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게임 종료 (14/17)

14. 게임 종료

“네네. 아무래도 당분간 집에는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제가 별말 없으면 앞으로 지금처럼 가끔 관리 정도만 해 주세요.”

[네, 그럼 그동안 계속 백담호 씨네 계시는 건가요?]

해인은 말하는 내내 마주 앉은 백담호의 눈치를 살폈다. 얼른 끊으라는 아우라가 고스란히 전해져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빨리 뱉으며 얼른 서준이 전화를 끊길 바랐다.

“네, 그럴 것 같아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보다 해우 도련님께서 해인 씨 번호 바뀌었냐고 묻던데 어떻게 할까요?]

“아…….”

그러고 보니 부모님에게만 번호를 알려 주고 형들에게는 딱히 말하지 않았다. 사실 생각도 안 했다. 애초에 그리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해인이 “제가 나중에 전화할게요.”라고 대답하니 서준은 “오랜만에 한국 오시니까 가족분들이 그리우신가 봐요.”라며 말을 건네 왔다.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해인은 서준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한 해인이 전화를 끊자 바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백담호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누구한테 전화를 해?”

카페 안의 아늑한 노란 조명 아래서 백담호가 웃고 있었지만, 해인은 편안하지 못했다.

“형. 너도 알지? 우리 둘째 형이 얼마 전에 한국 들어왔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해인은 그린티 라떼를 휘이 티스푼으로 저었다. 요즘 백담호와 눈을 마주하기가 조금 불편했다. 눈빛이나 행동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말로 하기 애매한 분위기 같은 것들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아…. 해우 형?”

“으응, 자꾸 한번 만나자고 그러네.”

“언제?”

“그건 잘 모르겠어.”

“그래, 정해지면 알려 줘.”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겨울이 온 게 체감될 정도로 밖은 쌩쌩 날카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많이 추워졌네.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갑자기 누군가의 몸이 커다란 창을 가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니 황정운이 웃으며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인물에 해인이 당황스럽게 쳐다보자 황정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손을 흔들었다. 해인도 떨떠름하게 손을 흔들려 했지만, 앞에서 냉기 서린 부름이 들렸다.

“해인아.”

그 부름 뒤로 ‘인사하지 마.’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만 같았다. 어색하게 들린 손을 내리고 해인은 황정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백담호를 바라봤다. 저를 무시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정운이 떠난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황정운과 사이가 막 좋은 건 아니었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무시하는 건 좀 미안했다. 게다가 황정운과 자신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백담호가 그까지 경계하는지 몰라 해인은 작게 불평했다.

“…인사만 한 건데.”

“그래도 쟤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잖아.”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해인의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황정운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 아무 생각도 없겠지,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해인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해인은 몇 주째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백담호와 지내고 있었다. 분명, 예전에 혼자 백담호와 같이 사는 모습을 그려 봤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요즘은 숨통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해인아, 화났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해인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해인은 “아냐, 내가 화가 왜 나겠어….”라고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화를 내겠어. 전에는 어떻게든 백담호와 같이 있으면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닥쳐오니 지치기 시작했다. 욕심이 과했던 걸까, 단지 백담호와 서로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날 이후로 해인은 모든 일상을 담호와 함께했고, 개인적인 연락도 담호의 은근한 감시하에 하게 되었다. 종종 영화관도 갔던 데이트가 대부분 집으로 한정되었고, 가끔 갑갑한 티를 해인이 슬쩍 내면 백담호는 간혹 집 근처 정도는 같이 나가 주고는 했다. 오늘처럼 백담호의 오피스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 같은 곳 말이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관계가 틀어졌나 해인은 생각했다. 서해빛과 잘못을 저지른 그날부터 틀어진 걸까, 싶었지만, 그전부터 백담호와 해인 사이에는 불안한 기운이 조금씩 감돌았었다.

백담호는 계속 해인이 숨김없이 모든 걸 말해 주기를 바랐고 해인은 모든 걸 말할 용기가 없어 계속 감춰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애초에 처음부터 다 잘못되었던 것 같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벌써 세 번째 떠오르는 충동을 해인을 애써 지워 버렸다. 백담호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고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불쑥불쑥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제 것도 아닌 남의 기억의 손실 여부를 자신이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충분히 백담호에게 여러 가지 몹쓸 짓들을 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그게 제대로 된 해결법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렇다면, 여기서 뭘 더 해야 할까. 해인은 괴로움에 침음을 삼켰다. 서해빛을 공략 인물에서 삭제하고, 내게 관심이 없어진다면, 백담호가 덜 불안해할까.

아니다. 이미 백담호의 불안 증세는 서해빛을 넘어서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집에서 본 족쇄가 해인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스스로 족쇄라도 차고 너 말고는 아무한테도 눈 안 돌린다고 빌면 나아지려나. 족쇄까지 차고 백담호에게 울며 비는 제 모습을 상상하다 해인은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감았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 확 전부 다 말해 버려? 이게 다 망할 게임 때문이라고, 전부 다…? 그러나 이제 와서 게임 탓이라고 말한들 제대로 해결되는 게 뭐가 있을지, 이마저도 해인은 헷갈렸다.

백담호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갑자기 마음이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전부 게임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이 황당무계한 일들이 실제라고 믿어 주는 것부터가 관건이었다.

언제나 모든 걸 다 말하는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늘 그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이 따라왔다. 이 최악의 결말이, 모든 걸 망설이게 했다.

실제로 말했을 때의 결과는 그 누구도 모른다.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고 상상했던 최악의 결말보다 더 나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확률이 조금 더 크다는 걸 느끼면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말이라는 건 주워 담을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요즘의 백담호는 예전과는 묘하게 다른 인상을 자아내 말하기가 더욱더 껄끄러웠다. 그건 전부 저 설정 조정과 그동안의 일들로 인한 백담호의 신경 변화 탓임이 분명했다. 설정 조정이 없었다면 백담호와의 관계가 지금보다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시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공략 인물 삭제와 백담호의 기억 상실.

해인의 시선이 침울하게 가라앉아 백담호에게 향했다. 백담호는 아까부터 해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설정 조정이 완료된 이후 백담호의 호감도 표시는 더 이상 완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계속 지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그래도 가끔 진정되긴 했는데 이제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해인을 응시하던 백담호는 짐짓 부드럽게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제 돌아갈까.”

나온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예기치 못하게 황정운과 마주쳐서 그런가. 평소에는 그래도 두 시간 조금 넘게 밖에 있었는데. 오늘은 하필 해인만 공강인 날이라 해인은 백담호가 끝날 때까지 오피스텔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다. 원래 집 밖에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는 했는데 자의로 안 나가는 게 아니라 타의로 못 나가는 상황이 지속되니 점점 답답해졌다.

벌써 돌아가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백담호는 무심한 투로 대답하며 겉옷을 입고 얼마 없는 짐을 챙기는 해인을 한 동작도 빼 먹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 * *

벌써 서해빛의 호감도 옮기는 날이 다가왔다. 강의실로 향하는 길에 해인은 제 주머니 속의 새로 바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번호가 바뀌었고 서해빛에게 알려 주지 않았으니 그 뒤로 당연히 전화나 문자가 오지 않았다. 해인은 강의실과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감정이 마음을 채워 갔다.

저번 주처럼 또 난리가 나면 어쩌나 불안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번호도 바뀌었으니 왠지 그 사달이 또 날 것 같은 걱정에 해인은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옆에서 걷고 있던 백담호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자 해인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경직된 다리를 움직여 강의실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해인은 강의실 안을 빠르게 훑었다. 차라리 서해빛이 아직 안 왔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곧바로 서해빛과 눈이 마주쳤다.

서해빛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꾸벅였고 해인의 옆에 있는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는지 잠시 표정을 굳히다 이내 미련 없이 몸을 앞으로 돌려 버렸다. 백담호는 짜증 난 듯 얼굴을 미세하게 구기기는 했지만, 별다른 일 없이 항상 앉는 제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심지어 서해빛은 해인이 항상 앉는 곳 옆자리가 아니라 그보다 두 줄 정도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항상, 매번 해인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옮겨 갔는데 말이다.

지금 그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 해인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는데….

지금까지 서해빛의 행동들을 보면 백담호가 아무리 사납게 굴어도 어떻게든 제 번호에 대해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인사만 하고 서해빛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해인은 그제야 자신이 서해빛 호감도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 호감도가 1이나 2도 아니고 순식간에 10이나 떨어진 거다. 그러니 전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다만, 해인의 마음이 새삼스러운 것은 백담호의 호감도처럼 자신의 잘못 때문에 떨어진 게 아니라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손쉽게 서해빛의 호감도를 빼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호감도가 떨어진 건 똑같았지만 사람의 호감도라는 게, 일종의 감정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남의 감정을 멋대로 올렸다 버린다는 생각에 괴리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해인아, 뭐 해?”

앉아 있던 백담호가 의자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해인의 손을 끌어당겼다. 해인은 맥없이 끌려오며 백담호를, 백담호의 호감도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공략 인물. 왠지 저 단어가 해인의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공략하기 위한 인물의 호감도는 평범하게 쌓아 올린 사람들의 호감도와 같은 감정일까. 어쩌면, 백담호와 자신의 관계의 시작은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지금까지도 쭉,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래, 해인아.”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해인의 목 뒤를 백담호가 주무르며 물었지만, 해인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백담호의 손을 슬쩍 떨어트렸다. 제 손을 떨어트리는 해인에 눈썹을 움찔거린 그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교수가 들어왔다.

백담호는 입을 다무는 대신 책상 아래로 놓인 해인의 손을 세게 움켜잡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강한 악력에 알싸한 고통이 느껴져 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살짝 빼내려 했다. 하지만 백담호는 그럴수록 더 꽉 잡았고 해인은 제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붉게 변하는 걸 보았다.

나직하게 해인이 “아파…….”라고 중얼거렸지만 백담호는 손을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목소리가 너무 작아 못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담호는 자신의 손 악력이 센 줄은 알고 있을 거다. 전에 백담호가 강하게 잡은 손목이 붉게 부어오른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해인은 허탈하고 우울해졌다.

설정 조정이 되지 않은 백담호였어도 지금 이렇게 행동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공략 인물 백담호’ 그 말이 오늘따라 더욱 머리에서 맴돌았다. 해인은 이 말이 참 싫었다.

해인은 결국 손을 빼내는 걸 포기하고 칠판을 보는 척 서해빛의 호감도를 빠르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서해빛은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의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설정 조정 중 81%]

[호감도 51]

서해빛은 등록 순간부터 높았던 터라 호감도가 어떻게 올랐는지는 몰라도 아마 자신이 기억 잃고 나서부터 올랐을 테니, 몇 개월은 걸렸을 것이다. 그 몇 개월에 걸쳐 오른 20이라는 수치의 호감도가 단 일주일 만에 손쉽게 사라졌다.

이게 정말 게임이었더라면, 해인은 화면 밖에 있고 ‘서해빛’이라는 공략 인물은 화면 속에 있는, 그런 게임이었더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애초에 원해서 시작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게임은 역시 끝을 내야만 한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해인은 알아볼 수도 없는 백담호의 호감도를 쳐다봤다. 게임을 끝내야 한다. 적어도 이제 더 이상 제 주변 사람들이 이 게임과 얽히게 둬서는 안 된다.

[백담호, 공략 인물 삭제 성공. 당신에 대한 기억 손실.]

정갈한 글씨로 써져 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해인은 점점 끝이 다가옴이 은연중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게임의 끝, 그리고 관계의 끝이. 그러다 불현듯 떠올랐다.

왜 백담호만 기억을 잃지?

학교가 끝나자마자 백담호의 오피스텔에서 과제를 하고 저녁을 먹고 두식이랑 노닥거리면서도 오직 해인의 정신은 딴 곳에 팔려 있었다. 바로 대체 왜 백담호만 기억을 상실하는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해인은 아무 일 없이 공략 인물에서 삭제된 서해빛과는 다르게 왜 백담호만 ‘방해인’에 대한 기억을 잃는 건지 의문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여기저기 정신이 팔려 있던 탓도 있겠지만.

그저 시스템이 그렇게 말하니까,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해인은 어느 순간부터 시스템의 말에 의심을 품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합리하다고는 여겼지만 딱 그뿐이었다. 문의 시스템이 생긴 이후로 이제 궁금한 게 생기면 스스로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바로 문의부터 하고 보는 것이 이미 해인이 게임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해인은 자신이 원래 제 세상과 가상 세계에 있어야 할 시스템이 뒤섞여 이제 그걸 구분 지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점점 동화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시스템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을 제 미래가 떠올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쩌면 시스템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을까.

이미 백담호도 <그레비티>의 ‘백담호’와 흡사해지기 시작했고 자신은…. 그러고 보니 자신 역시도 설정 조정이 진행 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해인은 서둘러 시스템창을 열어 정보창을 살펴봤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방해인 (조연은 이제 주연: 호칭에 맞게 이야기가 조정되는 중입니다… 90%)

나이: 22

키: 177.6cm

능력치

-힘: 하/ 외모: 최상/ 매력 지수: A

스킬

- 협박(희귀 스킬): 화난 표정으로 윽박지르면 대부분 겁을 먹고 당신의 말을 따릅니다.(소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스킬을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아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너 오타쿠니?: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1.8% 빠르게 호감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눈치 없이 이 세상 살아남기 : 4.8%의 확률로 눈치가 없어도 상대가 넘어가 줍니다.

특이 사항

-열성 알파

“와…….”

서해빛이랑 백담호 설정 조정만 신경 써야 할 게 아니라 자신의 설정 조정도 신경 써야 한다는 걸 해인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언제 저렇게 올라갔는지 벌써 90%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돌아왔던 시점을 제외하고는 성격은 기억 잃었을 때랑 별다를 게 없었다.

백담호가 건들면 거부감이 살짝 일었던 예전의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 사람 성격이야 원래 살면서 변할 수 있는 거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신은 아무래도 좀 범상치 않은 일들을 겪었으니 충분히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제 성격은 어쩜 과거의 성격이 단 한구석도 남지 않을 수가 있었던 거지.

전에는 무의식적으로 말이라도 험하게 나왔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정말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게 맞긴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드는 순간, 명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알림]

문의 서비스 점검이 끝났습니다. 사용에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현 시간부로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소름을 넘어서 번뜩 드는 공포에 소파 위에 엎드렸던 몸을 벌떡 일으키자 해인의 등에 올라가 있던 두식이가 놀라 후다닥 도망갔다.

타이밍이 소름 돋았다. 마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아니, 읽고 있는 게 맞을지도. 공략 인물로 등록된 사람들 감정과 개인 정보도 알려 주고 기억도 자기 마음대로 삭제했다가 돌려주는 마당에 생각이라고 읽지 못할 건 뭔가.

제 코앞에 떠 있는 시스템창이 당장 아무 생각도 말고 문의해서 알려 주는 답만 얻으라고 협박하는 것 같아 해인은 곧바로 창을 닫아 버렸다.

씻고 나온 백담호가 빳빳하게 굳은 해인에게 다가와 허리를 스르르 감쌌다.

“그렇게 불편하게 앉아서 뭐 해.”

따뜻하게 데워진 손이 해인의 옷 안으로 파고들며 성적인 의미가 다분한 손길로 마른 배 위를 문질렀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몸을 움찔거린 해인이 뒤를 돌아보자 백담호는 나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가까워지는 백담호의 얼굴을 해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설정 조정 완료]

[호감도 ??]

설정 조정이 완료된 백담호는 지금 정말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 텁, 거의 다가온 백담호의 얼굴을 해인이 손바닥으로 막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백담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내 불만스럽게 찡그려졌다. 마치 ‘왜?’라고 묻는 것 같았다.

“백담호, 너….”

해인의 입술이 미약하게 움찔거리다 이내 말을 이었다. 해인은 순간 ‘너 제정신이지?’라고 물을 뻔했다.

“나 씻으러 갈게.”

몸을 감싼 백담호의 손을 떼어 낸 해인이 일어서자마자 그대로 허리가 붙잡혀 소파에 눕혀지고 말았다. 백담호는 해인의 몸 위에 올라타 양 손목을 강압적으로 꽉 붙잡고 해인을 서늘하게 내려다봤다.

“내가 싫어, 해인아?”

분명 해인이 아는 백담호의 얼굴과 목소리였는데 이상하리만치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해인이 큰 눈을 깜빡거리며 떨림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왜 널 싫어해….”

“근데 왜 나를 피해?”

“그게 아니라…… 나도 우선 좀 씻고.”

해인이 다시금 벗어나려 몸을 버둥거렸지만 손목을 옥죄는 힘은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씻고 온다니까. 서둘러 해인이 말을 덧붙였지만 돌아오는 건 ‘싫어, 가지 마.’ 하는 냉정한 대꾸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손목을 붙잡지 않은 한 손이 해인의 윗옷을 파고들고 백담호의 얼굴이 점차 해인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전이라면 바로 보내 줬을 백담호가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갈수록 백담호가 해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던 백담호라고 할 수 있을지. 해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눈이 촉촉한 빛을 띠었다.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 네가 원해서 이러는 거야?”

백담호가 행동을 멈추고 해인의 얼굴을 봤다. 까만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담호는 해인의 눈을 피했다가 다시 쳐다보기를 반복하다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나는…….”

겨우 내뱉은 음성은 어느새 서늘함은 사라지고 그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해인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백담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괜찮아?”

허공을 보던 백담호가 해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해인이 다시 한번 물으려던 순간, 호감도 표시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설정 조정 표시가 일순간 지직거렸다.

“…미안해, 해인아. 이러려던 건 아닌데. 내가 요즘….”

백담호는 뒷말을 잇지 않았고 대신 어두워진 표정으로 허공을 다시 바라볼 뿐이었다.

* * *

해인은 떨리는 백담호의 손을 한참 잡은 채 그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욕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백담호도 공략 인물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것을. 더 이상 시스템과 게임에 연관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공략 인물 삭제를 그냥 진행해 버리면 백담호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자신보다도 백담호를 위해서 그래서는 안 되었다. 기억을 잃어 봤던 전적이 있는 해인으로서 백담호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수 없었다.

왜 서해빛은 멀쩡히 삭제되는데 백담호는 기억이 지워지는 걸까.

해인은 욕실에서 가만히 거울을 보며 고뇌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문의 서비스를 떠올렸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물어봤자 어차피 제대로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더 이상 문의 시스템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백담호의 기억만 지워진다는 게 사실은 맞는 걸까. 간악한 시스템이 일부러 거짓을 흘려 백담호의 삭제를 막으려는 건 아닐까. 시스템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무엇 하나 확신할 게 없었다.

그러나 시스템이 짜증 나는 것과 별개로 정말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삭제했다가 정말 기억이라도 잃으면 큰일이었다. 신중해야 했다. 해인은 일단 욕실에서 조용하게 오래 있으면 이상할 것 같아 샤워기에 서서 물을 틀었다.

머리부터 온몸을 적시는 따뜻한 물줄기를 느끼며 해인은 시스템창을 열었다. 문의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서해빛과 백담호의 차이. 창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해인이 눈을 크게 떴다. 둘에겐 차이가 있었다. 왜 이제 알아차렸나 싶을 정도로 명확한 차이가. 해인은 곧바로 퀘스트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보이는 퀘스트에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공략 인물 백담호의 두 번째 필수 퀘스트](중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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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필수 퀘스트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은 경우, 치명적인 페널티 또는 리스크를 받게 됩니다)

(주의, 페널티와 리스크는 퀘스트 중요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백담호의 두 번째 필수 퀘스트가 남아 있었다는 걸. 서해빛과 백담호의 차이는 필수 퀘스트의 유무였던 것이었다.

해인은 퀘스트를 한 번 쭉 훑었다. 다행히도 퀘스트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던 것이라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퀘스트를 처음 받았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는 게 기억났다. 그래서 되도 않게 백담호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던 것도.

떠오른 옛 추억에 해인이 살포시 아련한 웃음을 흘렸다. 시간상으로는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떠올리니 벌써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아직 백담호하고 사귀기 전이었지. 바로 전날 백담호가 연애하자고 물었다가 없던 일처럼 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백담호가 다시 고백을 해 왔을 때 호감도는 ‘60’ 정도였던 것 같다. 지금 백담호의 호감도가 정확히 몇인진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80’ 정도였던 것 같고.

‘80’에서 공략 인물 삭제를 하기 위해 해인 스스로 쓰레기통에 옮겨야 하는 백담호의 호감도는 ‘30’이었다. ‘80’에서 ‘30’을 빼면 ‘50’, 단 ‘50’밖에 남지 않았다. ‘50’을 계속 중얼거리던 해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빠르게 마쳤다.

어찌 되었든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삭제하면 해인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그건 공략 인물 삭제에 대한 리스크가 아니라 필수 퀘스트도 동시에 포기되니 그에 따른 리스크임이 분명했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던 해인은 다시 시스템창을 열었다. 예언자의 편지에 써진 내용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마지막으로 확인만 한번 하면 될 것 같았다.

인벤토리에 들어가 딱 한 개 남은 예언자의 편지 한 개를 사용하려는 찰나, 해인은 멈칫했다. 이걸 사용하고 나면 얼마 가지 않아 극심한 졸음이 몰려왔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잠에 빠지기 전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 해인은 바로 상점을 들어갔다. 검색창에 ‘소원권’을 치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내심 있어 주길 바랐기에 아쉬울 따름이었다. 대신 빠르게 ‘공략 인물 삭제 아이템’을 2개 사고 상점을 닫고 시스템 메인 화면 아래쪽에 있는 ‘문의 서비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나 다시 빠르게 시선을 돌리고 인벤토리에 들어가 ‘예언자의 편지’를 사용했다.

[공략 인물 백담호의 두 번째 필수 퀘스트를 완료 후, 공략 인물에서 삭제를 한다면.]

공략 인물이라는 말을 별로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예언자가 매우 까탈스러워 보였기에 최대한 정확하게 적는 것이 안전했다. 해인은 질문을 빠르게 적어 내리고 종이를 말아 붉은 끈으로 묶었다. 손에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끈과 종이는 젖지 않았다.

해인은 잘 말린 두루마리를 욕실에 작게 나 있는 창문을 향해 던졌다. 곧바로 홀로그램 부엉이가 날아와 그걸 낚아채더니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해인은 서둘러 가져온 잠옷을 입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참기 힘든 졸음이 몰려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욕실을 나오니 침대에 반쯤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백담호가 보였다.

“오래 걸렸네.”

딱히 무언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저 사실만을 읊조리는 듯한 무미건조한 음성에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와 거의 가까워졌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세상이 흔들렸다. 극심한 졸음이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인아?”

갑자기 침대 앞에서 비틀거리는 해인의 모습에 백담호가 의아하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해인은 상반신만 침대에 얼굴을 박은 채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놀란 백담호가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해인을 불렀다.

“방해인! 왜 그래!”

침대 위로 엎어진 해인의 몸을 뒤집으니 희미하게 뭉개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먼저 잘게…….”

아픈 사람이라기엔 바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차분해 백담호는 황당한 듯 헛웃음을 쳤다. 오늘 그렇게 피곤했나. 저녁에 있었던 실랑이 빼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백담호는 불편한 자세로 눕혀져 있는 해인을 끌어안아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 스탠드를 제외한 방의 모든 불을 껐다.

흐린 빛에 기대어 백담호는 해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잠든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무감정한 얼굴 위로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던 해인의 얼굴을 덧붙여 떠올릴 수 있었다. 백담호는 섬세한 손끝으로 해인의 얼굴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전에는 해인을 떠올리면 맹해 보이거나 아니면 눈치 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거나, 또는 사랑스럽게 뺨을 물들이고 웃는 모습이 나타났는데 이제는 곤란함을 감추려 짓는 애매한 미소나 당황스러운 표정, 울음기 가득한 얼굴 아니면 두려움이 깃든 낯빛이 떠오른다.

백담호는 해인의 얼굴을 더듬던 손을 떨어트리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까만 장막 위로 해인과 제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던 그날이 떠올랐다.

* * *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페로몬 향은 확실히 방해인의 몸에서 희미하게 풍기던 것과 똑같았다. 그때 자신은 반쯤, 어쩌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백담호는 불쾌하게만 느껴지는 향에 인상을 찡그리며 무작정 냄새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원 휴게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는 서해빛이 보였다. 소파 옆에는 약통과 생수병으로 보아 억제제를 먹은 듯했지만, 아직 공기 중에 만연한 페로몬 향이 그가 완전히 진정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들어오는 인기척에 서해빛이 고개를 돌렸고 바로 백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서해빛은 붉은 기가 감도는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빠르게 상황을 눈치챈 듯 샐쭉 웃어 보였다.

‘해인 형도 참…. 멍청하게 바로 들켜 버렸네요. 몰래 붙어먹….’

‘입 닥쳐.’

이미 알고 왔긴 했으나, 정말로 히트가 온 서해빛과 아주, 아주 옅어 주의 깊게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희미한 해인의 페로몬 향이 뒤섞여 맡아지니 장기가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발갛게 핏대 선 눈으로 백담호가 서해빛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서해빛은 즐겁다는 듯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찢어발겨 버리고 싶은 충동에 백담호는 서해빛의 멱을 잡아끌어 올렸다. 그러자 확 풍기는 짙은 오메가의 향에 백담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짓눌린 음성으로 경고했다.

‘다시는 방해인한테 개짓거리하지 마.’

‘애초에 먼저 찾아온 건 해인 형인걸요.’

백담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 역시도 방해인이 말해 줘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서해빛과 방해인 사이에 정확히 어떤 과거가 얽혀 있는지는 몰라도 과거의 죄책감에 어제 일이 신경 쓰여 서해빛에게 사과를 하러 갔다고. 들은 사실이었음에도 백담호는 또 물었다.

‘방해인이 너를 왜 찾아왔는데.’

‘미안하다던데요, 뭐……. 꼴사납다고 한 거 미안하다고 했나.’

해인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백담호는 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미 끝난 관계를, 자신이 있는데 방해인은 서해빛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걸까. 금방이라도 서해빛과 완전 남이 될 것처럼 굴면서 정작 해인은 제대로 끊어 내지 못한다.

백담호는 서해빛의 멱을 거칠게 던져 버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다시 방해인을 옆에 가두고 싶은 심정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화가 나 보고 싶지도 않은 감정이 뒤섞였다.

정신이 다른 곳에 묶인 채 운전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방해인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 방해인을 데리고 나올까, 하는 생각들이 문득 들었지만, 백담호는 다시 차를 돌려 제집으로 향했다. 방해인을 다시 보기에는 자신은 지금 너무 감정적이었다. 조용한 제집에 도착한 백담호는 소파에 앉아 풀린 동공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허공을 보다가, 또 몇 번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다시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쉬고 가끔 욕도 지껄이다 보니 벌써 새벽이 되었다. 하루 종일 넋을 놓고 생각해 봐도 딱히 무언가가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방해인과 앞으로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건지, 충동적인 생각들만 튀어 오를 뿐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방해인이 왜 서해빛과 그런 짓을 했는지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했다. 실제로도 방해인이 자신을 속이고 서해빛과 무슨 짓을 할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왜 굳이 아침 댓바람부터 거짓말까지 하며 사과하러 갔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에 자신이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사고였든, 사고가 아니었든 일단 연인이 다른 사람하고 붙어먹었으니까. 백담호는 들끓는 속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그냥 가둬 버릴까…….”

가둬 버리면 이런 일이 벌어질 원인조차 만들어지지 않을 테니까. 무의식적으로 제 손아귀에 갇혀 있는 방해인을 떠올리자 알 수 없는 기이한 만족감과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그러나 이내 금방이라도 울듯이, 제 잘못을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달달 떨며 말하던 방해인이 떠올랐다.

방해인은 아마 이후로 서해빛과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엄청나게 조심하고 조심할 것이란 걸 백담호는 예상할 수 있었다. 죄책감도 계속 느낄 테고. 분명 방해인이라면 그럴 거다.

이번 일에 미친 듯이 화가 나도 방해인이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이상 이 일로 계속 방해인을 질책하고 억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그게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좋지 못한 충동이 일었다. 대체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이번 일이 무슨 기회라도 된 것처럼 당장 방해인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버리고 싶었다.

생각할수록 예민해지는 신경에 백담호가 자려고 누운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방해인이었다.

백담호는 방해인의 연락을 보는 순간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차를 끌고 나갔다. 아직 생각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상태로 그를 만나면 안 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몸이 먼저 앞섰다.

* * *

방해인의 오피스텔 앞까지 가는 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차가 달리는 도로는 몇몇 불빛을 빼고는 어둡고 조용했고 그래서 평소보다 속도를 더 내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백담호는 도착하자마자 방해인에게 나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차에서 내렸다. 새벽의 공기가 차갑게 몸속으로 스며 들어와 정신 사납게 일렁이던 감정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그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해인이 내려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해인은 어떤 표정을 하고 내려올까, 울상을 지을까, 두려운 듯 주춤거릴까 백담호는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렸다.

분명 다 제 안에서 자란 감정들임에도 극과 극의 감정들이라 백담호는 막상 해인을 마주하면 어떻게 자신이 행동할지 전혀 예측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방해인을 제 오피스텔에 가두는 행동까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구름이 조금 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고요한 공간에 다급하게 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도드라지게 들려와 백담호는 들어 올렸던 고개를 내렸다. 조금 멀지 않은 곳에서 방해인이 대충 롱 패딩을 걸치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백담호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눈물이 가득 고인, 이미 몇 방울은 흘린 듯 보였다. 흐린 하늘에 뜬 달빛조차 어두운데 방해인의 두 눈이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백담호는 작게 “방해인….” 하고 중얼거렸고 방해인은 자신을 발견한 듯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여러 감정을 보인 얼굴로 주춤거렸다.

백담호의 부름은 전혀 듣지 못한 듯 담호의 눈치를 살피며 내딛는 해인의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둘 사이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듯한 목소리로 해인은 백담호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자 차를 타고 오며 했던 고민들이 무색하게도 해인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그대로 뛰어들듯 담호의 품에 안겼다. 세게 조여 오는 팔 힘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 순간, 훌쩍이는 방해인의 울음소리보다 자신을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고 떨어지기 싫어하는 방해인의 모습에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고 여겼던 행동을 몹시 행하고 싶어졌다. 이대로 방해인을 아무도 모를 곳으로, 자신만 아는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왠지 그래도 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백담호는 입을 다물고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강렬한 충동을 진정시켰다.

‘미안해.’

애달픈 사과에 괜찮다고 대답을 해 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해인이 계속 이렇게 제게 매달려 줬으면 좋겠어서. 백담호는 혼란스러운 욕구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눈을 감아 버렸다. 아까까지는 제 마음을 진정시켜 주던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만 느껴졌다.

그 욕구를 백담호는 결국 이기지 못했다. 결국 그 뒤로 방해인을 감금 아닌 감금처럼 제 오피스텔에 가두고 무조건 제 시야가 닿는 범위만 갈 수 있게 했으며, 전화번호도 마음대로 바꿨다.

잘못되었다는 건 아는데 이상하게 멈추기가 지나치게 힘들었다. 점점 갑갑해하고 지쳐 보이는 해인이 보이는데도 해인은 그걸 제대로 티를 내지 않아서, 다 괜찮다고 해서, 다 마음대로 하는 자신이 무섭지 않다고 해서 백담호는 그걸 방어로 계속 해인의 생활의 모든 것에 관여했다.

변해 가는 자신과 방해인의 관계에서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만해야지 생각하다가도 방해인이 누군가와 통화라도 하고 있으면, 다른 이를 쳐다보고 있거나 대화라도 하고 있으면 그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해인을 고립시키고 싶은 욕구가 제 것이면서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다 사이가 완전히 엇나갈까 봐 두려웠음에도 행동은 백담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보면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해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전화하는 것도 감시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못 보게 붙잡았고 나가고 싶어 하는 해인의 심정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다.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 네가 원해서 이러는 거야?’

원망을 담은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백담호는 불현듯 깨달았다. 방해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괴로운 듯한 표정만 지었더라면 아마 자신은 멈추지 않았을 거란 것을. 또 강압적으로 그를 안았을 게 분명할 거란 걸.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건지 백담호는 알 수 없었다. 백담호는 그저,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저 해인에게 잘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끔 싸우더라도 결국 웃으면서 잘 지내는 그런 사랑스러운 관계가 되길 바랐을 뿐이다. 절대 이런 식으로 겁을 주거나 상처를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백담호는 스르르 눈을 반쯤 뜨고 옆에 잠들어 있는 해인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손을 뻗으려다 낮에 두려움에 질렸던 해인의 얼굴이 떠올라 백담호는 손을 거두었다. 백담호의 머리 위에 있는 설정 조정 표시가 조금 지직거렸다.

* * *

누가 깨운 것처럼 해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딱히 누군가 알려 주지도 않았지만, 해인은 눈을 뜨자마자 제 머리맡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자 손끝에 뻣뻣한 종이가 걸렸다. 그걸 주워 든 해인이 옆을 획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해인은 재빨리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베개 밑으로 숨겼다.

백담호가 딱 봐도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어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봤을 땐 깨어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잠들어 있었다. 식겁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해인은 다시 편지를 꺼냈다.

백담호가 불편해 보여서 신경 쓰이기는 하다만 자세를 바꿔 주다가 깰 수도 있었다. 그것보다 편지가 우선이었다. 다행히 흐리긴 해도 침대 옆 스탠드 불빛이 있어 눈앞에 가까이 갖다 대니 편지 내용이 어느 정도는 보일 것 같았다.

“…음?”

해인은 편지를 뒤집으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과 다르게 편지 봉투가 없고 바로 엽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더듬어 봤지만 다른 걸리는 건 없었다. 편지 형태는 랜덤인가. 생각해 보니 엽서 테두리도 전과 다른 디자인 같기도 하고.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닌 거 같아 해인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신 뒤집혀 있는 엽서 뒤에 써 있을 내용에 긴장이 되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아직도 백담호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최악의 상황이 떠올라 피하고 싶은 마음을 해인은 겨우겨우 억눌러야만 했다.

해인은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엽서를 뒤집었다. 뒤에는 간결한 한 줄이 써져 있었다.

[일주일 안에 ‘공략 인물 백담호’를 삭제한다면 페널티 없이 공략 인물 삭제 성공.]

“아….”

어딜 봐도 ‘기억 상실’이라는 말이 없어 안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린 해인은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고 옆을 쳐다봤다. 다행히도 백담호는 깊게 잠든 듯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손에 들린 엽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짧아서 금방 외우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찬찬히 읽어 보려 했던 터라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거 어쩔 수가 없어 빠르게 미련을 접고 해인은 시스템창을 켰다.

역시 필수 퀘스트 때문이었어. 퀘스트 목록을 열려던 해인이 멈칫거렸다. 그런데 삭제는 왜 하필 일주일 안으로 해야 하지? 일주일을 넘기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건가. 근데 그 일주일이 대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건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공략 인물 삭제 아이템을 쓰고 나서부터 일주일인지, 아니면 오늘을 기점으로 일주일인지는 명확하게 써 있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전자겠지만 이 게임은 후자일 것 같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해인은 일단 퀘스트 목록을 열었다. 정확히 미션이 몇 번 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공략 인물 백담호의 두 번째 필수 퀘스트](중요도:⭐⭐⭐⭐)

좋아해라고 말하기: 18/25

좋아해라고 듣기: 10(완)

사랑해라고 말하기: 1(완)

사랑해라고 듣기: 1(완)

(주의, 필수 퀘스트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은 경우, 치명적 페널티 또는 리스크를 받게 됩니다)

(주의, 페널티와 리스크는 퀘스트 중요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7번, 7번이 남았다. 공략 인물 삭제도 일주일 안에 해야 하고 미션도 7번이 남았다. 우연인 듯 우연 아닌 것 같은 상황에 해인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결국 공략 인물 목록에 들어갔다. 왠지 상황이 오늘을 기준으로 일주일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설령 아니더라도 질질 끌 생각은 없었으니 퀘스트를 빠르게 하면서 공략 인물 삭제도 진행하면 될 것 같았다. 백담호의 정보창을 열고 그 아래에 작게 표시되어 있는 ‘공략 인물 삭제’를 터치하자 창이 떠올랐다.

[알림]

공략 인물 백담호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주의, 공략 인물 아이템 1개를 소모합니다)

(주의, 해당 인물의 호감도가 높습니다, 정말 포기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로 향하던 해인의 손끝이 멈췄다. 호감도가 떨어진 서해빛의 행동은 순식간에 변화했다. 그건 백담호도 마찬가지겠지. 둘 다 ‘공략 인물’이니까.

해인은 문득 어쩌면 이렇게 쉽게 호감도가 쉽게 떨어지고 행동이 변하는 이유가 자신이 ‘공략’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템도 쓰고, 호감도랑 정보창으로 사람 마음도 엿보고 그런 정상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쳤기에 호감도가 이리 쉽게 떨어지고 행동도 바로 변하는 거라고….

애초에 사람 마음을 어떻게 수치화를 할 수 있겠어. 그 복잡하고 이리저리 변하는 것을. 불현듯 드는 생각에 해인은 허탈감이 몰려왔다. 만약 좋아하는 마음이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거라고 해도 허탈했고 자신이 공략했기에 호감이 쉽게 떨어지는 거라고 해도 좀 허망했다.

역시…. 얼른 모두 공략 인물 삭제를 해 버리고 게임을 종료해서 다시는 켜지 말아야겠다. 해인은 ‘예’를 터치했고 곧바로 창이 떠올랐다.

[주의]

공략 인물 ‘백담호’를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서해빛을 삭제했을 때는 뜨지 않았던 창에 해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백담호’라고 강조한 말에 당장이라도 삭제를 그만두라는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게임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라도 백담호를 지우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해인은 단호히 바로 또 ‘예’를 눌렀다.

그러자 그 뒤는 서해빛 때와 똑같았다. 공략 인물 삭제가 진행된다는 창과 함께 간단한 방법과 주의 사항을 알려 줬다. 이미 한번 봤던 거라 빠르게 한번 훑고 창을 닫아 버렸다. 해인이 뒤를 돌아보니 백담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불편한 자세로.

백담호를 제대로 눕혀 주려다 머리 위를 보니 지직거리는 호감도 옆으로 쓰레기통이 보였다. 그걸 보니 씁쓸했다. 백담호도 변하겠지. 게다가 일주일 안에 하라고 했으니 서해빛보다 더 빠르게….

잠시 백담호를 바라보다 해인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백담호의 다리를 잡고 밑으로 잡아당겼다. 마음 같아선 안아서 제대로 눕혀 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백담호는 덩치가 너무 컸다.

주르륵, 미끄러진 백담호가 드디어 편한 자세로 누웠고 해인도 다시 누우려다가 멈칫했다. 필수 퀘스트는 잘 때 말하는 것도 되는 건가. 일단 말을 하긴 하는 거니까. 이 방법이 통했으면 좋겠다고 해인은 생각했다. 이제 곧 백담호는 자신을 점점 좋아하지 않게 될 텐데, 무조건 깨어 있을 때 이야기해야만 한다면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당장 내일 아침에 좋아한다고 7번 연속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성의가 없었고 오로지 미션을 깨기 위해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좋아한다는 말인데 그리 성의 없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백담호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해인은 그가 깨지 않도록 작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담호야, 좋아해.”

정말로. 속삭인 해인이 퀘스트창을 열려고 몸을 떨어트린 순간, 확 잡아당겨졌다. 갑작스러운 힘에 해인이 파악할 새도 없이 백담호의 품에 파묻혔다.

“언제 깼….”

“한 번 더 말해 줘.”

잠겨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위협적이기보다 간절하고 또 불안하게 느껴졌다.

“좋아해….”

또렷하게 말하려던 마음과 달리 음성은 가녀리게 떨리고 말았다. 그 떨림에 혹여라도 백담호가 불안을 느낄까 해인이 한 번 더 말하려 했지만, 곧 숨이 막힐 듯 강한 압박감에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뱉은 숨결이 품에서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밀착했다.

백담호는 한참을 그렇게 해인을 놓아주지 않았고 해인 역시도 아무런 미동 없이 가만히 안겨 있었다. 이 시간을 흐트러트리기엔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졌고 몸을 감싼 백담호의 팔이 어쩐지 떨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인아, 날 떠나지 마.”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야 백담호가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방금 말했는데 갑자기 떠나지 말라니. 게다가 하필, 곧 백담호의 호감도를, 자신에 대한 백담호의 애정을 떨어트려야 하는 시기에 들은 말치고는 조금 잔인하게 느껴졌다.

해인이 고개를 들어 올려 백담호를 바라봤다. 조금 슬퍼 보이는 까만 눈에 해인은 손을 빼내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걱정 말라는 듯 엄지로 백담호의 눈가를 쓸어내리자 백담호는 조금 뒤에 고개를 끄떡였다.

“안 좋은 꿈…. 응, 안 좋은 꿈을 꿨어.”

무언가를 혼자 되짚듯 아득한 목소리였다.

“내가 왜 떠나겠어.”

백담호는 그제서야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해인은 백담호를 떠날 생각이 당연하게도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 후의 백담호는 과연 지금과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까. 순간, 해인은 일주일이라는 기한이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이런데 시간이 더 흐르면 백담호의 호감도를 버리는 일이 힘들어져 공략 삭제를 그만두려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해인은 멍한 얼굴로 샤브샤브에서 고기를 건져 먹는 백담호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호감도 표시 옆에 쓰레기통 표시가 있었고 아직 하나도 옮기지 못한 상태였다. 어제, 정확히는 오늘 새벽에 잘 때 좋아한다고 말하고 나서 호감도를 옮기려 했는데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까 보니 ‘좋아해라고 말하기 미션’ 성공 횟수가 2개 늘어 있었다. 다만, 백담호가 언제부터 깨어 있던 건지 몰라 여전히 자는 사람에게 해도 유효인 건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이제 5번만 말하면 미션도 끝나고…. 그러면 백담호의 공략 인물 삭제도 진행해야겠지.

서해빛 때는 처음이기도 하고 또 서해빛이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옮겼었다. 그러나 이미 서해빛의 변화를 체감했고, 그걸 백담호에게 하려니 망설여졌다. 절대로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삭제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루 종일 넋이 나가 있네.”

백담호가 해인의 빈 접시를 채워 주며 걱정스레 쳐다봤다. 해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답했다. 백담호가 떠 준 그릇에 가득한 고기를 한 점 집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먹자 백담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해인은 발밑에서 앙알거리며 자꾸 허벅지에 매달리는 두식이를 조심스레 떨어트리고 아주 작게, 정말 작게 뱉었다.

“공략 인물, 백담호 호감도 옮기기 시작.”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쓰윽, 앞을 보니 백담호는 전혀 듣지 못한 눈치였다. 그의 머리 위에 있던 쓰레기통의 뚜껑이 활짝 열려 있는 게 호감도를 얼른 옮기라고 입이라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호감도가 여전히 저렇게 지직거리는데 옮기는 게 가능한 건가.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시도하기로 했다. 해인은 고기를 먹는 척 백담호의 호감도를 노려봤고 쓰레기통 위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 10이 되는 순간 창이 떠올랐다.

[알림]

공략 인물 백담호의 호감도 10을 정말 쓰레기통에 버리겠습니까?

(주의, 앞으로 2주 안에 공략 인물 삭제를 완료해야 합니다. 실패 시 호감도만 소멸되고 인물 삭제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예 | 아니오]

해인은 쓰레기통에 버리겠다는 말이 보기 싫어 떠오르자마자 ‘예’를 선택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정말 버리겠냐고 묻는 창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백담호의 호감도 옆의 쓰레기통 뚜껑이 닫히자마자 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직거리던 호감도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반대로 설정 조정 표시가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기호가 바뀌는 것이 꼭 오류가 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정 ■? ▨$]

[호감도 72]

분명히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77이었는데 호감도 10을 버리고도 72라는 것은 그 이후로 호감도 표시가 지직거려 82까지 올랐던 걸 몰랐나 보다. 변해 가는 와중에도 호감도가 오른 걸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해인이 조금 놀란 눈으로 백담호의 머리 위를 보다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아래로 내리자 백담호가 심각하게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복잡해 보이기도 했고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묘한 표정에 해인이 걱정스레 백담호를 불렀다.

“…백담호?”

그러나 백담호는 마치 어딘가 나사라도 빠진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이라 지레 두려워진 해인이 몸을 벌떡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 가지 마.”

덩달아 같이 일어선 백담호가 손을 앞으로 뻗어 다급하게 해인의 옷자락을 콱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백담호의 행동 탓에 해인은 백담호에게로 가려던 몸을 멈추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옷자락을 잡은 백담호의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간 건지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해빛 때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에 해인은 무언가 잘못되었나 덜컥 겁이 나 제 옷을 잡은 백담호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냐, 어디 안 가. 네 옆에 앉으려고 했어.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해인이 백담호의 눈을 똑바르게 쳐다보면서 이야기했지만 손은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해인이 “정말이야, 담호야.”라고 한 번 더 뱉고 나서야 백담호는 잡은 옷자락을 놓아줬다.

해인이 곧바로 백담호의 옆으로 가서 앉자마자 백담호는 해인을 빤히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시선이 어딘가 불안정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대답이 없던 백담호는 몇 분 더 지나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잠시 기분이 좀 이상해서 그랬어.”

내가 괜히 놀라게 했네. 백담호는 여전히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해인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는 듯한 미소에도 해인의 낯에 붙은 걱정은 떨어질 줄 몰랐다.

“별거 아니야, 정말. 그냥 갑자기….”

말끝을 흐린 백담호가 해인을 향했던 시선을 잠시 거뒀다.

“갑자기 네가 사라질 것 같았어. 그냥, 정말 갑자기. 지금은 정말 괜찮아.”

백담호는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히려 그 전보다 밝아진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해인의 표정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갑자기 네가 사라질 것 같았어.’

어쩌면 사라진 게 맞을 수도 있었다. 해인이 스스로 백담호에게서 빼낸 호감도 10만큼 말이다. 자신에 대한 백담호의 호감도를 빼낸다는 건 단순히 감정을 빼내는 게 아니라 백담호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해인을 지우는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대체 무슨 게임을 하고 있던 거지. 해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다 나직하게 말했다.

“좋아해.”

왠지 꼭 말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우습게도 호감도 10을 옮기고 다음 날 밤, 해인은 혼자 편의점에 갈 수 있었다. 사실 설정 조정 표시가 여전히 이상하길래 실험 삼아 던져 본 말이었는데 정말로 혼자 나올 수 있었다.

확 차가워진 밤공기를 마시며 걸어서 1분도 걸리지 않는 편의점을 해인은 느릿느릿 걸어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했다. 아이스크림 사러 편의점 가도 되냐는 조심스러운 해인의 물음에 백담호는 입을 벙긋거렸다가 이내 말없이 해인을 응시하더니 되물어 왔다.

‘이 앞에 있는 편의점?’

같이 가자거나 나가지 말고 시키자고 말했을 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해인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담호는 짧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은 내심 놀랐지만 그걸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빨리 갔다 올게.’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몇 주를 백담호의 감시하에 살았는데 공략 인물 삭제를 시작한 지 단 하루 만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서해빛 때도 느꼈지만, 정말… 영향이 크다. 분명 지금 이 변화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는데도 해인은 어쩐지 미세하게 씁쓸함이 느껴져 괜히 입맛을 다셨다. 벌써 이렇게 변하면 앞으로 더 빼내면 어떻게 변하는 거지 싶었다.

대충 막대 아이스크림과 콘을 몇 개 고른 해인이 계산을 했다. 항상 백담호하고 왔다가 혼자 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분명 전에는 갑갑했는데 막상 이렇게 순식간에 변하니 썩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복잡해져 들어가기 전에 밤공기를 잠깐 쐴까 했지만 백담호가 불안할지도 몰라 금방 생각을 거뒀다. 원래도 집착이 약간은 있는 편이긴 했으니까.

그렇게 해인은 봉지에 아이스크림들을 담고 나서 편의점을 나오면서 무심결에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백담호가 서 있었다.

백담호가 왜 여기 있지. 편의점 입구 옆에 백담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서서 해인을 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백담호의 등장에 해인이 의뭉스럽게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왜 여기 있어?”

해인의 물음에 백담호는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백담호를 보며 막상 혼자 보내 놓고 나니 신경 쓰여서 나온 건가 싶어졌다. 그게 제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조금 지나고 나서 백담호는 입을 뗐다.

“산책이나 할까 하고. 날씨도 좋…….”

구름 가득 낀 하늘을 보더니 백담호는 “개별로네.”라고 중얼거리고는 머쓱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해인이 이대로 그냥 집이나 가자고 하면 바로 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때마침 해인도 밤공기를 쐬고 싶었기에 백담호의 옆으로 붙었다.

“응, 산책 좋지. 그럼 아이스크림은, 음.”

해인이 하얀 봉지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봤다. 하나 먹을까 생각했지만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돌아다니다가는 입술과 손에 동상이 걸릴지도 몰랐다. 결국 아이스크림을 먹는 계획을 해인은 철회했다.

“편의점에 잠시 맡기지, 뭐.”

“응. 같이 들어가.”

해인이 아이스크림을 맡기는 동안 백담호는 카운터 근처에 있는 핫 팩 두 개를 샀다. 오늘 좀 유난히 춥긴 하지. 해인은 편의점 유리창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를 보다 자신도 핫 팩을 사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미 백담호가 문을 열고 편의점을 나서고 있었다.

해인은 옷을 두껍게 입었으니까 괜찮을 거라 여기며 결국 핫 팩을 사지 않고 백담호의 뒤를 따라나섰다.

둘은 늦은 저녁 근처에 있는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공원에는 해인과 담호처럼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어두워지면서 낮보다 더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에 많이는 없었다.

산책을 하자던 백담호는 정말 산책만 할 생각인지 아까부터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정적 속에 보시락보시락거리는 소리만 미약하게 들려왔다. 백담호의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였다. 주머니 속에서 열심히 핫 팩을 비비고 있을 손을 생각하니 해인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백담호 몰래 해인은 작게 웃다가 날 선 찬 바람에 부르르 떨며 몸을 웅크렸다.

“으….”

코를 훌찌락거리니 백담호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양손을 꺼냈다. 그의 양손에는 핫 팩이 들려 있었다. 백담호는 두 개 다 해인의 양 주머니에 넣었다. 패딩 주머니에서 곧바로 따뜻한 열감이 미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마워.”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핫 팩을 만지작거리며 해인이 살풋 미소를 지었다. 백담호도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 해인은 핫 팩을 주머니 속에서 비비던 백담호를 떠올렸다. 굳이 자신이 두 개 다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나 두 개나 주면 너는. 너도 춥잖아.”

해인이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핫 팩을 꺼내 건넸지만 백담호는 그 손을 다시 밀어냈다.

“어차피 너 쓰라고 산 거였어. 난 별로 안 추워.”

“아.”

그럼 그렇게 열심히 비빈 것도. 해인은 어쩐지 약간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해인은 가끔 백담호를 힐끔거리며 걸었고 백담호는 묵묵히 앞을 보며 걷기만 했다.

잔잔한 정적이 그리 싫지 않았다. 이 잔잔함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왠지 이 순간 무언가 숨기고 있던 것을 살짝 털어 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분위기가 그랬다. 백담호는 평소보다 차분해 보였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이 둘만 있었다.

몇 번 혼자서 입을 달싹거리던 해인은 고르고 고른 말을 슬그머니 뱉었다.

“너…. 혹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거 알아?”

뚝, 해인이 말을 끝낸 순간 세상이 조용해진 줄 알았다. 분명 백담호는 계속 조용했는데도 주변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것처럼 느껴졌다. 온 세상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고, 백담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만이 연신 두 사람 주변을 맴돌았다.

겨우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아느냐고 물은 것뿐인데 질문이 잘못되었나 의심마저 들었다. 해인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백담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의외로 백담호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아까와 다른 점은, 시선이 해인을 향해 있단 것뿐이었다.

“백담호?”

의문스럽게 부르니 백담호는 더듬더듬 낯선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보듯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하고 중얼거렸다. 백담호가 흥미를 느낄 게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생판 처음 듣는 말처럼 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아 해인은 눈치껏 설명을 붙였다.

“그…. 게임 캐릭터들을 공략해서 보상 같은 거 얻고….”

“대충 알긴 알아. 들어는 본 것 같아.”

“아,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외계어라도 듣듯이 군거지. 해인은 의아했지만 뭐라고 따질 건덕지도 아니라 그저 ‘오…. 아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건 왜.”

“음….”

해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서두를 먼저 꺼내기는 했지만 막상 말하려니 어떻게 자연스럽게 말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애초에 지금 상황에선 어떻게 해도 뜬금없는 이야기였기에 해인은 생각을 포기하고 일단 입을 열었다.

“만약에 네가 그 게임의 공략 인물이 되면 어떨 것 같아?”

“…내가?”

역시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였나. 백담호는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백담호는 이내 걷기 시작했고 해인 역시도 그를 따라 걸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해인이 화두를 돌리려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봤다. 왠지 이 순간이 아니면 평생 이 주제로 말을 꺼내기 힘들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전부 다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냥 백담호의 어렴풋한 생각이 궁금했다.

“어…. 중요한 건 아닌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막 널 공략해서 호감도를 높이면 보상 같은 걸 줘. 그래서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너한테 접근해서 꼬시고 그래…. 근데 넌 그걸 모르고 있어. 그러면 어떨 것 같나… 싶어서….”

말을 하면서 해인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숙여졌다. 지금 백담호에게 ‘이게 지금 내가 너한테 한 짓이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댔다. 주머니에 넣은 손이 무의식적으로 손톱으로 제 손끝을 불안하게 득득 긁어 튕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백담호에게는 좀 갑작스럽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텐데. 왠지 고개를 들면 백담호가 서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이득 챙기기 위해 누가 내 호감을 사려고 하면 어떨 것 같냐고?”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정리 없이 말했는데도 백담호는 알아서 요점만 집어 물었다. 해인은 고개를 여전히 바닥으로 수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음에 오는 백담호의 답을 해인은 숨죽여 기다렸다. 주머니 속 손에 찬 땀이 핫 팩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 때문인 건지 헷갈렸다.

백담호의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둘 사이에 감도는 침묵이 갈수록 묵직해져 걸음걸이도 덩달아 느려졌다. 가로등 불빛에 바닥에 내려앉은 제 그림자만 뚫어져라 보던 해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옆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어떠한 생각도 읽을 수 없는 오묘한 시선이었다. 무언가 생각에 깊게 잠긴 것 같은 게 해인의 이상한 질문을 꽤나 진지하게 여기고 있어 보였다. 느려지던 발걸음이 결국 불빛 아래에서 완전히 정지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기분이 좋진 않네.”

“아….”

“나를 이용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실망스럽기도 하겠지.”

끝까지 날 이용하려고 들다가 들키면 아마도…. 덧붙여졌으나 흐려진 말끝에서 해인은 살기가 느껴졌다. 그 말이 마치 자신에게 하는 경고 같아 해인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아마도’ 다음에 무슨 말이 올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말은 아닐 테지.

“그, 그렇구나…. 하긴 기분 나쁘겠지. 당연히. 나라도 그럴 거야.”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해인은 얼굴을 정면으로 돌렸다. 피하지 않는 백담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괜히 계속 마주 보고 있다가 백담호가 불쑥 ‘찔려, 해인아?’라고 할 것 같았다.

또다시 찾아온 침묵이 이번에는 가시가 돋아 있는 듯싶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백담호의 대답을 예상했는데도 ‘실망스럽기도 하겠지.’라는 말이 귓가에서 웅웅 반복적으로 울렸다.

“음…. 이제 그만 들어갈까? 날씨도 춥고.”

이 이상 이야기를 나아갈 자신이 없어 해인은 걸어온 방향과 반대로 몸을 돌렸다. 백담호가 들어가자고 답하지 않았지만 해인은 발걸음을 내디디다 이내 멈춰 섰다. 뒤에서 들려오는 물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보상을 얻었어? 이제 나한테 볼일 다 봤대?”

음성이 어딘가 싸늘했다. 해인은 지반이 훅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백담호가 무언가 눈치챘다. 단순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말투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해인이 말한 누군가를 거의 해인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제가 한 말 중에 쉽게 눈치챌 만한 게 뭐가 있나, 해인은 되짚어 봤지만 다소 뜬금없기는 했지만 이걸 가정이 아닌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만한 부분은 없었다.

애초에 갑자기 ‘너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공략캐야.’라고 말하면 누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인다고. 제자리에서 망부석이 된 해인의 동공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담호는 제 말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처음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을 눈치챈 건가. 똑똑하고 눈치도 빠른 백담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해인이 마른침을 삼키고 뒤를 돌아봤다.

백담호는 몸을 비스듬히 돌린 채 해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표정인 것 같기도 했고 조금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으며 화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어…….”

해인은 백담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정말 백담호가 말한 ‘그 사람’이 자신을 지칭하는 거라면 이걸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해인이 백담호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지만 여전히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쪽은 백담호였다. 그는 긴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뭐가 되었든, 나한텐 말해 줬으면 좋겠네.”

“…정말?”

백담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해인을 보다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 잘 모르겠다.”

나직하게 중얼거린 백담호는 해인을 지나쳐 앞서갔다. 멀어지는 백담호를 해인은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지나쳐 가는 백담호의 얼굴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서. 백담호의 머리 위의 호감도가 다시 지직거리고 있었다.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어떤 선택을 하든 이미 늦어 버린 것 같았다.

* * *

백담호는 그날 이후로 ‘연애 시뮬레이션’이나 ‘공략 인물’에 대한 얘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아예 그날 있었던 일들을 다 잊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해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그 뒤로 백담호와 자신 사이에 선이 그어졌다. 아주 희미하고 흐릿하지만, 발로 문댄다고 절대 지워지지 않는 그런 희미한 선이 생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같았다. 해인과 백담호는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전처럼 같이 다녔지만 대하는 태도나 말투, 분위기 등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대화는 줄었고, 자주 해인을 끌어안거나 해인의 어딘가와 꼭 접촉해 있던 백담호가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은 것이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고 꼭 필요할 때만 해인에게 손을 댔다. 가끔은 손을 뻗어 오다가도 혼자 흠칫거리더니 손을 거두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를 쓰레기통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백담호의 호감도가 자신이 옮길 때 빼고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금 상태로 보면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1’씩 떨어질 것 같은데도.

해인은 옆에서 걷고 있는 백담호를 흘긋 쳐다봤다. 아까부터 말없이 다음 강의실로 향하기만 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관계를 억지로 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해인은 백담호의 머리 위를 봤다.

[■□ 조? $▨]

[호감도 62]

벌써 쓰레기통에 들어간 백담호의 호감도가 20이었다. 그리고 삭제까지 남은 기간은 하루였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아마도 마지막 옮기기는 금요일에 하지 않을까 싶다. 그다음 날은 주말이니 공략 인물 삭제하기엔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션은 이제 딱 한 번, 한 번이 남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속도가 한계였다. 이제 백담호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그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게 눈에 슬슬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백담호는 좋아한다는 제 말도 듣기 싫은 정도일까.

변해 가는 백담호를 볼 때 가끔씩, 해인은 저도 모르게 차라리 백담호가 자신에 대해 다 잊고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시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이렇게 눈치를 보며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자괴감과 죄책감이 들어 혼자만의 생각임에도 서둘러 지워 버리고는 했다.

이제 게임에게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결국은 제 탓이었다. 산책하던 날 아무 말도 하지 말걸. 왜 대체 갑자기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걸까.

아무래도 백담호는 그날, 해인이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 갑자기 이런 거리감이 생길 리가 없었다. 게임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고, 단지 해인이 비유해서 돌려서 말했다고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했던 말을 백담호 나름대로 해석했겠지. 엄연히 틀린 해석은 아니었지만 생략된 게 너무 많았다. 다시 설명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러려면 게임에 관한 설명을 더 자세하게 해야 했다. 이제는 뭐가 되었든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인이 접근한 것에 목적이 있다고 여기는 백담호가 해인의 말을 믿어 줄까. 이미 신뢰 관계는 금이 가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인은 자신이 이상한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증거가 없었다. 백담호가 믿지 못해도 보여 줄 만한 게 없다는 걸 이제 와 깨달았다. 해인은 바닥을 보며 걷던 시선을 들어 올려 입을 살짝 벙긋거렸지만 이내 다물었다.

그사이 벌써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백담호가 먼저 들어가고 해인이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시야 끝자락에 흐릿하게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고개를 돌리니 서해빛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해빛은 어색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순간 이대로 지나치는 줄 알았던 서해빛은 살짝 머뭇거리더니 해인에게로 다가왔다. 서해빛의 머리 위에는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에 우연히 가다가 서해빛을 발견했고 마침 백담호는 옆에 없던 터라 그날 바로 마지막 호감도 옮기기와 공략 인물 삭제를 진행했다. 그러니까, 공략 인물 삭제 후, 서해빛과는 지금 처음 보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호감도를 옮길 때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급하게 자리를 뜨더니 지금은 꽤 좋아 보였다. 짓는 미소가 퍽 예전처럼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 어.”

매일 어떻게든 형, 형 하던 서해빛의 호칭이 자연스럽게 선배로 변해 있었다.

“아, 전에 까먹고 못 물어봤는데 번호 바꾸신 거죠?”

“음…….”

해인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해빛은 의외로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걱정 마요. 그냥, 확인해 보려고 물어본 거예요. 그래도 조금 씁쓸하긴 하네요. 이렇게 바로 바꾸실 줄이야….”

해인은 작게 “…응.”이라고 대답했고 서해빛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떡였다. 어색한 정적이 조금 흐르고 서해빛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웃긴데.”

해빛이 제 목덜미를 손으로 무안한 듯 문질렀다.

“그동안 제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선배.”

너무 뜬금없는 사과에 해인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찌푸려진 해인의 표정을 서해빛은 다르게 해석한 건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 몇 주 동안 계속 생각하다 보니까. 제가 정말 왜 그렇게까지 했나 싶더라고요. 아니, 그렇다고 선배가 좋다는 말은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물론 지금도 선배가 좋아요. 좋은데……. 어느 날 제가 마음을 앞세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고요…….”

선배하고 저하고 과거가 어쨌든 끝난 거였는데. 제가 너무 억지를 부렸네요. 선배도 지금 좀 어이없죠? 저라도 그럴 거예요……. 이해해요. 용서해 달란 말은 안 할게요. 죄송했어요, 선배.

허리까지 조금 숙인 서해빛은 말을 마친 뒤, 그대로 떠나 버렸다. 해인은 혼자 남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인파 속으로 파묻혀 서해빛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이제 서해빛은 서서히 자신에 대해 남은 감정을 지우고 끝끝내 자신도 잊어버릴 것이다. 서해빛이 그럴 거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해인은 앞으로의 서해빛이 그려지는 듯했다.

서해빛은 이제, 제 현실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빠르고, 미련 없이. 한결 가볍다는 듯이. 서해빛이 제게서 마음을 점점 떠나보내는 것 자체는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에 대해서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서해빛의 해인에 대한 마음을 해인은 보답해 줄 수 없으니. 다만, 공허했을 뿐이다.

돌에 묶인 것처럼 강의실 입구에서 가만히 있던 해인은 백담호가 왜 안 들어오냐고 다가오며 묻고 나서야 강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거기 서서 뭐 했어?”

“…서해빛이랑 대화했어.”

해인이 고개를 돌려 백담호를 쳐다봤다. 백담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대화.”

백담호는 전처럼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동안 미안하다더라….”

해인의 말에 백담호는 미심쩍은 건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걔가, 갑자기?”라고 물었다.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백담호는 입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러고는 교수가 들어올 즈음 “그렇구나.”라고 중얼거리듯 대답할 뿐이었다.

백담호는 전혀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고 서해빛이랑 자신이 대화한 것에 대해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해인은 백담호의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를 쳐다보려다 말았다.

두려웠다. 마지막 한 번이면 퀘스트가 끝난다. 좋아해, 이 한마디가 이토록 뱉기 힘들었던가. 예전에는 쑥스러워서 말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미묘하게 굳는 백담호의 반응과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백담호와 해인은 오피스텔로 향했다. 오피스텔로 옮긴 후 자주 걸어서 학교를 같이 갔고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하늘이 흐려 평소보다 거리가 조금 더 어두웠다.

찬 공기에 해인은 패딩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반쯤 얼굴이 파묻힌 채 옆을 돌아봤다. 백담호는 묵묵하게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지퍼를 잠그지 않아 펄럭이는 패딩이 몹시 추워 보여 해인은 나지막하게 권했다.

“담호야, 추워 보여. 지퍼 안 잠가도 되겠어?”

“괜찮아, 별로 안 추워.”

“…응.”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오피스텔에 들어갈 때까지 해인과 백담호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유일하게 생기가 가득한 두식이가 총총총 달려와 백담호의 다리에 제 몸을 문질렀다. 담호는 두식이를 가볍게 쓰다듬다 바로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식이 현관 근처 홀로 남은 해인에게 다가가 담호에게 했던 것처럼 제 몸을 비볐다. 해인은 입을 꾹 다물며 두식이를 보다가 몸을 쭈그려 두식이를 쓰다듬었다.

* * *

저녁에 별로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해인은 제 윗배를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교재를 골똘히 내려다봤다. 백담호도 테이블 좁은 면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곧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험 기간이라서 다행인 건지, 백담호와 아무 말 없이 한 공간에 있는데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기가 집이 아니라 칸막이 쳐진 독서실 같아서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도 조심해서 쉬기도 했지만.

해인이 한 번 더 윗배를 문지를 때였다.

“배 아파?”

갑작스러운 소리에 넋을 놓고 있던 해인이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로 백담호와 마주쳤고 백담호는 격한 해인의 반응에 황당한 듯 보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생각해도 과한 반응이라 해인은 머쓱하게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좀 소화가 잘 안 되나 봐.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 같아.”

“그래?”

백담호가 벌떡 일어서서는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서랍을 뒤적거리던 백담호는 무언가를 들고 와서 해인에게 건넸다. 갈색 병에 담긴 액상 소화제였다.

“고마워….”

목소리가 조금 먹먹하게 젖었다. 별거 아닌 일인데 왜 갑자기 슬픈 기분이 드는 건지 해인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었기에 백담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해인은 시큰거리는 눈을 괜히 부릅뜨며 소화제 뚜껑을 깠다.

바로 들이마시니 화한 맛과 한약재 맛이 입 안으로 퍼져 일렁이던 감정이 수그러든 듯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뒤 빈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백담호가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바로 다시 책을 볼 줄 알았던 백담호는 턱을 괴고 해인을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진 달갑지 않은 침묵에 버티지 못한 해인이 결국 어정쩡하게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백담호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해인아.”

“으응.”

“갑갑하지.”

물음을 가장한 확인이었다. 이미 백담호는 자신이 갑갑하게 느끼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이전까지 해인이 종종 반감금 생활이 답답한 티를 냈었고, 지금 백담호는 전처럼 돌아오고 있는 중이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해인은 쉽사리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해인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백담호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감정적으로 군 것 같아. 미안해, 해인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후회하고 있어. 정말.”

“…어?”

쿵쿵쿵, 해인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속까지 들리는 듯했다.

“이제 굳이 여기로 오지 않아도 돼. 집 가고 싶으면 가.”

백담호의 말에 서해빛이 떠올랐다. 미안함을 가득 담은 사과와 자책을 남기고 미련 없이 제 갈 길을 떠난 아까의 일이 오버랩 됐다. 불안한 징조에 해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난, 난 괜찮아.”

“아니잖아. 해인아. 안 괜찮잖아.”

“정말로 괜-.”

“그만. 넌 얼굴에 다 티가 나.”

해인의 동공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동안 백담호의 변화로 인해 해인도 계속 느끼고 있었다. 곧 이 관계가 끝나 갈 거라고. 그러나 생각만 하던 게 실제로 정말 머지않았다고 느껴지니 해인은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괜….”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진지하게 마주치는 검은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괜찮다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글프게 일그러진 제 얼굴에 해인은 더 이상 괜찮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억지로 나한테 맞추지 마.”

해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살얼음이 낀 정적 속에서 백담호는 결국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나갔다 올 테니까, 생각 정리 좀 하고 있어.”

냉랭하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백담호를 보는 해인의 시선은 어느새 물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백담호는 미련 없이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내가 원해서 너한테 맞춘 거였어. 안 괜찮을 거 알아도…. 결정은 내가 한 거였어.”

머뭇거리던 해인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신발을 신던 백담호가 멈칫거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긴 한숨 소리만 음울하게 깔려 들려올 뿐이었다. 빠르게 신발을 신은 백담호는 현관문을 잡았고 해인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백담호가 고개를 돌렸다.

“해인아, 그날….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거야? 난 차라리 내가 너한테 강압적으로 굴어서 미안해하는 게 나았던 거 같아.”

들려오는 말소리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백담호가 뜻하는 ‘그런 말’이 해인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네가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겠지만, 그건… 내용이 너무 복잡해서 생략된 게 너무 많았어. 그러니까….”

“결국 맞는 말이긴 했다는 거네.”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리고 말았다. 해인은 입술만 달싹거렸고 백담호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건지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해인은 몇 분을 망부석처럼 현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역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는 후회와 함께.

게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백담호의 호감도를 마지막으로 옮기고 공략 인물 삭제하는 날이. 그래도 전에는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공략 인물을 삭제하고 나서도 백담호와 제 관계가 회복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이 미세하게라도 반짝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든 게 검게 가려져 버렸다.

단 하루, 백담호와 자신의 사이가 유지되는 날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차라리 공략 인물 삭제를 포기해 버릴까, 힘겹게 다진 의지가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 *

밤 12시 03분. 백담호가 나간 지 벌써 3시간이 넘었다. 그사이 메시지를 몇 번 보내 봤지만 백담호는 읽지도 않았다. 초조함에 해인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

따끔한 고통과 함께 혀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손으로 쓰윽 입술 위를 문지르니 붉은 액체가 조금 묻었다. 묽은 피를 손가락으로 비벼 지워 버렸다. 결국 5분이 더 지났을 때 해인이 백담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긴 연결음과 기계 안내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 * *

백담호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술 냄새를 풍기며.

“백담호….”

샤워를 하고 가운만 입은 채 침대로 미적미적 올라오던 백담호가 건조한 시선으로 해인을 봤다.

“방해인.”

“응.”

“갑자기 나한테 관심을 보인 건 그날 말했던 거 때문이었어?”

“…어?”

백담호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으며 답답한지 가운의 앞섶을 조금 풀어 헤쳤다. 바디 워시의 향과 함께 풍기는 알코올 냄새는 백담호가 취기가 올랐다는 걸 말해 줬지만, 해인을 향하는 시선은 이상하게 또렷하기만 했다.

“보상.”

뻣뻣하게 굳은 해인의 반응이 이미 답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백담호는 집요하게 해인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답을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져 해인은 목울대를 일렁이다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응. 맞아.”

해인의 대답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곧이어 허탈감이 실린 웃음소리가 바람 새어 나오듯 들려왔다.

“그래서 그렇게 입 꾹 닫고 말을 안 하려고 했던 거구나. 왜 그러나 했더니….”

이제야 좀 알겠네. 백담호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어 놓았다. 헛웃음 소리가 튀어나오기를 한참, 백담호가 나지막하게.

“…해인아, 나랑 왜 사귄다고 했어. 이럴 거면.”

라며 원망 서린 말을 뱉었다.

해인은 미안함에 차마 백담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애꿎은 이불만 꾸깃거리다가 겨우 그를 바라봤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기겠지만…. 너를 정말 좋아해. 이 마음만은 늘 진심이었어.”

먼저 속인 건 정말 미안해…. 나오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담호는 조용하게 나오는 눈물을 꾹 참고 있는 해인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침묵을 오래 유지하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알게 되니까…. 기분 좆같다. 진짜.”

그 순간, 백담호의 머리 위의 호감도가 떨어졌다. 백담호는 그대로 해인을 등져 누워 버렸다. 해인도 더 이상 백담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도 떨어지지 않았던 호감도가 결국엔 떨어졌다.

해인은 제게서 등져 누운 백담호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 *? $]

[호감도 58]

호감도 표시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담긴 호감도들을 다시 쏟아붓고 싶었다. 해인이 결국 계속 참았던 눈물을 한두 방울 조용하게 떨구고 누우려던 참이었다. 불길하고도 맑은 소리가 명쾌하게 해인의 귓가에서 울렸다.

띵-.

[알림]

축하드립니다. 공략 인물 백담호의 두 번째 필수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은, ‘소원권’입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뭐? 떠오른 시스템창을 본 해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 * *

뜨지 마라, 뜨지 마라. 그렇게 빌었음에도 기어코 아침 해는 하늘 높이 떠올랐다. 해인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에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검게 주욱 늘어져 있었다. 망할 게임이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보상이라고 소원권을 줘 버렸다.

예전이었더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라며 넙죽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원래 공략 인물 삭제 후 게임을 종료하려고 했지만, 소원권이 생긴 지금은 게임을 완전히 지울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지우는 게 옳다는 걸 해인도 알았다.

게임을 종료한다고 해서 다시 제게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게임이 영영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소원권이 보상으로 온 건 분명 기뻐야 할 상황인데.

자꾸만 괴로워하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상처받은 백담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타이밍 좋게, 어쩌면 최악의 타이밍에 온 소원권으로 백담호를 예전처럼, 아니면 산책을 했던 그날 일을 잊게 해 달라고 빌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 다음 공략 인물을 삭제하고 게임을 종료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자꾸만 마음을 톡톡 건드렸다.

원래도 공략 인물 삭제 후 게임을 ‘종료’하려고 했으니까. 조금 더 백담호와 좋은 관계로 남은 채 종료할 수 있을 거라는 하나의 생각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해인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면 백담호를 최대한 건들지 않으려던 노력, 그가 그답게 지내기 위해 지금까지 한 내 행동은 뭐가 되는 거지.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결국 해인은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또한 해인도 느끼고 있다. 결정을 미루면 미룰수록 힘들어질 거라는 걸.

백담호에게 다가간 이유를 말하기를 계속 미루다 미뤄 이 꼴이 난 지금 같이.

“…어떻게 해야 할까.”

해인의 혼잣말이 허공으로 바스라졌다.

* * *

남은 시간 9시간 42분.

금요일의 마지막 수업을 듣는 중이다. 서해빛과 함께 듣는 주거와 문화 강의를. 서해빛은 남이라도 된 것처럼 해인과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그동안 제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선배.’

‘내가 그동안 너무 감정적으로 군 것 같아. 미안해, 해인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후회하고 있어. 정말.’

서해빛과 백담호의 행동 패턴이 겹쳤다. 해인은 공략 삭제 후 백담호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백담호는 서해빛보다 더한 남이 되겠지. 자신이 그리 상처를 줬는데.

교수가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인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해인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원래 이때쯤 호감도를 마저 옮기고 공략 인물 삭제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해인은 호감도조차도 옮기지 못했다. 백담호는 지난날들과 차원이 다르게 냉랭했고 오늘 백담호가 제게 한 말이라고는 “밥?”, “오늘 집에 안 가고 우리 집 가게?”였다.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백담호의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해인은 몸소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인은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고 싶었다. 백담호가 아무리 쌀쌀맞아졌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더 옆에 있고 싶었다. 호감도를 더 떨어트리고 공략 인물을 삭제하는 순간, 관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예상은 점점 확신이 되어 갔다.

백담호는 공부를 끝내고 먼저 잔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해인만 거실에 남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TV 화면만 보고 있었다. TV엔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해인은 하나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TV에서 나오는 소리가 고막에 닿지 못하고 퉁퉁 튕겨 나가고 있었으니까.

해인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 50분. 벌써 오늘이, 금요일이 10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직감한 해인이 드디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TV를 끄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움직여 침실로 향했다.

아직 삭제를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끝이 난 것만 같았다.

침실은 스탠드의 작은 불 빼고는 전부 꺼진 상태였다. 백담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듯했다. 해인은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 기어 올라가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여 백담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해인이 백담호의 머리 위 호감도를 내려다봤다.

[$■ □ * ? ]

[호감도 58]

58에서 10을 빼면 48. 절반에서 2가 모자란 숫자가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 알고서 하는 일인데도 밀려오는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생긴 큰 변수에 다 잡아 놓은 마음은 곧 부러질 나뭇가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해인은 소원권을 떠올리다가, 다시 백담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다가갔던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백담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경계하던 모습부터 살갑게 굴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실망밖에 남지 않은 얼굴까지.

욕심대로 한다면 지금 당장 백담호를 전처럼 돌리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해인은 앞으로 절대 백담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계속 이 순간이 떠오를 테니까.

그래, 지금 이 충동은 그냥 욕심이었다. 백담호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건 맞지만, 그걸로 인해 그를 괴롭게 하거나 망가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찬찬히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가 내뱉었다. 다시 떠진 해인의 눈은 전보다는 떨림이 잦아 있었다. 해인은 백담호의 호감도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호감도가 점점 쓰레기통으로 옮겨졌다. 빠르게 늘어난 쓰레기통 위의 숫자가 30이 되자 창이 떠올랐다.

[알림]

공략 인물 백담호의 공략 인물 삭제에 필요한 호감도가 전부 모아졌습니다. 삭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주의, 삭제가 시작되면 중간에 취소할 수 없습니다)

(주의, 삭제가 완료되기까지 최소 4분에서 최대 6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주의, 해당 공략 인물의 호감도가 높습니다)

[예 | 아니오]

해인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예’를 선택했다. 그러자 창이 바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서해빛 때처럼 바로 ‘삭제가 진행됩니다.’라는 알림창이 떠야 하는데 주변이 고요하기만 했다.

“…어?”

당황한 해인이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이자 뒤늦게야 창이 떠올랐다.

[알림]

보유하신 소원권으로 공략 인물 백담호의 ‘설정 조정’을 취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시스템창을 본 후에야, 해인은 역시 지금 이 타이밍에 소원권을 준 건 시스템의 계략이었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 봤자, 해인은 다시 마음을 바로 정했지만.

해인이 바로 ‘예’로 손을 뻗어 터치했다.

[알림]

공략 인물 백담호의 공략 인물 삭제가 진행됩니다.

예상 시간: 6시간.

“여섯 시….”

엄청나게 긴 시간에 제대로 당황할 새도 없이 해인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막을 수 없는 수마에 해인은 빠져들며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내일 아침, 백담호는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이제 집에 가라고 할까, 아니면 잠시 시간을 두자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까.

뭐가 되었든…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미안해, 백담호.

해인의 의식이 완전히 까맣게 점멸되었다.

* * *

시야를 가린 눈꺼풀 뒤로 밝은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해인이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힘겹게 뜨니 바로 코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라 있었다.

[알림]

백담호의 공략 인물 삭제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레비티 in dating sim>의 주요 인물에게서 일정 수치 이상 받아야 하는 호감도가 충족되지 않아 ‘조연은 이제 주연’ 칭호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로 인한 모든 ‘설정 조정’은 무효화됩니다.

창을 다 읽은 해인이 몸을 벌떡 일으켜 바로 옆을 돌아봤다. 백담호는 이미 일어나 있었고 그의 머리 위에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백담호의 머리 위를 해인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 정말…. 사라졌다. 백담호가 드디어 공략 인물에서 삭제가 되었다. 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잠시 해인의 얼굴을 때리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제야 백담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해인은 시선을 내려 백담호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굳고 말았다. 백담호의 눈가가 울기라도 한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담호.”

“나를….”

결국 끊어 냈구나. 백담호의 목소리, 표정, 눈빛 그 모든 것이 해인을 향한 배신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해인이 생각했던 예측 중에 백담호의 이런 반응은 없었다.

백담호를 끊어 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하지 마.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백담호의 표정은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임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말일까? 뭘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뜻인지 해인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단 한 번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산책하던 날, 백담호에게 게임 이야기를 말하긴 했지만, 단순히 비유로 알아들었던 게 아니었던 것인가. 해인은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나 되짚어 보았지만, 시간은 그를 위해 멈춰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인이 당황하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할수록 백담호의 표정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다 알고 있다니, 뭐를…?”

얼빠진 해인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비웃음이었다. 백담호는 해인을 살기 어리게 노려봤다.

“원하는 건 다 얻었어? 당연히 그러겠지.”

“아니, 잠시. 담호야, 내 말 좀 들어 봐.”

“아무 말도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지금은.”

당분간 시간을 좀 두자, 우리. 돌아가 방해인.

날 서린 단호함에 해인은 입이 다물어졌다. 자신을 보는 백담호의 모습이 너무나 차가워 해인은 어떠한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이 더 지나고 나서야 해인은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정말 미안, 갈게.”

공략 인물에서 삭제할 생각을 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지만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해인은 비척거리며 일어서 대충 겉옷을 껴입고 그대로 오피스텔을 나갔다. 백담호는 단 한 번도 해인을 붙잡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결말이었다.

* * *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현실과 동떨어진 듯 계속 허공을 부유했고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제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해인은 넋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아 택시 안에서도 텅 빈 모형처럼 창밖만 바라봤을 뿐이다.

다만 그 와중에도 잊지 않았던 건, 게임을 지우는 일이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해인은 본능적으로 소원권을 사용해 게임을 지워 버렸다. 다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 어떠한 것도 관여하지 말라고 빌었고 그 소원은 바로 이루어졌다.

게임은 백담호를 공략 인물에서 진짜로 삭제하겠느냐고 그렇게 되묻더니 이번에는 되묻지도 않고 바로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해인은 제 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강렬한 느낌과 아주 두꺼운 장막이 걷히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원치 않았는데도 순간 해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의 일들이 주르륵,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진짜로 게임의 끝을 알리듯이.

처음 느껴 보는 낯설고도 아주 기묘한 느낌에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공략 인물에서 삭제된 서해빛과 백담호도 이런 비슷한 류의 기분을 느꼈던 걸까.

해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백담호는 단순히 이 느낌 하나로 자기를 끊어 냈다고 여기는…. 말도 안 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잠깐 기분이 몹시 이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혼란스러움에 해인은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허공을 봤다. 순간, 그의 눈앞으로 [EYR453-90 동기화 실패]라는 창이 지직거리며 떴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맨정신이라면 저게 대체 뭔가 궁금해했겠지만 현재의 해인에게는 그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제 눈으로 반사되는 모든 빛과, 진동하는 소리가 튕겨져 나갔기 때문이다.

“학생, 괜찮아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백미러로 힐끔힐끔 해인을 살피던 택시 기사가 물었다. 해인은 “…괜찮아요.”라고 겨우 대답했다.

백담호가 무언가를 알아챘든 말든 이제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이미 끝나 버렸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은 나와 버렸는데. 해인은 몸을 추욱 늘어트리며 공허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기만 했다.

차가운 제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메말랐던 눈에서 봇물 터지듯 눈물이 죽죽 흘러나왔다. 낮아진 호감도로 인해 백담호가 자신과의 관계를 끝내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상처받은 눈빛을 보니 전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가 됐고 가슴이 미어졌다. 현관에서 풀썩 주저앉은 해인은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백담호에게로 다시 가야 한다는 것도, 그에게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일을 만든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 * *

신발을 벗지도 않고 한참을 쭈그려 앉아 울던 해인이 불현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띵하고 눈이 퉁퉁 부어 반쯤 시야가 가려졌다. 게다가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탓인지 다리까지 찌릿 저려 왔다.

해인은 비틀거리는 몸에 겨우 중심을 잡고 문고리를 돌렸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3시간 만에 다시 집을 나섰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백담호에게 제 감정만은 진심이었다는 걸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도 정리하지 못했고 다분히 감정에 치우친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백담호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결국 끊어 냈구나.’

냉담한 얼굴 속에 살짝 묻어나던 상처받은 표정과 붉은 눈가가 잊히지 않았다. 백담호에게 상처만 준 채로 관계를 끝낼 순 없었다.

백담호가 뭘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진 몰라도 ‘보상’을 위해 지금까지 그의 옆에 있던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비록 처음에는 속여 먹고 보상 얻고 거리 둔다고 쓰레기 짓을 했지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는 늘 진심이었다는 걸.

그래도 백담호가 이미 제게 질려 버려, 이미 다시는 믿을 수가 없어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하면……. 그때는…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거겠지. 해인은 그려지는 참담한 미래에 부은 눈을 세게 문질렀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탄 해인은 곧바로 백담호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백미러로 느껴지는 힐끔거리는 시선에 해인이 휴대폰으로 제 얼굴을 쳐다보니 가관이었다. 눈이고 뭐고 다 퉁퉁 부어 꼴 보기 싫을 정도였다. 코끝도 시뻘겋게 부어오른 게 감기라도 걸린 것 같아 해인은 심호흡을 하며 차갑게 식은 손으로 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몇 시간을 질질 짜며 감정을 쏟아 내기만 했더니 그래도 한결 정신이 또렷해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찬 바람에 정신이 더욱 선명해지니 너무 무턱대고 온 게 아닐까, 백담호가 문도 안 열어 주면 어쩌나 싶은 걱정에 발걸음이 더뎌졌다.

하지만 결국 문 앞까지 도착해 버렸고 초조함에 손바닥에 땀이 차 해인은 양손을 괜스레 비볐다. 오는 길에 대략적으로 정리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고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하자 다짐하고 나서야 해인은 벨을 눌렀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한참이나 조용해 해인이 한 번 더 벨을 누르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겨우 세 시간 사이에 안색이 더 어두워진 백담호가 삐딱한 얼굴로 나왔다.

“왜 다시 왔어. 당분간 시간 두자고 했잖아. 내 말이 우스워?”

딱딱하게 굳은 말투와 아까보다 더 싸늘해진 눈빛에 정리했던 말들이 전부 뒤죽박죽 섞이고 말았다. 모든 말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속인 건 미안해.”

사과였다. 하지만 예상했듯 백담호의 표정은 싸늘한 채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널 좋아하는 건 진심이야…. 이것만큼은 정말…. 정말….”

말을 이어야 하는데, 다짐한 게 부질없이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어 봤자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비록 처음에는…. 그래, 전에 말한 대로 보상을 얻으려고 다가, 다가간 거 맞는데……. 그거 맞긴 한데…….”

울컥울컥 올라오는 못난 서러움에 자꾸 목이 탁 막혀 해인은 말을 제대로 잇지를 못했다. 그렇게 울어 놓고도 또 눈치도 없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때 빼고…. 아니, 그때도 이미 너 좋아, 좋아했고, 흐윽…. 지금도…… 똑같이…. 좋아하는데…. 아니, 더 좋아하는데….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조, 존나 개새끼였어. 다 잘못했어…. 근데, 그래도 나, 흐읍……. 공략 인물, 삭제, 삭제 그거는… 끊어 낸 게 아니라…!”

이제는 숨도 꺽꺽 가쁘게 쉬며 말하는 해인을 백담호는 꽤 당황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렇게 오열하는 방해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탱탱 부어오른 게 이미 실컷 울다가 온 게 분명했다. 백담호는 잠시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고는 해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일단, 일단 알겠어. 진정하고 들어와. 해인아.”

뚝뚝, 화를 내지도 못할 정도로 안타깝게 흐르는 눈물을 백담호가 닦아 내자 해인은 더 울기 시작했다. 해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간간하게 미안해, 사랑해 정도만 겨우 들려올 뿐이었다.

이러다가 해인의 숨이 넘어갈까 백담호는 자신의 분노를 제쳐 두고 그를 달래 겨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수 있었다. 백담호는 바로 해인을 소파에 앉힌 뒤 티슈를 건네주고 바로 옆에 비스듬하게 앉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해인은 코를 훌쩍이며 티슈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결국 울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말하다 보니 넘치는 감정을 도무지 갈무리할 수 없었다.

해인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채 옆에 앉아 있는 백담호를 힐끔거렸다.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표정이었는데 말이 없으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호감도를 살피려고 시야가 올라갔지만, 그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깨달은 해인은 황급히 눈을 돌려 버렸다.

“네가 나한테 갑자기 게임 이야기를 하기 며칠 전에 이상한 걸 봤어.”

“뭐를…?”

코가 다 막혀 해인의 목소리는 맹맹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진 편지랑 그 안의 내용들.”

부어올라 가늘게 떠진 해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편지를 백담호가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백담호가 먼저 답장을 봤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어쩐지 봉투는 없고 엽서만 있었던 게 이상하더라니.

“거기에는 나를 일주일 안에 삭제한다면, 페널티 없이 공략 인물 삭제 성공이라고 적혀 있더라. 난 솔직히 처음에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었어.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아니면 드디어 돌아 버렸나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나중에 일어난 네가 자연스럽게 그 편지를 읽더라. 그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허공을 보며 하나하나 되짚어 보듯 조곤조곤 이어 나가는 백담호의 설명에 해인은 깨달았다. 말로 설명했으면 믿지 못했을 일을 눈으로 목격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 갑자기 백담호가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했던 이유와, 백담호가 산책한 날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그런데 솔직히 그것만 보고는 뭔지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잖아. 하지만 네가 나를 삭제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나랑 인연을 끊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그게 내가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어. 그동안 내가 너를 너무 구속하고 무섭게 굴어서. 근데 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이야기하더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공략 인물이 되어서 누가 보상 때문에 접근하면 어떨 거 같냐고. 그리고 오늘, 눈을 뜨니까 정말 기분이 이상했어. 전에도 가끔씩 느끼긴 했는데, 오늘따라 그게 더 심하게 느껴지더라고.”

“무슨 기분…?”

백담호도 자신이 게임을 삭제할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한 걸 느꼈던 걸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진 느낌이야. 네가 왠지 이대로 사라질 것 같은. 오늘 유난히 크게 느껴졌고…. 어제가 그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잖아.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바로 알았어. 아, 방해인이 나를 공략 인물인지 뭔지에서 결국 삭제를 해 버렸구나 하고.”

백담호는 아침에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떠올리듯 슬픔을 담은 까만 눈동자로 해인을 바라봤다. 해인은 백담호가 왜 자신을 끊어 냈다고 한 건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묵묵히 백담호를 바라보던 해인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보상 때문이었지만, 그 뒤로는 전혀 아니었어…. 보상도 이미 진작 얻은 상태였고…. 속여서 미안해, 하지만 좋아하는 건 진심이야. 그리고 공략 인물에서 삭제한 건 너와 끝내려던 게 아니라 그 게임이 너를 이상하게 만들어서, 네가 점점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그런 거였어.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삭제한 건 아니야. 정말.”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응, 네가 전에 나 집에 못 가게 하고 집착이 갑자기 더 심해지고 너도 혼란스러워하던 거…….”

백담호의 표정이 심각해져 해인은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너까지 휘말리지 않게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 게임이 워낙 자기 멋대로라서…. 나도 많이 당했어….”

백담호는 적잖이 충격을 먹은 듯 보였다. 눈만 몇 번 깜빡거리다가 나직하게 “그래서 그렇게 참기 힘들었던 건가….” 하고 중얼거렸다. 초장부터 계획이 완전 틀어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눴다.

백담호도 확실히 기분이 풀려 보였고 해인도 어느 정도 정정하고 싶었던 건 그래도 다 말한 듯했다. 해인이 꼼지락거리며 티슈를 꾸기다 백담호를 힐끗 쳐다봤다.

“화는…….”

“아직 다 풀린 건 아니야.”

대답은 단호했다. 아, 응. 미안. 우울하게 대답한 해인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은 기어코 몸의 수분을 다 뽑아내야만 울음이 그칠 모양이었다.

그래, 쉽게 풀릴 만한 일도 아니고 단번에 풀리는 데에는 무리가 있겠지. 납득은 했지만 다시 눈앞이 뿌예졌다.

여기서 더 우는 모습을 보였다간 그거야말로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해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일단 가 볼게…. 미안해. 나중에 화 풀리면 연락해. 기다릴게.”

단번에 화가 풀릴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 백담호의 마음을 풀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찾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백담호가 생각 정리를 하게 기다리는 게 낫겠지만.

입술을 콱 씹으며 해인이 눈물을 꾹 참고 백담호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이었다. 손목이 잡혀 곧바로 몸이 뒤로 당겨졌고 해인은 맥없이 힘에 이끌려 백담호의 허벅지 위로 눕듯이 넘어졌다.

“됐어. 그 꼴로 나가긴 어딜 나가.”

꼴사납게 부어오른 해인의 얼굴을 백담호가 살살 손으로 문질렀다. 해인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백담호는 툭 내려놓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우네. 원래 이렇게 잘 울었어?”

“아직 화났다며…?”

“아직 덜 풀리긴 했어. 처음에 다가왔던 거랑 갑자기 나 생깐 날, 그때 보상 얻은 거였지?”

날카로운 추리에 뜨끔한 해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그렇게 말을 그때 애매하게 했던 거네.”

“으응…. 미안….”

“다시 생각하면 좀 빡치기는 하는데.”

백담호는 해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네가 이렇게 얼굴 불어 터져라 울면서 비는데 내가 어떻게 안 풀릴 수가 있겠어.”

백담호는 소중한 것 다루듯 해인의 눈가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해인은 아직 가시지 않은 슬픔과 백담호의 다정한 행동에 긴장이 풀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 안 헤어져?”

눈가를 쓰다듬던 백담호의 손이 멈췄다. 그는 지금 뭘 들은 거냐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고 해인의 얼굴이 곧바로 추욱 쳐지려는 순간이었다.

“헤어지긴 왜 헤어져. 내가 언제 헤어지자고 했어?”

“아까 시간을 좀 두자고…. 했잖아….”

보통 시간을 두자고 하면 거의 다 볼 것도 없이 헤어지던데. 아니었나. 해인이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자 백담호는 황당한 듯 웃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 그냥 잠시 떨어져서 감정 좀 삭이자는 뜻이었어. 이렇게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대화해 봤자 내가 제대로 네 말 안 듣고 화만 낼 거 같아서.”

아침에는 이미 화가 나서 거칠게 말하긴 했지만…. 백담호는 머쓱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내가 너한테 거짓말도 많이 하고 화도 나게 하고 실망도 시켰는데…. 괜찮아…?”

“안 괜찮지. 당연히 안 괜찮지.”

“그럼….”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가 너랑 헤어질 이유가 되지는 않아. 해인아, 우리가 어떻게 항상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수만 있겠어. 지금처럼 크게 틀어질 수도 있고 또 소소하게 다툼도 자주 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러면서 하나씩 맞춰 가는 거야. 내가 지금 네가 왜 말을 안 하고 버텼는지 이해했듯이.”

“…….”

“그렇게 계속 이어 나가면 돼, 해인아. 좋고 깊은 관계는 순탄하게 만들어지지 않아.”

백담호는 입매를 말아 올려 옅게 미소를 그리다 해인의 눈 아래에 입술을 내렸다. 해인은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아까와는 다른 벅찬 감정에 목울대를 일렁였다.

“담호야, 고마워.”

“그리고?”

백담호가 장난스레 눈을 예쁘게 휘어 보였다. 해인은 그 눈 주위를 소중하게 손가락으로 매만지다가 애정을 담아 말했다.

“사랑해.”

“나도, 해인아.”

해인은 그제야 웃음을 머금었고 백담호는 해인의 얼굴을 감싸 입술을 겹쳤다.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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