.”

“됐어! 비키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해인을 무시하고 해빛은 손을 치워 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드로즈까지 벗겨 버렸고 단단하게 발기한 해인의 성기가 밖으로 드러났다. 해빛은 그 성기를 양손으로 감싸고는 말했다.

“이거 나 때문에 선 거잖아. 그렇죠?”

해인은 할 말을 잃었고 해빛은 늘 짓던 천진한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벌려 해인의 것을 담았다. 해인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성기가 따뜻하고 눅눅한 점막에 감싸지는 순간 허리가 잘게 튀어 버렸다.

불과 오늘 새벽까지 백담호와 뒹굴었던 몸이다.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몸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예민해졌고 해인은 그 사실에 지독하게 자괴감이 들었다.

“하으…. 아, 흐윽, 아, 서해…빛, 안 돼…!”

성기의 선단을 뭉툭한 혀가 비비듯 문질렀다. 강한 자극에 해인의 허벅지가 달달 떨려 왔다. 계속 가늘게 내쉬었던 호흡은 결국 쓸모없는 짓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해빛이 해인의 것을 전부 다 입에 넣어 빨아들이고 혀로 핥으며 손으로는 음경을 매만지며 회음부를 꾸욱 눌러 훑었다. 전과는 달리 자제할 수 없는 쾌감에 해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덜덜 떨었다.

산뜻한 과일 향이 폐부 가득히 들어오며 열기를 식혀 주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해인은 해빛의 머리를 꽈악 움켜잡았다. 벌써, 절정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 아으…. 그, 만…. 서해빛….”

해인의 반응이 격해질수록 해빛은 그의 아래를 전부 먹어 치울 듯이 집요하게 빨며 제 성기를 문질렀다. 오로지 성욕만이 남은 사람처럼 거칠게 해인의 것을 자극했고 곧이어 해인의 몸이 크게 곱아들었다.

“흐, 흐으윽…!”

해빛의 입 속에서 성기를 꺼낼 틈도 없이 해인은 그대로 사정하고 말았다. 입 안 가득 부어진 해인의 정액을 해빛은 그대로 삼켰다.

[특별 퀘스트 성공]

<서해빛의 히트를 해결해라!>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공략 실패> 경고가 해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 * *

해인은 혼이 완전히 나가 핼쑥한 얼굴로 휴게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서해빛하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의 것을 빨고 정액까지 먹은 것도 모자라 다시 달려들려는 서해빛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니 외면했던 현실이 자각되었다.

말로 다 담아내지 못할 죄책감과 허탈함 등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공략 실패> 경고는 무사히 해결되었지만 이제 제가 저지른 일들이 문제였다. 정액으로 더럽혀진 제 윗옷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억제제를 먹고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서해빛을 쳐다보니 예전에 백담호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바람피우다 걸린 것처럼 굴면 존나 서해빛이랑 떡이라도 친 줄 알겠어.’

응, 담호야. 네 말이 현실이 되었어…. 떡까지는 치지 않았지만 이건 명백한 바람이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그건 오롯이 해인만 아는 사정이었다.

“개좆같은 게임….”

해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밀려드는 죄책감으로 백담호 얼굴을 대체 어떻게 봐야 하나 하는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서해빛과 이랬다는 걸 백담호가 알아차렸을 때가 더 걱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두렵기도 했다. 불과 어제, 백담호의 호감도가 겨우 ‘2’ 떨어졌다고 코끝이 시큰거렸는데 자신이 서해빛하고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백담호가 알면 그의 호감도가 얼마나 떨어져 버릴까.

해인은 알고 싶지 않았고 애초에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막막했다. 지금 기분이 딱 그랬다. 막막하고 무서웠다. 눈가가 조금 촉촉해진 해인은 마른세수를 거칠게 하며 시스템 창을 열어 백담호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공략 인물 목록]

강서준 호감도27

백담호 호감도81

서해빛 호감도70

다행히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똑같았다. 혹시나, 아침에 문자를 남겨 두고 나오기는 했지만,혹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어떡하나 하던 걱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사실 백담호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던 척, 애초에 나간 적이 없던 척 굴며 지금 이 상황을 조용하게 넘길 수 있을 테니까. 백담호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였지만 행복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어느 정도 필요했다. 지금처럼 더더욱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면.

해인은 시스템 창을 닫았다. 그래, 일단 큰불은 껐으니 조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지금 해인에게는 서해빛 말고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해인은 묵묵히 고인 눈물을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소파에 잠든 서해빛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어느새 호감도가 오른 그의 머리 위를 잠시 응시하다가 휴게실을 나왔다.

[설정 조정 중 71%]

[호감도 72]

휴게실을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맑은 공기에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카페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 정도면 백담호가 일어나 있으려나.

해인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갔던 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리는 그 순간 휴대폰이 잘게 진동을 했고 해인은 잠시 주춤거리다 화면을 켰다.

[부재중 31건]

[메시지 58건]

엄청난 알림의 근원은 모두 백담호였다. 해인은 잠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이 꿈이기를…. 이왕이면 어제 일까지도…. 해인은 휴대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자꾸만 말도 안 되는 현실에 탈출하려는 이성을 겨우 붙잡고 다시 화면을 켜 메시지를 먼저 확인했다.

[백담호: 무슨 급한 일?] 오전9:10

[백담호: 많이 급한 거야?] 오전9:10

.

.

.

[백담호: 해인아, 나 지금 너네 집으로 가고 있어. 걱정된다.] 오전9:59

[백담호: 방해인, 어디야.] 오전10:16

[백담호: 보자마자 바로 전화해, 해인아.] 오전10:16

모든 메시지를 확인한 해인에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망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백담호가 이미 우리 집에 가 있단다. 이로써 자신이 변명할 거리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집에 돌아간다고 한들 어디서 뭘 하다 왔냐고 물을 게 뻔했고 자신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해인은 휴지로 대충 닦아 냈지만 번들번들하게 옷에 남아 하얗게 마른 자국을 내려다봤다. 게다가 서해빛하고 오랜 시간 함께했으니 제 옷에 해빛의 향이 배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한 가지 나은 점을 꼽자면, 서해빛은 원래 베타였으니 백담호는 이 향의 주인이 서해빛인지 모를 거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정말 딱 그뿐이었다. 이미 자신의 코에도 페로몬이 풀풀 풍기는 게 느껴지는데!

해인은 잘근 손끝을 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빠르게 근처 옷 가게에서 옷이라도 사서 갈아입어야 할까? 근데 이 근처에 벌써부터 여는 가게가 있었던가. 옷은 어떻게든 갈아입고 간다고 치더라도 백담호에겐 뭐라고 말해야 하지?

잠시 다른 곳에 볼일이 생겨서 갔다 왔다? 그럼 또 뭐라고 답해. 아침에 나올 때도 <공략 실패> 경고 해결에만 급급해 이 뒷일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나왔다. 아니, 애초에 서해빛과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지.

해인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불안하게 괜히 빙빙 돌았다.

일단, 그래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해인이 드디어 카페를 나서려는 때, 문득 해인의 머릿속에 흐릿한 아이템이 떠올랐다. 전에 분명, 뭔가 이동하는 걸 받았던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텔레포트였나?

순간 왠지 돌파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에 해인이 서둘러 시스템 창을 열어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순간 이동 티켓]

살면서 급하게 어디론가로 이동해야 할 때가 다들 있으시죠? 예를 들면 늦잠을 잤다든가, 식당에서 나와 이미 멀리 이동했는데 휴대폰을 두고 왔다든가 같은 일상적인 상황부터 특수한 상황까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그럴 때를 위해서 단 1초 만에 원하는 위치로 보내 주는 이 ‘순간 이동 티켓’을 사용해 보세요!

이동 원하는 장소의 정확한, 아주 정확한 명칭을 빈칸에 적어 주시고 그 장소를 떠올리면서 이 티켓을 찢어 주세요! 그럼 바로 원하는 위치로 뿅! 다만, 다른 사람 눈에 보이면 조금 큰. 일. 나겠죠? 조심하자고요~ 일반인들은 이런 거 모른단 말이에요~>.<*

원하는 장소 [ ]

(주의, 최대 반경 30km 이내 위치만 가능합니다.)

(주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주세요. 애매하게 상상했다가는 벽에 몸이 끼어 벽과 한 몸이 되거나 공중에서 줄 없이 낙하할 수도 있습니다.)

(주의, 가지고 가고 싶은 물건은 꼭 옷 주머니에 넣어 주세요.)

(주의, 2명 이하까지만 사용 가능합니다. 2명을 초과해서 사용할 경우 그에 따른 피해 보상은 없습니다.)

반경 30km 이내, 충분한 범위였다. 하지만 밑에 쓰인 주의 문구에 해인의 눈이 살짝 떨렸다. 까딱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만큼 위험한 티켓이었다.

그렇지, 그렇게 순간 이동이 쉽진 않겠지. 해인은 마른침을 삼키고 빈칸에 자신의 오피스텔 주소를 적고 그 뒤에 2층 침실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정확하게 적으라는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빈칸에 위치를 적자 시스템 창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던 티켓이 지직거리더니 실제 종이 티켓이 되어 해인의 손 위로 떨어졌다. 몇 번을 봐도 놀라운 광경에 신기해하기도 잠시, 해인은 오직 제 침실만 떠올리며 티켓을 북- 찢었다. 그러자 곧바로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빙빙 도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역한 느낌에 해인이 헛구역질을 하며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이미 침실에 도착해 있었다.

“와…. 미친.”

대체 이 게임은 어디까지 가능한 거야? 순간 이동 같은 게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감탄하며 생각했다. 이 게임이 나한테 개같이만 안 굴었더라면, 이 게임을 평생 했을지도.

지금까지 썼던 아이템 중 단연 최고라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벙 쪘던 해인은 다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옷을 훌러덩 벗어 세탁 바구니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마치 방금 자다가 일어나 씻고 나온 듯이 욕실에서 대충 머리와 몸을 물로만 씻어 내고 잘 입지도 않는 샤워 가운을 걸쳐 입었다.

물로 씻긴 했지만 혹시 몰라 해인은 잘 쓸 일이 없었던 탈취제까지 요란하게 뿌렸다. 그렇게 하니 서해빛의 페로몬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안심했고 그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또 자괴감이 들었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불륜남도 아니고•••. 아니, 이제 좀 비슷하긴 한가. 쓴웃음을 머금은 해인은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난 정말 자다가 씻고 나왔다’는 표정을 지어 봤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상한 표정을 지어 봤다는 뜻이었다. 길게 심호흡을 한 해인이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 계단으로 향했다. 곧바로 거실에 앉아 있는 두 명과 눈이 마주쳤다. 한 명은 백담호였고, 한 명은 강서준이었다.

그 누구보다 놀란 표정을 지은 건 강서준이었다.

“…해인 씨?”

해인 씨가 왜 거기서 나와요…? 해인은 욕실에서 표정 연습한 게 무색할 정도로 어색하게 웃으며 1층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심각하게 놀란 서준과 그런 서준을 서늘하게 째려보는 백담호는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분명 해인 씨 없었는데…? 정말 없었는데요? 저 거짓말 안 했습니다!”

서준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해인과 백담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손사래까지 쳤다. 서준의 그런 모습에 해인은 조금 미안해지고 말았다. 백담호만 생각하다가 강서준의 입장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 아까 들어왔는데 서준 씨가 없긴 하더라고요.”

서준을 노려보는 백담호의 시선이 워낙 살벌해 해인은 슬쩍 거짓말을 보탰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 같았다.

“아까요? 언제요…?”

그럼에도 서준의 의혹은 풀리지 않은 것 같았지만 해인은 단호하게 “아까, 새벽에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서준은 떨떠름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하자마자 해인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후로 오피스텔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해인이 보란 듯이 침실에서 나왔다.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한 사이에 해인이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백담호는 말없이 서준을 보다 다시 해인을 쳐다봤다. 해인이 방 안에서 나오자 메시지에서 보였던 살기는 거의 사라져 있는 것 같아 해인은 속으로 안도했다. 이대로 무사히 넘어가기를. 양심이 찔리지만, 그렇게 묻어 두는 게 훨씬 나았다.

“해인아, 그래도 갈 때 나 깨우고 가지. 집까지는 뭐 타고 갔어.”

소파에서 일어난 백담호가 나긋하게 물으며 계단으로 향했다.

“아냐, 너 잘 자고 있길래 그냥 택시 타고 바로 왔어.”

백담호가 다가올수록 해인은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평소처럼 굴어야 하는데 도무지 백담호의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말하는 목소리마저도 떨리는 것 같고 제가 서 있는 자세도 이상한 것 같고 표정도 어색할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게 다 부자연스러워 백담호가 눈치를 챌 것 같았다. 백담호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자 해인은 입 안이 말라 목울대를 일렁였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바닥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해인과 백담호의 거리는 다섯 걸음도 남지 않았다. 해인은 겨우 끌어 올린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한 걸음, 백담호가 다가왔다. 두 걸음, 백담호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세 걸음. 이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는 백담호의 표정이 굳었다.

“…방해….”

“그럼 필요하면 부르세요. 저는 나갔다 오겠습니다.”

서준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찻잔을 치우며 말했다. 해인과 백담호의 시선이 동시에 서준 쪽으로 향했고 서준은 흐리게 미소를 지으며 오피스텔을 나갔다.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해인은 더 이상 어색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서준 씨…. 나도 같이 데리고 가 줘요. 해인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백담호는 남은 두 걸음을 다가오지 않은 채 말없이 해인을 응시했다. 방금까지 다정함이 서려 있던 까만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인은 깨달았다. 고작 탈취제 정도로는 페로몬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해인은 느꼈다. 들켰다고. 그것도 아주 최악의 형태로.

“해인아.”

“으, 응.”

“정말 지금까지 집에 있었어?”

물어보는 투가 평소처럼 짐짓 부드러웠다. 해인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까,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백담호라면, 제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던 백담호라면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윽.”

백담호가 해인의 샤워 가운 멱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해인은 맥없이 끌려갔고 백담호는 해인의 목덜미에 바로 코를 박아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이고 해인의 목덜미에서 깊게 숨을 쉬던 백담호는 얼굴을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바로 굳은 얼굴을 한 채 해인의 침실로 향했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백담호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 기세가 너무 살벌해 해인은 몸이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해인의 침실로 들어선 백담호는 여기저기, 무언가를 찾듯 헤집다가 아직 밖에 서 있는 해인을 응시했다. 해인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백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해인. 들어와.”

해인은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백담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꽂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어떡하지, 지금 당장이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하지만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어느 정도가 백담호가 납득할 수 있는 범위인지 해인은 알지 못했다.

애초에 현재 상황은 그 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설명한들…, 백담호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라면…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았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사귀는 사람을 놔두고 다른 사람과 놀아난 거니까.

“미, 미안해. 담호야.”

해인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뭐가.”

“다, 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해인이 결국 눈물을 그렁 매단 채 백담호를 올려다봤지만 마주치는 시선은 싸늘했다.

“그러니까, 뭐가.”

“그건…….”

해인은 말끝을 흐렸다. 백담호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해빛이 갑자기 히트가 터졌는데 그때 같이 있어서 도와주고 왔다고…? 애초에 왜 이 아침부터 서해빛과 있었는지, 왜 자신에게 말도 없이 갔는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이 한 문장으로 백담호가 물어볼 무수한 질문들과 의심, 질책, 분노가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백담호는 말없이 해인의 한쪽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쳐다보았고, 그와 함께.

[호감도 72]

호감도가 순식간에 훅 떨어졌다. 지금까지 떨어졌던 것 중에 가장 많이 떨어진 수치였다. 해인은 덜컥, 심장이 훅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백담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해인의 손이 달달 떨렸지만 백담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듯이 반응이 없었다. 눈물이 시큰 고였지만 백담호는 서늘하게 식은 눈을 한 채 더 이상 해인에게 묻지 않았다.

“따라와.”

제 옷소매를 붙잡은 해인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챈 백담호는 그대로 욕실로 해인을 끌고 갔다.

“으윽.”

샤워기 아래, 해인을 거칠게 밀어 넣은 백담호가 바로 물을 틀었다. 찬 물줄기가 해인의 몸 위로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백담호를 보려고 했지만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눈이 떠지지 않았다. 백담호,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입을 벌리면 물이 들어와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쫄딱 젖은 해인을 백담호가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하는 울림과 함께 위에서 쏟아지는 물이 사라져 해인이 겨우 눈을 뜨자마자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까운 거리에서 백담호는 물줄기를 맞으며 입을 열었다.

“해인아, 숨기고 싶으면 완벽하게 숨겨야지.”

내가 눈치도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완벽하게 숨겨야지. 그렇게 숨기고 싶으면 그래야지. 내가 빡도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까만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살벌했다. 러트도 아닌 백담호에게서는 숨길 생각도 없는 짙은 향이 해인의 목을 옥죄듯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덜덜 해인은 몸을 떨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고 눈에서는 물줄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이게 눈물인지, 아님 젖은 얼굴에서 흐르는 물인지 해인도, 백담호도 알 수 없었다.

“나 좋아한다며. 아니었어?”

해인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인의 어깨를 잡은 백담호의 손에 힘이 점점 강해져만 갔다.

“그런데 왜, 말해 주지 않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아니야,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살기 어린 검은 눈에 서서히 스며드는 슬픔이 보여 해인은 절실하게 외쳤지만, 입이 막혔다.

“듣기 싫어, 해인아.”

항상 해인이 속내를 감추면 말하고 싶을 때 말하라던 백담호가 듣기 싫다고 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많은 감정에 해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백담호는 묵묵하게 응시하다가 해인의 입을 막은 손을 떨어트렸다.

“입 벌려.”

명령과도 같은 냉정한 말에 해인이 스르르 입을 벌리자 바로 백담호의 입술이 겹쳐졌다. 물기를 머금은 입술을 거칠게 물어뜯고 혀가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입 안 곳곳을 훑던 전과 달리 배려 없이 난폭했다.

“흐읍…….”

뱉어지는 해인의 숨결을 백담호가 앗아 가는 바람에 해인은 공기가 부족했다. 숨을 쉬기 위해 해인이 고개를 비틀어도 백담호는 그대로 따라붙어 해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주 짧은 사이에 겨우겨우 해인은 숨을 몰아쉬었지만, 호흡은 가빠질 뿐이었다.

시야가 점점 뿌옇게 변해 갔고 괴로운 와중에도 입천장을 긁는 혀끝의 자극에 옅은 성감이 느껴졌다.

“윽……. 잠…시…!”

거칠게 입을 겹치는 사이,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샤워 가운 안으로 백담호의 손이 파고들어 한쪽 엉덩이를 콱 움켜잡았다. 강한 악력에 해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해인의 말 따위는 전혀 듣지 않겠다는 듯 백담호는 난잡하게 뜨거운 입 안을 다 헤집어 놓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멈추고 이제 질척한 소리만 남발하는 가운데 백담호의 손가락 두 개가 곧바로 해인의 입구 위를 문질렀다. 물에 젖어 촉촉한 살을 백담호는 간을 보듯 꾸욱 눌러 문지르다 곧장 파고들었다.

“아…. 흐윽……!”

갑자기 들어온 이물질에 해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살벌한 분위기에 몸과 같이 구멍도 경직되어 있어 고통은 컸다. 뻣뻣하게 움츠러든 내벽을 손가락이 억지로 벌리기 시작했다. 불과 새벽까지 백담호의 것을 받아들였던 구멍은 아직 부기가 빠져 있지 않아 더욱 손가락을 꽈악 조여 왔다. 아릿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해인이 파르르 허리를 떨며 애원스럽게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해인의 윗입술을 잘근 물고 있던 백담호가 입을 떨어트리고 음산하게 물었다.

“해인아, 어디까지 서해빛이랑 놀아났어. 여기까지?”

해인의 눈이 커졌다. 백담호의 입에서 서해빛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해인이 서해빛의 ????서???? 자도 꺼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백담호의 입에서 정확하게 서해빛의 이름이 나왔다. 페로몬의 주인이 서해빛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백담호도 서해빛의 형질이 변했다는 걸 벌써 알고 있던 걸까?

해인의 그런 반응을 백담호는 어떻게 해석한 건지 조소하듯 한쪽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니, 반대였으려나?”

“으윽! 아, 아니…. 아니야…!”

다른 한 손이 가운 앞섶을 풀어 헤치고 해인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해인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지만 백담호는 전혀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멍을 헤집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갈고리처럼 굽힌 손가락이 바로 여전히 부어올라 있는 전립선 위에 직격했다. 순식간에 강렬하게 느껴지는 자극에 해인이 허리를 휘며 백담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연신 도리질을 쳤다. 해인의 입에서는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부정하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눈물이 확실한 물줄기가 해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백담호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고는 해인의 몸을 뒤집어 버렸다. 아직 둔부를 덮고 있는 하얀 목욕 가운을 들춘 백담호는 그대로 흉흉하게 서 있는 제 것으로 단번에 해인의 아래를 꿰뚫었다.

“아으윽……!”

차가운 물로 인해 식은 몸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단번에 끝까지 들어온 성기는 극점을 꾸욱 누르며 더욱 안으로 파고들어 갔고 해인은 눈앞이 번쩍 튀는 쾌감에 허벅지를 달달 떨었다. 퍽, 퍼억, 난폭한 마찰음이 날 정도로 거센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달리 점점 달아올라 쉽게 예민해진 몸이 원망스러워 해인은 입을 꽉 다물고 억눌린 신음을 삼켜 냈다. 좆이 박힐 때마다 해인의 뱃가죽이 뚫릴 것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백담호는 힘이 풀리는지 자꾸만 쓰러지려는 해인의 등을 꾸욱 눌러 고정했다. 샤워 가운이 흐트러져 드러난 하얀 피부에는 자신이 남긴 흔적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백담호는 조금 안도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코를 찌르는 타인의 페로몬 향에 속이 들끓었다. 대체, 방해인이 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백담호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아 더욱 해인에게 화가 났다. 집에 간다고 거짓말이라도 치지 말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줬더라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해인에게서 지독히 풍겨 오는 산뜻한 페로몬에 혹시나 하는 불신과 배신감이 커졌다. 행동을 좀처럼 자제할 수 없었다. 해인아, 제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 줘.

으득, 백담호는 사납게 이를 갈다 해인의 목덜미를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씹었다.

“흐윽……. 아흐…….”

연한 살을 씹는 고통에 해인의 내벽이 세게 움츠러들며 빠져나오는 담호의 성기를 잡아당겼다. 안쓰럽게 떨리는 몸으로 평소라면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할 법도 한데 방해인은 흐느끼는 소리만 뱉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담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만하라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이 행동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은데. 백담호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해인은 차가운 타일을 손톱으로 긁으며 최대한 숨을 죽였다.

해인은 오로지 얼른 이 행위가 끝나고 백담호의 기분이 조금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분노는 정당했기에 해인은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난폭하게 쑤셔지는 성기가 주는 감각을 느낄 뿐이었다.

솔직히 들키자마자 백담호가 크게 실망해 호감도를 잔뜩 떨어트린 채 그대로 뒤돌아 나가 버릴 줄 알았다. 아니, 사실 한 대 때리면 맞을 각오까지 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호감도가 떨어졌고 평소보다 거칠고 조용한 행위임에도 자신과 맞닿아 있는 몸에 안도감이 들었다

퍽퍽, 물기까지 있어 더욱 격렬한 마찰음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마구잡이로 내벽을 헤집는 성기에도 해인은 눈앞이 번쩍거리는 쾌감을 느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성감이 자극당하는 몸은 쉽게 달아올라 빠른 사정감이 몰려왔다.

해인은 입술을 꽉 씹으며 신음을 참다 결국 파정했다. 그와 동시에 내벽이 세게 조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신음이 뒤에서 어렴풋이 들리고 성기가 쑤욱 빠져나갔다.

“으읏…!”

나가는 순간에도 부어오른 극점을 긁어 해인은 허리를 튕겼다. 곧이어 그의 등허리 위로 뜨거운 액이 뿌려졌다. 백담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해인의 곧은 몸 위에 뿌려진 제 것을 보다 몸을 돌렸다.

“씻고 나와.”

짧막한 말을 남긴 백담호는 그대로 빠르게 욕실을 빠져나갔다. 해인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메마른 정사의 여운에 차가운 타일 위로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 * *

해인은 꼼꼼하게 씻었다. 열성인 제 코에 이제는 잘 맡아지지 않는 서해빛의 향이 백담호에게는 맡아질까 해인은 구석구석 거품질을 했다. 특히 서해빛과 닿았던 곳들을 샤워 볼로 피부가 붉게 변할 정도로 벅벅 문지르고 나서야 해인은 물로 몸을 헹궈 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욕조에 향이 독한 입욕제라도 풀고 몇 시간 내내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밖에서 기다릴 백담호가 신경 쓰여 그럴 수 없었다. 늦게 나가면 백담호가 없을까 봐. 해인의 눈앞으로 떨어지던 호감도가 아직도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물기를 닦으며 해인은 몇 번이고 생각했다. 백담호에게 무슨 말로 용서를 빌어야 할지. 이것저것 떠올려 봤지만 자꾸만 제 입을 막고 차갑게 내려다보던 백담호의 말이 떠올랐다.

????듣기 싫어, 해인아.????

용서를 구하기엔 이미 늦은 걸까. 이제 와서 말해 봤자 소용이 없는 걸까. 이 상황을 말없이 넘어갈 수는 없단 생각은 확고했으나 결국 샤워를 마칠 때까지 해인은 무엇 하나 제대로 결정 내리지 못했다.

욕실 문고리를 잡은 해인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문을 여니 바지만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설정 조정 중 91%]

[호감도 72]

침실은 조용했다. 백담호는 말없이 해인을 물끄러미 응시했고 해인은 긴장과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백담호에게 다가가던 걸음도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멈춰 섰다.

그렇게 각자 다른 의미를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몇 분, 먼저 입을 연 것은 해인이었다. 해인은 새로 갈아입은 샤워 가운을 꽉 쥐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서해빛이랑 있던 건 맞아. 하지만 이건, 그러니까 서해빛이 갑자기 히트가 와서 나도 당황해서…….”

우왕좌왕 정리되지 못한 말들의 마무리는 결국 사과였다. 해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또 ????미안해, 정말. 이럴 줄 몰랐어.????라고 했지만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화를 내는 것보다, 욕을 하는 것보다 침묵이 더 두려운 법이었다. 자신이 뱉은 이 말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 상황에 도움이 되는 말인지 더 악화시킬 말인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담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해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고, 몇 분이 더 지나서야 드디어 백담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아침에 서해빛을 만났는데 서해빛이 갑자기 히트가 와서 어쩔 수 없었다고?”

백담호가 정리해서 말하니 무언가 더 구차해진 변명같이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해인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끄덕였다. 백담호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극도로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무심해 보이기도 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서해빛을 애초에 왜 만난 건데? 나한테 거짓말까지 하면서.”

드디어 올 질문이 왔다. 가장 답하기 어렵지만 어떻게든 답을 해야 하는 질문. 완벽한 사실을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해인은 씻는 내내 적당히 사실과 거짓을 꾸민 대답을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어제 일이 좀 신경 쓰여서 그거 잘 마무리하려고 잠깐 이야기만 하려고 갔다 온 거였어. 너한테 거짓말한 건 미안하지만 정말 잠깐 이야기만 하고 오려고 했던 거라……!”

말을 끝맺지 못하고 해인의 몸이 그대로 벽 쪽으로 밀렸다. 놀라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리니 백담호가 분노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얼굴에 보이고 있었다.

“신경 쓰여? 서해빛이? 왜 신경 쓰는데 걔를. 이미 끝난 관계잖아. 해인아. 어? 네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서해빛이 아니라 나야. 나라고. 어제 그렇게 가니까 미련이라도 다시 생겼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신경이 쓰이는데, 왜.”

해인은 몇 번 입을 벙긋거렸지만 어떠한 말도 뱉지 못했다. 날이 선 공기가 둘의 주위를 아슬하게 흐르고 있었다. 몸이 저절로 위축될 정도로 살벌함을 담은 눈에 해인은 버티기가 힘들어 눈을 사선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내 애절하게 백담호를 올려다봤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미안해.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서해빛이 신경 쓰이는 건 단지 과거에 내가 했던 잘못 때문에 그래. 미안해서…. 다른 뜻은 전혀 없어. 담호야.”

단단한 가슴 아래 살포시 올려진 손이 간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해인의 눈에 두려움과 애절함이 가득해 백담호는 눈꺼풀을 몇 번 떨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욕실에서 우느라 빨갛게 짓무른 해인의 눈가로 백담호가 손을 뻗었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해인아.”

백담호는 그 뒤로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해인의 눈가만 엄지로 쓸어내렸다. 해인은 담호의 까만 눈을 쳐다봤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시간이 흐를수록 넘실거리던 분노가 잔잔해졌다는 점만 알 수 있었다.

“일단은 알겠어. 아프게 해서 미안해.”

눈가를 쓰다듬던 손을 떨어트리고 백담호는 몸을 뒤로 물렸다. 눈에 띄게 차분해진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축축하게 젖은 제 윗옷은 손에 들고 대충 겉옷만 걸쳐 지퍼를 끝까지 채웠다. 더 이상 자신을 가두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해인은 여전히 벽에 딱 붙어 백담호를 따라 시선만 움직였다.

“오늘 피곤할 텐데 이만 쉬고. 나중에 봐.”

백담호는 문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발걸음마다 백담호의 머리 위에 설정 조정 중 표시가 ????1????씩 올라갔다. 마치 저 숫자가 ????100????이 되는 순간 백담호와 자신의 관계가 끝이 날 거라고 말하듯이.

왜인지 미련 없어 보이는 백담호의 뒷모습이 유난히 불안해 해인은 다급하게 걸어가 백담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중에 보자는 말이, 대체 언제 보자는 건지 몰라 해인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대로 백담호가 나가면 완전히 제게 정이 떨어져 버릴까 봐 걱정됐다.

“가게…?”

“응.”

손목을 붙잡은 해인의 손을 떨어트린 백담호는 해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번 주말은 집에서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 괜찮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하게 느껴지는 어투였지만 미묘하게 전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서 더 붙잡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해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백담호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부턴 거짓말은 하지 말아 줘, 해인아.”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참기 힘들 거 같아. 엄지에 힘을 주어 해인의 얼굴 위로 자국을 남기듯 백담호가 길게 주욱 쓸어 올렸다. 해인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백담호는 돌아서 방을 나갔다.

쿵, 해인은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설정 조정 중 99%]

[호감도 72]

100%까지 남은 수치는 단, 1%.

그 1%가 오르는 순간 손쓸 수 없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 * *

백담호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해인은 침대에 그저 멍하니 앉아 제 눈앞에 있는 상태창만 쳐다봤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 백담호 (설정 조정 중 99%)

나이 : 22

키 : 190

특이사항

-알파

-희귀 공략 인물

호감도(72)

- 호감: 20

- 집착: 35

- 사랑 : 48

- 소유욕 : 11

- 미움 : -28

- 원망 : -14

(주의, 각 수치 밸런스를 잘 맞춰 주시길 바랍니다. 한쪽 수치가 지나치게 높을 경우 공략 인물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알림, 세부 수치의 종류는 추가될 수도 있고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알림, ????-???? 값이 붙은 감정은 ????-????를 뺀 절대값 수치로 봐 주시면 됩니다)

플레이어와의 관계

오직 나만 알고 나만 보도록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있습니다. (연인)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리 꽤 많은 것들이 변해 있는 것 같다. 집착과 사랑, 미움이 눈에 띄게 수치가 높아졌고 소유욕과 원망이 새로 생겨 있었다.

생각보다 큰 미움의 수치에 해인은 목 안이 썼다. 그러다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에 자꾸만 눈이 갔다. 편법으로 알아낸 그의 속내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울컥했다.

오늘 백담호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을 했을까,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해인은 참을 수 없는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원망, 그리고 게임에 대한 증오심이 느껴졌다. 말만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지, 하는 짓을 보면 사사건건 사랑을 방해하는 빌런보다 더했다.

대체 이 게임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해인은 문의창을 열었다. 열자마자 곧바로 채팅창이 떠올랐다.

[system: 안녕하세요, 방해인 님. <그레비티 in dating sim>을 플레이하던 중 궁금하거나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나요? 편하게 물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해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동안 의아해하고 혼자 추측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player : 백담호와 서해빛에게 있는 설정 조정 중은 소설 <그레비티>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system : 네, 두 공략 인물은 소설 <그레비티> 속의 주연이었기에 새 주연이 방해인 님이 되면서 그에 맞게 바뀌어 가는 중입니다.]

역시나 내 추측이…. 아니, 거의 확실하긴 했지만 백담호와 서해빛이 점점 소설 <그레비티>와 비슷해져 가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대체 <그레비티>는 무엇이고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는 어떻게 굴러가는 걸까.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 게임 자체가 현실과 많이 동 떨어지긴 했지만.

[player : <그레비티>는 무엇인가요, 실제로 존재하는 소설인가요? 제가 살고 있는 이곳과는 무슨 연관이 있죠?]

한 번에 많은 질문을 해서 그런지 작성 중을 알리는 ????…????이 꽤 오래 깜빡거렸다. 바로 한 가지씩 질문하라고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닌가 보다.

[sytem : <그레비티>는 소설이 아닙니다. 그저 방해인 님이 맞이할 수 있는 수많은 미래 중 한 가지에 제가 임의로 제목을 붙여 소설이라고 속여 알려 드렸을 뿐입니다. 이미 한 번 게임에 실패하셨기 때문에 조금 더 설정을 추가해 봤어요. 평행 우주처럼 수백 수천 가지의 미래 중 방해인 님의 원래 성격대로 살다가 맞이하는 가장 흥미로운 미래라고 생각되었기에 알려 드렸습니다. 이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책으로 내 보실래요? 꽤 잘 팔릴걸요. 제목도 똑같이 해도 돼요, 저작권료는 받지 않겠습니다^0^*]

“미친놈인가.”

자신이 쓰레기짓 하고 성격도 나쁘게 나오는 데다 아는 후배랑 현재 제 연인이랑 뒹구는 내용을 책으로 내라고….

웃기지도 않는 시스템의 농담에 해인은 짜증스럽게 창을 노려봤다. 그래도 솔직히 <그레비티> 내용 그대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아마 게임 시스템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서해빛한테 들이대다가 백담호하고 완전히 척을 지고 그러다 서해빛을 납치 시도까지 하는…. 그런 폐기 불가능 쓰레기가 되어 있을 거라는 건가.

그리 생각하니 차라리 게임 시스템이 나타나서 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어 해인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까지 쓰레기가 될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과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리 지금 성격이 바뀌었다고 해도 천성은 천성이었다.

게임은 제게 최악의 짓들만 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해인의 머릿속에 <그레비티>의 일부분 내용이 떠올랐다. 그것도 백담호와 서해빛이 함께 있는 내용과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그려졌다.

결국 마지막에 둘은 잘되었지, 해인은 심기가 불편해져 빠르게 머릿속을 지워 버렸다. 어차피 이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레비티>의 방해인과 지금의 방해인은 다른 인물이다. 지금의 자신은 누군가를 납치하고 뜻대로 패악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player : 왜 지금 제 상황이 소설 <그레비티> 하고 유사해지는 거죠? <그레비티>가 그저 일어날 수 있는 미래 중의 한 가지라면 굳이 설정 조정까지 해서 비슷해질 필요는 없잖아요. 날 좀 내버려 둬요. 개새끼야.]

생각으로 입력하다는 거다 보니 또 마지막에 쓸데없는 말까지 전송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속 시원했다. 이렇게 문의할 때 아니면 시스템한테 욕할 기회도 없었다.

[system : 전처럼 이었다면 상관없었겠죠.

하지만 방해인 님이 지금 참여하신 게임은 제가 <그레비티>라고 제목을 붙였던 미래의 설정을 기반으로 파생된 게임이기에 그에 맞춰 설정 조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괜히 이름을 <그레비티 in dating sim>이라고 지었겠어요? ]

시스템이 당당하게 나오니 해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리얼 어쩌고 게임에 참여했을 때는 지금처럼 정해진 스토리나 설정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누가 원했냐고….

해인은 또다시 느껴지는 침울함에 문의창을 슬프게 쳐다봤다.

[player :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system : 방해인 님이 무사히 공략을 클리어하는 것입니다.]

[player : 공략에 성공하면 이 게임은 제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나요?]

[system : 방해인 님이 원하신다면.]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원한다면 사라져 준다니 다행이었다. 과연 나중에도 시스템이 말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시스템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공략에 성공하면 게임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 문의창을 닫고 괜히 시스템 곳곳을 한번 쭉 살펴보다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그동안 잘 살펴보지 않아 낯선 아이템들이 쌓여 있었다.

예언자의 편지 1장, 두근두근 상대 마음 엿보기 아이템 2개, 공략 인물 슬롯 1칸 늘리기 아이템 1개, 공략 인물 1명 삭제 아이템 1….

“공략 인물 삭제….”

멍하니 중얼거린 해인의 머릿속에 썩 나쁘지 않은 방법이 떠올랐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자신이 ‘조연은 이제 주연’ 호칭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이 호칭은 메인 인물들의 관심을 일정 수치 이상 받았기에 생겼다고 했다. 관심이라는 건 호감도겠지. 게다가 저 호칭은 처음부터 호감도가 높았던 서해빛이 재등록되고 나서야 생긴 호칭이었다. 즉, 등록되지 않은 인물의 호감도는 수치화될 수 없고,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서해빛과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삭제한다면? 해인은 무언가 해결될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은색 테두리 안에 있는 공략 인물 삭제 아이템이 반짝였다. 해인은 그 반짝이는 칸으로 손가락을 가까이 했다.

[공략 인물 삭제 아이템]

공략 인물 슬롯이 부족한 당신께 추천드리는 아이템! 더 이상 공략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슬롯만 차지해서 불편하셨죠? 필요 없는 공략 인물을 냅다 치워 버리고 당장 새 공략 인물을 채워 보세요!

방법은 단순해요. 일단, 삭제하고 싶은 공략 인물의 호감도 ????30????이 필요합니다. 만약 부족하거든 호감도를 최소 30까지는 채우세요! 어차피 삭제할 건데 왜 올려야 하냐고요? 등록은 쉬워도 삭제는 어려운 법, 무분별한 삭제를 막기 위함이니 이해해 주세요.

호감도 30이 준비되었다면, 이제 삭제할 공략 인물이 근처에 있는 상태에서 호감도를 최대 10까지 쓰레기통 아이콘에 옮겨 주세요. 10 이상은 금물! 그렇게 호감도 30을 모두 쓰레기통 아이콘에 옮기면 공략 인물은 다음 날 자정이 되면 자동 삭제됩니다. 조금 번거롭기는 해도 먼저 등록한 건 당신이니 이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겠죠?

(주의, 공략 인물 삭제 아이템 사용 시, 해당 공략 인물의 ????공략 실패????가 아니라 ????공략 포기????로 처리되며 공략 실패와 달리 페널티나 리스크는 존재하지 않지만 재등록이 완전 불가합니다. 유념해 주세요.)

(주의, 호감도 10을 초과해 옮길 경우 해당 공략 인물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주의, 호감도 30을 옮기기 전까지는 아이템 사용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쓰레기통에 옮겨진 호감도의 1/2만 되돌아옵니다.)

재등록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어차피 다시 등록하지 않을 거니 상관없었고 페널티나 리스크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왜 진작 이 기능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다만 신경 쓰이는 건 ????호감도 30????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삭제할 인물의 ????호감도 30????을 쓰레기통 아이콘에 옮겨야 한다는 것은 호감도가 삭제된다는 뜻일까. 게다가 공략 인물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니, 얼굴을 보고 옮기라는 거잖아. 썩 고약한 조건이었다.

상대가 가진 호감도를 그 사람 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동이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에서 30을 빼 봤다. 제 잘못으로 훅훅 떨어져 버린 호감도에서 ????30????이 빠져나가면 겨우 ????42????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에 대한 호감이 순식간에 ????30????이나 떨어져 버린 백담호는 이 관계를 이어 나가려고 할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더 이상 관계가 꼬이지 않게, 방해하는 설정들을 없애기 위해 하는 일인데 끝이 나 버리면 안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백담호와의 사이를 좋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해인은 일렁이는 눈으로 인벤토리를 보다 또 문의창을 켰다.

[player : 공략 인물을 삭제하면 설정 조정은 진행되지 않고 취소되나요?]

[system : 네, 공략 인물 삭제된 인물의 설정 조정은 취소됩니다.]

공략 인물에서 삭제 인물의 설정 조정이 취소된다는 건, 삭제되지 않은 인물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의미였다. 결국 백담호의 설정 조정을 없애려면, 이 게임과 백담호를 완전히 분리하려면 공략 인물에서 삭제하는 것 말고는 현재 타개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player : 서해빛과 백담호, 둘 다 공략 인물을 삭제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을까요.]

문의창의 ????…????이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깜빡였다. 시스템이 마치 제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착각이 일어 해인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시스템의 대답이 오기도 전에 해인은 또 물었다.

[player : 당신은 내가 불행하길 원하는 건가요.]

시스템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짧은 대답을 보냈다.

[system :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시스템이 먼저 접속을 종료했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해인은 문의창이 사라진 허공을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보았다. 시스템은 서해빛과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삭제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을까요, 하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저녁이 다 되어 갈 때쯤, 서준이 돌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장바구니를 정리하고 해인의 침실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한 서준은 가볍게 노크를 했다. 온종일 방에서 아무것도 없는 백담호의 프로필만 눌러 보던 해인은 “네에.” 하고 외쳤다. 백담호와 했던 연락들을 읽고, 그가 보냈던 사진들을 보았을 뿐인데 벌써 하루가 다 지나간 모양이었다.

서준이 들어오자 해인은 고개만 비스듬히 돌렸다. 누가 봐도 우울한 티가 역력한 해인에 서준은 걱정스런 낯빛으로 다가왔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는 왜인지 다시 ????30????이 되어 있었다. 공략 인물을 삭제할 때 필요한 최소의 호감도.

그러고 보면 서준은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 걸까. 서준도 공략 인물로 등록되어 있긴 하지만 백담호나 서해빛에 비해 호감도가 훨씬 낮고 서준 자체로도 제게 무언가 특별히 하는 행동이 없어 신경이 덜 쏠렸다.

뭐가 어찌되었든, 강서준도 정리하는 게 좋겠지…. 해인은 더 이상 이 게임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했다.

“해인 씨, 어디 아파요? 표정이 안 좋아요.”

조심스레 서준은 해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떨어트리며 “열은 없네요.”라고 말했다. 해인은 조용하게 서준을 보다 눈을 내리깔고 물 먹은 솜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조금 기분이 안 좋을 뿐이에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해인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고 서준은 그런 해인을 내려다보다 나가는 대신 침대 끝자락에 앉았다.

“밥은 먹었어요? 냉장고 보니까 아침에 넣어 둔 그대로던데요.”

“아니요.”

해인의 목소리가 이불에 막혀 웅얼거리듯 작게 들려왔다. 두꺼운 이불에 얼굴이 완전히 파묻혀 작은 뒤통수만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서준은 그 뒤통수 위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다 거두었다.

“우울해도 밥은 먹어야죠, 해인 씨. 굶으면 더 우울해요.”

“…배가 별로 안 고파요.”

“오늘 나간 김에 회 사 왔어요. 해인 씨 회 좋아하잖아요. 매운탕이랑 대하도 같이 사 왔어요.”

해인은 조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꾸륵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어제 저녁부터 먹은 게 없던 위장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불 끝으로 살짝 드러나 있는 해인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서준은 작게 웃다 말했다.

“10분 뒤에 내려와요, 해인 씨.”

해인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10분 뒤, 해인은 터덜터덜 내려갔고 식탁에 도착하자 보이는 광경은 조금 놀라웠다. 큰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회와 버너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매운탕, 그리고 소금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대하와 아직 김이 나는 조개 구이까지 마치 바다에라도 온 듯한 풍경이었다.

“요즘 참숭어가 제철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와…. 대박.”

해인은 감탄하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순간적으로 우울했던 기분이 전부 잊히는 듯했다. 해인은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회부터 간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조금 두툼하게 썰린 참숭어 회는 고소했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해인은 감탄하면서 뒤늦게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 그러고 보니 해우 도련님께서 내일 단둘이 밥이라도 한번 먹자고 하시는데 뭐라고 답할까요?”

서준이 까 준 새우를 우물우물 먹던 해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방해우는 해인의 둘째 형이었다.

“방해우? 언제 한국 왔어요?”

“저번 주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깻잎에다 회를 두 점 올리던 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뭔 단둘이 밥이야. 친한 척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해인은 썰은 고추까지 마저 넣어 쌈을 싸고는 제 입에 꽉 차도록 집어 넣었다. 깻잎 향과 신선한 바다 향에 기분은 좋았지만 그와 함께 백담호가 떠올랐다. 백담호랑 회를 먹은 적은 없었지만 초밥은 잘 먹던 그였으니 회도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인은 식탁 위에 올려진 제 휴대폰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백담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직도 많이 화가 나 있을까, 연락해도 될까. 갑자기 찾아가면 안 되겠지….

- 이번 주말은 집에서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 괜찮지?

월요일에 보자는 말은 주말 동안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 * *

배도 부르고 상쾌하게 씻고 나오니 만족스러움과 동시에 백담호가 자꾸만 떠올라 우울한 기분이 뒤섞여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직 남은 과제가 있음에도 해인은 자꾸만 인벤토리만 멍하니 쳐다봤다. 정확히는 공략 인물 삭제 아이템만을 멍하니.

정말 설정 조정이 끝나면, 서해빛의 역할을 내가 대신하게 되고 백담호는 시스템이 만든 <그레비티>라는 설정의 백담호와 똑같아지는 걸까. 하고 싶으면 의사도 묻지 않고 좆을 박고, 수틀리면 욕도 하고, 다른 사람이랑 눈만 마주쳐도 그대로 질질 집으로 끌고 가 가두는 행동을 한다는 걸까.

해인은 그런 백담호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항상 다정한 백담호였기에, 강압적으로 굴기보다는 부드럽게 회유하고 오히려 불쌍한 척까지 하는 그였기에 해인은 자신에게 나쁘게 구는 백담호가 딱히 떠오르지….

- 신경 쓰여? 서해빛이? 왜 신경 쓰는데 걔를. 이미 끝난 관계잖아. 해인아. 어? 네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서해빛이 아니라 나야. 나라고. 어제 그렇게 가니까 미련이라도 다시 생겼어?

위협적이게 굴던 백담호가 떠올랐다. 자신이 잘못했으니 그가 화난 건 당연했지만, 그래도 조금 무서웠다. 오늘 같은 모습이 <그레비티>의 백담호와 비슷했다. 그러면, 백담호의 설정 조정이 완료되면 그는 매일 오늘처럼 행동하는 걸까.

하지만 해인이 아는 백담호는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정 조정 100%가 되면 오늘처럼 자신이 매번 백담호를 화나게 하는 걸까, 오늘보다 더한 잘못이라도 저지르기라도 하는 걸까.

백담호의 설정 조정 중은 곧 100%가 된다. 마지막에 정확히 1%를 남기고 멈춘 설정 조정 중은 아직까지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건 마치 1%가 채워지는 순간 무언가 큰 변화가 있다는 의미처럼 느껴져 해인은 불안했다. 백담호와 잘 지내고 싶었던 마음뿐인데 상황은 꼬이기만 한다. 코 끝이 시큰거려 한 번 훌쩍인 해인은 인벤토리를 닫으려다 멈칫거렸다.

????예언자의 편지????, 해인은 반짝이는 동색 테두리를 한 아이템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예언자의 편지]

당신의 선택이 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한가요? 아니면 앞으로 당신의 앞날이 궁금한가요? 그렇다면 예언자에게 자문을 구해 보세요. 예언자는 조금 불친절하더라도 당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줄 테니까요!

(주의, 최대한 간결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예언자는 5줄 이상 읽지 않습니다)

(주의, 최대 6개월 후까지의 미래만 알려 줍니다)

(주의, 예언자에게 편지를 보내고 난 후 극심한 피로가 몰려오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해인의 손 위로 둥글게 말려 붉은 리본 끈으로 묶인 양피지와 편지지와 깃펜이 떨어졌다. 붉은 끈을 풀어내니 얼룩덜룩하게 물든 베이지색 양피지는 꽤 중세풍 영화 소품으로 나올 것 같은 고전적인 느낌이 들었다. 윗부분에는 이미 ‘Dear. Prophet’이라고 적혀 있었다. 양피지에서 눈을 떨어트린 해인은 제 손에 들린 깃펜을 쳐다봤다. 잉크를 묻혀야 써질 것 같은데 잉크는 보이지 않았다.

새하얗고 큰 깃펜을 양피지 위에 대어 보니 검은색 점이 찍혔고 그와 동시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예언자의 편지 사용법]

1.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해 4줄 이내로 적습니다.

Ex) 내일 하루 어떨까요, 썸 타는 상대하고 공포 영화 보러 가도 괜찮을까요, 이 사람하고 사귄다면…… 등등

2. 다 쓰면 꼭 From.(player, 본인 이름)을 정확하게 적습니다. 제대로 적지 않을 시 편지가 누락될 수 있습니다.

3. 예쁘게 말아서 붉은 끈으로 묶고 창문이나 문을 향해 던집니다. 주변에 문이나 창문이 없다면 하늘을 향해 던집니다.

4. 답장은 다음 날 새벽이나 오전에 머리맡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사용법을 두 번 정도 꼼꼼하게 읽은 해인은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양피지를 놓고 깃펜을 움직였다.

[Dear. Prophet]

공략 인물인 백담호와 서해빛을 공략 인물에서 삭제한다면.

[From. player, 방해인]

짧지만 가장 정확한 질문이었다. 일부러 해인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인 ????공략 인물????까지 넣어 쓰기도 했다. 단 한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은 해인은 양피지를 조심스레 돌돌 말아 붉은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바로 창문을 향해 말린 양피지를 던지자.

“와.”

홀로그램처럼 생긴 큰 부엉이가 양피지를 낚아채더니 닫혀 있는 창문을 그대로 통과해 사라졌다. 이질적이고 신비로운 광경에 해인은 멍하니 어두운 창문 밖을 잠시 쳐다봤다. 옆을 돌아보니 깃펜도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로가 몰려와 해인은 기절하듯 옆으로 쓰러졌다. 이게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긴장했던 여파 때문인지 아이템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인지 해인은 헷갈렸다.

* * *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이 떠졌다. 잠들기 직전에 침대 끝자락에 쓰러진 것 같은데 일어나니 침대 정가운데에 누워 있었고 이불까지 꼭 덮어져 있었다. 해인이 뻑뻑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창문을 쳐다보니 아직 하늘이 까맸다. 시간을 보려 침대를 더듬거리는 해인의 손끝으로 무언가가 툭 걸렸다. 눈이 번쩍 떠졌다. 예언자의 편지였다.

해인이 곧바로 침대 옆 무드등을 켜자 편지 뒷부분에 ????Player. 방해인????이라고 적혀 있었고 뒤집으니 붉은 실링 왁스로 봉투가 봉해져 있었다. 대체 언제 답장이 온 거지. 자신이 잠든 사이에 눈치도 채지 못하게 도착한 편지가 조금 꺼림칙했지만 해인은 일단 뜯었다.

안에는 빳빳한 엽서 같은 종이가 나왔다. 그 종이에는 해인이 간결하게 보냈던 한 문장처럼 별로 길지 않은 단 두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서해빛, 공략 인물 삭제 성공. 주의 깊게 시도하면 별탈 없음.]

다음 줄로 넘어간 해인의 표정이 어둡게 경직되었다.

[백담호, 공략 인물 삭제 성공. 당신에 대한 기억 손실.]

* * *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던 피곤이 단번에 싹 가셨다. 해인은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방 안은 깜깜했다. 편지는 해인이 다 읽고 손에서 내려놓자마자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지만, 그 안에 적혀 있던 글자들은 여전히 해인의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백담호, 공략 인물 삭제 성공. 당신에 대한 기억 손실.????

당신에 대한 기억 손실. 이 게임은 사람 기억 가지고 장난질하는 데에 페티시라도 있는 걸까.

“내가 불행하길 바라지 않기는 무슨…….”

자조적인 중얼거림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듯 메말라 있었다. 차라리 자신이 기억을 잃는 게 훨씬 나을 정도였다. 백담호가 자신에 대해 잊는다는 건, 그건…. 그를 잃는다는 거나 똑같은 말이었으니.

대체 왜 서해빛은 멀쩡하게 삭제되는데 백담호는 기억을 잃는 건지 해인은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왜 하필 백담호가. 이 정도면 게임이 나서서 백담호와 자신의 사이를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문득, 어제 서해빛과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삭제하면 나는 지금보다 나아질까요, 에 대한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던 시스템이 떠올랐다.

시스템은, 알고 있던 거였다. 그러면서 가증스럽게도 자신이 불행하길 바라는 건 아니라고 했다. 짜증과 원망, 걱정, 혐오 등등 부정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가슴 속에 쌓이는 것 같아 답답했다. 해인은 그것들을 빼내려 깊게 숨을 흘려보냈지만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서해빛은 공략 인물을 삭제해도 백담호는 절대 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백담호의 설정 조정 중 때문에 자신과 백담호의 사이가 힘들어져도 곁에 있는 게 더 나았다. 차라리 자신이 버티고 노력해서 백담호의 호감도 100을 찍고 게임을 종료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게임이 그리고 있는 제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진 몰라도, 백담호의 옆엔 꼭 자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해인이 시스템창을 열어 백담호의 정보창에 들어갔다.

[공략 인물 정보]

이름 : 백담호(설정 조정 중 99%)

나이 : 22

키 : 190

여전히 설정 조정 표시는 99%에서 멈춰 있다. 마지막 1%는 그동안 올랐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단순히 자신이 가까이 있을 때 빠르게 오르고 멀리 있을 때 느리게 오르는 게 아니라 무언가 조건을 달성한다든지, 특정 상황에서 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게 대체 뭘까. 과한 추측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99%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가능성이 꽤 높았다. 힘없이 추욱 쳐져 시스템 창을 보던 해인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두 번 터치하니 화면이 켜져 밝은 빛에 눈이 찌푸려졌다. 잠금 화면에는 서해빛에게 온 문자 몇 통과 쓸모없는 알림들만 쌓여 있었다. 백담호가 월요일에 보자고 했지만 그래도 날이 밝아 오면 찾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자니 백담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금 두려웠고 또, 괜히 나서다가 설정 조정 중이 오를까 봐 무서웠다.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해인은 괜히 또 백담호와의 채팅창에 들어갔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는지 모르겠다. 어제 아침에서 뚝 끊긴 대화가 침울했다. 채팅창에 ????자?????라고 적고 다시 지웠다가 ????담호야.????라고 적었다가 또 지웠다.

자고 있겠지. 백담호. 많이 화났겠지. 내가 미안해. 보고 싶어.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 내가 정말 잘못했어. 실망했지….

무수한 해인의 말들이 채팅창에 써졌다가 흔적도 없이 지워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몇십 번이나 전하지 못한 말들만 적던 해인은 결국 고르고 고른 말을 보내 버리고 말았다.

[방해인 : 내일 너네 집 가도 돼…?] 오전 4:11 -1

충동적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었지만. 이왕이면 된다고 했으면 좋겠다. 해인은 허공에 떠 있는 백담호의 ????설정 조정 중????을 흘긋 쳐다보고는 닫았다. 어차피 삭제하지 못하면 결국 ????설정 조정 중????은 100%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백담호가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거칠게 대한대도 해인은,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백담호는 백담호였으니까.

백담호는 자고 있는 건지, 읽음 표시는 몇 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늦은 새벽인지라 해인도 딱히 바로 대답이 올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더 물끄러미 휴대폰 화면을 보다 끄려던 참이었다. ????1????이 사라졌다.

[백담호 : 지금 나와.] 오전 4:22

백담호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해인은 침대를 바로 벗어나 대충 롱 패딩만 입고 침실을 나갔다. 서준이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해인은 마음이 급해 발을 동동 구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신없이 나오느라 읽어 놓고 답장을 하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타자를 치던 중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 탓에 보내진 답장에 오타가 있었지만 해인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해인은 빠르게 달려 입구로 나섰다. 입구에는 백담호가 서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과 마주치자 해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춰 보이는 백담호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막상 백담호가 앞에 있으니 해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미소를 지을 수도, 사과를 할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어 해인은 주춤주춤 백담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화가 나 있을 텐데.

백담호와 해인의 거리가 다섯 걸음 남았을 때 해인은 겨우 입술을 떨어트렸다.

“담호야….”

떨리는 목소리에는 불안함이 가득했고 얼마 가지도 못하고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아슬했다. 그 위태로운 부름을 들은 백담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해인에게로 손을 건넸다. 제게 뻗어진 손을 보자마자 해인은 그대로 달려가 백담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품에 안겨 든 해인에 백담호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지만 금방 중심을 잡으며 해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해인은 백담호의 가슴에 더욱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에 안심이 되었고 제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평소와 같아 눈이 시큰거렸다. 입은 저절로 움직여 “미안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들려오는 애처로운 사과에 백담호는 조금 괴로운 낯빛을 하다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해인과 담호를 지나쳐 가는 바람이 지독하게도 차가웠다.

* * *

해인은 붉어진 눈언저리를 괜히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다 백담호의 옷에 생긴 눈물 자국에 민망함이 몰려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버렸다.

조용한 오피스텔 안, 백담호는 소파에 앉은 채 해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유자차는 다 식었지만, 양은 해인이 처음 가져왔을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집으로 올라와 소파에 자리 잡은 지 10분째, 백담호는 아무런 말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해인에게로 지긋이 기댄 몸이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았다. 무거운 정적에 해인은 몸을 조금 굳힌 채 곁눈질을 했다가 괜히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백담호는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잔잔한 기색으로 있을 뿐이다. 하아, 길게 내어진 백담호의 한숨에 해인은 살짝 움찔거렸다. 자신에게로 향한 한숨 같아서. 아마 맞겠지.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해인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피곤하면 올라갈까?”

백담호는 대답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살짝 뻘쭘해진 해인은 입을 다물었다. 백담호는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래, 일단 올라가자. 너도 피곤할 텐데.”

해인은 백담호를 만난 순간부터 전혀 피곤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올라가는 백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해인은 발걸음을 따라 옮겼다.

[설정 조정 중 99%]

[호감도 72]

방에 들어가자 백담호는 침대 끝자락에 앉았고 해인은 침대 서랍장 위에 있는 무드 등을 켰다. 어두운 방 안에 은은한 빛이 퍼졌고 해인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응시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백담호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해인을 불렀다.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앉자 백담호는 해인을 따라 몸을 사선으로 돌렸다. 백담호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다.

“난…….”

답지 않게 백담호는 말끝을 잠깐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불안해.”

“뭐가?”

해인의 동공이 커졌다. 마주하고 있는 백담호의 호감도 표시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지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숫자가 0.1초마다 바뀌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보는 현상에 해인은 백담호와 대화 중이던 것도 잊고 그의 머리 위를 입을 벌린 채 올려다봤다.

갑자기 미묘하게 어긋난 시선에 백담호는 서늘하게 눈을 내리깔았다가 벌어진 해인의 입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그제야 딴 길로 샜던 해인의 시선이 백담호와 완벽하게 부딪혔다. 해인의 입 속을 혀로 헤집어 놓은 백담호는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어 늘어트렸다가 입술을 미련 없이 떨어트렸다.

“모든 게.”

짧게 대답한 백담호는 얼굴을 물리고 먼저 침대에 누웠다. 해인은 여전히 커진 동공으로 백담호를 응시했다. 에러라도 난 듯이 숫자가 빠르게 바뀌던 호감도 표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바뀐 것은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점뿐이다.

[설정 조정 중 99%]

[호감도 77]

* * *

백담호가 점점 변해 가고 있다. 해인은 곤란한 눈으로 빈틈도 없이 들러붙어 있는 백담호를 흘긋 쳐다봤다. 날이 갈수록 백담호의 집착이 강해지고 있었다. 분리 불안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조금이라도 떨어지거나 해인이 혼자 어디를 가겠다고 하면 따라붙었다. 그래도 여기까진….

“담호야.”

“응, 해인아.”

“…화장실까진 안 들어와도 될 것 같은데.”

수업이 끝나고 화장실을 들어가려던 해인은 입구에서 곤란하게 백담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백담호는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전에 불안하다고 말하던 백담호가 떠올라 해인은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한 해인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백담호는 세면대 앞에 서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백담호가 볼일을 보는 옆까지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해인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겨우 일을 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백담호를 흘겨봤다. 백담호의 호감도가 이상했던 그날을 기점으로 그 뒤로도 가끔씩 백담호의 호감도 수치는 이상해졌다. 마구잡이로 숫자가 바뀌다 잠잠해지면 수치가 올라가 있을 때도 있었고 그대로일 때도 있었다. 문의를 해 보려 했지만 문의 시스템이 점검 중이라는 안내창만 며칠째 떠올랐다.

손을 다 씻은 해인이 나가자고 말하려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해인은 휴대폰을 꺼내는 대신 주머니에 손만 넣어 볼륨 버튼을 눌러 무음으로 바꿨다. 보나 마나 서해빛일 게 분명했다. 또 공략 실패 경고가 뜰까 봐 가끔씩 메시지에 답장 정도는 해 주고 있지만 갈수록 전화 빈도가 많아지는 게 서해빛부터 얼른 공략 인물을 삭제해야 할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그 공략 인물에서 삭제를 하려면 대상 근처에서 해야 한다는 건데. 운명의 장난인지 전에는 껄끄러워도 꼭 하루에 한 번 이상 마주치던 서해빛이 보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백담호의 설정 조정 수치가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인은 혼자 추측해 볼 뿐이었다.

애초에 하루에 한 번 이상 마주치던 시기는 백담호의 설정 조정이 ‘5’단위였을 때였다. 그전까지는 지금처럼 서해빛은 학교에서 마주치기가 힘든 편이었다. 그러니 백담호의 설정 조정이 멈춤으로 인해 마주치던 일이 없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공략 인물 삭제를 조금 더 빨리했더라면, 하고 해인은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나가자.”

잠잠해진 주머니에서 해인이 손을 빼며 몸을 돌리니 기다렸다는 듯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계속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또다. 백담호의 머리 위 호감도 수치가 빠른 속도로 변하며 지직거렸다. 해인은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물었다.

“왜?”

“오늘은 끝나고 영화나 볼까 해서.”

불안하게 바뀌는 호감도와 달리 백담호는 짐짓 평소랑 다를 바 없이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지직거리던 숫자가 멈췄고 호감도는 ‘1’이 올라가 있었다. 해인은 저 올라간 호감도 ‘1’이 집착 또는 소유욕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왜 저렇게 지직거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영화관 가서?”

“아니, 집에서.”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담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화장실을 나가는 해인과 나란히 붙었다. 해인과 백담호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학교가 끝나면 해인은 제 오피스텔이 아니라 백담호의 오피스텔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해인의 행동반경은 학교와 백담호의 오피스텔, 단 두 곳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오피스텔에 한 번 들어가면 잠깐 편의점 가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럴 때마다 지금 이런 상태로 지내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괜히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해인은 침묵한 채 백담호가 원하는 대로 따랐다.

걷다 보니 어느새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금요일 마지막 교시, 교양이었다. 유일하게 서해빛을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 해인은 오늘 서해빛을 공략 인물에서 삭제할 생각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해인은 눈을 굴려 서해빛을 찾았다.

서해빛은 맨 뒷자리, 해인과 백담호가 늘 앉는 자리 옆에 앉아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해인은 서해빛의 머리 위를 봤다.

[설정 조정 중 76%]

[호감도 71]

당연하게 설정 조정 수치와 호감도 표시가 보였고 그 옆에는 쓰레기통 모양의 아이콘이 생성되어 있었다. ‘공략 인물 아이템’이 게임 내의 상점에서 판다는 것을 알게 된 날, 해인은 바로 서해빛에게 아이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서해빛의 설정 조정도 99%와 그렇게 멀지 않았다. 서해빛은 설정 조정으로 형질이 변했고 공략 인물을 삭제하면 설정 조정이 취소된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서해빛의 형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해인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서해빛과 마주하며 호감도를 옮기려는 순간, 시야가 큰 등판에 가로막혔다.

쾅,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강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넘어진 의자와 함께 서해빛이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해인이 비명을 지르듯 “백담호!”라고 외치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 씹.”

넘어지면서 손목이 꺾였는지 서해빛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목을 주무르다 백담호를 살벌하게 올려다봤다.

“미쳤어요?”

“미친 건 너겠지. 네가 할 짓이 없어서….”

백담호는 발로 서해빛의 발목을 짓밟으며 허리를 수그렸다.

“어디서 자꾸 개수작을 부려. 내가 눈에 띄지 말라고 말했지.”

주변의 시선이 보이지도 않는지 백담호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았고 서해빛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해인은 서해빛의 모습이 소설…, 어쩌면 제 미래가 되었을 <그레비티>의 방해인과 자꾸만 겹쳐 보였다. 아슬한 분위기 속에 서해빛은 비죽 한쪽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불안해요?”

백담호의 눈가가 순간 움찔거렸다. 대답 대신 서해빛의 멱을 거칠게 잡아 올린 백담호의 얼굴에는 여유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해인이 다시 한번 백담호를 부르며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서해빛을 노려보던 백담호의 고개가 느리게 돌려졌다. 백담호와 눈을 마주한 해인은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백담호의 떨리는 동공처럼 그의 호감도 수치가 또 에러 난 듯이 지직거렸다.

백담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서해빛을 던지듯 손을 놓아 버리고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 안의 분위기는 무거우면서도 소란스러웠다. 해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서해빛을 쳐다봤다. 또 이 구도였다. 지난번 화장실에서의 일이 생각나 해인은 마치 귓가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들리는 것만 같아 눈을 꾸욱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빠르게 뛰는 맥박에 해인은 마른침을 삼키고 백담호의 옆에 앉았다. 다행히도 서해빛이 쓰러진 의자를 세우고 해인과 조금 떨어진 앞자리에 앉았다. 조별 활동이 끝나 서해빛이 더 이상 맨 앞자리에 앉을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해인은 슬쩍 백담호를 쳐다봤으나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지직거리는 호감도는 여전히 불안감을 주었다. 해인은 저 호감도가 어떨 때 저렇게 되는지 아주 약간 알 것 같았다.

저건 백담호가 불안하다는 뜻 같았다.

* * *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백담호는 침묵했다. 심지어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아 해인은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가끔씩 옆을 돌아봐 백담호가 있는지 확인했다. 여전히 호감도는 지직거리고 있다는 점도 같이 알 수밖에 없었다. 전보다 유독 진정되지 않는 호감도는 아무래도 서해빛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백담호에게 있어 서해빛은 가장 위험인물일 테니까.

자신과 한 짓도 있고 제 주변이 <그레비티>처럼 변해 가고 있으니 백담호는 서해빛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레비티>에서의 방해인과 백담호가 서로 적이었듯 이제는 서해빛과 백담호가 서로 적이 되어 버렸으니.

이제 다음 달이면 종강이니 서해빛과 백담호, 그리고 자신이 마주치는 일이 줄어들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백담호도 지금 이 상황이 화나고 힘들겠지만 해인도 계속 크고 작은 다툼들과 불안, 그리고 긴장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 갔다. 해인은 크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약간 틀어 서해빛의 뒤통수를 봤다. 벌써 설정 조정 수치가 ‘80’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걸 보니 머리가 지끈거려 해인은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시선을 옮겼다.

서해빛의 호감도 표시 옆에 있는 쓰레기통 아이콘을 봤다. 호감도를 옮기려면 대상 인물의 근처여야 한다고 했다. 해인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 거리면 ‘근처’의 범주에 들었다. 하지만 이 거지 같은 게임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조금 긴장됐다.

아까 빠르게 할걸. 아쉽기는 했지만 서해빛과 한 공간에라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백담호가 서해빛을 대하는 태도가 날이 갈수록 더 격해진다. 지직거리는 백담호의 호감도는 아직도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서해빛의 공략 인물 삭제를 서둘러야 할 성싶었다.

호감도가 30이나 깎인 서해빛은 전만큼 달라붙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백담호도 지금 보다는 훨씬 안심할 것 같다.

호감도를 옮기는 방법이…. 해인이 아주 작게,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정말 작게 중얼거렸다.

“공략 인물, 서해빛 호감도 옮기기 시작.”

처음 옮길 때는 이렇게 말로 뱉어 줘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부터는 굳이 말로 뱉을 필요가 없다고 했고. 해인은 옆을 힐끔거렸다. 백담호는 아직도 앞만 보며 미동이 없었다. 다행히 제 속삭임을 듣지 못한 것 같아 해인은 안도했다.

이제 다시 서해빛 쪽으로 고개를 티 나지 않게 트니 호감도 표시 옆에 있던 쓰레기통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 해인이 서해빛의 호감도 표시를 빤히 쳐다보자 쓰레기통 위에 숫자가 생겼다. 0부터 보이던 숫자가 10이 되자 자동으로 멈추고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알림]

공략 인물 서해빛의 호감도 10을 정말 쓰레기통에 버리겠습니까?

(주의, 앞으로 2주 안에 공략 인물 삭제를 완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시 호감도만 소멸되고 인물 삭제는 되지 않습니다)

[예 아니오]

표현이 더욱 격해져 있었다. 전에는 옮긴다고 하더니 이제는 버린단다. 호감도를 옮기는 통을 쓰레기통이라고 정한 건 자기들이면서 죄책감은 플레이어가 느끼게끔 하려는 수작이 짜증 났다. 애초에 게임 참여도 억지로 시킨 거면서.

지금 이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도 모두 게임 탓이었지만 자의든 타의든 게임을 플레이하는 주체는 자신이기에 해인은 밀려오는 죄책감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떠한 일이든 해인의 행동에 따라 이루어졌으니까.

쯧, 가볍게 혀를 찬 해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예’를 선택했다. 쓰레기통 위에 까맣게 써진 ‘10’은 붉게 변하더니 갑자기 종잇장 구기듯이 구겨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그 기가 막힌 연출에 해인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러니까 정말 사람 마음을 쓰레기통에 버린 못된 인간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아니, 호감을 버린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려나. 그래도 정말이지….

“개 같네.”

해인은 나직하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쓰레기통 뚜껑이 닫히더니 호감도 옮기기에 성공했다는 창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호감도 옮기기가 무난하게 끝났다. 이 정도 거리에서도 옮겨진다면 굳이 교양 시간이 아니더라도 길거리에서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교양 시간에 하는 게 제일 안전하긴 하겠지. 2주면 알맞게 서해빛의 호감도를 옮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주 교양과 다다음주 교양.

해인이 서해빛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떨어트리려는 순간, 해빛이 얼굴을 조금 수그리더니 한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냥 머리를 기댄 것일 수도 있지만 타이밍이 타이밍인 터라 해인은 서해빛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뭐지, 뭐가 잘못되었나?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해인의 두 눈가가 심각하게 찌푸려졌다.

서해빛은 몇 초간 관자놀이를 짚은 채 있다가 스르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서해빛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해인을 바라봤다.

[설정 조정 중 81%]

[호감도 61]

그 시선에 해인은 해빛에게 소리 없이 벙긋거리며 이유를 물어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해인의 손목을 백담호가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백담호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의 호감도는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게 지직거리고 있었다. 해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제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은 백담호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그러자 불안정한 호감도의 움직임도 조금 잦아든 듯했다. 하지만 완전히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아 해인은 백담호의 정보창을 열었다.

호감도 밑으로 나열되어 있는 세부 감정 목록들의 숫자가 백담호의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 표시처럼 숫자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그전에는 호감도 표시가 진정되고 나서 봤기 때문에 이 광경은 처음이었다.

정신 사납게 변하는 숫자들을 혼란스러운 낯으로 보던 해인은 불투명한 정보창 너머로 자신을 보고 있는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에는 불안, 의심과 같은 것들이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해인은 순간, 과연 서해빛을 공략 인물 삭제한다고 상황이 나아질까 하는 막연한 의심이 들었다.

[백담호, 공략 인물 삭제 성공. 당신에 대한 기억 손실.]

정갈하게 적혀 있던 문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 * *

해인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커다란 화면에 재생되는 영화를 멍하니 봤다. 백담호는 해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고 두식이가 소파 등받이 위에 식빵 굽는 자세로 앉아 같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서준에게 집에 안 들어갈 것 같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해인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잡혀가듯 백담호의 오피스텔로 왔다. 해인은 옆에 놓인 콜라 맛 젤리를 우물우물 먹다가 하나를 백담호의 입에 갖다 대었지만 백담호는 고개를 저었다.

백담호는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주방 한쪽 수납장을 젤리와 초콜릿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자신도 제집에 이만큼이나 간식을 쌓아 두지 않았다.

백담호가 거부한 젤리를 먹던 해인은 영화 대신 백담호의 옆얼굴을 내려다봤다. 지직거리던 호감도는 진정할 생각이 없는 듯 계속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백담호는 편안해 보였지만 숨겨진 속내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서해빛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진정하지 못하는 백담호의 호감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해인의 온 신경이 쏠려 있는 와중에 해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하니 서해빛의 전화였다. 아까 호감도를 쓰레기통에 옮기고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서해빛이 떠올랐다. 그때 왜 무슨 문제 있냐고 묻고 싶기는 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해인이 볼륨 버튼을 눌러 진동을 꺼 버리고 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서해빛?”

백담호가 물었다.

무의식적으로 “아니!”라고 나올 뻔한 말을 삼키고 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들킬 거짓말의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다는 걸 알기에 해인은 최대한 솔직하기로 했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가자 해인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근데 받을 생각은 없었어. 정말이야.”

제 말이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해인은 휴대폰을 멀찍하게 치우려 했다. 하지만 백담호가 해인에게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어떻게 봐도 휴대폰을 달라는 뜻 같아 해인은 고분고분 백담호의 손바닥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진동만 꺼졌을 뿐 휴대폰 액정에는 ‘서해빛’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떠 있었다.

자신이 서해빛에게 전화를 건 것도 아닌데 해인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백담호는 액정을 가만히 보다가 수신 거부를 터치하고는 휴대폰 전원을 종료시켜 버렸다. 웅-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듯 울린 휴대폰이 완전히 꺼지고 백담호가 얼굴을 조금 틀어 해인을 올려다봤다.

백담호는 화내지 않았지만, 기분이 가라앉은 게 확실했다. 겨우 전화 한 통으로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서리라도 낀 것처럼 차가워졌다. 소파 등받이에 앉아 있던 두식이는 눈치 빠르게 폴짝 뛰어 해인을 놔두고 유유히 제 하우스로 들어가 버렸다.

“해인아.”

제 이름을 담은 목소리가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으응.”

“번호 바꿀까?”

응, 이라고 하기에도 싫다고 대답하기도 힘든 질문에 해인은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번호를 바꾸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여기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 백담호가 좋아할까? 이전의 백담호는 제 번호를 캐묻지 않고 직접 줄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어떤 게 백담호의 진심일까.

몇 시간째 계속 수시로 바뀌는 백담호의 호감도는 더 이상 해인에게 어떠한 힌트도 주지 못했다. 해인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백담호는 물었다.

“아예 폰까지 바꾸는 건 어때.”

해인은 백담호가 원하는 답을 찾으려 얼굴을 빤히 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동시에 약간의 절망감도 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잘못했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긴 했지만 백담호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는 거다. 앞으로 서해빛이 제게 관심을 끈다고 백담호의 불안이 완전히 수그러들 수 있을까?

제가 백담호의 불안을 없애 줄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하면서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그런 절망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해인은 가늘게 숨을 흘리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이 그나마 백담호를 안심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응, 바꿀게.”

백담호는 조용하게 해인을 응시하기만 했다. 묘한 표정이었다. 백담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어 버렸다. 부쩍 백담호도 말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해인은 불안해져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바꿀게.”

곧이어 백담호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진심은 아니었어. 해인아.”

백담호는 부정했지만 해인은 오히려 그 말이 진심임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해인은 그저 “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우리는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내게 되는 건가. 서로의 진심을 읽기 위해 떠보고 눈치를 보고……. 해인은 생각하다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일단, 일단 서해빛의 공략 인물 삭제를 하고 나서 그다음을 생각해야겠다.

그래도, 자신과 백담호 사이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건 서해빛이었으니까. 그가 해결되면 지금보단 낫지 않을까 하고 해인은 실낱같은 희망을 억지로 움켜잡았다.

* * *

‘누구십니까, 나 알아요?’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린 백담호가 내 손을 먼지 털어 내듯 떨어트렸다. 그 냉정한 모습에 내 이름을 외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가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백담호가 뒤돌아 멀어질 때까지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감고 있던 해인의 눈이 번쩍 떠졌고 깜깜하고 뿌연 천장이 바로 보였다.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명확해지면서 한쪽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윽, 성의 없게 닦아 낸 해인은 옆을 돌아봤다. 심장이 쿵쿵쿵 가슴을 때릴 듯이 뛰었다. 백담호는 제게 팔베개를 해 준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긴장감이 풀리면서 안심이 됐다.

꿈인 걸 알긴 했지만, 어찌나 생생한지 꿈꾸다가 운 건 또 오랜만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개꿈이라고 여기고 싶지만, 만약, 정말로 만약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삭제를 하게 되면 백담호는 꿈에서처럼 낯선 이 보듯이 보고 떠나 버리겠지.

절대 백담호 공략 인물 삭제는 하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가끔씩 이 선택이 맞는 건지 혼란스럽다. 삭제를 안 하는 게 맞는 건가 하고. 설정 조정, 누가 이딴 걸 원했다고 함부로 칭호를 주고는 제멋대로 진행하는 건지. 지금 이 모든 상황은 저 설정 조정 때문에 벌어졌다.

서해빛이 갑자기 오메가가 된 것도, 백담호의 집착이 심해지는 것도. 마치 자신의 탓인 것처럼 구석에 몰아넣고 있지만 이렇게 흘러가게 만든 건 시스템이었다. 해인은 전부 시스템 탓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제는 전부 자신 때문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임을 억지로 하도록 시킨 건 시스템이었지만, 그때 끝까지 하지 않겠다고 그냥 월 25만 원 받고 살겠다고 버틸 걸 하고 후회를 했고, 기억을 잃기 전 서해빛의 공략 실패 루트가 떴을 때 그에게 갔을 걸 하고 또 후회가 들었다. 아니, 애초에 서해빛이 아무리 공략 인물로 되었다고 한들 진짜로 공략을 시도해서는 안 되었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왔다 갔다 했다. 후회해 봤자 바뀌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계속 이미 지난 일들에 대해, 이랬더라면, 이렇게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시스템에게 <그레비티>가 평행 우주처럼 이곳의 미래 중에 하나라고 들은 이후부터 그 강도는 더했다. 다른 우주의 내가 선택한 세계도 있겠지, 그곳은 어떨까 하고 훔쳐보고 싶을 정도였다. 백담호도, 자신도 지금 이 두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짜증과 우울, 분노, 절망을 꾹꾹 압축한 것을 삼킨 기분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와 해인은 마른세수를 하다 옆으로 돌아누웠다. 계속 생각해 봤자 스트레스만 받을 뿐이었다. 그만, 그만 생각하자. 해인은 감내하기 힘든 감정들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새 잠이 깼는지 눈을 감으니 졸리기는커녕 더욱 생각만 또렷해졌다. 이리저리 산발적으로 튀어 나가는 상상들에 결국 눈을 벌떡 뜨고 침대 옆을 더듬거려 제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계속 꺼져 있던 휴대폰을 켰다.

켜자마자 부재중 전화 2건과 메시지 3통이 와 있었다. 전부 서해빛이었다. 해인은 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서해빛 : 와 전화를 그냥 꺼 버리네요] 오후 4:56

[서해빛 : …뭐, 됐어요. 그냥 아까 잠깐 좀 이상해서 걸었어요.] 오후 4:56

[서해빛 : 어차피 전화 안 받을 거 알았고……. 그래도 나중에 답장이라도 해 줘요.] 오후 4:57

해인은 보기만 하려 했지만 아까 잠깐 좀 이상했다는 말이 눈에 걸렸다. 이 ‘아까’는 아마 자신이 서해빛의 호감도를 쓰레기통에 옮겼을 때가 분명했다. 고민하던 해인은 뒤를 힐끔 쳐다보고 답장을 했다.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

[방해인 : 이상했다고? 뭐가?] 오전 3:13 -1

해가 뜨고 나서야 올 줄 알았던 답장은 채 3분이 지나기도 전에 도착했다.

[서해빛 : 형 안 자네요?] 오전 3:15

[방해인 : 자다가 깼어.] 오전 3:16

[방해인 : 그래서 뭐가 이상했는데?] 오전 3:16

서해빛은 메시지를 읽었지만 바로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해인은 밝게 빛나는 액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렇게 4분이 지나고 나서야 서해빛은 ‘별거 아니었어요 ㅎㅎ 자다 깼으면 피곤할 텐데 더 자요 형!’이라고 보냈다. 김이 빠졌다. 당사자가 별거 아니라는데 계속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었다.

메시지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니까 괜찮겠지. 해인은 짧게 ‘그래, 너도.’라고 보내고 창을 닫고 잠이 완전히 깨어 버린 탓에 SNS 어플을 켰다. 온갖 자랑, 허세가 담긴 사진과 과장된 사기 광고들을 하릴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뒤에서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자고 뭐 해.”

화들짝 놀란 해인이 휴대폰 화면을 끄고 뒤를 획 돌아봤다. 불과 몇 분 전에 서해빛이랑 연락을 해서 더 긴장되었다.

“아, 자다가 깨서 그냥 폰하고 있었어. 다시 잘 거야.”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본 정자세로 고쳐 눕자 해인의 목 뒤에 놓인 백담호의 팔이 스르르 안으로 굽었다. 그와 동시에 해인의 몸도 같이 옆으로 돌아가며 끌려가 백담호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 버렸다.

너른 가슴팍에 해인의 얼굴이 묻혔고 숨을 쉴 때마다 짙은 백담호의 체향이 맡아졌다. 몸을 꽉 옭아맨 팔이 불편하기도 하고 또 안정감이 들었다. 해인은 숨이 좀 막혔지만, 그냥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담호의 품에서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았던 눈을 뜬 백담호는 검은 물길을 헤집는 듯한 시선으로 침대 위에 엎어진 해인의 휴대폰을 바라봤다.

* * *

침대에 대 자로 뻗어서 자던 해인이 끙끙거리며 눈을 떴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들어온 건지 두식이가 해인의 가슴팍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

처음 봤을 때에 비해 몸집이 커진 두식이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해인이 그런 두식이를 내려놓으려 손을 뻗자 눈치 빠른 두식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빠르게 침대를 내려가 버렸다. 가슴 위에 남은 온기를 느끼던 해인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자신은 혼자 누워 있었다.

백담호는 이미 일어났나? 의아함에 몸을 일으키며 해인은 부스스한 제 머리칼을 문질렀다. 침실을 나가 보니 오피스텔이 휑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서서히 불안감이 든 해인이 다시 침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찾으려 침대를 살폈지만, 침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내 폰 어디 갔어…?”

자다가 떨어졌나 싶어 해인은 침대를 밑까지 뒤적였지만 보이지 않았다. 증발이라도 한 듯 침실 어느 곳에서도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백담호는 없고 휴대폰도 사라졌다.

‘번호 바꿀까?’

‘아예 폰까지 바꾸는 건 어때.’

문득 어제의 백담호가 떠올랐지만, 해인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일 거라고 해인은 생각했다. 이미 서해빛 때문에 불안한 상태에서 그의 연락까지 왔던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백담호가 진심은 아니라고 정정까지 했다. 그러니 백담호가 자신 몰래 휴대폰을 바꾸러 갈 이유가 없었다.

해인은 애써 자꾸만 드는 의심을 무시했지만, 해인도 사실 알고 있었다. 현재 상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해인은 다시 휴대폰을 찾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바닥에 떨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가끔씩 물건이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도 나오지 않을 때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찾는 것처럼.

그러나 침실에는 없었다. 해인은 침실 구석구석을 찾다가 결국 거실로 나왔다. 나와서 소파 밑을 살피고 주방 곳곳을 살피다 못해 두식이가 물고 갔나 두식의 하우스까지 뒤적였지만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집 안 곳곳을 누볐더니 진이 빠진 해인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역시 이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백담호가 제 휴대폰을 가져가 버렸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함부로 제 휴대폰을 가져가는 것은 분명 연인 사이를 넘어서서 가족끼리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해인도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바꾸러 가자고 말이라도 하지. 그랬으면 해인도 별말 없이 바꾸러 갔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몰래 가져가다니. 뭐 바꾸러 가자고 하면 자신이 싫다고 화라도 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동안 자신을 보고도 이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싶었다. 생각하다 보니 해인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자신이 잘못한 것은 맞았다. 백담호도 그 일로 크게 충격을 먹었을 테고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뒤로 얼마나 자중하고 미안해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제 노력이 전부 백담호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해인은 화가 나는 동시에 우울해졌다.

하나하나 잘못을 따지고 들어가자면 끝이 없겠지. 자신도 백담호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 할 말이 없었다. 백담호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을까? 서해빛과 그런 일이 있던 날……. 아마 더 했겠지?

‘그런데 왜, 말해 주지 않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분노와 원망이 어린 백담호의 목소리가 깊게 아직도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해인은 백담호가 못 미더운 게 아니다. 단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백담호도 자신과 똑같이 느끼고 있기에 이런 걸까. 그리 생각해 버리니 화는 빠르게 사그라들고 말았다.

기운이 쭉 빠진 해인은 소파 팔 받침대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거꾸로 된 집 안 풍경이 낯선 느낌을 줬다. 이대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해인은 홀로 남은 오피스텔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휴대폰도 없이 오피스텔에 꼼짝없이 잡혀 있으니 마치 감금이라도 당한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헛웃음이 나왔다. 백담호의 설정 조정이 완료되면 자신은 <그레비티>의 서해빛처럼 감금이라도 당하려나. 물론 <그레비티>에서도 감금은 3주였나, 한 달이었나 얼마 가지 않고 끝나 버리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가기 않길 바라지만 만약 백담호가 진짜로 자신을 가둬 놓으려 한다면 어떡하지. 애초에 서해빛은 왜 감금까지 당한 거였더라. 해인은 게임 시스템이 제게 준 <그레비티>에 관한 것을 떠올리려 눈을 찌푸리다 고개를 조금 비틀었다. 그러다 굳혀 닫혀 있는 어두운색의 방문을 응시했다. 전에 한 번 열어 봤을 때 창고로 쓰이는 빈방 같길래 그 뒤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었다. 혹시 저기에 휴대폰이….

“있을 리는 없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생각에 쓰게 웃고는 고개를 다시 돌리려던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 백담호가 보이지 않았다. 서해빛은 온몸이 지끈거렸지만 늘 제 옆에 있던 백담호가 없다는 불안감에 집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건 어제 백담호가 깨부셨으니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해빛은 늘 굳게 닫혀 있는 문으로 시선이 향했다. 이곳에 매일같이 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간 적 없었던 방이었다.

백담호가 들어가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해빛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암묵적인 느낌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해빛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열었다. 잠겨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문은 쉽게 열렸다.

“아.”

당황스러운 해빛의 탄성이 울렸다. 낯선 방의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고문할 때 쓰일 법한 난잡한 기구들이 가득한 공간 한가운데 병원 침대 같은 것이 달랑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영화에서 죄인에게 채울 법한 족쇄와 아주 두꺼운 쇠사슬까지 놓여 있었다. 보면 안 될 걸 봐 버린 기분에 해빛은 황급히 몸을 돌려 나가려 했지만, 다리가 굳고 말았다. 차분하게 미소 짓고 있는 백담호가 입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저 방이…. 원치 않았으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자들에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해인은 일어나서 현관을 한번 봤다가 다시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봤다. 서해빛과 자신의 다른 점이라면, 자신은 이미 저 방을 한 번 들여다봤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분명 그냥 잡동사니만 좀 있던 빈방이었는데.

해인은 일어나 문으로 향했고, 문고리를 조심스레 잡았다. 금속의 차가움이 유독 날카롭게 느껴지는 듯했다.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문고리를 돌렸다. 만약 서해빛이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는 척하고 얌전히 감금당할 날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처형을 기다리는 죄수도 아니고 이게 지금 뭐 하는 건가.

해인은 허탈했다. 그러다 문을 열어젖힌 해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다 이내 보이는 방 안 풍경에 크게 숨을 내쉬었다.

처음 봤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낡은 책꽂이 두 개와 천으로 덮여 있는 그림 액자로 추정되는 것은 처음 봤을 때도 있었던 것이고 허리 언저리까지 오는 작은 서랍장이 하나 추가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SM 도구라든가, 누가 봐도 감금당한 사람이 지낼 만한 철제 침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싶어 해인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서랍장이 눈에 밟혔다. 단순히 서랍장일 뿐인데 그저 이 상황에 새로 추가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결국 해인은 나가려던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총 6개가 있는 서랍을 위에서부터 열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섯 개의 서랍은 텅 비어 있었다. 역시 혼자 앞서나간 건가.

두려움에 떨던 해인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마지막 서랍을 열려고 손잡이를 당겼으나 열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안에서 무언가가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손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덜컹, 서랍장을 힘주어 당기자 안에서 큰 마찰음과 함께 쨍한 금속 소리도 같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해인이 계속 열리지 않는 서랍장을 당겼고 시끄러운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잠재웠던 불안과 의심이 몸집을 키웠다. 이 서랍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야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양손으로 잡아당기자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서랍장이 쓰러지며 해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열린 서랍 안에는 죄인이 찰 법한 족쇄와 쇠사슬이 있었다. 서해빛이 봤던 것과 똑같은.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이 백담호가 정말 <그레비티> 속의 백담호처럼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백담호의 설정 조정이 완료되면, 그 백담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좋아하던 백담호라고 할 수 있을까.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해인이 번들거리는 쇠사슬을 바라보던 때였다. 띠링,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해인은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방을 나왔다. 다행히 현관에는 벽이 있어 이곳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해인이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던 때였다.

“벌써 일어났네, 해인아.”

화들짝 놀란 해인은 그만 문고리를 놓쳤고 걸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라 해인이 백담호를 등진 채 떨림을 최대한 감추며 대답했다.

“어어…. 잠이 깨서. 근데 넌 어디 갔다 왔어?”

“나 할 게 있어서.”

해인의 등 뒤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뒤를 돌아봐야 하나 해인은 곤란하게 인상을 찡그렸다가 결국 어색한 미소를 지어 내며 몸을 획 돌렸다. 몸을 돌리자마자 백담호가 바로 두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는 바람에 해인은 어깨를 움찔했다.

“할 일? 아침부터?”

애써 웃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어색한 표정이었다. 백담호와 등지고 있던 짧은 순간, 해인은 솔직히 말해 볼까 생각해 봤지만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너 혹시 나 감금할 생각이니?’라고 물었는데 ‘응’이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역시도 결정하지 못했다. 해인은 떨리고 있는 제 입매도 모른 채 백담호를 보다 눈을 돌리고는 능청스러운 척하며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해서 아침에 말도 없이 갔어?”

대답이 없었다. 소파 등받이에 자연스러운 척 올라간 해인의 손이 긴장감에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해인아.”

해인은 백담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자 백담호는 해인의 등 뒤로 바로 붙어 해인의 팔을 지나 소파 등받이에 올려진 그의 손을 감쌌다. 뻣뻣하게 경직된 몸이 들킬까 해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어느 순간보다 백담호가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방에서 족쇄랑 사슬 봤다고 말해 버리는 게 나은 선택인 건가, 해인은 끊임없이 결과를 알 수 없는 고민을 했다.

“미안해.”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해인은 바로 백담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몇 번이고 백담호의 말을 곱씹어 보고 나서야 어벙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응?”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서랍장에 있던 족쇄에 대한 것인지, 아님 자신을 가둘 생각에 대한 것인지. 시선 끝자락에 걸쳐 보이는 백담호의 표정은 사과하는 사람치고 차분했고 인위적인 미소였다.

“아침에 네 폰 망가트렸거든. 그래서 내가 새로 사 왔어. 미안해.”

아, 해인은 짤막하게 탄성을 뱉었다. 백담호는 종이 가방이 들려 있는 반대 손을 해인의 앞으로 둘러 보였다. 안에 들어 있는 길쭉한 박스가 해인의 눈에 들어왔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휴대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해인이 말없이 종이 가방만 바라보자 백담호가 말을 이었다.

“새로 사는 김에 번호도 바꿨는데….”

말꼬리를 늘리는 게 고의적이었다. 자신의 반응을 간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정말, 백담호가 마음대로 제 휴대폰을 바꿔서 돌아왔다.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서랍장에서 본 족쇄와 떠오른 <그레비티>의 장면이 충격과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백담호가 종이 가방을 한번 흔들었다. 얼른 건네받으라는 행동에 해인은 경직된 채 종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번호까지 마음대로 바꾸냐고 따져야 할까, 아니면 저 방에 있는 족쇄는 누구에게 쓰려고 있는 거냐, 나를 가두고 싶은 거냐,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고 화를 내야 하는 걸까.

묻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자신이 그동안 백담호에게 잘못한 일들과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 감정, 그리고 속절없이 덮쳐 오는 두려움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인아?”

가만히 있는 해인을 백담호가 짐짓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스르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해인이 나왔던 방문을 흘긋 쳐다봤다.

“내가 무서워?”

무섭냐고? 그래, 무서웠다. 해인은 지금 이런 상황이 무서웠다. 백담호가 무서운 게 아니라…. 아니, 솔직히 지금 백담호가 조금, 아주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앞으로 백담호와 자신의 관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아 무서웠다.

해인은 백담호의 물음에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담호야.”

해인이 백담호를 보려 고개를 돌리자 백담호는 해인의 손등을 감싸던 손을 떨어트리고 눈을 가려 버렸다.

“나는 불안해, 해인아.”

네가 불안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보이면 뭘 하고 있을지, 너랑 눈을 마주치는, 너와 대화하는 모든 사람들이 난 불안해. 이제. 나도 너를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모르겠어.

지독히도 괴로움을 담은 말을 하는 백담호의 차분한 목소리가 해인의 귀에 스며들었다. 한참을 이어 가던 말이 끝났는지 잠시 고요해졌다. 해인은 지금 백담호의 표정이 보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다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백담호는 해인의 눈을 가린 손을 떨어트리며 그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백담호가 해인을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인위적으로 말려 있었다.

내가 무서워, 해인아?

백담호가 다시 물었다. 해인이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글프게 웃음을 머금은 해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무서워.”

백담호는 그제야 정말로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어 보였고 그와 함께 맑은 소리가 해인의 귓가에 울렸다.

[알림]

백담호의 설정 조정이 무사히 완료되었습니다.

허공에 떠오른 불투명한 푸른 시스템창 너머로 백담호의 머리 위에 있는 표시는 여전히 지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색이 변했다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검게 지직거리던 숫자는 붉게 변해 지직거릴 때마다 검붉은 잔상을 남겼다.

[설정 조정 완료]

[호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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